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국 현대시와 만주 <4회> : 정책이민 시대3(1931~1945)

  

5. “여기는 유랑의 정착촌/ 쫓겨온 이민부락”

  1884∼1900년 사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광대한 식민지(영국 370만 평방킬로마일; 프랑스 360만 평방킬로마일)를 강탈하였는바, 1903년 현재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 미처 분할되지 않은 세계 영토 잔여분은 고작 ‘아프리카 9.6퍼센트, 폴리네시아 1.1퍼센트, 아시아 45.4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이 ‘치욕적인 식민지 분배’에서 특히 미국·독일 및 일본 등 후발 제국주의 국가들은 응당 받아야 할 제 할당을 분여받지 못한 것으로 쉽사리 간주(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쏘련의 국제관계 및 대외정책사: 1870년∼1957년』,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옮김,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1959, 49쪽 참조.)하였으며, 특히 일본은 급기야 조선과 중국 대륙1을 침탈하였다.
  ‘3국 군사동맹’ 추축국 독일의 ‘파리 함락’(1940. 6. 14.)을 확인한 일본제국주의는 ‘대동아 신질서 및 국방국가 건설 방침’(1940. 7. 26.)을 결정, 동북아지역으로 국한한 종래의 ‘동아신질서’ 계획을 ‘대동아공영권’으로 즉각 확대·전환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지속적 관리, 중일전쟁(1937)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서도, ‘전쟁물자 공급원 확보’를 절감한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전략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독일이 선점한 프랑스 상응국으로 선택된 동남아 베트남을 우선 침공(1940. 9. 23.)2한 일본은, 소위 ‘진주만 기습’(1941. 12. 7.)을 도발함으로써 ‘귀축미영鬼畜美英’이라 비칭한 미국·영국 등과의 ‘태평양전쟁’(1941∼1945)에 전면 돌입하는 한편, 곧 베트남으로부터 ‘남진南進’을 단행, 말레이시아(1941. 12. 8.)를 필두로 필리핀·싱가포르·버마 등지를 속속 침공하였다.
  이 지점에서 바로 ‘친일시’가 등장한다. 조선·중국을 망라한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극히 절제된 어조로 노래하고 있는 이광수李光洙(1892∼1950)의 「전망」(『녹기』, 1943. 1.)은, ‘조선문인협회’ 회장에 선임(1939)되고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한 춘원의 어용 ‘신체제문학’의 면모가 고스란히 반영3된 완연한 친일시이다. “남방”과 “여름의 무성”, “구슬 같은 쌀이 열리는 토지, 금이랑 석유가 샘솟는 토지” 등으로 다양하게 표상된 동남아시아 천혜의 비옥하고 풍요로운 이미저리가 특히 인상적인데, 태평양전쟁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후방 공급기지로서의 동남아시아의 전략적 필요를 강조한 일본제국주의의 정치경제적 인식의 본격적인 시적 발현이 아닐 수 없다.
  시인·소설가 박종화朴鍾和(1901∼1981)가 “아세아 동양에는 인도·안남安南(베트남─인용자)·섬라暹羅(태국─인용자) 이외에도 무진장의 보고寶庫가 즐비 (중략) 인구 4억의 노대국老大國 지나支那(중국─인용자)가 있고, ‘능라 5색 비단을 두른 고운 처녀가 금기둥 은기와집에 계수나무를 살라 백옥 같은 쌀밥을 짓는다’는 내지內地(일본 본토─인용자)가 있는가 하면, 하늘 푸르고 물 맑은 금수강산 조선이 있다”(박종화, 「동양은 동양 사람의 것」, 《매일신보》, 1944. 8. 27.)라고 한 것도 전적으로 이와 동궤이다.
  이 시기 중국 동북 만주지역에서는 이른바 ‘현지파 문학’이 출현한다.
  진주만 기습으로 도화된 대미 선전포고를 계기로 일본제국주의가 본격적인 비상전시체제로 전환한 1941년 12월 이래 약 5년간의 한국문학사는 “수치에 찬 ‘암흑기’요, 문학사적으로는 백지로 돌려야 하는 ‘브랑크의 시대’”로 인식(백철, 『조선신문학사조사─현대편』, 백양당, 1949, 399쪽.)되었다. 무엇보다 전시체제 협력문학 외에는 모국어로 발표된 여하한 작품도 ‘검열’을 통과하는 것이 극난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문학사적 암흑의 공백, 특히 시의 빈자리를, “우리 겨레의 문학창작 중심이 조선으로부터 간도로 옮겨지게 되었으며 (중략) 조선반도에서 겨레문학이 시들고 있던 형편”에 출간된 『만주시인집』(박팔양 엮음, 중국 길림시; 제일협회구락부문화부, 1942.), “일제강점기 말의 한국 시문학을 지킨 마지막 교두보”라 할 수 있는 『재만조선시인집』(김조규 엮음, 간도 연길; 예문당, 1942.) 등이 그 문학사적 공극을 상당 부분 메꾸어준다는 논의가 한때 제출된 바 있다(오양호, 『한국현대문학사와 간도』, 일지사, 1988, 19쪽 참조.).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현 지린성 창춘長春)에서 간행된 《만선일보》(1937∼1945)에 여러 장르의 문학작품들이 적잖이 발표4되었다는 점도 이러한 논의를 얼마간 뒷받침한다고 판단했음직하다.
  현하 ‘중국조선족’의 역사적 존재 형성 문제와 관련시킬 때, ‘정책이민 시대’에서 특기해야 할 사항은 일본 관동군 괴뢰정부 만주국(1932. 3. 1.∼1945. 8. 15.)의 성립이다. 1860년대 후반 이래의 조선인 만주 이주 형태가 ‘자발적 이주free migration’와 ‘망명 이민exiled migration’, ‘관리 이주controlled migration’의 복합(황유복, 『중국조선족 사회와 문화의 연구』, 북경: 민족출판사, 1996, 16쪽 참조.)이긴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그것은 기본적으로 ‘유이민’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만주국 출범을 계기로 그 이민 형태가 점차 ‘정주형’으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이들 정주형 이민에게 있어 절체절명적인 것은 어떤 이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논리 그 자체였다. 그것은 곧 ① “호미와 바가지와 피땀 이외에 아모것도 가진 것 없는 ‘간민墾民’ 속에서 자라난 것, (중략) 그 속에서 호흡하고 그 속에서 살찌고 기름진 시혼詩魂이 낳을 수 있는 만주조선인의 문학 (중략) 일망무제의 황막한 고량 밭에서 진흙 구뎅이를 후벼파고 자라난 개척민의 문학”(염상섭, 「서」, 『재만조선인 작품집─싹트는 대지』, 신영철 엮음, 중국 신경: 만선일보사, 1941.), ② “우리를 길러준 어버이요, 사랑하여 안아준 안해” 같은, “꿈에도 못 잊는 우리 고향, 우리 나라”(박팔양, 「서」, 박팔양 엮음, 앞의 책) ‘만주 문학’, ③ “계획과 경륜, 그리고 생활, 이 속에 도의의 나라 만주국”의 문학(김조규, 「편자 서」, 김조규 엮음, 『재만조선시인집』, 앞의 책. 1942)이다.
  ①의 후기에서 신영철이 분명히 언급했듯, 소설집 출간의 한결같은 철칙은 ‘현지주의’5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현재 중국에 머물고 있는 ‘만주 조선인 시문학’의 실체적 기원은 이러한 역사적 토대 위에서 형성되었으며, 그 구체적 상응체는 주로 『만주시인집』(1942), 『재만조선시인집』(1942) 등에 압축되었다고 할 수 있다.6 이 시집들의 주요 필진이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를 중심으로 활동한 데서도 분명한 바이지만, 이 무렵 만주 문단 주류가 그 활동 중심을 서울에 둔 채 잠시 만주에 머문 데 지나지 않은 소위 ‘문화부대’(신영철)가 아니라, ‘현지파’ 시인 윤해영尹海榮·이학성李鶴城·김북원金北原·천청송千靑松, 소설가 김창걸金昌傑·안수길安壽吉·황건黃健·현경준玄卿駿 등이라는 사실은 특히 주목을 요한다. 일단 그 문학적 성취는 차치하고라도, 특히 1940년대 전반기야말로 작품적 실체를 통해 후일 중국 조선민족문학의 이념적 지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관건적 시기인 까닭이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한국 유이민문학의 역사적 전개에 있어 『만주시인집』·『재만조선시인집』의 출현은 향후 ‘중국조선족 시문학’의 실질적 개시를 선언한 하나의 문학사적 사건이라 할 만하다.
  ‘현지파 시인’ 윤해영7의 「오랑캐고개」(1938)를 보기로 하자.

