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적의 귀환을 옹호하며

    

* 이 글은 『자음과모음』 2022년 겨울호에 발표한 「적이 없는 소설들」의 연속선상에 있는 글이다. 「적이 없는 소설들」이 최근 한국 문학에서 적대에 대한 표현이나 갈등에 대한 구성적 약화에 대하여 살펴보았다면, 이 글에서는 구체적이고 강력한 적의 실종과 관련된 좀 더 심층의 논리에 대하여 살펴보려 한다.

    

1. 민주주의의 개인은 사회적 원자를 꿈꾸는가

    심각한 사회 붕괴의 조짐이 대한민국 도처에서 시한폭탄처럼 터지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엄청난 사회적 공포를 조장하고 있는 칼부림 사건뿐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해결책이 난망한 교육 환경을 포함하는 사회적 제도의 붕괴, 사회 어디에서나 피해자와 가해자로 양분화된 구도 속에서만 우리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 보면 이러한 결과는 대한민국이 그동안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허상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소외를 묵인해왔고, 우리는 그간의 경제 발전과 선진국 합류라는 미래주의의 기치 아래에 대출처럼 당겨 쓴 인간적 가치와 사회적 성숙에 대한 도외시의 대가를 복리로 되돌려 받는 중이다.
    문제는 이처럼 전체 사회의 분위기가 임계점을 향해 아슬아슬 나아가고 있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매끄러운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는 의도적인 착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리스 리얼리티Seamless Reality’에 대한 강박, 어떠한 이음새나 시각적인 간극 없이 매끄러운 현실 인식을 추구하는 경향은 근대적 인간의 심리적 경향인 동시에 우리의 현실을 윤색하며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힘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불쾌한 사실을 가리고 제쳐놓으며, 블러blur 처리하거나 모자이크 처리를 수행한다. 살아 있는 인간 포토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의 시선은 빠르게 현실의 균열을 포착하고 그것을 매끄럽게 사포질하는 셈이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그러한 심리스 리얼리티의 시각적 보정 효과에 힘을 실어주고, 우리가 믿고 싶은 대로 현실을 바라보게 만드는 확증편향을 강화한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같은 대중적 SNS는 물론이고, 오늘날 특정 집단의 여론을 무서울 정도로 지배하고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적이 없다. 거기에 있는 것은 혐오스러운 몰골로, 나의 정체성에 대립되는 모든 반대 요소를 갖춘 상상의 허수아비가 있을 뿐이다. 심지어 알고리즘은 우리를 상상적인 혐오의 대상에게 손쉬운 비난을 쏟아내고 또 다른 혐오 허수아비를 실시간으로 갱신하여 제공할 따름이다. 페이스북의 전 직원 프랜시스 하우겐Frances Haugen이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내부고발 한 바 있듯이, 거대 테크 기업이 개발한 알고리즘은 우리를 점점 더 극단화된 목소리에 노출시키고 양 극단에 대한 증오를 부채질하고 있다. 알고리즘의 추천 목록 앞에서 우리의 진정한 사회적 관심과 집중력을 착취당하고 있다. 그 의미는 사실 우리가 우리 사회의 강대한 적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찰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다는 의미다.
    극단화된 진영 논리의 목소리와 혐오의 대상이 온라인상에 넘쳐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적에 대한 상상력을 박탈당했다. 혐오가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혐오의 대상에 대한 우리의 사유와 고민을 납작하게 평면화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사회는 공포와 긴장 상태로 넘쳐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정작 상황을 편의적으로 바라본다. 그 대표적인 시선이 바로 가해자-피해자로 이루어진 납작한 이분법의 세계다. 사람들은 이 엄혹한 상황을 만들어낸 직접적인 가해자에게 모든 책임을 묻게 할 것이며, 근본적인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면피하게 된다. 노골적으로 악당에 대한 사적 처벌을 보여줬던 〈빈센조〉(tvN, 2021)나 〈모범택시〉(SBS, 2021~2023) 같은 드라마는 물론이고 촉법소년들에 대한 물리적 처벌 자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참교육〉(네이버웹툰, 2021~) 같은 웹툰에서도 드러나듯, 법적 처벌의 공정성을 믿지 않는 시대에 각종 문화 콘텐츠에서 넘쳐나는 사적 제재에 대한 환상은 우리 사회의 잠재적 공격성 자체를 대변한다. 언제나 그렇듯,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무기력한 법적 처벌을 기다리기보다는 빠르게 가해자를 구별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여론재판 한 뒤, 빠르게 다른 사안으로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인터넷의 자경단 놀이가 만들어낸 얄팍한 정의감의 본질이다. 결코 패배하지 않는 인터넷 자경단의 논리적 회로는 자신들이 언제나 절대적인 피해자 편에 서 있다는 진영 인식에 근거한다.
    사회적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우리가 적이 없는 혹은 지워진 세계에 집착하는 이유는 우선 반대로 과도한 적대와 갈등이 우리 사회를 점거하고 있다는 피로감에서 비롯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젠더·계급을 포함하는 온갖 적대적 상상력에 과도하게 노출되어 있다는 민감성이 과도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적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빠르게 혐오를 분출하고 다음 혐오의 대상으로 미끄러지는 과정에는 어떠한 요철감이나 덜그럭거림이 없다. 마치 유튜브 쇼츠 영상을 보듯이 새로운 정보에서 다음 정보로 미끄러지는 시각적 현란함에 의도적으로 눈을 빼앗기는 것, 적극적인 현실 윤색의 효과는 반대로 우리 자신에게 투여하는 진통제와 같다. 통증은 단기적으로 잦아들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상처는 치료되기보다 여전히 곪아가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구태여 묻는다면 적은 누구인가? 어쩌면 그것은 자극의 수용체가 되어가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 자신이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사회물리학이 상정하는 ‘사회적 원자’ 이론에 수렴해간다.1 적이 없는 세계에서 우리는 각각의 역학에 의해서 작용-반작용을 수행하는 원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따름이다. 근대적 세계가 그토록 과대평가했던 개인의 내면이란 결국 허상이며, 우리는 매트릭스 속 환상적 이미지에 사로잡힌 채로 사실은 각자의 인큐베이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체 시스템에 에너지를 착취당할 뿐인 원자들이다. 복잡계 이론처럼 펼쳐진 시대적 흐름으로 구성된 통계 역학 속에서만 인간 개인은 존재할 뿐이라는 오늘날의 사회 인식은 거시적인 사회학적 진실인 동시에 문학을 포함하는 인문학적 상상력의 종말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이 자극에 노출된 하나의 원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개인으로서는 유독하고 치명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오늘날의 복잡한 현실에서 개개인이 서로를 설득하고 연대함으로써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지나치게 요원해 보인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막다른 길이고, 민주주의가 도달한 최악의 위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에 대한 상상력과 더 구체적인 갈등의 필요성은 이러한 위기의 순간에서 비롯된다.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적을 너무나도 잘 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등에 피로감을 호소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갈등 자체를 경험하지 않는다. 적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상상적인 악이며, 갈등을 대신하는 것은 극단화된 혐오다. 오늘날의 극단화된 혐오와 관성적인 적대는 오히려 적의 진짜 얼굴을 가리는 허수아비와 가면을 향해 있다. 따라서 우리의 갈등은 피상적이고 연극적인 것에 불과하다. 어차피 내가 상정한 적의 얼굴과 실제 우리가 마주하는 사회적 구성원들의 얼굴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2. ‘누칼협’과 ‘알빠노’의 관성화

