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유지영의 작품과 광역 인천의 문학 2

  

1. 적절한 또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기준을 찾아서

    기존 문학사 또는 주류문학사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문학, 또는 그에 미달한다고 판단되는 작품은 주로 지방문학의 일원으로 호출된다. 그것이 소위 ‘중앙’으로 일컬어지는 ‘서울’에서 발견된다고 해도 기존의 기준에 미달한다고 판단될 때, 그 역시 지방으로서의 ‘서울’의 일원, 지방문학의 일원으로 한정된다.
    그렇지만 그 기존의 기준이란 때로 객관적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요컨대 기존 문학사의 기준으로 볼 때 무언가 미달한 듯한 작품이라고 해도 이는 적절한 기준과 근거로 설명되지 않은 작품일 수 있으며 심지어 충분히 의미 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한 가치에 의해 앞으로 설명될 작품일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지방문학 또는 인천문학을 살피고 판단함에 있어 적절한 기준은 무엇일까? 지역성이라는 것은 지리적 특성에 쉽게 환원되거나 등치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문학적으로 실천되는 지역성이란 지역을 터전으로 살아낸 인간의 행적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일반적이거나 바람직하지 못할 때조차도 그것이 그때 그곳에 있던 실제 인간의 선택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근거와 기준을 정립하고 좀 더 입체적으로 해명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지역문학과 지역학의 한 의무라 할 것이다.
    앞서 여름호에서 대부분의 문학사 또는 문화사의 기술은 선도적 성과에 주목하여 기술되나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선도적 성과는 이것이 퍼져나가 일반화되는 확산을 통해서 완성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였고 아울러 인천문학사를 다룸에 있어 인천이 ‘광역도시’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더불어 기존의 문학적 기준에 부합되지 않거나 혹은 문학적으로 일정한 수준에 미달한다고 판단되는 문학작품조차도 섣부른 우열 평가로 재단하기에 앞서 왜 그러한가에 대한 납득 가능한 분석을 시도하는 것이 우선 과제임을 다시금 강조해두고자 한다. 새로운 작품을 발굴하며 외연을 넓혀가는 것과 이를 이해할 수 있는 판단 근거를 정립해가는 것, 두 가지가 병진되어야 할 노력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2. 비분의 현실과 생활인의 균형감각

    현재 남아 있는 오성 유지영梧城劉智榮(1901~1981)의 일제강점기 시가는 4편이다. 《조선일보》에 게재한 「해변의 저녁」(《조선일보》, 1928. 4. 22.)과 《중외일보》에 게재한 「떠나가신 님」(《중외일보》, 1928. 4. 28.) 「농촌의 하루」(《중외일보》, 1928. 4. 30.) 「병중음病中吟(《중외일보》, 1928. 8. 8.)의 3편이다.

    「해변의 저녁」은 해 지는 강화도의 저녁 풍경을 노래한 3음보의 시이다. 음수율보다는 3음보의 율격으로 신체시를 수용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얼핏 보기에는 전대의 선유船遊의 풍정을 계승한 듯 보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1연에서는 붉은 낙조를 배경으로 사람이 노를 젓는 고기잡이배를 배치하여 강렬한 시각성을 드러내는 한편, ‘찍-걱 찍-걱’이란 노 젓는 소리를 안배하여 강인하면서도 처연한 생활 감각을 보여준다. ‘어데로 가노’라는 질문은 방향을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짙은 애수의 정조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는 이어지는 2연의 둥지를 찾는 새들과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마을로 시선을 옮겨감으로써 자연스럽게 ‘귀가’라는 답변을 제시한다.
    말하자면 시각적으로는 낙조를 배경으로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이지만 이것은 절대 유흥이나 오락이 아니다. 여기에 결합한 ‘찍-걱 찍-걱’이란 노 젓는 소리는 어부의 고단한 노동과 집으로 가는 인간의 작은 행복을 동시에 환기한다. 그러나 그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고 그 시간 또한 짧지 않으니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 행위 이상으로 삶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절절하다. 까마귀는 ‘까-악’ 한 번, 참새는 떼로 날며 ‘짹-짹’이면 충분히 둥지를 찾지만 어부는 산허리의 저녁연기가 어둠과 같이 사라져가도록 아직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연에서 아침에 떠났던 고기잡이배는 얼레빗 같은 초승달이 기울고 밤바람이 차가워진 이후에야 돌아온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이러한 안온하고 평화로운 결말 안에서도 그들에게 고기는 많이 잡았느냐고 묻기가 어려우니 그들이 싣고 온 것이 달빛인 까닭이다.
    「떠나가신 님」은 순종의 3주기를 맞은 애통한 소회를 다루고 있다. 지난 왕조의 임금을 ‘님’으로 호출하는 심사가 퇴행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이 무렵 유지영은 신간회 강화지회의 상무간사였다. 지난 왕조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일제에 의한 독살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세상을 떠난 순종을 잊지 않음으로써 식민지 상태를 자각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여기에서 시인은 1연에서는 ‘낙화’를 서러워하지 말라고 시작하지만 2연에서 꽃은 다시 핀다는 사실을, 5연에서는 만 가지 꽃, 천 포기 풀이 해마다 다시 싹튼다는 사실과 떠난 님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비함으로써 비극적 정조를 점층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3연과 4연에서는 당시唐詩 김창서金昌緖의 「춘원春怨」을 응용하여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打起黃鶯兒(타기황앵아: 노란 꾀꼬리 쫓아보내어)
    莫敎枝上啼(막교지상제: 가지 위에서 울지 못하게 하라)
    啼時驚妾夢(제시경첩몽: 울음소리에 꿈이 깨어)
    不得到遼西(부득도요서: 님 계신 요서에 갈 수 없으니)

