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삶 속에 노란 리본을 달고: 세월호 참사와 함께한 10년

  

    나를 한 단어로 소개하면 4·16세대다.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로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눈에 띄는 것도 싫고, 매사 부정적이고, 대책 없이 놀고먹길 좋아해 인생이야 어떻게 되든지 모르겠고 준비해둔 것도 없으니 30대가 되면 확 죽어버릴 것이라는 치기 어린 말이나 내뱉던 나는 돌이켜보면 얼떨결에 세월호 참사 유족들을 만나 진상규명 활동에 연대하게 됐다.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을지 연대는 또 뭔지 도통 잘 모르겠어서 얼레벌레 눈앞에 있는 일들을 서툴게 해나갔다. 대학생들과 세월호 참사 관련 행사를 진행하고 집회를 열고, 농성과 도보행진을 하고,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사회적참사특조위’)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하는 조사관이 되어 세월호 선원들부터 책임이 있던 공무원들까지 직접 만나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썼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어느새 죽기로 했던 나이를 넘겼고, 좋고 옳다 생각하는 말을 떠들다 대가리 꽃밭 소리를 듣는 30대가 되었다. 날짜 이상의 의미를 지닌 날들과 곱씹게 되는 이름들이 늘며 머릿속 꽃밭은 커져만 왔는데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좋을지는 사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2024년 4월 16일을 앞두고, 잊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무엇을 떠올리고 있을까.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지극히 개인적인 나의 경험을 다시 정리한다. 나의 경험이 당신과 우리의 경험을 되살리며, 앞으로 무엇을 할지 함께 고민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2014년 4월 16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박정희의 고장에서 상경했던 나는 대학교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각층마다 기숙사 사생들이 공용으로 사용하는 소위 ‘거실’이라 불리는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엔 소파와 낡은 TV 한 대만 덩그러니 있었다. 기숙사를 나갈 때, 거실에 있는 TV를 통해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이 내가 세월호 침몰에 관해 처음 들은 소식이었다.
    잠깐 놀랐지만, 시험 기간이었고, 두꺼운 책이 잔뜩 든 가방은 무거웠고, 당장의 침몰 소식보다 수업 출석이 더 급했다. ‘배가 침몰했다니, 당연히 구조되지 않겠어?’ 하는 생각과 함께 기숙사를 나섰다.
    전원 구조 보도를 점심때쯤 확인했다. 휴대전화로 확인한 포털 메인 페이지에는 ‘세월호 승객 전원 구조’라는 제목의 뉴스 기사가 걸려 있었다. ‘거봐 역시 다 구조됐네.’ 같은 생각을 했었다.
    전원 구조가 오보라는 것은 그날 밤 기숙사 거실에서 알았다. 늦은 밤이었고, 불도 켜지 않은 기숙사 거실 소파에 사생 한 명이 TV 뉴스를 보며 울고 있었다. 전원 구조는 오보고, 아직도 구조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는 내용의 뉴스였다. ‘저 사람은 왜 울까? 가족이 타고 있었나? 괜찮냐고 물어봐야 하나?’ 하는 생각 따위를 하다 내 일도 아닌데 괜한 오지랖 부리지 말자 생각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기숙사 침대에 누워 울고 있던 사생을 떠올렸지만 타인의 고통을 오래 생각하기엔 내 삶도 벅차 눈을 감았다.
  

2014년 여름 세월호 참사를 외면했다

    거듭해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의혹이 쏟아졌고 농성과 단식이 이어졌다. 정부는 급하게 해경을 해체했고, 청문회 한번 없이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종료됐다. 유가족들이 단식에 들어가며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하자,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악의적인 보도와 모욕이 쏟아져 나왔다.
    가장 치열했던 여름, 나는 세월호 참사를 외면하기 위해 애썼다. 세월호 참사 관련 뉴스를 보지 않았고, SNS에 올라온 글도 빠르게 스크롤을 내려 못 본 척했다.
    자세히 알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갑자기 나빠진 집안 형편에 아르바이트 수는 늘었고 여유는 없었다. 누구의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옳은 방향으로 처리될 것이라고, 나는 관련 내용을 잘 모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2014년 가을 처음으로 광화문 세월호 농성장을 가다

