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사람과 책 쓰는 사람, 그리고 책 만드는 사람들의 잔치를 망친 사람은 누구인가

  

    김일성이 죽었다.
    너무 비현실적인 기분이 들었다. 북한 주민에게 신과 같이 추앙받던, 남한에선 그 유명한 『똘이 장군』 만화에서 돼지의 모습을 한 괴수로 표현되던, 나뭇잎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고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더라는 이야기 따위는 믿지도 않았지만 왠지 죽지 않고 영원히 북한을 통치할 것 같던 독재자가 죽었다.
    “호외요! 호외요!”
    만화책이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 청년이 서울 지하철 1호선에서 호외를 뿌리고 있었다. 공중에 뿌려져 바닥에 떨어지고 있던 호외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으로 다섯 글자가 커다랗게 박혀 있었다.
    “김일성 사망.”
    이게 내가 기억하는 서울국제도서전의 첫 이미지다. 회고를 하며 찾아보니 그때는 ‘국제’가 아닌 그냥 서울도서전이었다고 한다. 서울도서전이 서울국제도서전으로 바뀐 것은 그다음 해인 1995년이다.
    김일성이 죽던 해,1 폭력 교사 문제와 학생 자치권 문제 등으로 고등학교에서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정학을 맞고 자퇴한 나는 대입 검정고시를 준비하러 서울로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날이 휴일이었는지, 오랜만에 머리를 식힐 겸 학원을 빼먹고 나들이를 하려고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서울도서전이라는 행사가 있고 여러 출판사들이 모여서 책도 전시하고 무료로 책을 나눠준다고 하기에 전철을 타고 코엑스 전시관으로 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서울국제도서전을 떠올리면 그날 전철 안에서 받았던 호외 한 장과 새카맣고 커다랗던 활자가 떠오른다.
    처음 가본 도서전은 무척 재미있었다. 대형 서점이 잘 정돈된 백화점이나 마트의 느낌이라면, 도서전은 흘러 다니는 사람들의 물결 속에서 저마다 자신들의 물건을 뽐내느라 목소리를 높이는 시장이나 장터 같았다. 출판사나 책의 홍보를 위해 여기저기서 메모지, 연필, 노트 등 각종 굿즈를 선물로 줬고 무료로 책을 나누어주는 출판사도 있었다.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내 양손의 쇼핑백에는 구입한 책과 선물 꾸러미가 가득 찼다.

