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커먼즈: 2010년대 페미니즘 대중화의 조건과 과제

  

1. 2010년대 개인적 체감으로부터

    2023년 시점에서 2010년대를 돌아보는 일이란, 아직 터널을 빠져나오기 전의 주위를 살피는 일같이 여겨진다. 명료하게 분별할 수 있는 감각보다는 작은 헤드라이트에 시야를 내맡긴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하니 지금 2010년대, 한국문학, 페미니즘이라는 말들의 무게 앞에서 더듬더듬하게나마 상황을 짚어가 본다 해도, 그것은 타임라인을 역순으로 확인하는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또는 전체상보다는 지엽적이고 개인적 관심의 이야기가 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그 역시 시대를 아카이빙하는 과정의 벽돌 하나는 될 수 있을 터이니 일단 글을 시작해본다.
    지금 그 실마리로 삼으려는 것은 그동안 워낙 회자되어 이제는 피로감이 누적된 감이 있을지라도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 2016) 현상에 대한 것이고 특히 그것의 일본어 번역 이후 논의를 일별하려 한다. 이후 자세히 언급되겠지만 논의들 자체가 모두 『82년생 김지영』을 매개로 한 동시대에의 체감이자 경합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소설 현상이 보여주었듯, 글로벌한 세계의 조건 자체가 2010년대 페미니즘 정동의 유통과 순환을 특징짓기도 했다는 점에서, 번역에 주목한 논의들은 오늘날 시대의 조건과 운동─그것이 사회운동이건 자본의 운동이건─의 관계를 역으로 통찰할 계기를 던져주기 때문이었다.
    어쭙잖은 글이지만 개인적으로도 『82년생 김지영』의 일본어 번역과 관련된 글을 쓴 일이 있다.1 일본에서 이 소설이 번역된 2018년 이후 3년여의 시간을 주목했고, 차이를 가로지르는 공통적 문제의식을 임파워링하고자 하는 의지가 컸다. 즉, 여성이라는 이름이 다시 환기시킨, 궁극적으로 환원 불가능한 차이에 대한 긍정과 더불어, 공통장commons의 탈구축을 동시에 고민하고 싶었다. 이것은 곧 차이 vs. 공통성 혹은 개인 vs. 집합적 주체 식으로, 과거 배타적 선택지 혹은 이항대립적 구도로 공회전하던 논의 구도에 대한 문제의식이기도 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의 숨 가쁜 변화와 역동성을 재현적 지식의 프레임으로 환원시키고 싶지 않았고, 순간순간 사건의 연속과 운동성을 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의식·무의식적으로 놓친 것은 후속 논의들을 접하며 보완, 재조정할 수 있었음도 미리 적어둔다. 그리고 그 점을 지금 이 글에서 주제화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벌써 잊히는 감이 있지만 2010년대 들어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를 거점으로 해온 여성 혐오hate speech, misogyny 및 그에 따라 임계치에 다다른 분노는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에서 폭발적으로 가시화됐다. 그리고 거기에 포스트잇으로 상징되는 추모와 애도의 정동이 여성 당사자의 신체를 관통했다. 그 장면은, 한국 사회에서 세기말 세기 초를 살아온 나 자신마저 관통하며 새삼 무언가를 자각시킨 계기였다. 그렇기에 이것은 내가 지나온 시간에 대한 회고를 동반하기도 했다. 가령 20세기 말 대학에 막 제도화되고 있던 여성학 수업을 들으며 어렴풋이 각성하다가, 21세기 초를 풍미하던 ‘탈주’의 철학과 그 사유를 ‘젠더를 망각하는 방식으로’ 읽어가던 개인적 굴절을 반성적으로 돌아보게 된 것이기도 했다. 이런 개인적 경험 역시 시대마다의 차이를 변별시킬 수 있을 것이고, 혹은 본문에서 언급하겠지만 2010년대 대중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즘 대중화라고 일컬어진 것과 관련될 이야기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 이야기가 다소 길어졌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개인적 경험이 데이터로 추상화되기 쉬워진 기술적 조건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또한 마치 그런 기술적 조건에 상응하듯, 구체적 상황들이 어떤 프레임으로 환원, 배치되어 고착화하는 일도 빈번한 시대인 것 같다. 그러므로 2010년대 이후 세계를 더듬어 조망하는 일은 사사롭더라도 각자의 몸으로 체감된 무언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더욱 불가피하고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본래 동시대에 대한 비평적 개입이 늘 이러한 불완전한 감각과 그것의 오류 가능성에 내맡기는 무모한 작업 아니던가. 이러한 점들을 느슨하게 염두에 두며 이 글에 주어진 주제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한다.