    처음으로 광화문 농성장에 가게 된 것은 2014년 가을이었다. 어쩌다 ‘운동’을 하게 됐어요?에서 흔하게 나오는 답변처럼, 내가 세월호 참사 활동을 하게 된 것은 선배 A 때문이었다.
    얼굴만 알던 A는 뜬금없이 나를 불러 밥과 음료수를 사 먹이며 세월호 참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나는 밥값 한번 몹시 불편하다 생각하며 횡설수설하다 사실 잘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A는 매주 토요일 저녁에 광화문 세월호 참사 농성장에서 ‘진상규명 문화제’가 열리니 직접 한번 가자고 했고 그렇게 얼떨결에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처음 만났다.
    유가족들을 처음 보고 놀랐던 건 너무 평범해서였다. 엄청나게 선하거나 악하지도 않은 얼굴과 말투로 유가족들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고, 우리가 겪은 슬픔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길 바랄 뿐이라는 말을 했다. 누구나 피해자가 돼 일상이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선명해졌다. 나의 몰랐단 말이 면죄부가 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도 응당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돌아오는 길에 A는 나에게 어땠냐고 물어봤고,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매주 토요일엔 광화문광장에 나갔다.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곳을 혼자서도 가고, A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기도 했다. 왜 사람들이 매주 광화문광장에 나가는지,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는지, 내가 외면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기 위해 나갔던 것 같다.
    겨울이 되고, 그날따라 문화제가 끝난 후 포스터를 나눠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변에 붙여줬으면 좋겠다는 사회자의 말에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포스터를 잔뜩 받아 학교로 돌아왔다. A를 불러 포스터를 학내에 잔뜩 붙여놓고 나니 이상한 해방감이 들었다. 내가 변화를 위해 함께 행동할 수 있다는 감각을 그때 처음 느꼈고, 학내에서 A를 비롯한 사람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 관련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2015년 겨울 광화문 농성장 자원 활동을 시작하다

    2015년 4·16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이하 ‘세월호특조위’)가 겨우 만들어졌지만, 정부는 시행령1을 통해 직제와 예산을 축소하는 등 세월호특조위의 조사를 방해하였다. 처음으로 맞는 세월호 참사 1주기 집회에서 경찰은 유가족과 시민들에게 캡사이신이 섞인 최루액을 살포했고 피해자들과 시민들을 연행했다.2 세월호의 인양이 결정됐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동거차도에서 인양 작업을 감시하기 시작했다.3
    같이 활동하던 선배 A가 총학생회장이 되면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학내 모임은 A 다음으로 나이가 많던 내가 담당하게 됐다. 주말이면 세월호 참사 관련 집회나 박근혜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에 학우들과 함께 나갔고, 주중에는 학내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하거나 세월호 관련 책이나 영상을 사람들과 함께 보고 얘기를 나눴다. 어색하던 팔뚝질과 민중가요가 익숙해질 때쯤 겨울이 됐다.
    연일 이어지는 세월호 관련 뉴스가 답답해서 나는 겨울방학을 맞아 광화문 농성장에서 자원 활동을 시작했다. 농성장에서 하는 일 중 가장 좋았던 일은, 아침을 맞는 일이었다.
    밤사이 훼손되지 않게 닫아둔 분향소의 문을 열고, 사진 속 피해자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향로 속 모래에 숨은 타고 남은 향초 꽁다리를 손으로 휘휘 저어 걸러내고, 촛불 옆에 눌어붙은 촛농을 보기 좋게 떼어내고, 그을음과 먼지를 닦고, 국화꽃이 든 통의 물을 갈아주는 일련의 일들이 좋았다. 어제 추모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직접 손으로 어루만지고, 오늘 만날 사람들이 말간 분향소를 볼 수 있게 준비하는 일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광화문 농성장에 있으면서 크고 작은 쓰레기를 치우고 남는 시간엔 피켓팅을 하거나, 서명을 받고, 노란 리본을 만들었다. 자원 활동을 하며 유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었다,
    처음에는 유가족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었다. 섣부른 위로나 농담 같은 것들이 피해자들의 마음을 다시 다치게 할까 두려웠다. ‘안녕하세요.’ 같은 말도 너무 실례인 것 같았고, 고민 끝에 찾아낸 인사말이 식사는 하셨냐는 말이었다. 유가족들을 만나면 날씨나 식사 얘기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잠깐 농성장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때엔, 유가족들로부터 아이들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세월호 참사가 없었다면 단원고 희생 학생들은 16학번으로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을 시기였다. 아이들이 가고 싶어 했던 대학과 학과, 갖고 있던 꿈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부모님들을 안아주는 일이 잦았다.
    유가족들은 ‘자식 같은 나이라 그런가, 대학생들하고 함께하는 행사가 유독 힘이 되고 좋았다.’고 했다. 내가 자식을 대신할 순 없어도, 피해자들에게 작은 위로나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대학생들이 함께 활동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서로 간에 자연스럽게 나왔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추진력 좋은 활동가가 나와 마찬가지로 농성장에서 자원 활동을 하던 대학생들과 청년들을 한자리에 모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만들었다. 그게 세월호 참사 대학생 연대체가 만들어진 계기였다.
    친분도 없고 얼굴만 알던 사람들이 모여 통성명을 하고, 우리가 무엇을 함께할 수 있을지 무턱대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세월호특조위의 진상규명을 방해하는 해양수산부(이하 ‘해수부’) 문건이 드러났고, 세월호 선체 인양 작업이 시작된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진상규명과 온전한 인양을 요구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에 서로 공감했다.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세월호 참사 2주기를 함께 준비하고, 2주기가 끝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모여 세월호 참사 활동을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면서 5월에 광주를 가듯이 전국의 대학생들이 다 같이 모여 안산도 가고, 팽목항도 가면서 마음을 다지면 좋겠다는 꿈같은 얘기도 나눴다.
    모든 일은 말을 꺼낸 사람이 책임을 지게 되는 법이고,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은 꼭 책임지기로 약속하고, 세월호 참사 대학생 연대체를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다.
  

