축제의 모서리

  

2023년 8월 책방의 분위기

    피곤하다. 동네 책방 8년 차를 지내는 심정은 솔직히 그랬다. 책방을 하다 보니, 책방을 하려면은, 책방을 계속하고 싶으니, 이런저런 일들이 이유가 돼서 계속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도 만들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역량을 뛰어넘는 일들이었다. 타고난 재주는 없는데도 책방을 하다 보니 문화와 예술에 근접한 업적들을 생산해야 했다. 돌아보면 예상대로 뻔뻔하기도 했고, 의외로 괜찮은 작품도 있었다. 어떤 공적인 지위도 없이 그냥 좋아서 하는 핑계로 해마다 책을 써내고, 시 모임과 낭독회를 열고, 글쓰기 모임도 진행하지만, 결과적으로 문학의 벽은 만만치 않았고, 아주 소액의 돈을 버는 것으로 만족하는 현실은 피곤했다.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이 끝나고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쏜살같이 지나버렸다. 단 5일간의 축제로 20만 명이 넘는 사람을 만난 후유증은 과소평가되었다. 지난날의 아우성이 일요일 오전 시간을 잠식해버리는 현상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올해를 돌아보면 도서전 이전 거의 두 달 전부터 도서전 이후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겨우 5일간의 서울국제도서전은 어느 정도의 긴장감이었는지, 어느 정도의 성과가 있었는지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 중량감이 있었다. 이제 지난 서울국제도서전의 긴장감을 떠나보낼 요량으로 긴긴 과정의 글을 써보기로 한다.

    현관을 들어서면 직사각형의 공간이 보인다. 카페처럼 생긴 카페일지도 모르는 카페가 있다. 실제로 이곳에 들어와 “커피 마실 수 있어요?” 하고 묻는 사람도 여럿 있고, 뭐 하는 곳이냐는 사람도 있다. 8차선 도로 횡단보도 바로 앞에 위치한 책방이자 카페인 이곳은 입장하는 사람마다 목적이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카페로 또 어떤 사람은 책방으로, 제로 웨이스트 제품을 팔고 있는 상점으로, 동네 수공예 작가들이 작품을 전시해놓고 매대를 운영하는 소품 숍으로 찾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연스럽게 전화하면서 들어와 화장실만 이용하고 전화하면서 그대로 나가는 사람도 있다. 더워서 그러는데 시원한 물 좀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카페의 분위기로 봐서 거절은 없고 시원하게 드시라고 얼음을 듬뿍 담아준다. 이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다. 자기도 이런 북카페를 해보고 싶은데 한 달 매출이 얼마나 되는지 묻는 사람도 있다. 매출이 걱정되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무례한 사람과 오래 엮이기 싫어서 최대한 격을 갖춰 “얼마 못 벌죠”라고 해보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격을 갖춘 일이 후회하도록 만든다. 일면식도 없이 찾아온 사람은 끈질기게 무례하다. “그래도 얼마 버는지 가르쳐줄 수 있잖아요.” 하며 집요하기까지 하다. 곤란하다. 아침부터 책방은 이상하게 시작하는 분위기이다.

    카페의 외관에는 ‘마을과 마디’라는 간판이 있다. ‘동네 책방 지구불시착’이라는 간판은 없다. ‘마을과 마디’는 카페 이름이다. 이름에서 느껴지듯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 마을 사람이 만든 마을 사람의 공간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공약인 반값 기숙사를 SH공사가 짓고 학생들의 편의와 관리를 위해 1층 카페 시설을 노원구청을 통해 공모했는데 공릉꿈마을협동조합이 입찰에 성공했다. 마을협동조합답게 흩어져 활동하는 마을의 공예작가를 섭외하였다. 카페와 갤러리, 마을회의 등 커뮤니티로 붐비는 공간을 머릿속에 그렸을 것이다. 마침 동네에 월세를 못 내는 책방 지구불시착이 있어서 책방도 불러들이기로 했을 것이다. 책방을 좋아하는 젊은 청년들의 유입도 계산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책방은 사람이 안 온다는 것이다. 동네 책방 지구불시착은 전국에 무수히 많은 책방처럼 사명을 다해 손님이 안 오는 곳이었다.
    책방 8년 차, 이곳 카페에서 5번째 맞이하는 여름의 풍경은 한결같다. 현관 밖, 땡볕이 부서지는 횡단보도 앞에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 가게 앞에서 여지없이 양 갈래로 갈라지는 걸음을 본다. 누구든 목적지가 책방은 아닌 것 같다. 에어컨이 가동된 책방은 23도. 빈티지한 선풍기가 회전하며 부지런히 시원한 바람을 뿜어내고 있다. 바람이 닿는 스파티필름의 넓은 잎이 살랑살랑 움직인다. 책방에는 조금 전 이슬아의 신간과 내가 쓴 『성수기도 없는데 비수기라니』를 구매해 읽고 있는 이십 대 초반의 여성 2명이 있다. 내 마음은 내 책을 읽어줘서 고마운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동시에 출렁인다. 멀미가 날 지경이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책방에서 자신의 책을 사는 것을 봤다고 편집장에게 말했더니 작가가 자신의 책이 팔리는 것을 목격하면 그 책은 대박 날 것이라고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내 경우는 그렇지 않고 이슬아 책 쪽으로 ‘몰빵’할 가능성이 충분한 것으로 예상되고, 이 예상은 현실이 되는 분위기이다. 유튜브를 보다가 서가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독서를 하는 손님 쪽을 봤더니, 『성수기도 없는데 비수기라니』를 읽고 있는 쪽은 엎드려 자고 있고, 이슬아를 읽던 쪽은 스마트폰을 한 손에 들고 겨우겨우 독서를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뉴진스의 〈슈퍼 샤이〉 안무 유튜브 영상으로 돌아와 엉성하게 동작을 흉내 내고 있다. 어쩌면 이런 장면은 책이라는 것을 팔고 있는 전국의 동네 책방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책은 왜 안 팔리는 것일까?
  

