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서로의 어둠을 나누는 깊은 일: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문학의 흐름

    

    ‘그날 이후, 서로의 어둠을 나누는 깊은 일’이라는 제목은 이 글에서 살피는 작품들에서 빌려온 말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이 쓰인 까닭보다는 우선, 시 한 편을 읽는 일에서 시작해보자. 먼저 함께 읽을 작품은 이영주의 「연대」이다. 시집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의 마지막 자리에 놓인 시편이다.

    어둠이 쏟아지는 의자에 앉아 있다. 흙 속에 발을 넣었다. 따뜻한 이삭. 이삭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나는 망가진 마음들을 조립하느라 자라지 못하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밀알. 옆에 앉아 있다. 어둠을 나누고 있다.

─이영주, 「연대」(『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사, 2019) 전문

    “어둠을 나누고 있다.” 이 문장 가운데 ‘어둠’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빛에 대비되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만 머무르지는 않는 듯하다. 어둠이라는 것, 이는 몇 마디 말로 단순하게 가리킬 수 없는 깊은 무언가를 이른다. 완전히 드러내어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기에 시의 목소리는 그러한 무언가를 일컬어 어둠이라 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그렇게 시의 목소리가 “어둠을 나누고 있다.”고 말하며 그와 같은 일을 수행하는 곳은 바로 “어둠이 쏟아지는 의자”이다. 그 의자에 앉아 시의 목소리는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무언가를 나누는 동시에 그러한 것을 나누는 일에 관해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어둠’이라 표현된 헤아릴 수 없는 것, 즉 앎이 될 수 없는 그 무엇은 대체 어떠한 것일까.
    이어지는, “따뜻한 이삭. 이삭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듯, 그 헤아릴 수 없는 무언가는 ‘이삭’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된 한 존재와 그에 관한 일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모두 알 법한 것에서부터 살펴보자. ‘이삭’은 곡식의 낟알이나 과일 등 열매를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제, 누군가는 알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하거나 혹은 잊고 지내는 측면을 살펴보자. ‘이삭’은 또한 2014년 4월 16일 그날, 참사로 인해 집에서 떠날 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수 없게 된 한 사람의 이름이기도 하다. 시의 목소리는 그 이름을 지닌 친구에 관해 생각하는 동시에 그 이름이 지녔던 다른 의미를, 그 의미가 연상케 하는 움직임들을 함께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일컬어 “망가진 마음들을 조립하느라 자라지 못하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밀알”이라 한다. 시의 목소리는 ‘치유’나 ‘회복’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조립’이라는 말을 쓴다. 이러한 낱말을 고른 까닭은, 어쩌면 그 ‘망가진 마음’이 그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낫게 되는 일이 가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감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참사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 하여 돌아올 수 없게 된 이들과 그 시간을 그대로 지워져가는 흐름에 내맡김으로써 그렇게 부재하도록 둘 수도 없을 터이다. 스스로를 일컬어 “자라지 못하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밀알”이라 하였듯, 시의 목소리는 그날과 그날 이후 ‘망가진 마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을 고백한다. 그렇기에 다만 그 곁에서 함께 쏟아지는 어둠을 맞으며 곁에 있고자 한다. “옆에 앉아 있다. 어둠을 나누고 있다.”고 함으로써 그날과 그날 이후의 일 곁에 함께하며, 그에 관한 말을 나누고 또 이어가고자 한다.
    그렇다. 문학은 누군가의 아픔이나 슬픔을 위로하는 일을 제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아울러 위로를 목적으로 삼을 수도 없다. 문학은, 그리고 글쓰기와 그것을 수행하는 이는 아픔이나 슬픔을 겪는 이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고통을 겪는 이들의 곁에서, 혹은 그들보다 낮은 위치에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리고 대신 옮기는 움직임뿐이다. 누군가 문학작품을 통해 위로받는 기분을 느꼈다면, 그와 같은 현상은 문학의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문학의 공간에 독자가 참여하여 이루어진 정서의 나눔이 그와 같은 효과를 의도치 않게 불러일으켰을 뿐이다.
    그럼에도 고통받는 존재 곁에 함께 자리하여 그 목소리를 듣는 일, 그에 관해 침묵하지 않는 일은 문학의 중요한 덕목이자 책무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일은 또한 사람의 일이기도 하다. 이영주 시의 목소리는 스스로가 전하는 노래의 움직임을 가리켜 ‘연대’라는 제목을 붙였다. 연대, 이는 하나가 다른 하나의 곁에 있음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이어지는 움직임을, 동시에 서로의 있음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또한 곁으로 다가가 그 목소리를 듣는 일을, 그 목소리를 다시 자신의 목소리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일을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그날’에 관해 침묵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목소리들과 만나게 되었다.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

    그것은 깊은 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 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쓸모없어진 어떤 미움처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삶을 살아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것은 깊은 일