  물개와 좌수坐首의 딸과 함께 살아서
  사람과 같은 물개를 낳고
  물개와 같은 사람이
  사람과 같은 사람을 나서
  그 어른이
  크나큰 중원中原을 통틀어 다스렸다는
  아리숭 아리숭한 이야기가 있다.

  20년 전!
  아버지의 등뒤에 보따리 뒤에
  바가지 두 짝은 방울이 커서
  나는 제법 나귀 등의 귀공자인 양
  고갯길 삼십리에 행복은 철없더니
  그때 그 고개는
  두만강 건너 북간도 이사꾼들의
  아람찬 한숨의 관문이었다.

  10년 전!
  떡 벌어진 두 어깨에
  소곰 서 말이야 무거웠스랴만
  회령會寧 팔십리 황혼에 떠나면
  령마루 풀숲에 식은 땀 씻을 땐
  북두칠성도 기울어져서
  머―ㄴ 마을에 개만 짖어도
  캄캄한 공간에 어른거리는
  부유데기의 환영幻影!

  그때 이 고개는
  밀수꾼 젊은이들의
  공포의 관문이드니─
  오날 이 고개엔
  오색기五色旗 날부ㅅ기고,
  목도꾼 젊은이들의
  노랫소리가 우렁차서
  두만강 나룻터엔 다리가 걸리고
  남쪽으로 연한 길은 넓어져……
  이 봄도 나의 족속들이
  무태이 무태이 이 고개를 넘으리
  한숨도 공포도 다 흘러간 뒤
  다만 희망의 기쁜 노래 부르며 부르며
  무태이 무태이 이 고개를 넘으리. (1938년 4월, 於龍井에서)

─윤해영, 「오랑캐고개」(박팔양 엮음, 앞의 책) 전문

  시인은 먼저 ‘좌수의 딸-물개’ 교합으로 이루어진, 여진족을 통일한 청 태조 누르하치努爾哈赤(1559~1626) 탄생 설화,8 즉 대륙의 저 광막한 중원을 오래도록 통치해온 대청제국 시절의 위용을 1연에 넌지시 전진배치한다. 함경북도의 옛 육진六鎭 지역, 특히 여진족이 군집했던 회령 지방 전래의 ‘건주여진建州女眞 비조설화’에서 취한 것9이니, ‘여진족 시조 탄생설화’ 「청태조」(임석재 채록)이 곧 그것이다. 그 대요는 아래와 같다.

  ① 알목하斡木河(회령의 옛 이름) 두만강 한 마을에 이좌수李座首의 딸이 출가 전 임신을 하였다. 부모의 불호령에 이실직고한즉, 밤이면 물짐승 같은 시커먼 놈이 강간하곤 사라진다는 것이다. ② 바늘을 꿴 명주실꾸리를 그놈 다리에 꽂아 그 행적을 따라가보니, 두만강 건너편 옛성 안 연못이었다. 연못 밑의 수달 몸뚱이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③ 이좌수 딸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눈알과 피부가 누르스름해 ‘누루하치’라 불렀다. 어미가 감춰둔 수달의 시체를 누루하치에게 일러주었다. ④ 이 아이에게 한 풍수風水가, “동해바다 명당바위에 두 개의 뿔이 있다. 내 부모 시체는 오른쪽 뿔에, 네 아비 시체는 왼쪽 뿔에 걸고 오너라” 했으나, 누루하치는 그 반대로 했다. ⑤ 누루하치가 장가들어 3형제를 낳았다. ⑥ 회령 가까이 한 우물에 큰 뱀이 나타나 사람들을 떨게 했다. ⑦ 조선 선조宣祖 때 함경도 첨사僉使 정충신鄭忠信(1576~1636)이 그 우물에 가 보니, 뱀이 아니라 천자검天子劍이었다. ⑧ 누루하치 3형제 중 가장 영특한 셋째가 그 천자검을 지니고 명을 쳐 청태조淸太祖가 되었다.10

  「오랑캐고개」 제1연은 이 「청태조」 설화의 부분적 변용, 즉 이좌수 딸과 ‘수달’의 변형인 ‘물개’와의 ‘인수人獸 교합’이라는 ①, 이좌수 딸이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③의 시적 모티프를 슬쩍 원용함으로써, 이 시가 언뜻 ‘만주족 노래’를 넘어 ‘만주국 송가’라는 착시감을 갖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어쩌면 이 용의주도한 시적 구도는 일찍이 레닌이 혹독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우화적인 표현, 노예적인 언어”11와 동류일지 모른다. 그것은 ‘지배언어’에 대항하기 위해 “정치적인 지적까지도 최대의 주의를 가지고서 ‘암시적인 말’로써, 저 ‘이소프Aesop적인 말’로써, (중략) 검열이 허용하는 형태로써” 독자에게 은밀하게 육박하는 전술적 언어12이며, 「진실을 쓰는 다섯 가지 어려움」(1935)에서 B. 브레히트가 “진실을 유포시킬 수 있는 책략”이라 명명한 독특한 언어 운용 방식이 곧 ‘노예언어’13이다.
  2연에서 시적 퍼스나는 “북간도 이사꾼”으로, 만주유이민의 자식으로 귀공자처럼 나귀 등에 얹혀 “한숨의 관문” 오랑캐령14 30리 길을 넘던 20년 전의 철없던 한때를 아련히 떠올린다. 3연의 청년 화자는 ‘월경이민 시대’ 이래 줄곧 만주유이민의 전형적 이주통로였던 ‘조선 회령─중국 오랑캐고개’ 80리의 고달픈 소금 밀수 행정을 “머―ㄴ 마을에 개만 짖어도/ 캄캄한 공간에 어른거리는/ 부유데기”에 직결하였다. 걸핏하면 재만 조선인을 엄혹하게 압박한 중국 관헌 ‘부유데기’15의 방자한 행태를 강력히 암유한 것이다.
  “두만강 나룻터엔 다리가 걸리고”에서 짐짓 드러냈듯, 제4연의 시적 상황은 만주국(1932∼1945) 시대이다. 그런데 미구의 새 나라를 꿈꾸듯 시적 퍼스나는 단재丹齋의 ‘만주영토론’을 강하게 환기할 요량이었던가. 이젠 관북인의 좁다란 만주행로였던 ‘함경북도 회령─중국 싼허’뿐 아니라, 조선 13도 각처에서 고향을 등지고 새로 뚫린 직통 철로16로 “무태이 무태이”(뭉탱이뭉탱이) 무리 지어 북방을 향하는 만주유이민의 집단적 형상을 시인은 명료히 아로새긴다. 그것은 옛 고구려·발해로의 새로운 대규모 민족 이산, 겨레의 장엄한 엑소더스적 회귀 같은 것이다.17
  그런데 4연의 “오색기 날부ㅅ기고”는 단연 돌출적이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만주국 오색기’의 양양하게 강포한 이미지를 드러내지만, 이면적으로는 ‘오족공화五族共和’를 주창한 중화민국 북양정부北洋政府(1912∼1928)의 ‘오색기’, 대한제국大韓帝國(1897~1910)의 ‘오색기’, 멀게는 저 고구려 오족五族의 표표한 깃발 등의 혼종적 표상으로도 작용한다.18 그야말로 해석의 혼란을 극대화하는 고도한 시적 책략19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탈출, 고토로 복귀하는 “나의 족속들”에게 ‘오랑캐고개’는 더 이상 ‘한숨과 공포의 관문’이기는커녕 차라리 ‘희망과 기쁨’의 험령이다.