  

2. 여성 안의 차이들, 그리고 위치성

    단행본 뒤쪽에 실리는 해설은 그 책이 읽힐 회로를 넌지시 암시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출판 관행적 의미만 지니는 것은 아니다. 사이토 마리코齋藤眞理子의 번역으로 2018년 일본어로 소개된 『82년생 김지영』의 해설을 쓴 이는 이토 준코伊東順子2라는 저널리스트이다. 문학 관계자가 아닌 저널리스트가 해설을 썼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통상적인 문화상품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의미가 우선 확인된다. 해설에서 이토는 일본 독자를 위해 한국의 2010년대 상황을 사회학적 맥락에서 자세히 일별한다. 실제 그녀의 해설은 이 소설을 한일 사회 공통적 지평으로서의 2010년대 여성문제 및 2010년대 중후반 전 세계를 관통하던 소수자, 약자 혐오 및 백래시의 문제와 접속시켰다.
    대중사회적 운동의 매개로 포지셔닝한 이 소설은 비슷한 시기 번역된 이민경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3와 함께 연호되며 읽혔다. 이 두 권의 책은 일본 독자에게 “내 ‘목소리’를 되찾는” 법을 훈련하는 매뉴얼처럼 소개되었고, 실제 이에 대한 독자들의 호응에도 젠더 차별 구조를 대중 레벨에서 자각적으로 생각하게 된 2010년대 일본 내 상황과 그에 대한 분노가 개재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소개될 때부터 “화를 표출하는 방식”을 전달하며 정동적으로 임파워링하는 입지를 분명히 했고, 일본 사회에서도 임계점에 달했다고 여겨지는 여성 혐오에 분노하고 그것을 재전유해서 돌려줘야 한다는 욕망을 초기 독법부터 내재하고 있었다. 이 소설이 일본 사회 여성들에게 정동적 기폭제로서의 역할을 한 정황은, 한국에서의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사건 이후의 당사자 직접 행동에 분명 상응했다.
    하지만 초기 독법 회로와 별개로,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정동적 사건성의 열기로부터 거리를 두는 평가가 등장한다. 레이와令和 시대를 열고자 하는 일본 문학계의 재도약 취지가 두드러졌던 『분게에文藝』 2019년 가을호는 ‘한국문학·페미니즘·일본’ 특집으로 기획되었고4 이 특집 하에 배치된 대담(영문학자 고노스 유키코鴻巣友季子×번역자 사이토 마리코)에서는 이 소설의 번역 버프buff 논의가 비로소 오가기 시작한다. 일본 독자의 정동적 호응이 번역을 매개로 증폭된 정황이 시야에 들어온 것이다. 특히 영문학자 고노스 유키코는 “번역이라는 언어 조작”은 일종의 “판타지 섞인 감각”을 수반하고 그 덕택에 이 소설이 지지된 정황을 지적한다. 그녀는 무언가가 번역된 시점에 일종의 “신비성, 불가시성”이 생긴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일한 이야기가 일본 여성작가에 의해 쓰였다면 편집 과정에서 지적받고 수정될 만큼 소설의 “이야기 구조나 메시지 표현이 너무 직설적”이라고 말한다. “다성성, 다원시점, 중층성, 양의성 같은 것”이 중시되어온 여느 현대문학 작품과 달리 이 소설은 그런 것을 배제한 평평한 텍스트이기에 “불협화음이 아니라 유려한 유니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즉, 텍스트의 결점이라고 여겨지는 것조차 번역에 의해 신비성과 불가시성이라는 레이어를 덧입게 되고 독자에게는 전혀 다른 위상으로 감각된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는 주류 일본어 사용자 감각에서의 평가이고 번역의 문제를 좀 더 복잡한 정황, 예컨대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혹은 컬처럴 스터디즈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논의가 제출된다. 가령, 식민지·재일 연구자 조경희는 일본 내 미투운동의 배경으로서 1990년대 후반 이후 일본 페미니즘과 백래시의 과정을 주목했다.5 그리고 2010년대 일본의 미투운동이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시대의 정동과 경합하는 양상을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실제 일본 내 페미니즘 의제 확산의 매개가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면서도 “한일 간 문화적 참조 관계의 역전을 강조하는 서사”가 “식민주의와 근대화론의 위계질서를 거꾸로 설정하는 민족주의적 욕망으로 회수될 위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렇기에 “위계화나 ‘부러움’의 시선을 넘어선 문화 번역의 실천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과제 역시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제를 아예 주제화한 후속 글에서는6 일본에서의 K문학과 페미니즘 붐에 대한 비판적 점검을 본격적으로 이어간다. 그 논지 중 흥미로운 점을 거칠게나마 요약, 재구성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일본에서의 한국문학 붐은 식민주의적 열등감과 시장주의의 열망을 내포한 K문학의 확대 재생산처럼 보인다. 가령 일본의 대중적 패션 잡지에 한국 여성문학 특집이 실린다는 일도 그 사례처럼 보인다. 둘째, 한국문학의 발견은 페미니즘에 대한 갈망과 적극적으로 결합되었다기보다, 한류 문화의 향유층이 주로 여성들이었던 이유가 크다. 거기에서 일본 여성들에게 한류는 아래로부터 우러나온 페미니즘의 대중화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일본의 한국문화 수용 과정에서 페미니즘은 잠재된 요소이자 변수였을 따름이다. 셋째, 『82년생 김지영』을 읽는 일본 독자는 자신들 안에 있을 타자성에 외면하고, 한국 여성문학을 통해 마치 “타자의 목소리를, 신체성을 외주”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넷째, 일본에서 K문학과 페미니즘의 성황은 한일 주류 여성들 사이의 참조 관계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 사회 안의 타자성─가령 자이니치在日 사회─은 계속 보이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이 조경희의 글 본래 취지대로의 요약이라기보다, 개인적으로 주목한 대목을 재구성한 것임은 다시금 밝혀둔다. 