─안현미, 「깊은 일」(『깊은 일』, 아시아, 2020) 전문

    안현미의 「깊은 일」은 『문학사상』 2015년 2월호에 발표되었다. 시의 첫 행에 쓰인 “그날 이후”라는 표현 가운데 ‘그날’이 어떤 날인지 시에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는 않다. 물론, 곧바로 이어지는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라는 대목에서 ‘그날’이 ‘그 바다’와 연관된 사건이 일어난 때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만일 같은 시집에 수록된 다른 시편들, 가령 「세월호못봇」이라든가 「수학여행 가는 나무」 등을 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날’이 2014년 4월 16일을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시의 목소리는 참사의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는 대신 ‘그날’이라 표현한다.
    ‘그날’이라는 표현은 일견 모호해 보인다. 그러나 시의 목소리는 모호한 표현을 씀으로써 그날을 특정한 앎이나 상징으로 추상하지 않는다. 그 때문일까, ‘그날’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전하는 목소리와 만나는 가운데에서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것이 전하는 정서를 구체적인 실감으로서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고 표현된 그 ‘누군가’의 모습 역시 시에서는 특정한 인물을 떠오르게 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실존하는 사람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언어의 작용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그날’ 당일만이 아니라 그에 앞선, 그 이후에 일어난, 그리고 잇따르게 될 일들에 관해 생각하도록 이끈다. 이와 같은 일들은 비단 시를 읽는 우리들만이 아니라, 그와 같은 말들을 글로 쓰고 발화하는 시의 목소리 역시 동시에 겪으며 수행한다. 때문에 시의 목소리는 그 ‘누군가’의 모습을 생각하며 자신이 자리한 때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이라 규정하고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라는 다짐을 하기에 이른다. 이 대목에서 ‘무책임’이라는 표현은 ‘그날’이라는 낱말과는 또 다른 방향에서 모호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바다’를 견디는 그 누군가의 모습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레 그에 관한 사회적 책무와 관계된 것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시의 목소리는 그러한 것과는 대립된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표현으로 선언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러한 말하기는 동시에 그 낱말이 지닌 일반적인 의미와는 반대로 보이는 뜻으로 우리에게 보인다. 바꿔 말하자면,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라는 선언이, 그 표면적 의미와는 다르게 이 생에 대해 무한한 책임감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반어irony’라는 수사법의 효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무책임’이라는 말은 ‘나’를 지키고자 하는 에고이즘을 무너뜨리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담고 있기에, 겉으로 드러난 뜻과는 반대되는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의 목소리는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라는 선언을 이행하고자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아무래도”라는 말로 시작하는 다짐을 전하는 두 문장 사이에서, 시의 목소리는 ‘어떤 마음’과 ‘어떤 미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전자는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 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었고, 후자는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쓸모 없어진” 것이 되었다고 한다. 둘 모두 ‘오래’, ‘어느 날’이라는 막연한 시간 가운데에서 쓸모없게 되거나 사라져버린 것에 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시의 목소리가 드러내는 ‘어떤 마음’과 ‘어떤 미움’이 어떠한 것인지 헤아릴 수 없다. ‘오래’, ‘어느 날’ 그리고 ‘어떤’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쓴 데에서 엿볼 수 있듯, 그러한 말을 전하는 시의 목소리 역시 그 마음과 미움이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대목은 그 마음과 미움의 정체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방치’되거나 ‘끌려다니다’가 결국 사라지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의 목소리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고 하는 말하기는 또한, 바로 그와 같은 마음과 미움을 방치하고 끌려다니도록 두었던 자신의 태도와 결별을 선언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의 목소리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에 관해 침묵하지 않으리라 다짐함으로써, 그 마음들이 사라지거나 쓸모없는 무언가로 되지 않도록 하려 한다.
    「깊은 일」에서 펼쳐지는 이와 같은 언어의 흐름은 이어서 “아무래도”라는 말로 시작하는 세 번째 문장의 의미 역시 그 표층적인 의미와는 다른 것으로 읽히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라는 문장 가운데 ‘혼자’라는 말을 ‘함께’라는 의미로 바꾸어 읽게 된다. 그런데 이때,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혼자’라는 말이 쉽게 사라지거나 쓸모없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함께’를 지향하는 움직임은 또한 ‘혼자’인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 ‘혼자’라는 것을 지워버리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면 ‘함께’라는 움직임, 그리고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렇게 시의 목소리가 “혼자 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라고 말하는 움직임은 다름이 아니라 시를 쓰는 일, 문학의 행위이다.
    그런데, 「깊은 일」에서 이토록 ‘혼자’라는 말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즉 다른 무엇과 동일시될 수 없는 그 ‘깊은 일’을 듣고 그에 관해 침묵하지 않기 위해선, 자기 자신 역시 다른 무엇으로 바꿀 수 없는 스스로의 고유한 영역에 즉 자율성의 힘에 가닿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혼자’로서 존재할 수 없다면, 누군가의 곁에 있음으로써 그와 연대하는 일 역시 불가능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율성이 부재하는 타율적인 움직임은 가능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타율성과 함께하지 않은 자율적 움직임 역시 있을 수 없다. 때문에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는 일을 가리켜 ‘깊은 일’이라 하였듯, 시의 목소리는 또한 “혼자 죽는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는 다짐을, 그와 같은 일을 수행함으로써 침묵하지 않는 일을 일컬어 마찬가지로 ‘깊은 일’이라 이름 붙인다.
    올해 2024년은 어느덧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때로부터 10년이 되는 해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이지만, 앞서 안현미와 이영주의 시를 통해 먼저 살폈듯 참사 이후 ‘그날’에 관해 어떻게 침묵하지 않을 것인지 탐색하고 행동하는 문학작품들을 우리는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었다. 이 글은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문학의 흐름을 살펴달라는 요청에 의해 쓰이게 되었으나, 한정된 자리에서 10년 동안의 양상이라든가 윤곽을 개괄하는 일은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다소 임의적으로 고른 작품을 살피며 문학이 수행해온, 그리고 이행할 독특한 나눔의 움직임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앞서 다룬 두 시편에서 우리는 작가 혹은 시인들이 참사에 대하여 스스로가 어떻게 움직여왔거나 움직일 것인가를 성찰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밖에도 우리가 이 시편들에서 공통적인 것으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앞서 ‘모호성’이라는 말로 표현한 언어의 독특한 움직임 혹은 활용이다. 이영주의 시에서는 ‘어둠’이, 그리고 안현미의 시에서는 ‘그날’, ‘누군가’, ‘깊은 일’ 등으로 표현한 말들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펼친다.
    언어가 지닌 근본적인 성격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분절성分節性, 즉 스스로의 성분을 나뉘어 있는 것이자 동시에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의 연속성을 일정한 마디로 끊음으로써 그 의미를 한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분절로 나타나는 불연속적인 움직임을 통해 우리는 그 의미를 명료한 것으로서 파악하고 또한 전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움직임은 존재하는 것들의 실질 가운데 많은 부분을 추상하거나 왜곡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분명하다는 것, 그것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어둠으로 밀려난 영역들을 볼 수 없게 한다. 그런데 앞서 살핀 안현미와 이영주 시의 낱말들이 펼치는 모호성은, 언어의 분절성과는 반대되는 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말들은 의미를 한정하기보다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측면들까지 함께 품는다. 나아가 낱말 자체의 의미만이 아니라 그것이 대신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들, 나아가 존재하는 것들의 윤곽을 흐리게 한다. 이것과 저것을, 여기와 저기를 가르는 경계를 희미하게 만듦으로써 서로가 겹쳐지도록 하는 자리를 펼치는 것이다. 모호하다는 것은 또한 어둡다는 것이며, 빛을 배제하지 않는 가운데 어둠을 끌어안고 있음을 이른다.
    문학의 언어가 수행하는 모호성은 스스로의 의미를 한정 짓지 않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이러한 말들이 펼쳐내는 움직임은 또한 그 말을 발화하는 이와 듣는 이가, 그리고 그 말이 전하는 이야기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개체와 개체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을, 즉 심리적 장벽을 뛰어넘는 움직임을 이행한다. 이 움직임은 문학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어둠을 나누는 목소리를 함께 듣고 또 이야기하는 일에 ‘나’와 ‘당신’이 함께 참여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이렇듯 문학은, 그리고 시인의 글쓰기는 스스로가 일종의 매듭이, 혹은 매개가 되는 움직임을 수행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학의 언어는 때때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을 가능한, 아니 현행적인 움직임을 구현하기도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치유공간 이웃’에서 희생자의 생일 모임 때 시인들이 단원고 아이들의 육성으로 시를 쓸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그와 같은 문학의 독특한 특성에서 기인한다.1
    한편, 시의 언어가 스스로를 모호한 것으로 표현하는 일은 또한 언어가 분절을 수행함으로써 잃게 되는 감각적 성질을, 그리고 구체성을 다시 살리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