    둘째 구절 ‘막교지상제莫敎枝上啼’의 울 제를 생략하고 앞 구 ‘타기황앵아打起黃鶯兒’에서 울음의 주체인 ‘꾀꼬리’와 ‘마디마디 우지 마라’를 결합하고 ‘제시경첩몽啼時驚妾夢’에서 제시된 꿈의 공간을 4연의 ‘자나깨나 깨나자나 꿈에조차 못 잊겠네’로 연결한 것이다. 김창서의 시의詩意는 나뭇가지에 앉아 울려 하는 꾀꼬리를 툭툭 쳐서 쫓아달라, 그 울음소리에 시적 화자의 잠이 깨면 꿈에 님이 계신 요서로 가서 님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즉 시인은 꿈속에서 ‘님’을 만나고 있는 것이니 이를 위해 아름다운 꾀꼬리의 노랫소리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올 줄 모르’는 전 시대의 황제의 부재가 거듭되는 반복으로 확정된다는 느낌은 웬일일까? 의구한 산천, 다시 피는 꽃과 풀의 순환에 희망을 두되, 부재를 망각하지 않는 다짐이라면 과도하다 할 것인가.
    「농촌의 하루」는 평범한 농가의 모습을 명랑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아침과 낮, 저녁의 시간 순서로 나열되어 있지만 봄에서 여름, 초가을 정도의 계절을 배경으로 일상적인 일 외에도 김매기, 보리방아 찧기, 거름 거둬들이기, 건초 장만하기 등 농가의 여러 가지 일을 설명하고 있다. 닭과 소, 개 등 가축들에서 늙은 조부모와 부부 내외, 아이들까지 농가의 구성원 모두 할 일이 있어 제 몫을 다하고 있으니 전통적인 「농가월령가」와 「훈민가」의 감수성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닭과 소, 개 등 동물의 소리와 함께 아침이 밝아오기 시작하여 사람의 식사 앞에 닭 모이 주고 소죽 쑤어 동물을 먼저 먹인 후에 사람의 조반을 짓는다는 점이다. 농가의 우선순서가 자연과 생태에 준하고 있음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또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도 흥미롭다. 시골 마을, 아직 근대적인 학교는 없는 모양이지만 아들은 천자문을 끼고 서당에 간다. 평범한 농가일망정 으레 마을 서당이라도 보내서 교육을 시작하던 전통적인 교육관을 엿볼 수 있다. 딸은 서당에 보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소녀들의 교육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율격적 필요라 하더라도 딸 앞에 굳이 ‘어린’을 덧붙여 아직 미취학 연령임을 드러내고 있다. 여성의 교육에 미온적이던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유지영의 교육적 이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유지영은 소설 「새와 같이」(지난 호 소재)에서 학교에 다니는 소녀의 죽음을 다룬 바 있다.
    또 하나 흥미로운 풍물은 ‘곡산초’이다. 이는 황해도 특산의 담배로서 강화가 전통적으로 황해도 지역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교역하던 황해도 상권의 일원이었음을 보여준다.
    「병중음病中吟」은 시인이 병들어 누웠을 때 쓴 작품인 듯하다. 시인은 건강할 때, 더 열심히 일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게으름에 대한 처벌로 질병을 의심하고 있다. 현대 의학에서는 이미 상식이지만 대부분의 질병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과로의 결과이다. 하여 전통적으로는 질병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휴식을 통해 섭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질병을 ‘처벌’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는 기독교적 시각이고 특히 근대적으로는 근면을 신의 윤리로 이해한 칼뱅주의의 산물이기도 했다. 인상적인 것은 병들어 심리적으로 나약해진 순간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소곡 3편─고시체를 본받아서」는 삼랑성, 정족산, 참성단을 다룬 3연의 연시조로서 유구한 역사의 장소에서 무력한 현실을 비통하게 노래하고 있다. 강화 남쪽의 유적지로 단군이 제사하던 참성단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의 전설에, ‘심도沁都’의 흥망사란 일찍이 양헌수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무찌른 정족산의 역사를 일컬음이다.
    자신이 속한 강화의 자연과 역사, 일상 속에서 이를 따뜻하면서도 슬프되 시조라는 옛 형식에 기대어 감정적 파탄을 방어하는 미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망국에 비분하나 생활인으로서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유지영과 지역의 문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새삼 절감케 한다.
  

