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개념정원 〈20회〉: 아이러니와 근대성

  

‘문제적 개인’의 아이러니

    『소설의 이론』의 저자 루카치는 소설의 핵심 원리를 일컬어 아이러니라 했다. 소설novel이라는 근대적 서사 장르(‘novel’은 근대 유럽에서 활성화된 장편소설을 뜻한다. ‘소설’이라는 한국어는 길이와 무관하게 지어낸 이야기 일반을 뜻하므로 ‘fiction’에 해당한다.)의 겉모습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다 죽는 이야기, 곧 전기의 형태를 지닌다. 하지만 그런 정도의 외적 규정으로는 근대 장편 서사문학으로서의 소설의 핵심을 규정하기는 어렵다. 사람의 일생이라는 외형으로 보자면, 소설은 중세나 고대의 서사 장르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의 본질적 규정으로서 루카치가 주목하고자 했던 것은 소설의 ‘내적 형식’이고, 아이러니는 바로 그 내적 형식의 핵심 항목에 해당한다.
    『소설의 이론』에서 아이러니는 세계와 주체의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면서 또한 인물들의 마음이나 통찰력 혹은 의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소설이 포착해내는 세계는 망가져 있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 역시 부서져 있다. 세계는 절망적이어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지만, 그 상태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은 더욱더 절망적이다. 그래서 주체는 세계의 현재 상태에 맞서 뭔가를 할 수밖에 없고 결과적으로 세계와의 불화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처럼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어 문제를 일으키는 인물이 곧 ‘문제적 개인’이다. 좁은 의미에서의 아이러니는 바로 그 ‘문제적 개인’의 복잡한 내면 상태와 행위를 지칭한다. 소설은 아이러니의 힘이 동력이 되어 만들어지는 이야기로서, “문제적 개인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103쪽)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소설이 구현해내는 아이러니의 세계는 고대 서사시와의 대조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루카치에 따르면, 소설은 “신에 의해 버림받은 시대의 서사시”(113쪽)이다. 『일리아드』나 『오디세이아』 같은 서사시에서는 신이 직접적인 행위자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신은 인간계를 넘어서 있는 초월적 절대자로 군림하며 그 뜻이 인간 세계에 그대로 관철된다. 루카치의 용어법을 따르자면 그것이 곧 ‘총체성’이 갖추어진 세계, 혹은 ‘완결된 세계’의 모습이다. 여기에서 총체성이란 사람이 사는 세계가 초월자인 신의 뜻이 제대로 구현되어 있어서, 신의 시선으로 볼 때 매사가 조화롭고 아름다운 상태를 뜻한다. 그런 세계가 실제로 존재했느냐 혹은 존재할 수 있느냐와 무관하게, 서사시라는 매체에 포착된 세계의 모습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근대의 산물인 소설에는 그런 위력적인 절대자로서의 신은 존재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서사시적 총체성 역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 소설의 세계 한복판에 서사시적 세계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인간 위에 군림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던 초월적 절대성은 사라졌지만, 사람 사는 세상 안에 있어야 할 내재적 절대성에 대한 강렬한 희구가, 혹은 세계의 총체성(한때는 있었으나 이제는 사라져버렸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을 회복하고자 하는 갈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가 상실해버린 세계의 총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희원과 갈망이, 문제적 개인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서의 아이러니이다. 루카치는 그것을, “신으로부터 버림받은 세계가 신에 의해 충만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능력”(119쪽)이라 표현했다. 사라져버린 초월적 절대성의 자리에서 새롭게 내재적 절대성이 생겨나고 있음을 간취해내는 것이 곧 아이러니의 시선이다. 그런데 그런 총체성 같은 것은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갈망 자체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아이러니가 만들어내는 세계의 비전은 환각이나 환상 같은 것이 아닐 수 없다. 현실에서 벗어난 열망과 이상이 짙게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환각이 세상을 움직이고 그리하여 어떤 현실적 결과를 만들어낸다면 그 환각을 단순한 착각이나 허위라고 할 수는 없다. 오해가 진실에 이르게 하고, 착각이 진리에 도달하는 힘이 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상적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데 환각의 아이러니는 오히려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이러니와 근대적 주체