  풀 한 포기 돋지 못한 분묘의 언덕엔
  뼈만 남은 고목 한 그루
  깊은 가난 속에 파묻힌 초가 지붕들
  창문은 우묵우묵 안으로만 파고 들었다

  여기는 유랑의 정착촌
  쫓겨온 이민부락

  누구를 막으려
  무엇을 경계하여
  토성을 두세 길 쌓고도 모자라
  숨은 참호까지 깊이 팠느냐

  아, 한 많은 세상살이
  허리는 굽었지만
  마음이야 굽어들손가
  마을은 침묵으로 외면하고 있는 한낮

  오늘도 또 한 삶의 ‘통비분자通匪分子
  묶이어 성문 밖을 나오는데
  “왕도낙토王道樂土” 찢어진 포스타가
  바람에 상장喪章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1941. 8; 老土溝에서)

─김조규20, 「찢어진 포스타가 바람에 날리는 풍경」(1941)21 부분

  지린성 룽징현 근교의 한 조선유이민 “정착촌”22의 살풍경을 차갑게 묘파하고 있다. 3연 마지막 2행 “‘왕도낙토王道樂土’ 찢어진 포스타가/ 바람에 상장喪章처럼 펄럭이고 있었다”에서, 만주국의 허상에 대한 시인의 눈초리가 무척 예리하다. 만주국 치하 조선인의 “한 많은 세상살이”, 구차한 움집 살림, 전쟁을 방불케 하는 “참호” 속 생활, 항일게릴라 내통자의 피체 장면 등이 잘 합성된 음울한 삽화 같은 시편이다. 이 ‘정착촌’은 만주국 정부가 추진한 ‘집단부락정책’ 및 ‘안전농촌정책’의 산물, 즉 “일제가 정치 면에서 항일운동을 탄압하고 조선족 인민들과 항일부대와의 혈연적인 연계를 단절시키며, 경제 면에서는 ‘반일적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선족 빈고농민을 ‘안무’한다는 미명 밑에 일본 독점자본에 예속시키는 구체적인 통치정책”, 특히 ‘집단부락정책’23의 후과였다.
  만주국의 집단부락정책 추진 상황은 어떠했는가. 1933년부터 이미 만주국은 “연변항일유격지의 주변지역과 산간지구의 산재호散在戶들을 강제이주시켜 집단부락’을 세우고 유격구를 ‘무인지대’로 만들었다. 처음에는 조선총독부의 지령에 좇아 ‘동척’에서 투자하여 (중략) ‘집단부락’을 세우고 조선족 농민들을 ‘수용’하였다. 1934년, 괴뢰만주국정부에서 일본관동군의 사촉 하에 ‘집단부락’ 건설에 관한 통령을 반포, (중략) 1935년의 통계에 따르면, 연변 각 지방에 건립된 ‘집단부락’은 144개이고, (조선족 농민─인용자) 1만 2,362세대를 ‘수용’하였다.”24

  일제는 항일무장역량과 광범한 인민군 중간의 혈육적 관계를 끊어버리기 위하여 이른바 ‘비적과 백성 분리공작’을 진행 (중략) 항일무장력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경제적으로 봉쇄하려 시도하였다. 1934년 12월 3일에 괴뢰만주국 정부는 ‘집단부락’을 만드는 정책을 전면적으로 실시 (중략) 1939년에 이르러 동북에 설치된 ‘집단부락’은 도합 1만 3,451개에 달하였다. (중략) 집단부락은 높은 담벽과 철사망으로 둘러쌓여 있었고, 포대마다에는 경찰이나 자위단이 지키고 있었다. 출입할 때에는 등록해야 했고, 나가서 일하는 것마저 감시를 받아야 했다. (중략) 적지않은 주민들이 헐망한 오막살이집이거나 움집에서 살다보니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려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에 걸려 죽군 하였다. (중략) ‘집단부락’에서의 파쑈통치도 몹시 혹심하였다. 부락 복판에 군경파출소나 촌공소를 짓고 백성들의 일거일동을 감시 (중략) 전 동북적으로 집단부락정책의 재난을 입은 백성이 무려 500만 명에 달했는바, 이는 당시 동북 총 인구의 10%에 상당하였다.(김기봉 외, 『일본 제국주의의 동북침략사』, 앞의 책, 188∼190쪽 참조.)

  ‘집단부락’에 감금되다시피 한 조선유이민의 참혹한 생활상이 한눈에 선연한데, 예컨대 1943년 입만한, 젠다오성 허룽현和龍縣 숭선향崇善鄕의 ‘조선인 개척단’ 부락민의 그것은 더더욱 끔찍하다.

  위만 시기 숭선촌崇善村에는 8개 툰(작은 마을─인용자), 8개 ‘조선인 개척단’ 부락이 있었는데, 호수는 약 1,700호였고, 인구는 8,000명 좌우에 달하였다. 당시 촌 소재지였던 숭선툰에는 위만 말단 통치기구인 ‘촌 공소, 협화회 분회, 경찰서, 무장 자위단’ 등이 둥지를 틀고 있었고, 이밖에 ‘세관, 전매 분국’ 등이 백여 개 있었다. 이와 함께 ‘조선총독부’의 직할인 ‘조선인 개척단’ 본부가 ‘동경 부락’에 발톱을 박고 앉아 있었다. (중략) 위만 최하층 소관리와 경찰, 주구, 그리고 자위단 간부 및 일제의 ‘개척단’ 직원과 당지의 지주, 부농 등 이런 물건짝들을 다 쳐도 70여 명밖에 안 되었다. (중략) ‘조선인 개척단’은 본부를 ‘동경 마을’에 두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조선총독부’에서 내주는 월급을 타먹는 단장, 지도원, 치안원, 평사원 등 10여 명의 직원이 있었고, ‘8개 개척단 부락’마다에는 정·부 부락장이 있었다. 당시 이 개척단은 ‘이민’들에 대하여 생산, 행정권만 행사하였을 뿐 아니라 유치장까지 단독으로 설치하고 사법권도 행사 (중략) 농민들은 이런 개척단에서 집체 머슴살이 (중략) 해방될 때까지 3년 동안 곤봉과 주먹, 그리고 구둣발에 의하여 1년 사시절 노예노동을 하면서 깡치 나도록 착취당하였다. 별을 보고 나가서 달을 이고 돌아오며 (중략) 매년 가을이면 어린애 첫돌을 위하여 남겨둔 기장쌀 한사발까지도 다 걷어가며 싹싹 쓸어 ‘출하’를 바치고 나면 ‘가을이자 보리고개’로 되었다. (명진, 「숭선 인민공사의 과거와 오늘」, 『연변』, 1963. 7, 17~18쪽.)

