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의 장으로 확장된 페미니즘 : 1990년대 ‘파퓰러’ 페미니즘이 거둔 절반의 성공 혹은 절반의 실패

  

* 제목을 지을 때 손희정의 다음 글을 참고했음을 밝힌다. 손희정, 「대중문화를 찢고 나온 파퓰러 페미니스트들」, 『페미니즘 리부트』, 나무연필, 2017, 93~98쪽.

  

그놈의 밥 타령은 1990년대나 2020년대나

    2023년 1월 중순, 설을 앞두고 음식 장만할 걱정을 하던 차에 잠시 내 눈을 사로잡은 인터넷 뉴스 헤드라인은 〈아옳이, 남편 밥상 몇 번 차렸나〉였다. 기사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월 수익 1억 원을 창출하는 인기 유튜버 아옳이가 남편의 불륜으로 이혼한 사정을 전하는 유튜브 영상물에 남편 쪽 지인으로 추정되는 이가 ‘4년 결혼 기간 동안 남편 밥상을 제대로 차려주지 않은 아옳이에게도 혼인 파탄의 잘못이 있다’고 주장하는 댓글을 달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댓글의 진실 여부에 관심이 없다. 다만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을 뿐이다.
    장구하도다, 그놈의 밥 타령.
    1993년, 이경자의 장편소설 『혼자 눈 뜨는 아침』의 광고 카피가 “나는 더 이상 남편을 위해 밥상을 차릴 수 없습니다”였다. 나는 이듬해인 1994년 5월에 결혼했는데, 양가 상견례 때부터 대구 친정, 안동 시가 양쪽에서 ‘여태 공부만 해온 신부가 신랑 밥을 제대로 해주겠느냐’는 걱정을 들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니 시어머니께서 정성스레 손으로 쓴 편지를 건네셨다. 요지는 레토르트 식품이나 냉동된 식재료 말고 시장에서 제철에 나오는 생선, 채소 등을 사서 아들 밥을 제대로 해주라는 거였다. 콩나물국을 시원하게 끓이는 법까지 쓰여 있었다. 그러니 안동에서 시부모가 상경하실 때마다 나는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인가 시아버지께서 서울대병원 통원 치료를 하시느라 우리 집에 머무르실 때, 장가들기 전 시동생도 우리 집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유학 가 있던 시동생이 방학을 맞아 귀국했다. 끼니때가 어찌나 빨리 돌아오던지⋯⋯. 삼시세끼가 원수였다.
    학교 문턱도 못 밟아본 할머니, 초등학교만 졸업한 어머니와는 달리 나는 박사 학위를 받았고, 새벽부터 밤까지 뼈 빠지게 일하고도 무보수 혹은 ‘쥐벌이’에 불과했던 그녀들과 달리 상당히 안정된 직장을 가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가부장제 시스템의 견고한 그물코에 얽히고설킨 채 일상을 영위할 때, 나는 여전히 할머니, 어머니 세대와 똑같이 이 세상의 “노새” 노릇을 담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아가, 이리 할미에게 오렴. 옛날처럼 할미 무릎에 앉아봐. 할미가 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하게 할 성싶으냐. 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에서 네 손가락 하나 해칠 놈이 없게 하고 싶은 게 이 할미야. 아가, 이 할미가 알고 있는 한에는 백인이 이 세상의 지배자다. 어쩌면 저 먼바다 어딘가에는 흑인이 다스리는 나라도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우린 우리 눈으로 본 것밖에 알 수 없다. 백인은 자기 짐을 팽개치며 흑인에게 그걸 주워들라고 한다. 다른 수가 없는 흑인은 그걸 주워들지. 하지만 자기가 그걸 져 나르지 않아. 자기 여자한테 넘겨버리지. 내가 아는 한 흑인 여자는 이 세상의 노새다. 네게는 사정이 달라지길 그렇게 기도했는데. 주여, 주여, 주여!”1

