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으로부터 자유로운 죄의식─백온유의 소설에 대해

  

1. 사라지는 세계에서의 성장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근대를 향해 달려왔다. 여기에서 근대란 “새로운 시대 의식을 가리키는 철학적 담론”1을 의미한다. ‘근대성’이라는 용어로 불리기도 하는 이 담론을 구성하는 가장 큰 축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자본주의다. 유럽의 경우는 이러한 근대가 몇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진행되었는데, 한국의 경우는 근대가 압축적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근대에는 “‘보다 많이’, ‘보다 빨리’, ‘보다 효과적으로’ 따위의 모토만을 내세우고 지수함수적으로 급증하는 발전의 상승 곡선을 타고 몽매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발전과 성장이란 스칼라”2가 내재되어 있는데, 한국은 그것을 더 많이, 더 빠르게, 더 효과적으로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던 세계 최빈국이, 국민들의 손으로 대통령을 몰아내는 경제 규모 10위권의 나라로 탈바꿈됐으니, 근대와 성장을 향한 질주는 나름대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언제까지 그 노선을 유지할 수 있느냐이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달성해야 할 목표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왔다. 그 목표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때로는 민족중흥이 그 목표였고, 때로는 개인 소득 2만 불이 그 목표였다. 때로는 선진국이라는 지위가 그 목표가 되기도 했다. 목표했던 것들은 아주 많이, 빨리, 그리고 효과적으로 달성되었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어둠이 존재한다. 우리 사회는 더 빠른 성장을 위해 사회의 구성원들을 무한 경쟁으로 내몰았다.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에게 두 번의 기회는 없다. 낙오는 전적으로 낙오된 사람의 문제로 치부되었다.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성장을 향해 나아가라고 소리쳤지만, 사회적 안전망과 약자에 대한 보호망은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거기에 절망하고 지친 사람들은 희망이 아니라 죽음에 몸을 내던지기 시작했다. 목표에 도달만 하면 행복이 주어질 거라는 청사진은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성장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3
    이 글의 논의 대상인 청소년소설 또한 이러한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청소년은 기본적으로 “국가에 의해 공적으로 기획되어 교화, 훈육의 대상 집단”4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근대와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이상, 청소년 또한 성장 담론을 내재한 존재로 기획되었다.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성장소설과 청소년소설을 유사한 것으로 취급해왔다.5 청소년은 내적·외적으로 잘 성장하여 국가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성인이 되어야 했고, 청소년소설은 그런 청소년을 잘 교육하고 훈육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러한 교화나 훈육, 성장에 초점을 맞춘 소설에서 벗어나 조금씩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소설들이 쓰이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추동한 건 근래에 발생한 우리 사회의 굵직한 사건들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를 위시한 근래의 여러 사건들은 청소년들이 열심히 성장하여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해봐야, 그들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선물해줄 수 없으며, 더 나아가 그들의 목숨마저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확인시켜줬다. 청소년들이 제대로 ‘성장’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제대로 지켜줄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성장’을 요구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6
    백온유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성실히 대답해온 작가다. 그는 『유원』(창비, 2020) 『페퍼민트』(창비, 2022) 『경우 없는 세계』(창비, 2023)에 이르기까지 세 편의 청소년소설을 출간했다. 세월호 사건을 연상시키는 『유원』과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삶을 다루는 『페퍼민트』가 “재현하기 어려운 사회적 대재난”을 “회피보다는 과감히 맞서 ‘다르게’ 바라”7보고 있다면, 『경우 없는 세계』는 사회 제도 밖에 존재하는 청소년들의 삶을 “회피하지 않”고 “담담하고도 진실된 태도”8로 다룬다. 세 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사건 이후의 삶’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죄의식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백온유의 인물들은 그 죄의식과 마주하며 자신들의 주체성을 공고히 한다. 그리고 그들이 구획한 주체성은, 청소년을 새롭게 기획9하여 새로운 곳에 위치시킨다. 이 글은 백온유 소설의 그러한 결을 따라 읽으며, 우리 시대의 청소년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2.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유원』은 12층에 사는 할아버지가 무심코 버린 담뱃불로 인해 벌어진 화재 사건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유원의 삶을 다루고 있다. 11층에서 14층에 사는 대부분의 주민이 목숨을 잃은 큰 화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원이 화재에 휘말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언니 예정이 유원을 이불에 둘둘 말아 창밖으로 던졌고, 지나가던 진석이 그런 유원을 몸 바쳐 받아줬기 때문이다. 예정은 유원을 살리고 죽었고, 진석은 유원을 살리고 장애를 입었다. 어린아이였던 유원을 살리기 위해 두 명이 희생한 셈이다. 덕분에 유원은 자신 때문에 누군가 죽고 다쳤다는 죄의식에 짓눌려 산다.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느끼는 죄의식, 그러한 죄의식이 마치 원죄처럼 유원을 짓누른다.10 세상 사람들이 모두 화재 사건을 잊어도 유원 자신은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을 텐데, 애석하게도 세상은 화재 사건과 유원을 잊지 않는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유원의 행방을 묻는 사람들이 있고, 유원과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는 누군가는 “‘별문제는 없어 보인다.’”며 댓글을 단다. 세상의 이런 시선들이 유원의 마음을 곪게 하는데, 사실 유원의 삶을 제일 옥죄는 건 자신을 구해준 진석의 존재다.

