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문학 텍스트인 동시

    

1. ‘『말놀이 동시집』 이후 동시’의 재해석

    『말놀이 동시집』의 출현

    2005년 출간된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 시리즈(비룡소, 2005〜2010: 개정판 2020) 이후 우리 동시가 완전히 달라졌으며 지금까지 그 흐름이 이어진다는 건 동시에 관심 있는 누구나 동의하는 사실이다. 이를 처음 담론장에 제시한 김이구의 평론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는 “동시단이 몇몇 동시인들의 고투에도 불구하고 해묵은 동시를 시원스럽게 던져 버리는 시적 전환을 보여 주거나 독자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외부 세력’의 의미 있는 도전이 잇따르고 있다.”(『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 231〜232쪽)고 하며 『말놀이 동시집』을 첫손에 꼽는다. 이어 『말놀이 동시집』의 문학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놀이’는 동시의 주요한 구성요소로 동시인들도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말놀이 동시집』처럼 한가지로 말놀이에 집중한 경우는 없었던 듯하다. (중략) 말놀이 동시는 일반 동시의 구성원리와 달리 음운의 반복, 소리와 의미 등 다양한 차원의 연상작용을 구사해 씌어진다. 따라서 가락을 타는 단위 소리의 반복과 반복 속의 변화, 일상을 따라잡고 뒤집어 엎는 연상력과 상상력의 비약, 파격적인 난센스 같은 것들이 시의 재미와 성패를 좌우하는데 (후략)

―김이구,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 창비, 2014, 232쪽.

    오늘날 동시가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라는 데 동의한다면 『말놀이 동시집』에 대한 이 같은 텍스트 분석은 더욱 정치하게 거듭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말놀이 동시집』이 오늘날 동시의 분기점으로 끊임없이 회자되는 데 비해 정작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라는 텍스트의 특징과 의미에 대해서는 위 인용문 이상 정밀한 분석으로 나아가지 않는 듯 보인다. 지금까지는 『말놀이 동시집』이라는 텍스트 자체보다는 이 텍스트가 동시 장르의 텍스트 내·외부에 불러일으킨 영향력이 더욱 주목됐다. 즉 『말놀이 동시집』의 성공으로 어른 독자 대상의 시를 쓰던 시인들의 동시 창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이들 작품이 동시 장르에 새로운 형식과 상상력을 보여주었으며, 동시집과 동시전문잡지 출간 그리고 문학상 제정 등 장르의 토대가 확장됐다는 점이 조명되어왔다.

