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걸음들로 함께 새긴 4·16 세월호 참사: ‘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문학인들’의 10년

  

    2014년 4월 15일 밤 9시에 인천항을 출발한 세월호가 이튿날인 16일 오전 8시 52분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다는 신고가 접수된다. 전라남도 소방본부 119종합상황실에 접수된 최초 신고자는 단원고 학생이었다. 그 뒤로 탑승자들의 신고가 잇따랐다. 배가 기울었다고, 넘어가고 있다고, 구해달라고, 살려달라고 했다. 그들은 가족에게 마지막일지 모를 안부도 전했다. 통신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사랑하거나 미안하다는 통화와 문자를 남긴 거다.
    신고를 받고 해경 123정이 출동하고, 헬기도 도착했다. 세월호 근처에는 500명 넘게 탈 수 있는 유조선 둘라에이스호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는 10시 30분 선수부만 남기고 침몰했고, 탑승자 476명 중 304명은 배 안에 갇히거나 바다에 빠진 채였다.
    이것은 사고가 아닌 사건이었다. 선장과 선원은 일찌감치 탈출했고, 기다리라는 말을 믿은 사람들만 목숨을 잃게 된 사건이었다. 구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저버리고 제때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었다.

    사람들에게 2014년 4월 16일에 뭘 했냐고 물으면 당연히 기억한다는 답변을 듣게 된다. 나도 그날 하루가 온전히 기억난다.
    그날 오전, 9시가 넘어 세월호가 침몰하고 있다는 속보를 접했지만, 승객들이 구조될 거로 생각했다. 진짜 아무 걱정 하지 않았다.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좀 놀랐겠다.’ 정도로만 생각했다. 11시쯤엔 전원 구조라는 속보를 전해 들었고 함께 차를 마시던 지인과 당연한 결과라며 얘기를 나눴다. 무슨 차를 마셨는지도 기억난다. 오후 3시에는 전원 구조가 오보였다는 소식에 뉴스를 검색했고 물속으로 가라앉은 세월호를 봤다. 그때부터 TV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살면서 온전히 기억되는 하루가 있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날의 날씨와 기분, 공기까지 박제가 된 것 같은 순간들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떠올려도 세월호 참사만큼 선명한 기억은 없다. 우리가 2014년 4월 16일에 저마다 무엇을 했건 기억의 끝맺음은 하나로 연결된다. 세월호 참사라는 말도 안 되는 비극을 공유하고 있고, 그 기억이 계속되어야만 한다는 당위에 동의한다는 거다.

    4·16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어린이청소년문학에 몸담은 사람들은 마음을 모았다.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편집자와 독자의 마음이 하나였다. 우리 모두는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살리지 않은 사건을 목도한 증인들이었다. 범죄 현장의 목격자인 셈이다. 그러니 침묵하거나 숨을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든 내가 본 것을 증언해야 했다. 그래서 글과 그림으로, 말과 행동으로 증언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대가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어린이책 작가들’(현재 ‘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문학인들’)이었다.
    연대의 힘은 강해서 혼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을 이루고야 만다. 많은 사람이 함께했고, 어떤 이는 중심에 서기도 했다. 연대의 구심점에 선다는 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하는 일이다. 모든 일에 앞장서야 하고 모두를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청소년 문학가들의 구심점에는 임정자 작가가 있었다. 이 글은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며, 함께한 모두에게 바치는 감사이기도 하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가 함께한 걸음은 이 땅에 진실이 침몰당하지 않게 하고, 같은 참사가 벌어지지 않게 하려는 바람이었다. 기억해야 잊지 않을 수 있고, 잊지 않아야 되풀이되지 않을 수 있다. 이 지극함이 지금 2014년 4월 16일을, 아니 수시로 떠올려야 하는 이유다.
  