    우리는 늘 아저씨를 환대했다. 아무리 늦은 시간에 불쑥 나타나도 눈치를 주거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거나 부탁을 거절할 줄 몰랐다. 아저씨가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그런 나에게 화들짝 놀라 버렸다. 아저씨가 왜 해마다 거르지 않고 언니의 생일에 방문하는지 궁금했다. 언니를 기리기 위해서?
    언니를 잘 모르면서.
    아저씨는 종종 언니가 살아 있던 내내 언니의 좋은 이해자였던 것처럼 말한다.
    언니와 최후의 교감을 나눴던 유일한 존재였던 것처럼 말한다.
    틀린 말이라고도 할 수 없으니 우리는 아저씨 말을 가만히 들을 수밖에.

─『유원』, 48~49쪽

    언니 예정의 생일날 혹은 돈이 필요할 때 불쑥 집으로 찾아오는 진석. 유원은 그런 진석을 “내 주변을 맴돌며 우리를 착취”하는 사람이라 여긴다. 진석이 돈을 요구하는 등 유원의 가족을 곤란하게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유원이 도망치고 싶은 원죄의 순간을 진석이 자꾸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원죄를 상기하지 않기 위해 친구들하고도 별다른 관계를 맺지 않았던 유원으로서는,11 진석의 방문이 상당히 곤혹스러웠을 수밖에 없다. 유원은 곤혹을 넘어 진석에 대한 살인 충동을 느끼기까지 한다. 자신을 살려준 은인을 죽이고 싶다는 감정, 그것은 또 다른 죄의식이 되어 유원을 더더욱 짓누른다. 이러한 죄의식으로부터 유원이 벗어나는 길은 언니 예정을 잊고, 진석을 만나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정은 유원의 삶 곳곳에 자리하고 있고, 진석은 주기적으로 유원과 유원의 부모를 찾아온다.
    이처럼 죄의식에 짓눌린 유원이 잠시나마 그것을 잊게 되는 순간이 온다. 그건 바로 우연히 사귄 친구인 수현 덕분이다. 유원만의 아지트였던 학교 옥상에서 우연히 만난 수현. 유원은 수현과 치킨을 먹고 드라마를 보는 등 같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내 수현이 진석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유원은 수현을 멀리한다. 수현에게 유원은 자신의 아버지를 불구로 만든 사람이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유원은 자신이 수현에게 “마땅히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현을 피한다. 그러나 상대방에게서 죄의식을 느끼는 건 수현도 마찬가지다. 수현은 자신의 아버지가 유원과 유원의 가족에게 해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위해, 그리고 유원을 위해 진석을 유원에게서 떼어내고자 한다.
    그 진심은 처음에는 닿지 않는다. 오히려 진심은 오해를 낳았고, 오해로 인하여 둘은 잠시 동안의 냉전을 갖는다. 그러나 이내 유원은 수현이 전해준 용기를 받아 같이 방송 출연을 하자는 진석의 요청을 거절하고, 진석이 고마우면서도 너무 무겁다고 자신의 의사를 처음으로 전한다. 진석에 대한 죄의식을 고백하면서도 앞으로는 죄의식에 짓눌리지 않겠다는 것을 당당하게 선언한 대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수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현 또한 유원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아빠라는 죄의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고통의 죄의식을 함께 책임지고 극복한 것이다. 죄의식을 책임지고자 할 때 인간은 비로소 주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연대는 죄와 책임이 일치되는 주체가 탄생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유원』은 죄에 노출된 유원과 수현을 보호하고 감싸는 것이 아니라, 죄를 책임지게 함으로써 주체로 거듭나게 한다. 유원과 수현의 죄의식이 어른들의 행동으로 인해 생긴 것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들이 책임지는 죄는 단순히 그들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 어른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죄의식을 책임지고 주체로 거듭나는 것은 백온유가 그들을 수동적인 교화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의 일원으로 내세움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백온유는 청소년을 어른이 되기 전의 미숙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당당한 우리 사회의 일원이자 하나의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은 『페퍼민트』에서 보다 선명하게 나타난다.
  