    인용문은 “뿌리 뽑힌 나무”로서 “한 마리의 일소나 씨돼지로 이용”2당하며 살아온 늙은 흑인 여자가 손녀만큼은 다른 삶을 살기를 원했건만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며 탄식하는 이야기이다. 후기 자본주의의 필요와 페미니즘운동의 결과로 소위 ‘남자의 일’을 상당히 담당하게 된 것은 물론 담당할 것을 강요받게도 되었으나 가부장제 결혼제도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기본적으로’ ‘여자의 일’까지 동시에 떠맡아야 하는 형편에 놓인 현대 한국 여성의 현실도 근본적 차원에서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폭압적 노예제에서 살아남은 흑인 여성과 현대 한국 여성은 그 억압의 강도强度라는 관점에서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가사와 양육을 책임지는 시간과 그 노동 강도 또한 앞세대 여성들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줄어드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나보다 15년 정도 나이가 많은 어느 여교수는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퇴근하여 밥상 차리고 치우고 기타 집안일을 마무리하면 언제나 자정을 훌쩍 넘겼다고 했다. 나로 말하자면 그 정도로 혹사당하지는 않았다. 나보다 아랫세대는 사정이 좀 더 나을 테다. 그러나 가사와 양육에 대한 기본적인 책임이 여성에게 있다는 고정관념 자체가 바뀌었을까? 아이가 있는 직장여성 대부분이 아이가 있는 직장남성 대부분보다 시간에 쫓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방학 동안 문학관 등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더러 이용한다고 했을 때, 남자들이 (상당수 여자들도) 보이는 반응은 한결같았다.
    “집에 식구들 밥은 어떻게 하시고요?”
    사람은 밥심으로 살고 밥이 하늘이라는 거, 나도 잘 안다. 다만 밥상 차리는 노동이 결혼한 여자의 천부적 의무인 것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우스울 뿐이다. 그렇게나 소중한 밥을 왜 여자들한테 맡기실까나? 시쳇말로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출산도 아닌데?
  

태아 성 감별하겠다고 대구 원정 가던 임산부들

  출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여자 팔자가 드세다는 백말띠 해, 1990년은 한국에서 인구조사가 시작된 이래 출생 성비 불균형이 가장 심했던 해로 기록되어 있다. 예전에는 대를 이을 아들을 낳을 때까지 여섯이고 일곱이고 딸을 낳는 집이 흔했다. 딸을 그만 낳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딸 이름에 끝, 말, 종 등을 넣거나, 남동생 보라는 뜻에서 후남이, 득남이, 출남이로 짓는 경우도 많았다.3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이 유구한 남아선호 사상이 거국적 산아제한 정책에 부응하여 태아의 성을 감별하는 초음파 기기를 이용한 결과는 여아 선별 낙태였다. 1987년에 태아 성별 고지를 금지하는 의료법 조항이 제정되었음에도 여전히 암암리에 성행하던 여아 선별 낙태는 말띠 해에 정점을 찍었다. 1990년 “당시 첫째아 성비는 108명이지만, 둘째아는 117.1명으로 뛰어오르고, 셋째아 이상에서는 193.7명이라는 기형적인 성비가 나타났다. 당시 성비 불균형은 경북(130.7명), 대구(129.7명), 경남(124.7명) 등 영남지역에서 더 심하게 나타났는데, 대구의 셋째아 이상 성비는 392.2에 달했다”.4
  이 시절에는 한의원에서도 아들 낳는 약을 처방해달라는 요구가 엄청나게 많았다고 한다. 이에 “남아선호의 병폐가 심각하다는 걸 절감한 한의사 고광순은 1996년 말, 한국여성단체연합 사무국장 남인순에게 거의 날마다 전화를 걸어 이 문제로 여한의사회와 함께 토론회를 열자고 졸라댔다. 그 결과 1997년 1월에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토론회는 여성계 제1의 과제로 호주제 폐지를 선정했다”.5
  첫아이(95년생)를 가졌을 때 나는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심정으로 집에서 꽤 먼 상계동의 어느 산부인과에 대학 동기인 친구 손을 잡고 다녔다. 어느 날, 주치의와 잘 아는 사이이던, 친구 엄마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 불법인 거 알지만, 오래 알고 믿는 집이니까 알려주더라. 둘 다 아들이란다. 절친한 친구끼리 샘낼 일 없어서 좋지 뭐니? 내일 안동 간다면서? 가서 고개 빳빳이 세워.”
  우리 엄마도 아니고 시어머니도 아닌, 서울 토박이 인텔리 여성의 발언에 나는 심히 충격받았다. 하기는 내 결혼식 주례를 고사하시며 대학 은사님께서 꼽은 이유가, 당신께 딸만 둘 있고 아들이 없다는 것이었으니 인텔리라고 별다를 바가 없긴 했다.
  비슷한 시기에 받은 전화에서 나는 더한 충격을 받았다. 이번에는 고등학교 친구였는데, 큰애가 딸이라 둘째는 꼭 아들을 낳아야 하기에 대구로 원정 가서 성 감별을 받을 거랬다. 역시 아들을 낳아야 하는 시누이까지 동행할 거라나. 서울서는 불가능해도 대구에서는 가능하다고 대구 친척들이 보증한댔다.
  