    흰 항아리가 되어 작은 꽃들과 함께 네 책상 위에 놓이고 싶다
    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알맞게 줄어드는 글씨를 보고 싶다
    토끼의 두 귀처럼 때때로 부드럽게 접힐 줄 아는 네 마음을 보고 싶다
    베여 나간 나무 밑동의 향기에 인사하듯 길게 구부러지는
    너의 훌쩍 자란 등뼈를 만져보고 싶다

    세상의 비밀을 전해 듣고
    분노 속에서 네가 무엇도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
    단 하나의 사물이 되고 싶다
    네 손에 잡혀 벽을 향해 던져지며 부서지는 항아리가
    단단하게 굳어 제대로 모양 잡힌 기억이

    한밤중에 일어나 네가 연인의 잠든 얼굴을 한번 만져보고
    나쁜 꿈의 물풀들을 천천히 쓰다듬는 날들이 지나가고
    너의 늙어가는 얼굴 가득 물결처럼 번지는 주름을 보고 싶다
    공원 벤치에 잠시 지팡이를 세워두고
    새벽별들처럼
    아침이 고요하게 거둬들이는
    네 마지막 숨결을 느끼고 싶다

    “찾아 주세요. 사위 권재근, 손자 혁규.
    아직도 차가운 바닷속에 있나 봐요. 저는 베트남에서 왔어요.”
2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
    지금 내 곁의 빈 나무 관 속을 떠돌며
    반쯤 지워져가는 네 얼굴 위로 내려앉기를 기다리는 마른 먼지만
    아니라면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너를 위한 기억의 데스마스크로
    망각 법원의 길고 어두운 복도마다 걸리고 싶다
    무겁게 쌓인 먼지를 털면
    가장 오래된 슬픔의 죄수들이
    쇠창살 사이에서 기웃거리는 표정처럼

