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의 행방

  
  

    어떤 주체는 애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다른 주체들은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결정하는 애도가능성의 차등적 배분은, 누가 규범에 맞는 인간인가에 대해 특정한 배타적 관념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작용을 한다.1

  

1

    한국문학사를 지도로 그린다면,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높은 산도, 넓은 들도 아니고 어린아이 가슴팍 높이로 얕게 솟은 봉분일 것이다. 잃어버린 이를 기억하기 위한 작은 구릉들 주위로 문학의 말들이 낮게 맴돌고 있다. 한국문학사는 상실의 자리 위에 쓰였다. 잃어버린 것은 때로 인권과 자유 같은 추상적인 가치였지만, 대부분은 사람이었다. 문학사를 뒤덮은 낮은 봉분들은 한국문학이 여전히 근대문학에 미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여겨지기도 했다. 한국 사회에 어느 사건보다 많은 상실의 자리를 남긴 전쟁의 기억을 그린 소설들을 분석하던 김윤식은 전쟁을 이야기하는 작가들의 정신에서 근대 미달의 습속을 읽어낸다. 그는 분단과 전쟁의 기억에 대한 소설들이 근대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이를 설명하는 대신 전통과 가족의 세계, 샤머니즘적 시선으로 화해의 환각을 향한다고 비판했다.2 그가 보기에 이는 근대적 개인으로서 세계와 맞서는 대신 가족과 민족, 전통이라는 오래된 관계들 속으로 숨어드는 한국문학의 곤궁함을 반영한다. 하지만 그의 질타에 아랑곳하지 않은 것인지, 낮은 봉분 근처로 소설의 이야기들이 계속 모여들었다. 마치 함께 제사를 지내는 이들 사이에서만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제사를 위해 모여 앉아 상실의 경험을 공유하는 문학사의 전통이 오늘날의 소설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렇게 모여 앉은 관계를 통해서만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암시하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사에서 반복되는 제사의 풍경은 사회의 풍경을 가족이 만든 기억의 액자 안에 가두는 일이 아니었다. 또 김윤식이 우려했던 것처럼 근대적 폭력의 압도적 힘을 피해 숨어들던 전근대적 정신세계 역시 아니었다. 전쟁의 기억과 얽힌 제사의 장면은 오히려 무엇보다 근대적 위기를 반영했다. 제사를 위해서 둘러앉은 이들 사이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은밀한 기억을 망각의 바다로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붙잡던 절박한 손길이며, 기억의 무게에 눌려 숨쉬기조차 벅찼던 이들이 고통스러운 짐을 나누어 들어주던 드문 순간이었다. 그들이 추모하는 가족은 국가에 의해 애도 받을 자격이 박탈된 이들이었으며, 그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국가에 맞선 불온한 행동이었다. 한국전쟁에서 가족은 냉전의 경계를 만들어내면서 대립하던 두 국가가 충돌했던 또 다른 영토였다. 가족은 전근대적 전통의 장소가 아니라 “불안정한 사회정치적 환경에서 국내와 국외의 강력한 국가권력이 주장하는 상충하는 이념적 전망의 격렬한 각축장”3이었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와 기억은 누가 시민권을 가진 자이며, 그렇지 못한 자인지에 대한 경계선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위태로운 전선이었다. 제사를 위해서 모인 이들은 국가가 설정한 기억의 경계선과 가족의 기억이 엇갈리며 삐걱거리는 소음이 새어 나가지 않을지 불안해하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그 순간을 견뎌야만 했다.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삼킨 죽음을 토해내고 싶었다. 그 무렵 나는 낯선 길모퉁이 초상집에서 들리는 곡성에도 황홀해져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오래 서성대기가 일쑤였다. 저들이 목이 쉬도록 곡을 함으로써, 엄살을 떪으로써, 그들이 겪은 죽음으로부터 놓여나리라. 나에겐 곡성이 마치 자유의 노래였다.4