    매해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리면 빠짐없이 가려고 노력한다. 가서 넓고 넓은 전시장에 빼곡히 쌓여 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다가 돌아오면 그 책들을 다 읽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국제도서전을 가득 메우고 뜨거운 열기로 전시장을 데우며 책을 구경하고 책을 사기 위해 물결처럼 굽이치는 모습을 보면 20년 전쯤에 떠돌던, 곧 전자책이 상용화되고 종이책 시장은 사라지게 될 거라는 말들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주머니가 얄팍하여 맘에 드는 책들을 모두 구매해서 들고 오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매번 형편을 넘어서게 책을 사들고는 책 무게만큼이나 무거운 다음 달 카드 결제의 중압감에 낑낑대면서 돌아온다. 그래도 행복한 것은, 그럼에도 매년 서울국제도서전을 찾는 이유는 광고 사진이나 영상이 아니라 실재하는 책을 직접 가서 보고 하나하나 만져볼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책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실제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어릴 적 가난한 부모로부터 내가 받은 가장 큰 유산은 독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사랑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일찍이 사업에 실패하시어 평생을 혼자 일곱 식구, 시부모와 삼 남매를 요쿠르트 배달로 벌어먹이시며 집안을 건사하느라 늘 돈에 시달리셨으나 책을 사달라는 요청만큼은 한 번도 거절을 안 하셨다. 그 덕분으로 내게도 책에 대한 종교적이라 할 만큼의 절대적 애정이 자리 잡았으며 읽는 즐거움은 물론이거니와 읽지 않고 쌓아두기만 하여도 배가 부르고 공부를 다 한 듯 마음이 든든하였다. 그러니 매해 서울국제도서전에 가서 책을 매만지고 쓰다듬고 오는 것이 하나의 상례가 아니 될 수 없었다.
    올해도 날짜를 고르고 티켓팅을 하고 손을 꼽으며 서울국제도서전을 기다렸다. 행사는 수·목·금·토·일 닷새간 예정이 되어 있었고, 직장이 마침 쉬는 날이라 금요일에 서울국제도서전에 갈 생각이었는데 개막일인 수요일에 충격적인 소식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첫째, 학생 때 늘 좋아하고 선망하던 오정희 소설가가 박근혜 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을 뒤늦게 듣고 놀랐고, 둘째, 그 오정희 소설가가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의 홍보대사에 위촉되었다는 사실에 또 놀라고, 셋째, 그 사실에 항의하기 위해 작가들이 행사장 근처에서 피켓 시위를 했는데, 시위 종료 후 행사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제지당하고 결국 강제로 끌려 나갔다는 사실에 다시 충격을 받았다. 그날 저녁부터 SNS에는 서울국제도서전을 보이콧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쏟아졌다. 황정은 소설가, 오은 시인을 시작으로 행사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던 작가들이 하나둘 불참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이번 2023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제가 “비인간, 인간을 넘어 인간으로”인데 동료 작가가 행사장 밖으로 강제로 끌려 나가는 상황에서 인간과 비인간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순 없다는 것이다.
    당시 사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블랙리스트 사건만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울국제도서전 첫날, 김건희 여사의 축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대통령 경호처에서 김건희 여사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대통령경호법을 근거로 송경동 시인을 행사장 밖으로 끌어냈다. 송경동 시인이 위험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위험한 물건을 들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소리를 지르며 축사를 방해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행사장 바깥에서 피켓 시위를 한 후 아무 구호 외침도 없이 행사장으로 들어가는데, 일시에 수십 명의 경호원들이 시인을 둘러싸고 강제로 퇴거시켰다. 작가는 독자, 출판인과 함께 서울국제도서전의 주체이다. 이들의 잔치에 초청된 외부인이 행사의 주체를 내쫓은 것이다. 김건희 여사의 경호 안전이 그렇게 걱정되면 축사를 안 하면 될 일이요, 꼭 그렇게 축사를 하고 싶다면 총칼로 무장을 한 것도 아닌 맨손의 시인이 두려워 행사장에서 시인을 강제로 내쫓는 일을 벌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 경호처의 행동이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를 떠나서 반대 의견이 생기면 토론이나 합의가 아닌 삭제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윤석열 정부의 나쁜 습관이 이 사건뿐 아니라 다른 모든 분야에 걸쳐 일어난다는 것이다. 얼마 전 뉴스 기사에 오르내리던 마포구청 도서관 문제와 용산어린이정원 문제가 떠오른다. 서울 마포구에서 도서관 예산 삭감안에 반대 의견을 게시한 마포중앙도서관장을 파면시킨 사건이라든지, 용산어린이정원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색칠 놀이에 대통령 부부의 사진을 바탕으로 한 그림을 제공한 것에 문제를 제기한 시민들을 출입 금지시켜버린다든지 하는 일들 말이다. 중앙 정부의 행태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이런 소식들이 들려오니 서울국제도서전에 가서 실컷 책 구경을 하고 맘껏 놀겠다고 진작부터 채비하던 마음이 시무룩해졌다. 그리고 화가 났다. 책 읽는 사람들과 책 쓰는 사람들, 그리고 책 만드는 사람들의 잔치를 엉뚱한 사람들이 와서 망쳐버린 것이다.
    행사 참여작가들에 이어 행사를 즐기려던 독자 관람객들의 불참 선언도 SNS에서 줄을 이었다. 그리고 미처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하고 다음 날 서울국제도서전을 관람했던 관람객들과 전날의 일을 알지 못하고 행사에 참여했던 작가와 시민들이 자신의 참여 사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불쾌함, 분노, 부끄러움 등을 인터넷 공간에 토로하였다. 죄없이 부끄러운 사람들이 늘어나고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들은 침묵을 지키고 자신의 명예만을 생각한다. 그 침묵이 자신의 명예를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 자신만 모르는 것 같다. 정작 이 사건에서 부끄러워해야 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문화예술인들을 이념에 따라 나누어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배제하라고 지시한 사람, 그리고 그것을 주도한 사람, 그 지시를 수행한 사람, 그 수행을 방관하고 방조한 사람, 잘못된 줄 알면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 그것을 총괄하는 위치에서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 뒤늦게 밝혀져도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는 사람, 사건의 진실을 모두 밝혀야 재발을 방지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진실을 말하지 않고 침묵하는 사람, 그들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