    『말놀이 동시집』의 문학적 의의에 대한 평가

    『창비어린이』 창간 20주년 기념호에 실린 아래의 글들 역시 『말놀이 동시집』을 오늘날 동시의 분기점으로 삼으며 지난 20년간 동시 장르의 지형도를 그리고 있다. 『말놀이 동시집』이 텍스트 외부에 미친 영향에 대한 위와 같은 평가와 아울러 문학적 의의를 간략히 확인한다. 먼저 김제곤의 「새로운 말과 어린이를 찾아서」는 말놀이 동시가 새로운 동시를 기다리던 독자들에게 새로운 어린이관과 형식을 선보였다고 거듭 확인한다. “따분한 교훈주의나 천편일률적인 동시의 말법에 식상해하던 독자들은 새로운 어린이관과 말법에 입각한 새로운 시를 갈망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최승호는 그러한 시대의 주파수를 잘 읽어 낸 첫 주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말놀이 동시로 인해 기존의 동시에 내재되어 있던 진지함과 엄숙주의에는 일종의 균열이 가해졌다.”(『창비어린이』 2023년 봄호, 20〜21쪽.)
    이안의 「초대와 환대의 동시-판을 위하여」의 평가 또한 유사하다. “최승호의 이 작업은 『시정신과 유희정신』 이래 비대해진 의미와 주제의 무게만큼 언어 자체와 어조, 이미지, 리듬, 무의미, 난센스, 동시의 주체이자 독자로서의 어린이, 언어유희, 구조 등 동시를 이루는 기본 요소를 실험하고 되살리고 재구조화함으로써 시정신과 유희정신 사이의 균형을 이루려는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 동시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큰 기획이자 모험이었으며 『시정신과 유희정신』에 창작물로 맞서는 두툼한 반론이었다.”(『창비어린이』 2023년 봄호, 37쪽.)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우선 인용문에서 언급된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창비, 1977)의 이해를 위해 부언하자면 이오덕의 ‘시정신’이란 동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 가져야 할 “시인으로서의 자각과 특질, 곧 높은 지성을 밑받침으로 한 시정신”(177쪽)이라고 정의된다. 그는 “한국의 동시는 거의 대부분이 이러한 참된 시정신의 산물이 아닌 것 같다.”(같은 쪽)고 비판했다. “아이들을 인형으로 위안물로 여기는 어른 중심의 개인주의적이고 향락주의적인 유희정신으로 작품을 매만지고”(191쪽) 있다는 것이다. 동시가 “아동을 위해서 쓴 시인의 시라기보다 어린애들을 상대로 한 어른의 유희적인 취미물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즉 이오덕이 말하는 유희정신은 시정신과 대척점에 있는, 비판과 부정과 극복의 대상이다. 흔히 일상적으로 유희라는 단어가 놀이나 재미의 의미로 사용되는 바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이오덕 리얼리즘 아동문학론의 핵심인 ‘시정신과 유희정신’을 언급하거나 재평가하려면 그가 사용한 두 용어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가 비판한 ‘유희정신’은 어린이를 함부로 대상화하거나 종속화하며 동시를 창작하는 어른 작가의 태도이지, 어린이 독자가 동시에서 향유하는 즐거움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의 아동문학론에 대해 즐거움이라는 문학의 효용을 간과했다고 평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가 고유하게 사용한 용어인 ‘유희정신’을 어떠한 설명 없이 재인용하며 문학의 즐거움, 재미, 놀이의 의미로 사용한다면 오독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다분하다.
    다시 글의 흐름으로 돌아가 위의 두 글을 종합하자면 『말놀이 동시집』은 주제 외에 시의 여러 요소를 의도적으로 전면화함으로써 동시의 어린이관과 형식에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이오덕의 리얼리즘 아동문학론으로 대표되는 기존 동시의 주제 의식 강조와 그로 인한 엄숙주의에서 벗어났으며 이것이 이후 동시 장르 전반으로 확장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말놀이 동시’라는 명칭에서 가장 먼저, 가장 손쉽게 상기할 수 있는바 동시의 놀이와 재미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말놀이 동시집』의 재해석

    그런데 지난 20년간 동시 담론에서 간과되어온 점은 놀이와 재미가 말놀이 동시의 효과이지 말놀이 동시의 창작 원리나 태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김이구, 김제곤, 이안의 글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말놀이 동시집』의 말놀이는 단지 시작법의 하나인 ‘언어유희pun’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말놀이 동시집』의 핵심은 ‘언어유희’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에 있다. 『말놀이 동시집』은 언어의 ‘의미’에 집중한 기존 동시와 달리 ‘소리’를 구성 원리로 삼아 동시의 미학을 전환시켰다. 음운을 반복하고 동음이의어를 활용하여 ‘소리’에서 ‘의미’를 발생시키고, ‘소리’와 ‘의미’를 낯선 방식으로 결합시키면서 새로운 감수성과 상상력을 선보였다. 따라서 재미, 유머, 의미의 전복 등은 새로운 시선으로 언어에 접근하며 발생한 결과이자 효과이다.
    하지만 2000년대 동시 담론에서는 이를 구분하고 규명하기보다 『말놀이 동시집』의 효과가 미친 영향력을 되풀이했고 『말놀이 동시집』의 근본 의의와 성과를 편향되게 평가했다. 오래도록 뿌리박힌 동시 담론의 이분법적 구도─내용과 형식, 의미와 재미, 교훈과 놀이, 어른 작가와 어린이 독자─는 『말놀이 동시집』에서 형식, 재미, 놀이, 어린이 독자의 요소만을 부각시켜 보게 했다. 이분법적 구도의 한쪽 측면에만 평가 우위가 두어졌고 그 상황은 지금까지 여전하다. 그 결과 『말놀이 동시집』의 창작 원리와 태도가 아니라 결과와 효과가 부유했다.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들이 말놀이를 비롯한 유머, 의미 전복이 발생하는 시적 구성과 전개, 대화체, 문자와 기호를 이용한 형태시 등 다양한 창작 기법과 표현으로 창작됐다 하더라도 표층 텍스트의 추수만이 아니라 창작 원리나 태도까지 공유했는지는 되돌아볼 일이다.
    

