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와 피리

    

    달이 떴어. 작은 섬마을 캄캄한 밤하늘에 노랗고 둥근 달이 떴어.
    마당을 벗어나면 경사진 길, 그 위에 작은 언덕 사리언덕. 나는 오빠와 사리언덕에 올라 달 뜬 바다를 바라보았어. 섬에 와서 보는 세 번째 둥근 달이야.
    달님은 오늘도 검푸른 수면 위에 달의 길을 펼쳐놓았어. 달의 길, 금비늘로 반짝이며 검푸른 수평선에 가 닿은 길고 긴 달의 길.
    “오빠, 우리도 저 길 따라 걸으면 좋겠다, 그치?”
    “사람이 물 위를 어떻게 걸어? 고래라면 모를까.”
    고래가 달빛 가득한 바다를 헤엄쳐 오는 모습을 상상해봤어. 심장이 쿵쾅거렸어.
    “그만 들어와 자! 내일 학교 안 갈 거야?”
    할머니가 마당에 서서 냅다 소리를 질렀어.
    그날 밤 나는 고래를 보았어. 거대한 고래가 달처럼 둥근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봤어. 내가 놀라 마주 보니까 빙그레 웃으며 스쳐 지나갔지.
    아침에 밥을 먹다가 내가 말했어.
    “오빠, 고래가 나를 봤어.”
    할머니는 콧방귀를 뀌었어.
    “고래는 무슨! 꿈을 꾼 거제.”
    오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어.
    “고래가 널 찾아오려나봐.”
    “정말?”
    “엄마가 그랬어. 고래는 꿈으로 먼저 찾아온다고.”
    할머니가 험상궂은 얼굴로 빽, 소리 질렀어.
    “엄마 소리는 하지도 말어! 지 자식 내팽개치고 간 엄마가 뭔 엄마여!”
    오빠는 입을 다물었어. 난 할머니를 노려보았어.

    수업 시간에 리코더를 배웠어. 3학년 교실엔 나까지 네 명이 공부해. 야물딱진 영은이나 공부 잘하는 민혁이는 리코더도 잘 불어. 덤벙쟁이 대성이마저 얼마나 잘 부는지 몰라. 하지만 나는 아무리 힘껏 불어도 음이 제대로 나지 않았어.
    “수아, 너는 서울에서 리코더도 안 배웠냐?”
    영은이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어. 선생님이 영은이에게 다가와 말했어.
    “영은아, 친구가 잘하지 못하면 뭐라고 하는 거랬지?”
    “어렵니? 나랑 같이 해볼래? 요.”
    “잘 기억하는구나. 그럼 다시 말해야지.”
    영은이는 선생님 눈치를 보며 국어책 읽듯이 느릿느릿 말했어.
    “수아야, 리코더 부는 게 어렵니? 나랑 같이 해볼래?”
    선생님이 빙긋 웃었어. 나도 억지로 대꾸했어.
    “어떻게 불어야 음이 제대로 나는데?”
    “선생님이 도 구멍은 반만 막으라고 했잖아.”
    그리고 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였지.
    “그리고 살살 불어, 이 가시내야.”
    나는 화가 나 낮은 목소리로 말했어.
    “난 바이올린은 잘하거든.”
    영은이도 지지 않았어.
    “그게 뭐? 너는 꽹과리 못 치제? 나는 장구도 친다.”
    영은이가 혀를 쏙 내밀었어. 얄미웠지만 더 이상 내세울 게 없었어. 어쨌든 영은이 말대로 하니까 리코더에서 부드러운 소리가 났어. 음도 제대로 났고 말이야. 하지만 새끼손가락에서 쥐가 나는 것 같았어.