3. 책임과 용서로의 길

    『유원』이 누군가의 아빠에 대한 죄의식을 다루고 있다면, 『페퍼민트』는 누군가의 엄마에 대한 죄의식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시안과 해원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그중 시안의 엄마는 식물인간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저 냄새를 풍기고 용변을 볼 때만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이 입증된다. 시안의 모든 삶은 그런 엄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엄마를 간호하기 위해 학교가 끝나면 바로 병원으로 가고, 간호 시간을 지키기 위해 별다른 약속도 잡지 않는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삶을 잃은 셈인데, 시안이 그런 삶을 살게 된 건 바로 ‘프록시모 바이러스’ 때문이다. 치사율이 5퍼센트가 넘는 바이러스인 프록시모 바이러스. 시안의 가족은 그들과 절친했던 해원이네 가족에게서 이 바이러스에 전염되었다.
    문제는 해원의 가족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과정에서 해외여행 사실을 숨기고 자가 격리를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바이러스의 위험성이 경고되는 와중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안의 집에서 숙제를 하고 밥을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주말에 예배에 참석했고 예배 후에는 교회 근처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모두 보도되었고, 해원의 가족은 “슈퍼 전파자 N번으로 불리”며 온라인상에서 각종 테러를 당했다. 친구와 직장을 비롯한 평범한 일상을 잃은 그들은, 지방으로 이사를 간다. 그리고 일상이 어느 정도 다시 복원되었을 때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 그때까지 해원은, 자신들이 옮긴 바이러스로 인해 시안이네 가족의 일상이 송두리째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몰랐기 때문에 다시 만난 시안에게 자신의 일상을 공유하고 각종 고민을 상담하는 등 그를 자신의 삶 안으로 끌어당겨 오고자 한다.
    하지만 시안과 해원이 과거처럼 같이 잘 지내는 것은 잠시뿐이다. 시안은 해원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엄마에 대해 소홀해지고, 거기에서 더욱 큰 죄의식을 느낀다. 시안에게 해원은 엄마를 식물인간으로 만든 사람인 동시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친구이다. 미래를 나누고자 하는 친구이지만, 시안이 식물인간 엄마에 메여 미래를 꿈꿀 수 없게 만든 친구이기도 하다. 시안은 해원과 즐거움을 나눌수록 자신이 엄마를 “견디고 있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 감정은 이내 다시 더 큰 죄의식이 되어 시안을 짓누른다. 그러한 사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던 시안은 해원에게 죄의식의 근원인 자신의 엄마를 보여준다. 이 순간, 시안의 엄마는 해원에게도 무거운 죄의식으로 자리한다. 하지만 그 죄의식은 그들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죄의식은 못난 어른들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엄마 몰랐지?”
    “뭘?”
    해원은 천천히 직접 보고 들은 이모의 상태를 털어놓았다. 얘기하다가도 자신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들을 믿기 어려워 중간중간 말문이 막혔지만 시안이 요구한 일만 빼고 모든 걸 말했다.
    (중략) 정적을 깨고 입을 뗀 엄마의 질문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래서, 시안이 계속 만날 거니?”
    섬뜩한 위화감.
    “불편하지 않겠어? 시안이도 마음이 무거울 것 같은데.”
    해원은 황당해서 자기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엄마⋯⋯ 마음이 무거운 건 우, 우리여야지.” “대답이나 해. 계속 만날 거야? 뭐 하려고 그 집까지 갔어? 어? 친구가 시안이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예전처럼 똑같이 놀려고? 환자가 있는 집에 가서? 넌 참 넉살도 좋네.”
    “엄마!”
    (중략)
    해원은 자리에 앉아 아연한 얼굴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혹시⋯⋯ 이미 알고 있었어?”
    “뭘?”
    “이모, 식물인간 상태인 거 알고 있었냐고. 왜 안 놀라? 반응이 왜 그래?”
    엄마는 전에 없던 차가운 얼굴로 해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럼. 당연히 알고 있었지. 엄마가 그걸 몰랐을까 봐.”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왜 숨겼어? 우리한테 왜 말 안 했어?”
    “그걸 왜 말해야 하는데? 지원(해원의 새 이름: 인용자)아, 너 그때 힘들어했잖아. 기억 안 나? 네가 밤마다 악몽 꾸고 집 밖으로도 못 나가고 그래서 엄마 마음이 너무 아팠단 말이야. 그런 너한테, 이모가 식물인간이 됐다는 얘기를 어떻게 하니. 뇌 손상이 너무 심해서 깨어날 가망이 없다는데, 그걸 솔직하게 말해? 네가 그걸 감당할 수 있었겠어?”