    박완서의 초기 단편 「부처님 근처」(1973)의 ‘나’는 낯모르는 이의 초상집에서 들려오는 곡소리를 부러워한다. 전쟁 때 반동으로 몰려 죽은 오빠와 좌익이라 살해된 아버지의 이야기를 털어놔야만 그 죽음에서 자유로워지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 달리, “수난의 시대를 보는 눈에도 많은 여유들이 생기”는 때에 “오래 묵은 체증을 토하듯이 이야길”5 했지만 무관심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부처님 근처」에서 전쟁에 대한 시선이 여유로워졌다는 표현이 무색하게 박완서는 오래도록 가족사의 기억을 숨기고 변형해서 이야기해야만 했다. 「엄마의 말뚝」 연작과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등에서 반복해서 등장한 오빠의 죽음은 그런 박완서가 처했던 곤경을 잘 보여준다.
    박완서의 80년대 대표작 중 하나인 「엄마의 말뚝」 연작에서 오빠는 인민군에 살해당한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은 그를 심문하던 인민군이 총상을 입힌 뒤 다른 조치 없이 떠나는 기이한 상황으로 묘사된다. 이런 작위적 연출의 이유는 10여 년 뒤에 발표된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밝혀진다. 오빠의 죽음은 한국군의 총기 오발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억압적인 시대상 속에서 그 모든 일을 좌익의 행동으로 그려야만 했다.6 이런 곤경 속에서 제사는 죽은 가족의 억울함만이 아니라, 자신의 위태로운 처지를 환기한다. 비극적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지만, 동시에 이를 말해서는 안 된다는 현실과 마주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그 애도가 금지된 관계, 그래서 이 관계에 묶여 언제고 불온한 존재로 밀려날 수 있는 자신의 위태로운 위치를 말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기에 한국 사회가 경험했던 사회적 폭력은 개인 주체가 아닌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향해 있었다. 근대 사회의 법적·정치적 주체는 개인으로 인식되었지만, 근대 국가의 폭력은 “사회적·도덕적 관계망에 자리한 사회적 몸”7을 향해 있었다. 이처럼 관계의 위기는 한국문학장의 속성을 결정지은 주요한 역사적 배경이었다. 전쟁의 기억과 살해당한 가족, 부를 수 없는 이름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위태롭게 외쳤던 작가는 박완서만은 아니었다. 스스로 ‘아버지 없는 세대’라 부르기도 했던 전후 한국문학의 정신 속에는 살해당했거나 불온한 존재가 되어 지워야만 하는 가족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러한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박완서의 기억을 다시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주류적 남성 서사들이 바라보지 못했던, 이중으로 잊힌 여성의 삶이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완서의 소설에서 나타나는 위태로운 제사의 풍경은 가족 관계를 향한 사회적 위기에 대한 소설적 대응의 지난한 과정을 반영한다. 자전적 이야기의 반복 속에서 박완서의 소설은 은폐해야 했던 죽음의 진상에 점차 다가간다. 이 진실의 복원 과정에서 사실 그 자체의 내용보다는 그 관계가 살아남은 여성들의 삶을 옥죄는 방식에 대한 집요한 추적이 박완서의 소설 속에서 나타났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그의 관심이 과거를 증언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위태로운 자신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금기가 된 가족 관계를 계속 마주하려고 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권명아는 박완서의 소설을 검토하면서 제사와 무속 제의 등에 대한 집착이 근대성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죽은 자, 혹은 죽은 것들을 매장하거나 반대로 기념함으로써 과거를 교정하려는 방식”8으로 재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처럼 제사와 같은 의례는 국가폭력에 의해 금지된 사회적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사회를 전환하는 주요한 동력이었다.9
    박완서의 소설에 나타나는 제사의 풍경은 금지된 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문학사적 긴장을 담아낸다. 관계성에 대한 한국문학사의 전통 속에서 박완서가 가진 고유한 자리는 관계의 위기에서 파생되는 활력과 배제라는 모순된 양상을 포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완서의 소설에서 가족의 위기는 여성의 삶에 상반된 효과를 가져온다. 불온한 가족 관계로 인한 사회적 위기를 경험하지만 동시에 가부장 없는 가족의 생계부양자가 된 여성은 사회적 주체로 거듭날 기회를 잡게 된다.10 「엄마의 말뚝」에서 남편의 급사로 대처로 나갈 수 있었던 어머니나,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오빠의 죽음 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나’의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묘한 활기는 그러한 역설적 위치를 포착한다. 그러나 위기에서 비롯된 이러한 활력 뒤에는 가부장적 정상성으로 회귀하려는 전후세대 남성의 욕망이 다시 여성을 배제하는 가족 질서를 재구성하는 서사가 뒤따른다. 「엄마의 말뚝」 연작의 마지막 편에서 엄마의 죽음 이후 그의 유언대로 화장해서 바다에 뿌리려던 ‘나’를 제지하는 것은 장손인 조카다. 「부처님 근처」에서 여성들의 제사가 불완전한 형태로 이루어졌던 것11처럼, 「엄마의 말뚝」에서 가족 의례에 대한 여성의 주도권은 다시 남성 가부장에 의해서 회수된다. 박완서의 소설은 제사가 금기가 된 관계의 계보를 복원 혹은 창출하려는 사회적 실천으로 의미화되었던 역사적 맥락뿐 아니라, 이 실천이 여성에게 주었던 가능성의 획득과 상실이라는 양면성을 모두 보여주었다.

