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들의 역사를 읽을 때─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방현석 『범도』

    

1. 다시 돌아, 역사 이야기로

    한동안 우리 문단은 우리 안의 타자에 대한 이야기들에 집중해왔다. 여성과 성소수자 담론이 그러하고, 그 상위에는 스스로 소외시켜온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다른 세대의 이야기, 남 이야기를 읽거나 쓰기보다는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넘쳐나는 시기를 통과하는 중이다. 최근 역사 서사물이 대중적으로 호평을 받는 현상이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아마도 이런 흐름에서 튀어 오른 대조 효과 때문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부터 분단 이후의 현대사까지 ‘나’가 아닌 ‘우리’,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와 연결된 ‘나’를 의식하도록 만드는 서사들이 약진한다. 가령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영웅〉(윤제균, 2022)은 동명의 순수 창작 뮤지컬이 이미 알려졌음에도 작년 말 많은 관객을 끌어모았다. 빨치산 아버지의 삼일장 풍경을 그린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 2022)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여전히 화제작의 반열에 올라 있다.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와 항일무장대의 활동을 집중 조명한 방현석의 『범도』(문학동네, 2023)는 이른바 ‘홍범도 루트’ 답사와 맞물려 그야말로 체험적 고증 작업으로 진화했다. 12·12 군사정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김성수, 2023)은 다양한 세대를 포괄하면서 역사 교과서의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물론 역사 이야기는 어느 시기에나 쓰였다. 조선왕조사든 근현대사든, 우리가 지닌 지식의 출처는 비단 교과서나 전문 서적이 아니라 유명한 역사 드라마나 소설에서 비롯된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최근 문화시장에서 역사물의 선전을 유독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간명하다. 최근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 논란이 보여주듯, 강압적인 역사 지우기가 도리어 역사를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한다는 당위의 원천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이들 역사물에서 무엇을 읽고 무엇을 보고 있을까. 복잡한 맥락이 얽힌 역사를 강제로 옭아매는 일이란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그런 어림없는 일을 시도할 때 딴지를 거는 것은 늘 이야기의 몫이었다. 이렇게 다시, 역사 이야기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 지면에서는 근간에 화제가 된 역사소설 두 편을 함께 읽어보기로 하자.
    

2. 그들은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걸었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써온 정지아 작가의 최근작이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이적표현물로 지정되었던 데뷔작 『빨치산의 딸』(실천문학사, 1990)을 낸 이래로, 그녀의 글쓰기는 사회주의자 아버지의 삶이라는 주제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이때 아버지의 삶이라는 문구는 혁명을 이루지 못하고 간첩 혐의까지 받으며 살아야 했던 아버지의 생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주제에는 남편보다 감옥살이를 일찍 마친 탓에 당장 홀로 생계와 양육을 감당하느라 혁명분자로 남을 여유조차 없었던 어머니의 삶, 무엇보다도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전부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던 작가 자신의 삶도 담겨 있다.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 작가는 ‘아버지의 삶’이라는 말이 포괄할 수 있는 인간관계의 그물망을 최대한 펼쳐놓았다. 소설은 아버지의 삼일장을 치르는 동안 모여든 조문객들의 면면을 살피고 그들과 아버지가 맺은 인연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역동적 사건이 없음에도 빈소에 들고 나는 다양한 조문객들의 개성과 살아 있는 대화 덕에 지루하지 않다. 조문객은 크게 세 부류로,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덩달아 신산한 삶을 살아야 했던 가족들이 그 첫 번째이다. 아홉 살 때 군인들에게 ‘우리 형이 면당위원장’이라고 자랑을 했다가 그 결과로 부친이 총살당하는 것을 지켜봤던 작은아버지가 그 예이다. 두 번째는 빨치산 동지였거나 적이었던 이들이다. 학도병으로 군대에 끌려가 지리산에 파견되어 남부군인 아버지를 쫓았고 지금도 《조선일보》만 읽는, 그럼에도 평생 아버지와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낸 박 선생 같은 사람이다. 빨치산의 가족이나 동지들 간에 얽힌 과거의 갈등은 그 자체로는 그리 낯설지 않다. 비록 후일담의 성격을 띠긴 하지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태백산맥』(조정래, 한길사, 1986~1989), 『남부군』(이태, 두레, 1988) 등 빨치산 문학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독특함은 마지막 부류의 조문객들, 즉 의외성의 영역에서 뜬금없이 출현하는 인물들에게서 나온다. 빈소에 나타난 노란 머리 소녀는 팔순이 넘은 아버지와 ‘담배 친구’를 맺은 사이다. 학교에서는 베트남 국적의 어머니를 두고 놀려대는 아이들과 싸우고, 집에서는 그 어머니를 때리는 술꾼 아버지와 싸운다. 고교를 자퇴하고 문제아가 된 소녀를 다독여 검정고시를 보도록 하고 장차 미용사가 되겠다는 꿈까지 꿀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다. 빈소를 찾아온 의외의 인물들은 또 있다. ‘아버지의 첫 번째 부인의 여동생’ ‘어머니의 옛 시동생’처럼 예사롭지 않은 가족들인데, ‘나’의 부모가 재혼으로 만났기에 생긴 일이다.
    사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아버지가 선택했던 이념과 그 투쟁의 역사는 희미한 배경으로 물러나 있다. ‘역사가 곧 스포일러’라는 말을 농담처럼 쓰지만, 여순 사건 이후 입산한 빨치산 부대와 남로당은 결국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려진 운명이 되었다. 그들이 몰두했던 혁명은 숱한 희생자를 낳은 채 무위로 그쳤고, 그들이 동경했던 사회주의 체제는 절대 권력의 독재와 왜곡된 시장주의 이상의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채 그나마도 내부로부터 붕괴해버렸다. 환멸밖에 남을 것이 없는 패배의 역사인 것이다.
    대신 이 소설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렇듯 목숨까지 걸었던 신념이 붕괴하는 모습을 지켜본 사회주의자가 감당해야 할 ‘그 이후’의 삶이다. 당신에게 혁명이란 무엇이었나, 모든 것을 바쳤던 열정에 대해 후회는 없는가. 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이는 물론 작중 화자인 ‘빨치산의 딸’이다. 그리고 그 답은 다음과 같은 장면에 집약되어 있다.

