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시대와 청년노동

    

1. 자발적 비노동은 가능한가?

    니트(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진학, 취업, 직업훈련까지 모두 거부하는 사람들, “진로 진입기와 적응기에 전방위적 엉망감을 느껴 노동으로부터 배제되거나 스스로 노동을 배제시킨 사람들”1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적 현실에서는 이러한 니트의 의미를 그저 ‘일할 의지가 없음’으로 치부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니트의 의미는 다소 모순적이다. 일단 ‘Not in Education’보다는 ‘A highly Eudcated’ 상태의 무직자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니트를 단순히 구직거부자로 보는 것에도 문제가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청년 세대 장기실업이라는 문제가 고착화되면서, 현재 한국에서 니트의 문제는 ‘자발적 구직거부자’라기보다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 발생한 ‘구직단념자’로 인식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질문해보아야 한다. 자발적 비노동은 정말 가능한 걸까? 사회적 생산구조나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이 존재할 수 있는가? 오히려 문제는 무엇이 이러한 니트를 유발하고 있느냐에 있다. 이충한은 한국형 니트의 특성을 소진형 니트, ‘노오력’형 니트, 간헐적 니트로 구분한다.2 그는 소진형 니트는 노동 현장에서 극도의 사회적 압력을 받은 경우를, ‘노오력’형 니트는 사회적 착취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계발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는 유형을, 간헐적 니트는 노동과 비노동을 반복하는 유형이라고 정의한다. 자칫 간헐적 니트의 경우에는 청년 세대의 ‘게으름’에 대한 표상처럼 오인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비정규직이나 파견직과 같은 모순이 만연한 한국의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야기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니트로 대변되는 청년노동의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청년들이 경험하는 노동 현장의 모순점을 면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창비, 2021)와 김유담의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창비, 2022)는 사무직으로 일하는 이십 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해서, 그들을 착취하는 노동 현장의 모순을 드러내는 한편, 그 모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고군분투를 담아내고 있다. 청년 세대의 구직 문제 또한 이러한 사회적 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
    사실 두 작품의 주인공은 정규직으로 취업한 상태이므로 니트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어쩌면 이 혹독한 취업 전쟁 속에서 소기의 목표를 성취한 청년들로 평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직장에서 겪는 여러 문제들은 오늘의 청년들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니트라는 상황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한국적 노동 현실을 반추하고 있다. 회사에서 그들이 겪는 모든 불합리야말로 우리의 청년 세대들이 현실에서 겪는 노동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2. 1.2의 공간, 생존이 아닌 생활

    장류진의 장편소설 『달까지 가자』는 여러모로 문제작이다. 그의 첫 소설집인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2019)이 직장인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과 애환을 담아냈다면, 『달까지 가자』(이하 본문 인용은 쪽수만 표기)는 모든 K-직장인들이 바라는 ‘꿈의 퇴사’를 성취한다. 그것은 바로 가상화폐 투자로 ‘떡상’하고 과감하게 사표를 지르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지점에서 본다면 노동 탈출기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단지 그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계기와 본질을 파악하지 않고 표면적인 것만을 본다면, 이 작품이 가진 진실이 감춰지게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 다혜는 “햇수로 5년, 근무 연수 3년 11개월”차의 직장인이다. 그녀의 3년 11개월은 수많은 모순이 중첩되어 있는 회사 생활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다. 그저 “네네”만 하고 지나쳤던 수습 기간을 지나,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책임진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12쪽)는 팀장을 적당히 비꼬는 “네네”를 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한 직장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매달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삶의 가능성이 있다. 바로 오직 자신만을 위한 공간, 그 사적인 장소를 획득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상상 속에서 침대를 크레인으로 살포시 들어 이 공간 안에 쏙 집어넣어보았다. 그리고 복도로 나갔다가, 다시 현관문을 열었다. 침대가 보이지 않는다. 밥을 먹을 때에도, 침대가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방의 면적도 그만큼 넓어진다. 그 자리에는 미니 소파를 사서 둘 것이다. 방은 식사를 하고 디저트를 먹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공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한발짝 더 걸어가서 오른쪽으로 스윽 꺾으면⋯⋯ 거기가 바로 내 침실, 베드룸이 되는 것이다.

─『달까지 가자』, 70쪽.