  

2

    한국문학사에서 제사의 풍경은 근대적 폭력과 마주한 이들이 경험했던 관계의 위기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 위기의 재현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는 실천이 되기도 했다. 제사 문학의 이러한 한국사적 맥락은 근래 연이어 등장하고 있는 제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놓여 있는 문학사적 위치를 가늠하게 해준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와 황정은의 『연년세세』의 경우처럼 근래 등장한 소설 속 제사의 풍경은 사회적으로 금지된 관계성을 증언하는 작품은 아니다. 탈냉전과 민주화를 거치며 과거사를 말하는 것은 금기의 영역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금지를 대신한 사회적 망각과 이에 맞선 기억의 경합이 뒤를 이었고, 망각으로부터 사라진 이들의 삶을 복원하려는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근래 제사의 풍경을 포착하고 있는 소설들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잔혹한 폭력의 역사를 둘러싼 망각과 기억의 전선 모두가 놓치고 있었던, 다른 경험과 삶을 가시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사의 재현이 포착해왔던 상실과 폭력의 기억은 때로는 물리적 위협으로, 때로는 무관심과 왜곡에 위협받았다. 그러나 어떤 기억들은 대립의 구도를 세우지도 못한 채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전쟁의 폭력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지만, 전쟁의 기억은 모두의 경험을 반영하지 않는다. 남성이 경험한 전투와 정치는 전쟁 기억의 중심을 이루는 데 반해, 여성의 경험은 전선이 아닌 후방과 가족, 생계의 문제로 비가시화되었다.12 동시대 여성의 삶을 조명하려는 노력이 이어지는 가운데 앞선 세대 여성들의 세계를 살피려는 시도는 역사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여성의 계보를 그리는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작품들이 제사의 문학사적 전통과 연결되는 지점은 금기의 증언이 아니라 비가시화된 관계를 불러내 새로운 계보를 창출하는 힘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계보의 서사에서 우리가 박완서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는, 상실 이후의 삶에서 여성이 경험한 이중의 가능성을 모두 발견하게 된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의 ‘심시선’은 소설에 등장하는 가족 계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그의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만들어진 넓은 가계도 속의 인물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하와이에서 지내기로 한 제사를 위해 모여든다. 소설의 각 장은 심시선이 남긴 책의 인용과 하와이를 여행하면서 제사 때 올릴 가장 좋은 것(경험 또는 물건)을 모으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교차한다. 심시선은 작중에서 행동하는 인물이 아닌 기억의 회상과 인용을 통해 소설에 등장한다. 작가의 의도된 배치에 의해서 심시선은 가족 성원이 뒤따라야 할 일종의 사회적 모범이라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는 이 가족 집단을 구성하는 혈연적 관계의 한 고리가 아니라, 그 자신이 행동과 가치의 준거로서 가족의 계보를 창출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도입부에 인용되는 제사 문화를 두고 심시선과 보수적인 남성 지식인 사이의 갈등은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이 제사라는 (가족적이자 동시에 역사적) 계보의 재생산 수단을 두고 가부장적 한국 사회와 경합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의 첫 장면은 한국 사회의 제사 문화를 둘러싼 심시선과 보수적 남성 지식인 사이의 논쟁이다. 제사를 전통문화의 중요한 축이자, 부계적 가족 계보를 재확인하는 기회로 인식하는 남성 지식인에 맞서 심시선은 제사를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이 새로운 시대의 방향이라고 확신한다. 제사를 둘러싼 이 대립의 장면에서 “바깥 물 좀 드셨다고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 아”13니라는 비난의 수사는 심시선이 서 있는 좌표의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그는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와 치열하게 맞서지만, 동시에 그 사회의 바깥에서 상징자본을 가지고 온 외부자로 여겨진다. 