    “자네 혼자 잘 묵고 잘 살자고 지리산서 그 고생을 했는가? 자네는 대체 멋을 위해서 목숨을 건 것이여!”(61쪽)

    돈 갚을 능력이 없는 이웃을 돕겠다고 고명딸을 앞세워 빚보증을 선 것만도 한심한데 그 이웃이 야반도주하고야 말았다. 쌍욕을 쏟아내며 원망을 쏟아놓는 혁명가 어머니를 혁명가 아버지는 이 말 한마디로 제압한다. ‘당신은 대체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가.’ 이 일화는 작중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대책 없는 오지랖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남의 가난, 남의 농사, 남의 교통사고 등을 돌보느라 당신 집의 빚이 쌓이고 당신 아내가 골병이 드는 줄을 모르는 것이 ‘나’의 아버지다. 무엇보다 자신의 헌신이 번번이 배반으로 돌아오는 기막힌 상황마저 인정하지 않는 것이 ‘나’의 아버지다. 대체 저 말 한마디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아버지는 저토록 당당할 수 있는가.
    이러한 아버지를 지켜보는 딸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섣불리 아버지를 옹호하지도 답을 정해놓고 독자를 설득하려 들지도 않는다.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세대를 가리지 않고 독자층을 넓혀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이 분명한 거리감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이 거리감 안에서 ‘나, 내 가족, 나의 이익’을 사고의 원점으로 삼는, 평범하고 악의 없는 속물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독자의 눈높이는 딸의 눈높이에 맞추어진다. 이는 대중적 빨치산 소설이 쓰이는 방식이랄 수도 있다.
    인간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았기에 늘 손해 보고 배반당하기 일쑤였던 아버지의 삶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그가 패배하지만은 않았다는 증거들로 다시 쓰이기 시작한다. 좌우 세대 국적의 구분을 내려놓고 한자리에 모여 앉아 있는 조문객들이 그 증거이다. 그 조문객들을 맞아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나누며 딸이 알게 된 것은 대단한 내용이랄 수 없다. 생전의 아버지도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자식 때문에 마음 끓이며, 나이 들어서는 치매를 앓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런 평범한 인간이 ‘나, 내 가족, 내 이익’을 한사코 내려놓고자 했고, 그 애씀을 곧 사회주의자로서의 신념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으며 그 믿음으로 평생을 버텼다는 사실이다.
    ‘대체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가.’라는 물음은 『아버지의 해방일지』 전체를 관통하는 구절이다. ‘무엇을 위해’를 채워 넣는 것은 대답을 요구받는 자의 몫이다.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이 질문이 발화되는 순간 절대적 위력을 갖게 된다는 상황이 아닐까.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이념의 내용이 아니라 이념을 지녔다는 사실 자체이다. 그 힘이 실패한 혁명을 눈앞에 두고도 아버지를 한갓 실패한 인생이 아니라 자부심에 찬 이데올로그로 살게 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비뚤어진 문제아를 다독이는 일, 떼일 뻔한 뺑소니 합의금을 대신 받아주는 일 모두가 그에게는 세상을 바꾸는 일이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일들 개개의 리스트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혁명가라는 이름을 유지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왜 인간에게는 이념이 필요한가, 그까짓 돈도 되지 않으면서 갈등만 조장하는 이념이 있어야만 하느냐는 가장 원초적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3. 그들은 어떻게 목숨을 걸었나