# 서명운동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깃발 (출처: ‘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문학인들’. 이하 출처 동일)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어린이책 작가들’이 처음 한 일은 진실규명을 위한 서명운동이었다. 유가족이 중심이 된 서명운동은 세월호가 왜 침몰했고, 사람들을 왜 구조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거였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요구였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지켜봤는데,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모른다면 복장이 터지고도 남을 일이 아니겠는가. 누구라도 그럴 거다. 그러니 특별법을 만들어서 진실을 알게 해달라고, 그래야 답답하고 억울한 마음을 달랠 수 있겠다고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 호소가 바로 서명운동이었다.
    서명운동은 사람들의 통행이 잦은 곳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안산과 광화문에 마련된 분향소는 물론이고 지하철 입구와 공원, 행사장 등에 거리 서명대가 마련됐다. 서명운동에 참여한 단체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유가족과 안산시민, ‘세월호와 대한민국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들’(‘세대행동’)이 앞장섰고, 어린이청소년책 관련 단체에서는 ‘어린이도서연구회’가 나섰다.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어린이책 작가들’도 거리 서명대 지킴이를 자처했다. 작가들은 안산과 광화문 분향소, 지하철 홍대입구역에 마련된 거리 서명대를 중심으로 시민들의 서명을 이끌었다. 2014년 6월부터 시작된 범국민 서명운동은 같은 해 11월 세월호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 바탕에는 650만 명의 국민 서명이 있었다.
    하지만 서명운동과 특별법 제정 과정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드물게 거리 서명대에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에게 트집을 잡거나 험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해 국회 농성과 단식투쟁을 하는 유가족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왜곡하는 무리도 있었다. 특별법 제정 이후에는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와 활동을 방해하고, 활동기간과 진상규명을 위한 예산을 줄이는 일도 잦았다. 그런 탓에 우리는 또다시 거리 서명대에서 세월호 인양과 진실규명을 위한 서명운동을 이어가야 했고, 세월호 배지(출판인과 그림 작가, 디자이너가 중심이 되어 만든 배지)를 나누고, 세월호 참사 추모 집회에서 초를 들고 길바닥에 앉아 있어야 했다. 우리가 간절히 바랐던 건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염원, 그 하나였다.
  

세월호 참사 추모 배지

  

# 노란 엽서 그리기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을 받으면서 참사를 추모하는 마음도 나누자는 의견이 생겼다. 4·16 세월호 참사는 유가족들만의 상처와 비극이 아니었다. 그건 우리 모두의 상처와 비극이었다. 참사를 겪고 사람들이 나눈 대화 중에, 하루가 끝날 무렵 가족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큰 행복인 줄 알겠다는 말이 많았다.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간 가족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휘감은 거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의 상처와 불안을 위로해야 했다. 그 작업이 바로 노란 엽서 그리기였다.
    

노란 엽서를 쓰는 참여자의 모습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상당수 포함된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어린이책 작가들’은 노란 엽서를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추모하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도록 도왔다. 추모하고 슬퍼하고, 위로하고 위로받는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했다.
전시된 노란 엽서
    2014년 7월 노란 엽서 그리기를 처음 시작한 곳은 광화문광장이었다. 아이들과 어른들은 작가들이 마련한 노란 엽서에 글과 그림으로 추모하는 마음을 담았다. 정성이 담기지 않은 글과 그림은 없었다. 시민들이 만든 노란 엽서는 줄에 걸어 전시했다. 노란 나비와 노란 리본, 노란 배가 그려진 노란 엽서는 바람에 흔들리며 광화문광장을 밝혔다. 그렇게 위로하고 위로받는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이후 노란 엽서 그리기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지역에 거주하는 작가들을 중심으로 노란 엽서 그리기 운동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 릴레이 단식

    세월호 참사 희생자 고 김유민은 단원고 학생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영오 씨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특별법 제정 촉구를 요구하며 2014년 6월부터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비통함과 절박함은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걸음도 이끌었다. 유가족은 동조 단식투쟁을 이어갔다. 곡기를 끊으면서까지 원했던 것은 내 가족이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밝혀달라는 거였다.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어린이책 작가들’도 릴레이 단식을 시작했다. 릴레이를 위한 바통은 현수막이었다. “세월호 유가족을 응원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돌려가며 단식을 이어간 거다. 하루를 굶기로 했지만 더러는 이틀이나 사흘을 굶는 이도 있었다. 단식을 마친 뒤에는 현수막을 펼쳐 들고 인증 사진을 찍고, 지인에게 자신이 가진 현수막을 건넸다. 그러면 현수막을 받은 사람은 단식한 뒤 인증 사진을 찍고, 또다시 현수막을 건네는 방식이었다. 현수막 없이 단식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노란 종이에 추모하는 글귀를 적어 인증 사진을 올렸다. 발 없는 현수막은 소리소문없이 옮겨 다녔고, 공유된 사진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응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사회적재난인 세월호 참사가 비윤리적 방식으로 사람들을 희생시킨 것에 분노했고, 그 희생자가 나와 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심정으로 유가족의 마음을 헤아렸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드러난 모순과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면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절박함으로 유가족의 행보에 동참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보고자 했던 이들은 단식투쟁을 이어가는 유가족 옆에서 폭식투쟁을 저질렀다. 그것은 조롱 섞인 만행이 분명했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한편으론 의연할 수 있었다. 우리에겐 폭식투쟁을 저지른 자들을 포함한 모두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유가족의 단식투쟁은 정치적 쇼가 아니라 사회적 염원이 담긴 절박함이었다. 몰지각한 이들의 폭식투쟁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손을 잡고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울먹이던 유민 아빠의 말이 더 진실함을 우리는 알았다. 그래서 2014년 7월부터 시작된 릴레이 단식은 그해 9월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 한 뼘 그림책 ─『세월호 이야기』