어린 나이에 민간인 학살로 전쟁고아가 되어 하와이로 이민을 떠났고, 이후 독일에서 결혼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생애는 한국적 가족제도의 견고한 틀에 온전히 갇힌 적이 없다. 한국의 가부장제로부터 심시선 일가가 상대적 자율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진취적 여성 지식인인 심시선의 역량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성의 가족제도가 무너지는 틈새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과 대량 학살, 이주 등은 가부장적 가족 질서에 가해진 강력한 충격이었다. 심시선의 삶에 던져졌던 잔혹한 현대사의 비극들은 역설적으로 그를 짓누르는 가부장제의 견고함을 연성화했다. 그런 점에서 심시선은 한국의 가부장적 가족 질서의 외부자라는 자리에서 제사로 대표되는 가족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할 수 있던 인물이다. 그런 심시선과 제사를 맞물려놓는 소설의 선택은 기존의 남성적 질서에 대항하여 계보의 재구성이라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위치로 그를 세운다. 폭력으로 인해 사회적 관계를 상실하고 한국을 떠난 심시선의 선택에서 극대화되는 것은, 뿌리뽑힌 자의 위기보다는 견고했던 가족적 위계가 붕괴되면서 새로운 사회적 위치로 이동할 수 있는 위태로운 기회다. 독일인 화가 마티아스와의 만남이나 그의 죽음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심시선은 반복해서 기존의 관계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적 위치를 얻는 기회로 활용한다. 마치 박완서 소설 속 여성들이 가족의 상실 이후에 사회로 나가며 보였던 어떤 활력처럼, 심시선은 관계의 위기를 자신을 얽매던 굴레를 녹이고 이를 새롭게 자신의 계보로 빚어낼 기회를 얻는다.
    한국 사회 내부의 시선에서 심시선은 기이한 경로를 거쳐온 외부자다. 그러나 심시선이 마주했던 위태로움들을 생각한다면, 실상 가부장제의 억압적 질서는 한국이란 경계로 안과 밖이 나뉘지 않는다. 『시선으로부터,』에서 심시선 가족이 행하는 제사는 부계 혈족을 강화하는 의례인 한국 사회의 제사와 대립한다. 모계를 따르고 그마저도 혈연 계보를 느슨하게 만들면서 디아스포라적 경험을 포괄하는 심시선 일가의 제사는 가부장제의 제사가 강화하고자 했던 거의 모든 것을 뒤집는다. 단지 죽은 자를 추모하는 가족 의례라는 제사의 가장 기초적인 정의만을 지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죽음을 기억하려는 의례 사이의 이러한 경합은 다시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기억되는 죽음과 그에 맞서는 대항 기억이자 새로운 사회적 계보의 원점이 되는 이의 죽음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바로 심시선의 삶을 옥죄려던 마티아스 마우어의 죽음 말이다.
    심시선 일가가 심시선의 1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서 모인 하와이는 시선을 기억하는 공간일 뿐 아니라 마티아스 마우어의 기억을 만들어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의 미공개 유작에 포함되어 있던 그가 그린 심시선의 초상화가 하와이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마이 스몰 퍼키 하와이안 티츠My small perky hawaiian tits〉라는 모욕적인 제목이 붙은 심시선의 초상화는 가족들의 여행지인 호놀룰루 미술관에 걸려 있다.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심시선을 고립시키기 위해서 사랑을 배반당한 자로 자신을 연출한 마티아스의 자살은 죽음의 기억과 애도를 타인을 가두는 굴레로 사용했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시선의 목소리 앞에는 위대한 남성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기억이 장벽처럼 세워진다. 마티아스의 그림이 심시선을 성적 측면만을 강조한 이국적 존재로만 재현하듯 그의 죽음 역시 시선을 자신이 그려내고자 하는 이미지 속에 포획하려고 한다. 마티아스의 죽음은 죽은 자에 대한 기억과 애도가 차등적으로 분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이를 통해서 현재의 차별적인 위계가 어떻게 강화되는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한국 사회를 향한 심시선의 비판적 진단에 귄위를 실어주었던 한국 바깥의 문화적 상징자본 역시 가부장제라는 가장 오래되고 견고한 세계 위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시선으로부터,』가 선택한 하와이라는 공간은 국경을 따라 구성된 기억의 단층선을 넘어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 장면을 포착하게 해줄 뿐 아니라, 가부장제의 지구적 질서의 한 단면도 짚어낸다.