대학원에서 기혼녀를 선호하는 뜻밖의 이유

    학부 졸업을 앞둔 1992년, 나는 언론정보학과 동기생 혹은 타과의 언론인 지망생들과 함께 영어, 시사상식, 국어, 작문 등 이른바 ‘언론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쩌다 언론사 선배가 와서 밥과 술을 사주었는데 앞날이 막막한 취준생 입장에서는 그분들 말씀이 금과옥조처럼 귀했다. ‘남자는 여러 명 뽑지만 여자는 1등 한 명만 뽑기 때문에 더 악착같이 공부해야 한다’던 조언이 잊히지 않는다.
    1등을 못해서, 혹은 기사보다는 픽션을 쓰고 싶어서, 나는 진입 장벽이 낮은 방송국 막내 작가로 진로를 바꾸었다. 당시 방송국은 남성 PD와 여성 작가라는 성별 구도가 명확했고, 막내 작가는 PD가 지시하는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지 글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적성에 맞지 않는 업무, 저임금, 성희롱, 불안정성을 견딜 수 없었고 결혼으로 도피했다. 연이은 출산과 함께 전공을 바꾸어, 1995년 봄,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뜻밖에도 거기서 나는 결혼한 여자를 선호하는 분위기를 감지했다. 사실 ‘선호’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떠도는 얘기인즉슨 기혼녀는 교수가 취업을 시켜줘야 한다는 부담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때라고 국문학 박사의 취업 자리가 많았으랴. 전원 남성으로 이루어진 국문과 교수들은 당신 학맥을 이을 진짜 제자로 싹수 있어 보이는 남자들을 점찍어 일종의 이너 서클을 만들었다. 먼저 취업한 선배가 후배를 끌어주고 밀어주는 끈끈한 관계가 그 안에서 형성되었다. 다만 이너 서클 바깥의 기타 대학원생으로는 공부머리 없으면서 취업 욕심만 많은 남자들보다 결혼(교수들이 생각하기에 일종의 취업)을 했음에도 공부 자체에 갈급하여 대학원에 진학한 기혼녀가, 버리는 카드로 써먹기 편하다는 논리였다.
    노동계라고 해서 여성이 버리는 카드 취급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97년 말에 터진 “IMF 위기 직후 몇 달 동안 감소한 취업자 수의 75퍼센트를 여성 일자리가 차지하고 있었지만, 여성의 고통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6 “1996년 8월에 출간된 김정현의 『아버지』는 아버지의 무력함과 희생을 그려 수많은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면서 출간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7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아빠 힘내세요〉라는 노래를 배워와서 혀짤배기소리로 불러댔다. 아침 방송에서는 남편 기 살리는 법 특강이 끝없이 이어졌다. “1997~8년 시기를 풍미하던 ‘고개 숙인 아버지’, ‘남편 기 살리기’ 담론들은 고용불안으로 인한 위기를 곧바로 부권상실의 테마로 번역하고 그 책임을 페미니즘과 여성들에게 전가하는 전형적인 반페미니즘의 선동이었다”.8

  