3. 한국 민담과 서양 동화의 혼융

    균형감각은 유지영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기반이다. 이는 옛 설화, 이솝우화 등 다양한 경로로 접한 이야기를 다시 쓰는 과정에서도 확실히 드러난다. 유지영의 작품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중외일보》에 실린 일련의 설화형 동화들이다. 유지영은 《중외일보》에 연속하여 작품을 게재하였다.
    이 중 「떡 잘 먹는 노승」(《중외일보》, 1928. 4. 3.~5.)은 어린이가 떡을 혼자만 먹는 탐욕스러운 어른 몰래 떡을 먹어 치우고 이를 속이는 화소로서 ‘오성과 한음’의 일화 등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를 동자승과 노승의 관계로 변환하고 동자승이 부처님이 떡을 먹었다고 거짓말하여 위기를 모면하고 다음 날에는 개구리를 넣어두어 노승이 개구리를 잡아 혼내려고 쫓다가 연못에 빠져 죽어 그 연못을 노승담老僧潭이라 하고 그 옆에 바위를 개구리바위라 한다는 유래담형 창작 설화이다.
    「썩어 끊어진 새끼 동아줄」(《중외일보》, 1928. 4. 12.~14.)은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이야기이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고개를 넘어오면서 입은 옷은 모두 빼앗기고 알몸이 되어 호랑이와 싸운다는 화소는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어머니’에 대한 성적 학대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의 경우는 호랑이를 ‘암호랑이’로 한정하여 그러한 해석의 가능성은 비껴간다. 그럼에도 남매의 지혜와 도주를 강조하는 전래의 이야기와 달리, 아이들 어머니의 상황과 갈등을 좀 더 상세히 기술하여 아이들을 위해 싸우다 희생하는 어머니의 뜻과 금방석을 내려주는 하늘의 뜻이 상응하도록 안배하였다.
    「욕심 많은 부자의 소원」(《중외일보》, 1928. 8. 10.~13.)은 흔히 ‘우스운 소원’으로 샤를 페로를 위시하여 다양한 유럽민담의 화소를 응용한 작품이다. 나그네에게 친절하여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 가난한 사람은 풍요로운 삶과 이후의 천국행을 약속받아 잘살게 되었으나 욕심꾸러기 부자 부부는 불평과 저주의 언어 습관대로 스스로를 저주하여 머리에 쇠뿔이 네 개나 돋고 결국은 죽고 만다는 이야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음 착한 도깨비 왕녀─복남이 장가들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모습을 감춰주는 모자, 입으면 하늘을 날 수 있는 두루마기, 신으면 한 걸음에 멀리까지 갈 수 있는 신발이란 세 보물의 이야기다. 얼핏 보기에도 ‘도깨비 감투’와 프랑스 민담 「엄지동자」의 ‘세븐리그 부츠(한 걸음에 30킬로미터를 간다는 마법 부츠)’와 ‘하늘을 나는 양탄자’의 이야기가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의성이란 기준으로 보면 어설픈 모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기에는 간단치 않은 원천 스토리가 있다. 우선 ‘도깨비 감투’ 설화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 서구에서도 유형이 발견되는 광포설화이다. 우리나라에서 채록된 자료만도 서울, 충남, 전남, 경북, 평북 등 전국적인데, 대부분은 도깨비에게서 우연히 ‘감투’를 얻은 사람이 도둑질로 부자가 되었으나 작은 담배 불티에 구멍이 나서 빨간색 실로 기웠더니 그 부분만 다른 사람들 눈에 띄어 얻어맞고 벌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평북 선천에서 1936년 임석재 선생이 채록한 이야기는 구성이 특이하다. 길바닥에서 부모가 남긴 갓, 두루마기, 신발, 지팡이의 네 가지 보이지 않는 의장 보물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두고 싸우고 있는 삼 형제를 만나 싸움을 중재하는 척하고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신발을 신고 지팡이를 짚어 모습을 감춘 뒤 보물을 빼앗아 달아난다는 내용이다.