    애석한 일이지만, 진리는 다수결이 아니다. 나는 지금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발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민주주의가 편의적인 부족주의2로 후퇴해버린 시대에, 오히려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자신의 허울뿐인 위선적 가면을 벗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와 온라인 커뮤니티가 모든 정치적 담론을 흡수하고 팬덤 정치의 강력한 참여자로 거듭나면서, 팬덤의 입맛에 맞는 가짜뉴스와 해석적 서사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러한 모든 형태의 극단적 발언까지도 정치적 지지 세력의 믿음 속에서, 현실에 대한 그럴듯한 한 가지 이해임을 수용한다. 이제 우리는 사실상 같은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평행선을 달리며 결코 만날 수 없는 여러 개의 평행세계를 살아가는 중이다.
    세계에 대한 인식론적인 이해의 관점에서부터 출발하여 우리의 부조리한 삶을 이해하기 위해 발전한 서사적 시도가 근대적인 메타서사였다면, 이미 우리는 그러한 서사적 시도 자체가 불가능해진 세계-없음worldlessness의 상태를 살아가고 있다. 멀티버스나 평행세계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세계-없음의 동의어가 된다. 기존의 서사가 지닌 세계에 대한 통사적인 이해와 메타 서사가 문학의 영역에서는 쇠퇴하는 반면에, 오히려 세계에 대한 이해를 손쉽게 재편하고 더욱 압축적으로 제시해주는 서사 장르가 바로 음모론이다. 음모론은 세계를 비밀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그에 대한 진리를 파헤치는 구도 속에서 더욱 은밀하지만 명확한 세계의 대타자를 재설정한다. 음모론은 파편화된 세계 이해와 대타자 부재를 완전히 극복하는 새로운 대타자 의존성을 갖는다. 포스트모던은 모든 대타자를 부정하라고 말하는 종류의 대타자이며, 사람들은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와 생존주의라는 포스트모던의 대타자에는 강력하게 사로잡혀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대중화된 음모론 중 하나인 지구평평설은 극단적인 형태로 보편화된 지식을 부정하며, 자기 눈으로는 관측할 수 없는 거대한 형태의 과학적 지식과 세계 이해의 종합을 부정한다. 우습지만 우리는 단순히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비문명화된 사람, 비과학적이며 전근대적인 주술적 믿음을 가진 자들로만 매도하기 어렵다. 이러한 태도는 근대성 위에 머무르는 반근대적 태도 속에 근거하고 있으며 세계를 일종의 ‘트루먼 쇼’, 시뮬레이션으로 격하하며 새로운 세계 이해의 모델을 제시하기에 이른다.
    우리의 앎과 믿음은 완전히 분열되어 있으며, 혹은 언표행위와 언표내용 사이의 분열 속에서 우리는 조건부의 형태로 믿음을 유지한다. “나는 모든 정치인들이 위선적인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내가 지지하는 정당의 주장을 믿어.” “나는 인터넷상의 가짜뉴스가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하지만 가짜뉴스가 효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비판을 수행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이러한 믿음은 주체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구성하는 있는 조건적인 상황 속에서 발휘된다. 주체는 자신을 둘러싼 허구적 현실을 능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것이 허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그 허구의 효과에 종속되어 있다. 포스트모던한 초자아는 바로 이러한 효과를 발생시키는 외밀한 목소리, 주체 내부에서 나왔지만 주체를 조작하는 초월적인 힘처럼 작동한다.
    이처럼 포스트모던한 외설적 초자아가 수많은 부족주의의 형태로 각각의 진리를 생산할 때, 민주주의는 가장 최악의 방식의 정치체가 되어가는 중이다. 오늘날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허수아비와의 대화를 거부하며 독아론적 밀실을 광장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 여기서 휘발되는 것은 바로 ‘아곤agon’이다. 아곤은 그리스 희극에서 두 인물 사이에 벌어지는 토론이나 말다툼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놀이의 형식 안에서 인물들의 우열을 가리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 상대를 절멸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 비극에서 폴리스의 시민적 목소리를 대변하는 코러스의 목소리도 극 중에서 서로 다른 입장으로 나뉘어 두 편을 응원하며, 최대한 평등한 경쟁 내부에서 변증법적인 대화를 수행한다. 아곤의 역할은 사회적 갈등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공공의 장에서 표현하는 효용을 경험하기 위한 대화적 투쟁이다.
    아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사회적 갈등이 표피화되고 있으며, 어떠한 해결에 대한 기대 자체를 무력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더 이상 서로를 설득할 수 있다고, 누군가의 삶에 진정한 의미에서 연루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 무의식을 대변하는 것은 오늘날의 언어적 감수성을 압축하는 인터넷 밈meme이다. 2000년대 이후 인터넷 문화를 특징짓는 것은 각종 과격한 언어 사용으로, 각종 신조어와 밈의 활용은 점점 더 타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거나 그런 감정들을 유포한다. 밈의 활용은 특히 타인에 대한 상상력을 완전히 표준화하거나 일반화하고,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순화할 따름이다.