    저녁나절에 오빠랑 사리언덕에 올랐어. 하늘도 바다도 잘 익은 감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어.
    “오빠, 나 리코더 불기 싫어.”
    “리코더가 잘 안 불어져?”
    “응. 하기 싫어.”
    내가 시무룩이 대답하니 오빠가 말했어.
    “예전에 엄마한테 들었는데, 엄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피리 부는 걸 좋아했대. 그래서 고기 잡으러 간 아버지를 기다리면서 늘 언덕에 서서 피리를 불었대.”
    오빠가 어떤 말로 위로해도 내 기분은 좋아질 수 없었어. 리코더를 생각하니 새끼손가락이 다시 저리는 것 같았거든. 나는 시큰둥히 대꾸했어.
    “그래?”
    “한번은 피리를 불어서 고래를 불러오기도 했대.”
    “고래?”
    고래라는 말에는 귀가 솔깃해졌어.
    “음 음 음. 이 곡 알지?”
    오빠는 입을 다물고 콧소리로 노래를 불렀어.
    “알아. 엄마가 잘 때 불러줬잖아.”
    “기억하네. 이 노래가 바로 고래가 좋아하는 노래래.”
    “어? 난 그런 말 못 들었는데!”
    “넌 일찍 잠들어서 못 들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엄마가 그랬어. 피리를 불어서 고래가 왔다고.”
    “진짜?”
    “그럼 진짜지. 엄마가 그러는데, 엄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어부였대. 하루는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는데, 갑자기 바람이 거칠어지고 파도가 엄청 높아졌대. 고기 잡으러 나간 배들은 다 돌아왔는데 아버지 배만 돌아오지 않았대. 엄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그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걱정되었대. 그래서 바다로 나갔는데⋯⋯ 이 언덕에 말이야. 이 언덕에 서서 보니까 멀리서 출렁대는 배가 보이더래. 그런데 배가 돌아오지 않더래.
    아버지, 빨리 돌아오세요!
    엄마의 그 할아버지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대. 그러다 깨달았대. 배는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 거친 파도 때문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걸 말이야.
    엄마의 그 할아버지는 발을 동동 구르다 생각났대. 고래는 피리 소리를 좋아한다는 걸 말이야. 피리 소리를 좋아해서 피리 부는 어부를 구해준 적이 있다는 이야기가 떠오른 거지. 그래서 얼른 피리를 꺼내 불었대. 피리 소리가 고래에 가 닿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배는 점점 더 멀어졌대. 엄마의 그 할아버지는 눈물이 났대. 그렇지만 피리 불기를 멈출 수 없었대. 피리 부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때였대! 뭍에서 멀어지기만 하던 배가 갑자기 다가오기 시작하더래. 가만 보니까 글쎄 고래더래! 고래가 배를 밀어주고 있더래!”
    “와! 신기하다. 그래서? 배가 무사히 왔대?”
    “아니. 고래가 배를 육지 근처까지 밀어줬는데 파도에 배가 또 뒤로 밀려났나봐.”
    “그래서?”
    “엄마의 그 할아버지는 또 피리를 불었대. 속으로 ‘도와주세요. 우리 아버지를 제발 데려다주세요.’ 기도하면서. 그러자 신기하게도 고래가 다시 와서 배를 뭍까지 떠밀어주었대. 그리고 유유히 먼바다로 헤엄쳐 갔대.”
    “우와! 오빠 그 말 정말이야?”
    “그럼. 정말이지.”
    “정말 저 바닷속에 고래가 있어? 고래가 피리 소리 듣고 배를 데려다주는 거야?”
    “그렇다니까. 엄마가 그랬어. 엄마는 거짓말 안 하잖아.”
    붉게 물든 바다, 저 먼 수평선. 저 바닷속에 고래가 있다!
    가슴이 뛰었어.

    나는 학교가 끝나고 돌아오면 사리언덕에 올라 리코더, 아니 피리를 불었어. 오빠도 내 곁에 서서 피리를 불었어. 내가 음을 틀리면 가르쳐주기도 했어.
    학교에 가서도 피리를 불었어.
    하루는 아이들이 내 곁으로 몰려들었어. 영은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어.
    “수아, 너 실력이 엄청 늘었다.”
    “너 리코더 진짜 잘 분다. 최고다.”
    민혁이도 나를 칭찬해줬어.
    “원래 우리 엄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피리를 잘 불어서 그래.”
    나는 괜히 우쭐해서 한마디 했어.
    “너가 너네 엄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하여간 그 할아버지를 닮았나보다. 영은이도 쟤네 아빠 닮아서 힘이 세잖아.”
    대성이 말에 영은이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어.
    “근데 그 노래는 무슨 노래야? 처음 들어봐.”
    영은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어.
    “이거? 고래 노래야.”

    나는 오빠랑 날마다 사리언덕에 올라 피리를 불었어. 피리를 불다가 붉어진 바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돌아왔어.
    할머니는 그때마다 지청구를 늘어놓았어.
    “피리를 분다고 고래가 오나? 다 옛날이야기다. 수종이, 너는 5학년씩이나 돼갖고 쪼만한 동생이랑 맞장구나 치고. 언제 철들래?”
    바다 위 둥근 달이 이지러지더니 어느새 밤하늘에서 사라져버렸어. 오빠는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피리를 불지 않았어. 그저 내 곁에 앉아 우두커니 바다를 바라보았어.
    나는 알아. 오빠가 무슨 생각하는지. 하지만 알아. 고래는 올 거야. 내 피리 소리 듣고 고래가 올 거야. 반달 같은 배를 밀고 내게 올 거야.