    한편, 방현석 작가의 장편소설 『범도』는 평생 지켜야 할 특정한 이념도 이름도 없이, 오로지 부끄럽지 않은 죽음밖에는 현실적인 선택지를 갖지 못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물론 소설의 주인공은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홍범도 장군이다. 작가는 홍범도가 범포수(호랑이를 잡을 수 있는 포수)였다는 점을 부각시켜, 어려서부터 포수의 총술을 익힌 소년 범도의 모습을 그리는 데에서 출발한다. 이후 하산한 청년 포수 홍범도는 성장소설의 형식 속에서 친구와 적을 만나고 지켜야 할 명분과 거짓된 권모술수를 가릴 수 있는 시선을 익혀간다. 타고난 우직함과 의협심은 그를 홀로 짐승을 사냥하던 포수에서 여단 규모의 포수들을 거느리고 왜군을 공격하는 무장대 책임자로 바꾸어놓는다. 주지하듯, 홍범도는 가난하고 불행한 고아였으며 생계를 위해 군대 나팔수, 제지소 일꾼, 승려, 금광의 잡역부 등 여러 직종을 전전했다. 소설은 홍범도가 왜 그 시절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개연성을 부여하여 배치했다. 권당 600페이지, 도합 두 권이므로 1,2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서사를 통해 작가는 청년 홍범도가 장년의 홍범도가 되는 동안에 그가 여러 조직의 수장으로 활약하는 모습을 담는다. 왜군의 발호에 저항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던 무렵 그는 포수들과 ‘저격여단’을 꾸려 의병대 지휘관으로 임했고, 군대가 해산되던 무렵에는 총기 반납을 거부하는 포수들과 ‘항일연합포연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에 저항했다. 일본군에 쫓겨 조선을 떠난 이후에는 만주 및 연해주 일대의 항일무장독립군에 합류하여 싸웠고, 3·1운동 이후에는 마침내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 되어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왜군이든 일본군이든 단 하나의 적을 향한 이 모든 활약상에도 불구하고, 작중에서 홍범도는 조선이나 대한제국을 위해 싸우는 구국의 영웅으로 그려지진 않는다. 굶주림과 차별을 겪고 글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그에게, ‘대의’란 무엇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믿을 수도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가령 전국의 유림이 봉기해 조직한 의병대의 요청으로 포수여단을 이끌고 합류하면서도 그는 의구심을 품는다.

    인, 의, 예, 지, 신, 다섯 진의 깃발보다 더 높이 ‘국적처단’과 ‘국모복수’를 쓴 깃발이 휘날렸다. 왕이 보낸 관군은 호좌의진이 치켜든 저 깃발을 진압하러 오고 있었다. 나는 자기 부인을 살해한 왜구에게 복수하겠다고 일어선 의병을 진압하라고 보낸 관군을 보낸 고종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임금이기 이전에 한 여자의 사내로서 어찌 그럴 수가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자신들을 토벌하러 군대를 보낸 왕을 지키겠다며 왕의 지시를 이행한 관찰사와 군수, 현감을 참수하고 왕의 군사들과 싸울 준비를 하는 유림의 수장 유인석과 군장들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왜구와 싸우려고 총을 들었지 관군과 싸우려고 총을 든 게 아니었다. (『범도』 1, 364쪽)

    『범도』가 그려내는 범포수 출신의 무장인 홍범도는 의적에 가깝다. 그의 적은 그가 사랑한 친구와 동료, 힘없는 선량한 이웃들을 괴롭히는 놈들이다. 일본군은 가장 큰 적이며, 그 일본군에 야합하여 이익을 챙기는 조선인 또한 적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목숨값을 갚기 위해 적들은 그에 몇 배가 되는 목숨을 내놓아야 마땅하다. 이 정산 작업은 민족이나 국가를 위한 대업이라기보다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인과응보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는 오직 총만을 믿는다. 생사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는 총의 세계처럼, 서로 상극인 정의와 불의가 어떤 지점에서 만날 수 있는지 알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을 살핀 다음에야 우리는, 왜 이 소설에서 정작 봉오동 전투가 서사의 핵심로 자리매김되지 못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소설 『범도』의 서사가 가장 생동감 있게 살아나는 부분은 금강산의 범포수 홍범도가 구월산 포수 김수협을 만나 포수여단을 꾸려 왜군과의 전투를 치르는 장면들, 그리고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포수들이 뭉쳐서 만든 항일연합포연대가 하세가와의 일본 군대와 전투를 치르는 장면들이다. 이 부분에서 홍범도는 그가 사랑하는 동지들과 함께 그의 별명처럼, ‘날아다닌다.’ 그가 의지하는 동지들은 모두 그처럼 ‘포수의 심성’을 지닌 사람들이다. 부끄러움은 가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포수로서의 본분을 놓아버리는 데에 있다. 즉 비록 짐승을 잡아 생계를 꾸리더라도 총은 한 발만을 급소에 겨누어 쏘아 짐승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게 포수의 ‘격’임을 잊지 않는 순정한 사람들의 세계다.
    봉오동 전투로 이르는 긴 시간은 이 순정한 동지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봉오동 전투처럼 역사적으로 평가를 받지도 대승을 거두지도 못한 크고 작은 전투에서 무명의 동지들이 죽음으로 감당해낸 시간이 홍범도를 살아 있는 신화로 봉오동에 서게 했다. 사랑하는 동지 하나를 잃을 때마다 인간 홍범도는 점차 지치고 지휘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버거워한다.