2. 동시의 언어

    『말놀이 동시집』이 전환한 기표와 기의

    ‘언어’ 자체를 집중적으로 탐색한 『말놀이 동시집』의 창작 지향과 실천은 동시에서는 낯설지 몰라도 사실 현대시가 창작되는 근본 자리다.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이래 언어는 작가의 사상과 감정을 담아 전달하는 수단에서 나아가 독립적인 체계를 지닌 기호로 사유되고 있다. 언어라는 기호는 기표(시니피앙)와 기의(시니피에)의 결합, 즉 ‘청각 이미지’와 ‘개념’의 대칭적이고 상호의존적이고 자의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론을 오늘날 언어와 문학 텍스트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공유한다.
    『말놀이 동시집』은 바로 여기에 자리한다. 기표와 기의를 분리하고, 동시 창작 원리를 기의가 아닌 기표로 전환한 것이다. 거듭 말하건대 현대시에서는 새로운 것 없는 언어학 이론과 문학 창작 원리라고 하더라도 2000년대 동시에서 이를 전면에 내세운 건 전혀 새로운 접근이었다. 예를 들어 “도룡뇽/ 레롱뇽/ 미롱뇽/ 파롱뇽”(「도룡뇽」)이라든지, “왜 가/ 왜가리가 왜 가/ 물고기가 많은데 왜 가”(「왜가리」)라는 말놀이는 기표의 인접성에서 출발해 기의의 유사성으로 나아간다. 도롱뇽이 레롱뇽, 미롱뇽, 파롱뇽으로 결합되는 원리는 파충류의 한 종류인 기의와는 상관없이 첫음절 ‘도’라는 기표의 청각 이미지가 ‘도레미파솔라시도’의 7음계로 이어지는 데 있기 때문이다. 기의의 유사성이 전혀 없는 ‘왜가리’와 ‘왜 가’의 결합 또한 기표의 동일성에 있다. 청각 이미지의 동일성에서 발생한 ‘왜가리’와 ‘왜 가’의 결합으로부터 “물고기가 많은데 왜 가”라는 의미가 생산된다. 로만 야콥슨 언어학의 은유와 환유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은유가 지닌 ‘선택의 원리’가 아닌 환유가 지닌 ‘결합의 원리’가 우선하는 것이다. 『말놀이 동시집』은 기표들의 결합으로 구성된 언어가 새로운 의미와 감수성을 찾아낸 지점을 보여주는 동시 창작의 사례이다.
    바로 이 점이 기존 동시와 전혀 다른 창작 원리이자 태도이다. 『말놀이 동시집』 이전의 동시가 유독 주제와 내용만을 강조했다는 비판적 평가는 현대 문학 이론에 근거해 말하자면 기표와 기의의 결합인 언어에서 기표가 소외되고 기의가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존 동시에서는 은유가 환유에 앞섰다. 여기서는 로만 야콥슨의 언어학에 바탕한 라캉의 은유와 환유 개념으로 설명해볼 수 있겠다. 라캉의 문학 이론에서 은유는 하나의 시니피앙이 또 다른 시니피앙으로 대체되는 과정 자체다. 작가의 시니피앙(글쓰기)이 독자의 시니피앙(독해)으로 대체되듯이 말이다.1 이에 비해 환유는 시니피앙의 연결을 가능하게 만드는 법칙이며 하나의 단어를 또 다른 단어로 연결하는 과정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기존 동시는 오직 은유를 창작 원리의 거의 전부로 표방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편 라캉은 소쉬르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표와 기의 개념에서 나아가 기표와 기의의 대칭성과 안정성을 의문시한다. ‘기표/기의’라는 공식과 ‘기의는 기표 아래서 미끄러진다’라는 유명한 명제로 이를 말한다. 언어의 최소 단위는 기호가 아니라 기표라고 하며 기의에 대한 기표의 우월성과 자율성을 강조한다. 언어는 의미론적 가치를 포함하는 기호가 아니고 기표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이다. 나아가 언어의 근본적인 모호성, 의미의 가변성과 이중성을 주장한다. 기표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주체가 언어의 지배자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과 통한다. 기표의 결합으로부터 파생되는 의미들은 필연적으로 주체의 의도를 비껴가면서 주체의 언어활동에 무의식의 효과를 산출하기 때문이다.