    2022년 온라인을 휩쓴 밈은 ‘누칼협’과 ‘알빠노’로 요약된다. ‘누칼협’은 게임 커뮤니티에서 누군가가 활용한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의 줄임말이며, ‘알빠노’는 말 그대로 상대의 사정 따위는 내가 알 바 아니라는 온라인 게임상의 채팅에서 비롯되었다. 두 밈은 모두 공통적으로 대화의 상대가 놓인 상황의 열악함과 복잡성에 대하여 무화하는 태도이며, 그 핵심은 정치성과 사회성의 실종이다. 타인의 고통은 내 알 바가 아니다. 적자 생존과 무한 경쟁의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누구도 협박하지 않은 삶을 살아내기 과정에서 누구에게 호소할 수도, 설득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그와 정반대로 만약 논란이 될 만한 일이 발생했다면, 누군가를 비난하고 편을 가르는 데 있어서는 누구보다 남의 일이 아닌 방식으로 참여함으로써 타인을 공격하는 데에는 적극적이다. 이러한 사안에 있어서는 아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빨리 유리한 위치를 선점함으로써 상대를 깔아뭉개는 방식으로만 자신의 입장이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불과 10여 년 전 우리는 문학장에서 ‘문학과 정치’를 이야기했고, 랑시에르와 함께 ‘감각의 재분할’을 이야기했고, 미시적인 모든 것을 정치학적으로 재인식하는 과정에 대하여 강조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치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인터넷 세상은 역설적으로 정치(학)적인 것에 대한 상상력을 절멸시켜가는 중이다. 대의라는 개념이 실종된 정치성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오늘날 부족주의화된 정체성 정치 혹은 그에 대한 피상적 모방이다. ‘누칼협’과 ‘알빠노’는 약자-소수자-피해자가 되는 삶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심도 기울이고 싶지 않으면서, 동시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에서는 기가 막히게 가해자를 분리해내고 사회적 여론재판을 여는 민감성과 관련되어 있다. 모든 것이 정치성을 잃고 나 자신의 한 몸을 지키기 위한 치안이 되어버리는 시대, 가해자를 빠르게 구분하고 사회적 격리를 수행해야 한다는 타자의 절멸에 대한 요구가 우리가 서로에게 ‘게슈타포’가 되는 사회로, 가장 최악의 ‘리좀’으로 민주주의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가 갈등을 피로하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언제나 사회적 문제의 진정한 해결 방식이 구체적인 갈등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환기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의 커뮤니티와 각종 정치 진영에서 수행하는 혐오 대상으로서의 허수아비 때리기는 연극적인 갈등에 불과하다. 갈등과 투쟁의 자리를 혐오가 차지하고 있기에, 오늘날 우리는 타자에 대한 입체적인 상상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이제 타자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가상적인 존재처럼 모니터 안에만 존재하는 가면 쓴 익명적 존재가 되어가는 중이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거나 연루된 바 없는 삶에 대한 해석적 입체성을 의도적으로 평면화하고 있으며, 조금이라도 나와 다른 입장에 놓여 있거나 다른 정체성을 갖춘 자들을 가장 혐오하기 쉬운 대상으로 격하한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트렌드 아래 유행하고 있는 수많은 하이퍼리얼리티 콘텐츠가 인터넷을 점령 중이다. 이러한 콘텐츠들은 대부분의 경우 인터넷 ‘썰’에 기반한 현실의 ‘빌런들’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으로 공감을 유발하고 인기를 끈다. 현실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갈등 자체는 휘발되고 우리와 대결하는 적의 원본조차 사라진 채, 얄팍한 대체물의 이미지와 그에 대한 혐오만이 손쉬운 공감으로 유포된다. 이처럼 자극적인 방식의 타자에 대한 상상력은 그 반대급부로서의 무해함에 대한 환상을 강화했다. 인간의 미덕을 ‘나에게 무해함’으로 상정하게 되는 것은 갈등 회피적인 상황을 지나치게 과장할 뿐 아니라, 타자에 대한 모든 감각을 나에 대한 자기 중심으로만 환원한다. 나에 대한 무해함만을 원하는 관성이란 사실은 공동체에 대한 포괄적인 유해함일 수도 있다.
    아곤이 사라진 사회에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꿈꾸는 것은 과장된 무균실의 상상력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에게 무해하다는 것은 그들이 선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무균실에 가두어두고 어떠한 병균도 전파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 구속하는 것이다. 면역력이 상실될수록 우리는 타인을 더욱 공포스럽게 느낀다. 오늘날 문학의 게토화는 그런 측면에서 다른 공동체들과 스스로를 격리하고, 착한 사람들의 무균실을 구성하는 또 다른 부족주의가 될 수도 있다. 혹은 이미 부분적으로 그러한 현상은 진행 중이다. 소설의 서사 속에서 악인의 서사가 옅어지거나 혹은 무화되는 것, 악인에게 서사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 아래에서 적대자의 논리가 피상화되거나 갈등 자체가 첨예화되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현상의 문학 내적인 구현일 수도 있다. 적대와 대립의 논리는 오히려 더욱 치밀해지고 강렬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오늘날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적을 찾고 발견하는 이야기들은 드물고 귀하기에 소중하다.
    