  이로 미루어, 위의 시 제2연의 “정착촌”은 재만 조선인 밀집 지역 젠다오성25의 ‘집단수용소’나 다름없는 전형적인 폐쇄공간이며, 「찢어진 포스타가 바람에 날리는 풍경」(1941)은 그 묘지 같은 ‘이민부락’의 황폐를 가감 없이 형상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6. 결론을 대신하여

  일제강점기 만주유이민의 ‘정주형 이민화’ 현상이 공고화되면서 그 사회경제적 기반은 ‘태평양전쟁’의 일제 패퇴(1945. 8. 15.)에도 별반 동요하지 않을 만큼 굳건한 것으로 되었다. 이때 중국대륙은 장제스蔣介石(1887∼1975) 국민당 정부군과 마오쩌뚱毛澤東(1893∼1976) 공산당 정부군 간의 4년여의 ‘제3차 국내 혁명전쟁시기’(1945. 8. 15∼1949. 10. 1.)에 돌입했지만, 중국 조선민족 사회의 역사적 토대는 대체로 건재했던 것이다.
  1945년 6월 1일 현재 만주유이민(재만 동포) 총수는 216만 3,115명이었다. 통계수치가 다소 유동적이긴 하지만, 일본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자 80여만 명이 귀국, 1947년 5월경 만주 ‘잔류동포’는 140만 명쯤으로 추산되고 있다.(김승식 엮음, 『조선년감』, 1948, 조선통신사, 350~356쪽 참조.)

  ① “해방된 조국으로, 선조가 살던 조국으로!” 하고 귀국을 하였으나, 한겨울 추위와 굶주림에 견디다 못하여 그들은 다시 만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 (중략) 이 봄을 맞이하면서 38도선 이북의 만주귀환 농민은 벌써 가서 농지를 경작하는 중에 있으며, 38선 이남의 만주농민 귀환자들도 매일같이 38선을 돌파하여 무리를 지어 북으로 북으로 떠나간다고 한다. 만주 동삼성東三省은 100만 이상의 조선농민이 개척한 기름진 땅, (중략) 만주 당국은 우리 농민을 오히려 환영 (중략) 이 소식을 접한 만주귀농 농민은 속속 (만주로─인용자) 출발한다고 한다. (「왜 도로 가지 않으면 안되나─만주전재민의 재도만자再渡滿者 일증日增」, 《조선인민보》, 1946. 5. 11.)

  ② 국민군이 진주한 지대는 봉천·안동·신경·사평四平 등인데, 여기에는 약 16만의 동포가 있다. 그중 3만 내지 5만은 귀국을 희망하고 있으나 대부분은 동북에서 살겠다고 한다.(「재만동포의 귀국문제」, 《독립신보》, 1946. 12. 17.)26

  ③ 재만동포들은 될 수 있으면 현지에 잔류할 의사인 듯하고, 또는 고혈膏血로 개척한 땅을 최후까지 고수하고 생존권을 확보함이 필요할 것이다. (「재만동포 원호책 성안成案」, 《한성일보》, 1947. 3. 13.)

  ④ 해방후 만주로부터 80만의 동포가 귀환하였으나, 아직도 130만의 동포가 여전히 거주하고 있다. 8월말 현재 중앙군지구 내 88,488인(17,821호)을 제외하면, 대개 중공군지구 내에서 비교적 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재만동포 생도生途 막연―동북교포 국내파견단 호소」, 《한성일보》, 1947. 9. 28.)27

  위에 몇몇 사례를 인용했지만, 해방 직후 주요 신문의 만주지역 귀향 유이민 관련기사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① “지역적으로 전 만주의 8할 이상을 점거”했던 마오쩌뚱의 중공군 점령지구(김승식 편,『조선년감』, 앞의 책, 354쪽) 산하의 만주유이민 대다수는 현지에 그대로 머물렀다는 것, ② 장제스 중앙정부군 산하의 재만동포들은 대부분 귀환28했지만 원래 그들 역시 잔류의사가 강했다는 것, ③ 상당수의 ‘귀향 유이민’이 재도만再渡滿했다는 것 등이다.
  김소월·박우천·이설주·이용악·서정주·유치환·백석·윤해영·김조규 등의 작품을 통해 일제강점기 한국 현대시의 ‘만주 인식’ 양상을 위에서 간략히 검토하였다. ‘월경이민 시대’(1868~1905)의 주된 시적 양식은 단연 ‘민요’였다. ‘망명·유랑이민 시대’(1905~1931) 시편은 주로 ‘만주생활의 고통’을 애절하게 노래했으니, 소월의 「나무리벌 노래」(1924)가 대표적이다. ‘정책이민 시대’(1931~1945)는 ‘만주사변(1931), 만주국 건국(1932), 중일전쟁(1937), 대동아 신질서 건설(1940), 태평양전쟁(1941∼1945)’ 등으로 이어지는 사실상 전쟁 상황의 연속이었다. ‘문화부대’ 일원으로 만주에 잠시 체류한 서정주는 ‘미개한 만주’만을 바라보는 천박한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노정하였으며, 유치환은 ‘민족시─친일시’ 사이를 기묘하게 넘나들었다. 박우천·이설주·윤해영·김조규 등은 만주유이민의 다양한 피압박 현실을 리얼하게 형상한 실사구시적 시인이었다. 여기서, 오늘의 ‘중국조선족 시문학’의 실질적 선구는 ‘현지파’ 윤해영의 「오랑캐고개」(1938), 김조규의 「찢어진 포스타가 바람에 날리는 풍경」(1941) 등이라 할 수 있다.
  한족 및 신장 위그루족, 티베트 시짱족, 옌볜 조선족 등 55개 소수민족(총 56개 민족)으로 구성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1949. 10. 1) 이래, ‘중국조선족문학’의 역사적 전개는 실로 험난하였다. 위그루족·시짱족 등과 달리, ‘중국조선족’은 ‘천입遷入·과경跨境 민족’으로서의 원천적 한계성에다, ‘소수민족 우대정책의 외피, 대한족주의의 실질적 관철’이라는 중국의 정책 기조에 줄곧 시달렸던 것이다. 이 양면적인 소수민족정책은 ‘사회주의 정치─자본주의 경제’ 국가시스템 전환의 주요 계기로 된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의 ‘개혁개방’(1978)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1994년 ‘북한 핵문제’가 동북아 정세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고, 2000년대 들어 특히 이 ‘북한 변수’가 한층 심중해지면서 연변지역, 즉 “고국을 가진 조선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한반도 변경’은 새로운 민감지역”으로 대두(이희옥,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현황과 참여기관 실태」, 이개석 외, 『중국의 동북공정과 중화주의』, 고구려연구재단, 2005, 102∼103쪽 참조)되었다. 게다가 당시 한중 간의 정치현안으로까지 된 ‘동북공정東北工程29은 중국조선족의 존재를 더욱 복잡화하기에 충분하다.
  동북공정이란 오늘의 “한반도 현상유지가 중국의 국가이익에 부합된다는 인식” 아래 진행되는,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한 영토획정과 관련한 정밀한 국가전략”(이희옥, 앞의 글, 85∼107쪽 참조)이다. 말하자면, ‘한중수교’(1992)를 계기로 급격히 증대된 양국 간의 경제·사회·문화적 교류 및 소위 ‘탈북자’ 증가 등으로 크게 동요하고 있는 동북지방 조선민족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중국 당국의 강력한 정책적 고려의 산물(이개석, 앞의 글, 25쪽 참조.), 나아가 남북통일 후 한반도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진행되는 중국정부급 대형프로젝트이다.
  현 중국조선족은 일제강점기 만주지역 한국 유이민의 후예로서 신분·국가·국체國體적 대전변을 겪은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그들에 헤쳐온 험난한 정치적 파고, 예컨대 ‘항일전쟁, 8·15해방, 토지개혁(1945. 9.∼1948. 4. 22.), 3차 국내혁명전쟁(1945. 8.∼1949. 9), 중화인민공화국 창건(1949. 10. 1.),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1950. 10. 19.∼1958. 10. 24.)’, ‘연변조선민족자치구’(1952. 9. 3.) 출범과 ‘연변조선족자치주’(1955. 12. 20.)로의 축소 개칭, ‘반우파투쟁(1955∼1957), 문화대혁명(1966∼1976)’, 그리고 ‘개혁개방 및 현대화 건설’(1978. 10.) 등이 그것이다.
  중국조선족 시문학의 주요 궤적은 당대의 핵심적 현안들을 예민하게 반영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그것은 특정 정치체제의 이념노선을 보위하는 아지프로물로 떨어지는 시적 결함을 쉽게 노정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이후 중국조선족문학의 사적 전개는 중국정치투쟁사의 단순 반영 그 자체라고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니다.
  ‘반우파투쟁 시기’ 중국조선족 문학은, 1957년 마오쩌둥의 ‘예술상 백화제방,학술상 백가쟁명’ 선언에도 불구하고, 예컨대 1930년대 연변 조선인민들의 항일투쟁을 뛰어나게 형상한 김학철金學鐵(1916~2001)의 『해란강아, 말하라』까지도 “반당활동을 진행한 ‘독사’로, 수정주의 문예리론의 ‘뿌리’로 판결 (중략) 계급투쟁을 지나치게 확대함과 아울러 예술발전의 특수법칙을 홀시하면서 예술민주와 창작자유를 마구 부정”한 것으로 탄핵하였다. 또한, 조선민족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한 작품들은 ‘지방민족주의’(1959)로 가차없이 낙인하였다.30
  『해란강아, 말하라』는 “‘9·18’ 사변, 추수춘황투쟁(1931∼1932년─인용자), 일제의 야만적 토벌, 항일무장투쟁 같은 중대한 력사적 사건들을 연변의 한 농촌마을 ‘버드나무골’ 농민들의 구체적인 생활투쟁 속에서 생동하게 형상화”한 장편소설이다.31 그러함에도 한 조선족 논자는, 김학철이야말로 “작가 개인의 천재가 명작을 창작한다고 하면서 인민군중의 집체적 력량을 무시하고 개인의 력량을 극단적으로 과장 선전 (중략) 늘 입버릇처럼 ‘창작 자유’론, ‘개성 해방’론 등 기괴망칙한 주장들을 절규”한 반동이라 규탄했다.32 또한 김학철의 단편소설 「서리」(1957. 5.)도 “반동적인 자산계급 민족우월론을 산포”함으로써 “민족형식, 민족풍격을 부적당하게 강조하고 절대화하며 사회주의 내용을 부인 (중략) 지방민족주의 사상을 고취”한 작품으로 쉽사리 간주되었다.33
  마오쩌둥의 ‘예술상 백화제방,학술상 백가쟁명’(‘쌍백방침雙百方針’) 논의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할 문제에 관하여」(1957. 2. 27.)에서 제기됐는바 그 핵심은, ① ‘소수민족문제’의 관건은 “대한족주의를 극복하는 데 있다. 동시에 지방민족주의가 있는 소수민족 가운데서는 지방민족주의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 ② ‘백화제방, 백가쟁명’ 방침은 “예술의 발전과 과학의 진보를 촉진하는 방침이며, 우리나라 사회주의 문화의 번영을 촉진하는 방침이다. 예술상의 각이한 형식과 풍격은 자유로이 발전할 수 있으며, 과학상의 각이한 학파는 자유로이 논쟁할 수 있다.”34는 것, 이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러나, 소위 ‘문화대혁명’의 역사적 격동 속에서 조선족 지식인·문인 들이 겪은 참화는 또 어떠하였는가.