    소설이라는 장르나 아이러니라는 개념은, 그것이 문예학이나 수사학의 항목에 국한된 것이라면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이 우리 시대 사람들의 마음의 삶을 재현해온 대표적 서사 양식임을 고려한다면 사정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근대적 주체의 마음은 곧바로 근대성의 핵심 원리와 이어져 있는 것이라서, 소설에 대한 접근은 곧 우리 시대 삶의 핵심 원리에 대한 접근이 되기 때문이다. 청년 시절 루카치가 쓴 『소설의 이론』이 명저로 평가받는 것도, 근대적 주체가 지닌 마음의 기본 형식에 접근하고자 했던 까닭이다. 그런 접근의 핵심에 놓여 있는 것이 아이러니라는 개념이다.
    아이러니라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 쓰임을 가진다.
    첫째는 수사학적인 용어로, 반어反語라는 말로 번역된다. 반어는 말 그대로, 자기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대로 말하는 경우를 뜻한다. 이를테면, 죽어도 눈물 흘리지 않겠다는 말은 죽을 만큼 슬프다는 뜻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엇나가는 중2병 자식을 지칭하여 미워 죽겠다고 말하는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애호가 마음의 바탕에 있어야 가능한 표현이다.
    둘째는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를 낳거나 모순에 빠져버린 역설적 상황을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 오이디푸스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혼인하리라는 자기 운명을 알고 그런 비극을 피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자기 운명을 피하려 한 바로 그 노력 때문에 오히려 비극적인 운명에 도달하게 된다. 또래 중 가장 건강관리를 잘 하려 했던 사람이 뇌일혈로 사망해버린 장례식장에서, 친구들의 마음을 스쳐가는 정서 역시 이런 아이러니에 대한 반응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아이러니는 역설이라는 단어와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셋째는 낭만적 아이러니라고 통칭되는 쓰임이다. 세계와 인간 사이의 고전적 조화가 돌이킬 수 없이 깨져버린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지니게 되는 마음의 상태나 그와 연관된 행동을 지칭한다. 근대 독일 낭만주의자들의 사상과 작품이 이를 잘 포착해내고 있어 낭만적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아이러니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독일의 낭만주의 이론가 슐레겔에게서 대표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에서 개진되는 아이러니에 관한 논리도 낭만적 아이러니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근대적 주체와 관련하여 문제가 되는 아이러니는 바로 이 세 번째 아이러니이다.
    근대성의 세계에서 주체로 산다는 것은 자기 힘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입각해서 행동하고 책임지는 자율적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어떤 외적 강제나 권위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는 존재가 곧 근대적 주체이다. 실체로서의 절대자가 제거됨으로써 생겨난 이런 상황은 근대 과학과 사상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이런 상황으로 인해 근대적 주체에게는 달갑지 않은 선물이 주어졌다. 무한 공간으로서의 우주라는 무시무시한 모습의 세계가 근대적 주체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별 먼지의 자식이 된 인간은 사막의 모래알보다 하찮은 존재가 되었다. 이 엄청난 무한성의 황무지에서, 복종할 존재가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은 영웅적이지만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근대적 주체에게 생겨난 존재론적 불안 혹은 실존적 불안(여기에 대해서는 3회에 썼다.)은 이런 정황의 산물이다. 자기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회의와 불안이 곧 그것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주체는 어떤 식으로든 판단하고 움직여야 하며 그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인간이 움켜쥔 확실한 사실이 하나 있다는 점이다. 세계의 실상에 대해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점이 곧 그것이다. 이것이 곧 ‘무지의 지’(여기에 대해서는 17회에 썼다.)이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모른다. 자기 처지와 능력치의 한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제대로 된 어른이 될 수 있다. 아이러니를 아는 근대적 주체는 최소한 어린아이는 아니다. 루카치가 소설을 일컬어 ‘성숙성의 형식’이라고 말했던 것도 그런 뜻이다. 소설은 동화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이러한 자기 제한, 즉 세계와 자아의 본모습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한 축으로 하고, 회의주의와 불가지론의 황무지에서 주체가 원하는 지적 확실성과 절대성에 대한 갈망을 다른 축으로 삼고 있다. 냉정한 자기 인식과 자기 지양에 대한 열망이 팽팽하게 얽혀 있는 상태가 곧 근대적 주체의 마음으로서 아이러니에 해당한다.
  