2016년 봄 세월호 참사 대학생 연대체를 만들다

    그 후 나는 대학생 연대체를 준비하는 단장 역할을 맡게 됐다. 가장 어리니 오래 활동하지 않겠냐는 엉뚱한 이유였다. 다른 사람들이 행사 진행을 위한 장소 섭외나 물품 등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무턱대고 전국의 대학교 총학생회와 단체들에 연락하기 시작했다.
    기꺼이 함께하겠노라 의사를 밝히며 힘이 되어준 곳들도 있었고, 너무 정치적인 사항이고 중립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고 답변한 곳들도 있었고, 일단 논의를 해봐야 할 것 같은데 자세한 내용을 좀 더 설명해주면 좋겠다는 곳들도 있었다.
    설득이 필요해 보이거나 연락조차 닿지 않는 곳들은 직접 찾아가 세월호 참사 대학생 연대체에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 서울 부산 강원 등 전국 곳곳의 대학들을 돌아다니면서 무작정 사람들을 만나 왜 지금 대학가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이야기해야 하는지를 설득했다.
    그렇게 80여 개의 대학·단체들이 모여 세월호 참사 2주기 행사와 세월호 참사 대학생 연대체 운영과 관련해 논의했다. 80여 개의 단체는 서로 성향이 달랐다. 서로 공통된 목적은 있지만 의견이 달랐다. 쏟아지는 다른 의견 속에서 중첩되는 공통의 의견을 찾고, 차이 속에서 새로운 방향을 찾아내는 일들이 소란스럽게 이뤄지며 2주기 대회가 기획되고 운영됐다.
    대학생들과 단원고 희생 학생의 형제자매들, 생존 학생들, 부모님들이 함께하는 행사를 안산과 광주에서 진행하며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되는 날까지 함께하겠다는 다짐을 하기도 했었다.
    생전 처음으로 전국의 대학생들과 함께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사회를 봤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거나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내향적인 사람인데도, 그때는 신기하게도 힘들거나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는 박근혜 정부가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한다는 사실이 화가 나는 만큼 함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간절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같은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마주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꿈꿔왔던 일들을 우리가 모여 해낸다는 고양감이 좋았던 것 같다.
    내 편인 든든한 사람들 앞에서 나는 마음껏 용감해져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미수습자를 가족 품에, 끝까지 책임자 처벌, 끝까지 잊지 않고 함께하겠습니다.’와 같은 구호를 겁도 없이 외쳤다.
  