    나 또한 서울국제도서전의 관람을 두고 고민을 많이 하였다. 개막일에 일어난 폭력적인 사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보이콧의 대열에 동참하여야 하나, 아니면 그냥 참여해도 될까. 국가에서, 정부 기관에서 사상의 문제만을 가지고 사상이 의심되는 예술인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그들을 배제하는 정책을 펼치고 퇴출시키려는 공작을 했다는 것이 블랙리스트 사건의 본질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벌이는 기관에서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았던 사람이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의 홍보대사를 맡았다. 아무 일이 없다는 듯이 예년처럼 도서전을 즐기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문제를 항의했던 시인이 행사장 밖에서의 시위를 마치고 그저 행사장에 들어갔을 뿐인데 김건희 여사의 축사에 방해가 예상된다고 강제로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런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내 즐거운 일만 찾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너무 아쉽고 안타깝지만 이번 서울국제도서전은 불참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금세 다시 고민이 생겼다. 매해 서울국제도서전을 가봤지만 거기에는 수많은 참가자들이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서 행사에 참여한다. 대형 출판사의 커다란 기획과 준비도 기대되는 볼거리지만 작은 출판사, 작은 책방, 1인 출판사 작가들의 열정과 정성과 준비는 매번 볼 때마다 감동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작년 아트 북페어에서도 만나고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도 다시 만난 스파이 소설을 쓰는 작가는 1인 독립 출판으로 책을 만들어 가지고 왔는데 스파이물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고전적인 스파이 영화에 등장할 법한 가방에 책들을 담아서 여러 스파이 소품들과 함께 부스 테이블에 전시하고 있었다. 직접 그린 아기자기한 굿즈 스티커를 제작한 작가도 있었고, 고양이와 관련된 책만을 파는 귀여운 고양이 부스도, 오리와 관련된 책만을 파는 오리 부스도 있었다. 직접 캐리커처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동네 책방도 있었고 단어를 말하면 그 단어로 즉석에서 시를 타자기로 쳐주는 시인도 있었다. 그 모든 부스에서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책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과 정성을 모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어떻게 서울국제도서전을 보이콧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책을 사랑하는 애꿎은 독자와 작가와 출판인들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과거 정부의 문화예술계 길들이기와 블랙리스트 사건을 통해 교훈을 얻었어야 하지만 전혀 성찰 없이 과오를 아니, 범죄를 답습하여 문화예술계를 정권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려는 윤석열 정부의 잘못이고,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 인물을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로 세우고, 사전에 문화예술계의 문제 제기를 인지했음에도 홍보대사 임명을 밀어붙인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잘못이며, 끝내 진실을 밝히지도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사과도 하지 않는 전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 직무대행의 잘못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책임을 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홍보위원으로 오정희 작가를 위촉한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서로 떠넘기기만 하고 밝혀지지 않았다.
    고민 끝에 문제 제기는 문제 제기대로 도서전 관람은 도서전 관람대로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한 개인의 문제 제기와 마음먹음이 무슨 그리 큰 영향을 미치리오마는 나 같은 한 사람의 도서전 관람객이 모여 10만 명 20만 명의 관람객이 되듯이 한 명의 문제 제기가 모여 여론이 되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는 출발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서울국제도서전을 불참하기로 한 작가들의, 독자들의 마음 또한 너무 잘 알 것 같다. 거대 집단, 정부나 대기업에 대한 한 개인의 거의 유일한 대응 방식은 보이콧이다. 물론 개인으로 법적 소송을 하거나 집단 소송 등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이 접근하기에 쉬운 방식이 아니므로 일단 논외로 한다면 말이다. 향유자나 소비자의 보이콧은 일견 문제에 대한 정면 대응에서 비켜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매우 적극적인 대응 방식이자 저항 방식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사회문제에 대한 보이콧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무도한 권력에 기대어 민의를 교란하고 왜곡 보도를 일삼던 조·중·동 신문에 대한 불매 운동, 사내 성폭력 문제를 무마하려 했던 한샘가구 인테리어에 대한 불매 운동, 분유를 만드는 회사가 여성 정규직 사원이 결혼을 하면 그 직원을 비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임신을 하면 해고하는 만행을 저질러 공분을 샀던 남양유업에 대한 불매 운동, 그리고 빵 공장에서 끼임 사고로 노동자들이 죽어도 돈을 벌기 위해 기계 가동에만 급급했던 SPC 그룹에 대한 불매 운동, 열악한 물류창고 근무환경에서 노동자가 계속 죽어 나가던 쿠팡에 대한 불매 운동 등 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불매 운동을 해왔고 하고 있다.
    때론 힘없어 보이거나 직접적인 시위와 항의보다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불매 운동의 대상이 되었던 많은 회사들이 주가가 폭락하고 매출이 급감하고 기업의 대표가 형식적으로나마 사과를 하게 만드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불매 운동이나 보이콧 또한 나는 지지하고 응원한다. 다만 이런 과정에서 상처받고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우리 모두가 주위를 살피고 같이 손을 잡아야 한다. 어느 한쪽을 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콧이든 다른 방식의 문제 제기든 다 서로 힘을 모으고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