책은 왜 안 읽는 걸까?

    2019년부터 매년 노원평생학습관에서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 내용은 글쓰기, 그림 그리기, 책 만들기 등 독립 출판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영역의 활동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사람들의 관심은 책 읽기보다 책 만들기에 이끌리고 있었다. 글쓰기와 책 만들기에 관심이 많던 주무관이 지구불시착을 찾아온 게 시작이었다. 동네 책방의 활동도 도서관에서 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동네 책방의 운영 방식에 비하면 도서관이란 조직은 신중하고 철저할 정도로 시스템에 의해 운영된다. 책방이 의외성을 즐긴다고 보면 공공기관은 의외성이야말로 발생하지 말아야 할 위험 상황인 셈이다. 책이라는 것을 두고 대응하는 방식이 전혀 다른 공간이 책방과 도서관이다. 책방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책을 만든다는 이유로 도서관과 밀접한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구립도서관인 화랑도서관과는 2017년 도서관 상주작가로 활동한 적도 있고 지금까지도 각종 프로그램을 함께하고 있다.
    책을 판매하는 동네 책방과 책을 대여하는 도서관이지만 책이라는 분모를 두고 우리는 친구라고 볼 수 있다. 책방과 도서관의 운영 방법은 엄밀히 들여다보면 전통의 방식에서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책만 팔았던 책방에서 낭독회와 글쓰기, 그림 그리기 워크숍, 보드게임을 겸하고 다문화 영화를 본다. 이러한 행위가 살롱문화의 씨앗이 되어 책방 이미지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도서관도 열람실과 자료보관실의 역할을 넘어 지역사회 환경 개선까지 발을 넓히고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도서관으로 유입하고 있다. 또한, 초·중·고 학교 아이들과 마을을 알아가기 위한 활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도서관은 지역사회의 중심이 되고 그 활동처를 동네 책방까지 넓혀가고 있다. 이렇듯 차이가 있는 듯한 시스템의 도서관과 동네 책방은 형과 아우 같은 관계로도 가능함을 증명했다.
    좋아하는 마음이 없다면 시스템이란 것은 움직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학습관의 주무관처럼 독립 출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조금씩 시스템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책을 좋아한다. 단지 좋아하는 방법이 읽는 행위에서 머무르던 시기를 지나고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편집을 배우고 인쇄소에 제작을 의뢰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영역에서 책이 되는 활동을 즐긴다. 이렇게 만들어진 책은 독립 출판이 된다. 우리는 그 책을 만든 사람을 작가라고 부른다. 등단이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작가로서의 직업이 가능한 출판 세계로 확장된 것이다. 그 배경에는 포토샾과 일러스트레이터, 인디자인 등 배움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이 있었고, 소량도 가능해진 출판 시장의 변화도 한몫했다. 독립 출판 작가들에게 소량 제작이라는 매혹적인 시스템은 독립 출판의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이 되었다. 따라서 출판이라는 거대 조직은 책을 읽는다는 행위로부터 책을 만든다는 행위로 스스로 길을 찾아낸 셈이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 자생력을 찾아내고야 마는 생명력을 가진 유기체처럼 시대의 흐름에 맞게 진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거창하게는 다윗의 진화론처럼 문학이 읽기에서 쓰기로 스텝 업되는 과정으로 진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은 왜 꼭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책을 사지 않는 이유를 들어보면 사놓고 읽지 않은 책이 많아서라는 이유가 많다. 책을 팔았으면 하는 나에게는 궁색한 변명처럼 들렸다. 왜 책은 읽는 것이 되어야 할까? 책을 좋아하는 것이 마치 많이 읽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는 예로부터 책을 읽는 민족이었다. 조선의 이덕무가 그랬다. 독립 출판왕 정약용이 있었다. 조선의 선비들은 책을 읽고, 소리 내어 읽고, 외워서 읽었다. 왕조차 스승을 두고 책을 가까이하며 사신들과 책 암송 대결을 했을 정도이니 그만큼 책 읽기에 진심인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 시대에 유튜브는 없었다. 유튜브와 스마트폰이 없던 것도 조선의 독서량에 긍정적인 영향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아마도 있었다면 조선은 K-판소리의 나라가 돼 있지 않을까. K-콘텐츠가 없는 조선의 운명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일제강점기와 전쟁은 우리의 책 읽는 DNA를 완전히 빼앗아갔다. 해 뜨는 아침의 나라에서 가난한 나라로 바뀐 나라의 운명에서 가장 필요했던 건 교육이었다. 모든 교육은 당연히 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사교육과 공교육을 앞세워 읽지 않는 자는 도태되는 나라가 되었다. 