확실한 것은 이 논의들이 일본 내 마이너리티의 위치, 그리고 번역되지 않는 신체의 감각을 강조하며 쟁점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른바 일본의 메이저리티 여성의 관점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이며, 설혹 보인다 하더라도 (이토의 해설에서처럼) 연대의 기대에 가려 부차화되는 일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 일본 독자의 주류성이 자기 안의 타자성에 대한 고찰을 회피하고 그 몫을 간접화, 외주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꽤 의미심장하다. 가령 오늘날 전 세계적인 K문화 열풍도 (문화예술계에서 간헐적으로 제기되었듯) 단지 ‘K문화의 역전’이나 ‘한류의 석권’ 식의 관점으로 말할 수 없는 제1세계의 역투사, 즉 국내의 근접한 문제를 간접화 혹은 외주화하며 윤리적 포지션을 확보하는 경향성을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 내의 근현대문학 연구자 고영란의 논의도7 일본어 공간에서 또 다른 타자의 신체성을 매개로 하여 번역되지 않는 타자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었다. 그녀 역시 평상시 일본어 공간 속 언어·문화적 위계를 잘 체감하지 못할 이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영란의 논의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하고 싶은 것을 이렇게 요약, 재구성해본다. 첫째, 『82년생 김지영』의 번역자 사이토 마리코의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은 자이니치 쪽에서의 “‘광주 세대’와는 다른 의미의 주류 사회에서 태어난 ‘광주 세대’”의 것이었다. 둘째, 이 소설은 “메이저리티 일본어 속 ‘남자’와 ‘여자’를 축으로 하는 이항대립적 구도를 안정적으로 가시화”했다. 즉, 일본 독자에게 김지영은 “‘메이저리티(일본인)-보통-여자’와 교환 가능한 기호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셋째, 이 소설 겉표지의 ‘얼굴이 비어 있는’ 이미지에서 떠오른 것은 2010년대 초 일본의 신자유주의의 살풍경을 그린 호시노 도모유키星野智幸의 소설이었다. 즉, 김지영 현상은 신자유주의적 심상과 공멸에 대한 위험까지 내재한 듯 보인다. 실제 일본 내 K문학에 대한 관심 급증 시기는 “인종주의·배외주의排外主義·리버럴의 보수화·페미니즘의 보수화·젊은 층의 보수화” 등에 대한 우려가 이어지던 시기이기도 했다. 넷째, 그러므로 “번역불가능한 타자로 대상화되어 그 존재조차 감지되지 않는” 목소리에 침묵하고 일본과 한국이 페미니즘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저 주류 측에서 안전하게 누리는 페미니즘에 불과하다.
    일본 내 김지영 현상에 대한 고영란의 강한 비판은 특히 2000년대 이후 일본 내의 정치·경제적 우경화, 보수화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의식한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그녀의 말처럼 타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는 세계에서 주장되는 여성들의 연대란 확실히 기묘한 것이다. 이것은 가령 한국에서 한때 문제적으로 논의되던 페미니즘 안의 배제나 혐오의 현상들과 밀접하게 연결시켜 볼 수 있음도 분명하다. 즉, 많은 이들이 ‘여성’을 연호할 때 그때의 여성이 누구인지 질문한다면 그것에 응답하기 어려웠을 2010년대 페미니즘의 곤혹스러운 장면들이 고영란의 논의에서 겹쳐 읽히기도 한다. 그녀의 관점은 곧 2010년대 페미니즘이 그 어느 때보다 정동적이었음에 주목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거칠게 살핀 셈이지만 표준 일본어가 공식어로 사용되는 공간의 역학을 염두에 둔 두 논자들(조경희, 고영란)의 이야기는, 『82년생 김지영』과 여성 연대를 말할 때 종종 간과되는 것들이었다. 또한 실제 이 소설 현상을 견인하던 이들을 어떤 경향성으로 환원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고 여기지만 적어도 이들의 논의가, 연대의 설득력을 도모할 때 종종 범하기 쉬운 오류, 즉 온전히 번역되지 않을 차이나 잔여가 보이지 않게됨을 지적한 의의는 부정할 수 없다. 이들이 제기한 논점들은 경계를 방법화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이 논의들은 정체성이라는 범주 자체에 대한 질문에 토대하고 있고, 『82년생 김지영』 열광이 자기동일성으로 환원되는 내러티브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문제의식은 정체성의 사유와는 구별되는 이른바 위치성positionality의 사유 혹은 방법을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참고로, 지금 위치성이라고 적은 말은 고유의 이론적 개념어라기보다 정체성 논의가 품고 있을 한계를 인지하고 극복하고자 한 사유 혹은 방법에 가깝다. 이것은 또한 이 글에 주어진 주제, 곧 2010년대와 한국의 페미니즘을 특징지을 개념의 하나라고도 생각한다. 가령 2010년대 중반 이래로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부상해온 다양한 시민권운동(장애, 성 소수자, 동물, 생태) 및 반군사주의 평화운동, 생태운동 등의 사유도 정체성보다 위치성의 사유를 통해 설명될 것이 많다. 페미니스트 재현 연구자 오카 마리는 위치성에 대해서 사고한다는 것은,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공간적 배치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8 그것은 자기동일성의 사고를 탈구dislocate시키는 것이며 스스로의 공간적 위치를 질문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평화운동가 신시아 코번9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의미들을 만들기 때문에, 지식은 보편화될 수 없다”는 명제를 통해 각기 다른 위치의 여성들 사이 관점의 차이로부터 출발하는 여성 반전 평화운동을 제안했다.