    복남이가 집을 떠나 모자와 두루마기와 신발을 얻게 되는 과정과 완전히 일치한다. 다만 설화에서 모습을 감추는 은신의 기능에 한정되어 있던 것이 여기에서는 은신 기능은 모자에 한정되고 신발을 신고 먼 길을 잠깐 동안 갈 수 있고 두루마기를 입고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으로 이동 능력이 더욱 강조되었다. 신작로가 뚫리고 기차가 달리는 세계였지만 여전히 교통이 불편한 벽지에 불과했던 강화에서 이러한 신이한 교통수단에 더욱 몰입하게 되는 것 또한 근대적 변화에 대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보물을 얻은 복남이가 지하 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미륵돼지 설화’와도 가까우려니와 신이한 지하 세계에 대한 아이디어 또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 광범위한 것이다. 다만 이곳에서 도깨비를 만나 위험을 겪고 죽었다가 특별한 약물로 부활하여 왕좌가 비어 있는 도깨비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였으나 부모가 그리워 돌아오다가 금기를 어겨 귀환이 불가능해진다는 화소는 ‘선녀와 나무꾼’의 화소와 대동소이하다. 더구나 도깨비 나라 공주의 지조와 결단으로 복남이와 공주가 재회하여 해피 엔딩의 결말을 맺는다는 상상 또한 이에 연속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가 혼융되며 새로운 이야기로 축조되어가는 것은 전래된 설화와 각종 매체에서 소개된 서양의 이야기가 대등한 위치에서 습합,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한 사례가 될 것이다.
    더욱이 이 이야기에는 결정적으로 집을 떠나는 청소년을 격려하는 특별한 아동문학적 문제 제기가 있다. 근대 아동문학의 본령은 부모와 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 핵가족을 기본 단위로 주체로 성장해가는 어린이, 청소년의 발달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거치게 되는 탈가정의 욕망을 위험한 외부에 대한 경계와 자발적 귀환의 서사로 통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겨우 열세 살의 소년이 먹을 것 없는 집을 떠나 살길을 찾기 위해 모험/여행을 떠나는 것을 지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유지영은 복남이의 출분과 소년으로 출발한 길에서 짝을 만나고 왕좌, 즉 자신이 주인이 되는 자리를 찾는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전체 과정을 지지한다. 도깨비 나라의 왕녀와 결혼한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늙은 부모를 모셔다가 큰 궁궐에 모시고 부정한 수단으로 빼앗았던 세 가지 보물까지 주인을 찾아 돌려줌으로써 과오를 시정하고 행복을 달성한다.
    앞서 언급한 「떡 잘 먹는 노승」이나 「썩어 끊어진 동아줄」, 「욕심 많은 부자의 소원」 등도 어리고 약하지만 지혜롭고 용감한 어린이와 소년을 지지하고 탐욕스러운 기성세대를 경계한다는 점에서는 근대 초기 어린이 담론에서 지향하는 새로운 세대 중심의 성장과 가능성의 자장 내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이야기에서 일관된 것은 약자의 행복과 탐욕스러운 강자의 대비이다. 탐욕스러운 강자의 몰락과 죽음, 겸손하고 부지런한 약자의 행복이 당대의 유지영이 어른과 어린이를 막론하고 모든 독자에게 제안하는 가치였던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해둘 것은 구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한국 설화와 독서를 통해 접했을 서양의 설화가 대등하게 혼융, 습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1910년대 이래로 다양한 신문, 잡지의 대중화를 통해 한국 설화 또한 독서를 통해 습득했을 가능성을 열어둔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설화와 서양의 설화를 구별 없이 섞어 새로운 이야기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은 적어도 이 시기, 강화의 유지영에게 이들 이야기는 우열적 이해나 지리적 구분은 불필요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발굴 자료 1〉