  

한 뼘 그림책을 감상 중인 시민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100일이 지났지만, 진실을 밝히는 일은 멀어 보였다.
    특별법 합의안은 졸속으로 이루어졌고 수사도 지지부진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바로잡기 위한 요구가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진실규명을 위해 작가로서 참여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 자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참여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할 시점이 된 거다. 논의 끝에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어린이책 작가들’은 참사에 대한 동화와 동시를 쓰고, 그림을 그릴 작가를 모으기로 했다.
    2014년 7월 23일에 작가 모집 공고를 내고, 8월 2일에는 작품으로 만든 걸개를 전시하는 것이 목표였다. 한 편의 글이 하나의 걸개에 담겨야 하므로 원고는 1,000자 이내로 짧아야 했고, 일주일의 기간을 두고 글과 그림을 완성해야만 했기 때문에 최대 완성작은 20편으로 정했다. 하지만 기대보다 많은 작가가 참가 신청을 했다.
    신청한 동시인, 동화 작가, 그림 작가는 65명이었고, 글 작가가 완성한 글은 39편이었다. 그림 작가들은 39편의 글에 그림을 앉혔다. 그렇게 완성된 글과 그림은 세로 1미터, 가로 90센티미터의 걸개로 만들어져 거리에 전시됐다. 그게 바로 ‘한 뼘 그림책’이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디자인하고, 현수막을 제작하고, 거리에 설치하고, 설치된 작품을 지키는 것이 모두 작가들의 몫이었다. 걸개를 만들기 위한 기금 역시 작가들의 기부로 이루어졌다.
    걸개 그림책이 처음 거리에 걸린 건 2014년 8월 2일, 광화문광장 분수대 둘레였다. 광화문광장은 시민분향소와 유가족의 거리 농성 텐트가 있고, 참사를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거리에서 시민들을 만난 한 뼘 그림책은 2014년 9월 10일, 도서출판 별숲에서 『세월호 이야기』로 출간되었다. 7월 말에 시작한 일이 8월 초에는 걸개로 완성되고, 9월 초에는 출판물이 된 거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냐고 물으면 명쾌하게 답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지금 다시 하라면 절대 같은 시간 안에 해낼 수 없다는 건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 그때는 가능했다. 그건 어쩌면 희생자를 추모하고, 그들이 죽어야만 했던 진실을 밝히고, 유가족을 위로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바람으로 가능했던 것 같다. 그것들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그때 못할 일이 없었다.
    한 뼘 그림책으로 이름 붙여진 걸개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에서 전시됐다. 안산 부산 여주 원주 광주 대전 전주 인제 파주 제주 하동 해남 제천 공주 구미 등의 거리에서 시민들과 만난 거다. 작가들은 걸개가 전시된 곳에서 세월호 참사 추모 콘서트를 병행했다.
    『세월호 이야기』로 북콘서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 역시 작가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어졌다. 2014년 10월 15일에 광화문광장에서 북콘서트가 진행될 예정이니 신청해달라고 하면 작가들이 나서주는 형식이었다. 전국의 북콘서트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품과 시간을 들여 북콘서트에 선 작가들은 이 땅에 다시는 이런 참사가 없기를, 그래서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랄 수 있는 세상이 만들어지기를 바랐다.
    한 뼘 그림책으로 만들어진 『세월호 이야기』의 인세 수익은 지금까지도 세월호 참사 추모사업으로 기부되고 있다.
    