    이사를 위해 여러 집을 살펴보면서 다혜는 자신이 진짜 꿈꾸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부동산에서 소개해준 집에서 특별하게 숨어 있는 공간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침대를 꼭 넣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공간, 거기서 다혜는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삶의 질’을 알게 된 것이다. 바로 그 누구에게도 노출되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을 갖는 것, 그것은 문만 열면 그대로 밖으로 통해버리는 원룸에서는 차마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1.2의 공간에 다혜는, 말 그대로 매료되어버린다.

    나는 1말고 1.2를 원했다.
    그 추가적인 0.2가 내게는 꼭 필요했다.
    나는 얇지만 깊고 아늑한 그 0.2에 분명하게 사로잡혀 있었다.

─위의 책, 73쪽.

    자신만의 사적인 공간에 사로잡힌 것은 비단 『달까지 가자』의 다혜만이 아니다. 김유담의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의 주인공 연희를 살펴보자. 연희 역시 다혜와 마찬가지로 사무직, 게다가 아직 신입사원 딱지도 채 떼지 못한 직장인이다. 출판사에서 아동 콘텐츠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업무를 하는 연희에게도 자신만의 공간이라는 특별한 니즈가 있다. 다혜에게 그것이 침실이었다면, 연희에게 그것은 바로 변기였다.

    회의실을 나오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러나 아마 자연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조금 전까지 눈가가 새빨개질 정도로 울음을 참았다. 팀장은 더욱 소리를 질렀다. 기필코 나를 울려야겠다고 작정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중략) 회의가 끝나자마자 슬그머니 화장실로 숨어들었다. 삼층 여자화장실 맨 안쪽 칸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 위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 72쪽.

    원고료에 0이 하나 더 붙어버린 상황, 함께 일하는 성 대리를 비롯한 모든 결제라인(팀장, 본부장)까지 그 누구도 그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사태에 대한 책임은 연희에게 전가되었다. 팀장의 고함과 독설을 감당하면서 연희가 알게 된 것은, 타인으로부터 완전히 몸을 숨길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연희의 1.2는 다름 아닌 변기였다.

    스무살 이후 나는 자주 변기를 옮겨야 했다. (중략) 아침 시간에 다섯칸이나 되던 화장실이 만원이 될 때면 화장실 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 고향 집에 있는 하얀 변기를 생각하곤 했다.

─위의 책, 76쪽.

    나는 방을 보러 다닐 때마다 욕실과 변기의 상태를 방보다 더 꼼꼼하게 확인했다. 언제나 내 마음에 드는 방은 지나치게 비쌌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방도 내 형편에 맞지는 않았다.

─위의 책, 78~79쪽.

    여기서 질문이 던져진다. 왜 그들은 침실과 변기에 집착하게 된 걸까? 그것은 주거가 단지 생존이 아닌 생활이라는 가치를 갖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의 시선에도 노출되지 않는 침실과 나 홀로 가장 깨끗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것 같지만 수많은 청년들이 생존을 위해 포기해야 하는, 그리고 포기해왔던 결정적인 한 가지이기도 하다. 청년주거와 관련된 수많은 뉴스를 떠올려보라.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수 있는 협소한 고시원, 주방과 욕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는 골방. 그렇게 ‘최소한’이 지켜지지 않는 곳에서 생존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므로 그들에게 ‘돈’이 필요한 이유는 명백하다. 다혜와 연희가 꿈꾸는 그 최소한의 공간, 그것은 ‘돈’이라는 절대적 가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혜는 가상화폐 투자라는 모험을 통해 자신만의 침실을 갖고자 했고, 연희는 꿈이 아닌 ‘월급’이라는 절대적 생계를 선택했던 것이다.
    

3. 자본의 속도, 그 원심력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는 자칫 일확천금을 바라는 사람들의 판타지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한 오독을 피하기 위해서는 가상화폐 이더리움에 매료되는, 그들─은상·다혜·지송의 회사 생활을 엿보아야 한다. 세 사람은 같은 시기에 입사했지만, 공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직원들로부터 소외감을 느낀다. 그나마도 은상과 다혜는 정규직이지만, 지송은 회사 내에서 ‘오오’라고 불리는 일종의 무기직이다.

