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개념정원 〈19회〉: 능력주의와 성공 서사

  

자기 서사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서사를 마음에 지닌 채로 살아간다. 여기에서 자기 서사란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자기 삶으로 만들어나가는 서사의 밑그림을 뜻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지금 나는 어떤 사건 속을 살아가고 있으며 장차 어떤 삶을 살고자 함이, 각자의 마음속 자기 서사 속에 기록되어 있다.
    당연한 말이겠으나, 누구라도 자기 서사 없는 삶은 불가능하다. 서사는 인물과 사건과 줄거리로 구성된다. 서사가 없다면 인물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인물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좀비나 유령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라면, 의식과 의지의 밑그림으로서의 자기 서사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겐 자기 서사 같은 것은 없다고, 나는 그저 닥치는 대로 살 뿐이며 삶의 계획이나 미래의 설계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물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바로 그런 즉흥적이고 현재 중심적인 모습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의 자기 서사이다. 삶의 밑그림으로서의 자기 서사는 자각적이거나 의식적으로 설계된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순간 불쑥 그 존재나 진상이 사후적으로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다.
    자기 서사의 내용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인물이 다르고 그 인물이 계획하고 직면하는 사건이 다르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서사를 만들어내는 틀은 그럴 수가 없다. 세상이 움직이는 이치는 어떠하며, 따라서 사람은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서사 틀의 핵심 내용을 이룬다. 서사의 틀은 서사의 내적 형식이기 때문에,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공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시대나 한 사회 구성원 절대다수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을 지배 서사의 틀이라고 지칭할 수 있겠다.
    지배 서사의 틀이 하는 핵심 역할은 개인들의 자기 서사에 세계관과 이념과 윤리를 공급하는 일이다. 시대 정신이 인물이라 한다면 지배 서사는 시대 정신의 자기 서사와도 같고, 지배 서사의 틀은 시대 정신의 무의식에 해당한다. 한 시대 사람들의 절대다수에게 의심의 여지없는 것으로 통용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또한 너무나 자명하여 사람들이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지배 서사의 틀은 자기 세계의 어른 집단으로부터 아이들에게 부지불식간에 자연스럽게 전승된다. 보편적 인간의 윤리나 집단적 삶의 이념, 그리고 실천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생활 지침이 만들어지는 것도 모두 그 틀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사람 사는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다. 역사와 현재의 사건들, 소설과 전설에서 신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 더미 속에서 사람의 삶은 이루어진다. 그 다양한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삼투되어온 지배 서사의 틀과 결합하여 자기 서사를 이루어낸다.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알게 모르게 삼투되어온 그 틀을 바탕으로, 개인들은 저마다 자기 고유의 서사를 만들고 그 서사 속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간다. 자기 서사의 진행이나 결말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자기 서사 생산의 모체인 지배 서사의 틀은 그럴 수가 없다.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서 지배 서사의 틀은 어떠할까.
  