전 국민의 취미가 독서이고, 정부가 청소년 필독서를 장려했다. 우리는 다시 독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가 되었다. 유튜브와 스마트폰이 우리의 생활을 잠식해가도 책은 역시 읽는 것이라는 외침은 뿌리가 깊다. 왜 책은 그냥 좋아하면 안 되는가의 질문은 책과 교육을 동일선상에서 보는 습관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교육이 가능한 콘텐츠가 많다. 대표적으로 유튜브가 그렇다. 몇몇 괜찮은 유튜버는 우리가 읽기 두려워하는 소위 ‘벽돌 책’에 관한 이야기라도 상세한 줄거리 소개와 이해가 빠른 영상으로 요약·정리해두기도 한다. 불과 20분 남짓한 시간으로 벽돌 책 1권을 독파한 효과도 볼 수 있다. 그래도 책은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서 읽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 1권을 독파해야 다음 책을 살 수 있다면 대한민국의 출판 시장은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나는 책을 좋아한다.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책이란 물성을 사랑한다. 편안하게 누워 있는 책을, 잘 진열된 서가를 좋아한다. 책을 사는 행위를 좋아한다. 사 온 책을 완독하려는 욕심도 없다. 몇 날을 책상 옆에 눕혀놓고 그것을 바라본다. 표지가 예쁜 책이면 더 좋다.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꽤 있다. 지인의 책이 나오면 산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산다. 환경 문제와 역사의식, 젠더 문화, 성소수자의 활동을 지지하기 위해 책을 사는 사람도 있다. 나는 독서라는 의무감보다는 팬심, 의리, 의식, 지지 등의 이유도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사는 행위 같은 것으로 나의 의사가 전달되는 것이라면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 아닌가?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이 책은 읽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내가 책을 좋아하는 방식에 대해서 그릇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도서관 상주작가를 할 때였다. 내가 진행한 프로그램은 신선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책과 함께한 멋진 장면을 연출해 사진을 보내주면 선물을 주는 ‘책 간지 프로젝트’였다. 다양한 사진이 올라왔다. 한 번도 독서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는 아버지와 딸의 독서 사진, 공원에서 평화롭게 책을 읽는 사진 등이 있었다. 대단히 화제가 되었던 프로그램이다. 나는 올라온 사진을 골라 가장 멋진 사진을 보내주신 응모자에게 ‘금주의 책 간지 왕!’, ‘월간 책 간지 왕!!’을 뽑아서 작은 선물을 보내주었다. 상주작가 간담회에 참석해 책 간지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다른 도서관 상주작가들의 책 간지 프로젝트를 향한 관심이 대단했다. 책과 함께하는 문화를 확장시키기에 적지 않은 반향이 되었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지구불시착이 있는 공릉동의 아이들은 모두 책을 들고 다닌다는 소문을 만들고 싶다. 책을 읽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이다. 하지만 책을 가지고 있는 것 역시 그만큼 멋진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출판 환경은 언제나 고되다. 사람들의 독서량 저조에서 문제점을 찾는 것 같다. 하지만 책은 읽어야만 한다는 식의 문화에도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주장하는 편이지만 피천득의 수필과 존 버거의 글을 읽지 않을 걸 생각한다면 그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교보문고 같은 메이저에서조차 고전하던 출판계는 의외의 장소에서 힌트를 얻은 듯했다. 바로 독립 출판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책을 만든 작가들은 크고 작은 플리마켓과 동네 책방 입점을 통해 활동 범위를 넓혀가게 된다. 의지만 있으면 출판이 되는 독립 출판을 시작한 작가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굳건한 팬덤이 생겼다. 소위 인기 작가가 생기고 팬이 생겼다. 독립 출판 작가의 인지도는 서서히 쌓이고 있었다. 작가는 동네 책방을 자기의 서재처럼 사용하고, 때론 독자처럼 드나들기 시작했다. 책방에서 작가의 낭독회와 북 토크를 열면 독자와 작가가 친구가 되고, 책방에 충성도 높은 고객이 형성되어 책방, 독자, 작가가 모두 만족하는 공생관계가 되기도 했다. 이는 읽기에서 만들기로 진화하는 출판 시장에 큰 동력이 됨과 동시에 동네 책방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출판계는 발 빠르게 독립 출판을 파고들었다. 김현경이 제작한 『아무것도 할 수 있는』은 위즈덤하우스에서, 백세희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는 출판사 흔, 김예지의 『저 청소일 하는데요?』도 21세기북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지금은 스타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이슬아도 그 시작은 독립 출판이었지만 자신의 출판사인 ‘헤엄’을 만들어 메이저의 길을 걷고 있다.