    “우리는 칠백육십사 명의 동지들을 이 태백준령에 묻었소. 우리는 이제 태백준령 어디에서도 함부로 발을 굴러서 안 되오. 함부로 노래를 불러도 안 되오. 우리 동지들의 피와 눈물이 스민 골짜기를 건너지 않고, 우리 동지들의 뼈가 묻힌 언덕을 밟지 않고서 넘어갈 수 있는 산마루는 이제 단 하나도 남지 않았소.” (『범도』 2, 191쪽)

    무명의 전투에서 죽어간 무명용사들의 리스트는 너무도 길다. 가족 중 의병을 내지 않으면 소작을 떼겠다는 양반 지주의 협박 때문에 의병대에 합류했던 동지, 지원병이 당도했음을 아군에게 알리기 위해 자기 몸을 적의 표적으로 일부러 내주었던 동지, 패전 후 확인 사살을 시행하는 적군의 시선을 돌리고자 일부러 일어나 뛰어나간 동지 등 물론 이들의 죽음 어느 하나도 당연할 수는 없다. 때문에 『범도』는 홍범도의 이야기지만, 주인공의 자리에 놓이기를 거북해하고 그와 함께했던 무명의 용사들과 함께 기억되기를 원하는 홍범도의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말년에 극장 수위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 그조차도 흔적 없이 잊힐 뻔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아니, 최근에는 억지로 흔적을 지우려는 대상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범도』는 역사소설이란 근본적으로 기억의 기제라는 것을,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이냐는 문화적 기억의 장치라는 사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 무명의 용사들을 주목할수록 어떤 부담감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생전 가난과 차별에 시달렸던 이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도 생명을 걸고 야산을 누볐는가. 덧없는 희생이 계속될수록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이들에게도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거느냐는, 앞서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마찬가지의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범도』가 내놓는 답은 명료하다. 당초 전투에 참여할 대의 따위가 없었던 이들에게 그 명분은 중요하지 않다. 몸종이나 노비로 전장에 끌려왔거나, 농지를 잃은 농부, 총을 빼앗긴 포수로서 무장대원이 된 이들에게 그런 거창한 선택지는 없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미 각오한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 동지라는 자격에 걸맞은 죽음, 그로써 평생 그들을 따라다닌 차별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다.
    

4. 역사소설의 호흡

    이 글은 작년과 올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두 편의 소설이 모두 역사소설이었더라는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이 ‘감명’이란 단어는 물론 재미있다는 의미를 초과하는 어떤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에는 혁명가라 부르기에는 너무 인간적인 아버지가 등장한다. 그가 일상에서 해내는 일들은 사소해 보이지만 사실 쉽게 해낼 수 없는 일들이다. 남을 돕는 일은 내 삶에 여유가 생긴 다음에야 가능한 것이 통념이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의 논밭 농사를 내버려두고 사고를 당한 이웃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한단 말인가. 차라리 ‘오지랖’이란 용어로 외면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범도』는 영웅이 되기를 거부하는 영웅이 주인공이다. 수많은 동지들의 죽음을 딛고 선 자리에서 마련되는 영웅의 호칭을 듣느니 차라리 무명의 포수로 홀로 뛰어다니며 전투를 치르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혁명가와 영웅을 주제로 삼는 최근의 화제작 두 편이 모두 사소한 일상사나 무명의 존재들을 그려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그저 우연일까. 결국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일상을 살아가는 무명의 당신들이라는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아닌가. 과거의 지나간 사건이나 인물을 다룬다고 하지만, 역사소설을 써내는 작가는 지금-이곳에 있다. 낯익은 주제가 낯익은 방식대로 서술되지 않을 때 그 변화는 곧 문학이 당대 사회와 호흡한다는 증거이다. 그들의 역사는, 다시 이렇게 우리의 역사가 된다.
  
  

정주아

문학평론가. 강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저서 『서북문학과 로컬리티』, 주요 평론 「육체성의 형식과 리얼리티」 「계모찾기, 버림받은 세대와 냉혹한 모성의 세계」 「일인칭 글쓰기 시대의 소설」 등이 있음.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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