한 뼘 그림책 전시와 『세월호 이야기』로 진행된 북콘서트

# 기억의 벽 만들기

  

‘기억의 벽’을 시공하는 모습

    2014년 11월에는 세월호 희생자를 찾기 위한 정부의 수중 수색이 중단되고, 범정부사고대책본부도 해체되었다. 특별조사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수사권과 기소권이 보장되지 않아 불완전했고, 희생자 304명 중 9명은 여전히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다. 참사와 진실규명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도 조금씩 식어갔다. 수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지만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은 계속되어야 했다.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어린이책 작가들’은 기억의 중요성을 상기했다. 기억을 이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의 벽’을 만들기로 했다. 기억의 벽은 작가들의 주도로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는 기억운동이었다. 가칭이었던 ‘세월호를 기억하려는 어린이책 작가들’은 이제 ‘기억의 벽을 만드는 어린이문학인들’로 활동 이름을 변경했다.
    기억의 벽은 세로 11센티미터, 가로 14센티미터 크기의 도자기 타일에 글과 그림으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내용을 담고, 그걸 모아 타일 벽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처음 목표한 타일 숫자는 1,000개였다. 이 또한 전국에 거주하는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 중심으로 진행됐다. 시민단체에서 기억의 벽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겠다는 연락이 오면 어디라도 갔다. 그렇게 타일과 채색 도구를 챙겨서 전국을 돌아다닌 거다. 타일을 완성해서 기억의 벽을 만들 장소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였다.
    작가들은 시민들에게 기억의 벽을 만드는 취지를 설명하고, 타일에 무엇을 쓰고 그려야 하는지 안내했다. 글과 그림이 담긴 타일은 말리는 과정을 거치고, 파손되지 않도록 포장한 뒤 유약을 바르고 굽는 곳으로 옮겨졌다. 모든 타일은 일련번호가 매겨졌고, 참가자에게는 번호가 적힌 참가증을 나눠줬다. 기억의 벽이 완성되고 난 뒤에 자기가 만든 타일을 찾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거였다. 기억의 벽을 만드는 비용은 참가자가 지출한 참여비와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 어린이청소년책 관련 단체, 개인의 기부금 등으로 충당했다.

팽목항 방파제에 세워진 ‘기억의 벽’
    작가들은 광화문에 마련된 천막에서 참가를 희망하는 시민들의 신청을 받고, 방법을 안내하고, 타일을 포장하고, 운반하는 일을 했다. 타일을 운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무게가 많이 나갔다. 그리고 추위에 안료가 굳지 않게 하는 작업이 까다로웠고, 깨지지 않게 포장하는 것도 중요했다.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될 즈음에는 허허벌판과 마찬가지인 광화문광장에서 작업을 이어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기억의 벽을 만들 타일 작업은 광화문을 벗어나 지역과 모임을 중심으로 이어가기로 했다.
    처음 팽목항 방파제를 기억의 벽으로 만들자는 논의는 2014년 12월 13일 ‘기다림의 버스’를 타고 팽목항을 방문했을 때 얘기됐다. 1.7킬로미터에 달하는 방파제를 기억의 벽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목표했던 것보다 더 많은 타일이 필요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해 2015년 2월에 기억의 벽을 완성한다는 목표는 참사 1주기에 맞춰 완성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벽을 채울 타일의 개수가 늘어났으니 작가들의 활동도 그만큼 늘어나는 것이 당연했다.
    2015년 2월에는 팽목항에 내려가 기억의 벽을 방파제에 설치하는 일을 구체화했다. 진도군청 직원도 만나고, 타일 시공 업체도 알아봤다. 기억의 벽 타일은 지역별로 배치해서 설치하기로 하고, 미처 참여하지 못한 제주 강원 경상 진도 지역의 타일을 추가로 모으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기억의 벽은 점점 실체적 이미지로 다가왔다. 몸을 사리지 않는 작가들의 수고와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뤄낸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2014년 11월 15일에 시작해서 1차로 기억의 벽을 만든 2015년 2월 13일까지 모인 타일은 1,720장이었다. 그 타일로 팽목항 방파제 69.5미터를 채울 수 있었다. 1차 시공된 기억의 벽 타일은 유가족이 만든 것과 광화문 서울 안산 파주 고양 인천 대전에서 참여한 시민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타일이었다. 이후 2015년 2월 15일부터 타일을 모으는 작업이 다시 시작됐다. 방파제를 마저 채울 타일은 2,200장이 필요했다. 2차 시공을 위해 타일을 모은 지역은 제주 부산 울산 김해 대구 구미 원주 횡성 제천 진도 해남 순천 광주 강진 등이었다. 그렇게 시민들이 만든 타일은 2차 시공 작업으로 이어졌다.
    한 계절을 온전히 타일 만들기로 보내고 맞은 2015년 4월 9일, 드디어 팽목항 방파제에 기억의 벽이 완성됐다. 기억의 벽의 최종 길이는 195미터이며, 벽을 채운 타일은 4,656장이었다.
    4·16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팽목항을 찾은 시민들은 완성된 기억의 벽 앞에서 저마다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타일을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묵념했다. 아이들에게 기억의 벽 취지문을 읽어주는 부모도 있었다. 그렇게 기억의 벽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기억의 벽을 만드는 어린이문학인들’은 기억의 벽이 완성되고 난 뒤에 후속 작업을 논의했다. 만들기만 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이 빚어낸 추모의 마음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기억의 벽을 만드는 어린이문학인들’은 이제 ‘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문학인들’이 되어야 했다. 우리는 달마다 담당자를 정해 떨어지거나 파손된 타일이 있는지 살피고, 더러워진 타일을 닦고, 부착제를 보충하는 일을 했다. 지금도 기억의 벽은 잊지 않겠다는 마음, 기억하겠다는 마음을 새기는 추모 공간으로 팽목항에 남아 있다.
  