    오빠는 언덕에 가지 않으려나봐. 할머니 방에서 책만 봐. 전화기 옆에 꼭 붙어 앉아서.
    “오빠, 전화 왔어?”
물으면
    “일하느라 바쁘신가봐.”
대답하곤 다시 책만 봐.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그래. 할 수 없지 뭐. 나 혼자 갈 수밖에.
    피리를 들고 집을 나서는데 할머니가 내 등에 대고 소리쳤어.
    “하늘이 꾸물거리는데 어딜 간다냐?”
    나는 대답했어.
    “피리 불러요.”
    하늘만큼 바다도 온통 회색빛, 수평선은 보이지도 않았어. 바람마저 불었어. 바다엔 넘실넘실 파랑이 일고, 사리언덕 나무들은 이파리를 흔들어댔어. 나는 바람 속에 서서 피리를 불었어.
    휘리리 피, 피리리 휘.
    토독토독, 가느다란 빗방울이 어깨 위에, 피리 위에 떨어졌어. 괜찮아. 회색빛 바다에도 고래는 있고, 내 피리 소리를 들을 테니까.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어. 어느새 어깨가 흠뻑 젖었어.
    “너 제정신이야?”
    갑자기 오빠가 나타나 피리를 낚아챘어.
    “비 오는데 뭐 하는 거야? 이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오빠가 나를 끌고 집으로 갔어.
    할머니는 내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다 말릴 때까지 지청구를 늘어놓았어.
    “그 에미에 그 딸이제. 이 늙은 할미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 하고 어쩌크롬 다들 지 생각만 허고. 고생고생해서 공부시켰더니만 기껏 만난 게 명 짧은 비리비리 약골이⋯⋯.”
    “할머니! 그만해요!”
    오빠 입에서 어떻게 그렇게 큰소리가 나올 수 있지? 나는 놀라 머리빗을 떨어뜨리고 말았어. 할머니도 놀랐는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오빠를 올려다봤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오빠는 두 주먹을 꼭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어.
    “아빠가 하늘나라 가서 엄마가 얼마나 슬픈지 아세요? 엄마는 할머니 딸인데, 할머니는 왜 딸을 위로해주지 않고 자꾸 흉만 보고 미워하는 건데요?”
    “느자구없네. 지금 할매한테 뭐어?”
    나는 얼른 달려가 두 팔 벌려 오빠 앞을 막아섰어.
    “안 돼요, 할머니! 혼내지 마요, 할머니.”
    난 봤어. 오빠 눈에 눈물이 어려 있는걸. 나는 돌아서서 오빠를 끌어안았어.
    “오빠도 슬퍼요. 그러니까 우리 오빠 야단치지 말아요.”
    “니그들이 시방⋯⋯.”
    할머니는 말을 잇지 못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았어. 그도 잠시, 할머니는 뒤돌아 앉았어.
    “요로코롬 이쁜 아그들을 떼어놓고 눈에 밟혀 우찌 살고 있당가.”

    눈.
    둥근 눈.
    달을 닮은 고래 눈.
    고래가 내게 와서 말했어.
    ‘피리를 불어줘.’

    나는 잠에서 깨어나 피리를 찾아들었어. 비는 그쳤나봐. 마당에 환한 달빛이 가득했어. 나는 달빛을 밟고 사리언덕에 올랐어.
    음 음 음.
    나를 재우던 엄마의 노래.
    휘리리 피, 피리리 휘.
    엄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불렀던 고래의 노래.
    고래야, 듣고 있니? 내 피리 소리.
    너를 위한 내 피리 소리.

    “에구, 이를 어쩌. 온몸이 불덩이랑께.”
    안절부절못하는 할머니 목소리,
    “할머니, 수아 죽으면 어떡해요?”
    훌쩍대는 오빠 목소리.
    “죽긴 왜 죽어? 감기 걸려 죽은 사람 있당가?”
    할머니가 오빠를 윽박지르는 소리.
    오빠 혼내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입술이 움직이지 않았어. 눈도 떠지지 않고.
    “어린 게 겁도 읎제.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뭔 일이 있다고 한밤중에 언덕까지 올라가 피리를 분당가. 뭐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제.”
    할머니가 자꾸만 내 얼굴을 쓸어내렸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은 못해도 거칠거칠한 손이 할머니 손인 건 알 수 있었어.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손은 오빠 손이고.
    하지만 할머니 목소리도, 오빠 목소리도 자꾸만 가물가물 아득하게 멀어져. 그러다간 또다시 가까워지고.
    “넌 뭔 자랑거리 났다고 학교 아그들한테꺼정 쓸데없는 소리를 해갖고는⋯⋯.”
    할머니가 또 오빠를 혼내. 그런데 오늘은 말끝도 맺지 못하고 목소리엔 힘이 하나도 없네.
    “애들이 왜 수아가 학교에 오지 않냐고 물어봐서⋯⋯.”
    오빠도 마찬가지야. 코를 훌쩍이는 코 맹맹한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
    나 때문인 거지? 오빠, 울지 마. 나 괜찮아.
    “수아야, 인나라. 이제 우리가 같이 피리 불어줄게 어서 인나라.”
    어? 영은이 목소리네! 영은이가 왔나봐.
    “수아야, 어서 나아. 오늘은 우리가 너 대신 피리를 불어줄게.”
    민혁이야.
    “우리도 이제 고래 노래 알거든.”
    대성이도 왔구나. 우리 3학년 친구들이 다 왔네.