    즉, 지금 『82년생 김지영』 현상에 대한 이 비판적 논의들은 2010년대 두드러진 페미니즘 안의 복잡성, 그리고 여자라는 이름 하에 균질화될 수 없는 차이와 그것의 조건들을 분명히 상기시킨다. 이에 다시 과거의 정체성운동, 정체성 정치가 떠오를지 모르나(실제 2010년대 페미니즘의 정동을 정체성 정치로 일축하려는 목소리가 많았다) 그것은 이러한 복잡화한 사유의 진전을 보지 않는 손쉬운 귀결에 불과하다.
  

3. 그런데 그들은 누구인가: 과잉/과소대표되는 대중

    한편, 『82년생 김지영』 현상을 견인한 존재가 곧 안정되게 상상되던 교과서 속 독자상을 뚫고 나온 존재였음도 기억해야 한다. 실제 2010년대는 반드시 페미니즘의 의제가 아니더라도 내내 대중의 직접 행동이 두드러지게 부상한 시기였다. 노란 리본이나 포스트잇이나 해시태그의 물결이 이것의 2010년대적 표상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즉, 이것은 소수의 전위가 다수의 민중을 선도하는 모델, 곧 전위와 대중 혹은 지식인 전문가와 일반 시민의 모델로 설명될 수 없는 새로운 운동성을 암시했다. 여기에는 어떤 신념이나 구호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신체적이고 정동적인─그렇기에 휘발적이고 일시적이라는 오해와 회의가 종종 수반되기도 하지만─움직임이 주된 추동력으로 놓여 있었다. 2010년대적 현실을 새삼 자각한 독자, 유저user, 대중, 다중 등 아직은 명명 불가능한 무명의 존재들이 주요 행위자agency였음은 2010년대 페미니즘을 이야기할 때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논자들의 위치에 따른 각기 다른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글 속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 단어는 ‘대중’이었다. 물론 각 논자들이 페미니즘 대중화 자체를 주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글 속 ‘대중’이라는 말은 아주 거칠게 독해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2010년대의 어떤 운동성─그것이 사회운동이든 자본의 운동이든─의 성격을 유추하는 데에는 참고가 될 것이고, 그 너머에서 더 읽을 것이 보이게 될 것이다. 다음은 다시 일본의 영문학자 고노스 유키코의 말이다. 번역자 사이토 마리코와의 대담 중, 한국 독자의 다양한 감상을 접한 후 고노스 유키코가 응답하는 대목이다.