이율배반antinomy

    칸트에 의해 정식화된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은, 세계의 실상에 대한 인간의 근본적 무지를 논리화해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율배반이란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두 명제가 모두 거짓이거나 혹은 동시에 참임이 논증되어 논리적 난관에 봉착한 경우를 뜻한다. 『순수이성비판』에 등장하는 네 개의 이율배반 중 앞의 두 개가 세계의 이해불가능성에 대해 다룬다. 칸트는 이를 수학적 이율배반이라고 칭했다. 인간의 자유와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를 다루는 세 번째와 네 번째 이율배반은 역학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첫 두 개의 이율배반은 각각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무한대의 영역과 무한소의 영역을 다룬다. 둘을 요약하자면, 첫 번째 이율배반은 ‘세계는 시간적 시작과 공간적 한계가 있다, 없다’이고, 두 번째 이율배반은 ‘세계는 분할 불가능한 단순한 부분들의 합성체이다, 그렇지 않다’로 요약된다.
    첫 번째 이율배반에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유한성과 무한성이다. 세계에 시작이 있다고 하면 그 시작 이전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시작이 없다고 해야 할까. 세상에 시초나 시작이 없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세계의 공간적 한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결론이 나온다. 세계가 유한하다면 그 너머는 세계 밖이라는 것인가. 세계 밖은 세계가 아니라는 것인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와 반대로 세계에 한계가 없다면, 세상에 한계가 없는 존재가 어떻게 있을 수 있나,라는 말이 바로 따라 나온다. 요컨대 둘 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이 칸트의 결론이다.
    무한 분할의 문제를 다루는 두 번째 이율배반도 마찬가지이다. 세계가 분할 불가능한 단순체의 합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명제에 대해, 칸트는 그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모두 그르다고 논증한다. 세상의 존재자들은 모두 쪼개질 수 있는 부분들로 이루어진 합성체이다. 세계가 합성체인 이상, 세계를 이루어내는 최소 단위를 전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와 반대로 분할 불가능한, 원자 같은 어떤 단순체를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칸트에 따르면, 아무리 작은 단순체라도 공간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데, 분할 불가능한 공간은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분할 불가능한 단순체 역시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율배반에서 초점이 되는, 가장 작은 단순체의 실재성은 물질의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당시에 원자나 단자 같은 이름으로 상정되었던,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로서의 단순체가 실재한다면, 세계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로서 그것은 불변의 영원성을 지닌 것일 수밖에 없다. 사람에게 그것은, 분할될 수도 파멸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의 영혼이 된다. 이런 존재의 불확실성에 대해 논증하는 칸트는, 물리적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 영혼의 실재성에 대해서도 이율배반에 해당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맞서 있는 명제는 하나가 참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이어야 한다. 그런데 칸트가 제시한 두 쌍의 명제들은 모두 거짓이다. 그래서 이율배반이다. 이 두 개의 이율배반이 지시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의 지적 무능력이다.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은 바로 이 두 개의 미지의 영역, 무한대의 영역과 무한소의 영역에 대한 20세기의 물리학이 내놓은 답변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칸트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여전히 세계는 전모가 파악될 수 없는 미지의 것이고, 자기 사는 세계의 본래 모습조차 모르는 인간은 지적으로 무능한 존재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인 뉴턴 역학의 영역과는 달리, 우주 공간을 다루는 상대론과 원자의 세계를 다루는 양자론의 영역은 보통 사람의 감각과 직관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다.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얽혀 시공간을 이룬다든지, 절대적 척도라고 생각해온 시간과 공간이 천문학적 속도나 질량이 개입한다면 느려지거나 휘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특수 상대성 이론, 한발 더 나아가 우주의 시공간은 본래 그 자체가 휘어지고 비틀려 있다고 하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세계는 인간이 지닌 지각의 구조로는 이해될 수 없는 영역이다. 양자 역학이 다루는 원자 내부의 세계 역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궤도에서 궤도로 순간 이동(양자 도약)을 하는 전자의 모습 같은, 보통 사람의 물리적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기이한 현상들이 양자 역학의 세계에서는 엄연한 사실이자 기본값으로 존재한다.
    이해할 수 없는 이 두 세계의 질서에 대해, 과학자들은 관측하고 계산하며 공학자들은 그 결과를 이용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 우리 삶을 구성하는 전자문명의 세계이다. 양자론과 상대론이 담당하는 이 두 무한세계의 현상들이 기이하게 보이는 까닭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기이해 보이는 것이 세계의 본래 모습이며, 그것을 기이하게 느끼는 것은 인간이 지닌 인지 체계의 구조적 한계와 무지 때문이라 함이 곧 그것이다.
    인간은 세계에 대한 관찰자이지만 그와 동시에 세계의 일부이기도 하다. 자기 세계의 본모습을 알지 못하는 인간이니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역시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근대인은 스스로에게 복종하는 주체가 되어 자율적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그것 자체가 이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칸트의 세 번째 이율배반은 바로 그런 역설적인 모습을 논리화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원인의 결과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모두 원인과 결과라는 사슬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람도 그런 인과 필연성에 종속된 존재인가. 그렇다면 어떤 개체의 자율성도 자유도 허용될 수 없고, 인간 역시 자율적 주체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해 칸트는 세계의 인과 필연성도 옳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 함도 역시 옳다고 말한다. 서로 모순되는 것이 둘 다 옳으니 이율배반이 된다. 네 번째 이율배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가 있다, 없다’라는 명제들은 절대적 초월자이자 자기 원인으로서의 신의 존재에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는 논리의 아이러니를 표현한다.
    칸트의 네 개의 이율배반은 그 자체가 근대적 주체가 당면한 아이러니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자면,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면서도 스스로 자율적인 주체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그야말로 엉뚱하고 하찮은 존재가 곧 근대적 주체이다. 주체 앞에 근대적이라는 한정어가 붙는 것은, 자신의 무지에 대한 파악이 근대성의 출현과 함께 이루어진 까닭이다.
    그런데 하루살이와 다를 것 없는 그 존재들이 자신의 하찮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불멸의 절대성에 대한 가눌 수 없는 그리움을 품게 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전통 세계에서는 공동체의 신앙과 인륜적 절대 가치를 제도화함으로써 인간의 무상감을 채워왔다. 근대적 주체는 양쪽으로 열린 무한 우주 앞에 홀로 서 있는 존재이다. 그런 사람이 지닌, 감당할 수 없는 공허감과 고독이야말로 칸트적 인간학의 원천이자 이율배반과 아이러니의 밑바탕에 해당한다.
  