    동네 책방 초창기에는 많은 사람에게 독립 출판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설명이 필요했다. 책방에 온 사람들은 그냥 가져도 되는 책인지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출판사의 사은품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독립 출판에 대해 들어본 사람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의 태도는 사뭇 달라서, 재밌는 에피소드도 한둘이 아니다. 오침안정법으로 직접 수제 제본을 해온 어느 작가는 자신의 책에 오타가 너무 많다는 고백을 했다. 그래서 나는 ‘오타는 보물’이라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재입고를 위해 만든 책을 들고 왔을 땐 우리의 대화가 책에 실려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이런 문장도 있었다. “사장님 제 책은 보물이 너무 많아요.”라는 문장이었다. 소량의 책이 팔리는 대로 새로 제작을 하니 한 번 제작할 때마다 수정이 늘어나기도 일쑤인데 이 책의 작가는 오타를 고치기는커녕 보물이 많다는 내용을 보강해왔다. 또 제작된 책 중에는 표지를 뒤집어 제작된 책도 있어서 작가가 다시 수정해오겠다고 했는데 나는 잘못된 책이 가장 먼저 팔릴 것 같으니 그냥 두라고 했다. 내 예상대로 일부러 표지가 잘못된 책을 골라가는 손님이 있었다. 동네 책방은 이처럼 예상할 수 없는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독립 출판을 위주로 판매하는 동네 책방에서는 기성 출판에서 실수라고 부르는 일까지 에피소드가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동네 책방과 독립 출판물에 대해 마음을 여는 것은 아닐까. 독립 출판은 여전히 얇고, 투박하고, 오타도 있고,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다. 그것을 이유로 좋은 책인지 나쁜 책인지 구별은 삼가는 편이다.
  

2019년 서울국제도서전

    매년 열리는 출판 마켓이 있다. 퍼블리셔스 테이블, 언리미티드 에디션, 책 보부상 등의 마켓에는 엄청난 숫자의 인파가 몰린다. 작가들은 행사 기간에 맞춰 신간을 쏟아내기에 바쁘다. 출판 시장 언더도그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서울국제도서전은 모르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지구불시착의 서울국제도서전 도전은 2019년 봄부터 시작됐다. 당시 코엑스에서 개최된 서울국제도서전의 가장 큰 특징은 독립 출판의 진출이었다. 2019 서울국제도서전 측은 전시 주제를 ‘출현’으로 하고 독립 출판으로 대변되는 출판의 새바람에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동네 책방과 독립 출 판이 전시장의 한 섹션을 차지했다. 출판 시장에 아주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는 평가였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자랑하고 싶은 동네 책방을 지도에 표시하는 공간도 있어서 지구불시착을 표시했다는 제보를 SNS를 통해서 받아보곤 했다. 지구불시착은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 함께할 수 없었다. 신청 기간을 놓쳐버린 탓인데 행사 기간 내내 후회가 상당했다. 그렇지만 좋은 일도 있었다. 지구불시착이 최고의 인기 책방으로 선정됐다는 믿기 어려운 발표가 있었다. 도서전 행사에 앞서 SNS를 통해 자랑하고 싶은 동네 책방 댓글 이벤트에 지구불시착이 가장 많이 거론됐다는 소식이었다. 대한출판문화협회의 관계자들과 미팅을 하면서 ‘내가 사랑한 독립 출판’이란 독자 참여 이벤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서울국제도서전과 지구불시착이 선정한 ‘럭키백’을 배포하는 행사였다. 럭키백을 꾸리고 행사장을 찾은 나는 당당하게 서울국제도서전을 리드하는 독립 출판 작가들과 동네 책방이 부럽기만 했다. 그 후 빠짐없이 서울국제도서전에 참여했는데 2019년의 소외감이 큰 자극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2019 서울국제도서전의 최대 화제가 독립 출판과 성심당이었다면, 적어도 독립 출판 관계자들 사이에서의 최대 화제는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출판협회장 사건이다. 난데없이 나타난 독립출판협회장이 도서전의 연사로 등장했던 사건이었다. 정작 독립 출판의 중심에 있는 독립 출판 작가와 동네 책방 사이에서도 낯선 인물이었던 그가 스스로 협회를 만들고 독립출판협회장으로 나온 이유로 우리는 수군거렸다. 심지어 그는 독립 출판에 대해서 개선해야 할 방향만 제시했다. 근본적으로 독립 출판 문외한이었던 이가 무주공산에 올라선 격이었다. 우리들이 매우 분개할 만한 사건인 것은 분명했다. 행사가 끝나고도 스토리지북앤필름의 강형규 대표는 독립 출판을 대표해서 ‘인정할 수 없다’는 메일을 보내기도 했으나 돌아온 답변은 괴변에 가까웠다는 풍문이다. 독립출판협회장 사건은 우리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스스로 자취를 감췄는지 그 후 별다른 소식은 들리지 않고 있다.
    독립 출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다정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켓과 책방, 또는 SNS를 통해서 꾸준한 만남의 기회가 이루어진다. 독자가 되었다가 작가가 되기도 한다. 작가의 팬이었다가 작가를 팬으로 두는 케이스도 흔한 일이다. 그들은 모두 친구이고 어떤 의미로 가족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그에게 자격을 물었다. 그것은 정당한 요구였다.
    2019 서울국제도서전은 ‘출현’이란 주제에 맞게 출판 생태계의 새로운 바람으로 독립 출판의 의미를 인정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019년 이후 서울국제도서전은 독립 출판과 계속 걸음을 같이하게 된다.
  