    “사후적인 공감인 셈이군요. 그때 인정받았다면 내 인생은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의 눈물도 있겠고요. 그 일본 독자의 눈물이 흐르는 방향이 모두 매우 비슷하다는 것이 저는 좀 무섭습니다. 최근 책에서 자주 ‘우리’라는 말이 사용되는데요. 『세 갈래 길三つ編み10의 띠지에도 ‘이 분노와 기원이 우리를 연결한다’고 적혀 있고요. (중략) ‘나’가 번식하여 ‘우리’에 연결된다는 것. 이런 연대감은 필요하긴 하지만 동시에 ‘우리’라는 큰 주어로 이야기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옳은 이데올로기더라도, 예컨대 ‘거리를 깨끗이 합시다’ 같은 아주 소박하고 올바른 제안조차 파시즘이 될 수 있으니까요. (중략) 본래 여성이라는 약자, 마이너리티에 대해 쓰는 일에서 시작했는데 그 공감의 힘이 너무 커져서 ‘김지영 조調’의 메이저리티조차 생겨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11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고노스의 우려, 공포가 다소 익숙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라는 주어가 함의할 집합적 주체(성), 공감의 힘의 넘쳐흐름 등을 향해 있다. 자세한 맥락이 없기 때문에 행간을 유추해야 하지만, 그녀의 ‘파시즘’이라는 말이 단적으로 상기시키듯 이는 일본 근현대사 속 대중에 대한 지식인의 학습된 불안과도 관련되지 않을까 싶다. 예컨대 한국에서의 민중이라고 일컬어진 존재에 상응할 집합적 주체와 그 행동의 정치적 변화 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본 근현대사에 비추어볼 때, 웅성거리고 시끄럽고 강한 방향성을 지닌 집합적 주체의 형상은 어떤 기시감 혹은 우려를 자아냈을지 모른다. 더구나 2010년대 미디어 조건에서 두드러진 것이지만 어제의 진실이 오늘의 거짓으로 판명 나는 빈번한 반전과 혼란의 행위자가 곧 우리 스스로임을 상기할 때 이런 위화감은 일견 이해도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것이 가령, 과거 19세기 말 서구 사회의 구조 변동 와중에 출몰한 이름 붙이기 어려운 존재에 대한 지식인의 불안이나 공포의 변형처럼 보이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근대적 시스템(노동, 자본, 가족, 정치 등)이 막 구축되는 과정에서 기존 관념으로 포착되지 않던 이들, 새롭게 가시화되던 빈곤층, 광의의 노동자를 두고 군중crowd으로 부를 것이냐 공중public으로 부를 것이냐 식의 당시 논의가 어떤 보수적 사유로 수렴되기 쉬웠는지, 그리고 오늘날 종일 미디어에서 이합집산 중인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사회학적으로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는 사실 등을 떠올려보아도 좋다.
    또한 페미니즘 연구자 입장에서 나온 혹평도 주목하고 싶다. 여성학자 센다 유키千田有紀12는 이것이 “트위터 소설”로 보일 뿐이며 “마지막까지 어떤 것도 제기하지 않”고 “끝까지 복선을 해결하지도 않는 것이 놀라울 정도”라며 비판한다. 또한 한국 남성들이 일본 아마존 리뷰에 번역기를 이용하여 악플로 공격한 사례도 자세히 언급하며 이 역시 “트위터스럽다”고 말한다. 센다 유키의 글은 2019년 출판 동향을 일별하는 취지에서 일본 내 여성학, 젠더 연구의 동향을 살피는 글인데 그 절반 분량이 한국 페미니즘 도서에 할애되어 있다. ‘트위터 소설’에 비유하는 그녀의 박한 평가는 단지 소설 내적 평가만은 아니다. 그녀는 소설을 둘러싼 익명들의 이전투구 현상 자체에 우호적이지 않은 것이다.
    단순화하여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만, 강단 페미니스트에게 비추어진 『82년생 김지영』과 그 현상 자체는 썩 미덥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몰mole적 군중의 이미지가 그녀의 불신에서 두드러지게 읽히기도 한다. 2010년대 페미니즘이 SNS 기동력 없이 생각하기 어려운 점을 생각할 때 미디어나 그것의 사용자에 대한 관점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실제 한국에서도 SNS 등을 매개로 한 익명, 가면의 존재에 대한 불신이 존재했고, 그것은 기존 사회운동이나 변혁을 논할 때 전제가 되어온 존재론─가령 개별 존재의 의지나 능동성 등이 발현되는 주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중의 페미니즘 정동 자체를 백래시의 정동과 등가적으로 취급하거나, 단지 정동 전쟁으로 조망하는 장면에는 무질서와 혼돈에 대한 지적 권위의 호통이 감지된다.
    즉, 이러한 2010년대의 미디어, 자본주의, 커뮤니케이션, 정동 등의 관계와 그 복잡성을 시야에 두며 사용되는 말이 포스트페미니즘, 한국에서는 이른바 대중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즘 대중화이다. 지금 ‘대중’이라는 말은 과거 매스 미디어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대두된 그 대중과 일치시켜 이해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다중multitude 쪽의 관점을 더 사유하고 싶지만 우선은 집합적 주체(성)가 가시화한 흐름에 대한 문제의식 정도만 일단 확인해둔다. 하지만 대중 페미니즘이라고 지칭될 경향성이 강단 페미니즘이나 기존 운동 진영 혹은 문화상품의 시장 논리-수동적 대중 등의 익숙한 관점으로 환원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종종 반동과 혁명이라는 극단적으로 다른 이미지로 표상되어온 역사 속 집합적 주체와 지금 2010년대 우리의 조건은 꽤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고영란 글에서의 대중은 곧 메이저리티의 다른 이름인데, 이것은 고노스 유키코나 센다 유키가 보여준 대중에의 불안과는 조금 다른 맥락에 놓일 듯하다. 앞서 언급했듯 고영란의 논의는 오늘날 일본의 신자유주의, 정치적 우경화 등의 조건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실제 소설 표지에서 신자유주의화를 읽기도 했다. 『82년생 김지영』의 독자=대중=메이저리티의 구도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오늘날 페미니즘 대중화의 행위자로 지목되는 집합적 주체의 ‘조건’에 대해서 고민할 것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단지 페미니즘 유통 형식으로서의 출판-문화상품이라는 특수한 장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그 질문은 세기말 글로벌 자본주의의 패권 장악과 더불어 시대 정신처럼 확산된 이른바 ‘(자본주의의) 바깥은 없다’는 명제의 장기지속의 효과를 향해 있을 것이다.