1990년대 문화계를 관통한 키워드, 페미니즘

    2007년, 성비 불균형이 자연 수준으로 돌아왔다. 2005년 헌법 불합치 결정을 받은 호주제가 2008년 마침내 폐지되었다.
    나는 1990년대의 한 특성이 2000년대의 이러한 변화를 추동했다고 생각한다. 90년대는, 한편에서는 가부장제라는 천년바위가 물질주의 과학기술과 결합하여 더욱 무지막지한 반여성주의의 모양새를 선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해방의 파도가 그 바윗돌을 세차게 들이치던 시대였으므로.
    여성들은 세상보다 앞서, 세상보다 많이, 바뀌었다. 90년대에 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결혼하고 출산하고 양육한 나 또한 페미니즘 소설과 이론서를 보는 족족 사들였고 스터디 그룹을 꾸렸다. 나와 같은 여성들이 많았고 21세기는 달라야 한다고 믿는 남성들도 동조했기에 페미니즘은 90년대 문화계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었다.
    여성학 전문 출판사가 등장했고 『또 하나의 문화』 『여성과 사회』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등 잡지도 여럿 탄생했다. “〈델마와 루이스〉(1991), 〈후라이드 그린 토마토〉(1991), 〈피아노〉(1993), 〈조이 럭 클럽〉(1993) 등의 대중 영화와 〈아들과 딸〉(MBC, 1992~1993) 등의 드라마가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논의를 상승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페미니스트 문화운동단체인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는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제작하는 한편, 다양한 페미니스트 전시와 퍼포먼스, 무대 등을 선보였다. 1997년, 이 에너지의 흐름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시작으로 이어졌다”.9 상기 목록 중에서 특별히 드라마 〈아들과 딸〉은, 내 대학 동기 중에 후남이가 있어서도 그랬지만, 귀남이, 후남이, 종말이라는 캐릭터 명명부터 시원한 결말까지 시청자들에게 작가의 메시지를 선명하고도 강렬하게 전달하는 대중적 페미니즘 드라마였다.
    문학사 연구자들은 90년대 문학계의 한 특성으로 여성 작가의 대거 출현을 꼽는다. 여성 작가는 수적으로도 많아졌지만, 독자의 호응 측면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성과를 보였다. 양귀자의 장편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92년 초판이 나오자마자 페미니즘 논란의 중심에 서며 그해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연이어 93년 ‘신경숙 현상’, 94년 ‘공지영 현상’의 주역인 신경숙과 공지영 또한 신간을 내는 족족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렸다.
    페미니즘은 상업성에 민감한 출판사들의 화려한 홍보 키워드가 되었다. 이러한 세태를 조명하는 신문 기사10나 칼럼, 특집도 많았는데, 문예 계간지들이 연쇄적으로 ‘여성문학특집’을 기획하고는 이 모든 현상을 대중성과 연결 짓곤 했다. 개중에서도 “『문학동네』 1995년 가을호 ‘여성문학특집’은 90년대 주류 문예지의 기획 중 단연 특수한 형태의 돌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해당 특집은 ‘여성문학’을 전면에 내세운 기획이라는 점에서, 90년대 이전과 이후의 시공간에 중층적으로 관여한다”.11 여성문학의 게토화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미현은 “현재의 여성문학은 자신에게 걸려 있는 마술을 풀거나 필요 이상으로 과대포장된 거품을 빼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어떤 특수한 영역을 여성들만의 영역으로 절대화시키면서 더욱 그 활동 공간을 좁게 만들거나 여성문학에 대한 주목을 통해 더욱 효과적인 여성 배제의 장치를 마련하는 것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12
    『사람의 아들』 『영웅시대』 등으로 1970~80년대를 풍미한 작가 이문열은 상기 여성 작가들이 자신과 함께 거론되는 것조차 싫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기 집안의 13대조 할머니인 정부인 안동 장씨를 내세운 장편소설 『선택』을 출간했는데, 발간 3개월 만에 21만 부가 팔린 이 소설 「작가의 말」에서 “특히 지금은 페미니즘 문학의 선봉처럼 오해되고 있으나 실은 한 일탈이나 왜곡에 지나지 않는 이들과 내가 나란히 논의되는 것은 거의 욕스러울 지경이었다”13라고 썼다. 그는 “이혼은 〈절반의 성공〉쯤으로 정의되고 간음은 〈황홀한 반란〉으로 미화된다. 그리고 자못 비장하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외친다”14며 이경자의 『절반의 실패』 『황홀한 반란』,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대놓고 저격했다.
    나는 정부인 안동 장씨라는 호칭보다는 그이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장계향, 그이는 주어진 시대적 조건 아래 최선을 다해 살았고 운 좋게도 남편, 아들, 손자의 입신양명이라는 보상을 받았다. 늙어 ‘눈 어두운 가운데’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남긴 덕분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 목록이 풍성해졌다. 요즘 태어났더라면 국가적 인재로 한식 세계화의 주역이 되었을 성싶다.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한 이 여성에게 오늘의 페미니스트들이 무슨 유감을 가지겠는가. 그이가 타임 슬립하여 오늘의 여성들을 만났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다.
    “나는 요리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고 경영 능력도 탁월했지만, 내가 가문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에 나가 음식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면 명예살인을 당했을 거다. 내가 가문에 순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산 것은 내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얘들아, 우리 때는 선택이란 걸 할 수가 없었는데, 너희는 그래도 선택지가 꽤 있구나. 정말 다행이구나. 부럽다.”
    본디 작가는 당대적 욕망을 실현하고자 역사 인물을 호출하기 마련이다. 『선택』의 1인칭 화자는 당연하게도 페미니즘의 부상을 고까워하는 이문열 자신이었다. 안동 장씨의 가면 뒤에서 만들어진 의고체 목소리는 이문열의 보수주의와 반페미니즘을 담아냈을 뿐이다.
  