마음 착한 도깨비 왕녀

 

    옛날 어떠한 곳에 늙은이 대장장이가 한 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금년에 겨우 열세 살 된 아들 복남福男이란 귀여운 아들 하나가 있었습니다. 늙게 낳은 아들이 되기 때문에 이야말로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하고 무섭게도 귀하게 기르는 아들이었답니다. 복남이는 이제 겨우 서당書堂에 다니면서 천자千字를 마치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배우기 시작한 지 열흘도 못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남의 집에는 한 걱정거리가 생겼으니 그 걱정이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늙은 복남이의 아버지가 이제는 정말 늙고 기운이 없어서 대장장이 영업을 못하고 할 수 없이 이 다음 장날부터는 대장간을 남에게 팔기로 계약까지 맺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두 늙은이는 날이면 날마다 밤이면 밤마다 어린 복남이와 어떻게나 세상을 살아나갈까 하고 걱정으로 지냈습니다. 그래서 복남이도 서당에 더 다닐 수 없이 되었습니다. 집안 사정이 그렇다고 대장간 영업을 복남이 나이로는 도저히 맡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집은 가난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저렇게 늙으셨으니 어떻게나 하면 하루에 죽 한 끼라도 얻어먹고 살까 하고 복남이 어린 맘에도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남이는 하는 수 없이 집을 떠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무슨 다른 도리를 생각하여서 공부도 하고 장차 생활의 안정까지 얻어보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복남이는 늙은 양친을 떠나서 날마다 부모를 그리울 생각을 하고 남몰래 눈물을 흘린 지도 한두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번 결심한 것을 그대로 삭힐 수 없어서 어떠한 날 양친을 향하여 이같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나는 집에 있어서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일이라도 집을 떠나서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면서라도 내가 할 만한 직업을 찾겠습니다. 그래서 다행히도 상당한 벌이할 곳을 구하기만 한다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셔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재미있게 일생을 보내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늙은 어머니, 아버지는 몹시도 어진 복남이를 정처도 없이 멀리 보내는 것을 안타까워하였지만 복남이의 말하는 것을 들은 양친은 그 결심한 것을 말릴 수 없어서 복남이를 떠나보내게 되었습니다. 복남이도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어머니의 손목과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들고 한참이나 울었습니다.
    집을 떠난 복남이는 하루를 계속해서 길을 걸었습니다. 집도 없고 사람도 없는 고적하기 한량없는 적막한 산속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도 어제처럼 걸음을 걸었습니다. 마음까지 시원스럽게 넓게 열린 넓은 들도 지나고 물소리 잘잘 나고 새소리 짹짹 나는 산골로도 걸음을 걸었습니다. 복남이는 이렇게 걷는 걸음으로 한 곳에를 갔었습니다. 그러자니까 어떠한 사람들인 삼 형제 같은 사람 세 사람이 무슨 일이 있는지 시끄럽게도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복남이는 어쩐 일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나이 많아 보이는 아이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아버지는 돌아가셨단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이 신발과 모자 그리고 이 두루막을 우리들에게 남겨주고 돌아가셨는데 우리 세 형제들은 제가끔 그 물건을 제 것을 만들려고 하여서 이렇게 싸우는 거란다.”
    그 말을 들은 복남이는
    “어째서들 그렇게 쌈들만 하니? 좋도록 나눠 가지도록 하려무나”라고 복남이는 이상스럽다는 듯이 물어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신발을 신으면 누구든지 하루 아무리 먼 길이라도 갈 수가 있단다. 그리고 이 두루막을 입게 되면 얼마나 먼 곳이든지 아무리 높은 곳에라도 날아갈 수가 있고 이 모자를 쓰면 제 모양이 남의 눈에 보이지를 않는단다.”
    그 말을 들은 복남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들은 한 형제가 아니냐. 그러면 그렇게 싸움을 하면 안 된다. 내가 잘 나누어줄 터이니 그 세 가지 물건을 이리 다고.” 그래서 그 형제들은 모자와 두루막과 신발을 복남이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복남이는 제일 먼저 모자를 받아서 머리에 썼습니다. 하니까 벌써 복남의 모양이 그들 삼 형제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루막을 입고 신발을 신었습니다. 그래서 펄-펄 어데로인지 날아가버렸습니다. 얼마 동안 날아서 그들 삼 형제가 보이지 않을 만하여 어느 나무 그루 등걸에 내려앉았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보느라니까 그 나무 아래에 이상스러운 구녁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복남이는 무서운 것을 억지로 참고 그 구녁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살지 않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방 속에는 한가운데는 큼직한 책상이 있고 그 책상 위에는 여러 가지의 맛있는 음식이 벌여 있었으므로 복남이는 배가 몹시도 고프던 중이므로 나중 일은 어찌 되었든 한 밥 잘 먹었습니다. 복남이가 이렇게 잘 먹고 있느라니까 밖에서 어떠한 노파老婆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맛있게 잘 먹었니?”
    “네! 잘 먹었습니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다 먹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저녁만 이곳에서 자도록 해주셔요.”