    휘리리 피, 피리리 휘.
    휘리리 피, 피리리 휘.
    피리 소리야! 고래를 부르는 피리 소리.
    엄마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불던 그 피리 소리.
    친구들이 부나봐. 사리언덕에 서서 나 대신 정말 피리를 불고 있나봐.
    음 음 음.
    음 음 음.
    노랫소리. 엄마가 불러주던 그 노래. 고래를 부르는 엄마의 노래.

    달이 떴어.
    어두운 밤바다에 노랗고 둥근 달이 떴어.
    멀리 수평선. 바다를 치고 뛰어오르는 저것은⋯⋯ 고래?
    고래야!
    고래가 나를 찾아왔어!
    “오빠! 고래야! 고래가 왔어!”
    나는 있는 힘껏 소리쳤어.
    “이것이 이젠 헛소리까지 다 하네.”
    꿈인가?
    할머니가 혀를 찼어. 그 소리 들으며 나는 다시 까무룩 잠에 빠졌어.

    긴 밤이 지나고 깊은 바다에서 해가 떠오르고, 어두웠던 세상이 다시 찬란히 빛났어.
    나흘 만에 나는 학교에 갔어. 친구들이 반갑다며 내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었어. 대성이는 사탕도 줬어.
    그럭저럭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은 민혁이랑 1학년 민지를 데리고 서둘러 배 타러 갔어. 금요일이면 선생님들은 가족들과 함께 오후 배를 타고 육지에 있는 집으로 가거든.
    나는 오빠랑 스쿨버스를 탔어. 스쿨버스가 영은이네 식당 앞에 멈췄는데, 뜻밖에 거기에 할머니가 서 있지 뭐야. 할머니는 버스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고는
    “기사 양반, 우리 아그들 좀 내리라카소.”
카랑카랑한 할머니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어. 오빠와 나는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어.
    “할머니 무슨 일 있어요?”
    오빠가 의아하여 물었어.
    “터미널로 가자.”
    할머니는 앞뒤 설명도 없이 성큼성큼 앞서 걸었어. 터미널⋯⋯ 나는 괜히 가슴이 뛰었어.
    터미널 대합실은 배를 타려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했어. 멀리 배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어. 내가 목을 빼고 배를 보는데 선생님 옆에서 동생 민지랑 아이스크림을 먹는 민혁이와 눈이 딱 마주쳤어. 방금 전에 헤어졌으면서도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난 것처럼 민혁이는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어. 기분이 좀 이상했어.
    어느새 배가 항구로 미끄러져 들어왔어.
    “오빠, 우리도 배 타?”
    “몰라.”
    오빠가 할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 할머니는 바위처럼 서서 배만 바라보고 있었어. 오빠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물었어.
    “할머니,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할머니는 못 들었는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배에서 사람들이 내렸어.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끌고 오는 사람,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낑낑대며 걷는 사람,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두리번거리는 사람⋯⋯ 차례차례 사람들이 배에서 내렸어.
    “어?”
    본 것 같아!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 내가 본 것 같아!
    그때였어.
    “엄마다!”
    오빠가 탄식처럼 소리를 내뱉었어.
    맞아. 엄마야. 엄마가 배에서 내렸어!
    나는 잡고 있던 오빠 손을 놓고 냅다 달렸어.
    “엄마!”
    고래야. 고래가 왔어!
    피리 소리를 듣고, 먼 수평선 너머에서 반달 같은 배를 밀고 내게 온 거야. 엄마를 데리고 내게 온 거야.
    “엄마!”
    오빠와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엄마에게 달려갔어.
  
  

임정자

동화작가. 1998년 월간 『어린이문학』에 단편동화 「흰곰인형」으로 등단. 동화책 『어두운 계단에서 도깨비가』 『무지무지 힘이 세고 대단히 똑똑하고 아주아주 용감한 당글공주』 『하루와 미요』 『흰산 도로랑』, 그림책 『내 동생 싸게 팔아요』 『진도에서 온 수호』 『 발자국개』 등이 있음. 『할머니의 마지막 손님』으로 제8회 권정생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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