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와 놀이─다섯 번의 의도와 다섯 번의 놀이

    

    의도를 따지는 일은 좋은 일이며 즐거운 일이다. 의도를 품은 계획은 치밀하면 치밀할수록 흥미를 배가시킨다. 무엇보다도 예술가에게 ‘의도’는 작품을 춤추게 하고,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하지만 ‘의도’가 무조건 옹호되는 것은 아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자신의 의도가 쉽게 간파당한다면 예술가의 의도는 수명을 잃는다. 그래서 어떤 작품은 ‘의도’를 간파하기가 쉽지 않다. 뫼비우스의 작품 『에데나의 세계』(교양인, 2021)처럼 돌파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이런 의도를 셈하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나 평론가 입장에서나 하나의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 물론, 기교를 위한 가식이 의도적으로 작품에 섞여 있다면 역겨운 것이 되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어리석은 예술가는 동시대에 없을 것이다. 적어도 요즘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척’하지 않는 것이 첨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에게 의도는 중요하다. 이 의도는 독자를 휘어잡고, 평론가를 고독하게 만든다.

    이것은 내 말이 아니다. “비평적 평가는 예술가가 시도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성취한 바를 평가하는 것”1이라고 언급한 노엘 캐럴의 말이다. 즉, ‘시도한 것’(의도)이 어떻게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지 셈하는 것이 재미있는 놀이인 것이다. 물론, 여기서 제시된 ‘의도’가 의도 자체만을 말하지 않는다. 어떤 의도는 그림자의 모습을 지녔다. 그림자처럼 의도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심장의 언어로 의도를 드러내지 않게 한다. 이런 의도는 죽음의 형태와 함께 움직인다. 죽음을 응시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써 내려가는 고독하고 지독한 외로운 예술가들에게 발견되는 독특한 성질이다. 이런 작품을 만나게 되면 주저앉은 채, 평론가는 자신의 수명과 텍스트 읽기를 대가 없이 교환한다. 어느 한 오타쿠 문학도가 동시대에 좋은 작품을 만나고 싶다고 페이스북에 써대는 것도 이런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 또한 어느 한 문학도의 말이 아니다. 철학자 한병철의 최근 신작 『서사의 위기』(다산초당, 2023)에서 화두로 다루는 내용이다. 이 텍스트에서 동시대는 스토리텔링만을 소유할 뿐, 사람을 이끄는 이야기는 소실되었다고 비판한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예술가에게 의도는 그래서 더 값지게 다가온다. 그것이 그림자의 형식이든 수학적인 계산이든 ‘의도’는 평론가에게 평가의 대상이 되고, 독자에게는 즐거움의 요소가 된다.

『계시록』 표지

    최근에 연상호와 최규석의 신작 『계시록』(문학동네, 2023)을 읽었다. 이 두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이 이번에도 비슷하게 반복해서 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복’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르 클레지오의 신화 강연을 교보문고에서 듣고 있을 때도 ‘반복’은 출현했다. 질문 시간에 어느 한 독자는 작품을 어떻게 꾸준히 계속해서 쓰느냐고 물었고,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여러 소재를 ‘반복’한다고 말했다. 반복이 차이를 동반한다면 보기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의 한 구절처럼 이 창조물이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계시록』을 읽었다. 동일한 내용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연상호와 최규석의 작품은 너무나도 지겹다는 생각과 함께, 이 두 작가의 계산된 ‘의도’에 귀를 열었다.

    이 작품에선 세 인물이 등장한다. 성추행과 성폭행과 납치를 일삼고 전자 발찌를 차고 다니는 권양래. 그는 어린 시절 계부에게 지독하게 학대받았다. 다섯 살 때부터 시작된 학대는 그를 악마로 만들었고, 모친도 그를 외면했다. 그래서 계부 대신 증오할 대상을 찾아야만 했다. 계부를 미워하면 엄마를 잃고 홀로 남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그는 고장 난 인간이 되어간다. 두 번째 인물은 성민찬이다. 그는 목사다. 모든 일상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사소한 것부터 더럽고 역겨운 것까지 모두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이런 사람을 조현형 인격장애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말로 아포페니아Apophenia다. 텍스트에서 이런 유형의 인간을 “무질서한 정보들 사이에서 일정한 규칙이나 의미를 찾아내는” 존재라고 말한다. “배가 떨어지면 기어이 까마귀를 만들어내는”2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성민찬은 그런 사람이다. 모든 것을 자신이 믿는 ‘신’과 연관해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연희 형사다. 그녀는 권양래에게 잡혀 있을 때, 전화로 살려달라는 동생의 절규에 신속히 반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랜 시간 힘들어한다. 이 사건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는다.