근대 서사의 틀

    근대성의 시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서사의 틀이 지닌 요소는 다음 세 가지로 대별될 수 있다.
    첫째, 근대성의 서사가 확보해낸 시공간의 질서는 진보와 발전의 개념이다. 근대성과 더불어 무한 우주가 출현하면서 시공간의 흐름은 불가역적인 것이 되었다. 과거로부터 떠나온 사람은 결코 그곳에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시공간은 전통적 시공간이 지닌 순환의 고리로부터 풀려나와 직선적인 것이 되었다. 직선의 궁극적 지향점은 알 수 없으되, 현실에서의 시간 축적의 결과가 진보와 발전이자 성장이었다는 것은 근대성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다. 각종 경제 지표와 사회 지표들이 가리키는 성장의 추이가 그 증거들이다. 200년 전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불어난 현재 인간의 기대 수명이 대표적이다. 부모의 세상보다 자식들의 세상이 더 풍요롭고 발전된 것이라 함은 근대 이래로 두루 통하는 통념이 되었다.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편차는 있으되, 지구적 차원에서 성장과 발전의 추세는 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는 것이 지배적인 관념이 되었다. 진보와 발전의 시공간은 근대성이 자기 세계를 바라보는 기본 질서로 자리 잡고 있다.
    둘째, 근대인들의 개인 서사의 윤리로 작동하는 것은 공리주의와 능력주의라는 틀이다. 이 두 개의 틀은 행복주의와 성공 서사라 지칭해도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이 지닌 자기 서사의 윤리가 감당해야 하는 핵심 질문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이다. 자기 자신의 삶의 이유와 방법에 대해 답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하는 말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된다. 엄마가 바라는 것은 오직 너의 행복뿐이다. 이것은 자식이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우리 시대 엄마들의 입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문장이다. 착하게 살아라, 올바르게 살아라, 같은 문장들의 순위는 행복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의 바탕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행복주의이자 공리주의, 능력주의 같은 관념들이다. 행복주의와 공리주의가 개인 서사의 차원으로 옮겨지면 성공 서사라는 틀이 된다. 발전 서사가 세계 운행의 필연성의 차원에 있다면, 성공 서사는 사람들의 생활 지침을 규정하는 윤리에 해당한다.
    셋째, 물리적 차원에서 근대성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은 무한성의 시공간과 불가지론의 세계상이다. 근대 과학의 출현으로 인해 사람들이 사는 땅은 세계의 중심이 아님이 명확해졌고 우주는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 결과로 근대인은 자기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본모습을 알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도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 근대성의 출현과 더불어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기는커녕 무한 우주 속에 있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된 셈이다. 인간이 사는 땅을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했던 전근대의 세계상은 바보 같은 것이지만, 그런 착각에서 벗어나 진상을 알아차린 근대인이라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세계의 전모와 실체를 모르는 근대인 역시 바보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의 무지를 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진보라 함이 근대인의 자기 위안일 수는 있다. 그러나 전근대인의 착각과 근대인의 무지는 모두 세계의 본모습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진짜 세계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것, 인간 역시 그 알 수 없음의 일부라는 것은 근대성의 세계에 사는 사람에게 존재론적 불안의 원천이 된다.
    근대적 서사의 세계관과 윤리를, 세계에 대한 불가지론과 결합하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우리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짜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해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세상은 지속적으로 발전해왔고 어려움이 많겠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선택한 일 속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룸으로써 세상에 보탬이 되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 이런 문장들 속에서 크게 힘을 발휘하는 것은 공리주의와 능력주의의 관념이다. 불가지론으로 표상되는 세계는 인간이 책임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생활하는 사람의 의지와 윤리에서는 비켜날 수밖에 없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근대적 자기 서사의 기본 틀은 성공 서사이다. 그 의지의 힘이 근대성의 존재론적 불안을 덮어쓰고 있다.
  