    기대감 반, 무거운 마음 반을 가지고 서울국제도서전을 관람하였다. 여전히 수많은 책 사이를 오가며 책을 쓰다듬는 일은 행복한 일이었다. 아름다운 책과 책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 누군가 예쁘게 접힌 홍보물을 하나 주길래 받아들고 부채질을 하다가 문득 뭔가 해서 펴보니 전국언론노동조합 산하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 출판노동유니온에서 만든 소식지였다.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나는 주위 선배들 동기들 후배들에게서 종종 출판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매우 낮은 급여, 손쉬운 징계와 해고, 잦은 야근과 수당 미지급 등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홍보물의 내용은 출판계의 그런 현실에 대한 이야기와 출판 노동자의 권리 찾기, 출판사별 노조 결성 현황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출판 노조의 활동이 활발해져서 출판계의 노동환경이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에 홍보물을 소중히 챙겼다. 영화계나 출판계처럼 다루는 매체 자체의 매력이 클수록 노동환경 개선이 더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노동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노동자들이 더 오래 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출판 노동자들이 갖는 책에 대한 애정에 기대어 일정 부분이 유지되게 만드는 것 말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과 대한출판문화협회의 주관으로 운영된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각 출판사 대표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서울국제도서전의 재정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원하는 10억 원 규모의 국고보조금과 3천만 원 정도의 대한출판문화협회의 부담으로 운영된다고 알려졌다. 서울국제도서전이 한쪽으로 치우친 운영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재정적으로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중립적이고 공정한 운영을 보장하지 못하면 이런 파행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도서전이니만큼 한쪽에 치우치는, 혹은 정부의 방향성에 영향을 받는 일이 없도록 문화체육관광부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서울국제도서전은 이미 출판사와 출판 노동자, 작가, 독자들이 모두 구성원으로 참여하여 만들어내고 있는 행사이다. 출판 노동자 개인으로는 출판사와 정부 기관에 제대로 된 대응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출판 노조의 활동이 활성화되고 노조 가입자가 늘어나서, 출판계의 큰 행사 중의 하나인 서울국제도서전이 출판사뿐만 아니라 출판 노동자, 출판 노조가 하나의 큰 축으로 같이 행사를 꾸려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출판 노조의 견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면 이번 홍보대사 논란 같은 사건을 사전에 걸러내고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문화체육관광부는 자신들의 재정 지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깨닫고 시혜적이거나 고압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국고보조금은 국민의 세금으로 마련되는 것이므로 정부나 문화체육관광부가 자신의 돈을 쓰듯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과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지 말고 국민의 눈높이에서 국민의 입장과 마음으로 서울국제도서전을 포함한 문화예술계의 행사를 도와야 한다.