    복남이는 대담하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다! 그 대신 오늘 밤중에 스물넷의 도깨비가 와서 화투花鬪를 하자거니 춤을 추자거니 할 터이니 그때는 점잖게 앉아서 도깨비 편을 보지 말아야 된다.”
라고 노파는 말했습니다. 복남이는 저녁밥을 먹고 방 한편에 가만히 드러누워 있었습니다.
    밤중쯤 되었으리라고 생각할 때 도깨비 스물넷1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복남이더러 화투를 하자고 합니다. 복남이는 용기를 다하여서 그 말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도깨비들은 저희들끼리 숨바꼭질을 시작하여서 복남이도 같이 하자고 꾀었습니다.
    그러나 복남이는 또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름다운 음악音樂을 하면서 또 같이 춤을 추자고 하였으나 복남이는 절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도깨비들은 성이 나서 복남이를 잡아 나꾸어서 태질을 쳐서 죽게 만들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어데서인지 새벽을 보하는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도깨비들은 연기 사라지듯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노파가 돌아와서 죽어 넘어진 복남에게 약을 먹여서 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잘 잤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참 잘 잤습니다.”라고 복남이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노파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장한 일이라. 그러나 오늘 저녁에는 도깨비가 어젯밤 곱쟁이나 와서 너를 못살게 굴 것이니 오늘도 어젯밤 모양으로 도깨비 있는 편을 보면 안 된다.”
라고 노파가 말했습니다.
    그날 밤도 역시 그곳에서 자게 되었습니다. 어제 그맘때쯤 하여서 노파가 말한 대로 마흔 명의 도깨비가 나타나서 화투를 하자거니 춤을 추자거니 졸랐습니다. 복남이는 오늘도 어제 모양으로 아주 거절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도깨비들은 어제보다 몇 곱절이나 더욱 복남이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복남이는 조금 겁이 났습니다. 도깨비들은 어제 모양으로 복남이를 죽이고 닭이 우는 소리를 좇아 어데로인지 자취를 숨겼습니다. 이튿날 아침에 노파가 돌아와서 죽어 넘어진 복남이를 약 먹여 살렸습니다. 그래서 복남이는 처음 모양으로 원기가 났습니다.
    “어땠었니? 잘 잤느냐?” 노파가 물었습니다.
    “네─. 잘 자고말고요.” 복남이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는 또 예순 명의 도깨비가 어제 모양으로 나타나서 복남이를 못살게 조르다가는 듣지 않는 데 화가 나서 또 죽여 넘기고 가고 말았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노파가 와서 복남이를 약 먹여 살리고 또 상한 곳에 고약膏藥까지 발라주었습니다. 그래서 복남이는 도로 원기元氣가 났습니다. 노파는 복남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저 신발과 두루막 그리고 모자를 빼앗은 연고로 이런 곤란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깨비 나라에는 임금이 죽고 아들이 없어서 대신 임금 노릇할 사람이 없는 중이란다. 내가 너를 도깨비 나라의 사위가 되게 하여주마. 조금만 있으면 어여쁜 왕녀王女가 올 것이니 그렇게 되면 너는 담박에 부자도 될 수 있으니 그것을 다 삼 형제에게 돌려주어라.”
    조금 있더니 꿈에도 못 보리만큼 어여쁜 왕녀 한 사람이 복남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어여쁜 왕녀는 복남이에게 인사를 하였습니다. 복남이는 이상하게도 생각을 하고는 창밖을 내어다보았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정들이 왔다 갔다 하고 그 밖에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큰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때 왕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버지는 이 나라의 임금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나라의 임금이 되어주셔요. 저기 보이는 성이 즉 아버지가 계시던 곳입니다. 자─ 그러면 같이 우리 집에 가시지요.”
    이렇게 말을 한 왕녀는 복남이에게 어여쁜 금반지 한 개를 주었습니다. 복남이는 왕녀와 같이 그 굴속을 나갔습니다. 그리하여 복남이는 어여쁜 왕녀와 함께 이 도깨비 나라 임금님이 살고 있던 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고향에 계신 늙은 부모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녀와 결혼을 할 때 모셔오도록 왕녀에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왕녀는
    “곧 모셔오도록 하셔요. 아주 쉽게 내가 드린 반지를 한 번만 돌리시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일 초 동안에 가시게 됩니다. 그 대신 길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이든지 마십시오. 말을 하시기만 하면 반지는 없어지고 그 다음부터는 길을 더 갈 수가 없으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복남이는 왕녀의 말하는 대로 손가락에 있는 반지를 한 번 돌리니까 한 걸음에 백 리, 이백 리씩 가게 되었습니다. 한 곳에를 가니까 그곳에는 한 사람의 공주를 가진 임금이 살고 있는 대궐이었습니다. 그 임금이 복남이를 보더니만 저의 공주를 주어 사위를 삼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복남이는 도깨비 나라의 공주를 생각하고는 그 사정 이야기를 모조리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아무렇지도 않던 금반지는 물같이 변하여 방울방울 땅에 떨어졌습니다. 복남이는 몹시도 섭섭하고 서러웠습니다. 