    가령, 2010년대 한국 문화예술계에서의 주요 이슈와 사건을 대략 떠올려보아도 확연해진 것은, 자본주의 시장으로부터의 자율성을 더 이상 상기할 수 없게 된 문화예술의 조건이었다. 예컨대 2010년대 초중반 문화예술계에서 제출된 ‘예술노동’ 의제는 그 자체가 자본주의와 예술의 대치 관계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시장 안의 정당한 노동으로의 승인을 요구하는 의미를 지녔다. 2015년 표절 스캔들과 문학권력 논의에서도 문제 설정의 전제는 마찬가지였다. 과거 21세기 초 문학권력 논의에서 쟁점화된 ‘상업주의’란,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었다는 2015년의 인식 속에서 아예 언급할 계제조차 되지 못했다. 근대 자본주의 세계 영역들 중에서도 허구적이나마 가장 시장과의 친화성을 거부해온 마지막 보루가 문화예술계였다고 할 때, 오늘날 독자는 이 상품 미학 혹은 시장 논리의 구조 속에 옴짝달싹 못하는 존재처럼 보이는 것도 부정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러하니 『82년생 김지영』의 독자=대중은 더욱 이러한 전면화된 시장과 친연적인 존재처럼 보이기 쉽다. 실제 2010년대 중반 이후에 페미니즘, 소수자의 정동(문제의식)과 연결되어 있는 문학계의 여러 캔슬 컬처cancle culture가 독자 아닌 ‘소비자’ 정체성을 내세우며 그 동력을 얻어간 것도 상징적이다. 그것은 ‘독자 행동의 한 방법’으로, 즉 하나의 출판물에 대한 독자로서의 의견을 표명하고 개선에 대해 압박하는 집단행동이라는 측면에서 일종의 소비자 주권을 공표하고 행사하는 의미를 가졌다. (선뜻 동의하기에는 더 살필 것이 많지만) 캔슬 컬처는 오늘날 서구 문화예술계에서의 신자유주의적 문화 현상을 지시하는 말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미 시장 이외의 향유, 감상의 선택지가 점점 축소해가는 상황에서 향유자, 감상자 스스로가 자신을 소비자=구매자로 포지셔닝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럽게 보이고 그렇기에 독자=대중은 이전보다 더 미덥지 못한 존재처럼 보임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4. 2010년대 이후 대중의 조건과 재전유의 상상

    방금 캔슬 컬처의 사례를 잠시 이야기했지만, 스스로를 소비자로 정체화하기를 원하는 독자의 부상은 의미심장하다. 앞서 내내 이야기했듯 우선 이것은 일견 자본주의 시장의 전면화 속에 자신을 위치하는 감각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독자의 의미가 소비자로 환원되는 감각은 일견 ‘자본주의 리얼리즘’(마크 피셔)의 사례처럼 보인다. 실제 오늘날 미디어와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공모시키는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오늘날 문화소비자는 수동적인 발신자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생산에서 공모적이며 창의적인 중계 지점이라고 지적된다.13
    가령 오늘날 미디어는 과거 텔레비전 수상기로 상징되던 (top-down) 메커니즘과 달리, 가령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수평적 네트워크의 구조를 지닌다. 과거 독자는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존재였다면, 지금의 독자-사용자-소비자-표현자는 시스템 속에서 서로 공모되어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존재다. 자본주의는 고정된 시스템이 아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적 생산 역시 이전과 같은 수직적 착취나 약탈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주지하듯 과거 자본주의 생산의 동력은 주로 대규모 산업의 노동 착취에 있었지만 지금은 종종 자본주의 스스로가 공통적인 것(사회적 노동의 협력)으로부터 가치를 추출(주로 금융, 기술적 수단을 통한)한다.14 강조하건대 오늘날 감정, 이성, 말, 담론 등의 생산과 유통 조건 자체가 이미 일종의 미디어 속 공모, 연루, 협력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82년생 김지영』 현상과 2010년대 후속 사건들의 행위자의 조건, 원리를 낙관적이지만은 않게 상기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들 스스로 공모하게 만들며 교묘하고 “부드러운 전제專制, tyranny15를 행하는 이 세계의 통치술은 존재의 능동성이나 자발성을 더욱 독려한다. ‘전제’를 수식하는 ‘부드러운’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오늘날 통치술은 직접적인 강요와 억압의 성격을 띠지 않을 경우가 많다. 오히려 우리 몸이 가지는 고유의 역능을 동기화시키며 작동하도록 해 우리 스스로의 필요와 욕망도 함께 충족케 한다. 즉, 오늘날 여러 플랫폼 디바이스는 곧 우리 세계의 매트릭스다. 사람들은 플랫폼을 통해 소소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플랫폼은 그러한 네트워크를 이용한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 삶이 플랫폼에 종속되어 있으며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는 말이 다시 떠오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지금부터다. 달리 보아 이들의 연결과 협력 없이는 그 플랫폼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16 우리의 역량[commons]을 다시 가져올 조건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것, 자본주의가 이 힘을 빌리지 않고 매끄럽게 작동할 수 없다는 것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2010년대 여성 독자=대중=소비자의 문제도 다시 생각해본다. 