    이 작품에서 권양래와 성민찬은 어떤 방식이든지 심판을 받게 되지만, 작가의 ‘의도’는 이 두 사람을 벌하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가 의도한 것은 이 세 인물이 동일하다는 거다. 사태의 원인을 내부든 외부든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동일한 인간의 표정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원인에 직면하기보다는 외부(내부)에서 원인을 당겨와 틈을 메우는 방식이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를 어떤 방식이든지 의미 부여한다는 점에서 나의 ‘의도’를 합리화시키는 종족인 것이다. 연상호와 최규석은 부정적인 상황이든, 긍정적인 상황이든 이런 인간의 심리를 다크한 형식으로 몰아간 면이 없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선사한다. 따라서 연상호와 최규석의 문법이 지루하게 반복되더라도 일정 부분 효과를 얻는 것일 테다. 자신을 온전히 응시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방식으로 쳐다봐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으니 그렇다. 인간의 한계다. 이처럼 작가의 의도를 셈해보는 것은 즐거움과 불편함을 동시에 느끼는 것이겠다.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 표지

    예술가의 ‘의도’와 관련해 또 다른 작품으로 산호의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고블, 2023)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문장 이후 『그마숲』으로 표현할 것이다. 그녀는 이 작품 전에 바다에 사는 인어와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지역의 사생활’ 부산 편인 『비와 유영』(삐약삐약북스, 2021)을 제작했었고, 의뢰자의 주문으로 제작된 케이크로 죽은 영혼을 달래는 내용을 담은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문학동네, 2021~2022)도 출간했었다. 이번 신작은 앞선 텍스트 이후, 세 번째 작품이다. 『그마숲』 2권이 출간되지 않은 상태라 온전한 글쓰기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1권에서 확인되는 세계관만으로도 작품의 성취와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값지다는 판단에 망설임 없이 쓰게 된다.

    산호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산호의 신비하고 마법 같은 ‘세계관’을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아버지의 심리적인 가정폭력으로 집에 있는 것이 불가능했던 소녀가 집 밖을 나와 부산 주변을 배회하는 내용을 담은 『비와 유영』을 있는 그대로 현실을 재현한 텍스트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소녀가 쓸쓸히 부산을 배회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나 어울리게 되는 존재가 바다에 살고 있는 동화 속 인어라는 점에서 산호의 특유한 세계관을 짐작할 수 있다. 지구에 살고 있지 않는 동화 속 인물을 소환해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인상적이다.