# 책 놀이터와 책짝꿍

  

책 놀이터에 참여한 아이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분들이 바다를 벗어나 처음으로 오른 뭍이 팽목항이었다. 참사 당시 팽목항은 희생자의 시신이 안치되고, 가족을 기다리는 유가족이 슬픔으로 밤낮을 지새워야 했던 곳이다. 팽목항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시민들의 추모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팽목항이 삶의 터전인 사람들은 얼마간 죽음을 가까이에서 목도해야 했고, 슬픔과 참담함을 깊이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다가 등장인물이 눈물을 흘리면 따라서 울기 마련이다. 그것이 허구임을 알면서도 슬픔의 감정이 투사되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그 감정의 투사가 허구가 아닌 팩트라면 어떻겠는가? 날마다 희생자가 뭍에 오르고, 울음소리가 들리고, 참담한 소식을 먼저 전해 들어야 하는 일상이라면, 어떤 마음으로 생활하게 될까? 모르긴 해도 편하게 소리 내어 웃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을 거다.
    기억의 벽을 만들기 위해 진도 팽목항을 오르내리며 작가들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고, 겪어내야 할 상황에 마음이 쓰였다. 특히 세월호 참사를 가까이에서 보고 들었을 아이들이 걱정됐다. 지역의 트라우마를 보살피고 치유하는 일에 작가들은 힘을 보태고 싶었다. 그러던 중 2015년 8월 2일에 팽목항 인근 마을에 마을도서관이 개관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작가들과 어린이책 관련 단체들은 마을도서관에 책을 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기억의 벽을 관리하기 위해 팽목항에 내려가는 일정에 맞춰 마을도서관에서 책 놀이터를 운영하기로 했다.
    책 놀이터는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이 자신이 출간한 책을 중심으로 아이들과 만나는 행사였다. 아이들이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재밌게 노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역시 작가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졌다. 작가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시간을 내고, 품을 들여 아이들과 만나는 시간을 준비했다.
    진도의 아이들은 작가와 함께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만들기를 하고, 공연을 보고, 놀이를 했다. 달마다 아이들을 만나는 것은 작가에게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아이들과 어떻게 놀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하면 더 좋아할지 궁리하고 준비하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행복해지고 웃을 수 있게 된 거다.
    책 놀이터를 확장한 지역 연계 활동으로 책짝꿍 사업도 있다.
    도시의 경우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지만 도서 지역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학교 도서관 외에는 책을 접할 수 있는 통로와 기회가 적었다. 그런 연유로 도서 지역 아이들은 자기 책을 갖고 있는 경우가 적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는 진도에 있는 초등학교와 연계해서 아이들에게 분기별로 한 권의 책을 보내기로 했다.
    취지에 동참하는 작가를 모아 책을 받을 아이와 짝꿍을 맺었다. 이 사업이 바로 책짝꿍 사업이다. 책짝꿍에 참여하는 작가는 1년 단위로 모았다. 그러니까 한 명의 작가는 1년에 네 명의 아이에게 자신의 책을 보내고, 한 아이는 네 명의 작가로부터 각기 다른 책을 받아 네 권의 책을 갖게 되는 거였다.
    책짝꿍 사업은 2015년 7월에 처음 시작됐다. 그리고 도서 지역 아이들에게 책을 보내는 책짝꿍 사업은 현재 ‘어린이청소년책작가연대’에서 위원회 활동으로 이어오고 있다.
  