    올해로써 은상 언니, 나, 지송이 모두 입사 이래 네번 연속 ‘무난’ 등급을 받게 된 것이다. (중략) 심지어 나는 얼마 전 팀 송년회 때 ‘올해의 야근왕’ 부문에서 MVP에 선정되어 싸구려 와인 한병을 선물로 받기까지 했다. 말로는 ‘잘했다’ ‘고생했다’ ‘너 없으면 어쩔 뻔했니?’ 해놓고서 정작 평가는 ‘무난’이라니.

─『달까지 가자』, 22~23쪽.

    함박사는 사장의 대학 후배이자 이종사촌 동생이라고 했다. 출근하고 싶을 때 출근하고 퇴근하고 싶을 때 퇴근했다.

─위의 책, 31쪽.

    다혜는 입사 후 쭉 ‘무난’에 해당하는 업무평가를 받았다. ‘올해의 야근왕’으로까지 뽑혔지만, 업무평가에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녀가 이 평가에 목을 매는 이유는 그것이 결국 연봉 협상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노동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드러나는 문제는, 이 평가가 결코 공정하지 않다는 점이다. 다혜는 ‘올해의 야근왕’으로까지 뽑혔지만 회사에서는 그녀를 M등급(요구 충족), 즉 그저 무난한 직원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사장의 대학 후배이자 이종사촌 동생인 함 박사는, 낙하산으로 들어와 ‘빅데이터 TF’라는 모호한 직책을 맡았지만 언제나 O등급(특출함)을 기록해왔다. 전년도 상여금만 5억 원을 받았다고 한다. 4년 연속 ‘무난’을 받은 B03(비공채 출신 3인─다혜·은상·지송)와는 달리, 입사 이래 매년 최고 등급을 받으며 억대의 인센티브를 받고 있는 함 박사. 출발점이 달랐던 계층의 차이는 평가와 보상을 통해 더 강화되고 공공연하게 된다. 하지만 ‘조금 더’를 통해 자신을 채찍질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노오력’에 대한 요구는, 회사 안에서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근대로부터 노동의 의미가 발견된 이후, “21세기에도 노동은 인간과 삶의 변함없는 토대”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노동은 전통적인 노동보다 확장된 의미를 가진다. 비단 신체적·정신적 노동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의 형태나 구조, 그리고 거기에 개입되는 시간과 공간까지도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간의 변화는 눈부시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상황이 일상화되면서 프리랜서가 아님에도 재택근무가 가능해지는 등 물리적 공간은 더 이상 노동을 규정하는 틀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뿐이랴. AI의 등장 이후, 인간은 물리적 노동뿐만 아니라 정신적·지적 노동에 있어서도 기계와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노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개입되는 문제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시간을 꼽아야 할 것 같다. 흔히 자본주의는 속도의 경쟁 시대라고 일컬어진다. 이때 속도란 결국 시간을 단축하는 것과 연계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속도를 통해 단축하고자 하는 시간은 품이나 재화·서비스의 생산과 유통에 따른 시간일 뿐, 노동의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자본의 속도는 자본 자체를 성장시키지만, 그 성과가 노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회사가 어떤 성과를 내든, 근로자의 봉급에도 그들의 노동시간에도 큰 변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자본의 평가에 성공적으로 길들여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절망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스낵팀이랑 파이팀이랑 합쳐진다는 얘기 있잖아. 파이스낵팀으로. 다혜 너 같은 실무자들이야 신경 안 쓰고 하던 일 계속하면 되겠지만 팀장이 둘일 순 없잖아? 결국 한명은 내려와야 할 테고 그 직급에 팀장 자리 내놓으면 집에 가란 소리나 다름없는데, 너라면 둘 중에 누굴 집에 보낼 거라고 생각해?”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집에 가야 하는 사람이 파이팀장이 아니라 우리 팀장이라는 건 너무나 자명했다.

─위의 책, 323쪽

    가상화폐 투자에 성공을 거머쥔 B03 멤버들이 강릉에서 유명한 카페에 가던 날, 다혜는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팀장을 만난다. 다혜에게 가상화폐 투자에 대해 물어보고, 가상화폐로 큰돈을 번 후 퇴사를 단행한 은상을 향해 쓴소리를 늘어놓던 팀장은, 결국 조직 개편에서 밀려나게 된 상황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책임진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12쪽)던 팀장이었지만, 결국 모든 책임을 지고 직책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그가 단지 조직에서 실패한 사람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회사라는 조직은 근본적으로 불평등하고, 경영에 따른 모든 책임 역시 더 약한 고리로 전가된다. 김유담의 『커튼콜은 사양할게요』에서 그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

    팀장의 외양은 거북이를 닮았다. 인상과 몸집이 동글동글한 편에 등판이 넓었다. 그녀는 늘 각종 노트북과 업무자료, 참고서적 등이 가득 들어 있는 백팩을 지고 우직하게 회사와 집만 오갔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 12~13쪽.