    마티아스가 자살을 가해의 수단으로 썼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한 것은, 귄위적인 남성 예술가인 자신을 피해자로 기억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남성을 파멸시키는 악녀의 오래된 이미지를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피해’와 ‘희생’을 중심으로 축조되는 20세기적 기억서사의 반영물이기도 하다.14 군사화된 남성성과 그 국가를 위해 희생한 남성을 강조해온 민족국가의 기억은 20세기 중후반에는 점차 피해자다운 피해자의 위치를 두고 벌이는 경합으로 전환된다. 마티아스는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듦으로써 시선에 대한 세계의 기억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만들어내려고 한다. 심시선의 끝없는 부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티아스가 만들어낸 피해의 기억 앞으로 반복적으로 소환된다. 스스로를 배신당한 피해자로 형상화함으로써 기억의 권위를 획득하는 마티아스의 수단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향한 폭력에서도 반복된다. 심시선의 손녀인 ‘화수’는 직장에서 여성 직원들을 표적으로 삼은 염산 테러의 피해자가 된다. 염산 테러를 감행한 가해자 ‘기민철’은 초범이라는 이유와 희석된 염산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집행유예 처분만 받은 채로 자살한다. 기민철이 화수가 다니던 회사의 착취 때문에 도산하게 된 협력업체 사장이라는 사실과 자살은 그가 피해자로 기억되게 한다. 염산 테러로 인해 화수가 유산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언론에 새어 나가면서 화수와 여직원들의 피해에 언론과 사회가 관심을 보이게 되지만, 그들은 누가 더 피해자다운지 증명하길 요구하는 현실 앞에 서게 된다. 화수는 피해자가 되고 싶지도, 피해자로서 자기 정체화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피해의 서사를 통해 확산이 되는 기억의 경로는 가해자가 사라진 뒤에도 폭력을 더 증폭한다.
    “어떤 자살은 가해였”고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178쪽)가 될 수 있는 것은 피해의 서사를 동력으로 삼는 강력한 기억의 회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경로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폭력은 제동장치 없이 가속할 뿐이다. 심시선의 가족들이 모인 제사는 기억되지 않는 이를 기억하기 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마티아스가, 한국 사회가, 가부장제의 질서가 만들어낸 기억의 경로가 유일한 것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그 기억의 경로가 더는 폭력의 속도를 높일 수 없도록 맞서기 위함이다. 가족들의 경험을 묶어내는 심시선의 기록과 말들은 새로운 기억의 경로를 만들어낸다. 심시선과의 관계를 통해 새롭게 만들어지는 기억의 경로는 피해와 가해, 좋은 삶과 나쁜 삶,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다르게 정의하고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그 관계는 남성적 사회의 그림자에 가려진 삶들을 회복하고, 위로의 에피소드가 아닌 역사와 계보를 만들어낸다.
    『시선으로부터,』의 심시선은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자 했다”15는 작가의 말처럼, 삶의 위기 속에서도 선의와 자긍심을 새롭게 세워나가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사회적 위기 속에서도 이를 낙관적으로 극복해가는 여성의 서사는 정세랑의 소설을 뒷받침해온 주요한 축16이다. 『시선으로부터,』에서는 이 극복의 서사가 한 개인으로 머물지 않고, 20세기에서 21세기로 다른 시대를 사는 여성들의 계보로 확장된다. 이러한 계보적 관계는 남성적인 집단의 계보를 대체하고, 더 나아가 남성 질서에 의해 주변화되었던 여성들의 삶을 역사화한다. 즉 20세기의 여성은 21세기 여성의 모델이 되어주고, 21세기의 여성은 다시 20세기의 여성의 삶을 복원하는 관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심시선이 ‘실재에 기반하여 상상된 본보기’17라는 선우은실의 표현처럼, 이 계보는 20세기 여성의 삶을 긍정하면서 그곳에서 21세기의 여성들이 살아갈 출발점을 찾아내려 한다.
  