─진은영,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문학과지성사, 2022) 전문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는 『시산맥』 2014년 가을호에 발표된 작품으로, 아마도 이 글에서 다루는 시편 가운데 참사가 일어난 때로부터 가장 가까운 시기에 쓰였을 터이다. 그날에 가까운 시간에 쓰인 만큼 시의 언어는 참사를 겪은 이의 마음에 한없이 가까운 곳으로 가닿고자 하는 모습으로 또한 우리에게 다가오는 듯하다. 앞서 짧게 언급한 ‘생일시’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 역시 참사에서 희생된 이의 목소리를 전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례로 진은영 역시 ‘생일시’ 기획에 참여하여 진은영이 참사 희생자 가운데 단원고 2학년 유예은의 목소리를 옮겨 적는 형식으로 쓴 작품으로 「그날 이후」가 있다.
    「그날 이후」와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 둘 사이에 공통적인 모습이라면 양자 모두 시의 목소리가 참사 희생자의 것이라는 점 외에도 이제는 가능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미래의 시간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는 또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이 땅에 남아 있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전하고 있는 모습인데, 후자는 이 땅에 남겨진 이들이 아니라 참사 때 실종된 아이에게 목소리를 전하고 있다. 2014년 그날, 아빠 권재근, 엄마 한윤지, 아들 권혁규, 딸 권지연 네 가족은 제주도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라는 부푼 꿈을 안고 세월호에 올랐다. 가족 가운데 딸 권지연만 구조될 수 있었다. 이 시의 목소리인 엄마 한윤지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 시를 다시 읽는 지금은 그날로부터 10년의 시간이 흐른 때이다. 아직까지도 아빠 권재근과 아들 권혁규는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에서 시의 목소리는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 무엇이든 되고 싶다”고 말하며, 빼앗긴 미래의 시간을 되찾고자 하는,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린 바람을 표현한다. “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기억”하고 또한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알맞게 줄어드는 글씨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며, 자신이 갖지 못하게 된 시간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우리에게 펼친다. 그리고 “토끼의 두 귀처럼 때때로 부드럽게 접힐 줄 아는 네 마음을 보고 싶다”라고 말함으로써, ‘마음’처럼 눈앞에 직접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 자리까지 살아 있는 이미지로서 현전하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이와 같은 말들은 단순히 눈앞에 있는 것 같은 느낌만을 전하는 데에서 머무르지 않고, “토끼의 두 귀처럼 때때로 부드럽게 접힐 줄 아는”과 “베여 나간 나무 밑동의 향기에 인사하듯”이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 마치 만질 수 있는 것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처럼 시의 목소리는 아이가 자라면서 지니길 바라는, 타자를 향한 온유한 마음가짐과 정중한 태도와 같이 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역까지 구체적이며 감각적일 뿐만 아니라,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무언가로 나타나도록 한다.
    비가시적인 것을 구체적인 감각으로 나타나게 하는 언어의 움직임에서 우리는,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의 목소리가 바라는 바를, 그이가 싸우는 상대가 무엇인지를 보게 된다. 우선 시의 목소리가 싸우는 상대는 바로 시간의 마멸 가운데로 존재하였던 것들을, 그와 함께하는 진실을 방기함으로써 은폐하는 일련의 움직임들이다. 시의 목소리는 구체적으로 존재했던 감각적 실질을 서둘러 관념으로 추상하고자 하는 일들에 저항하며 구체적인 동시에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되고자 한다. 나아가 ‘너’라 불리는 아이의 있음 곁에서 그 모든 것을 담는 “흰 항아리가 되어 작은 꽃들과 함께 네 책상 위에 놓이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아이가 언젠가 “세상의 비밀을 전해 듣고/ 분노 속에서 네가 무엇도 만질 수 없을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 붙잡을 수 있는 구체적인 “단 하나의 사물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것을 시의 목소리는 또한 “단단하게 굳어 제대로 모양 잡힌 기억이”라고 표현한다.
    이렇듯 진은영의 시에서 표현된 “단 하나의 사물” 즉 “단단하게 굳어 제대로 모양 잡힌 기억”은 일견, 앞서 함께 살핀 이영주 시의 ‘어둠’이라든가 안현미 시의 ‘누군가’ 혹은 ‘깊은 일’이라는 말의 모호성과는 반대로, 매우 구체적이고 단단한 직접적인 단 하나의 존재자를 가리키는 말처럼 보인다. 「죽은 엄마가 아이에게」에서 시의 목소리가 구체적인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까닭은, “지금 내 곁의 빈 나무 관 속을 떠돌며/ 반쯤 지워져가는 네 얼굴”의 모습이 만들어가는 빈자리를, 먼지처럼 사라지는 허무에 내맡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잊히고 사라져가는 흐름에 방기함으로써 진실 또한 은폐하고자 하는 잔인한 힘에 맞서는 안간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의 목소리는 돌아오지 못한 아이의 자리를 그대로 빈 곳으로 두지 않기 위해 “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고 함으로써 과거의 이야기를 붙잡는다. 또한 “너의 훌쩍 자란 등뼈를 만져보고 싶다”고 함으로써 동시에 마땅히 누렸어야 할 미래의 시간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시의 목소리에 의해 표현된 열망이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는 바람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견, ‘진흙 반죽’은 ‘단 하나의 사물’과 같은 ‘단단하게 굳어 제대로 모양 잡힌’ 것이 되는 일의 앞 단계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중요한 사실은, ‘진흙 반죽’이 다른 무엇과 구분되어 고립된 상태로 머무른다면 ‘흰 항아리’와 같이 ‘모양 잡힌’ 무언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대로 모양 잡힌 기억이” 되고 싶다는 바람처럼, “단 하나의 사물”이 되는 일은 시간의 흐름뿐만 아니라 여러 타자들과 함께 다양한 사건을 만날 때에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시의 목소리는 “네 어린 시절의 큰 글씨를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고 하며 그 존재의 고유함을 지키고자 하는 가운데에서도, 또한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알맞게 줄어드는 글씨를 보고 싶다”고 말함으로써 아이로 하여금 다양한 사건과 타자를 만나며 그와 함께 존재를 나누며 변화할 수 있게 하는 시간의 열림을 희구한다.
    시의 목소리가 전하는 마음은 “너의 늙어가는 얼굴 가득 물결처럼 번지는 주름을 보고 싶다”고 하는 말로써 아이가 이제는 가질 수 없게 되어버린 것들을 바라는 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아침이 고요하게 거둬들이는/ 네 마지막 숨결을 느끼고 싶다”라고 함으로써 아이가 누리지 못할 시간의 빈자리를 표현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구체적인 사건과 그 감각들을 불러일으키는 움직임은 역설적이게도 ‘죽은 엄마’라는 이 세상을 떠난 존재가 몸을 찾지 못해 빈자리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아이를 향해 건네는 말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아이가 지녔으면 했을 미래의 시간이라는 잠재성을 담아내기 위해, 시의 목소리는 스스로가 “진흙 반죽처럼 부드러워지고 싶다”고 함으로써,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는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진흙 반죽”으로 표현된 이와 같은 물성은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어둠’과 ‘깊은 일’이 이루어냈던 모호성을, 경계를 희미하게 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될 수 있도록 하는, 즉 서로의 존재를 나누는 장을 여는 일을 이행한다. 이렇듯 스스로의 존재를 유연하게 함으로써 타자와 서로의 존재를 함께 나누는 경험을 통해서만 “단단하게 굳어 제대로 모양 잡힌 기억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이어지며 단단하게 굳어가는 일을 통해 ‘연대’의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당신’과 ‘나’의 경계를, 즉 개체의 한계를 긋는 것으로 여겨지는 선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언어의 행렬을 우리는 또한 이영광의 시에서 만날 수 있다.