차이 있는 반복

    김미지는 각각 1990년대와 2010년대의 대표적 페미니즘 소설로 손꼽히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와 『82년생 김지영』(2016)을 비교·분석했다. 두 작품은 “재현의 배경이 되는 시대 상황도 현격히 다르거니와 서사 구성 방식이나 인물 제시 방법 등에서 동질성을 찾기 어려운데, 대신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30여 년을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이슈들을 총망라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장편소설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이슈들은 1) 남아 선호와 여아 낙태, 2) 여성의 비정규 노동과 이중 노동, 3) 취업 및 직장에서 여성 차별과 성희롱, 4) 출산, 육아휴직 및 경력 단절 5) 일상의 성폭력, 6) 여성 혐오 등이다. 이외에 『김지영』에는 최근의 이슈인 호주제 폐지 후 자녀 성 선택 문제, 화장실 몰래카메라(여성 신체 불법 촬영)가 추가되는 대신 『무소의』에 등장하는 가정폭력, 혼외 관계(외도), 이혼 문제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15
    두 장편소설은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되었다는 공통점도 있는데, 백래시의 측면에서는 『82년생 김지영』 쪽이 훨씬 광범위하고도 끈질겼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대한 반격이 이문열을 위시한 소수의 보수주의자들 쪽에서 나왔고 대중적 호응은 크게 얻지 못한 것에 비해, 『82년생 김지영』은 그저 이 책을 읽었다고 얘기한 연예인들까지 사이버 조리돌림과 인신공격을 당하는 참담한 백래시의 중심에 섰다. 페미니즘 때리기가 젊은 남성들의 온라인 놀이처럼 되어 있는 오늘의 현실이 가감 없이 반영된 하나의 현상이라고 할 만하다.
    내 또래(1960년대 말 혹은 70년대 초반 태생) 여자들의 반응은 좀 ‘웃프다’고 해야 할까. 이미 한국 가부장제의 매운맛에 너무 익숙해진 터라 82년생 김지영이 겪는 갖가지 차별의 양상이 다소 밍밍하게 느껴지더란다. 게다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 나오는 남편들에 비교하면 『82년생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은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16라는 거다.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나는 연전에 가부장제 사회에서 내가 어떻게 고투하며 살아왔나 얘기하다가 한 젊은 페미니스트에게서 뼈아픈 비판을 받았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왜 판을 뒤집어엎지 않았느냐, 왜 바보처럼 그 판에서 아등바등 살아왔느냐는 것이다. 나는 ‘오빠가 허락하는 페미니즘’만 했고, 내 희생과 인고와 자기 착취로 썩어들어가는 가부장제의 기둥을 온몸으로 받쳐주었으며, 결과적으로 지금도 가부장제의 든든한 부역자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꾸역꾸역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해온 나 같은 부류 때문에 가부장제 결혼문화, 독박가사와 독박육아, 제사 등을 거부하는 젊은 여성들이 비교질을 당하고 욕을 먹는다고도 훌닦였다.
    나는 하릴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시쳇말로 ‘현타(현실 자각 타임)’가 왔다. 그랬구나. 나는 한 번도 가부장 지배체제에 위협적인 사람이 아니었구나.
    돌이켜보건대 나는 천성 자체가 래디컬이 아니었다. 농촌사회의 보수성을 싫어하면서도 체화한 쪽이고 언제나 투쟁보다는 타협을, 혁명보다는 개선을 선택해왔다. 그 결과가 오늘의 ‘여혐민국’이라니 당혹스럽고 미안하고 씁쓸하지만, 이제 와서 급진적으로 변화할 의지도 방법도 없다.
    어쩌면 오늘날의 똑똑한 젊은 여성들이 선택하는 비혼과 출산파업이야말로 진정한 위협이며 전복이고 탈출일지도⋯⋯.
  