3

    『시선으로부터,』가 관계의 위기 속에서 새로이 구성되는 계보와 그 가능성에 집중한다면, 『연년세세』는 무너진 삶의 계보를 따라 확장되어온 현실의 위태로움을 향해 걸어간다. 황정은의 소설 세계에서 기억은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백의 그림자』(민음사, 2010)에서 ‘그림자’가 들린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듯, 나쁜 기억은 누군가의 삶에 침투하여 그를 고통에 빠뜨리고 결국에는 파괴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황정은의 소설에서 나쁜 기억이 전달되는 경로가 대부분 모계라는 점이다. 황정은의 첫 소설 「마더」에서 상처 입은 자를 파괴하는 ‘기억의 배드섹터’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자신을 버려야만 했던 어머니로부터 전달이 되어 ‘오’를 파괴해간다. 그에게 ‘기억의 배드섹터’, 스스로를 파괴하는 상처 입은 자의 기억을 전달한 어머니의 삶 역시 망가졌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문학동네, 2013)에서 상처 입은 기억을 전달하는 이 역시 ‘앨리시어’의 어머니와 그의 어머니였다. 앨리시어의 어머니를 망가뜨린 나쁜 기억, ‘씨발됨’에 앨리시어 역시 노출되어 고통을 받는다.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에서도 사고로 남편을 잃은 어머니 ‘금자’가 ‘소라’와 ‘나나’ 자매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전달한다. 황정은의 소설에서 기억을 전파하는 모계라는 경로는 반복되었지만, 『연년세세』에 와서야 처음으로 어머니의 기억에 초점을 맞춘다.
    『연년세세』는 ‘이순일’, ‘한영진’, ‘한세진’ 모녀가 중심인물인 연작소설집이다. 「파묘」와 「무명」은 어머니 이순일을 중심으로, 「하고 싶은 말」은 첫째 딸인 한영진의 이야기이며 마지막 작품인 「다가오는 것들」은 한세진을 화자로 내세운다. 『연년세세』는 2020년대에 발표된 여성 가계를 소재로 한 작품들처럼 모계 서사의 원점을 찾아 한국전쟁 전후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으로 인해 가족을 잃은 이순일의 기억부터 한영진, 한세진의 현재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이순일의 이모 ‘윤부경’과 그의 아들 ‘노먼’까지 이어지는 기억의 가계도가 그려진다.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나 최은영의 『밝은 밤』(문학동네, 2021)과 같이 여성 가계를 중심으로 한 다른 작품들과 『연년세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는 여성 가족들의 대화가 단절되거나 엇갈릴 뿐 아니라,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서로에게 힘겨운 기억의 멍에를 넘긴다는 사실이다. 황정은의 다른 작품들처럼 『연년세세』의 여성 가계는 힘겨운 감정들이 흐르는 경로이지만, 고통스러운 세계의 기원을 찾아서 거슬러 오르는 길이기도 하다. 그 세계의 고통을 마치 처음부터 없던 일처럼, 잊고 보지 않으려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오르는 순례의 길 말이다.
    연작소설집 『연년세세』의 첫 작품인 「파묘」는 이순일이 외할아버지의 묘를 파묘하기 위해 둘째 딸 한세진과 함께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들어가며 시작한다. 한국전쟁 중에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인 이순일에게 외할아버지의 묘는 그가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가족의 장소였다. 그러나 이순일의 나빠져가는 건강 때문에 무덤을 관리하기 어려워지자 파묘를 결정한다. 이순일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묘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외할아버지를 추모하는 의례에서 소외된다. 파묘를 하기 전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한세진과 아침 일찍 집을 나섰지만, 인부로 고용한 마을의 노인들은 이순일과 한세진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무덤을 파헤치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유골을 화장할 때도 이순일이 제사를 올리기 전에 인부들이 유골을 태우기 시작한다. 이순일과 마찬가지로 전쟁고아였던 남편 ‘한중언’ 역시 처가 제사에는 참석하는 게 아니라며, 매번 이순일을 홀로 성묘를 보내곤 했다.
    이순일은 자신의 가족에 대한 의례에서도 소외되었지만, 부계 가족의 제사 의례와 가족 내에서 ‘어머니’의 역할은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는 타인의 기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신의 기억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일에 익숙하다. 뉴질랜드에서 생활하는 막내아들 한만수가 이순일에게 주기 위해서 받아온 선물과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18라는 축하 메시지를 한세진이 모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존경과 축하의 말도, 마음도 결코 이순일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어머니라는 역할을 향해 있을 뿐,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지워진 이순일의 삶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 말을 전한 이들에게 이순일은 어머니일 뿐, 자기 이름이 없는 자다. 이순일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다른 단편이 「무명無名」인 까닭은 아마도 그가 이름 없는 자로,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지 못한 자로 살아왔음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무명」에서 이순일은 어린 날에 아버지에 의해 눈더미에 던져졌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인 그 장면은, 그의 생애가 가장 친밀해야 할 이들로부터 폭력을 경험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리라 가늠하게 해준다. 이순일의 부모는 전쟁 중 학살과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린 여동생은 외할아버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일어난 사고로 잃게 된다. 순일의 삶에서 반복되는 상실은 주변의 사람들을 잃는 것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그의 이름이었던 ‘순자’를 불러줄 사람도, 그리고 순자라고 불렸던 시절의 기억도 어딘가로 사라지고 마는 상실이었다. 어린 순자는 식모처럼 부리면서도 가족이라는 말로 그를 붙잡았던 고모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 결혼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서류상의 이름이 이순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순일이 된 그의 곁에는 순자로서의 삶을 함께 겪었거나 기억하는 이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또 다른 순자 역시도 곁에 없다. 순자였던 그를 기억하는 이는 80년대가 돼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된 이모 윤부경뿐이다. 그리고 그 역시 더는 순일의 곁에 남아 있지 못한다.
    이순일의 가족들은 순자였던 시기의 그의 삶을 거의 알지 못한다. 던져진 그의 입에 들어간 눈에서 느낀 무명천 같은 폭력의 맛도, 순자가 용서할 수 없던 것들도, 고모에게 벗어나기 위해 독일로 떠나고 싶었던 그의 마음 역시도 알 수 있는 이가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마음으로 같은 시대를 살았던 또 다른 순자와 순자들 역시 알지 못한다. 이순일과 이순자, 그리고 또 다른 순자가 겪은 것, 견뎌낸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조차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면서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 했고, 자신의 아이들이 그 끔찍한 일들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꿈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무명」, 138쪽)