    인간들이 입에 칼을 물고 다니는 것 같아
    말도 안 되게, 찌르고 베고 보는 거야
    안 아프지도 못하면서
    저 아프면 우는 것들이

    예전에, 수술받고 거덜 나 무통 주살 맞고 누웠을 적인데
    몸이 멍해지고 나자, 아 마음이 아픈 상태란 게 이런 거구나 싶은
    순간이 오더라고, 약이 못 따라오는 곳으로 글썽이며
    한참을 더 기어가야 하더라고

    마음이 대체 어디 있다고 그래? 물으면,
    몸이 고깃덩이가 된 뒤에 육즙처럼 비어져 나오는
    그 왜, 푸줏간 집 바닥에 미끈대던 핏자국 같은 거,
    그 눈물을 마음의 통증이라 말하고 싶어

    살아보면, 원수가 왜 식구 중에 있을까 싶은 날도 있지만
    피가 섞였다는 건 말이지, 보조 침대에 구겨져 새우잠 자는
    식구란 말이지, 같은 피 주머니를 나눠 찬 환자란 걸
    마음이 우니까 알 것 같더라고
    그게 혈육이더라고

    세월호 삼보일배가 살려고, 기어서 남녘에서 올라오는데
    잃은 아이 언니인가 누나인가 하는
    그 여린 아가씨,
    옷이 함빡 젖고 운동화가 다 해졌데

    죄 많고 벌 없는 이곳을 뭐라 부를까
    내 나라라는 적진敵陣을 부러질 듯 오체투지로 뚫으며
    몸이 더 젖고 더 해지는 동안,
    거기 세 든 마음이란 건 벌써 길 위에 길처럼
    녹아버렸겠다 싶더라고

    마음이란 거 그거, 찌르지 마, 자꾸 피가 샌다고
    중환자실 천장에 달려 뚝뚝 떨어지는 피 주머니 같은 그것에게
    칼질 좀 하지 마
    그 붉은 것, 진통제도 무통 주사도 안 듣는 거라고