  계급대오를 정리하는 운동 가운데 붙잡혀나온 ‘계급의 적’들은 연변에만 수만 명이나 되고, ‘운동’ 가운데서 맞아죽은 사람, 불구로 된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이 무려 2천 명이나 되었으며, 안도현安圖縣 만보공사만 해도 붙잡혀나온 ‘계급의 적’이 264명이나 되었는데, 그중 29명이 심사과정에서 맞아죽었다. (중략) 특히 조선족 간부는 거의 다 ‘외국 간첩’이 아니면 ‘특무’로 몰리었다. (최삼룡, 「21세기를 지향하는 민족지성인의 마음가짐」, 『중국조선족공동체연구』, 2000, 137쪽.)

  총괄컨대,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 ‘건국 후 17년’(1949∼1966)의 문학을 사실상의 “보은문학”으로, ‘1966∼1978년 시기의 문학’을 “정치설교문학”이라 각각 통칭35한 것은 그러므로 매우 적실하다.
  오늘날 중국조선족은 ‘한민족’이라는 기본틀은 유지하되 “중국 공민公民으로서의 ‘조선족’이라는 입지”는 견지하면서 특정의 지역·정치이념·문화가치 및 민족주의 등의 협애성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궁극적으로는 한민족 공동발전을 지향하는 ‘한민족네트워크’ 형성의 주도적 역할자, 특히 “남북문화교류에 있어서 중개자”(허명철, 「네트워크시대의 중국조선족문화」,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2001, 501∼511쪽 참조.), 더 나아가 2000년대 들어서는 남북통일의 적극적 균형자를 자임(김강일, 「남북통일에 있어서 중국조선족사회의 역할」,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 『중국조선족사회의 문화우세와 발전전략』위의 책, 436∼450쪽 참조.)하기에 이르렀다. 현하 중국 조선민족사회의 이러한 정치문화적 중요성을 유념할 때, 오늘의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한 한층 깊이 있는 논의가 활발히 후속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문학의 원심적 확장으로서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위상이 바르게 정립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주석