이제는 도깨비 나라에도 갈 수 없고 또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 고향에도 갈 수 없구나 하고 한탄하면서 한 걸음 두 걸음 걷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가지고 있는 두루막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햇님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가서 도깨비 나라를 물으면 알리라’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햇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햇님은 집에 있지를2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해가 저물었을 때에 피곤한 몸을 끌고 돌아온 해를 보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햇님은 그런 곳을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곳을 밝혀주지 않으니까 모르나 달을 찾아보고 물으면 알 것이다.”라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은 그곳에서 자고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서 달나라를 찾아갔으나 달도 역시 집에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지기더러 하루를 묵고 달을 만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집지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달님이 돌아오도록 기다리려무나. 그러나 주인 되는 달은 몹시도 찬 사람이 되어서 네가 추울는지도 모르겠다.”
    말을 들은 복남이는
    “추워도 좋습니다. 내 두루막은 퍽 더운 것이니까”라고 대답을 하고는 달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밝은 때쯤 하여서 달은 집에 돌아왔으나 역시 모른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찾아가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복남이는 또 바람나라를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역시 바람은 집에 있지를 않아서 밤까지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어스름해서 바람은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누가 오지 않았나? 사람 내음새가 몹시도 나는걸.”
하고 집사람더러 물어보았습니다.
    “네─ 인간人間이 와 있습니다. 그래서 바람님더러 도깨비 나라를 알려달라고 말합니다”라고 집사람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웬만치 멀어야지! 나로도 그 나라를 가려면 여간 센 바람으로는 갈 수 없는데! 그러나 나는 어제 그 나라에를 갔다 왔는걸. 그때 마침 혼인 준비를 하느라고 그 나라 대궐에서 한참 분주하기로 좀 도와주고 왔는데.” 그러더니만 “그럼 내가 데려다주마. 그러나 네가 나를 쫓아오려면 퍽으나 힘이 들라.”하고 복남이를 보고는 걱정 비슷이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복남이는 바람에게
    “나에게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이 신발을 신으면 아무 근심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복남이는 모자를 쓰고 두루막을 입고 신발을 신고는 바람을 따라서 도깨비 나라의 길을 향하고 떠났습니다. 복남이는 바람보다도 늘 앞서갔습니다. 바람과 복남이는 도깨비 나라에 거진거진 가까웁게 왔습니다. 그래서 바람은 복남이를 데려다주고는 어데로인지 가버렸습니다.
    도깨비 나라에서는 그 동안 다른 사위를 구해서 결혼을 하고 모든 손님들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복남이는 그 손님들이 음식을 먹고 있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든지 복남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복남이는 왕녀가 앉아 있는 옆으로 가서 먹으려는 음식 숟가락이 입에 들어갈 때마다 자기 손으로 받아버리고 받아버리고 하였습니다.
    음식을 먹고 난 왕녀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의 그릇에는 음식이 한 그릇 잔뜩 담겨 있는 것을 보고 또 먹기도 다 했건마는 내 뱃속은 아무 것도 들어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또 나의 술잔에는 가득한 술이 담겨 있는 것을 보았으나 먹은 적도 없이 술이 없어졌으니 아마도 내 음식을 다른 사람이 먹은 모양 같아요.”
    이렇게 말을 한 왕녀는 부엌으로 무엇을 먹으러 갔습니다. 복남이는 왕녀의 뒤를 따라서 부엌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다 부엌에서 나갔을 때에 복남이는 모자를 벗고 왕녀 앞에 정체正體를 나타냈습니다. 그것을 본 왕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은 복남이가 무고히 돌아온 것이 무엇보다도 즐거웠던 것입니다.
    “복남 씨, 나는 당신에게 한 가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금반지를 잃어버리셨지요? 그래서 나는 은반지를 가진 신랑에게 시집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신이 잃어버리신 금반지를 찾았습니다. 나는 어떤 반지를 골라서 시집을 가야 옳을까요?”
라고 왕녀는 말했습니다.
    그때는 은반지3를 가지고 온 새 서방이 들어와서
    “금반지 가진 이에게 시집을 가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왕녀는 기쁨을 참지 못하여서 복남에게 좋은 옷을 입혀가지고 손님 있는 곳으로 가서
    “이 분이 정말 나의 남편 되는 사람이오. 이 분이 나를 퍽 사랑해주니까요. 이 분과는 벌써부터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저희 양친을 모시러 갔었습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실 줄 알고 은반지 가진 분에게 시집을 가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남편이 돌아오셨으니까 나는 불가불 이 분에게 시집을 안 갈 수 없습니다. 은반지를 가지신 분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복남이와 왕녀는 그 이튿날 굉장한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도깨비 나라에서 왕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멀리 계신 어머님과 아버님을 모셔다가 크고 큰 궁궐에 모셨습니다. 또 삼 형제를 찾아서 모자와 두루막, 또 신발을 내어주었습니다. 만일 복남이와 왕녀가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두 사람은 그 도깨비 나라 안에서 행복幸福을 누리고 살겠지요.