    다시 블랙리스트 사건과 홍보위원 논란으로 돌아와 이야기를 더 해보자. 오정희 작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누군가는 오정희 작가가 적극 가담하였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적극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알면서도 묵인·방조하였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오정희 작가는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오정희 작가는 박근혜 정부 시절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이자 위원장 직무대행이었다. 당시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사업’, ‘우수문예발간지원 사업’, ‘주목할만한 작가상 사업’ 등을 진행하는 데 있어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블랙리스트 작성 및 배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심의 과정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심의위원들에게 압력을 행사하고 블랙리스트에 적힌 작가들에 대해 배제를 요구했다고 한다. 다행히, 아니 당연히 심의위원들은 모두 도장찍기를 거부하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모두 인터넷에서 검색을 몇 번 하면 여러 언론사의 기사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공개한 블랙리스트 사건 백서에 따르면 오정희 위원장 직무대행은 심의위원들에게 블랙리스트 배제 문제를 논의하자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심의위원 중에는 오정희 작가의 설득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논란은 아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 오정희 작가와 당시의 심의위원들이 관련 사항을 자세히 밝히면 된다. 특히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오정희 작가가 직접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오정희 작가는 침묵으로 진실을 덮고 있다. 덮고 싶은 진실은 무엇일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그렇게 블랙리스트 명단을 작성하고 심의위원들을 찾아다니며 종용하고 하는 동안 그 위원회 위원이자 위원장 직무대행이었던 오정희 작가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는 만무하고, 적극적으로 사건을 주도하였는지 암묵적 동조를 하였는지는 결국 차차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어느 쪽이어도 비판을 받아야 한다. 백번 양보하여 설혹 당시 그런 일들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몰랐다고 하더라도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위원장 직무대행은 위원장이나 다름없다. 한 단체의 대표라는 자리는 모든 행사되는 일들을 책임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자존심과 명예가 있다면 그것은 국가의 폭력과 잘못을 가리는 침묵함에 있지 않고 진실을 밝히는 용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허물일지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오정희 사태”라고 불리는 것에는 반대한다. 한 사람을 악마화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사건의 본질은 국가에 의한 문화예술계에 대한 검열과 폭력이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홍보대사가 모두 여성 작가인 것에 대해서도 오정희 작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곁들여서 이야기되는 것을 보았다. 남성 작가들이 주류였을 때에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다가 그 반대가 되자 문제적이라고 생각하는 선택적 문제의식은 편협한 사고이다. 그런 헛발질은 블랙리스트 사건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최근 이명박 정권 시절 청와대 대변인과 청와대 홍보수석 비서관, 대통령 언론특별보좌관 등을 두루 거치며 언론 장악을 시도하고 언론사에 보도 지침을 내려보내고 국정원을 동원하여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이동관 전 특보가 윤석열 정부의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으로 내정되었다(2023년 8월 15일 기준). 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블랙리스트 문제로 서울국제도서전이 파행을 겪은 지 한 달만의 일이다. 이동관 전 특보는 권력을 등에 업고 언론을 길들이는 일에 매우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이다. MBC·KBS·YTN 등의 언론사의 경영진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교체하는 방안을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시행하였으며,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 보도가 나오면 문제 보도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시정 지침을 내려보내 압력을 행사하였다. 정권에 우호적인 기사를 쓰는 언론인이 있으면 「VIP 전화 격려대상 언론인」이라는 듣기도 민망한 문건을 작성하여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다. 당시에 작성된 언론 장악을 위한 수많은 문건과 블랙리스트 관리 문건에 이동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저 관례상 서류에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일 뿐 관련 내용을 보고 받은 바가 없다는, 무책임하고 말도 안 되는 해명을 하였다. 그런 인물이 다시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이 된다고 하니 윤석열 정부가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를 이어 유구히 내려오는 블랙리스트의 역사를 계승하려는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럼 이동관 전 특보가 국정원을 동원하여 언론 장악을 시도하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할 때, 주무 부처였던 문화체육관광부의 장관은 누구였는가? 바로 유인촌 전 장관이다. 그는 이번에 윤석열 정부의 대통령 문화체육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역사의 시계가 다시 거꾸로 흐르고 있다. 역사가 발전하지 않고 거꾸로 흐르는 것은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청산할 것을 제대로 청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의 축제였던 서울국제도서전을 엉망으로 만든 블랙리스트 사건이 유야무야 넘어가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미 당시의 책임을 제대로 지고 처벌을 받았어야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된 심판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이런 일들이 생긴 것이며 이제 우리가 이 일들을 제대로 정리하고 처리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게 된다면 그런 일들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문화예술인들을 이념적으로 구분 짓고 권력에 비판적인 인물은 배제하고 압력을 가하여 문화예술인들 스스로가 권력의 눈치를 보고 권력에 굴종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서울국제도서전 블랙리스트 사건의 본질이다.