읽는 이이지만 책을 ‘구매’하여 ‘소비’하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전경화하는 감각이 자연스러운 것은 이미 문학이 ‘시장’ 안의 상품이라는 사실을 자연화하여 추인하는 시대의 방증이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흥미롭게도 캔슬 컬처처럼 독자의 의사 표현은 시장에 걸림돌이 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계속 읽을지, 읽는 것을 중지하고 책을 덮을지의 판단 자체가 이미 비평 행위이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감상을 자기표현 미디어를 통해 연결해가며 집단적 정동, 의견을 생성시키는 과정 자체는 전위-대중, 전문가-대중의 모델을 변형시키는 사례임을 부정할 수 없고, 그 개별적 사안마다의 분석과 평가는 적극 수반되어야 할지언정 이것을 ‘권력을 휘두르는 대중’ 식으로 환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즉, 오늘날 대중운동의 동력처럼 보이는 독자와 문화상품의 구매자=소비자로서의 독자는 크게 변별되지 않는다. 『82년생 김지영』의 독자와 캔슬 컬처의 독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체가 바로 지금 시대의 조건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예컨대 『한국 페미니즘과 우리韓国フェミニズムと私たち』(タバブックス 編, タバブックス, 2019)의 기획자의 한 명이자 ‘플라워 데모’17의 주요 인물이며, 자신의 일본어 이름과 한국어 말 ‘페미니스트’를 결합한 ‘小川たまか×페미니스트’를 트위터 계정명으로 사용하는 무수한 트릭스터들에게서 이 행위성을 좀 더 집중적으로 읽어야 할 것이다. 내내 살폈듯 자본주의 시스템은 우리의 힘을 빌리지 않고 매끄럽게 작동할 수 없으나, 그것을 오히려 사용하는 이들의 전략 측에 좀 더 시야를 열어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협력, 네트워킹 없이는 자본주의가 작동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자본의 생산물은 거기에 공모된 존재가 창출하는 우리의 커먼즈이다.18 그렇다면 독자와 소비자가 일체화되는 오늘날 문화예술 현장에서 기억할 것도 궁극적으로는 이런 조건을 독자=소비자 입장에서 어떻게 재전유할 것인지에 있지 않을까. 대중 페미니즘의 문화적 동력이 이러한 독자=소비자의 형상으로 등장했다고 할 때 정황들을 어떤 표상으로 환원시키기보다는 그것의 수행력마다의 가능성도 놓치지 않는 적극적 상상력이 필요한 것 아닐까.
    곧, 세기말 이래로 자연화한 ‘바깥 없음’(외부 소멸)이라는 감각과 그 조건은 좌절의 대상임이 분명하지만, 그 조건 자체가 (횡령된) 잠재성을 되찾아와야 할 ‘바로 그’ 장소다. 이것이 이른바 ‘바깥 없음’이라는 조건 자체에서, 초월성의 사유를 빌리지 않고 그 안에서 뒤집을 방법에 대한 사유였다. 또한 그것이 곧 시대를 불문하고 등장해온 집합적 주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될 무언가를 사유할 원리이기도 하다. 가령 스피노자의 비유를 빌리자면, 슬픔과 기쁨이 정반대의 감정 상태가 아니라 하나의 평면 위의 강렬도에 따라 벡터가 달라지는 동일한 힘의 표현인 것처럼, 대중이라고 상상하는 존재의 이미지 역시 내재성의 평면 위의 여러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배치되는 어떤 힘, 역능 자체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2010년대의 대중 페미니즘 혹은 페미니즘 대중화라고 일컬을 때의 대중이란 (이 글에서도 역시 같은 운명이지만) 늘 과잉/과소대표될 수밖에 없거나 그것을 말하는 이의 관점에서 구부러지거나 참칭되는 이름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제 ‘대중’ 쪽보다는 그 대중의 ‘조건’ 쪽을 향해야 하지 않을까. 문득, 시대는 급변했다 하더라도, 압도적 권력 시스템으로부터의 힘의 재전유를 바라는 측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늘 불변자본, 즉 이 세계의 거푸집 같은 지점들이었음도 떠오른다. 자본주의 혹은 시스템의 이야기를 거대서사, 큰 이야기라고 일축하던 시절도 오래되었지만, 그것이 결코 큰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모세혈관까지 장악하고 있는 촘촘한 관계론의 이야기임을 우리는 지금 다양하게 경험하고 있다. 지금 그 근본을 다시 질문하는 논의들과 페미니즘이 접속할 것은 많다. 우리는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늘 다른 존재가 된다. 압도적 조건처럼 보이는 것을 기피하지 않고 그것을 재전유하는 상상력이 훗날 2020년대라는 시대의 한 특징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주석

  1. 김미정, 「국경을 넘는 페미니즘의 정동」, 손지연 외, 『전후 동아시아 여성서사는 어떻게 만날까』, 소명, 2022. 사후적이나마 개인적 문제의식을 돌이켜보자면, 첫째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의 정동적 임파워링affective impowering의 과정을 읽고 싶었고, 둘째 ‘김지영 현상’이 역사 속 민중의 이미지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시대의 집합적 주체의 형상, 예컨대 다중의 운동성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을지 읽고 싶었으며, 셋째 이 현상을 통해 근대문학의 재현 체계에 일어난 형질 변환을 확인하고 싶었다. 지금 쓰고 있는 글은 그 이후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2. 伊東順子, 「解說: 今、韓国の男女関係は緊張状態にある?」, チョ ナムジュ, 『82年生まれ、キム・ジヨン』, 筑摩書房, 2018, 173~185쪽.