    동시 담론에서의 모호성과 난해성

    이렇듯 라캉의 문학론은 언어가 세계와 인간 내면의 감정과 욕망을 충실히 재현하고 기술할 수 있다는 전통적 입장을 비판하면서 언어의 다의성과 모호성을 강조한다. 이는 근원적으로 문학 텍스트를 창작하고 해석하는 시선을 달리 두게 한다. 하지만 동시 창작에서는 언어라는 독립된 체계, 언어의 모호성에 대한 관점이 외면되어왔다. 여전히 언어를 두고 작가의 내면이나 교훈이나 재미를 어린이 독자에게 충실히 전달하는 수단으로 보는 시선이 강고하다. 지금까지 동시 논쟁의 쟁점은 주로 어린이 독자에게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고, 언어를 전달의 수단으로 보는 관점은 대동소이했다. 이처럼 언어의 전달과 효용을 우선할 때 모호성은 미연에, 말끔히, 여지없이 제거돼야 할 요소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를 평가하면서 제기된 모호성 혹은 난해성과 관련된 담론들 역시 현대 문학이론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말놀이 동시집』 출간 이후 다양한 창작 실험이 진행되면서 동시 담론장에서는 ‘해묵은 동시 논쟁’(2007), ‘어린이 화자 논쟁’(2010)과 아울러 ‘난해성 논쟁’(2015)이 진행됐다. 난해성이란 모든 어린이 독자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려운 텍스트의 성격을 일컫는 개념이다. 논쟁의 쟁점을 소박하게 정리하자면 어린이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게 쓰면 안 된다는 견해와 문학 창작을 그러한 방식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의 대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난해성과 관련해 말하고 싶은 점은 난해성과 모호성이 구분되지 않고 ‘난해성=모호성’이라는 등식으로 동시 담론이 형성되어왔다는 사실이다. 동시의 난해성에 대한 견해를 차치하고 우선 난해성에 대한 개념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린이 독자가 이해하거나 수용하기 어려운 텍스트인 이유에는 뜻을 모르는 단어, 시적 긴장이 큰 비유와 상징, 아이러니와 역설, 시적 거리 등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어른 독자에게조차 명확히 장악되지 않는 모든 텍스트에 난해성이라는 꼬리표를 일괄적으로 붙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모호성이라고 통칭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국 동시문학사에서 특별한 맥락을 지닌 난해성 개념과 달리 언어의 모호성은 위에서 언급했듯 현대 철학에 바탕해 현대 문학이론이 정립한 언어의 본질적인 성격이다. 이는 현대시의 본질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니 『말놀이 동시집』 출간 이후 동시 담론이 줄곧 주창했듯 ‘동시도 시’라고 말하는 한 현대시의 특징인 모호성을 동시 장르에서 간단히 축출시킬 수 없는 일이다.

    현대시는 하나의 의미를 진술하는 동시에 은폐시키도록 하는 모순된 과제를 언어에 부여한다. 모호함이 시의 지배적인 원리가 되었다. 모호함이란 접근하기보다는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부유의 상태에 묶어놓기 위해 시를 언어의 일상적인 전달 기능으로부터 과도하게 분리시키는 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의 구조』, 장희창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3, 343쪽.

    서정 장르의 주관성 또한 모호성과 관련된다. 헤겔의 문학론에서 ‘객관의 서사, 주관의 서정’이라고 규정하듯 서정 장르의 본질은 주관성이고 이 주관성의 실체로서 체험과 감정을 강조한다. 주관성은 시의 모든 요소에 작용하며 모호성을 발생시킨다. 이를테면 비유에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연결될 때 이는 시인의 체험과 감정이라는 주관성에 근거한다.