  1. 특히 만주는 “중국의 최대의 경제적 지대의 하나였다. 석유 채취량의 약 93퍼센트, 철도의 약 41퍼센트가 만주의 몫이었다. 중국의 대외 무역액에서 이 지역의 비중은 37퍼센트에 달하였다. 중국 동북지역은 쏘련, 몽고인민공화국 및 중국 중앙지대를 반대하는 일본의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서 극히 거대한 전략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공산당중앙위원회, 『쏘련의 국제관계 및 대외정책사: 1870년~1957년』, 224쪽.
  2. 일본제국주의자들은 ‘대동아공영권’ 실현의 지대한 경제군사적 요충인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을, 태평양전쟁 수행에 있어서 “북으로는 중국, 동남으로는 비율빈과 인도네시아, 서남으로는 말라이, 서쪽으로는 타이와 버마를 거쳐 인도를 침략할 수 있는 중요 전략 기지로 간주하였다.” 유일범 엮음, 『동남아세아 인민들의 민족해방 투쟁』,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64, 30~31쪽 참조.
  3. 1938년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의 《만선일보》 고문,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재임하다 1942년 귀국한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중일전쟁(1937)이 후진국 중국을 “진실로 응징을 위함이요 각성시키기 위함임이 분명한 사실이어니와 (중략) 문물에 축인 사랑의 채쭉, 살에 쓰라리기는 하겠지마는 그 장야(長夜)의 혼몽(昏夢)을 깨침에는 이것이 도리어 친절이요 지정(至情)”이라 했다. 최남선, 「사변(事變)과 교육」 ; 신영철 엮음, 『만주조선문예선』, 중국 신경; 조선문예사, 1941, 79∼80쪽 참조.
  4. 이상범·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엮음, 『‘만선일보’ 문학관계 기사 색인: 1939. 12∼1942. 10』(1995). 장르별 수록 작가에 한정하더라도, 시(한죽송·최수복·함형수·이수형·이학성·윤해영·정지용·이해문·김달진·장만영·유치환·조연현·허이복·허민·김경린 등, 해방 후 입북한 박우천·김조규·조학래·한명천·김북원·천청송·강승한·이호남 등), 소설(김영팔·현경준·박영준·김창걸·황건·안수길·이효석·윤백남 등), 아동문학(최순애·남대우·서덕출·윤복진·신고송·김태오·강소천·윤극영·목일신·임춘길·박영종·손소희·윤석중·채택룡 등), 평론(백석·박팔양·함형수·김우철·김경린·이수형 등), 수필(백석·김조규·신영철·이광수·김우철·박팔양·인정식·김한주·김조규·김종한·오장환·이기영·안회남·채만식 등) 들이 망라되고 있다. 백석은 영국 작가 키플링(J. R. Kipling; 1865∼1936)의 단편소설 「리스페스」(3회; 1940. 12. 24.~1940. 12. 26.)와 「헛 새벽」(6회; 1940. 12. 27.~1941. 1. 9.)을 번역·소개하였다. 정지용·윤석중·최순애·박영종(박목월) 등 일부 국내 거류자를 제외한다 해도, 《만선일보》(1937∼1945) 발간 전 기간에 걸친 작품 발표 문인은 위 숫자를 훨씬 상회할 것이다. 《만선일보》(1939. 10~1940. 12 및 1941. 1~1942. 12)를 통해 발표한 시인만 하더라도 줄잡아 100여 명에 달한다. 장영미·김강 엮음, 『’한국근대문학과 중국’ 자료총서 6-시II』(역락, 2021), 172~604쪽 참조.
  5. 신영철은 이를 “현지 거주인의, 현지 취재의, 현지 작품으로서, 현지 발표를 중심”이라는 표현으로 집약했다. 신영철, 「‘싹트는 대지’ 뒤에」, 신영철 엮음, 『재만조선인 작품집─싹트는 대지』, 1941, 3쪽 참조.
  6. 소설적 성과는 『싹트는 대지』(1941)이다. 이에 덧붙여, 만주국 출범 이듬해인 1933년 11월, 룽징(龍井)에서 리주복·강경애·윤영춘·천청송·안수길·박영준·박화성·박계주·김규은 등을 주축으로 발족된 ‘북향회(北鄕會)’ 기관지 『북향』(총 4호 발간: 1935. 10.∼1936. 8.)의 존재는 더없이 귀중하다. 권철, 「‘북향회’의 전말」, 『일송정』 제2기(룡정시 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연길; 연변교육출판사, 2001), 346∼357쪽 참조.; 姜致鉉, 「룽징시 조선족 문화활동(龍井市鮮鮮族文化活動)」, 金钟国·金昌浩·金山德 編, 『중국 조선족 문화활동(中國朝鮮族文化活動)』(北京; 民族出版社, 1993), 165~166쪽 참조.
  7. 윤해영(尹海榮; 1909∼1956?): 함경북도 함흥 출생. 1930년대 젠다오성(間島省) 룽징현(龍井縣)에 거류, 1940년대 초∼1946년 6월까지 무단장성(牡丹江省) 닝안현(寧安縣)에 거주하였다. 부인과 함께 닝안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바 있으며, 이직 후 윤해영은 ‘닝안현 협화회 홍보과’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해방 후 1946년 상반기까지 신문 《인민신보》, 잡지 『건설』·『효종』 등에 시와 산문 20여 편을 발표하였다. 1946년 7월 투먼(圖們)을 거쳐, 1946년 말 북한으로 귀환, ‘토지분여 농민의 희열’을 노래한 가사(1947)를 발표하기도 했다. 권철, 「‘용정의 노래’의 작사자 윤해영과 그의 광복전 시작」, 『광복전 중국 조선민족문학 연구』, 서울: 한국문화사, 1999, 358∼374쪽 참조. ; 리춘일 주편, 『일송정』 창간호(룡정시 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편인, 1999), 15~16쪽 참조. ; 그의 시편은, 가사 〈룡정의 노래〉(1932; 조두남 개제·개사곡, 일명 〈선구자〉: 1943∼1944), 가사 〈동북인민행진곡〉(《인민신보》, 1945. 11. 11.), 민요 〈滿洲 아리랑〉(『在滿朝鮮人通信』, 1936. 11.), 〈아리랑 滿洲〉(《만선일보》, 1941. 1. 1.), 『만주시인집』(1942) 수록시 「오랑캐고개」(1938)·「海蘭江」(1938)·「渤海古址」(1941)·「四季」(1941), 시조 「拓土記」(『半島詞話와 樂土滿洲』, 1943.), 「樂土滿洲」(『半島詞話와 樂土滿洲』, 1943) 등 9편이다. 권철, 앞의 책 『광복전 중국 조선민족문학 연구』, 서울: 한국문화사, 1999 ; 김영수, 『몽상의 시인 윤해영』, 우신출판사, 2006 ; 최삼룡 엮음, 「재만조선인 친일문학 작품집』, 서울; 보고사, 2008 참조. ; ‘목단강시민주동맹’(1945. 9.)의 후원 아래, ‘위원장 시인 김례삼(金禮三), 총무·문학·음악·미술·연극(5개) 분과, 50명 회원’으로 발족한 ‘동북신흥예술협회’(1946. 3. 17.)는 《인민신보》를 통해 마오쩌뚱(毛澤東)의 「在延安文藝座談會上的講話」(1942. 5.) 전문을 번역·소개하는가 하면, ‘중국공산당 문예 방침, 신민주주의 문화’ 등을 적극 선전하였다. 윤해영은 ‘동북신흥예술협회’ 일원으로 ‘목단강시 조선민족해방동맹 선전부’를 통해 가사 〈悼念東北自治軍的英靈〉, 〈工人和農民〉, 수필 「蓖麻油灯下」·「淸明時節」·「海林頌」 등을, ‘목단강시민주동맹’ 기관지 『建設』(1946. 5.∼1947. 3.)에 시조(‘귀농문학’) 「早春情景」을 발표하였다. 金钟国·金昌浩·金山德 엮음, 『中國朝鮮族文化活動』, 앞의 책, 1993, 31~33쪽, 42∼43쪽 참조. “특히 ‘토지개혁, 인민해방전쟁 승리’를 구가한 윤해영의 「동북인민행진곡」(1945. 11)은 당시 인민들에게 널리 회자되었다.” 王保臨 主編, 『中國少數民族現代文學』, 廣西新華書店, 1989, 70쪽 참조. “조선민족의 전투적 격정을 노래한 윤해영의 「동북인민행진곡」·「東北人民自治軍頌歌」은 당시 인민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 가요(가사)였다.” 徐基述 主編, 『黑龍江朝鮮民族』, 黑龍江朝鮮民族出版社, 1988, 185쪽 참조. 「동북인민행진곡」은 중국공산당 영도 아래 “단결일심, 선열의 유지 계승, 민족해방 쟁취 분투, ‘신동북 건설’ 열정의 고양과 지향” 등으로, 조선민족 군민들에게 광범히 전송되었다.“ 孫春日 主編, 『中國朝鮮族社會文化發展史』, 延邊敎育出版社, 2002, 229~230쪽 참조. ”북한으로 귀환(1946. 7.)한 윤해영(1909∼1956-1957; 함북 회령 생)은 북한 토지개혁 예찬 시 「분여받은 땅」 발표, 1956년(또는 1957년) 사망하였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엮음, 『친일문제연구총서 인명편 2(ㅂ∼ㅇ)─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713∼715쪽 참조.