    같은 방식으로 『장례식 케이크 전문점 연옥당』도 마찬가지다. 이 텍스트는 단테의 『신곡』을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망자가 이승에서 영원히 떠나기 전에, 마음 편히 보내고 싶은 마음을 흥미롭게 담아놓았다. 지인이 케이크 제작자에게 망자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주고, 여러 정황과 사정을 바탕으로 케이크를 제작해 이 계절에 없는 영혼을 달래주는 내용이 이에 해당한다. 한 텍스트에 사연이 있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내용이 지속해서 펼쳐지는 작품이다. 이런 계열의 작품 또한 산호가 연출한 공간이 현실 재현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번 신작은 확실히 다르다. 현실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 앞서 소개된 두 작품처럼 리얼리즘적인 재현을 선택하진 않지만, 작가의 의도가 독특한 세계관을 경유해 치열하게 반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의도’는 바로 기후위기에 대한 불안과 모순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창작 배경과 관련해 작가가 왜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는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시대적인 담론의 흐름도 무시할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가 경험한 나무 소멸과 관련이 있다. 집 앞에 있는 무화과나무는 산호에게 계절을 선물해주었다. 산호가 경험한 이런 고마운 마음 덕분에 『그마숲』 말미에 적힌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실제로 집 근처에 있는 무화과나무를 애틋하게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봄에는 커다란 잎으로 산호에게 초록을 선물해주었고, 여름에는 작게 맺히는 열매로 기쁨을 주었다. 가을에는 열매를 취하기 위해 찌르레기와 까치가 모이기도 했으니, 무화과나무 주변은 이벤트가 일어나는 장소이다. 무엇보다도 이벤트의 하이라이트는 겨울이었다. 가지에 쌓인 싸락눈을 보았을 때, 산호는 그 순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 나무는 한 사람을 위해 신비하고 매력적인 ‘사건’을 끊임없이 선물해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건물주는 어느 날 3층 건물의 리모델링을 목적으로 무화과나무를 자르게 된다. 나무는 이제 더 이상 살아날 수 없게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주의 목적이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입주자를 들이기 위해 리모델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임대가 이뤄지지 않아 공실이 된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무화과나무를 자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인간의 욕심에 의해서 많은 사람에게 계절을 선물해주었던 생명을 지구에서 소멸시킨 것이다. 작가는 분노가 치솟는다. 우연히 방문한 마트에서도 분노와 불안은 지속된다. 애호박이 천 원에서 5천 3백 원으로 오르는 것을 목격하는 순간, 산호는 ‘재난’임을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가 한 개인의 사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생활에서의 이러한 무모함과 불안이 『그마숲』을 제작하게 만든 배경이자 ‘의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동시대의 기후위기 시대를 겨냥해 적극적으로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사회 참여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야 할 것은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방식이다. 앞서 산호의 특유한 세계관을 이야기했는데, 이런 스타일이 이번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한 명의 작가가 자신의 스타일을 변모하는 경우가 있고, 지속해서 유지하며 더욱 견고하게 자신의 포지션을 위치시키는 경우가 있는데 산호는 후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산호의 세계관이 이번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은 독자 입장에서 즐거운 일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세계관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첫째로 이 텍스트에 등장하는 여섯 인물은 모두 월정산에서 일어난 산불 피해자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산불로 인해 화상을 입었고 이러한 공통감각으로 인해 주인공들은 서로 의지하고 협력한다. 이들의 이런 경험은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의 입장과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게 해준다. 그리고 등장인물이 마녀로 설정되어 있는 세계관 또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녀는 여성 하위 부류에 속하는 존재로 여성보다도 못난 존재인 것이다. 마녀는 유럽 민간 전설에서 불행이나 해악을 가져다주는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사회에서 배척당했던 존재들이다. 작가는 이 지점을 직시한 후, 마녀가 숲을 살리고 나무를 성장시키는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능력이 『그마숲』의 세계관에서는 부정된다는 사실을 부각했다. 무엇보다 독자는 텍스트를 벗어나 이 존재를 무한대로 증식할 수 있다. 작가가 그런 대상을 주인공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소외된 존재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겠다는 ‘선언’과 무관하지 않다. 이 의도로 인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주변을 쳐다보게 된다. 즉, 산호는 기후위기 시대에 공포와 두려움을 이와 같은 설정을 통해 극복해나가려고 한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런 의도를 자연스럽게 셈하면서 작가가 숨겨놓은 연출과 표현을 즐겁게 탐닉할 수 있다.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 표지

    의도와 관련해 또 다른 작품으로 캉탱 쥐티옹의 『모든 공주는 자정 이후에 죽는다』(바람북스, 2023)를 유쾌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어린 퀴어 소년 루루와 그의 누나 카미유 그리고 이들의 엄마 이야기를 다룬다. 이 세 인물은 각자 사연이 있다. 여덟 살 꼬마 루루는 입술에 루주를 칠하고 동네 형 요요와 공주 놀이를 좋아한다. 존재할 때부터 퀴어로 태어난 것이다. 누나에겐 진득하게 사랑하는 거친 남성이 있다. 그는 카미유에게 원하지 않는 잠자리를 요구한다. 엄마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이별을 연습한다. 각자 세 인물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힘들어한다.