    모호성과 난해성의 개념 분리

    어른 독자 대상의 시에서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연결이 관습적이지 않고 시적 긴장이 큰 비유가 호평을 받는다. 반면 동시에서는 지나친 시적 긴장을 염려한다. 동시도 시이지만, 동시니까 모호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지금까지 동시 담론에서 어떠한 균열도 없이 제시되어왔지만 손쉬운 절충으로 해결될 성질은 아니다. 모호성을 난해성으로 통칭하며 어린이 독자의 이해라는 기준으로 간단히 재단하고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 동시 문학사를 두고 볼 때 1960〜70년대에 전면 등장한 난해성이라는 용어와 개념은 사실인즉 ‘되다 만 동시, 되다 만 시’의 핑곗거리가 되어왔다.2 난해성이 문제된 동시 중 모호성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시적 완성도의 부족을 비평적으로 평가하지 않은 채 난해성이라고 에둘러 말하고 이를 모호성이라고도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염된 용어와 개념인 난해성이 현대시의 특질인 모호성까지 오염시키며 동시 담론에서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최근 난해성 논쟁 또한 어린이 독자의 동시 감상에 대한 견해차를 확인할 뿐 생산적인 논의가 되지 못했다.
    따라서 ‘난해성=모호성’이라는 등치를 깨고 우선 난해성과 모호성을 분리시킨 후 두 개념을 따로 논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모호성이라는 현대시의 본질적인 특성과 동시의 미학성이 병존할 수 있는지는 앞으로 더 논의할 만한 주제다. 한편 난해성 주제는 각기 다른 동시론의 지향이나 기준을 주장하고 재확인하는 일을 넘어 독자반응 비평 등 어린이 독자 관련 연구 분야에서 이론과 체계를 갖추고 제안될 때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3. 동시의 어린이 독자

    작가-텍스트-독자

    동시가 모호성을 수용하는지 여부는 단지 작가의 창작 지향에 따른 문제만이 아니라 어린이 독자 인식과 긴밀히 연결된다. 시와 언어의 본질적인 모호성을 수용할 때 어린이 독자의 자율성을 신뢰할 수 있다. 역으로 어린이 독자의 자율성을 신뢰한다면 동시에 좀 더 많은 모호성이 허락되어도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의 언어는 작가의 창작 지향보다는 어린이 독자 인식에 좌우되는 듯 보인다.

    시는 독자를 통하여 독자적인 권리를 갖는 새로운 의미 작용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비록 그것이―원래 고정되지 않았던―작가의 의도로부터 이탈한다고 하더라도. 스페인 작가 살리나스P. Salinas는 말한다. “시는 오해를 그 본질로 하는 해석의 더 높은 형식에 의존한다. 한 시가 문자상으로 끝을 맺을 수 있으나 그 작용은 중단되지 않는다. 시는 자기 자신 속에서, 작가 속에서, 독자 속에서, 침묵 속에서 각각 다른 얼굴을 추구한다.”

─후고 프리드리히, 앞의 책, 345쪽.

    위 인용문에서처럼 시 해석의 주관성과 독자의 자율성은 서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는 줄곧 이야기했듯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이후 현대 문학이론이 언어 체계와 문학 텍스트를 전통적인 관점과 달리 보는 데 바탕한다. 특히 ‘작가-텍스트-독자’의 관계를 규정해온 방식과 연관된다. 현대 문학 연구와 비평은 작가-텍스트-독자의 관계에서 텍스트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주체를 작가 → 텍스트 → 독자의 순으로 이동시켰다.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이란 선언은 현대 문학이론이 텍스트의 의미를 만드는 주체를 저자 아닌 독자로 규정하고 있음을 명백히 드러냈다.
    여러 문학이론 중 특히 사르트르의 문학론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독자의 권리를 그의 존재론에 바탕해 주장한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존재론에 기반해 작가에 의해 창조된 작품은 반대되는 이중의 존재론적 지위 즉 ‘대자적’ 측면과 ‘즉자적’ 측면을 지닌다고 한다.3 이때 작품에 분신되어 있는 작가의 대자-즉자 존재의 결합을 실현시키는 것이 바로 독자이다. “예술은 타자를 위해서만, 타자에 의해서만 존재할 뿐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주장에서 예술은 곧 문학이요, 타자는 독자다. 이를 위해 작가는 독자에게 ‘자유’와 ‘주체성’을 준다. 작가의 글쓰기 행위는 일종의 ‘증여’ 행위이며 독자의 ‘요구권’을 인정한다.
    오늘날 여러 독자반응 비평이론들 역시 텍스트의 의미를 만드는 주체로서 독자를 강조한다. 상호거래적 독자반응 이론, 영향문체론, 주관적 독자반응 이론, 심리적 독자반응 이론, 사회적 독자반응 이론 등은 모두 텍스트를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독자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본다.4 각각의 독자반응 비평이론들 사이에서 독자의 반응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 반응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텍스트는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등에 대한 견해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자반응 비평이론은 텍스트의 의미가 저자의 의도에 있다거나 오직 텍스트 안에만 담겨 있다는 관점들과 다르게 텍스트의 의미를 만드는 주체가 독자에게 있다는 관점을 명백히 한다. 독자는 문학 텍스트가 제시하는 의미를 수동적으로 소비하지 않고 능동적으로 의미를 찾아내고 또 만들어낸다고 믿는다.