─이영광, 「마음 1」(『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8) 전문

    「마음 1」은 『시로 여는 세상』 2015년 여름호에 발표되었으므로, 앞의 시보다 조금은 시간이 더 흐른 후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세월호 삼보일배가 살려고, 기어서 남녘에서 올라오는데”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 시가 쓰일 무렵의 사회 상황은 참사가 일어난 그날 이후 점점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140일이 지난 2014년 9월 2일, 세월호가족대책위원회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청와대까지 삼보일배 행진을 시도했으나 경찰에 의해 가로막혔다.3 이후 세월호 유가족은 2015년 2월 23일 팽목항에서 출발해 광화문광장으로 향하는 삼보일배를 다시 시작했다.4 아마도 시에서 전하는 삼보일배는 2015년 팽목항에서 출발한 움직임을 가리키는 듯하다.
    시의 목소리에게 이 삼보일배가 “내 나라라는 적진을 부러질 듯 오체투지로 뚫으며” 나아가는 모습으로 보인 까닭은, 당시 유가족들을 향해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이른바 ‘폭식투쟁’이라는 형태로 혐오 행동을 한 자들, 그리고 이를 자극하는 당시 정부와 일부 언론이 벌인 일련의 움직임들이 마치 적과 같은 모습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단지 살고자 한 행동이, 살기 위해 진실을 밝혀달라는 목소리를 묵살하고 그에 왜곡된 이념적 잣대를 들이대며 적대적 행동을 획책하고 실행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수라장 같은 광경을 목도하며 시의 목소리는 “인간들이 입에 칼을 물고 다니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은 그에 이어지는 “안 아프지도 못하면서/ 저 아프면 우는 것들이”라는 대목이다. 그렇다. 그렇게 입에 문 칼로 “말도 안 되게, 찌르고 베고 보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이는 없다.
    비록 타인의 아픔에는 둔감할 수 있어도, 스스로의 아픔에 무딜 수는 없을 터이다. 육체의 고통은 마취에 의해 잊을 수 있지만,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누구나 어떠한 모습으로든 느끼게 된다. 그렇게, 마음이 아픔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서 시의 목소리는 극단적으로 분열된 양상을 뛰어넘을 길을 찾는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여겨지곤 한다. 보이지 않으리라 여기는 까닭에 또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하는 탓인지, 참사의 희생자와 그 유가족을 향해 “입에 칼을 물고 다니”면서 “말도 안 되게, 찌르고 베고 보는” 자들이 있다. 시의 목소리는 그런 인간들을 향해 ‘마음’을 선명한 사물로 표현한다. “몸이 고깃덩이가 된 뒤에 육즙처럼 비어져 나오는/ 그 왜, 푸줏간 집 바닥에 미끈대던 핏자국 같은 거”라며, 일견 마음과는 대립된 것이라 여기곤 하는 살덩어리로 그 거처를 제시한다.
    이러한 말의 흐름은 비단 ‘마음’의 형상을 구체적인 무언가로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관습적 인식의 틀을 와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육체와 마음을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것이라 여기는 사유의 틀을 무너뜨리고, 양자가 실상은 개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충격적인 이미지로써 전하는 것이다. 또한 시의 목소리는 세월호 삼보일배를 하는 이의 옷과 운동화가, 그리고 몸이 젖고 해진 모습과 그 몸에 세든 마음이 “길 위에 길처럼/ 녹아버렸겠다” 생각하며 각각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포개며,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이들을 제시한다. 아울러 이 같은 말의 운용은, 하나가 다른 하나와 서로 구별된 것으로 보일지라도 실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겹칠 수 있으며 동시에 겹치고 있음을 표현한다. 더 나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그렇게 서로 겹쳐져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러한 말들과 함께 시의 목소리는,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 적대하는 자들을 향해 “마음이란 거 그거, 찌르지 마, 자꾸 피가 샌다고”라고 하소연한다. 고통의 얼굴에 스스로를 노출되도록 한다. 인간의 가장 취약한 곳을 드러냄으로써 또한 그에 자신을 노출되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을, 감정을 갖는 존재라면 누구나 누군가의 아픔에 노출될 때 그와 이어져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 1」이 수록된 시집의 이름인 ‘끝없는 사람’은 ‘무한한 사람’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끝’이라는 경계가 없는 사람, 즉 울타리가 없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하고 또 스며들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나아가 사람이란 그렇게 서로에게 겹치며 의존할 때에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말의 흐름은 또한 죽음이 삶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구별된 것으로 인식하는 그 둘이 실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포개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실감을 느끼게 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이 삶과 분리된 것으로 밀쳐두거나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고통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그 슬픔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시간을 ‘그날’ 이후로 빠르게 감으며 그 흐름을 훑어보자. 세월호 참사 이후 몇 해 지나지 않아 권력이 감추고자 했던 진실 가운데 일부가 드러났고, 그에 분노한 시민들이 촛불과 함께 모였다. 그리고 결국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될 당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당시의 흐름 가운데 우리가 외면했거나 둔감하게 받아들인 문제를, 황정은의 소설집 『디디의 우산』(창비, 2019)에 수록된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연세대 항쟁, 용산 참사, 세월호 참사, 그리고 촛불혁명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흐름과 함께한 한 사람의 시선에서, 정의로운 일을 실천하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여러 혐오와 그러한 것을 둔감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문제적인 것으로 그려낸다.

    왜냐하면⋯⋯ 그걸 목격한 사람은 청와대 깊숙이 숨은 대통령이 아니고 그 팻말 앞에 선 나였으니까. 계집인 나. 惡女 OUT이 지금 그의 언어라면 그것이 그의 도구인데 그의 도구가 방금 여기서 내게 한 일을 그는 알까. 그는 자기처럼 이 자리에 나온 많은 여성들은 왜 보지 않을까. 惡女라고 빨갛게 지칭할 때 ‘그 사람’의 여성은 그렇게 선명하게 보면서도. 그 팻말 앞에서 나는 이렇게 하지 말라고, 이렇게 하지 말라고⋯⋯
    말했어?
    말할까 말하지 말까를 계속 망설였는데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우리니까⋯⋯
    모두가 좋은 얼굴로 한가지 목적을 달성하려고 나온 자리에서 분란을 만드는 일을 거리끼는 마음이 내게 있었고 그래서 결국은 그 팻말 앞을 그냥 지나쳐 왔는데 오늘 밤 집에 돌아가서 이 일을 계속 생각할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내가 그 말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했다는 생각을, 말하자면 그걸 말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자꾸 할 것 같다고. 우리가 무조건 하나라는 거대하고도 괴로운 착각에 대해서도.