  3. イ・ミンギョン, 『私たちにはことばが必要だ – フェミニストは黙らない』, すんみ·小山内園子 옮김, タバブックス, 2018. (이 번역본의 원서는 이민경,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봄알람, 2016)
  4. 斎藤真理子×鴻巣友季子, 「世界文学のなかの隣人ー祈りを共にするための「私たち文学」」, 『文藝』, 河出書房, 2019년 가을호, 58쪽. 여기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일본문학의 관점에서 ‘우리’를 다시 사유하고자 하는 관점이었고,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매개로 한 한국문학과 주변부 문학이 배치된 장면이었다. 이 ‘우리’가 어떤 내셔널·트랜스내셔널한 사고의 변형일지는 다시 내셔널·트랜스내셔널한 사고에 대한 관점을 요청한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지면이 필요할 주제다.
  5. 조경희, 「일본의 #Me Too 운동과 포스트페미니즘─무력화하는 힘, 접속하는 마음」, 『여성문학연구』 제47호, 한국여성문학학회, 2019. 8. 각주 뒤의 인용은 111쪽.
  6. 조경희, 「동시대적 정동과 번역 불가능한 신체성─일본에 파급된 ‘K문학’과 페미니즘」, 『문학과사회─하이픈』, 문학과지성사, 2020년 여름호.
  7. 고영란, 「번역의 불/가능성과 K문학─일본어로 『82년생 김지영』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겹쳐 읽다」, 김미정 옮김, 『뉴래디컬 리뷰』, 도서출판b, 2023년 봄호.
  8. 오카 마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재봉·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2016, 177쪽.
  9. 신시아 코번, 『여성, 총 앞에 서다─전쟁과 폭력에 도전하는 여성 반전 평화운동』, 김엘리 옮김, 삼인, 2009.
  10. レティシア コロンバニ, 『三つ編み』, 髙崎順子·齋藤可津子 옮김, 早川書房, 2019. 한국에는 『세 갈래 길』(래티샤 콜롱바니, 임미경 옮김, 밝은세상, 2017)로 번역. 원제는 La Tresse,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래티샤 콜롱바니Laetitia Colombani의 소설.
  11. 斎藤真理子×鴻巣友季子, 앞의 대담.
  12. 千田有紀, 《週刊讀書人》, 2019년 12월 20일자.
  13. 여기에서 이른바 ‘통제 사회control society’(질 들뢰즈) 및 그 후속 아이디어들이 중요한 참조점으로 놓인다. 이 글에서 주로 참고하는 아이디어는 통제 사회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온 자율주의 정치경제학, 미디어 연구 등의 논의들이다.
  14. A. 네그리, M. 하트가 2천년대 초반부터 진행해온 ‘제국’ ‘다중’ ‘공통체’ 3부작 논의를 비롯하여 포디즘과 포스트 포디즘의 특징을 구별 짓는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의 일반적 논의이기에 별도의 서지사항을 적지 않았다.
  15.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6, 90쪽.
  16. 요컨대 자본주의는 ”하나의 생산 양식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들의 생산”(질 들뢰즈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창현·김상운·자율평론번역모임 옮김, 갈무리, 2005, 240쪽)이며, “자본주의는 자연을 형성”하고 “자연은 자본주의를 형성”(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1, 47쪽)한다.
  17. https://www.flowerdemo.org/about-us 2019년 봄부터 일본 각지에서 정기적으로 #Me Too, #With you 운동에 직접 행동한다. 지역마다 규모는 다르지만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 규모. 주로 트위터 등을 통해 기동력 있게 움직여왔다.
  18. 연구공간 L 외, 『자본의 코뮤니즘, 우리의 코뮤니즘』(연구공간 L 엮음, 난장, 2012)이 일찍이 이런 관점을 명확히 보여주었고, 최근 특히 이광석, 『피지털 커먼즈』(갈무리, 2021)가 꽤 중요한 원리와 쟁점을 제기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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