공리주의의 역설

    utilitarianism의 번역어인 공리주의라는 단어는 특이한 역설을 품고 있다. 현재의 어감을 살려 번역하자면, ‘쓸모주의’나 ‘효용주의’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 공리주의이다. 공리라는 단어는 utility의 번역어로 한자로는 ‘功利’라고 쓴다. 이 말은 공로와 이익을 뜻하는 것이라서 그것을 추구하는 일이 도덕적으로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기는 힘들다. 다른 목적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단 정도의 뜻이라면 간신히 중립적인 어감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자를 병기하지 않은 시간들이 지속되면서 공리라는 단어는 ‘公利’의 뜻으로 통용되곤 한다. ‘공’이라는 음절로 인해, 공공질서나 공익 같은 단어들과 같은 계열체로 오인되는 까닭이다. ‘공’이라는 음절이 공/사의 대비에서 매우 긍정적인 뜻을 지님은 물론이다. 요컨대 본래는 부정적인 어감을 지닌 공리주의라는 단어가, 한자가 감추어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일종의 착시가 만들어져서, 거꾸로 공익에 대한 추구라는 긍정적인 어감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역설적이지만 여기에 또 하나의 반전이 더 추가된다. 공리주의라는 관념은 그 자체가, 한자어의 모습과는 달리 이미 공공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곧 그것이다.
    공리주의는 19세기 영국에서 전개된 생각으로, 벤덤과 J. S. 밀 등에 의해 대표되는 도덕 철학이다.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것은 당연히 ‘공리’이며 그 궁극적 지점에 놓여 있는 것은 행복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행복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 강령이다. 요컨대 공리주의는 그 안에 행복주의eudemonism와 쾌락주의hedonism를 품고 있는데, 이런 요소들은 윤리 일반과 안 어울린다는 통념이 있어 문제가 된다. 통상적으로 윤리나 도덕이란, 귀찮고 어렵더라도 올바른 것이기 때문에 당위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윤리적인 행위는 그 자체로 존경의 대상이 된다. 이런 점으로 보자면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윤리적일 수 없다는 통념은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 결과로 쾌락주의나 행복주의는 직관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그랬듯이, 공리주의 역시 배부른 돼지들의 철학이라는 비난을 받은 것은 그런 까닭이다.
    하지만 공리주의(혹은 쾌락주의)를 향한 이런 통념과 비난에는, 행복이나 쾌락을 저급하게 생각하는 비판자들 자신이 곧 인간을 저열한 존재로 만든 것이라는 고전적인 응수가 기다리고 있다. 즉, 당신들이 저급한 쾌락과 행복을 생각하기 때문에 공리주의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비판자들에게는 치명적인 것이다. 쾌락주의에 대한 비판자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사람의 본성을 저열한 것으로 간주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행복이 신체적인 만족의 수준에 국한되지 않음은 너무나 자명하거니와, 벤담의 도덕 철학을 이어받은 밀이 공리주의 비판자들에 맞서 내세운 것 역시, 사람이 지닌 고급한 쾌락과 행복의 개념이다. 인간은 고등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서 쾌락이나 행복에 있어서도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 양적인 것보다는 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것이다. “만족한 돼지가 되는 것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나으며, 만족한 바보가 되는 것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후주 참조, 33쪽. 이하 쪽수만 표기)는 유명한 말이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밀의 공리주의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간다. 공리주의가 바탕을 두고 있는 ‘최대 행복의 원리the Greatest Happiness Principle’에서 행복 자체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인간 행위가 마땅히 목적으로 삼아야 할 행복(혹은 쾌락)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점이 곧 그것이다. “공리주의에서 행위의 옳음의 기준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그 행동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다.”(47쪽)라고 밀은 썼다. ‘일반 행복general happiness’이나 ‘일반 이익general interests’ 같은 용어를 구사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반 이익이라는 말은, 현재 일상적으로 쓰는 말로 옮기자면 공공선이나 공익public interests이 된다. ‘일반 이익’을 윤리적 기준으로 삼는 공리주의 도덕철학이, “동료 인간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인 사회적 감정social feelings”(75쪽)을 도덕 감정의 토대로 간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된다.
    이렇게 보면, 공리주의는 결과만을 따지는 이기적인 쾌락주의라는 통념과 정반대의 모습임이 드러나게 된다. 공리주의는 출발점에서부터 그 자체가 공동체주의에 기반을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리功利가 공리公利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 역설적이라 했으나, 실상을 따지면 ‘쓸모’로서의 ‘공리utility’란 그 자체가 사회적 성격, 즉 공적public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우리 시대 엄마들의 당부는,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됨으로써 사회적 인정을 받으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당연하게도, 돌이나 벌레가 아니라 함께 사는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 있는 사람을 뜻할 수밖에 없다. 요컨대 공리주의가 공동체의 산물인 것은 가치가 시장의 산물인 것과 마찬가지다. ‘쓸모주의’로서의 공리주의가 공동체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근대성의 세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쓸모와 효율을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공리주의자로 살아간다. 