3. 멈춰라, 다르게 응답하라 : 〈더 글로리〉와 「애도의 방식」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유행어처럼 번지게 된 팃포탯Tit-for-Tat은 게임 이론에서 주장하는 가장 탁월한 사회 공동체의 결속을 구성하는 전략이다. 팃포탯에 의하면 윈-윈Win-Win을 추구하지 않고 누군가가 배신을 수행할 경우 마찬가지 배신 행위로 이를 응징하는 것만이 결과적으로 도덕적인 사회를 복구할 수 있게 한다. 오늘날 미러링의 전략을 포함하는 커뮤니티의 혐오 전략은 이러한 팃포탯에 대한 전유를 통해 정당성을 얻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팃포탯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오래된 공동체 내부의 체득된 논리를 바탕으로 할 때 가장 효과적이었다. 반대로 이러한 논리가 끊임없는 상호 배반이나 보복의 범위를 상정할 수 없을 만큼 악랄한 규모로 발생할 경우, 공동체 내부의 신뢰를 복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앞서 언급한 아곤의 실종은 건강한 의미의 팃포탯의 불가능성과 관련되어 있다.
    혐오에 혐오로 대응하는 전략적 효용에 대하여 진지하게 묻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혐오가 전략화되기 위해서는 그 양상에 대한 연극적 규모와 팃포탯 전략에 기반한 구체적 공동체적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문제는 혐오가 단순히 규모를 산정할 수 있는 형태의 보복으로 구체화되기 어려우며, 상호적인 공멸을 지향할 수 있는 극단적 사례로 발전하기 쉽다는 점이다. 또한 대등한 공동체 간 관계성, 권력의 작동에 대해서는 세밀한 산정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문제다. 과연 정당한 배신과 그렇지 않은 배신, 구조적인 원인에 의거한 불가피한 형태의 해방적 분출과 무차별적인 논리로 이를 응징하고자 하는 시도는 동등한 미러링 전략이라 말할 수 있는가. 앞서 언급한 세계-없음의 현실과 포스트모던한 음모론의 유행 속에서 상호 신뢰에 의거한 팃포탯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게임의 논리다.
    무엇보다도 혐오의 전략화는 결과적으로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주된 대결 구도 아래에서 비도덕에 대한 경계를 더욱 확장하고 그 포괄적인 구도 아래에서의 부수적인 폭력을 양산한다. 오늘날의 도덕은 아주 예리하게 벼려진 무기로 활용되기 쉬우며, 역설적으로 그 칼날은 개인의 고립으로 이어지기 쉽다. 개인은 관성적인 사회적 원자로서 자신을 그러한 부족주의의 도덕에, 폭력적이고 외설적인 초자아에게 의탁할 따름이다. 팃포탯은 관성화되고, 이제는 공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새로운 게임의 논리가 시작된다. 이러한 조짐은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이미 많은 영역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누칼협’과 ‘알빠노’가 더 이상 인터넷 세상의 밈으로서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으면서 자기 삶을 지배하는 관성적인 힘에 끌려갈 때, 누군가는 멈춰주기를 바라면서도 서로를 파괴하는 공멸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얼마 전 대중적으로 상당한 화제성을 불러일으켰던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 〈더 글로리〉(Netflix, 2022~2023)는 복수라는 이름의 사적 제재의 가장 한국적인 판본으로서, 오늘날의 상반된 적에 대한 상상력에 집중했다. 특히 학교 폭력과 관련된 이슈가 빠르게 사람들에게 공론화되고, 선명한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 속에서 복수의 서사로 소비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하지만 〈더 글로리〉는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복수 서사의 패턴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만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의 상반된 삶의 풍경들을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소위 ‘사이다’ 문법으로 점철된 복수의 과정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삶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과정의 통쾌함을 제공하는 것만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 폭력의 형태로 연루되는 불가피한 공존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이야기가 하나의 서간체 서술을 통해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동은은 매번 박연진을 호명함으로써, 모든 복수에 대한 준비 과정과 그 실천의 순간들에 박연진에 대한 반응과 응답을 상정한다. 동은의 표현처럼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자신의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오직 박연진의 무감각하고 화려한 삶에 대한 확인과 그에 대한 복수심을 통해서만 자신을 실감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 고데에 입었던 화상의 공포를 환기하는 끓어오르는 주전자에 공포심을 느끼면서도 거기에 손을 대려는 충동을 함께 느끼는 모순된 이중 감정이 문동은의 복수자로서의 삶을 지탱한다. 박연진은 문동은을 전혀 기억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문동은은 모든 순간 속에 박연진을 기억해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비대칭적인 관계의 양상이 여전히 관성적으로 문동은의 삶을 지배한다. 존재에 대한 폭력은 단순히 잊을 수 없는 흔적으로서가 아니라, 삶에 작동하는 관성 자체로서 여전히 지속적인 시간을 상연한다.
    그렇기에 〈더 글로리〉는 관성화된 폭력과 그에 대한 복수의 시간을 상대화하여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문동은과 박연진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분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게 대비되는 것은, 두 사람이 더 이상 같은 시간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피해자의 시간은 과거에 고정되어 복수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 모든 현재의 시간적 밀도까지도 과거에 종속되어 있다. 반면에 박연진의 삶은 반성 없는 관성적 패턴을 그대로 지속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고등학교 시절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채로 어른이 되어도 상관없는 우리 현실의 구조적인 부조리를 드러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에서 박연진과 그 학창 시절 친구들은 그저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악인으로만 비춰지지 않는다. 그들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문동은은 정지된 시간 속에서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의 관성을 체감해야 하는 반면에, 박연진과 그 일당들은 관성대로만 흘러가는 현재의 가속도에만 충실하다.