# 4·16 세월호 참사를 다룬 어린이청소년책

    2024년 4월은 세월호 참사 10주기가 된다. 그동안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은 다양한 형태로 추모 활동에 동참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으며 여전히 추모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많은 활동이 있었지만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추모 형태는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일일 것이다.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이 쓰고 그린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표적 출판물은 『세월호 이야기』다. 『세월호 이야기』는 한 뼘 그림책의 결과물이었다. 단 2주 만에 완성된 글과 그림을 모아 책으로 만든 작품집이다.
    『슬이는 돌아올 거래』(김하은 유하정 윤해연 이영애 이퐁 임정자 전경남 정재은, 문학동네, 2020) 역시 어린이책 작가들이 세월호를 기억하며 엮은 단편 모음집이다.
    그 밖에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4·16 단원고 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4·16 단원고 약전 작가단·경기도교육청, 굿플러스북, 12권, 2016)도 있다.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 중 251명이 단원고 학생과 교사였다. 그들의 삶을 원고지 40매에서 80매 분량으로 기록한 문학작품이 단원고 약전이었다. 약전 집필에 참여한 작가들은 유가족을 만나 희생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2014년 4월 16일 이전의 삶을 문학적으로 풀어냈다. 그 과정이 녹록지 않았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약전 집필에 참여한 작가들은 원고를 쓰는 동안 많이 아팠다.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삶에 작가들의 마음 앓이가 심했던 탓이다.
  

    10년이 흘렀지만 추모의 시간이 허투루 흘러가기만 한 건 아닌 걸 안다. 그러니 세월호 참사를 담은 작품은 앞으로 10년, 그 후로 10년, 어쩌면 더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까지 쓰이게 될 거다. 그렇게 글에 담은 힘으로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의 활동을 개괄적으로 언급했다. 미처 알지 못해 언급하지 못한 활동도 있을 거다. 알지 못하는 걸음을 포함한 모든 기억과 추모 활동에 경의를 전하고 싶다. 세월호 참사 이후 추모와 기억 활동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질문했다.
    “어린이책 작가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한마음인 듯 모여서 움직이고 일을 해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 거다. 그런 질문을 받으면 당혹스러웠다. 너무나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다는 전제로 한 질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당연하다고 생각된 것이 다른 이들에겐 어렵고 힘들고 하기 싫은 일이었다는 건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됐다. 사람들은 쉽게 지치고, 회피하고 싶어 했다. 그럼에도 어린이청소년책 작가들이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일에 그토록 진심일 수 있었던 건, 희생자 대다수가 단원고 학생과 교사라는 점도 있다. 어린이청소년책을 쓰는 작가는 기본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숙명을 지닌 사람들이다.
    어린이를 방임, 방치하는 것은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방임과 방치로 어린이를 위태롭게 하는 건 폭력이라는 얘기다. 부모와 어른이 아이를 보호해야 하는 것처럼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고 보호할 책무가 있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구하는 일을 다 하지 않는다면, 그걸 어쩌다 그렇게 되어버린 사고라고 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피해자가 가해자를 넓은 아량으로 헤아려야 하는 걸까? 그러니 사고라고 해서도 안 되고, 아량을 베풀어서도 안 된다. 국민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는데 구하지 않은 것은 방임에 해당하는 폭력이다. 따라서 4·16 세월호 참사는 국가의 방임으로 국민의 생명이 희생된 국가적 폭력 사건이 분명하다.
    우리 사회가 4·16 세월호 참사를 제대로 조사하고 명명백백히 밝히고, 처벌해야 할 사람을 제대로 처벌하는 일을 해냈다면, 그래서 안전 규칙을 제대로 정비했더라면,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날 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목숨들이 좁고 차디찬 골목에서 죽음을 맞는 일은 없었을 거다. 만약 의무와 책임을 저버린 사람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을 다했더라면, 그랬다면, 아무도 죽지 않았을 거고, 2014년 그때처럼 거리로 나서야만 하는 유가족도 없었을 거다.
    이런 국가적 재난 사건을 어쩌다 생긴 사고로 여기고 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같은 일을 또 겪게 될 거다.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최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거다. 우리에게 그런 비극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비극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는 조금씩 안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오시은

어린이청소년책 작가, 월간 『어린이와문학』 편집주간, 단원고 약전 『짧은, 그리고 영원한』 발간위원 역임. ‘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문학인들’ 회원. 『천삼이의 환생 작전』 『안녕, 나의 우주』 『고리의 비밀』 『내가 너에게』 『우리 집 화장실에 고양이가 살아요』 『귀신 새 우는 밤』 『훈이 석이』 등 출간.

  
  

〈주석〉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