  8. 이 ‘여진족 시조 탄생설화’를 “몽고 건국 설화와 연루된 문맥”이라 그릇 파악한 오양호는, “황량한 대륙을 무대로 살아온 만주족에게는 물은 외경의 대상이다. 그런 물에서 사는 물개와 사람 사이에서 누르하치 같은 그들의 영웅”이 태어났다고 본다. 요컨대, 「오랑캐고개」가 ‘친일시’라는 것이다. 오양호, 『일제 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연구』(문예출판사, 1996), 126쪽. ; 최삼룡은 이 작품이 “만주족의 시조전설을 감개무량하게 회고”한 “친만, 친일시”라 확정하였다. 최삼룡, 앞의 책, 51쪽. 제1연의 ‘청태조 누르하치 탄생설화’ 삽입으로 「오랑캐고개」를 친일시라 단정하는 것은 작품 해석의 오류이다. 이 작품은 단지 ① 청나라 시대상황(제1연)을 먼저 제시하고, 조선인이 처한 정황을 ② 중화민국 시대(2∼3연), ③ 만주국 시대(4연) 등 3단계로 전개하고 있을 뿐이다. 제4연의 “나의 족속”은 만주족 후대가 아니라 ‘조선인’이다.
  9. 조선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 1383~1453)는 여진족의 침공에 대비해 두만강 하류 남안에 육진(六鎭; 종성·온성·회령·경흥·부령·경원 등지)을 개척했다. 이재욱(李在郁)은 육진 산간지방에 산재한 여진 유민(女眞遺民) 재가승(在家僧) 규모가 1935년 현재 ‘총 563호, 3,323명’이라 했는데, 그 절반 이상(292호; 1,974명)이 ‘회령’에 집중되었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재욱, 「재가승만고(在家僧漫考)」, 《동아일보》, 1935. 11. 30.~1935. 12. 7. 참조.
  10. 「청태조」(구술자: 김성덕, 함경북도 경원군 경원면, 73세 남/ 1983년 7월 3일; 채록자 임석재), 임석재, 『임석재 전집 4: 한국구전설화─함경북도 편, 함경남도 편, 강원도 편』, 평민사, 1989, 34~40쪽 참조.
  11. 레닌, 「당 단체와 당적 문학」(1905), 『문화와 예술에 대하여』, 모쓰크바: 외국문서적출판사, 1958, 50~58쪽 참조.
  12. 레닌,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의 제국주의」, 『레닌 저작선집』 제1권 제2분책, 모쓰크바: 외국문서적출판사, 1952, 503~504쪽 참조.
  13. 김숙희, 「노예언어와 지배언어─독일 제3제국의 언어」, 『오늘의 책』, 1984년 가을호, 한길사, 1984, 217~218쪽 참조.
  14. 이용악의 시 「낡은 집」(1938)에도 등장하는 ‘오랑캐령’(‘오랑캐고개’)은, 함경북도 회령 건너편, 중국 ‘싼허진(三合鎭)─룽징현’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외외한 준령 천불지산(天佛指山; 원명 ‘천불붙이’, 높이 1,265미터)의 한 고개이다. 김동환(金東煥)의 서사시 『국경의 밤』(한성도서주식회사, 1925)의 여주인공 ‘순이’는 두만강 연안 회령의 “여진(女眞)의 유족(遺族)”(76쪽) 재가승(在家僧)의 딸이다. 옛적 고구려 군사가 그들 여진족 집거지를 침범하자 장정들은 곧 전선에 뛰어들고, 남은 아녀자들이 남정네들의 생환을 갈원하는 대목을 아래에 인용한다. “냇가에 칠성단을 묻고 밤마다 빌었다, 하늘에/ 무사히 살아오라고! 싸홈에 이기라고!/ 그러나 그 이듬해 가을엔 슬픈 기별이 왔었다,/ 싸홈에 나갔던 군사는 모조리 패해서 모다는 죽고 더러는 강을/ 건너 오랑캐령으로 달아나고,/ ─사랑하던 여자와 말과 석부(石斧)와, 석동소(石銅簫)를 내버리고서.”(74쪽).
  15. 김학철에 의하면, ‘부유데기’란 “부이연 회색 군복을 입었다고 하여, 농민들은 로(老) 중화민국(1912∼1931년 간의 중국─인용자)의 ‘보안부대’를 이렇게 불렀다” 한다. 김학철, 『해란강아, 말하라 1』, 연길; 연변교육출판사, 1954, 192쪽.
  16. ‘조선 함경북도─중국’ 간 철도는, ‘온성군 상삼봉역(上三峰驛)─룽징현 카이산툰(開山屯) 조양천역(朝陽川驛)’을 연결하는 ‘조개선(朝開線)’은 1933년 8월, ‘온성군 남양역(南陽驛)─투먼(圖們)’을 잇는 ‘도문선(圖們線)’은 1933년 10월에 각각 개통되었다.
  17. “저― 언덕 밭가는 농부/ 그 시절 백성인 듯!/ 멍에 멘 소잔등에/ 태고가 어리우다.”(윤해영, 「渤海古址」, 1941. 5, 박팔양 엮음, 앞의 책)에서 분명하듯, 시인은 ‘재만 조선농민’을 옛 ‘발해 백성’과 동일시하고 있다. 윤해영의 강렬한 ‘고토회복 의식’의 시적 발현이 아닐 수 없다.
  18. 중화민국(1912) ‘오족공화(五族共和)’의 ‘오족’은 ‘한족·만주족·몽고족·회족·티베트족’이며, 고구려 ‘오족’은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屢部)’이다. 김영수에 의하면, 「오랑캐고개」에서 “오색기가 ‘오족협화’의 문맥에서는 만주국의 국기일 것이고, 중화민국 성립(1912년) 이후 국민정부 성립(1928년) 때까지의 ‘오족공화’의 문맥에서는 중화민국의 국기일 것이며, 고구려 오족과 아리랑 오색족인 ‘나의 족속들’의 문맥에서는 모든 행사와 전투의 선두를 이끄는 의장기이다.” 김영수, 『몽상의 시인 윤해영』, 대구: 우신출판사, 2006, 73쪽.
  19. 윤해영은 「오랑캐고개」·「낙토 만주」에 ‘오색기’를, 〈만주 아리랑〉(1936)·〈아리랑 만주〉(1941)엔 ‘오족’을 전술적으로 배치한다. 〈아리랑 만주〉·「낙토 만주」는 ‘흥안령, 송화강’ 등의 지정학적 아펠레이션을 적극 활용하는가 하면, 그 제목에 ‘만주, 낙토’ 등을 아예 의도적으로 전면에 명시하기까지 한다. 특히 「낙토만주」를 관류하는 시적 어조가 은근히 반어적이라는 사실을 명념할 필요가 있다. 「척토기」(1941)의 일절 “사나흰 성(城)을 쌓고”도 주목을 요한다. 만주의 고구려·발해 유적지엔 33개 성이 산재해 있다. (방학봉·장월령, 『고구려 발해 유적 소개』, 연길: 1995, 1~160쪽 참조) ‘오족협화, 왕도낙토’를 결코 주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론 만주국 건국이념(‘오족협화, 왕도낙토’)를 강렬하게 환기하는 ‘만주국 예찬 친일시’로 위장하지만, 옛 고구려·발해의 재흥을 꿈꾸듯, 궁극적으로 시인은 「룡정의 노래」의 견강한 ‘항일의식’의 내밀한 지속을 겨냥한 것이다. 이러한 ‘시적 전략’(poetic strategy)이 〈아리랑 만주〉를 《만선일보》 ‘신춘문예당선민요’로 추동한 소이연이다. 권철·오양호·최삼룡 등은, 시 「오랑캐고개」, 민요 〈아리랑 만주〉, 시조 「척토기」, 가사 「낙토만주」 4편을 ‘친일시’로 평결하였다. 오양호, 『일제강점기 만주조선인 문학연구』, 문예출판사, 1996, 123∼135쪽 참조. ; 권철, 『광복전 중국 조선민족문학 연구』, 한국문화사, 1999, 359∼374쪽. ; 최삼룡 엮음, 앞의 책, 50∼56쪽, 91∼94쪽 참조. 『친일인명사전』은 윤해영이 ‘무단장성 닝안현 협화회 홍보과’ 직원(1940∼1945)이었음을 밝히고, 「오랑캐고개」·〈아리랑 만주〉·「척토기」·「낙토 만주」·〈만주 아리랑〉 5편을 ‘친일시’로 못박았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엮음, 앞의 책, 713∼715쪽 참조. 필시 그의 ‘협화회 복무 이력’이 곧장 ‘친일시인’으로 작용했을 터이지만, 위 작품들을 한결같이 ‘친일시’로 규정하는 것은 그 특유의 시적 방책을 깊이 고려하지 않았거나 작품 내적 문맥을 제대로 판독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김영수의 언급처럼, 오히려 “윤해영이야말로 재만 시인 가운데서 가장 특출한 방식으로 (중략) 당국의 허를 찌르는 예술적 표현의 기교로 덫을 놓아 작품의 의도를 구현”한 시인일지 모른다. 김영수, 앞의 책, 116∼117쪽 참조. 유치환도 그렇지만, 그러다 ‘만주 전체 주민의 준국가적 대중조기’이라 할 ‘협화회’ 회원·복무자를 몽땅 ‘친일파’로 일률화하는 것은 무리이다.