가격과 가치, 제논의 역설

    아이러니는 기본적으로 불일치로 인해 생겨나고 작동한다. 말과 뜻의 불일치, 의도와 결과의 불일치, 생각과 행위의 불일치 등이 아이러니의 공간을 만든다. 생각과 다른 말이 잘못 나와서 커다란 곤경에 빠지기도 하고, 친구를 돕자고 벌인 일이 오히려 내 인생의 결정적 이득이 되기도 한다. 우발성과 우연성의 세계 속에서 주체는 세계의 균열 및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와 대면해야 하며, 그 안에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세계의 균열을 채워내고 혹은 분열을 생산하며 불일치를 버텨낸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근대성의 핵심 공간은 시장이다. 시장은 불일치라는 조건 자체를 자기 존재의 기본값으로 지닌다. 가격과 가치 사이의 불일치가 이를 대표한다. 수시로 나타나는 할인과 덤핑, 바가지, 가격 파괴 등이 가치와 가격 간의 간극을 보여주는 예이지만, 가장 상징적인 예는 주식 시장의 경우를 들어야 한다. 왜 주식시장인가. 상업자본에서 산업자본을 거쳐 금융자본으로 나아가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적 행로이다. 시장 중의 시장은 금융시장이며 주식시장이 그 정점에 있다. 주식시장은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 모두를 자본가로 만든다. 사용가치의 생산이 개입하지 않은, 이익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순수한’ 시장이 곧 주식시장이다.
    주식 투자자의 눈으로 보자면 주식시장은 거대한 아이러니의 공간이다. 가격과 가치가 다양한 방식으로 어긋나 있는 상품들이 곧 주식이라는 금융상품들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현재 실적이라는 객관성과 그 기업의 미래에 대한 판단이라는 주관성이 결합된 결과가 해당 주식의 가치이다. 주식의 가치가 기의라면 주식의 가격은 기표에 해당한다. 주식의 가격은 매일매일 분초를 다투며 오르내리고, 주식의 가치는 조용히 버티며 천천히 움직인다. 현명한 주식 투자자는 한없이 요동치는 주가 변동의 물결 속에서, 기업 가치라는 커다란 흐름을 통찰해내는 스토아의 현자와도 같다. 그에게 장차 이익을 가져다줄 주식을 고르는 일이란 가격과 가치의 불일치라는 아이러니를 꿰뚫어보는 일이자, 동시에 주식 거래를 통해 아이러니를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투자자가 이익이나 손해를 실현해야 하는 순간이 되면 가치 역시 가격으로 환원될 것이다. 주식의 가격은 극단적인 변동성을 지닌 것이지만, 가치 역시 불변의 것일 수는 없다. 내재적인 것으로서의 가치는, 미래의 어느 순간이건 간에 가격으로 환원되어야만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럼에도 가치와 가격의 정확한 만남은 불가능하다. 주식이 매매되는 바로 그 순간에도,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주식의 가치는 너무 저평가되었거나 고평가되어 있다. 가격과 가치의 이 같은 불일치는 서로 다른 판단과 매매와 흐름을 만들어 시장 전체에 거래의 핵심 동력을 제공한다. 사람의 말 속에서 기표와 기의의 어긋남이 소통을 만들고 언술 주체의 영역을 확보해내는 것과도 같다.
    가격과 가치의 관계는 욕망과 그 대상의 관계와도 같다. 라캉과 헤겔을 겹쳐 읽은 지젝은, 아무리 발이 빠른 아킬레스라도 거북이를 잡을 수 없다는 제논의 역설을, 인간의 욕망과 그 대상과의 관계로 읽고자 했다. 욕망의 주체가 그 대상을 포착하지 못하는 것은, 흡사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발 빠른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할 수는 없다. 욕망과 그 대상으로 바꿔 말한다면, 아킬레스가 거북이를 잡지 못한다는 말은 그가 거북이에 미치지 못하거나 혹은 지나쳐버린다는 뜻이 된다. 대상에 도달하는 순간 욕망의 주체는 그것이 이미 욕망의 진정한 대상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욕망과 그 대상 사이의 불일치라는 역설은, 결코 한자리에 정주할 수 없는 것으로서 욕망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역설이 된다.
    주식의 가격이 아킬레스라면 가치는 거북이다. 가격은 가치의 뒤를 좇아가지만 결코 가치를 붙잡을 수 없다. 붙잡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가치는 한발 앞에 있거나 한발 뒤에 있다. 가격과 가치의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이 같은 아이러니의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거래는 생겨난다. 어떤 사람은 비싼 값이라고 생각하고 파는데 상대방은 싼값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가치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이 마주치는 순간의 일이다. 또한 돈이 급해서 싼값에 팔아야 하는 경우의 물건은 명백하게 가치와 가격이 어긋나 있다.
    동일한 물건을 보는 관점의 불일치, 자발적 계약과 등가교환이라는 형식적인 일치 속에 잠재해 있는 내면의 불일치가 거래를 만들고 거래는 쌍방을 주체로 만든다. 현재의 가격을 지불하고 미래의 가치를 사는 주식 투자자는 근대적 주체의 원형에 해당한다. 근대적 주체가 미래 가치를 위해 지불할 수 있는 것은 화폐만이 아니다. 가격 속에서 가치를 바라보는 욕망의 주체들은 아이러니의 공간에서 아이러니를 실천하는 아이러니의 주체들이다.
  