(《중외일보》, 1928년 4월 18일~24일(6회))
 

해변의 저녁

    1
    날개 큰 갈매기 강 위에 날고
    서산을 넘는 해 붉어 있는데
    어여차 노 저어 작은 배 한 척
    찍-걱 찍-걱 어데로 가노

    2
    까마귀 까-악 숲 속을 찾고
    참새 떼 짹-짹 깃을 찾는데
    산허리 둘리인 저녁 연기는
    어둠과 같이도 사라져 가네

    3
    얼레빗 초생달 기울어 있고
    해변에 바람은 쓸쓸도 한데
    아침에 떠났던 고기잡이배
    달빛을 싣고서 돌아를 오네

(《조선일보》, 1928년 4월 22일)
 

민요
떠나가신 님

    가는 봄날 저녁 바람 낙화된다 설워 마라
    한번 세상 떠나신 님 다시 올 줄 모르시네

    피는 꽃은 철을 따라 봄이 오면 다시 피되
    한번 세상 떠나신 님 다시 올 줄 모르시네

    막교지상 꾀꼬리야 마디마디 우지 마라
    네 아모리 금수라도 인정인들 모르는가

    물과 같이 세월 흘러 님 여읜 지 삼년이라
    자나깨나 깨나자나 꿈에조차 못 잊겠네

    만 가지 꽃 천 포기 풀 해해마다 싹트건만
    떨어지는 오얏꽃을 따라가신 우리 님은

    한해 두해 지나가서 삼 년이나 되었건만
    님도 또한 ×××라 다시 올 줄 모르시네.

─무진 4월 고 순종 3주기를 맞이하면서
(《중외일보》, 1928년 4월 28일)
 

농촌의 하루

    아침
    꼬끼요 홰를 치고 첫 닭이 우니
    외양간 소 방울도 달랑거리고
    대문 밖 삽살개가 컹컹 짖으니
    어둡던 새벽 하늘 밝아를 오네
×
    할애비 마당 쓸고 닭 모이 주면
    할머니 방을 치고 애기 달래면
    애비네 여물 썰어 소죽을 쑤면
    에미네 물 길어다 조반을 짓네

    
    아들은 천자 끼고 서당에 가면
    어린 딸 뒷산으로 나물을 가고
    소 내어 나무 그늘 풀밭에 매면
    김 매러 애비네는 들로 나가네
×
    할머니 날기 멍석 새를 쫓구요
    사랑엔 할아버지 신발을 삼네
    겉보리 물 추겨서 방아를 찧면
    어느덧 점심 때가 되어를 오네

    저녁
    더운 해 서편으로 기울어지니
    산그늘 나무그늘 거름을 걷고
    낫 갈아 살진 풀을 베이어다가
    올겨울 소먹이를 장만한다네
×
    온종일 흘린 땀을 샘 찾아 씻고
    곡산초 담배 한 대 위안을 얻네
    서늘한 바람 부는 저녁에는요
    옛─날 이야기로 밤을 보내네

(《중외일보》, 1928년 4월 30일)
 

병중음病中吟

    엊그제 성턴 몸에
우연히 병이 드니
    게으르던 성턴 때가
이제 다시 뉘우치네
    내 병이 낫기 곧 하면
힘써 일해 보리라.
×
    하늘이 나로 하여
병나게 하시온 것
    아마도 그 무엇을
훈계하심인가 하네
    사람이 돌 아니어든
어찌 그를 모르리
×
    오늘도 하루 해 다
서산을 넘어가니
    청춘의 붉은 피도
병들어 시들은 마음
더욱 설워하노라.

1928년 7월 27일
강화 전등사 아래에서
(《중외일보》, 1928년 8월 8일)
 

소곡小曲3편
  ─고시체古詩體를 본받아서

    삼랑성三郞城
    옛 성을 찾아드니 회고도 많을시고
    삼랑三郞郎의 그 자취는 의구히 남았건만
    어찌타 이 성에는 마른 풀만 남았고야

    정족산鼎足山
    심도沁都의 흥망사를 너는 정정 알려니와
    천고에 다문 입에 물어볼 곳 바이 없네
    추풍만 독소소獨蕭蕭하니 애끊는 듯하여라

    참성塹城
    성현의 옛 자최를 석양만 비치노라
    어린 풀 시들은들 찾는 이 몇몇이냐
    고객孤客이 독배회獨徘徊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조선일보》, 1929년 10월 13일)
  
  

윤진현

문학박사.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저서 『조선 시민극의 구상과 탈계몽의 미학』, 공저 『전쟁과 극장』 『정본 노작 홍사용 전집 2』가 있음.

  
  

〈주석〉

  1. 원문에는 ‘열둘’
  2. 원문은 ‘갓지를’
  3. 원문에는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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