2020년 서울국제도서전 X, Y, Z 얽힘─언택트의 시대

    우주 유일한 인류의 낙원으로만 알고 있던 지구는 몸살을 앓았다. 우리는 매일매일 확진자의 숫자를 이야기했다. 멀게는 우리보다 좀 더 위험한 국가의 사망자 소식과 가깝게는 마스크를 하느니 마느니 하는 사람들의 실랑이를 겪어야만 했다. 나라마다 공항이 문을 닫고 전 세계의 스포츠가 멈췄다. 사회적이란 말을 앞세워 서로의 관계에 조금씩 거리를 두는 지침을 따라야만 했다. 졸업식과 입학식, 결혼식, 웬만한 시상식까지 온라인으로 치러야만 했다. 2020 서울국제도서전도 피해가지 못했다. 외출 시 마스크를 깜박하고 나왔다가 허겁지겁 돌아간 출근길도, 화상으로 치러지는 졸업식도, 라이브 이벤트라던가, 줌이란 생소한 프로그램도 있었다. 그래도 지구는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는 인간의 저력만큼은 어떤 면에서는 일생을 두고 회자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몇 가지 더 생긴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지구에는 언제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가 모두 마스크에 집착하던 시절, 반쯤 가려진 얼굴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마스크를 벗어야 했지만, 지금은 반대로 손을 마스크 모양으로 해서 얼굴의 반을 가려주고 나서야 반가운 얼굴을 알아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 시절 마스크는 우리의 얼굴이자 시대의 자화상이었다.
    2020년 서울국제도서전은 온라인으로 치러졌다. 도서전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마켓이 온라인으로 치러졌다. 동네 책방은 그다지 온라인을 반기지 않는다. 독립 출판도 그랬다. 책은 마케팅이 잘 된 자본이 개입된 상황이 아니라면 당연히 직접 경험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약속이라고 여겼다. 시대는 아이러니했다. 돌아다니는 독자는 적었으나 매출은 급격히 상승했다는 온라인 서적계의 역설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것은 일부이나 막강한 힘의 교보, 알라딘, 예스24의 매출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동네 책방은 매출 부진에 힘겨운 싸움을 이어갔지만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바라본 통계 자료는 서점은 코로나19의 특수를 맞이한 상황이었다. 당시를 돌아보면 우리들의 인사는 대부분 “요즘 힘드시죠?” 하며 안부를 묻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2020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 또한 X, Y, Z의 얽힘이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의 양방향성을 활용한 주제는 신선했지만 낯설기도 했다. 출판사와 서점을 연결하는 취지의 ‘책도시산책’이라는 프로그램도 했다. 지구불시착은 온라인 참가자로 신청해 2019년도의 설움을 이겨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미약해도 동네 서점은 오프라인이 유리했다. 차라리 ‘책도시산책’ 쪽으로 신청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다. 지구불시착은 언제나 선택에 약한 편이다.
  