    수용자로서만 호명된 어린이 독자

    동시를 비롯한 아동문학은 어른 독자 대상의 문학에 비해 훨씬 더 중요하게 어린이 독자를 호명해왔다. 작가, 평론가, 교사, 학부모 등 아동문학을 둘러싼 그 어떤 어른도 어린이 독자를 최우선으로 두지 않는 경우는 없다. 어린이 독자 중심주의가 아닌 작가 중심주의나 작품 중심주의는 오늘날 아동문학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5
    하지만 동시 담론에서 줄곧 호명한 어린이 독자가 과연 현대 문학이론이 새롭게 발견한, 텍스트의 의미를 만드는 주체로서 독자의 의미를 지녔는지 따져본다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동시 담론에서는 아직도 작가 쪽에 텍스트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주체로서의 비중이 실려 있다. 예를 들어 난해성 논쟁이나 어린이 화자 논쟁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텍스트나 독자에 대한 논의로 보이지만 논쟁의 배경이나 지향은 작가가 어떤 동시를 창작할 것인지에 대한 창작론이었다. 이 논쟁들에서 어린이 독자가 중요하게 고려됐다 하더라도 거기서 고려된 건 작품에 담긴 작가의 의도가 어린이 독자에게 수용될지 여부였지, 어린이 독자의 주체성과 자율성이 아니었다.
    즉, 한국 동시문학사 내내 근본적으로 창작론의 성격을 띠는 동시 담론이 그간 호명한 어린이 독자는 텍스트의 의미를 수용하는 독자이지 결코 의미를 생산하는 주체적인 독자가 아니다. 어린이 독자를 최우선하는 수다한 동시 담론은 물론, 어린이 독자를 존중하는 태도에서 나왔겠지만 어린이 독자를 수용자로 묶어두었기에 작가의 의도가 어린이 독자에게 수용될 가능성을 동시비평 기준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독자인 어린이 존재에 대한 존중과는 별개로 어린이 독자의 주체성을 제한하지는 않았는지, 그 이중적이고 역설적일 수 있는 전제가 현대 문학이론의 독자 이론에 비추어 점검돼야 할 것이다.
    동화나 청소년소설 등 서사 장르에 비해 유독 동시 담론에서 어린이 독자의 수용 여부가 비평 기준으로 강조되고, 어린이 독자가 호명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서정 장르의 근본적인 모호성에서 유래한다. 서사 장르보다 모호하니까 어린이 독자라는 잣대가 드리워진 것이다. 동시가 현대시이기 때문에 갖는 모호성이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자 세 개의 논쟁이 일어났고, 줄곧 어린이 독자가 호출됐다. 그러나 모든 논쟁에서 그 어느 편도 어린이 독자가 수용할 수 있게끔 동시를 창작해야 한다는 전제에 대한 의문을 본격적으로 제기하지는 않았다. 동시의 언어 역시 모호성과 자율성을 지니며 바로 여기에서 독자의 자율성이 발생한다고 명백히 주장된 바 없다.
    동시에서 어린이 독자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담론은 독자보다 작가를 우선하는 입장으로 여전히 오해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언어의 모호성이 작가에게는 제약이 아닌 탐색의 가능성이며, 어린이 독자에게는 텍스트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기반이라고 믿는 창작 태도가 어린이 독자를 도외시하는 건 결코 아니다. 어린이 독자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신뢰하는 태도는 오히려 어린이 존재를 존중하는 태도일 수 있다. 동시를 오늘날의 문학 텍스트로 바라본다면 현대 문학이론이 작가-텍스트-독자의 관계에서 규정한 텍스트와 독자의 주체성에 기대어 동시의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 동시의 어린이 화자