아이러니의 실천

    소설가 이상은 “그대는 이따금 그대가 제일 싫어하는 음식을 탐식하는 아이러니를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소.”라고 썼다. 이런 경우 아이러니의 실천은 의식적인 것이지만, 근대적 주체의 행위는 그 자체가 아이러니의 실천에 해당한다. 프로이트가 밝혀준 바와 같이 사람은 무의식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라는 규정은 착각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율적 주체라는 전제 아래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살아야 한다. 게다가 어떤 참됨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오해나 자기기만이 필수적이라고, 라캉과 헤겔을 겹쳐 읽은 지젝은 주장한다. 그런 주장이 말이 된다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1951)의 예를 들어보자.
    뉴욕 맨해튼에 사는 16세의 고등학교 퇴학생 홀든은 서부로 가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자 한다.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망을 보는 보호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서부에는 그런 호밀밭이 없고 당연히 거기에서 뛰노는 어린이도 있을 수 없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겠다는 생각조차도,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소녀의 노랫말을 잘못 들은 때문에 시작된 것이다. 12세의 똑똑한 여동생은 서부로 떠나겠다는 말썽쟁이 오빠를 붙잡아놓으려고 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홀든이 서부로 떠나지 못한 채로, 자기 동네에서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어린 여동생을, 혹시나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으로 맺어진다. 그러니까 홀든이 가고자 했던 호밀밭은 서부나 스코틀랜드의 골짜기가 아니라 바로 자기 동네에 있었고, 그곳에서 그는 이미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어 있는 것이다. 홀든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자기가 이미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었다는 사실인 것이다.
    여기에서 홀든을 아이러니의 주체로 만드는 것은 착각이나 오해 혹은 잘못된 믿음이다. 서부로 가면 호밀밭이 있으리라는 믿음(잘못된 믿음, 즉 오해, 즉 필연적 오인)이 언제 어디서나 그가 있는 공간을 ‘호밀밭’으로 만들고 거기에서 그는 ‘호밀밭의 파수꾼’이 된다. 그럼으로써 그가 수호하고자 하는 순수성은, 순수성을 위협하는 위험한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홀든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그러니까 순수함의 옹호자가 됨으로써 홀든이 이뤄낸 것은, 여동생이나 어린이들에 대한 구원이 아니라 자기 구원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자기도 모른 채로 이미 행하고 있는 홀든은 아이러니의 주체가 되어 있다.
    라캉은 자기 인식이 기본적으로 오인誤認, méconnaissance으로 구성된다고 했다. 이 단어는 자기 인식me-connaissance, self-recognition이라는 개념에 대한 프랑스어식 말장난이지만, 그 바탕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놓여 있다. 실제로 남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 혹은 남들이 듣는 방식으로 자기 목소리를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거울이나 카메라나 녹음기 같은 것들의 도움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매체에 의해 재현된 것 역시 정확히 자기 자신의 모습이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런 생각을 수긍하게 한다.
    아이러니의 주체는 그러나 바로 그다음 순간에 출현한다.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자기가 사는 세상의 진짜 모습이 어떠한지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만 하고 의미 있는 일을 행하려 하며,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지려 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근대적 주체에게 일상화된 아이러니의 실천이자 행위의 영역이다.
 