─『페퍼민트』, 200~202쪽

    해원의 엄마는 해원이 그것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시안 엄마가 식물인간이 된 것을 숨겼다고 했다. 죄의식 자체를 해원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죄가 없으니, 책임의 자리 또한 없다. 죄와 책임이 없으니, 해원은 주체로 바로 설 수 없다. 그러면 본인이라도 죄를 제대로 책임졌을까. 해원이 책임에 대해 묻자, 해원의 엄마는 보상금을 줬기 때문에 이미 끝난 문제이며, 모든 것은 너희를 위한 것이었고, 자신 또한 너무 힘들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부끄러운 말로 상황을 회피”할 뿐 제대로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자신도 책임지지 않고, 해원에게 책임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해원에게는 대학이라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라고 채근한다. 해원은 이에 응하지 않는다. 그는 엄마가 마련한 미래를 외면하고, 시안과 시안의 엄마라는 죄의식을 향해 나아간다.
    물론 죄의식은 잘 해소되지 않는다. 그것은 ‘엄마’라는 죄의식을 해소하고자 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시안은 해원이 엄마의 산소통 밸브를 잠가주기를 바라고, 해원은 그것을 거부한다. 다만 해원은 시안의 곁에서 그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한다. 시안이 청부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여 자유로워지고자 한다면, 해원은 자신의 자리에서 죄의식을 담담히 책임지고자 한다. 둘은 그 문제로 인해 다퉜고, 시안은 집을 박차고 나간다. 그렇게 해원은 이모(시안 엄마) 곁에 홀로 남는다. 그리고 그때 시안의 아빠가 이모의 산소 밸브를 잠그고자 하는 걸 목격한다. 해원은 몰래 경찰에 신고하고, 몸싸움 끝에 시안 아빠를 저지하며, 죄의식의 근원인 이모를 몸 바쳐 지킨다. 엄마를 죽이려고 했던 아빠, 그런 아빠와 같은 마음을 품었던 딸, 그리고 그 둘을 모두 말린 딸의 친구. 이 기묘한 광경을 겪으며 시안과 해원은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해서 용서를 구한다. 그러고는 더 이상 서로 만나지 말자며 “각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서로를 상처 입히고 죄의식과 책임감에 괴로워하는 마음의 상태”12로부터 멀어지고자 한다. 물론 진정한 사과와 용서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살면서 계속해서 죄의식과 조우할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이들이 느끼는 죄의식은 기존 죄의식과는 다를 것이다. 죄의 정체를 명확히 알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와 책임의 가능성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를 다시는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각자의 “햇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4. 죄의 연쇄와 배제