    보편의 어린이 독자에서 개별 어린이 화자로

    물론 동시는 텍스트와 관련된 모든 지점에서 그 무엇보다 어린이라는 존재와 어린이 독자를 우선해야 한다. 어른 독자 대상의 문학과는 달리 어린이 독자를 1차 독자로 하는 아동문학의 정체성에 따라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아동문학이 어린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 자체가 아니라 지금까지 아동문학이 어린이를 잘못 고려하거나 편협하게 고려하면서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데 있다.
    『말놀이 동시집』 이전 동시의 편협한 어린이 인식은 동시의 미학을 옭죄었다. “지금까지 동시단은 어린이를 너무 의식했다. 그 어린이는 시인의 몸 안이 아닌 바깥에 있었다. 기성 동시가 터를 두고 있는 어린이는 깡그리 잊어버려라.”6라는 비판은 그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 것이었다. 한편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 담론에서 어린이 독자라는 기준은 아동문학의 미학성과 배치되는 방식으로 잘못 규정됐다. 평론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를 이분법적 논리로 이해하고, 이분법적 논리의 바탕 위에 기입한 담론으로 각자 자신의 창작 실천과 작품을 뒷받침한 결과였다.
    동시가 『말놀이 동시집』 이후 20년간 축적된 문학적 성취에서 다시 한번 새로워지려고 한다면 다시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일밖에는 없을 듯싶다. 거기에는 근대의 어린이를 넘어서는 이 시대의 어린이에 대한 감수성과 윤리가 수반되어야 한다. 『말놀이 동시집』이 이루어낸바 동시를 오늘날의 문학 텍스트로 보는 관점 역시 아울러 이어나가야 한다. 결국 오늘날의 어린이 독자가 읽는 오늘날의 문학을 성찰해야 한다는, 지극히 온당하면서도 늘 어려운 작업이다.
    단, 이를 실제 창작에서 찾아나갈 실마리는 새로운 ‘어린이 화자’의 발견에 있다고 제안하고 싶다. 지난 20년간 동시 담론이 ‘어린이 인식’과 ‘어린이 독자’로 이야기한 바와 조금 다른 지점으로 시선을 돌리자는 것이다. 평론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 이후 줄곧 언급된 어린이 인식이란 개념은 아동문학의 지향과 기준임은 분명하지만 일종의 정언명법이지 구체적인 내용이나 원칙이 아니다. 그래서 실질적인 비평 기준으로 삼거나 창작 실천으로 적용할 수 없다. 반면 어린이 독자는 종종 너무 구체적이어서 작가-텍스트-독자 관계에서 추상화된 어린이 독자를 논의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또 창작 실천에 있어서는 ‘보편의 어린이 독자’7라는 고정관념이 창작을 제한하기 십상이다.
    새로운 어린이 화자의 발견은 새로운 어린이 인식과 어린이 독자의 발견에 다름 아니며 그것들의 구체적인 현현이다. 또한 어린이 화자의 발견은 ‘개별 어린이’로 ‘보편의 어린이’를 탄생시키는 과정이며,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보편의 어린이’를 스스로 전복하며 다시 ‘개별 어린이’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 동시는 어린이의 개성의 발견, 내면의 발견을 하지 못했단 말인가. (중략) 윤석중 동시의 어린이는 보편적인 인간성의 측면보다는 그와 구별되는, 명랑성을 지닌 다른 존재로서 어린이의 특질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것은 집단적 자아로 파악되며 윤석중의 어린이 역시 ‘어린이’라는 집단적 자아의 형성에 기여했던 것이다.

―김이구, 「동시의 생태계, 동시의 희망』,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 126쪽.

    인용한 글에서 위 인용문 이상으로 논의가 확장되지는 않고 있지만 동시가 개별 어린이와 보편의 어린이의 관계를 어떻게 사유하고 규정해야 할지에 대해 미루어 고찰해볼 수 있겠다. 윤석중 동시가 이전 동시와 달리 명랑한 어린이 화자를 발견했을 때 그건 당시의 보편의 어린이와 다른 개별 어린이였다. 그런데 그가 발견한 명랑한 어린이는 이제 보편의 어린이가 되었고 오늘 우리에겐 그 보편의 어린이와는 다른 개별 어린이의 발견이 또다시 요구된다.
    근대가 발견한 보편의 어린이는 어른과 구분되는 어린이였다. 동시를 비롯한 아동문학은 보편의 어린이를 발견하고 재현하며 어린이의 존재를 존중하고 어린이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근대를 지난 현재에는 보편의 어린이 즉 ‘집단적 자아’로서의 어린이 개념이 오히려 어린이를 억압하고 어린이를 타자화할 우려가 있다. ‘개별 어린이 화자의 발견’이란 보편의 어린이 개념에 내재한 일말의 폭력성과 전체주의를 성찰하고 파기하며 보편의 어린이에서 소외됐던 개별 어린이들을 재현하는 일이다.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 그 이후