2021년 서울국제도서전 긋닛 뉴월드 커밍

    코로나19는 끝나지 않았다. 계절이 지나면 끝날 것만 같더니 확진자의 수는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백신의 활약은 한 가닥 희망이 되었다. 철저한 방역 준칙에 따라서 서울국제도서전은 예전보다 조금 작은 규모로 성수동 에스펙토리에서 진행되었다. 지구불시착은 동북권 동네 책방 세 곳인 책인감, 도도봉봉과 함께 연합 부스로 참여했다. 재밌었던 기억은 간판에 10글자가 최대여서 우리 책방연합은 ‘지구불시착뚀뿅책인감’이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참석했다. 작은 규모의 전시장은 서울국제도서전의 역사를 돌아보는 아카이빙에 포커스되어 있었다. 동네 책방으로 참여한 건 우리가 유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까지 서울국제도서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로 연출되었고 작은 공간은 행사의 규모 면에서 아쉬운 면이 있었지만 코로나19 상황으로 인한 관람 인원 제한 등으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보였던 행사였다. 민음사, 문학동네와 같은 대형 출판사도 아담한 규모의 시설로 참가했다. 작은 출판사와 대형 출판사의 비교 자본이 비교적 눈에 띄지 않는 효과가 있었다. 지구불시착뚀뽕책인감은 눈에 띄게 줄어든 동네 책방과 독립 출판을 대신한 느낌으로 방문자들의 환대가 기대 이상이었다. 우리는 각자 준비한 대표작을 홍보할 수 있었다. 지구불시착은 『성수기도 없는데 비수기라니』를 신간으로 준비했다. 사람들은 책의 제목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한편 고개를 끄덕였다. 코로나19 시대를 대표하는 제목이었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웃 책방 ‘책인감’은 책인감 상주작가 이소연 시인의 신작 『고라니라니』를 들고나와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시골 농부와의 생태일기 교환이라는 포맷으로 편집은 지구불시착이 했다. 도봉구 창동에서 인기 있는 동네 책방 ‘도도봉봉’은 재밌고 참신한 책을 다양하게 준비했다. 『도봉산 힙스터』라는 책은 도봉산에서만 볼 수 있는 다양한 패션을 책방지기의 그림과 함께 인터뷰를 수록한 책이었는데 이 책 역시 반응이 좋았다. 2021 서울국제도서전은 팬데믹 시대의 새로운 도전과 같았다. 우리는 모두 견뎌내는 것에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출판사는 떼돈은 벌지 못해도 잘 망하지 않는다는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끈질긴 책 문화의 저력을 보여주었다. 2021 서울국제도서전의 가장 큰 성과는 코로나19 4단계의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끊어지고 이어지는 긋닛과 팬데믹 현상을 견디고 이겨내는 문화의 승리라 해도 좋을 것 같다.

    2022년 3월 9일, 정권이 바뀌었다. 근소한 차이였다. 책방 사람들은 분개하는 쪽이 훨씬 많았다. 나도 정치적 성향이 있다. 분개하는 쪽이었다. 정치는 모르지만 정치가 중요하다는 건 의심하지 않는다. 정권이 바뀌면서 일어나지 말았으면 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책방의 하루하루가 시급한 문제였다. 대부분 그랬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에도 정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불행하게도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나는 문학 앞에서 순수함을 드러내는 정치가가 있었으면 한다. 김용택 시인의 『심심한 날의 오후 다섯 시』(예담, 2014)의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읽은 정치인이 있었으면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산책방을 시작했다. 에이프런을 두르고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이 너무 좋다. 적어도 내가 원하던 정치인이 한 사람쯤은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생겼다. 더디지만 아주 더디지만 전직 대통령이 동네 책방을 하는 모습에 나사형 발전의 원리를 빗대어 본다. 우리는 아주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2022년 서울국제도서전 반걸음