    이 인물들은 얽히고설키는 과정에서 각자 품고 있는 사연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아빠와 달리 누나 카미유와 엄마는 루루가 퀴어로 당당히 걸어갈 수 있게 도와준다. 카미유는 배려 없는 남자친구와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겪는 과정에서 이별을 받아들이게 되고, 엄마 역시 남편을 영원히 떠나보내게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식인 카미유와 루루를 온전히 품게 된다. 루루 엄마의 경우, 루루의 성 정체성에 대해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남편과 함께 지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이런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보다도 하나를 잃고 하나는 얻는 이야기의 설정이 흥미롭다. 이 작품은 1997년 사망한 다이애나 왕세자비Diana Frances Spencer의 죽음과 교묘하게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재미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녀의 죽음과 동시에 시작하는 이 텍스트는 ‘죽음’이라는 큰 대가를 치렀기 때문에 무엇인가 다시 생동할 수 있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즉, 루루가 ‘남성’이라는 상징적인 기표를 버리는 과정에서 누나와 엄마가 루루의 존재를 온전히 품게 된다는 설정이 그것이다. 게다가 상징적인 기표를 버렸던 루루의 사연이 교묘하게 아버지의 떠남과 연결되는 것도 ‘의도’의 영역에서 생각해볼 때 마법 같은 것이다. 루루는 변한 것이 없지만, 주변 사람들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변하게 되니 그렇다. 루루뿐만이 아니라 카미유와 엄마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버리고 헤어지고 잃는 과정에서 이들 가족 구성원들은 잘 은 찰흙처럼 예전보다 단단해진다. 작가는 이런 장면을 의도적으로 연출했을 것이고, 이런 ‘의도’를 독자들이 셈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은 물론, 놀이로서 즐겁게 참여할 수 있다.

영화 〈한강에게〉 포스터

    어느 한 시인이 첫 번째 시집을 꾸리는 내용을 담은 박근영 감독의 영화 〈한강에게〉(2019)에서도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을 셈하는 것은 흥미롭다. 첫 시집을 준비하는 시인 진아는 오래된 연인인 길우를 잃는다. 이 사건으로 시집 작업은 진행되지 못한다. 하지만 진아가 길우를 애도하는 과정에서 시집은 묶이게 되고 결국 출판된다는 내용이다. 중요한 것은 잃은 애인에 대한 ‘애도’를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관건일 것 같은데, 감독의 이 의도를 생각하는 것은 흥미롭다. 우선, 진아는 시를 쓰는 시인이기도 하지만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이기도 했다는 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그녀가 수업 시간에 시를 쓸 때 멈추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은 흥미롭다. 시를 멈추지 않으면 나만의 ‘나’를 찾게 된다는 수업 내용이 그것이다. 학생들은 진아의 말을 듣고 웃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정작 진아는 애인을 잃은 슬픈 마음으로 인해 시를 쓰지 못하고 있으니 강단에서 말한 시 쓰기 작법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아가 무기력하게 가만히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가만히 있기는 했으나 삶을 ‘견디고’ 있었다는 점에서 계속해서 시 쓰기를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한강에게〉: 진아와 동료의 가식적인 대화 장면

    가령, 다음과 같은 장면이 이에 해당하겠다. 진아는 시인이니 낭송회나 모임에 아픔을 달고 방문한다. 그곳에서 동료들과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함께 나눈다. 그러던 중, 잠시 쉬기 위해 진아는 서점 밖에서 담배를 피운다. 그때 동료와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진아는 동료 문인으로부터 ‘그런 상황에서 글 쓰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라는 말을 듣는다. 이런 말이 고맙다. 그런데 이 말을 한 당사자는 지속해서 말을 잇지 않고 아는 선배와 함께 사라져버린다. 당혹스럽다. 자신의 처지를 위로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곧바로 이 감정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진아는 이런 과정을 견디면서 시 한 편을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또 다른 장면은 틈으로 변한 길우의 구멍을 다른 존재로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지독하게 고독하고 힘들고 외로웠던 진아는 길우의 빈 공간을 그렇게라도 채우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어리석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깨달은 진아는 성적 행위를 멈춘다. 진아는 또다시 길우의 빈 공간을 견디게 된다. 이 영화에서 진아는 시 한 편을 오랜 시간 완성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끝끝내 완성하게 되고 시는 묶여 시집으로 출간된다. 따라서 감독의 의도는 정확하게 떨어진다. 학생들에게 시를 쓸 때 멈추지 말라고 했던 행위는 ‘견디는’ 방식으로 완성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시를 빨리 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속도도 각자 다르다는 것을 느낄 필요가 있다. 한 편의 시를 하루 만에 쓰는 사람이 있고, 몇 개월에 걸쳐서 완성하는 작품이, 시인이, 그런 삶이,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그 어떤 시론서보다도 잘 보여주는 작품 같다. 진아는 끝끝내 「한강에게」라는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심대섭의 『투명한 남자』는 참 독특한 텍스트다. 나는 2021년에 출판된 이 작품의 ‘의도’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지 모르겠다. 이 책의 부제는 ‘자각생自覺生’이다. 자신을 갱신한다는 의미를 담았다. 책 앞부분에 수록된 저자의 에세이는 일반 독자들이 접하기에는 다소 파격적이다. 대체 무슨 고백이기에 나는 파격적이라는 단어를 쓴 것일까. 그것은 칙칙하고 우울했던 자신의 솔직한 삶을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는 어느 한 시인의 발언처럼, 누군가의 삶과 고통이 특이할 것은 없다. 사연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고, 사연이 없는 사람 또한 없으니 그렇다. 하지만 그의 고백이 의미 없지 않은 것은 독특한 색을 지니고 있어서다. 그것이 연출인지, 혹은 실제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으나, 텍스트는 어떤 방식이든지 기표의 형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의 고백은 고백을 넘어선 ‘고백’3이 된다.