    키즈콘텐츠미디어본부의 매출은 탄탄했고, 우리 팀은 본부 내에서도 실적이 제일 좋았다. 그건 천미진 팀장이 굳건하게 키즈콘텐츠1팀을 지켜준 덕이었는데, 까다롭고 기준 높은 팀장을 밑에서 받치느라 나는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위의 책, 15쪽.

    연희가 소속된 키즈콘텐츠미디어본부의 팀장인 천미진은 회사 내에서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는 직원인 동시에 굉장한 워커홀릭이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어차피’로 귀결된다. 그녀는 ‘어차피’ 해야 할 업무라며 어떤 일에든 ‘YES’를 외쳤고, 부하직원에게는 폭언을 동반한 ‘어차피’로 업무를 강요했다. 우직하게 회사와 집만 오가는 그녀의 삶은, 자발적으로 회사의 ‘노예 되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달까지 가자』의 팀장이 놓인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 나는 업체 선정에 가장 크게 관여한 본부장이 당연히 이 일에 책임을 지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며칠 사이에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었다. 회사의 실세인 최전무가 동향에 대학 선후배 사이인 본부장이 무너지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지 않을 거라는 말들이 사내에서 떠돌았고, 본부장이 전무의 사무실을 들락거리는 횟수가 부쩍 늘어났다.

─위의 책, 295쪽.

    내가 극복하고 싶었던 안타고니스트는 나와는 무관하게 제거되어버렸다. 내 입장에서 악당으로 여겨졌던 팀장도 자신의 서사에서는 프로타고니스트였고, 그녀를 곤경에 빠뜨리는 안타고니스트는 따로 있었다는 사실에 맥이 빠졌다.

─위의 책, 346쪽.

    본부장이 진두지휘했던 전집 사업, 그 별책부록인 자석 블록에서 유해 성분이 검출되고 대규모 리콜 사태가 벌어진다. 업체를 선정한 것도, 유해 성분에 따른 문제를 은폐한 것도 모두 본부장의 의도에 따른 것이지만, 그에 따른 책임은 천 팀장이 지게 된다. 자발적 노예로서 회사에 충성을 바쳤던 그녀에게 회사가 준 보상은 해고였다. 줄에서 줄로 이어지는 회사의 견고한 계층 사이의 벽은, 거기에 애써 매달렸던 천 팀장의 사다리를 제거해버린 것이다.
    실제로 수많은 회사들이 경영에 따른 악재의 책임을 경영진이 아닌 중간관리자에게 전가하는 일은 너무나 흔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해서 때로는 오히려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 촘촘하게 쌓아 올린 개연성 때문인지 이 결말은 조금도 뜻밖의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두 작품에서 드러나는 자본의 속성은 소용돌이다. 자본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결말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원심력의 중앙에서 굳건하게 버티거나, 아니면 원심력의 희생양이 되어 튕겨나가거나. 문제는 처음부터 중앙에 있었던 이는 그대로 중앙에 놓여 있지만, 소용돌이 바깥에서는 끊임없이 물보라로 튕겨나간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소용돌이 같은 조직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튕겨나가는 만큼 더 많은 새로운 자원이 지속적으로 유입되기 때문이다.
    

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제 결말을 향해 가보자. 장류진의 『달까지 가자』는 ‘B03_무난이들’이 자본과 첨단기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가상화폐 시장에서 통쾌한 ‘떡상’을 획득하고, 인생의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최종적으로,
    지송이는 2억 4,000만원을 벌었다.
    나는 3억 2,000만원을 벌었다.
    은상 언니는 33억을 벌었다.
    (중략)
    내겐 이 모든 게 2017년 5월부터, 2018년 1월까지. 단 여덟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달까지 가자』, 298~299쪽.