  20. 김조규(金朝奎; 1914∼1990): 평안남도 덕천 출생. 1931년 《조선일보》·『동광』으로 등단. 평양 숭실전문 영문과 졸업(1937) 후 중국 젠다오성 룽징현 조양천농업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해방 직후 북한으로 귀환, 한국전쟁 때 종군기자로 활동하였다. 시집 『동방』, 평양: 조선신문사, 1947. ; ‘전선시집’ 『이 사람들 속에서』,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51. ; 시선집 『김조규 시선집』, 조선작가동맹출판사, 1960. ; 시전집 『김조규 시전집』, 연변대학교 조선어문학연구소 엮음,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 ; 동시집 『바다’가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평양: 아동도서출판사, 1960. ; 『뜨락또르 달린다』, 평양: 아동도서출판사, 1961(공저) ; 번역 시집 『근대 영국 시선』, 평양: 조선문학예술총동맹출판사, 1967(공저) 등이 있다.
  21. 김조규, 『김조규 시전집』, 연변대학교 조선어문학연구소 엮음,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2002, 115∼116쪽. 이 작품은 ‘발표지 미상’의 ‘미발표 육필원고’(1941. 8)이다.
  22. 김기봉·방영춘·권립 편저,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침략사』,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87, 188∼190쪽 참조. 여기서 특히 강조돼야 할 것은, 이 ‘집단부락’은 “공산비적활동(共産匪賊活動)의 중심지인 동만(東滿) 일대”를 숙청하기 위한, “항일무력의 활동지구를 무인지구로 만듦으로써 항일무력과 인민들 간의 연계를 철저히 끊어버리고 항일무력을 소멸해버리려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죄악적 의도”(190쪽)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다.
  23. 이 ‘안전농촌정책’은, 「통제-안전정책」 입안(1932. 8.), 일제 식민회사 ‘동아권업회사’(1921)를 매개한 대규모 토지의 염가매입 또는 강점, ‘안전농촌’ 설립, 조선농민의 강제이주 및 수전 개발, 고율 소작료 징수 과정 등을 거쳐, 가혹한 조선농민 착취로 완결되었다. 김철수·강룡범·김철환, 『중국조선족력사상식』, 연길: 연변인민출판사, 1998, 89쪽 참조.
  24. 김철수 외, 『중국조석력사상식』,위의 책, 89∼90쪽 참조. 집단부락 주위에는 “깊은 도랑을 파고 높은 담벽을 쌓으며 철조망을 늘이고 또치까를 세우는 등 방어시설들을 설치하였으며, (만주국─인용자) 괴뢰경찰과 자위단을 두고 ‘연좌법’을 실시하여 주민들의 일거일동을 감시하였다. (중략) 이런 ‘집단부락’ 정책을 일제는 1936년에 이르러서는 북만의 항일활동지역들에서도 실시하였다.”(89~90쪽)
  25. 작품 말미의 ‘노토구(老土溝)’는 아마도 ‘젠다오성(間島省) 룽징현(龍井縣) 라오터우거우진(老头沟鎭)’이 아닌가 한다.
  26. 1947년 통계에 따르면, 국민당통치구역에서 각종 ‘죄명’으로 체포된 조선족 인민은 8,468명이며, 2,042명이 살상당하였다. 김동화, 「중국조선족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의 력사적 고찰」, 『21세기로 달리는 중국조선족 ⓛ당대 중국조선족 연구』, 김동화·김승철 주필 외, 연변인민출판사, 1993, 22쪽 참조.
  27. 1945년 4월, 중국공산당 제7차전국대표회의에서 보고서 「련합정부를 론함」을 통해, 마오쩌뚱은 “국내 소수민족의 대우를 개선하고 각 소수민족들에게 민족자치의 권리를 허용 (중략) 그들의 언어·문자·풍속·습관 및 종교신앙은 존중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동화․앞의 글, 21쪽 재인용.
  28. 장제스 국민당정부 소수민족정책의 핵심이 “봉건통치계급과 소수민족의 분할통치(分而治之), 즉 ‘오랑캐로 오랑캐를 다스리는’(以夷治夷) 간접 혹은 직접적인 통치방식”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사정은 쉽사리 이해된다. 祝啓源, 「중화민국 시기의 민족정책(中華民國時期的民族政策)」, 『중국 역대 민족정책 연구(中國歷代民族政策硏究)』, 靑海人民出版社, 1993, 401쪽 참조.
  29. ‘동북공정’이란 「중국동북변경의 역사적 현사에 대한 계열 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2002. 1. 7.)의 줄임말로, 좀더 부연하면 “동북변강의 조선족 집거지역과 관련된 역사와 현상(정치·군사·경제·문화 방면)을 계통적으로 연구하는 사업계획”이다. 이개석, 「현대중국 역사학 연구의 추이와 동북공정의 역사학」, 『중국의 동북공정과 중화주의』, 위의 책, 25쪽 참조.
  30. 조성일·권철·최삼룡·김동훈, 『중국조선족문학사』, 연변인민출판사, 1990, 286쪽, 291∼292쪽 참조.
  31. 현룡순, 「조선족 소설문학 개관」, 『조선족문학연구』, 임범송·권철 엮음,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89, 120쪽.
  32. 임호, 「공산당을 보위하고 사회주의 문학을 보위하자!」, 『아리랑』(1958. 1.), 28~30쪽 참조.
  33. 연변문학 편집부, 「침통한 교훈」, 『연변문학』(1959. 11.), 63~64쪽 참조.
  34. 모택동,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정확히 처리할 문제에 관하여」(1957. 2. 27), 『모택동 선집 5』, 북경: 민족출판사, 1977, 575∼579쪽 참조.
  35. 전국권, 「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 문제─민족문학사 편찬을 겸해 론함」, 최윤갑 교수 정년퇴임 기념론문집 편집위원회 편, 『조선언어문학론문집』, 연길: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6, 381쪽. 전국권은 ‘1949년∼1966년 시기’ 조선족문학은 “정치개념이나 정책의 선전역할을 많이 수행 (중략) 문학형식을 가진 정치선전물의 작용”을 한 ‘보은문학’으로, ‘1966년 (중략) 1978년 시기’ 조선족문학은 “다분히 정치색채”를 띤 “정치설교문학”으로 간단히 규정한다. 다만 후자의 ‘문화대혁명시기’를 구태여 ‘1966∼1978년’으로 다소 늦추어 설정한 이유를 그는 “우리 조선족은 내지와 거리가 멀고 정보가 늦었던 원인으로 한족문단보다 좀 더디었기 때문”(381쪽)이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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