심대섭 작가의 첫 책 『투명한 남자』의 표지

    작가의 의도적인 고백은 『투명한 남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동한다. 이 에세이는 이 작품이 끝나는 시점에서 ‘사후적’으로 적혔기 때문이다. 즉, 텍스트의 씨앗은 이 에세이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지저분한 공중화장실”로 명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화자’는 좀처럼 보통의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 그가 구원의 대상으로 삼은 존재가 종교나 선각자가 아닌, ‘창녀’나 ‘AV’ 배우였다는 사실은 사실상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갈망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종교나 선각자가 구원의 대상이 된다는 보장이 없지만, 절규의 대상이 이색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실제의 삶에서도 그는 사랑의 대상을 가까운 곳에서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의 이러한 이행은 불가능한 대상을 향해 걸어간 실패의 발걸음이었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는 살아낼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왜 이런 삶을 선택한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이러한 선택으로 인해 『투명한 남자』도 불가능한 사랑에 대해 논하게 된다는 점을 독자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작품에서 불가능한 사랑 이야기가 침입하는 것은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제시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특징은 작가가 경험한 게임 프로그램이나 영향력의 자장 안에서 「LUCID MAN」이라는 액자식 구성물로 재생된다. 심대섭이 게임을 즐겼다는 사실은 동시대의 게임 문화를 반영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연주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삶과 인생의 의도적인 연출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변주’의 형식을 음미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수감 생활 같았던 유년 시절, 작은 거울은 원철의 유일한 장난감이었다. 반사된 햇볕을 세상 곳곳에 보내거나 거울 속에 세상을 담으며 시간을 보냈다. 거울 속 세상과 자신은 안전해 보였다. 가장 좋아하는 건 거울을 통해 하늘을 보는 일이었다. 까마득히 먼 곳의 구름이나 비행기가 눈앞의 작은 조각 안에 그려지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4

    그는 불행했던 자신의 유년에 대해 이처럼 서술한다. 그에게 유일한 장난감이 거울이었다는 사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거울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과 세상의 풍경은 유년의 ‘나’와는 사뭇 달랐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면 닿을 수 없는 대상을 거울을 통해 끌어당겼을 수도 있다. 이 행위를 통해 ‘나’와는 또 다른 나를 찾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러한 측면에서 작가가 표지로 거울의 형식을 ‘의도’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물론, 표지 제작이 작가의 계획된 의도가 아닌 편집자의 의도라 할지라도 은박지처럼 반사된 채 누군가의 얼굴을 비추고자 했던 ‘의도’는 이 작품과 무관하지는 않다. (훌륭한 편집자는 작가의 대리인이기도 하니까.) 여하튼 이 텍스트는 내 모습이 아닌 숨겨진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거울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는 책의 표지(형식)와 내용을 통해 당신의 삶은 어떠했냐고 반문하며 독자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무의식이 의식의 형태로 분출될 때 찌그러지는 고백의 형태도 존재하지만, 심대섭은 눈치 보지 않고 고백의 형식을 건축한다.