    이처럼 문동은과 박연진의 상반된 특성은 다양한 육체적-물질적-성격적 차이로 구체화된다. 악의 실체성과 갈등의 구체성은 박연진이라는 인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드라마가 구성하는 전체 이야기의 규범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규범은 단순한 권선징악을 넘어서서 현실의 구조적인 측면에 포함되어 있는 양극단의 삶을 대조적으로 조명하는 시선에 의해서 구성된다. 가해와 피해의 관계성 속에서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 삶을 뒤돌아보지 않고 멈추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의 삶을 그려내는 시선에 오늘날의 적에 대한 상상력은 확장된다. 박연진은 괴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서 태어나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오면서, 다른 방식으로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는 동은의 등장으로 불안해하는 연진에게 연진의 엄마 홍영애가 하는 말을 통해 압축적으로 대변된다. “해결할 방법은 뒤에 없어. 늘 앞에 있어. 인생은 그런 거야.”라는 대사는 홍영애와 박연진의 삶 자체를 대변하고 있으며 그들에게는 관성적인 미래주의가 현재를 지배하고 있다.
    복수의 플롯은 그 자체로 피해자가 고통받는 과거에 대한 묘사에서는 그 고통에 집중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시간 자체의 묘사가 감속한다. 하지만 복수를 시작하는 순간에는 그동안 응축되었던 감정들이 토해지며 주인공의 모든 설계와 함정들이 빠르게 그 정체를 드러내면서 복수 대상을 올가미에 몰아넣는 과정의 속도감이 가속한다. 그런 의미에서 문동은 역시 복수 과정에 있어서는 관성에 떠밀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때의 복수의 관성은 박연진의 일상을 추동하는 관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문동은은 이미 복수의 모든 과정에서 자신이 도달할 미래에 대한 기대를 접고 있다. 실제로 동은은 자신이 멈추어야 하는 순간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으며, 그 결과가 자신에게 파괴적이라는 사실마저 알고 있다.
    〈더 글로리〉의 대중적인 이야기 도식 속에서 문동은이 최종적으로 복수를 마치고 자신을 멈추기 위한 수단으로 자살을 선택하고자 했던 것이라면, 그것을 주여정의 엄마인 박상임이 등장하여 멈추는 과정은 다소 작위적일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이 멈춤은 관성적인 이야기의 논리를 비틀기 위하여 작가 스스로가 자신의 바람을 투영하는 방식의 외부적 개입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중적인 복수의 플롯이란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지만, 거기에서 〈더 글로리〉가 취하는 작위적인 결말은 그 자체로 암시적인 측면이 있다. 결과적으로 문동은이 다시 나타나 주여정의 복수를 돕고자 하는 것, 그리고 두 사람이 기꺼이 감옥으로 들어가면서 앞으로도 복수자의 삶을 살아갈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 서사에서 가해자-피해자의 이분법적인 구도는 결코 급진적으로 비틀어지거나 뒤집히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대립에 의해 구성하는 갈등이 서로의 얼굴을 더욱 정확하게 확인하는 과정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단순히 피해자의 보상과 가해자의 처벌이라는 사이다 중심의 향유에서 벗어나, 이미 파괴되어버린 삶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지, 그것을 위해 누가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
    〈더 글로리〉가 내용적인 차원에서 다소 작위적이더라도 인물들을 멈추게 만들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복수의 플롯으로서 대중적인 관성적 질주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반면에 비교하여 언급할 만한 안보윤의 소설 「애도의 방식」(『문학동네』, 2022년 겨울호)은 이러한 폭력이 관성적 삶과 관계성에서 머무르는 힘이라는 사실을 더욱 명확하게 소설적 플롯으로 보여준다. 이 소설은 오늘날 학교 폭력의 한 가지 현실을 직접적인 당사자성으로 경유하면서도 그것을 근거리의 시선에 압도되지 않고 그려내는 침착성을 갖추었다. 소설의 주인공 동주는 동급생이자 돈가스 집 아들인 승규에게 지속적으로 학교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의 입장에 있다. 하지만 승규가 불의의 사고로 죽은 뒤, 이제 그에게 가해지는 의혹과 궁금증은 그를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죽음의 진실에 대하여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의 위치에 놓인다. 그런 동주가 이슈와 가십의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도달한 곳이 바로 ‘미도파’라는 찻집이다. 찻집이라고는 하지만 터미널 내부에서 온갖 음식까지 파는 음식점에 가까운 곳으로, 함박스테이크는 있어도 돈가스는 없다는 점 때문에 동주는 미도파에서 일하기로 결심한다.
    함박스테이크처럼 으깨진 고기를 다시 뭉치고 모양을 잡는 과정처럼 미도파는 동주의 으깨진 마음을 다시 모양 잡기 위한 공간이다. 이처럼 미도파라는 가게가 구축하는 소설적인 장소성은 터미널이라는 모두가 오가는 곳, 따라서 언제나 소란스럽지만 무뚝뚝한 가게 주인이 그러하듯 급격하게 변화하지 않는 자기 고집 같은 것이 있다. 따라서 그 자체로 주변의 관성에 휩쓸리지 않고 이미 소란스러운 곳일지언정 ‘소란스러워지지는 않는 곳’이다. 동주가 이처럼 쉽게 변하지 않는 것, 주변에 휩쓸리지 않는 장소를 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승규의 죽음 이후 어떻게든 그것을 가십화하기 위한 의심 어린 질문에도 응답하지 않고 동주가 도달한 침묵과 멈춤을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비단 〈더 글로리〉뿐 아니라 오늘날 학교 폭력을 다루는 서사화 작업은 대중문화 콘텐츠부터 본격 문학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들이 오늘날 꿈꾸는 사적 제재와 복수의 서사는 그것을 소비하는 관성적인 욕망의 플롯이기도 하다. 안보윤의 「애도의 방식」은 말 그대로 관성에 짓눌려 있는 폭력의 굴레와 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강요된 질문에 대하여 다른 방식으로 응답하고자 노력한 소설이다. 승규의 죽음의 진실을 듣기 위하여 승규 어머니는 끈질기게 미도파로 찾아와 동주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동주는 끝내 어떠한 진실, 혹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다. 동주에게 있어서 승규와의 관계에서 굴욕을 준 것은 비단 폭력만이 아니라, 승규의 관성적인 폭력으로부터 어떤 멈춤이나 변화를 시도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굴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동전을 던지고 앞과 뒤를 맞추길 요구하는 승규의 질문에 동주는 어떤 대답을 해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둘 중 하나를 대답하길 멈추지 못했다.
    승규가 죽은 그날은 바로 동주가 동전의 앞과 뒤 어느 쪽도 아닌 대답 ‘호랑이’라는 대답으로 스스로의 관성적 응답을 벗어난 날이기도 하다. 승규의 죽음이 동주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주는 그 이후 다시금 자신이 머물러 있던 관성적인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미도파에 도달했다. 그리고 다시금 자신을 둘러싼 적대와 갈등에 대하여,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이분법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멈추어 생각할 수 있는 순간들을 얻는다. 승규의 어머니가 찾아와 진실을 요구한다고 한들, 그 진실이란 그렇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동주가 승규의 관성적인 폭력의 순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다른 응답을 시도한 것처럼, 그리고 승규의 어머니인 ‘여자’가 집요하게 동주를 찾아와 진실을 요구하던 것에서 벗어나 결국 동주에게 어떤 진실을 듣지 않고도 떠나가서 섬에서 혼자 시금치를 키우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처럼, 「애도의 방식」에서의 ‘애도’란 복수의 통쾌함이나 보상심리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멈춤의 순간을 발명하는 윤리적 태도에 값한다.
    