2016년 6월 해수부의 세월호특조위 종료 발표와 정부청사 앞 농성 시작

    2016년 6월 21일 해수부는 세월호특조위의 조사 활동 기간이 6월 말 종료된다고 하며, 세월호특조위 정원 축소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예산 또한 지급하지 않았다. 원칙대로라면 세월호특조위의 조사 기한은 2017년 2월에 종료될 예정이었다.4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새누리당으로부터 세월호특조위가 청와대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지 않을 경우 조사 기간을 연장해주겠다는 제안을 받았고 이를 거절하였다고 폭로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세월호특조위 강제 종료를 저지하기 위해 서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더운 날씨에 그늘막이나 은박 롤 같은 것들을 가지고 가면, 경찰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금지 물품이라고 뺏어가기 일쑤였다. 나는 농성장에 있는 물건들을 시시때때로 정리하며, 혹시 또 경찰들이 농성장에 있는 물건들을 뺏어가지는 않을까 예민하게 주시했다. 세월호 참사 팔찌와 노란 리본을 정리할 때, 직급이 상대적으로 높아 보이는 나이 든 경찰 한 명이 내게 다가와서 ‘그게 뭐냐?’고 물어봤다.
    전날 그늘막을 빼앗겨 심기가 몹시 불편했던 나는 이놈들이 이제는 팔찌를 갖고도 시비를 건다 생각해 ‘그걸 왜 궁금해하시냐.’고 쏘아붙였다. 경찰은 ‘가방에 다는 거면 자기도 한 개만 달라.’고 했다. 내가 퉁명스레 ‘하시려고요? 하실 거 아니면 안 드려요.’라고 대꾸하자, 경찰은 선선히 ‘업무 중에는 못하는데 평소에는 하죠. 저 가방에 노란 리본도 걸고 있어요.’라고 대답했다.
    거짓말도 능숙하게 잘하네 하는 마음이 들어 무시할까 했지만, 저 사람의 말이 진심이었으면 좋겠단 맘이 더 커서 팔찌를 건네줬다. 그러자 경찰 옆에 같이 서 있던 어린 의경들이 ‘저도 하나 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내게 물었다. 조심스럽고 밝은 목소리였다. 팔찌를 건네주자, 의경들은 와 하는 탄성을 작게 터트리며 ‘고맙다.’고 말하고는 웃으며 팔찌를 주머니에 챙겼다.
    경찰이 처음으로 ‘사람’같이 느껴졌던 때가 그때였던 것 같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서로 다른 위치에서 마주하고 있지만,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던 것 같다.
  