    2018년 1월 8일, 세 사람은 가상화폐를 현금화했고 투자의 성공을 자축할 수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투자 실패로 인해 어떻게 절망했는지, 그 위험성을 잘 알고 있는 2023년의 우리에겐 이들의 성취는 그저 현실성 없는 판타지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실상, 초창기에 투자했던 은상을 제외하고는 주인공 다혜나 지송의 수익은 삶을 바꿀 정도로 엄청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만난 이래 가장 화사하고 건강해진 얼굴로 웃었다. 참 이상했다. 실제로 달라진 건 거의 없었다. 은상 언니가 사표를 내긴 했지만 우리는 아직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올해 평가에서도 나란히 ‘무난’ 등급을 받았고, 여전히 5평, 6평, 9평 원룸에 살고 있었다. 구내식당 밥을 먹었고, 이따금씩 전주식 콩나물국밥이나 우동이 곁들여 나오는 돈가스 정식, 라면사리가 무제한인 김치찌개 같은 걸 먹었고, 가끔은 조각 케이크를 사 먹거나 핫도그를 설탕에 굴려 먹었다. 그런데 2018년 1월 8일 이후, 우리가 사는 세계가 통째로 달라진 것 같았다. 그건 몇마디로 설명하기 불가능한, 실로 거대한 변화였다.

─위의 책, 303~304쪽.

    하지만 투자로 인해 얻은 종잣돈이 가져온 안정과 행복은, 그들의 삶을 본질적으로 변화하도록 만든다. 지금까지 그들의 노동이 그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부터 그들의 노동은 삶의 질을 위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가치의 변화야말로 이 작품이 진정으로 획득한 판타지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달까지 가자』를 가상화폐를 옹호하는 작품으로, 그러한 세태를 흥미롭게 반영한 것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이 말도 안 될 것 같은 놀라운 희극은 전복의 의미를 갖는다. 오직 가진 자들을 위한 블루오션이었던 금융시장, 그들이 만들어낸 최상의 수익처이자 도박처였던 가상화폐, 그 거대한 물결 속에서 세 사람은 튕겨나가지 않고 중심에서 버텨냈다. 가진 자만을 위한 법칙이 그대로 통용되는 가진 자들의 세계에서, 잠시 그들의 법칙을 따르고 비껴가서 이루어낸 그들의 성취. 그것은 근대 이후 끊어져버린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다시금 마주한 것 같은 감격을 준다.
    하지만 박수를 보내기엔 여전히 망설여진다. 이 혹독한 자본의 세계에서 해피엔드란, 결국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우리는 그것이 분명 신기루에 의한 찰나임을 인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커튼콜은 사양할게요』에서 주인공 연희가 마주한 현실은 더 혹독한 것처럼 보인다. 친구 장미의 비극적 죽음 때문이다.

    이 방에 있는 모든 유리창에는 비닐로 된 단열 에어캡이 붙어 있고, 창문 틈은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채 둘러싸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부엌창에는 세로로 절반이 나눠지는 모양으로 길게 실금이 가 있었고, 그 길을 따라서도 청테이프가 여러겹 붙어 있었다.
    대학 시절 청테이프를 팔찌처럼 팔목에 감고 다니던 장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연극 동아리에 처음 들어왔을 때 선배들은 “대학생이라면 청테이프로 집을 지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커튼콜은 사양할게요』, 321쪽.

    장미는 창틀에 친친 감겨진 청테이프로 겨우 찬바람을 막아둔 이 방에서 쓸쓸하게 죽어갔다. 청테이프로 집도 지을 수 있다던 농담이 이 집에 들어서자 너무도 잔인하고 살벌하게 와닿았다. 청테이프가 완벽하게 바람을 막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덜컹거리는 창문 사이로 살을 후벼 파듯 들어오는 찬바람에 몸을 떨면서 꺽꺽 목 놓아 울었다.

─위의 책, 323쪽.