    4. 적의 얼굴을 찾아서 회귀하기 : 〈재벌집 막내아들〉의 논리

    오늘날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정체성 정치가 처한 곤경은 유사 정체성을 통해서 모든 적대를 유희화하는 가면 놀이의 함정에 대하여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의 정체성은 직접적인 자기 규정을 수행하는 과정에 지나칠 정도로 발화-의존적이다. 예를 들어 온라인에서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정체성과는 정반대의 가면을 쓰고, 심지어 그러한 가면을 진짜 자신이라고 여기는 것도 가능하다. 문제는 이러한 가면 놀이로 무화되는 갈등을 다시 구체화하고 현실화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이다. 사회적인 가면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세계-없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편의적인 정체성의 도구이자 스스로가 빠지는 함정이기도 하다.
    얼마전 코로나바이러스(COVID-19)에 의한 팬데믹이 절정이었던 시기에, 유럽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이 마스크의 기능에 대하여 비판하며 기꺼이 안티-마스크의 찬성자로 여겨질 만한 주장을 한 것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감벤이 줄곧 자신의 철학적 입장에서 사람의 민얼굴을 정치성의 장소로 규정한 것을 고려한다면, 일면 그가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은 타당하다. 분명 마스크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치명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었지만, 불행하게도 코로나19 팬데믹이 길어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도 우리에게서 타인의 얼굴을 통해 대화하는 실감을 빼앗은 것도 사실이다. 대화 속에서 구성되는 정동의 교류와 그에 의해 실체화되는 정치성의 확장을 경험하는 순간들을 박탈당하는 기간 동안,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가짜 가면을 쓰고 타인을 허수아비 취급하는 혐오 문화와 자경단 놀이가 심화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가면 아래의 민얼굴을 드러내는 데에는 여전히 용기가 필요하다. 오늘날 우리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미시적인 의상과 액세서리는 늘어났지만, 모든 외관적 전시는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감추기 위한 의태Camouflage이기도 하다. 사회적이고 가상적인 형태의 정체성 역시 온라인 커뮤니티 내부에서 가면화되는 양상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정치성의 효과적인 도구가 되기 어렵다. 대표적으로 진영 논리 속에서 좌우의 스테레오 타입이 오늘날의 갈등을 더욱 형식화하고 있다. 갈등이 가지고 있는 대화적 효과나 의미는 점점 축소되고 갈등에 참여하는 상호 간의 무기력으로 학습되는 것이기도 하다.
    정체성과 관련된 방식으로 적에 대한 상상력을 한정할 때,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있는 진짜 좌표에 맞추어 상상된 적이다. 특히 세계를 잃어버린 세계-없음의 상황에서 좌표 역시 우리가 상상한 방식으로 재구성되어, 서로를 필요한 위치에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 반면에 우리의 욕망은 그보다 탄력적이며 역동적이다. 정신분석적인 논리에 있어서 욕망이란 구조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정신적인 에너지에 가깝다. 그것은 단순히 내면의 요구가 아니라 현실에 의해서 굴절되고 조작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세계 자체가 좌표를 잃은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욕망은 상징계의 권력과 그 구조에 의해서 긴밀하게 호응하여 작동한다.
    문제는 우리의 욕망을 길들이고 훈육하며, 사회 구조에 적절하게 안착시키는 구조적인 환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포스트 IMF의 경쟁 구조는 모든 것을 경제적인 최종 심급으로 환원시켰으며, 사유와 담론으로부터 벗어난 동물화된 포스트모던의 세계를 최우선의 욕망으로 부추겼다. 이 과정에서 욕망은 순치되고 모두가 따라야 하는 시대 정신으로 정당화된다. ‘부자 되세요’라는 2000년대의 광고 구호에서처럼, 사회가 인정하고 허용하는 욕망은 기꺼이 따라야 한다. 특히 IMF 이후에도 한국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빨리빨리’라는 가속화의 욕망 속에서 경제 성장과 개인의 부의 축적을 정당화해왔다. 가속도는 말 그대로 강한 관성을 정당화한다. 이념과 진영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빨리빨리의 가속도와 관성화된 욕망 속에서 비슷해져버린 서로의 얼굴을 사실상 무감각하게 응시한다. 문제는 바로 그러한 자기 생존의 욕망이란 결코 우리가 사회적 환상을 횡단하고 관성적인 삶에서 벗어나도록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욕망은 이미 환상에 의해서 걸러지고 오히려 상징계를 유지하기 위한 에너지원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응시해야 할 적의 얼굴을 잊어버리는 것은 내 얼굴을 잊어버리는 것, 내가 누군인지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Jtbc, 2022)의 논리는 우선적으로 자신을 죽인 범인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면서, 1회차의 삶에서는 차마 꿈꿀 수도 없었던 욕망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주인공 윤현우가 진도준이 되면서 자신을 살해했을지도 모르는 진씨 집안 사람들과 적대적인 공존 관계를 구성하며 그들의 생태계 안에 안착해나간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기묘한 자가당착이야말로 사실은 우리가 놓인 욕망의 순치 과정을 적절하게 보여준다. 진도준은 자신의 전생의 삶을 파괴한 순양그룹의 창업자인 진양철을 완전히 자신의 할아버지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의 가장 온전한 이해자가 되어준다.