    2022년도 서울국제도서전은 시작하기 전부터 독립 출판 작가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서울국제도서전 참가사 모집에 대해 처음 들었던 건 이른 봄이었다. 벌써 얼리버드 모집은 끝났고, 일반 참가사 모집은 여유가 있었다. 서둘러 준비했다. 막차에 올라탄 것이다. 이번에는 책방 연합이 아닌 단독으로 참가했다. 신간의 종수를 조금 늘렸다. 『미지의 친구들』 『너에게 반했어 나머지 반 부탁해』 그리고, A3 포스터 몇 종을 준비했다. 대형 출판사는 이를 갈고 나왔다 할 만큼 엄청난 노동력과 자본을 앞세웠다. 문학동네는 젊은 작가들을 아이돌 관리하듯 했고, 민음사도 다양한 굿즈 공세로 판을 키웠다. 안전가옥은 신생 출판사답지 않은 과감한 투자로 대형 출판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지난 2년 동안 안팎으로 발목을 잡은 건 코로나19였다. 2022년 서울국제도서전은 사회적 거리두기 완화로 치른 첫 번째 대규모 행사였다. 근래에 가장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서울국제도서전의 홈그라운드는 역시 코엑스였다. 독립 출판 작가들의 사이트는 마감 시간까지도 인산인해를 이룬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인사를 나누며 그들의 활약과 뿌듯함을 함께 나눴다. 내가 준비한 포스터는 반걸음 정도의 성과가 있었다. 매일 아침 출력 센터에 들러 재고를 확보해야 했다. 행사 기간 동안 많은 지구불시착 관계자들이 부스를 찾아와줬다. 나에게 서울국제도서전은 언제나 1부터 9까지 만족했지만 하나가 아쉬웠다. 주최 측이 준비한 강연을 들어볼 시간이 없었다. 정우성도 못 봤고 정세랑, 유시민도 그림의 떡같이 소문만 들려왔다.
  

동네 책방 그리고 지원사업

    코로나19는 전국 책방의 지원사업에 불을 지폈다. 거의 모든 책방이 지원사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어느 책방에서는 책 판매보다는 지원사업계획서 작성과 보고서 작성이 하루의 일과가 되기도 한다. 나는 여전히 지원사업에 관한 한 어딘가 모르는 불편함과 약간의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에는 나의 확고한 태도만이 불편함에 맞설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2023년 지원사업에 하나도 신청하지 않은 것에 현재까지는 매우 만족하고 있다. 동네 책방 8년 차를 지내오는 동안 내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 있는 지구불시착을 만드는 것이었다. 구석구석 재밌는 그림을 그려놓는다. 화초를 잘 가꾸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생각한다. 그리고 지구불시착에 머무는 시간을 즐거워한다는 약속이다. 지구불시착은 가장 지구불시착일 때 사람들이 만족한다고 믿는다. 책방은 책방을 이해하는 사람이 도울 수 있다.
    올해는 비가 엄청나게 왔다. 책방 천장에서 비가 새서 책들이 상하는 일이 생겼다. 마침 시 모임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서가 위로 비가 폭포처럼 쏟아져내렸다. 나와 친구들은 모두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한 대처를 했다. 덕분에 예상보다 피해는 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불시착 친구들은 책 5권 사기 운동을 시작했다. 인스타그램에 태그를 타고 들어온 사람도, 평소 지구불시착을 애정했던 사람도 5권 사기 운동에 동참했다. 참 고마운 사람들이다. 지구불시착에는 유난히 특별한 애정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다. 책방의 과거형을 함께하고, 책방의 현재를 만들고, 책방의 미래를 예상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구불시착 관계자”라고 말한다. 연말이면 관계자 파티도 계획한다. 책방의 한편에는 ‘오래오래’라고 두 줄로 쓰인 그림이 붙어 있다. 노출 콘크리트의 벽에 접착 껌을 이용해 다양한 그림을 붙여놓았다. 시간이 지나면 그림도 피곤한지 하나둘씩 떨어지는데 ‘오래오래’만은 한 번도 떨어지지 않은 게 신기하다. 책방은 견디는 게 일이라는 푸념에도 동네 책방을 오래오래 하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은 지구불시착 관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책방 지구불시착과 관계자만 아는 이야기로 계속 이어가길 바랄 뿐이다.
    여름이 되기 전에 지구불시착은 두어 번의 마켓을 나갔다. 지원사업을 줄였으니 나름의 계획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나는 계획에 약하고 주어진 상황에 강한 타입이다. 어떻게든 되겠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때도 있다. ‘에라 모르겠다’가 지구불시착 3대 법칙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부딪치면서 부족한 것을 찾는다. 책이 안 팔리면, 포스터를 준비한다. 포스터에 관심이 없으면 초상화를 그린다. 덕분에 지구불시착의 마켓 역사는 적당한 선에서 좋은 편이다. 이제 곧 서울국제도서전이다. 가벼운 토너먼트를 지나 본선을 준비해야 한다.
  