    대규모 리콜로 괴로웠던 시기, 연희는 친구인 장미에게 모진 말을 한다. 자신이 포기한 꿈(연극)을 여전히 따라가고 있는 장미는, 연희에게 질투의 대상이자 연민의 대상이었고, 지독하리만치 남루한 자기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자각하게 만드는 존재였다. 더 이상 장미와 함께 연극을 하는 ‘1+1’이 될 수 없다는 자각, 그것은 연희로 하여금 자신이 꿈을 포기했다는 것을 각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희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누구보다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고,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당당했던 장미가, 청테이프로 기워낸 듯한 방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을.
    꿈을 포기하고 사회로 한 발을 내디뎠던 연희도, 용기 있게 자신의 꿈을 향해 도전했던 장미에게도, 최선으로 살았지만 그 최선이 제대로 보답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상처받았던 것이다. 이는 오늘의 청년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삼만원, 오만원, 십만원씩⋯⋯ 이틀 만에 장미 앞으로 전달을 부탁받은 돈은 이백만원이 넘었다. 로비로 나와 장례식장 ATM에서 돈을 찾는데, 착잡한 기분이 몰려왔다. 이 돈이 있었더라면 장미는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중략) 우리는 왜 살아 있는 장미를 살피지 못하고, 장미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고서야 이렇게 지갑을 열 수 있었던 걸까.

─위의 책, 330쪽.

    동아리 공연에서 주연을 도맡았던 장미는 그날의 대화에서도 화제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주인공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날 밤 장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위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장미를 만날 수는 없었다. 연극 「대머리 여가수」는 공연이 마칠 때까지 대머리 여가수가 끝내 등장하지 않는 부조리극이다. 그리고 장미의 장례식은 내가 경험한 가장 참혹한 부조리극이었다.

─위의 책, 341~342쪽.

    연희와 장미는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부조리극의 배우가 되어 무대에 올랐다. 그들이 연기했던 부조리극은, 아직 어린 그들에게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모순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고작 대학을 졸업하고 수년, 연희는 장미의 장례식장에서 가장 참혹한 부조리극은 바로 그녀 자신의 현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자본의 세계에서 우리의 삶은 그저 비극으로 점철되어야 하는 것일까? 작가는 이 끔찍한 현실이라는 부조리극 속에서도 결국 사람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힘은 어디에 있는지를 애써 찾아내고자 한다. 그것은 현재의 서사 중간중간에 배치된 과거, 대학 시절 연희·장미·소연이 함께 무대에 올렸던 4편의 부조리극을 통해 구체화된다. 〈벚꽃 동산〉 〈하녀들〉 〈고도를 기다리며〉, 그리고 〈대머리 여가수〉까지. 이 4편의 부조리극은 연희가 놓쳐버린 꿈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녀가 사회에서 마주한 모든 순간들에 대한 은유가 된다.
    〈벚꽃 동산〉에서 부자인 ‘로파힌’과 맺어지는 것을 포기하고 가정부가 되어 떠나는 ‘바랴’처럼 연희는 졸업과 함께 꿈이 아닌 현실을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하녀들〉에서 마담을 동경하고 추종하다가 그녀를 독살하려고 했던 하녀 ‘솔랑주’처럼, 연희는 자신이 선택한 현실에서 만족보다는 절망을 먼저 배웠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연습 기간 내내 ‘고도’의 존재를 학구적으로 탐색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과장된 몸짓으로 무대를 채우며 부조리극이 때로 코미디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것은 결국 홈쇼핑의 대박에서 대규모 리콜로 이어지는 희비극의 사건에 대한 전조가 된다. 그리고 대단원, 장미의 죽음은 장미가 부재한 장례식을 ‘장미의 이야기’로 채우며 〈대머리 여가수〉의 모순을 완성한다.
    이는 연희에게 이미 삶이 그대로 하나의 무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무대는 단 한 번의 기회만을 준다. 그것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이며, 결코 반복될 수 없다. 그럼에도 연희는 절망하지는 않는다. 장미를 잃었지만, 연희는 꿈을 함께 나누었던 장미에 대한 찬란한 기억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참혹한 부조리극 같은 현실에서 그녀가 견뎌내고 살아갈 수 있도록 당겨주는 가늘고 질긴 힘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 순간이 지나가면 기억 속에만 남겨둬야 한다는 것, 연극과 인생은 닮은 구석이 아주 많다. 나를 매료시켰던 연극의 속성이 실제 삶의 무대에서는 잔인한 가르침으로 돌아와 짓눌렀다. 연극을 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아도 됐을까. 한때의 배우 지망생이라는 알량한 자의식이 없었다면 회사생활을 견디기 좀더 쉬웠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연극에 매달렸던 청춘의 시기를 지워버린 나의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꿈을 이루지 못한 나’보다 ‘꿈꾸던 시간조차 지워버린 나’가 더 싫었다.

─위의 책, 352~353쪽.