    이 드라마는 역설적으로 좌절된 욕망의 소유자가 가질 수 있는 욕망이 제한 없이 고삐 풀릴 때, 얼마나 자기 자신의 욕망에 솔직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보여준다. 문제는 그러한 욕망이 자기 자신이 설정한 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자가당착에 빠지지만, 동시에 그러한 자가당착까지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진도준에 비하여 오히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매력적인 존재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지도 타인에게 맡기지도 않는 진양철이라는 적의 존재다. 진양철은 분명 매끄러운 사회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로 인하여 극은 활기를 띠고 주인공 진도준의 자가당착 역시 이해받을 수 있다. 진양철은 재벌로서의 삶에 관성화되어버린 자기 자신의 자녀들을 누구보다도 못마땅하게 생각하며, 자신을 가장 닮은 손자 진도준에게서 스스로를 재발견한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과연 진양철을 순양그룹과 관성화된 재벌의 삶으로부터 요령 있게 분리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방식으로 적의 고귀함을 통해서 갈등은 손쉽게 해결 가능한가?
    이 드라마는 그런 의미에서 변칙과 절충, 자가당착과 자기 화해로 물고 물리는 진도준의 정체성에 대한 분열적 드라마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진양철을 진정한 의미로 미워하지도 극복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동정하거나 닮고 싶어 함으로써 제대로 된 대결을 하지 않는다. 결국 진양철이 죽고 난 뒤, 승계 구도가 안정화되고 난 뒤에야 드라마는 비로소 밀린 채무 관계처럼 늘어진 갈등의 반격을 시도한다. 진도준이 진양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 시점에서 그를 죽이는 것이다. 다름 아닌 전생의 자기인 윤현우의 손으로 말이다. 이 드라마의 결말에서 진도준을 죽이는 것이 윤현우가 되는 것은 지극히 온당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급진적인 것도 예측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명백하게 진도준의 삶은 윤현우의 환상이며, 사회적 욕망에 순치된 또 다른 가면의 한 가지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드라마에서 회귀라는 게 중요한가? 2회차의 삶에서 1회차에 달성할 수 없었던 사회적 성공과 욕망을 거침없이 달성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원작 소설이 지향했던 보편적 회귀물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도준이라는 후생의 삶은 스스로 잊어버리고 있었던 전생의 적들과 온전하게 대결할 기회를 얻는다. 윤현우는 자신의 적의 얼굴조차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사람, 언제나 그들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다른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관성대로 순양 일가를 지켜왔기 때문이다. 진도준의 삶은 바로 그처럼 관성화된 시선의 회피, 적을 응시할 수 없는 시선의 차폐성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적을 제대로 응시하기 위한 형태의 가면이다. 그리고 그러한 적에 대한 응시는 마찬가지로 재벌은 나쁘다는 식의 관성적 이해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도준의 응시는 진양철을 향해 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도 모르게 진양철의 욕망에 순치되어가는 자신을 향해 간다. 따라서 윤현우는 진도준을, 자신의 적이 된 또 다른 자신을 죽이게 되는 운명이다.
    이 죽음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죽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윤현우는 자신의 적에 닮아 있는 자기 내부 욕망의 가면을 깨트림으로써만, 비로소 관성적으로 지배되어 있었던 자신의 삶에서 멈추고 벗어날 기회를 얻는다. 그는 다소 변칙이고 다분히 작위적인 방식으로 법정에서 순양그룹 일가에게 복수하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죽은 진도준의 이름으로 이뤄지는 복수가 아니라, 정확하게 그들을 올려다볼 수조차 없었던 윤현우의 이름으로 이루어져야 마땅한 그런 복수다. 그렇게 적의 얼굴을 마주 봄으로써, 윤현우는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되찾는다.
    