공리주의는 대한민국 교육의 최고 이념의 자리에 올라 있는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교육법〉이 교육의 유일 이념으로 현창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구절은 고조선 건국신화에 나오지만, ‘재세이화在世理化’를 제외한 채 ‘홍익인간’만을 한 나라 교육의 최고 이념으로 내세운 것은, 20세기 후반 대한민국 교육법을 만든 사람들이 근대인이자 ‘일반 이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실천이성의 이율배반과 공리주의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근대가 직면한 윤리의 문제를 미덕과 행복의 불일치로 규정했다. 다소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착하게 사는 사람이 행복해져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이 문제라는 것이다. 칸트가 생각하는 최고선은 착함과 복됨이 합일을 이루는 것인데, 그런 상태가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실천이성의 이율배반’이라고 했다. 도덕성의 이상이 현실에서 빚어내는 모순과 역설이라는 뜻이다.
    미덕과 행복의 불일치는 현실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면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착하게 살면 손해를 본다는 것은 과장된 통념이지만, 착함과 행복이 반드시 인과적이지 않음은 많은 사람의 오래된 경험칙에 해당한다. 둘의 불일치에 대해, 그리스의 에피쿠로스학파는 행복에 대한 추구가 종국적으로는 미덕에 대한 추구로 이어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진정한 행복은 높은 수준이 정신적 충족감이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추구는 결국 도덕적인 삶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와 반대로 스토아학파는 미덕에 대한 추구가 행복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도덕적인 삶은 현실적 행복 같은 보상을 바라기 전에 그 자체가 이미 복 받은 삶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칸트가 보기에, 이 둘은 모두 그릇된 추론에 입각해 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결과와 무관하게 그 자체가 도덕적인 것일 수는 없다. 그래서 에피쿠로스의 논리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또 덕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현세에서의 행복이 따라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스토아학파의 논리는 조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야 하는가. 『실천이성비판』에서 칸트가 내놓은 대답은, 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의 인식 영역 바깥으로 추방해버렸던 요소, 즉 신의 존재와 인간 영혼의 불멸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다. 다만 칸트는 이 두 요소를, 존재나 사실이 아니라 요청의 형식으로 소환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미덕과 행복의 일치는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라 해도, 천상의 나라가 보장하는 영원한 삶을 전제한다면 이 둘의 불일치는 해소된다. 나쁜 짓을 하면 결국 천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차원이다.
    그러니까 실천이성의 이율배반이 해소되기 위해서라면, 천벌을 행하는 절대자가 존재해야 하고, 또한 불멸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자기 잘잘못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신의 존재와 영혼 불멸은 사실이 아니라 당위적 요청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도덕성의 영역은 사실이 아니라 당위가 지배하는 영역이기 때문에 칸트의 도덕 철학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위적 요청들을 전제로 사람의 행동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한 그럴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곧 사람됨의 의무라 함이 칸트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이와 같은 입론의 방식은, 일찍이 『국가』에서 플라톤이 내세웠던 대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은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플라톤은 이 질문에 대해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서 말한다. 세상에서 나쁜 짓을 하면 죽고 난 다음에 천 곱절로 갚아야 한다고. 이것은 대단한 협박이지만, 예로부터 지금까지 매우 유효하게 작동하는 도덕률이기도 하다. 나쁜 짓을 하면 그 화가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이런 위협이 통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끝이 그렇듯 절대자와 사후 세계도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우연의 산물임을 확신하면서도, 외부의 제재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덕성을 갖춘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대단한 윤리적 영웅이 아닐 수 없겠다.
    밀의 공리주의가 내놓은 ‘일반 행복’이라는 대답은, 칸트가 제시한 ‘실천이성의 이율배반’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대답일 수 있다. 칸트는 착함과 행복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절대자와 불멸의 영혼이라는 초월적 협박을 동원해야 한다. 칸트가 행복주의나 에피쿠로스주의를 절대적 불가능이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행복을 한 개인의 차원에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밀이 말하는 ‘일반 행복’이나 ‘최대 행복의 원리’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차원에서 추구하는 행복을 뜻하는 말이다. 그것이 저 하늘나라의 도덕성에 해당할 수는 없으되, 최소한 인류가 사는 공동체를 하나의 일반 세계라고 전제한다면, 그 지상 세계 안에서는 도덕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밀의 공리주의는 헤겔주의적 성격을, 좀 더 멀리로는 바울주의의 요소를 그 안에 품고 있다. 공동체주의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능력주의의 함정