    자신의 고통을 피해서 잘 살기를 원했던 이순일의 바람은 그가 받아들인 생존의 방식 속에 딸들의 삶을 가두고 만다. 동성 연인과 함께하는 한세진이 자신의 삶을 터놓을 수 없던 것도, 한영진이 자기를 계속 모멸 속에 가두었던 것도 이순일이 잘 모르면서도 잘 살기 위해 감내한 일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그 일들은 이순일과 이순자의 삶을 이야기하지도, 그들이 스스로 말하지도 않게 했던 세계의 외면에서 비롯된다. 첫째 딸인 한영진은 이순일이 그랬던 것처럼 잘 살기 위해서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하고 싶은 말」, 70쪽) 사람이었다.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그렇게 견디고 버티는 삶에서 한영진이 얻은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이었다. 한영진은 모성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자신의 일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순일에게도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이순일의 잘 살기는 그에게 상처를 남겼듯이 한영진에게도 벗어나기 힘겨운 족쇄가 된다. 이순일이 원치 않았던 일이었다 해도 여성을 어머니라는 역할로 순치시켰다는 점에서 자신뿐 아니라 그다음 세대 역시 자신을 속이는 거짓말에 순응하게 한다.19 한영진이 “거짓말, 하고 생각할 때마다 어째서 피 맛을 느끼”(「하고 싶은 말」, 84쪽)는 것은 가부장적 세계가 그의 이름이라며 붙였던 모성이란 언어가 그동안 흐르게 만든 고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위태로운 삶 속에서 이순일이 ‘잘 살기’를 바란 것은 어떤 잘못도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잘 사는 가능성을 남겨두지 않은 세계야말로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다. 잘 살고자 하는 이들이, 끔찍한 일들을 겪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들이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가오는 것들」, 174쪽)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것들」에서 한세진의 동성 연인인 하미영은 어린 아기가 벽에 던져지던 것을 기억한다. 하미영의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그의 동생을 벽에 던졌고, 그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자신 역시 그 폭력의 대상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미영의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알려주면서 오히려 잊는 것이 편안해지는 길이라고 조언한다. 폭력을 잊어버리라는 말은 그 폭력의 고통을 보이지 않도록 하는 일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잊으라는 말 앞에서 고통을 입은 자들은 자신이 경험했던 것이 폭력이 아닌 척 위장해야 하고, 그 폭력을 가리는 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미영은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려는 공원 건립을 반대하는 시민을 설득하려고 만들어진 영상에 대해서 생각한다.

    부드럽고 밝은 색조와 천천히 숨을 쉬는 것처럼 편안한 리듬에서 전개되는 그 영상에서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생명안전공원을 설명하는 그 여성의 목소리를 하미영은 어디선가 이미 들은 것 같았다고. 그가 생명안전공원이 인근 부동산 가격을 하락시키는 혐오시설인 납골당이 아닌, 도시를 이롭게 하는 시설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공원이 우리 도시가 명품 도시로 거듭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했다고.
    명품 도시.
    그 말을 발음한 전후에 그는 울었을 거라고 하미영은 말했다.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어.
    용서할 수가 없어. (「다가오는 것들」, 173~174쪽)

    나와 우리의 고통을 부정하는 언어는 타인의 말로만 남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서 더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반발을 막기 위해서라도 폭력에 희생된 이에게 그 언어를 자신의 입으로 반복하게 한다. 폭력에서 벗어나 잘 살고 싶었던 이순일도, 그게 더 나은 삶이라고 믿었던 한영진도 그렇게 말을 하게 만들었던 자들, 그런 세계와 언어는 용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전쟁 중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난 윤부경을 ‘양색시’라며 혐오하고 조롱한 한인사회와 그들의 언어를 보고 부경의 아들인 노먼은 모어를 거부한다. 그는 한국어를 할 줄 알지만 결코 말하지 않는다. 부경을 향했던 혐오의 말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언어를 거부하고 침묵하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침묵은 그 언어가 계속 이어지도록 방관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먼의 딸인 캐서린은 한세진에게 노먼이 자신의 모어를 경멸하고 용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캐서린은 그의 침묵이 “안나를 양갈보라고 부른 그 사람들”에 대한 “아주 강한 동조였다고” 말한다. “안나의 언어를, 자기 모어를 경멸 속에 내버려”(「다가오는 것들」, 177쪽) 두었기 때문이다. 『연년세세』의 여성 가계도는 소통보다는 불화를 반복하는 관계다. 서로에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알 수 없는 것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하는 이 삐걱거리는 대화는 역설적으로 그들의 관계를 다른 측면에서 조망하게 한다. 각자의 고통을 보이지 않게 하는 사회의 언어가 아니라, 서로가 입힌 상처일지라도 그 고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관계로 변화하려고 한다. 그래서 한세진은 노먼처럼 침묵하고, 경멸하는 대신에 서로의 고통을 힘겹더라도 들으려고 한다. 그래야만 다가올 다른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4