2016년 7월 온전한 인양을 기원하며 도보행진을 하다

    정부는 2016년 5월에 선수를 들고, 7월 말에 세월호를 인양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2016년 5월에 예정되어 있던 세월호 선수 들기는 장비 이상과 기상 조건 등의 이유로 계속해서 실패하고 연기되었다.5
    선체 인양이 지연되는 동안 세월호 선체는 곳곳이 절단되고 훼손됐다. 세월호가 온전히 인양될 수는 있는지도 불투명했고, 세월호가 인양되더라도 정부가 조기 종료시키려 하는 세월호특조위가 선체를 조사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세월호의 인양이 시작됐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지만 인양 과정이 실패 속에서 지연되고 있고, 피해자들과 소통 없이 선체 일부가 절단되고 있다는 사실은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일이라 이를 알리기 위해 3박 4일 동안 도보행진을 진행했다. 100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세월호가 인양 후 거치될 목포신항에서 출발해 팽목항까지 미수습자 수습, 온전한 선체 인양과 진상규명을 염원하며 함께 걷기로 했다.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쏟아지는 7월 말이었다. 폭염이니 야외 활동을 주의하라는 안내 문자를 수신하며, 힘들다는 말 대신 날씨는 너무 덥지만 이렇게 함께 걸으니 좋다는 말을 했고, 조금 더 걸으면 되니 우리 같이 힘내자는 말을 더 자주 했다. 나란히 발맞춰 걷고 서로가 괜찮은지 눈을 맞추며 확인했었다.
    빠르게 완주하는 것보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가 느리더라도 함께 마지막까지 가는 것이 더 중요해서 몸 상태를 자주 묻고 숨기지 않고 얘기했다, 아픈 사람은 후미에 있는 차량에 잠깐 탑승해 휴식을 취했다. 그만큼의 빈자리는 함께 걷던 사람들이 채우거나, 휴식을 잠시 취한 후 복귀한 사람들이 채웠다.
    3박 4일의 일정이 끝나고 모두 수고했다고 함성을 지르고 손뼉을 칠 때, 우리가 앞으로 가야 할 길도 이런 길이리란 생각을 했었다. 정말 못할 것 같던 일들이, 서로가 있어서 가능한 길일 것이라고. 누군가 빠지면 그만큼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워주고, 잠깐 빠졌던 사람이 돌아오면 다시 반겨주고 하다 보면 언젠가 아득하게 느껴지던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이란 길도 끝에 도달하고, 함께했더니 결국 해냈네 하고 서로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2016년 11월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집회 시작

    2016년 9월 세월호특조위가 정부에 의해 강제 종료됐다. 2016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보도되며,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일곱 시간의 행적에 대한 의혹이 재조명되고 박근혜퇴진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6
    매주마다 대학생들과 유가족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다. 많은 촛불 중 유독 기억에 남는 대회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304명을 상징하는 구명조끼를 입고 시민들과 유가족들, 대학생들이 함께 행진하던 때였다.
    행진이 시작되기 전까지 304명 몫의 구명조끼는 모두 광화문광장에 국화와 함께 놓여 있었다. 혹시라도 304개의 구명조끼가 입어줄 사람이 없어 하나라도 바닥에 남을까봐, 또다시 구조되지 못했다는 생각에 유가족들의 마음이 무너질까봐 마음 졸이며 행사를 진행했었다.
    다행히 기꺼이 함께해준 많은 시민들 덕에 모든 구명조끼가 행진에 함께할 수 있었다.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많은 인파 속에서 누구 하나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서로 함께 손을 잡고 나란히 걸었다.
  

2017년 3월 박근혜 탄핵과 2017년 4월 세월호 참사 3주기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박근혜를 탄핵했다. 무수히 많은 죽음과 비명, 울음과 분노가 모여 이뤄낸 결과였다.7 헌법재판소 앞에 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기뻐 소리치고 뛰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세월호 참사 당일 대통령의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위반과 관련해 보충의견을 통해 언급했을 뿐, 세월호 참사를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사유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쉬움은 있지만 긴 겨울이 끝났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는 전환점이 생겼다고 생각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구호가 현실이 되니, 함께한다면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해졌다.
    2017년 3월 21일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 특별법이 공포되었다. 2017년 3월 22일 세월호의 인양이 시작됐고 2017년 3월 31일 인양된 세월호가 목포신항만에 도착했다.8 박근혜가 내려가자, 세월호가 올라왔다.
    세월호 참사 3주기를 앞두고 밝혀지지 않은 침몰의 원인과 참사 당일 청와대의 행적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여전히 단장직을 하고 있었고 다시 대학가를 돌아다니며, 제안서를 돌리고 강연을 했다.
    2016년에 한번 해봤던 일들은 1년이 지나고 나니 좀 더 익숙해졌다. 우리가 변화를 일으켰다는 감각에 들떠 있던 때라 2주기 때보다 더 많은 대학생들과 청년 단체들이 모여 세월호 참사 3주기 대회를 기획하고 진행했다. 진상규명과 안전사회 건설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루빨리 미수습자를 수습해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달라고, 끝까지 잊지 않고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다시 되새기는 자리였다.
  