    능력주의는 근대성의 지배 서사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념이다. 공동체 운영을 위한 중요한 지위는 그에 합당한 능력 있는 인물이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능력주의의 핵심 강령이다. 능력주의는 이런 점에서 계층이나 신분이나 혈통에 의존하는 귀족주의와 금권주의를 배제하며, 더 나아가 개인 간의 사적 인연을 중시하는 정실주의를 부정함으로써 공동체 운영의 공정함과 올바름의 상징이 된다. 그런데 그런 능력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면 무슨 까닭일까.
    능력주의라는 단어는,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Michael Young(1915~2002)이 자신의 풍자소설 『능력주의The Rise of Meritocracy(1958)에서 제목으로 쓰기 위해 만들어낸 단어 meritocracy를 번역한 말이기도 하다. meritocracy는 라틴어 어원의 ‘merito-’와 그리스어 어원인 ‘-cracy’를 합성한 것으로, 위에서 사용한 ‘쓸모주의’라는 말처럼 어색한 조어법의 산물로서, 마이클 영 자신도 그런 점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다고 쓴다. 하지만 이제는 영어 세계에서 확실한 시민권을 얻었으며, 한국어 번역인 능력주의라는 단어가 그렇듯이 공정과 정의를 표상하는 매우 당당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능력주의에서 ‘-주의’가 떨어져나가고 ‘능력’만 남는다면 사태가 조금 달라진다. 마이클 영이 사용한 능력의 개념은 ‘능력=지능+노력’의 공식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현재 한국어의 어법으로 보자면, ‘능력’이라는 단어는 주로 경제적 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된다. 결혼 상대자로 잘생긴 사람과 능력 있는 사람 중 누구를 원하느냐는 통속적인 질문이 있다. 여기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란, 돈이 많거나 돈을 잘 버는 사람을 뜻한다. 여러 능력 중에서도 돈 잘 버는 지능과 노력만 특화된 셈이다. merit라는 단어의 어원인 라틴어 동사 mereo 역시 ‘(돈을) 벌다, 획득하다’라는 뜻이기는 마찬가지이다. 예나 이제나 능력 있는 사람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쓸모나 가치가 있다고 인정받는 사람이고, 그 인정은 결국 축적된 화폐의 양에서 대표적인 표현 도구를 찾는다고 할 수 있겠다.
    현재 능력주의가 직면한 문제와 비판은 다음 세 가지 항목으로 구분해볼 수 있겠다.
    첫째, 능력주의가 현실 세계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이런 비판이라면 누구라도 금세 수긍할 수 있다.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아는가가 중요하다.”라는 표현이 이런 사태를 상징한다. 능력 없는 사람이 이런저런 정실 관계에 의해 좋은 지위를 차지해서 생기는 문제는, 능력주의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한 정밀하고 엄격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둘째, 능력주의 이념 자체의 부실함에 대한 비판이 있다. 대물림되어서는 안 될 능력이 대물림되곤 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 대표적이다. 능력주의가 이념이 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기회의 균등과 능력 평가의 적절성이다. 그럼에도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에 따라, 한 아이에게 주어지는 교육의 기회와 질, 문화 자본과 사회 자본의 차이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것이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또한 능력 평가에서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특정 지위에 오르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로 보상과 배분에서 현격한 차이가 생겨난다면 사회적 올바름의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라 하기 어렵다.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 격차, 그리고 사회적 보상 체계와 연관된 불합리와 불평등이 오작동하는 능력주의를 비판대에 올리는 것이다.
    셋째, 능력주의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비판은 좀 더 근본적이다. 능력주의 이념 자체가 불행의 원천일 수 있다는 마코비츠Daniel Markobits(1969~) 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능력주의에 대해, 부의 원천이 토지가 아니라 노동력이 된 시대의 귀족주의라고 규정한다. 세습 귀족은 자신의 덕성과 인품을 내세움으로써 특권자로서의 자격을 입증했다.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착취해 소득을 얻는다.”(후주 참조, 441쪽)는 점에서 귀족과 구분된다. 게다가 능력주의 시대의 엘리트는 수시로 행해지는 능력에 대한 검증으로 인해 지속적인 압박감을 받아야 한다. 엘리트는 업적을 쌓기 위해 자기 자신을 착취해야 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며, 엘리트의 자손들은 새로운 능력의 시험대에 올라야 하고 또한 경쟁 탈락에 대한 불안에 시달려야 한다.
    또한 경쟁에서 탈락한 능력주의 시대의 패배자들은 그들대로 치명적인 열패감에 시달려야 한다. 신분이 세습되는 귀족주의 시대 하층민들은 하늘을 탓할지언정 자기 자신을 탓할 이유는 없었다. 노예라도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을 지닐 수 있었다. 혈통으로 자격을 인정받는 세습 귀족 역시 신분에 합당한 범절을 갖추면 될 뿐 그 이상의 자격 검증을 요구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능력주의 시대의 원리에 따르면, 하층민들은 불행과 고통의 이유에 대해 자기 자신을 비난할 수밖에 달리 핑계를 댈 길이 없다. 능력주의 이념의 지배 하에 있는 한, 하층민들과 탈락자들은 현실적 고통과 불행만이 아니라 도덕적 비난과 자책의 가혹함까지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누구를 탓할 수가 없으니 자책의 틀 안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이들의 원한은 자기 외부에서 구체적 지향점을 찾아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기 자신을 향한 폭력이나 대상 없는 무차별한 폭력으로 발현되기 쉽다.
    세습 귀족이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혈통 뽑기에서 당첨된 자기 자신의 행운뿐이었지만, 자기가 거둔 모든 결과와 영광이 저 잘난 때문이라는 능력주의 시대 엘리트의 기고만장은 하늘을 찌른다. 그런 오만의 운명이 어떠할지는 성공한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공허감이 이미 예시하고 있는 것이겠다. 능력주의가 만들어놓은 무한경쟁의 세계는, 실패한 사람과 성공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불행을 골고루 선물한다. 이것이 평등주의라면 불행의 평등주의라 해야 하겠다.
 