    모든 이야기는 과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나온 과거를 통해서만 현재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과거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그리고 우리가 가야 할 내일도 함께 이야기한다. 그래서 죽은 자에 대한 기억과 추모 역시 현재를 결정하고, 미래가 지나갈 경로를 만들 수 있었다. 한국문학사에서 제사의 풍경이 반복되었던 것 역시 죽은 자들이 살았던 과거를 통해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향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국문학에 제사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죽은 자들에 대한 기억, 그 죽음 속에서도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을 통해서 어떤 미래로 향하려고 하는지.
    20세기 한국의 제사 문학은 금지되고 부정당한 가족 관계를 불러냄으로써 현재의 삶을 억압하는 정치적 금제에 맞섰다. 말할 수 없던 관계를 말함으로써 이를 금지하는 힘의 부당함을 주장하고, 빼앗긴 삶의 권리를 이야기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다시 등장한 제사의 풍경은 과거처럼 정치적 억압과 싸우는 전선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폭력이라고 불리지조차 않는,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위장한 언어와 생각들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가 보인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도 서로에게 불빛을 전하는 이들의 계보가 점차 밝아지고 있다. 여성 가계도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그 불빛은, 혈연적 질서를 따르는 것은 아니다. 심시선의 가족들이 제사의 이름을 가져와서 제사의 질서를 전복했듯이, 여성 가계도는 가족 관계를 통해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는 연대의 계보로 펼쳐져나간다. 『시선으로부터,』와 『연년세세』의 가족 서사는 가족과 한국 사회의 범주를 넘어 코리안 디아스포라까지 서로의 고통을 이해하는 범위를 넓혀간다. 최은영의 『밝은 밤』이나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처럼 모계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들뿐 아니라, 강화길의 『대불호텔의 유령』(문학동네, 2021)과 한정현의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문학동네, 2022)처럼 여러 시대로 이어지는 여성의 이야기들까지 이 연대의 계보에 속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연대의 계보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 여성의 역사를 되찾을 뿐 아니라, 지금의 폭력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던 언어와 그 계보를 상대화한다. 역사에서 잊히고, 자신의 역사를 부정당한 자들이 이야기한다. 아니 그들은 계속 이야기를 해왔다. 벤야민의 말처럼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지 않고 죽을 만큼 빈곤한 삶을 살지 않는다.20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다가올 세계를 위해서.
  
  
  

주석

  1.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윤조원 옮김, 필로소픽, 2018, 13쪽.
  2. 김윤식, 「우리 문학의 샤머니즘적 체질 비판: 세 가지 도식과 관련하여」, 『운명과 형식』, 솔, 1992, 217쪽.
  3. 권헌익, 『전쟁과 가족』, 창비, 2020, 37쪽.
  4. 박완서, 「부처님 근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문학동네, 2013, 110~111쪽.
  5. 위의 책, 111쪽.
  6. 박완서 외, 「6·25 분단문학의 민족동질성 추구와 분단 극복의지」, 『한국문학』, 한국문학사, 1985. 6, 49쪽.
  7. 권헌익, 앞의 책, 142~143쪽.
  8. 권명아, 「한국 전쟁과 주체성의 서사 연구」,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202쪽
  9. 권헌익, 『또 하나의 냉전』, 민음사, 2013, 140쪽.
  10.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남성 부재 상황에서 여성이 경제·사회적인 주체로 거듭날 수 있던 경험은 박완서만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경제 영역에서 두드러졌던, 전후에 사회로 진출한 여성들은 그러나 가부장적 가족 질서를 재구성하려는 한국 사회의 보수성 때문에 다시 가정 내부로 흡수된다. 이재경, 「여성의 시각에서 본 분단과 근대」, 윤택림·이재경·조은주 외, 『여성(들)이 기억하는 전쟁과 분단』, 아르케, 2013, 15쪽.
  11. 「부처님 근처」에서 죽은 오빠와 아버지에 대해 모녀가 치르는 제사는 박수무당이 지내는 지노귀굿이나 비구승에 의해 진행되는 절에서의 제사로 나타난다. 여성의 제사는 유교적인 가족 의례가 아니라 유교적 질서 외부의 다른 종교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무속과 불교는 전근대 한국 사회에서 유교 의례에 참여할 수 없던 여성들의 의례 영역이었다. (로렐 켄달, 『무당, 여성, 신령들』, 김성례·김동규 옮김, 일조각, 2016 참조.) 이는 남성 가족 성원의 상실 이후에 여성들이 여전히 가부장적 질서 안에서 주변적 위치에 머물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12. 이성숙, 「한국전쟁에 대한 젠더별 기억과 망각」, 윤택림·이재경·조은주 외, 앞의 책, 60~61쪽.
  13.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문학동네, 2020, 9쪽. 이후 본문 인용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한다.
  14. 임지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민족국가의 서사에서 희생자라는 자리가 민족의 도덕적 정당성을 뒷받침해주는 기억의 준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임지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휴머니스트, 2021.
  15. 정세랑, 「작가의 말」, 앞의 책, 334쪽.
  16. 오은교, 「정세랑과 많은 사람들」, 『문장 웹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 12.
  17. 선우은실, 「‘좋은 것’을 상상하는 힘: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 『크릿터』 3호, 민음사, 2021. 3, 104쪽.
  18. 황정은, 「파묘」, 『연년세세』, 창비, 2020, 34쪽. 이 글에서 인용될 황정은의 소설은 『연년세세』에 수록된 4편의 단편, 「파묘」 「하고 싶은 말」 「무명」 「다가오는 것들」이며 이후 인용시 괄호 안에 작품명과 쪽수만 표기한다.
  19. 재클린 로즈, 『숭배와 혐오』, 김영아 옮김, 창비, 2020, 159쪽.
  20. 발터 벤야민, 『서사(敍事)·기억·비평의 자리』, 최성만 옮김, 길, 2013, 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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