그래도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봉건 가부장제적 생활 양식이 뿌리 깊은 경상북도의 한 집성촌에서 1남 3녀 중 첫딸로 태어났다. 성차별주의는 삶의 도처에서 작동했고 나는 울분과 체념을 동시에 품고 자라났다. 성격상 아마도 고려 시대에 태어났으면 전형적인 고려 여자로,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전형적인 조선 여자로 살았을 나로서는 내가 페미니즘을 만나지 않고도 저절로 페미니스트가 되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나의 페미니즘은 스무 살 이후의 나를 구성하고 변화시킨 핵심적 질료였다. 내 안에는 일상적으로 부당한 차별을 당하는 “울고 있는 딸”이 여전히 살아 있거니와 만약 내가 페미니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그 딸의 눈물이 여자로 태어난 죗값이라고 체념하거나 정녕 체념하지 못하더라도 그 눈물 속에서 끝없이 질퍽거렸을 것이다. 페미니즘 덕분에 나는 한 걸음 떨어져서 내 속의 “울고 있는 딸”에게 말을 걸고 그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내 삶의 방향을 좀 더 긍정적인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나는 젊은 페미니스트에게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었다. 제사 문제를 예로 들자면, 나는 판을 뒤집어엎지는 못했어도 시나브로 판을 간소화했고 내 아이들에게 미리 쓴 유서에서 제사를 이렇게 정리했다.
    “엄마를 위해 제사 지내는 방법을 알려줄게. 봄날의 꽃밭에서, 여름날의 계곡에서, 가을의 단풍 숲에서, 겨울의 양달에서, 가끔가끔 너희를 향한 엄마의 눈길을 떠올려주렴. 그것이 엄마가 바라는 가장 훌륭한 제사란다.”
  

동이 방의 추억

    1990년대는 페미니스트 대중이 최초로 가시화된 시대이다. “1990년대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 대중은 진보와 보수의 구분 없이 젠더 이해를 중심으로 모였다. 진보운동 속에서 여성운동을 도모한 1980년대와 달리 젠더가 여성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는 여성운동이 활성화된 것이다.”17
    90년대 대학마다 발족했던 총여학생회, 여성학 동아리는 바로 그러한 페미니스트 대중을 생산하는 요람이었다. 내가 속한 사회대에도 여성학 동아리가 생겼다.
    동아리 이름이 ‘동이’였다. 우리는 사회대 여학생 휴게실을 동이 방이라고 불렀는데,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듯 틈만 나면 드나들었다. 우리는 페미니즘 소설과 이론서를 함께 읽기도 했지만, 훌렁훌렁 옷도 갈아입고 생리대도 빌리고 또래 고민 상담도 했다.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모였기에 여느 운동권 동아리와는 결이 달랐다. 정권 타도 집회에는 관심이 없던, 윤기 흐르는 상류계급 출신 여학생도 열심히 참가했다. 그녀 역시 뿌리 깊은 성차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중에 아이 이름을 동이라고 짓기도 했다.
    우리는 동이 방에서 다른 어떤 서클에서도 말할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깊은 고민을 공유했다. 내 젊은 날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한 컷을 고르라면, 동이 방에 모여 서로의 내밀한 속내에 아낌없이 공감하던 그때가 떠오른다.
    동아리 이름의 의미를 물었을 때, 선배가 이렇게 설명했다. “동이는 물 같은 것을 담는 질그릇이라는 명사이면서, 따로 흩어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한데 묶는다는 뜻을 가진 동사 ‘동이다’의 어근이야. 혼자보다는 함께하는 게 힘 나잖아.” 나는 이 우주의 한 점 먼지처럼 외로운 우리가 한데 모여 물동이처럼 둥그렇게 서로를 동이는 이미지를 그렸다.
    꼰대를 ‘극혐’하는, 꼰대뿐만 아니라 많은 것을 극혐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그때 그 ‘동이’의 소중한 의미를 들려주고 싶다. 페미니스트들이 영향력을 더 확대하고 페미니즘의 전망을 더 많은 대중과 공유하려면 단호한 배제의 정치가 아니라 담고 묶고 ‘동이는 전략’을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가부장제의 부역자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끔 사는 꼴이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언제나 페미니스트이고픈 나,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까지 싹 배제하고서야 어떻게 외연을 넓힐 수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 지구에서 지속 가능한 행복을 추구하려면 남성을 설득하고 페미니즘의 동지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 또한 결코 중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성은 하늘의 절반, 세상의 절반’이라는 플래카드 앞에서 오래 서 있었던 90년대의 나.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렀다. 나는 글을 쓸 때 일종의 ‘노동요’처럼 음악을 듣는데, 오늘은 샘 스미스Sam Smith의 앨범 〈글로리아Gloria〉를 틀어놓았다. 남성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스스로 여성이라 생각하다가 이제는 논바이너리non‐binary라 여긴다는 샘 스미스는 30년 전 우리의 ‘절반’ 또한 누군가를 배제하는 정의였음을 일러준다.
    장강의 뒷물결은 앞물결을 밀어낸다. 나는 기꺼이 밀려나서, 변하긴 했어도 근본적으로는 변한 게 없는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힘겨워하고 싸우고 뒤집어엎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싶다.
  