 

후주

밀의 『공리주의』에 관한 인용은, 『밀의 공리주의』(류지한 옮김, 울력, 2021), 33쪽, 47쪽, 75쪽을 따랐다. 대한민국의 〈교육법〉은 1949년 12월 1일 제정되었고, 1997년 12월 13일 〈교육기본법〉으로 개정되었다. 홍익인간의 이념이 나오는 ‘제2조(교육이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실천이성의 이율배반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제2권 2장에 나온다. 생전의 잘못을 사후에 천배로 갚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플라톤의 『국가』 10장에 나온다.
마이클 영의 소설 The Rise of Meritocracy는, 『능력주의』(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로 번역되어 있다. “지능+노력=능력”이라는 공식은 14쪽에 나온다. “무엇을 아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아는가가 중요하다.”라는 표현은, 스티븐 맥나미·로버트 밀러 주니어, 『능력주의는 허구다The Meritocracy Myth(김현정 옮김, 사이, 2015) 3장의 제목이다. 능력주의가 오작동하는 한국의 현실에 대해서는, 김동춘 『시험능력주의』(창비, 2022)가 상세하다. 마코비츠의 The Meritocracy Trap은 『엘리트 세습』(서정아 옮김, 세종, 2020)으로 번역되어 있다. 마코비츠의 인용은 441쪽이다.

  
 

서영채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 교수. 저서 『우정의 정원』 『왜 읽는가』 『풍경이 온다』 『인문학 개념정원』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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