    누군가는 그의 수위 높은 표현들을 문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심대섭의 의도5된 연출이다. 작가는 악인도 괴물도 사이코도 살인자도 만들 수 있다. 인물은 단지 다양한 삶의 하나일 뿐이다. 그의 삶이 부정되더라도 그렇게 뿌리내려진 삶인 것을 어떻게 외면하랴. 이런 삶 역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한 인간의 모습이다. 텍스트는 환상 속에서 재생된 표현들이지만, 그런 환상을 재생시킨 이곳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 동시대가 이런 표정을 죄로 치부하더라도 이 죄 역시 동시대에 공존하는 감정인 것이다. 사회의 다양한 시선을 쳐다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작가의 ‘의도’는 이처럼 놀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평가의 대상이 된다. 독자는 이 내용을 보고 냉정하게 비판하고 평가하면 그만이다.

    심대섭은 아래의 시처럼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도 했다. 눈물을 일상처럼 벽에 걸어두어야 하는 삶, 가시에 젖은 채 몸을 움직여야 하는 삶, 종이로 세운 집에서 몸을 움츠리고 버텨야 했던 삶, 지은 죄로 인해 일어날 수 없었지만 일어나야 했던 삶의 흔적이 아래의 시에 숨겨져 있다. 이 작품은 그의 텍스트 마지막에 수록된다.

    씻김 받은 남자
    가시에 젖어
    투명한 몸
    돌을 안았네

    얼어 누운 여자
    피를 덮고
    남은 눈물
    벽에 걸었네

    종이로 세운 집
    음악으로 버티고
    죄가 있어도
    꽃이 심심하네6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덧붙여보려고 한다. “너만의 탑을 쌓아 가거라. 풍요롭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거라.7 이 말은 작가의 ‘의도’를 위한 말이며, 독자의 ‘놀이’이자 평론가에게는 윤리적인 ‘평가’의 영역이 된다. 그러니 평가 이전에 ‘의도’를 셈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정의롭고 아름다운 것은 쓰기 쉽지만, 추한 것을 추하다고 기록하는 행위는 곤혹스럽다. 하지만 이런 요소도 작가의 ‘의도’에 속한다. 독자들은 의도와 놀이를 즐겨보시길 바란다. 이 평론의 형식도 글의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들여쓰기를 쓰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일부러 익살맞은 의도를 이행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의도를 밀어내고 웹진으로 전환된 『작가들』의 세로 스크롤 형식에 부합하기 위해 문단을 나누고 옴니버스 형식으로 사진을 첨가해 발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것도 의도 중에 하나다. 이것은 평론가의, 예술가의, ‘의도’이고 ‘놀이’이다.
  
  

문종필

2017년 계간 『시작』에 「멈출 수 없는 싸움」으로 문학평론, 2021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 「그래픽 노블의 역습」으로 수상하면서 만화평론을 시작함. 문학평론집 『싸움』이 있음. 『싸움』으로 2023년 제5회 ‘죽비 문화 다 평론상’을 수상함.

    
    

〈주석〉

  1. 노엘 캐럴, 「예술가의 의도와 비평적 평가 사이의 관련성 제1부」, 『비평철학』, 이해완 옮김, 북코리아, 2022, 98쪽.
  2. 연상호·최규석, 『계시록』, 문학동네, 2023, 246쪽.
  3. 여기서 고백은 심대섭 작가 개인의 유년 시절에 대한 것이다. 일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원철)는 자신을 “지저분한 공중화장실”로 비유한다. 자신을 그 누구도 찾아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게 비유한 것이다. 유년 시절에는 아무도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았다. 청소년 시절 배달 일을 한 것은 그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그에게 아르바이트는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돈을 손에 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는 새벽 1시부터 오전 7시까지 비디오방에서 일했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모텔에 갈 수 없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커플”이었다. 그들은 러닝타임이 긴 비디오를 고른 후, “섹스나 영화”가 끝나면 질주하듯 ‘그곳’을 도망쳤다. 그는 이곳에서 “베드 소파에 흥건한 손님들의 애액 자욱에 얼굴을 묻고 자위”했다. 이곳에서 “소파에 남은 낯선 여자들의 내밀한 흔적은 실제 여자보다 더 여자 같았다.”라고 믿었다. 비디오방 사장 부인과 성관계를 하기도 했다. 서른두 살인 그녀는 고등학생인 그와 섹스했다. 1주일 후 “그녀는 원철에게 5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며 그만 나와” 달라고 통보한다. 원철은 연습장에 그녀의 얼굴을 그려 선물해주었다. 원철은 미성년자인 자신이 강간당했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를 사랑해주지 못해 미안해했다. 그림을 제법 잘 그렸던 원철은 비디오방에서 입시 미술학원으로 아르바이트를 옮겼다.