  
  

주석

  1. 조라 닐 허스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이시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1, 25~26쪽.
  2. 위의 책, 27쪽.
  3. 나는 고등학교 때 득남이, 대학교 때 후남이, 교수가 되어 출남이를 만났다. 사내 남이 들어가지 않은 한글 이름 ‘방울’이에도 그런 뜻이 있는 줄은, 강준만 교수의 책에서 유아인 배우의 페이스북 포스팅을 읽기 전까지 몰랐다. “작은누나의 이름은 한글로 ‘방울’이다. (중략) 딸 둘밖에 없어서 다음에는 꼭 아들을 낳으라고 할머니가 그렇게 지으셨다고 한다. 엄방울, 불쌍하고 예쁜 이름.” 강준만,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인물과사상사, 2018, 241쪽.
  4. 〈30년 만에 반전… 최악의 ‘여아 낙태’ 재앙은 끝나지 않았다〉, 《중앙일보》, 2022. 6. 5.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76761)
  5. 강준만, 앞의 책, 26쪽.
  6. 같은 책, 31쪽.
  7. 같은 책, 25쪽.
  8. 배은경, 「‘경제 위기’와 한국 여성─여성의 생애 전망과 젠더/계급의 교차─」, 『페미니즘 연구』 9권 2호, 2009, 64~65쪽.
  9. 손희정, 앞의 책, 93~94쪽.
  10.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문학… 베스트셀러 휩쓰는 그들…〉(《조선일보》 1999. 11. 15.)과 같은 기사가 대표적 사례이다.
  11. 최가은, 「‘90년대’와 ‘여성문학특집’: 『문학동네』 1995년 여성문학특집을 중심으로」, 『민족문학사연구』 75호, 2021. 4., 66쪽.
  12. 김미현, 「이브, 잔치는 끝났다─젠더 혹은 음모」, 『문학동네』, 1999년 봄호. 김영옥, 「90년대 한국 ‘여성문학’ 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여성 작가 소설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상허학보』, 2002, 115쪽에서 재인용.
  13. 이문열, 『선택』, 민음사, 1997, 223쪽.
  14. 위의 책, 9쪽.
  15. 김미지, 「『82년생 김지영』(2016)과 겹쳐 읽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3)─페미니즘과 소설의 전략」, 『현대소설연구』 제85호, 한국현대소설학회, 2022, 7쪽.
  16. 박정훈은 남성 지배 체계 아래 교육받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보통 남자는 가부장제의 원리를 충실히 이행하고 가부장제의 온존에 기여한다면서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에 자족하면 안 된다고 한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남편 정대현이 겉으로 보기에 멋지고 선량한 인간인 것과 별개로 김지영이 고통을 겪는 것은 이와 같은 현실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박정훈,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 한겨레출판, 2021, 284쪽.
  17. 허윤, 「1990년대 페미니스트 여성 대중의 등장과 잡지 『if』의 정치학」, 『상허학보』, 2018, 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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