    벌써부터 서울국제도서전을 주관하는 대한출판문화협회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감히 김건희 여사가 축사를 하는데 훼방질을 해? 이놈들 맛 좀 봐라 식의 수사는 아닌지 의심이 생긴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일을 수없이 경험했다. 용산 대통령 사무실로 출근하면서 하나 마나 한 브리핑을 하다가 언론에서 비판적인 기사들이 많이 나오자 그렇게 국민과의 소통이라고 자랑해대던 출근 브리핑 자체를 없애버렸다. 국익과 직결된 중요한 외교 무대에서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냐”고 모두의 귀에 쏙 들리게 동맹국 (자신이 그렇게 강조하던 한미 공조) 대통령 험담을 하더니 하루아침에 “바이든”이 “날리면”이라고 말도 안 되는 낯부끄러운 거짓말을 하고, 문제 제기하는 언론사는 대통령 전용기 동행을 금지시켰다. 또 양평고속도로의 종점이 김건희 여사 집안의 땅 근처로 내정됐다는 사실에 상식적인 문제 제기를 하자 양평고속도로 건설 자체를 백지화하여 문제 제기 자체를 차단하려 하는 윤석열 정부는 이번에도 논란이 있으면 사건 자체를 지워버린다는 기조를 세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된다.
    예전에 〈넘버 쓰리〉라는 영화에서 송강호가 연기하던 캐릭터가 떠오른다. “내 말에 토 다는 XX는 전부 배반형이야 배반형!”이라고 외치면서 집 안의 물건을 다 때려 부수고 난장판을 만들던 그 장면 말이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나라가 난장판이다. 벽에다 대고 욕이라도 해야 한다.
  
  

이원석

202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엔딩과 랜딩』, 공저 『먹고 살고 글쓰고』가 있음.

  
  

〈주석〉

  1. 천용성의 노래 〈김일성이 죽던 해〉를 들으며 읽으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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