─황정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디디의 우산』, 창비, 2019), 306〜307쪽.

    서수경과 나는 그 침묵 속에서 함께 침묵하는 동안 평화적 시위를 원하는 사람들의 갈망에서 상처를 보았다. 누군가 다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너무 겪었다고.

─황정은, 위의 소설, 309쪽.

    촛불혁명은 피 흘리지 않고 성공한 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일까, 촛불을 들고 함께 참여한 이들 가운데에서 누군가는 같은 편에 서 있으리라 생각했던 몇몇의 어떤 언어와 행동으로 인해 “너무” 다쳤다는 사실이 쉽게 간과되곤 한다. 위의 인용에서 살필 수 있듯,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의 초점 인물은 대통령 퇴진 구호에 사용된 여성 혐오 표현을 보며, 그에 상처 입는 여성을 생각하고, 또 그에 관해 말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당장은 ‘우리’로 움직이고 있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일이 지닌 문제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당장은 묻어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일은 결국 앞으로 일어날 사회적 갈등의 전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에 뿌리 깊게 스며있는 ‘혐오’에 관한 문제의식을 드러낸 황정은의 소설은 일종의 예언과 같은 역할을 한 셈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덮어두려 했던 문제들은, 결국 이후 발생한 팬데믹과 10·29참사 때 제 모습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드러낸 혐오의 움직임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가장 큰 상처를 내고 있다. 혐오의 본질은 끊임없이 하나와 다른 하나를 가르고 배제함으로써 제 이익이라 여겨지는 것을 지키는 데에, 나아가 타자의 몫을 빼앗으려 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혐오 발언의 모습과 그 움직임들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열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혐오의 움직임에 맞서, 문학이 ‘사람’에 관해, ‘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살피고자 한다. 이어서 함께 볼 작품 역시 한 사람으로서 ‘한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편이다.

    이라는 제목은
    이소연 시인이 쓴 글을 보고 적은 것이다

    그 글에는 한 사람이 등장하고
    나뭇잎이 후두두 떨어져 내리지만
    한 사람에 대한 나뭇잎은 쓰여 있지 않다

    그 글은
    10·29 참사를 몸으로 앓으면서 쓰였다

    “나는 모든 일을 멈추고 낮달같이 몸져누웠다.”

    그 글은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추모하기 위해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는 304낭독회 99번째 자리에서 읽혔다

    어제 대통령실에선
    슬픔을 정치에 활용해선 안 된다는 말을 전했다

    슬픔이 그 자체로 정치인데,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수많은 시인이
    슬픔을 시에 활용하겠는가

    그 글에서 한 사람이 시인에게 묻는다

    “시인이 생각하는 법이 궁금해요.”

    아마도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생각 속에서
    시인은 후두두
    떠오르지 않는 나뭇잎을 보면서
    슬픔에 빠지는 사람이리니

    그래서 나는
    달력을 넘기다 말고
    시간의 부드러운 융단에 떨어진
    한 사람에
    대한
    나뭇잎을 주워 집으로 가면서
    오래되었다고 넘겼다

    사람처럼

    어제 나는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발이 땅에 닿지 않으면 끝난 거래요
    태아 자세로 웅크려야 된대요
    그거 봤어요
    이태원 참사 사고 은마에서 또 터진다
    진짜 쓰레기들 아니에요

    물방울처럼

    그 글에서 시인은
    단 한 사람 잃을 준비도 하지 못하는
    사람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시인의 머리에서 어깨에서
    가슴에서, 저 끝에서
    무릎에서 발등에서 떠오른 것이다