    『말놀이 동시집』 이후 동시는 동시문학사에 유례없는 창작 성과를 거두었으며 평론 「해묵은 동시를 벗어 던져 버리자」로 시작된 담론들은 이 성과에 대해 적절한 문학적 의의를 기입했다. 덕분에 밑도 끝도 없이 새로운 동시, 좋은 동시를 요구하며 장르 전체를 폄하하는 목소리는 잦아들고 동시는 지도비평으로 훈계만 듣던 ‘동네북’에서도 드디어 벗어났다. 현재 다른 아동문학 장르인 그림책, 동화, 청소년소설 등과 나란히 놓고 볼 때 각 장르가 성취한 미학성에 비해 동시 장르의 미학성은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지금의 동시는 충분히 아름답고, 뛰어나다.
    그럼에도 『말놀이 동시집』이 출간된 지 벌써 20년을 향해 가고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가 강력한 담론의 흐름으로 거의 유일한 담론이 된 상황에서 동시의 새로운 미학을 찾아가는 일은 또다시 요구된다.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와 이를 뒷받침한 담론은 그 이전 담론이 불균형했던 상황을 전복하고 형식, 재미, 놀이, 어린이 독자의 요소를 강조한 의의가 있다. 하지만 또다시 한편으로만 기울어진 담론은 이미 그때부터 기우뚱한 균형에서조차 멀어져 있었고 이러한 담론의 불균형은 창작으로까지 이어져왔다.
    몇몇 뛰어난 성취를 제외하고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는 종종 『말놀이 동시집』의 표층 텍스트만 이해하고 그것을 추수한 결과로 보이기도 한다. 어른 독자 대상 시의 여러 기법들, 새로운 시적 형식들, 어린이 독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와 장치들⋯⋯. 『말놀이 동시집』의 재미는 ‘언어’ 그 자체를 추구한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텍스트의 심층이 좀 더 깊이 사유돼야 하겠다.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들이 추구한 미학과는 또 다른 동시의 미학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지향을 공유하며 찾아나갈 때다.
동시를 오늘날의 문학 텍스트로 바라보고, 동시를 읽는 어린이 독자를 오늘날의 감수성과 윤리로 발견하는 가운데 『말놀이 동시집』을 잇고 뛰어넘는 동시의 미학이 또다시 탄생하길 기다려본다.
  
  

김유진

창비어린이신인문학상 동시 부문(2009)과 평론 부문(2012)을 수상함. 동시집 『나는 보라』 『뽀뽀의 힘』, 청소년시집 『그때부터 사랑』, 아동문학평론집 『언젠가는 어린이가 되겠지』, 학술서 『한국현대동시론』 등이 있음. 동시집 『뽀뽀의 힘』으로 한국가톨릭문학상 신인문학상, 동시집 『나는 보라』로 창원아동문학상 수상.

    
    

〈주석〉

  1. 이하 라캉의 이론에 관해서는 김석, 「라캉의 문학론」, 『프랑스 철학과 문학비평』, 한국프랑스철학회 엮음, 문학과지성사, 2008, 16〜39쪽 ; 홍준기, 「자끄 라깡」, 『현대 프랑스 철학사』, 한국프랑스철학회 엮음, 창비, 2015, 267〜292쪽 참조.
  2. 김유진, 『한국현대동시론』, 청동거울, 2022, 122~127쪽.
  3. 이하 사르트르의 문학론에 관해서는 변광배, 「사르트르의 문학론」, 『프랑스 철학과 문학비평』, 앞의 책, 41~75쪽 참조.
  4. 로이스 타이슨, 『비평이론의 모든 것』, 윤동구 옮김, 앨피, 2012, 369쪽 참조.
  5. 김유진, 「어린이와 시 쓰기─어린이 독자를 발견하는 길 하나」, 『동시발전소』 2021년 겨울호, 134쪽 참조.
  6. 김이구, 『해묵은 동시를 던져 버리자』, 창비, 2014, 237쪽.
  7. 김유진, 「‘첫 시’와 어린이」, 『창비어린이』 2023년 봄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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