2017년 11월 사회적참사진상규명특별법 제정

    세월호 참사 3주기 이후, 강제 종료된 세월호특조위를 대신해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2기 특조위 설립을 요구하는 활동이 대학가에서 지속되었다. 학교와 지역에서 서명운동을 하고, 특별법 입법을 촉구하는 현수막을 대학가에 붙이고, 주말에 청년 촛불 문화제를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기도 했다.
    2017년 11월 24일 사회적참사진상규명특별법이 마침내 통과되었다.9 새로운 정권에서 만들어진 사회적참사특조위는 이전과 달리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할 수 있길 바라며, 사람들과 함께 사회적참사특조위 설립 활동을 모니터링했다.
  

2018년~2022년 사회적참사특조위 조사관 근무

    2018년 사회적참사특조위의 조사관을 처음 모집할 때 채용이 돼 위원회의 조사 기간이 끝날 때까지 도망가지 않고 일했다. 내가 조사관이 된 것을 실감했던 때는, 처음 출근한 날이나 임명장을 받았던 때가 아니라 신규 채용된 조사관들이 유가족들과 처음으로 대면하고 인사를 나누는 날이었다.
    그날은 내가 세월호 참사 활동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피해자들의 옆이 아니라 앞에 서는 날이었다. 항상 실수를 해도 ‘우리’라는 말 속에서 보호받았는데, 피해자들의 밖에서 피해자들을 바라보는 내가 낯설었다. 그때 나는 내가 더 이상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입장이 아니고, 피해자들 앞에서 책임 있게 결과를 전달해야 하는 조사관임을 실감했다.
    피해자들의 눈 속에 담긴 염원이 처음으로 무섭게 느껴졌던 것 같다. 열심히 하기보다 잘 해내야 하는 자리인데, 내가 정말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들어 불안했다.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세월호 유가족들이, 마주치면 반가운 마음보다 성과를 내지도 못했는데 내가 미안해서 어떻게 얼굴을 보겠냐는 죄책감에 피해 다니는 사람들이 됐다.
    이후로는 부담감 속에서 야근을 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이러다 체력이 떨어져 죽겠다 싶어서 운동을 시작했고, 운동을 해야 하거나 특별한 약속이 없는 어지간한 날들은 야근의 연속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고생을 하며 만든 곳인지 알아서, 정말이지 잘 해내고 싶었다. 처음 하는 사람의 서투름을 무식하게 시간으로 메웠다.
    몇십만 건이 되는 자료를 살펴보고 조사할 가치가 있는 주요한 내용을 선별하고, 수십 개의 진술조서를 읽으며 상충되는 진술을 찾아 정리하고, 관계인들을 불러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정부 부처가 수시로 세월호특조위의 조사 현황을 청와대 및 관련 부처와 공유하였음이 일부 확인된 후, 사회적참사특조위가 만들어져서일까. 사회적참사특조위는 하나의 큰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시기별, 대상별로 나눠 조사 과제를 수립했다.
    각각의 조사 과제는 경계가 철저했고, 보안을 이유로 경계를 오가는 자유로운 소통은 지양됐다. 조사 과제별로 밝혀내야 할 의혹과 대상이 명확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전체 과제 속에서 내가 하고 있는 조사가 어떤 유기적 의미를 지니는지, 상충되는 조사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은 알기 어려웠다. 각 조사 과제별 벽은 공고해졌고, 각 과제들의 조사가 절반쯤 진척됐을 땐 더 이상 소통하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각자가 맡은 과제를 처리하기 급급해졌다.
    모두가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퇴근 후 꿈에서도 종종 조사를 했다. 조사를 망치거나, 무언가를 찾는 꿈을 자주 꿨다. 꿈속에서 나는 새파랗게 어린 여자애라며 조사 대상자에게 한참 무시당하거나,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찾느라 헤맸다. 무시당하는 꿈은 기분은 나쁘지만, 딱 거기서 끝이 나는 꿈이라 좀 더 편했다. 무언가를 찾는 꿈이 제일 힘들었다.
    한참 동안 헤매도 찾지 못해 망연자실한 내 앞에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가족들은 나에게 화를 내지도 않고 조용히 ‘찾았냐.’고 물었다. 간절하지만 많이 지친,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내가 아는 그 표정으로. 그 얼굴을 마주치면 꿈에서 덜컥 깼다.
    1,000쪽 분량의 개별사건 보고서를 밤을 새워가며 울면서 썼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해야 할 국가가 도리어 피해자들을 사찰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이 확인됐다고 조사 결론을 도출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세월호 참사가 국가폭력이었으며 국가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해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하게 해야 하며, 피해자의 진실을 알 권리와 진상규명 과정과 후속 조치 수립에 피해자가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국가가 적극적으로 마련하라는 권고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일부 드러난 사실이 있었지만 모든 의혹을 규명하진 못했다. 비공개된 자료와 문건들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회적참사특조위가 입수한 문건을 토대로 기존에 제기된 의혹이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고 사실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완전한 진상규명에는 책임자 처벌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한 것도 원인이었다. 개인의 책임을 추궁할수록 반성하는 사람은 성실히 대답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조사를 받고 본인이 책임질 몫이 늘어났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발뺌하는 사람은 계속 모르쇠로 일관해 조사가 짧게 끝나고 책임질 몫도 적었다. 인정하고 반성하는 실무자는 처벌 대상이 되고, 회피하는 책임자들은 처벌하기 어려운 구조였고, 온전히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사회적참사특조위의 조사가 끝났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속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이후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폭력이 있었다는 윤곽만 어렴풋이 드러났을 뿐이다. 세월호 참사가 국가폭력이었다고 인정하는 사과도 없었고,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알 권리와 참여할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이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여태까지 그랬듯이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과 함께 얘기하고, 고민하다 보면 또 다른 방향이 펼쳐질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2024년 4월 16일을 앞두고 각자의 삶 속에서 다시 노란 리본을 걸고, ‘세월호’에 대한 기억을 나눌 수 있길.
  