    나뭇잎처럼

─김현, 「한 사람에 대한 나뭇잎」(『장송 행진곡』, 민음사, 2023) 전문

    시의 첫 행에서 “이라는 제목은”이라 말한 ‘한 사람에 대한 나뭇잎’이라는 표현은 이소연의 「사람에게도 ‘떨켜’가 있다면」을 읽고 쓴 것이라 한다.5 이소연은 이 산문에서 한 사람을 잃은 일에 관한 개인적인 경험을 나무의 ‘떨켜’와 연관 지어 이야기한 후, 10월 29일 참사에 대하여 “이 참담 앞에서는 슬픔이 견딜 수 있는 것이라는 게 이상하다.”라고 썼다. 그리고 이소연은 이 글을, 시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10·29참사 한 달여 뒤인 2022년 11월 26일에 진행된 아흔아홉 번째 304낭독회에서 낭독하였다. 마찬가지로 위에 인용한 김현의 시 「한 사람에 대한 나뭇잎」 역시 같은 날 낭독되었다. 시가 쓰일 무렵 “그 글은/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추모하기 위해/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는 304낭독회 99번째 자리에서 읽혔다”라는 문장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지시한 것이었을 터이다. 물론 이러한 문장이 쓰일 수 있었던 까닭은, 이소연의 글이 낭독회에서 읽히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숨어 있는 배경과 별개로, 문학의 언어는 때때로 이처럼 이곳과 저곳의 시간을 겹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사실과 허구를, 언어와 실재를 서로가 서로에게 포개지도록 한다.
    또한, 문학의 언어는 때로는 지나간 것으로 여겨진 일을 다시 불러오기도 하고, 때로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고지하기도 한다. 「한 사람에 대한 나뭇잎」에서는 “이태원 참사 사고 은마에서 또 터진다”라는 강력한 경고를, ‘한 사람’과 나눈 대화의 움직임 가운데 제시한다. 여기서 ‘은마’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일어난 많은 참사가 사람의 목숨보다 돈 혹은 경제적 문제를 우선하는, 즉 사람을 생각하지 않는 태도와 그 의식구조로 인해 발생해왔다는 생각을 내포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그 경고의 내용 자체보다, 그러한 말이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라는 움직임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사람’은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인물을 지시할 터이지만, 시에서 이 표현 자체는 우리에게 특정한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동시에 어느 누구든 될 수 있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측면에서 ‘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앞서 살핀 시편들에 등장했던 ‘어둠’이라든가 ‘누군가’라는 말들처럼 모호성을 띤다. 그렇다. 앞서 살핀 시편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모호성은 그 말이 지시하는 대상을 불분명한 것으로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어떤 사실적인 실감으로 다가옴으로써 구체적으로 실존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느끼고 생각하도록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마치 안현미의 시 「깊은 일」에서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고 표현된 그 ‘누군가’의 모습에서 나타나는 ‘깊은 일’을 생각하며 그에 관해 침묵하지 않는 ‘깊은 일’과 공명하는 것 같다. 그렇다. 김현의 시에 목소리를 내는 이는, 이소연의 산문에 제시되었던 그 ‘한 사람’과 ‘나뭇잎’에 관한 이야기를 받으며, 그렇게 “단 한 사람 잃을 준비도 하지 못하는/ 사람의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게 스스로 “사람처럼” ‘한 사람’과 ‘사람의 일’에 대해 대화하고, 또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단순히 머릿속에서만 떠오른 것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의 일에 대해 생각”하는 일, 그 일은 “시인의 머리에서 어깨에서/ 가슴에서, 저 끝에서/ 무릎에서 발등에서 떠오른 것이다”라고 한다. 몸의 모든 곳에 떠오르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의 말 역시 몸의 모든 곳에서 떠오르는 그 무엇으로 나타난다. 몸을 떠나 다른 이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 몸과는 또한 다르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사람의 말은 때로 칼이 되어 마음을, 그 마음이 깃든 몸을 다치게 한다. 그러나 몸에서 나온 그 무엇이기에 또한 다른 이의 곁에 다가가 함께 슬픔을, 체온을 나눌 수도 있는 것이다. 정치는 바로 이와 같이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함께 나누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또한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고 생각하는 과정을 이른다. “슬픔을 정치에 활용해선 안 된다” 말하는 이들과 같은 부류가 생각하는 권력을 향한 욕망과 그 재분배는 정치가 아니라, 그저 단순한 권력투쟁에 불과하다.
    그렇게, 사람의 말은 서로의 존재를 나눈다. 그리고 또한 서로의 어둠을 나눈다. 우리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는 ‘누군가’의, 그리고 10월 29일 그날을 또한 마찬가지로 견뎌야만 하는 그 깊은 일을, 그 어둠을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으로서 사람처럼, 그에 관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의 말을 나눠야 할 것이다. 때문에 침묵할 수 없다. 이는 또한 한 사람으로서 ‘한 사람’의 일을, 그 기억을 함께 나누고 이어가는 일이다. 그렇게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어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용산 참사와 관련한 문제의식을 담은 최은영의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문학동네, 2023)에는 ‘기억한다’는 일의 중요함이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다. “나는 아직도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33쪽) 그렇다. 진실을 덮고 ‘그날’의 일을 기억에서 지우고자 하는 일은 또한 ‘사람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을 지우는 일이다. 그와 같은 비인간화의 흐름에 맞서, 문학은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의 말’을 나누어 오고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게 서로를 나누며 나아갈 것이다. 이는 또한 서로의 ‘어둠’을 나누는 ‘깊은 일’이다. 온전히 헤아릴 수 없는 그 무엇과 함께하는 일이다. 때문에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나갈 것이다.
  
  

김태선

문학평론가. 201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304낭독회’ 일꾼으로 활약했음. 공저 『세계의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리라』가 있음.

  
  

〈주석〉

  1. 세월호 참사에 희생된 단원고 아이들의 시선과 육성을 담는 형식으로 쓰인 생일시는 『엄마. 나야.』(곽수인 외, 난다, 2015)에서 살필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 외에도 생일시 행사에 참여하여 쓰인 시편들이 여럿 있다.
  2. 김일우 기자, 「권지연양의 베트남인 할아버지 “사위·손자 찾아주세요” 손팻말 호소」, 《한겨레》 2014년 5월 26일 자.
  3. 「세월호 유가족, 광화문광장서 ‘특별법 제정’ 3보 1배」(《노컷뉴스》, 2014년 9월 2일) 참조.
  4. 「세월호 인양 촉구 유가족 부녀 팽목항→서울 삼보일배 고행」(《연합뉴스》, 2025년 2월 23일) 참조.
  5. 이소연 시인이 쓴 글은 2022년 11월 5일 자 《한국경제》에서 확인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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