5. 매끄러운 사회라는 적

    이 글의 주제 의식은 아주 단순하다.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적에 대하여 피로를 느끼고, 그들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할수록 우리는 결국 적의 얼굴을 잊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얼굴을 잊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적에 대한 상상력은 언제나 그보다 더 상위 심급의 상상력에 의해 조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적이 존재하지 않는 매끄러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심리스 리얼리티는 의도적인 방식으로 구성되는 일종의 매트릭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가면 쓴 적을 상상하는 과정 역시 그 가면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급속도로 소비되고 향유되는 피상적 혐오에 빠져 있는 이유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누군가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고 구체적인 갈등의 영역으로 진입하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시대에 대중문화의 갈등은 얄팍하고 피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시적이고 예민함으로 무장한 갈등이 반드시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미시적인 갈등은 우리가 갈등의 대상에게 집중할 수 있는 집중력과 끈기를 무력화한다. 우리가 자신의 내면으로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면 갈등은 이내 자기 내부와의 화해 과정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갈등이란 내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주 강력하게 나의 바깥에, 복잡한 관계성과 두꺼운 가면 너머의 타자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과도한 미시적 갈등은 당사자성에 근거한 미시성과 근접성 때문에 때로는 적의 얼굴을 파악할 수 있는 적절한 거리감을 잃는다.
    다시 말하건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갈등은 더 정확한 적을 상상하고 재현해내기 위한 여러 층위의 노력에 걸쳐 있다. 대중문화에서만이 아니라, 본격문학이나 우리 자신의 일상적 무의식의 층위에서도 그렇다. 우리의 적은 관성적인 패턴 속에서 적 자체를 회피하는 자신의 자신을 드러나게 해야 한다. 어떠한 불쾌나 공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우리의 사회적 현실을 들여다보는 일은 영화 〈미드소마Midsommar(2019)에서 주인공들이 호르가Hårga 마을의 하지 축제를 통해 경험하고 있는 대낮의 공포와 동일하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인간이 인간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예외 상태의 일상화 말이다. 문제는 어디까지 우리가 거기에 익숙해질 것인가, 혹은 이 현실에 개입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다. 과연 이 마을을 떠나면 모든 공포의 꿈은 끝날까? 하지만 갈수록 불안정해지고 거칠어지는 사회적 분위기를 회피하고 도달할 수 있는 그런 매끄러운 세계는 없다. 오히려 그 매끄러운 세계야말로 지금 우리가 극복해야 할 최악의 적일지도 모른다.
    
    

박인성

문학평론가.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평론 부문으로 등단. 평론 「기자와의 조우」 「불가능한 소설의 세계성, 소외되는 문학적 지역성」 「시대착오와 노년으로서의 문학」 등이 있음.

    
    

〈주석〉

  1. 마크 뷰캐넌은 복잡한 사회적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니라 패턴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를 이루는 기본 구성 요소로 사람을 ‘원자’라고 한다면, 이 ‘사회적 원자social atom’가 이루는 거시적인 패턴은 사람들 개개인의 성격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기대할 수 있다. 어쩌면 공동체, 정부, 기관, 시장, 사회 계급들도 돌무더기와 비슷할 것이다. (중략) 사람이 원자나 돌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고 해도, 사회과학의 기본 방향은 물리학과 비슷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마크 뷰캐넌, 『사회적 원자』, 김희봉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0, 28~29쪽.
  2. “우리는 근대적 보편주의, 계몽주의의 보편주의, 승리를 구가하는 서양의 보편주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보편주의란 사실상 특수한 자민족중심주의의 일반화일 뿐이다. 세계의 조그마한 지역의 가치들이 모두에게 유효한 모델처럼 확대 적용된 것이다. 부족주의는 경험적으로 어떤 장소에 대한 소속감, 그리고 어떤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이 소속감은 모든 사회적 삶의 본질적 토대이다.” 미셸 마페졸리, 『부족의 시대』, 박정호·신지은 옮김, 문학동네, 2017,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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