    『유원』과 『페퍼민트』가 학교라는 제도에 속한 청소년을 다루고 있다면, 『경우 없는 세계』는 학교에 속하지 않은 거리의 청소년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초점화자 ‘나’의 회상으로 진행된다. 3년째 옥탑방에 살고 있는 ‘나’는 어느 날 우연히 길거리에서 교통사고 자해공갈을 일삼는 십 대 소년 이호를 보게 된다. ‘나’는 그런 이호에게 “뭔가에 씐 듯”한 호의를 보인다. 이호의 삶에서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제대로 된 보호와 사랑을 받지 못했고, 그에 대한 반발 심리로 십 대 때부터 ‘우리집’이라 불리는 반지하 방에서 생활했다. ‘우리집’에는 다양한 이유로 가출을 한 청소년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절도, 사기, 협박, 아르바이트 등 다양한 방식으로 생활을 꾸린다. 때론 음식을 나누고 협력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의리를 기대할 수 없는 관계”를 맺으며 각자도생의 삶을 꾸린다. 그런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준 사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A의 죽음이다.
    A는 “아무도 일 안 시켜주고, 가끔 일을 시켜놓고 돈도 안 주”는 세상이 억울해서,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하는 아이다. 그러나 그는 행동이 굼뜨고, 말귀를 잘 못 알아들어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다. 가진 것은 몸뚱어리밖에 없는데, 그 몸뚱어리가 자기 말을 안 들어서 돈을 벌 수 없는 슬픈 상황. A는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통사고 자해공갈에 몸을 내던진다. A는 차에 치이며 잠시나마 갑이 되고, 갑의 지위를 이용해 돈을 받는다. A는 그 돈을 ‘우리집’에 머무는 아이들에게 베풀며 잠시나마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약간의 돈과 잠깐의 인정을 위해 자기 몸을 계속 갉아먹어야 하는 악순환, 그 악순환의 굴레 속에서 A는 천천히 죽어갔다. ‘나’는 A의 죽음 이후 “단 한 뼘도 자라지 못”한다.
    A의 죽음은 ‘나’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큰 변화를 일으킨다. A의 죽음 자체가 충격적이기도 했지만, A의 죽음 이후 ‘우리집’에 있는 아이들이 A의 시체를 산에 유기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런 충격적인 결정을 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철이 없고,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A의 죽음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 믿어서, 오히려 자신들이 A를 죽였다고 오해받을까봐, 그러한 오해를 해소시킬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A의 사체를 유기한다.

    “씨발. 진짜 그럴 수도 있잖아. 재작년에 판새가 나만 8호 때렸단 말이야. 학폭 신고 먹고 퇴학까지 당했다고. 씨발. 그때 내가 더 많이 맞았는데도 내 말 듣지도 않던데? 얘 봐. 우리가 얘 상습적으로 두들겨 팼다고 할 것 같지 않냐? 경찰한테 말하면 우리 다 어떻게 될 것 같은데?”
    세준이 A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고 우리는 모두 A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봤다. 영철은 불안한 듯 두피가 벗겨지겠다 싶을 정도로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나 역시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우리 안 믿어줄걸. 우리가 이렇게 만든 거라고 생각할걸.”
    “우리가 왜? 도대체 왜?”
    성연이 아까보다는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어른들이 알 바 아니지. 그냥 싸웠다고 생각하겠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정희가 속삭이며 말했다. 모두가 A의 죽음을 곤란해했다. A는 헐벗은 채 굳어가고 있었다.

─『경우 없는 세계』, 180~181쪽

    사체를 유기한 아이들은 A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다만 곤란해한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일신만을 생각하는 끔찍한 괴물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이렇게 만든 건 과연 무엇인가. 그 심층에는 사회적 안정망과 청소년보호시설의 부재라는 “사회 전체의 문제를 그들에게 고스란히 떠안기려는 음모”13가 깃들어 있다.
    한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생애 주기에 따라 십 대는 당연히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여긴다. 사회 제도가 학교를 중심으로 갖춰져 있으니, 학교 밖에 머무는 아이들을 학교로 데리고 오려는 것 자체는 긍정적인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여건상 혹은 가족사적인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을 청소년이라는 범주에서 배제하는 것, 그것이 문제다. 아이들에게 부모나 학교라는 “보호해줄 존재가 없다는” 것, 그것은 결코 그들을 “함부로 대”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 속의 어른들은 ‘우리집’의 아이들을 너무나 쉽게 해하고, 무시한다. 경우처럼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판단되는 아이의 말만을 들어줬을 뿐, 나머지 아이들은 철저히 차별하고, 착취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진지하게 아이들의 말을 들어주고 입장을 이해하려 했다면, A는 지나가는 차에 자신을 내던지지 않아도 됐을 것이고, 아이들이 A의 사체를 유기하는 일 또한 없었을 것이다. 현재 시점의 ‘나’가 이호를 품어준 건 바로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호는 자신처럼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죄의 연쇄를 풀고자 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으로 ‘나’는 이호에게 손을 내밀고, 이호는 그 손을 잡는다. 그들에게 다시 “한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건 바로 서로의 손을 맞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백온유는 이런 ‘나’의 삶을 통해 “가족과 사회가 연결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결핍의 세계를 생생하게 드러”14낸다. 그것을 통해 제도 밖에 있는 아이들은 어른들의 배제로 인해 만들어지고 기획된 것이며, 그들 또한 우리 사회의 청소년이자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5. 자유로운 죄를 기다리며