 

후주

『소설의 이론』의 인용은 루카치, 『소설의 이론』(반성완 옮김, 심설당, 1985)에 의거했다. 최근 판본인 『소설의 이론』(김경식 옮김, 문예출판사, 2004)에서는 아이러니가 반어로 번역되어 있다.
낭만적 아이러니의 개념에 관해서는 박현용, 「낭만적 아이러니 개념의 현재적 의미─슐레겔의 이론을 중심으로」」(『독일문학』 22집, 2004)가 상세하다.
루카치는 소설을 “성숙한 남성의 형식”이라고 썼다. 남성만이 주체일 수 있던 시대의 소산이다. 여기에서 긴요한 것은 ‘남성’이 아니라 어른 되기로서의 ‘성숙함’이다. 이제는 오히려 남성이라는 단어가 지워져야 말이 된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성숙성의 형식이라고 고쳐 썼다.
칸트의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의 정확한 문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립: 세계는 시간상 시초를 가지고 있으며, 공간적으로도 한계로 둘러싸여 있다. 반정립: 세계는 시초나 공간상의 한계를 갖지 않으며, 도리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둘째] 정립: 세계 내의 모든 합성된 실체는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어디에서나 단순한 것이거나 이것으로 합성된 것만이 실존한다. 반정립: 세계 내의 어떤 합성된 사물로 단순한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세계 내 어디에서도 단순한 것은 실존하지 않는다. [셋째] 정립: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인과성은, 그로부터 세계의 모든 현상들이 모두 도출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현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유에 의한 인과성 또한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반정립: 자유는 없다. 오히려 세계에서 모든 것은 오로지 자연법칙들에 따라서 발생한다. [넷째] 정립: 세계에는 그것이 부분으로서든 그것의 원인으로서든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인 어떤 것이 있다. 반정립: 단적으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세계 안이든 세계 밖이든 어디에도 그것의 원인으로 실존하지 않는다. 『순수이성비판 2』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640〜665쪽.
제논의 역설에 관한 지젝의 생각은 지젝,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주형일 옮김, 인간사랑, 2013), 23〜32쪽에 있다.
이상의 인용문은 단편 「날개」에 나온다. 『이상문학전집』 2, 문학사상사, 1991, 318쪽.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오인(착각과 자기기만)이 필수적이라는 지젝의 언급은 그의 저작 거의 대부분에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지젝,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115~117쪽과 지젝,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박정수 옮김, 인간사랑, 2004), 29쪽을 들 수 있겠다.
라캉이 말하는 오인誤認, méconnaissance의 구조는 자기-인식me-connaissance이라는 단어의 분절과 결합으로 만들어진다. 인간은 성장단계에서 만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거울단계를 거치며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착각에 입각한 것이라 함이 라캉의 입론이다. 이에 대해서는 졸저, 『인문학 개념정원』(문학동네, 2013) 4장에 간략하게 써두었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아이러니에 대한 상세한 분석은 졸저, 『왜 읽는가』(나무나무, 2021) 8-2강에 있다.

  
 

서영채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 교수. 저서 『우정의 정원』 『왜 읽는가』 『풍경이 온다』 『인문학 개념정원』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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