        공간이 옮겨지면서 그의 고백도 달라졌다. 원철은 이곳에서 재능을 인정받았지만, “학원에 비치된 미술이나 디자인 잡지를 보면 알 수 없는 혐오감만 들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좋게 볼 수 없었다. 다 가짜 같았다.” 이러한 고백 때문인지 그는 제도권에 안착하지 못한다. 가짜를 진짜라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만화도 이런 표정을 닮아간다. 결국, 그는 대학을 포기한다. 그 이후에 “게임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꿈을 품게 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채워나간다. 원철은 이 시기를 행복한 시절로 기억한다. 공간은 또다시 ‘군대’로 옮겨진다. 그곳에서도 원철은 적응하지 못한다. 허해진 마음으로 인해 휴가 때마다 “자신을 구원해줄 창녀”를 찾았다. 휴가 미복귀로 영창을 다녀오기도 했고, 자해를 하기도 했다. 전역 후에는 FPS 게임만 했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입시 학원에 손길을 내밀었다. 하지만 입시 제도가 변했기 때문에, 자신이 잘하던 것을 내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배달 일과 주유소 등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그는 약해졌다. 그래서 서른 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와 동일한 삶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그는 10년의 시간을 흘려보내게 되었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배달 일, 주유소, 기독교 청소업체, 미래를 위해 캐드, 3D, 웹디자인, CSS 등을 배웠다. 그가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편의점 일과 노가다였다. 실제로 ‘노가다’는 『투명한 남자』에서 핵심 소재로 등장한다.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했지만 “아리스라라는 AV 배우”만은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본다’는 행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간접 체험이 아닌 직접 체험이며 그게 실물이든 화면이든 상관없다.”고 믿었다. 그러니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는 ‘아리스라’의 모습은 가상이 아닌 현실적 사랑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 그는 아리스라를 진심으로 마음에 품었고 많은 돈을 후원했다. 끝내는 고액을 후원한 대가로 팬으로서 AV 배우의 팬티를 얻게 된다. 원철은 그녀로 인해 ‘구원’ 받았다고 고백한다. (심대섭, 「투명한 남자」, 『투명한 남자』, 로프 에디션스, 2021, 9~20쪽.)

  4. 심대섭, 「투명한 남자」, 위의 책, 17쪽.
  5. 심대섭은 텍스트를 시작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내걸었다. 옮겨놓으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은 다양한 트리거 요소를 다루고 있습니다. 해당 트리거 요소에 민감하신 분은 감상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건설 노동 및 재하청 시스템, 공황 발작 및 구토, 군대와 군 병원 및 영창, 나체와 성기 및 환부, 남성과 여성 및 청년 비하, 노인에 대한 성행위와 폭행 및 폭언, 동물의 죽음 및 장애, 매춘 및 AV 배우, 무면허 운전 및 음주 운전, 미성년자의 성행위와 자위행위 및 섹스어필, 불법 매장 및 장례, 비밀번호 해킹과 개인정보 열람 및 불법 다운로드, 사이버불링과 일베 용어 및 욕설, 산업재해와 안전 불감증 및 근로기준법 위반, 살인과 자살 및 자해, 성인의 성행위 및 자위행위, 속옷 페티쉬 및 냄새 페티쉬, 신체 변형 및 탈모, 아동 학대 및 청소년 노동, 알코올과 담배 및 본드 중독, 절도와 주차선 침범 및 쓰레기 무단 투기, 정치적 발언 및 욱일기, 쥐와 바퀴벌레 및 구더기, 콤플렉스와 자기혐오 및 가스라이팅, 포르노 및 여성, 하반신 마비 및 심한 요통, 환시와 환청 및 불면증.”
  6. 심대섭, 「자각생」, 같은 책, 233쪽.
  7.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2023년 애니메이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the Boy and the Heron〉 대사 일부를 옮겨놓았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