    백온유의 인물들이 마주하고 있는 죄의식은, 기본적으로는 어른들의 것이다. 『유원』에서 아파트 화재가 벌어진 것, 『페퍼민트』에서 감염병이 확산된 것, 『경우 없는 세계』에서 아이들이 집을 나온 것 모두 어른들의 행동 때문이다. 아이들은 거기에 관여한 바가 없고, 어른들은 죄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어른들은 그저 자신들이 구획한 선로線路 위에서 아이들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길 바란다. 어른들이 정한 목적지까지 묵묵히 달리는 아이들은 보호해주고, 선로에서 벗어난 아이들 혹은 벗어날 수밖에 없던 아이들은 철저히 배제한다. 아이들이 선로에서 벗어난 건 아이들의 실수이자 잘못으로 여기며, 벗어난 아이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쩌면 애초부터 선로가 잘못 깔린 것은 아닐까? 선로의 부품이 불량이었던 것은 아닐까? 닦아놓은 선로 자체가 불량이라면, 삶의 방향성 같은 건 애초부터 강제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백온유는 아이들이 불가피하게 대면할 수밖에 없는 죄의식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전가된 죄의식에 그에 합당한 책임의 자리를 만들어준다. 그럼으로써 아이들을 어른들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주체성을 가진 존재로 ‘기획’한다. 이를 통해 백온유는 성장과 통제를 넘어서는 청소년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가능성이 그의 소설의 결말처럼 밝은 미래를 담보한다고만은 할 수 없다. 현실은 유원이 패러글라이딩을 한 하늘처럼 넓고 아름답지만은 않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기에는 현재가 너무 어둡고, 암담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어둡고 암담하지 않은 시대는 없었다. 어느 시대나 시대만의 고민과 어둠은 존재했다. 누군가는 그러한 어둠 속에서 썼고, 누군가는 그것을 빛처럼 읽었다. 백온유의 인물들이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었던 건 자신들에게 부과된 어둠과 죄의 근원을 명확히 알았기 때문이다.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제대로 책임질 수 있었고, 책임짐으로써 주체적인 삶의 방향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스스로 책임지는 삶, 그것이 백온유의 인물들이 꿈꾼 밝은 미래였다. 그 밝은 미래가 지속되길 바란다. 아마 그 미래는 죄가 전가되지 않을 것이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전가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죄, 나는 이제 그것이 읽고 싶다.
  
  

진기환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주석〉

  1. 김성기, 「세기말의 모더니티」, 『모더니티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4, 21쪽.
  2. 위의 책, 17쪽.
  3. 아쉽게도 이러한 거대한 문제의식을 한 편의 글에서 전부 다룰 수는 없다. 이를 다루기 위해서는 한국의 사회·문화·정치·경제의 영역을 폭넓게 고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것을 감당할 만한 글이 아니다. 다만 이 글은 논의의 폭을 청소년소설로 국한해, 청소년소설에 나타난 탈성장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4. 오세란, 『한국 청소년소설 연구』, 청동거울, 2013, 51쪽.
  5. 성장소설과 청소년소설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방식으로 유통되었는지와 유사해 보이는 두 장르가 실은 다른 장르라는 사실에 대해선 다음의 책을 참조. 위의 책, 93~112쪽.
  6. 김성중, 「허공의 아이들」, 『개그맨』, 문학과지성사, 2011, 26쪽.
  7. 강수환, 「재현의 언어를 청소년에게」, 『창비어린이』 2023년 가을호, 47쪽.
  8. 백지은, 「마음이 천천히 자라는 시간」, 『경우 없는 세계』 해설, 창비, 2023, 266쪽.
  9. 오세란은 청소년이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시대에 맞게 기획된 개념이라 주장한다. 한국 사회에서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기획된 청소년에 대해선, 오세란, 앞의 책, 13~61쪽.
  10. 강수환, 「세 죽음과 어떤 죄책감: 백온유 『유원』」, 《문장웹진》 2020년 9월호.
  11. 『유원』, 71쪽. “다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갸륵해하는 표정으로 ‘해피 버스 데이 투 유’ 대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렀던 초등학교 4학년 생일 파티 이후 앞으로 생일은 가족끼리만 보내리라 결심한 것뿐이었다.”
  12. 강수환, 「재현의 언어를 청소년에게」, 앞의 책, 49쪽.
  13. 오세란, 「청소년문학의 정체성을 묻다─『완득이』이후」, 『청소년문학의 정체성을 묻다』, 창비, 2015, 28쪽.
  14. 백지은, 「마음이 천천히 자라는 시간」, 『경우 없는 세계』 해설, 창비, 2023년, 263쪽.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