2023년 6월

    2023 서울국제도서전이 다가오자 조금 떨렸다. 도서전의 말미까지 준비한 『지구불시착, 글쓰기 팁 초간단편』은 확신이 없었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포스터를 준비하기로 했다. 종류를 늘리고 수량도 지난해보다 훨씬 강화했다. 포스터가 눈에 잘 띄도록 디피(display)해봤다. 다행히 포스터는 기본은 한다. 올해는 책, 포스터보다 다른 것을 해볼 생각이다. 30초 초상화!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크고 작은 마켓에서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를 그리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초. 짧은 순간 이미지를 포착해서 빠르게 그린다. 도구는 붓과 먹물이다. 영문으로 된 헌책 위에 휙휙 그려서 찢어서 준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다. 나는 눈치를 보는 타입이다. 의뢰인이 만족하는 얼굴이면 (가끔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다음 그림은 에너지가 넘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 반면 조금 갸우뚱한 표정이거나, 닮지 않았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손님도 있다. 그럴 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음 그림은 열에 여덟은 영향을 받는다. 그림은 망치고 한 소리 듣고 또 망치고⋯⋯ 악의 고리가 열리는 순간이 된다. 30초 초상화는 기백의 영역이다. 하루 300명의 그림을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부끄러움과 욕망의 격투기장이 된다. 속마음은 어느 쪽이 이겨도 상처가 되고 몸은 이미 미역이 되어버린다. 행사 기간 내내 초상화를 그렸다. 제법 긴 줄이 생기기도 했다. 누군가는 와서 말했다. 이슬아의 줄보다 지구불시착 초상화 줄이 더 길다고 했다. 5일 내내 그리다 보니 준비해둔 먹이 소진됐고 중고책방에서 산 제법 두꺼운 영자 책도 소진됐다. 다행히 예비로 준비해둔 책이 있어 그림은 멈추지 않고 그릴 수 있었다.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초상화는 제법 성공적이었다. 아쉬운 점은 이번에도 역시 초청 연사들의 강연은 한 번도 들을 수가 없었다.
    행사 기간 중에도 여러 가지 제보가 날아왔다. 전시장에 『성수기도 없는데 비수기라니』 『미지의 친구들』이 진열돼 있는 사진을 메시지와 함께 보내주었다. 궁금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틈을 내어 전시장을 돌아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행사 마지막 날 평소보다 일찍 도착해 행사장을 둘러보았다. 미련이 남아서였다. 다행히 ‘다양한 타자들이 있는 세계와 만나기’ 코너의 ‘다른 삶의 방식’ 서가에서 『성수기도 없는데 비수기라니』를 발견했다. 묘한 기쁨이 있었다. 동네 책방이라는 상업적 삶의 방식에서 비즈니스를 외면하는 책방 주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아주 잘 들어주겠다는 태도의 독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이번 행사의 가장 큰 이슈는 이외의 장소에서 발생했다. 세대 간의 트렌드를 정확히 읽어낸 〈슬램덩크〉의 활약이 대단했다. 행사 내내 가장 긴 줄을 만들어낸 것도 〈슬램덩크〉였던 것 같다. 그 외 불미스러운 상황으로 인한 소동도 화제가 됐다. 보도와 SNS의 확장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현장의 상황을 물어보는 목소리도 많았다. SNS는 내가 느낀 현장의 상황보다 훨씬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끌려 나가는 사진과 누군가 왔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도, 보이콧이란 말도 들려왔다. 나는 아마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주위의 소동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한민국 최대의 문학 축제의 장인 이곳까지 정치의 알력이 입장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더 외면했던 것일 수도 있다.
  

모서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도서전이 정리되는 시간이 다가오면 현장의 소리를 ‘뮤트’하고 이곳저곳을 유영하듯 마실을 나가는 재미를 안다. 이번 서울국제도서전도 대부분 같은 축에서 작년과 같다. 행사장은 실력의 냉정함과 자본의 법칙에 의존한다. 그런 환경에서 살짝만 돌아봐도 나는 주눅 들곤 한다. 부러움과 시기로 초라해진다. 독립 출판 작가와 출판사는 이날을 기다렸다는 듯 신작과 유명 인사의 초청사인회 등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묶어두기에 바쁘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지구불시착은 어떻게 실력과 규모의 법칙에서 이토록 버틸 수 있는 건지. 지인들의 응원과 싸 들고 온 푸딩을 먹으며, 그 당도만큼 순도 높은 에너지를 받고 또 일어서는 것만이 모서리를 살아가는 동네 책방 지구불시착의 분투기일 것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의 중앙에서 축제를 이끌어가는 대형 출판사는 그들의 역할에 충실했다.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점점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는 독립 출판 작가들과 작은 출판사들도 모서리에서의 고군분투에 뜨거운 응원과 갈채를 보낸다.

    서울국제도서전은 출판인과 책을 좋아할 줄 아는 사람들의 축제이다. 이제는 내가, 지구불시착이 그 자리에 있어도 아무런 이질감 없다 할 정도로 당당히 축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내년도 내후년도 같은 자리에서 지구불시착과 인사 나누었으면 한다.
  
  

김택수

책방 ‘지구불시착’ 운영. 저서 『지구불시착, 그림 그리기 팁 초간단편』 『하루만 하루끼』 『성수기도 없는데 비수기라니』 『너에게 반했어 나머지 반 부탁해』 『미지의 친구들』 『지구불시착, 글쓰기 팁 초간단편』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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