  

은하

4·16세대. 4·16연대에서 활동했고,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관으로 근무함.

  
  

〈주석〉

  1. 유성애, 「세월호 유가족·특조위 “해수부 시행령 수정안은 ‘꼼수’”」, 《오마이뉴스》, 2015. 4. 29. (https://omn.kr/d601)
  2. 권영전, 「세월호 집회 참가자들, 광화문 일대서 경찰과 충돌(종합)」, 《연합뉴스》, 2015. 4. 16. (https://www.yna.co.kr/view/AKR20150416202751004?input=1195m)
  3. 김성수, 「동거차도의 아버지들… “자식도 못 지킨 죄인이 무슨 명절인가요”」, 《뉴스타파》, 2015. 9. 25. (https://www.newstapa.org/article/wHeTB)
  4. 손봉석, 「세월호특조위 “조사활동 계속할 것”···박근혜 정부 “30일로 종료”」, 《스포츠경향》, 2016. 6. 23. (https://sports.khan.co.kr/bizlife/sk_index.html?cat=view&art_id=201606230954003&sec_id=562901&pt=nv)
  5. 임정환, 「세월호 선수 들기 또 연기… 현지 기상악화로 내달 11일로 미뤄」, 《뉴데일리경제》, 2016. 6. 27. (https://biz.newdaily.co.kr/site/data/html/2016/06/27/2016062710073.html)
  6. 김동환, 「다시 떠오른 ‘세월호 7시간’, 국가 회복의 첫 단추」, 《오마이뉴스》, 2016. 10. 31. (https://omn.kr/lgle)
  7. 이세원, 「[대통령 탄핵] 헌재 박대통령 파면 선고 요지 전문」, 《연합뉴스》, 2017. 3. 10. (https://www.yna.co.kr/view/AKR20170310091200004?input=1195m)
  8. 성혜미, 「침몰 3년만에 항구로 가는 세월호…2시30분 목포신항 도착(종합)」, 《연합뉴스》, 2017. 3. 31. (https://www.yna.co.kr/view/AKR20170331021301003?input=1195m)
  9. 강병철, 「사회적참사법 국회통과…세월호참사·가습기살균제 특조위 구성(종합)」, 《연합뉴스》, 2017. 11. 24. (https://www.yna.co.kr/view/AKR20171124048451001?input=1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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