    인생은 되돌릴 수 없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는 허탈한 조소로 탄식하더라도 결국 우리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무대는 오직 ‘이번 생’뿐이다. 연희의 자각은 여기에 맞닿아 있다. 극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어도, 합일되지 않는 의견으로 서로 갈등해도, 무대 위에서 대사를 잊었어도, 극은 진행되어야 한다. 그 틈들을 메우는 수많은 ‘애드리브’들은 오직 갈망하는 사람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절망 같은 하루가 이어지더라도 꾸역꾸역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살아 있는 의미라는 것은 연희는 새삼 깨닫는다. ‘가장 늦게까지 남아, 어제와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일상으로 내일을 살아내는 것.’(『커튼콜은 사양할게요』, 352~353쪽) 그것만이 이 참혹한 부조리극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5. 오늘도 우리는 회사에 간다

    이 글은 『달까지 가자』와 『커튼콜은 사양할게요』를 노동의 문제에 집중하여 분석하였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반쪽짜리 분석에 불과하다. 3명의 여성 인물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두 작품에서, 그들 사이의 연대나 갈등을 고조시키는 회사의 구조는 그야말로 가부장적이다. 그들이 겪는 여러 갈등의 이면에는 노동만이 아니라 젠더에 따른 모순점 역시 분명하게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이 보편적인 노동 현장에서 겪는 갈등은, 젠더에 대한 시각 없이 이해되기엔 한계가 있다.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노동과 젠더, 두 가지 측면 모두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제 다시 이 글의 시작에서 제기했던 니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어떤 이들은 니트의 확산을 개인적인 일탈로 치부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니트는 사실상 오늘의 노동이 마주한 총체적 위기의 반영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수많은 젊은이,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청춘이 일회용으로 전락하거나 적어도 잉여excess처럼 취급”3되는 오늘의 노동 현실은, 이미 그 자체로 착취의 시스템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엔 탈출구가 없다. 보라. 가상화폐로 타고난 계층에 균열이라도 내지 않는 한(『달까지 가자』), 남은 기회는 어쩌면 단 하나다. 매달 통장을 스쳐 지나가는 월급에 목을 매며 자발적 노예가 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존해나가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은 모든 ‘연희’는 결국 내일의 ‘천 팀장’이 될 것이다(『커튼콜은 사양할게요』). 여기서 니트의 의미는 보다 뚜렷한 균열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니트는, 끊임없는 스펙 경쟁 속에 내몰린 청년들의 비명을 담아낸 일종의 저항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누가 청년에게 노동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노동의 가치는 이미 끝없는 블랙홀로 빠져들고 있고, 보상 없는 ‘노오력’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청춘을 병들게 만들고 있는 이 사회에서 말이다. 결국 불안은 개인이 아닌 사회적 시스템에서 야기되는 것이다. 불합리한 노동의 세계에서 시스템 내에서 보다 유리한 자리를 선점한 기성세대가 ‘숭고한 노동의 가치’를 내세우며 청년들의 ‘노오력’을 요구하고 때로 그들의 게으름을 비난하는 것은, 그야말로 ‘입바른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돌이켜보게 된다. 우리는 진정, 건강한 어른이었는가? 혹시 자기 세계에 갇혀 ‘쯧쯧’을 내뱉는 ‘꼰대’였던 적은 없었는가? 다양한 미디어에서 상업적으로 포장된 MZ세대의 문화를 매혹으로 바라보는 어리석은 추종자였던 적은 없었는가? 그리하여 우리 현실 가까이에 있는 청년들을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현실의 모순을 먼저 발견하는 눈과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 전가되지 않도록 개선하려는 행동력 없이, 건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청년들에게 ‘노오력’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진정한 ‘노력’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가장 취약한 고리로 모든 사회적 모순을 전가하는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류수연

1977년 서울 출생. 2013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저서 『뷰파인더 위의 경성』, 평론집 『함께 내딛는 찬찬한 걸음』 등이 있음.

    
    

〈주석〉

  1. 이충한, 「위기에 빠진 것은, ‘청년’이 아니라 ‘사회’다」, 『황해문화』, 2019년 여름호, 48쪽.
  2. 위의 글, 49~50쪽.
  3. 임윤서, 「포토보이스를 통해 본 청년의 불안경험」, 『황해문화』, 2019년 여름호,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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