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개념정원 〈14회〉 : 욕망의 그래프2

  

  〈욕망의 그래프〉는 라캉 이론의 인간 이해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전체 지도와도 같다. 몸과 마음이 중첩되는 곳에서 생겨나는 심리 현상이 그 중심에 놓여 있다. 지난 회에는 그래프의 아랫단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것이 마음의 차원이라면 그 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몸의 차원이다. 다르게 말한다면, 마음 너머의 마음이라고 해야 하겠다. 이번 회에는 그래프의 윗단을 살펴본 후, 흐름 전체를 조망해 보겠다.
  그래프의 윗단 역시 아랫단과 마찬가지 두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다. 윗단 형성의 첫 단계인 〈그래프3〉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다.

〈그래프3〉

  

〈그래프3〉의 기호들

  〈그래프3〉이 〈그래프2〉(지난 호 참조)와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그래프2〉에서 두 개의 갈고리가 튀어나와 있는 것이 곧 〈그래프3〉이다. 갈고리라고 표현했으나 어찌 보면 짐승의 뿔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두 개의 갈고리가 만들어낸 새로운 질서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두 갈고리 사이에 있는 ‘케 보이Che vuoi?’라는 외국어 문장이다.
  살펴보기에 앞서, 〈그래프3〉에 추가된 세 개의 기호를 확인해보자. d는 욕망, ◇a는 환상을 지칭한다. 그리고 ‘Che vuoi?’는 이탈리아어로 “당신을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뜻이다.
  지난 회에 언급한 바와 같이, 〈그래프2〉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의식의 흐름을 보여준다. 주체(/S )는 언어의 질서 속에서 타자(A)를 만난다. 타자=언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주체는 공동생활의 문법을 익히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게 된다. 주체의 자기 동일성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곧 그것이다. 주체로부터 출발한 화살표가 끝나는 지점에 상징적 동일시, I(A)가 자리 잡고 있음은 그런 까닭이다.
  〈그래프3〉은 주체 형성의 이 평온한 흐름이 깨지는 격렬한 순간을 그려내고 있다. 주체(/S )가 타자(A)=언어를 만나는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깨져버린 소화전의 물줄기처럼 두 개의 갈고리가 솟아나와 있다. 주체와 타자의 어긋난 만남이 초래한 의식의 비상사태를 보여주는 모양새이다. 정상적인 흐름이 유지되었다면, 주체는 타자의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 질서를 내면화하여 얌전하게 자기 자리를 향해 갔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타자의 질서를 거부하는 힘이 생겼음을 뜻한다. 그것이 곧 튀어나온 갈고리의 의미이다.
  두 갈고리 사이의 공간에서 주체는 타자를 향해 말한다. 내가 왜 당신이 하는 말을 따라야 하는가. 주체의 이런 항변은 주체 안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의 발언이기도 하다. 두 갈고리 사이의 공간 초입에 욕망(d)이 놓여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여기에서 욕망은 타자=언어의 질서가 완전히 흡수해내지 못한 어떤 것, 소화되지 않고 배출된 뼈나 씨앗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욕망은 내 의식과 내 의지의 통제 영역 밖에서 움직이는 힘이다. 바로 그 자리에 라캉은 ‘케 보이’라는 이탈리아어를 써놓았다.

  

욕망과 환상

  〈그래프3〉에서 왜 욕망이 튀어나왔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그래프1〉(지난 호 참조)을 떠올려야 한다. 〈그래프2〉에서 출발점의 자리는 주체가 차지하고 있지만,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은 〈그래프1〉에서 △로 표기된 원초적 의도였다.
  여기에서 원초적 의도라 이름 붙인 것은 주체가 형성되기 전에, 몸과 마음이 갈라지기 전에, 한 개체 안에 무언가를 필요로 하고 또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힘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런 힘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어떤 생명체에게나 당연한 일이며, 여기에서 몸과 마음의 분열 이전이라 함은 곧, 인간이 언어의 습득을 통해 상징체계 속으로 들어가기 이전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것을 △라 표기한 것 역시 언어 이전이라는 뜻을 함축하는 것이기도 하겠다. 바로 그 △를 음성 언어로 나타낸 단어가 욕구need이다. 그러니까 욕구라는 말은 그 자체가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한 결과이겠다.
  그런데 바로 이 욕구는 타자=언어를 만나는 순간 두 갈래로 분열된다. 언어화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갈라진다. 이 둘은 의식화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기도 하고 혹은 자기의 마음속에서 표현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을 이와 같은 방식으로 분할하고 있는 언어체계란, 심리 현상으로 보자면 욕구를 걸러내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욕구가 상징계를 통과하며 언어화된 것은 요구demand가 되고, 언어화되지 못한 것은 욕망desire이 된다. 그래서 라캉의 기호 체계 속에 요구는 대문자D이고, 욕망은 소문자 d로 표기된다(대문자는 상징계, 소문자는 상상계임을 뜻한다). 욕구에서 요구를 제외하면 욕망이 남는 것이다. 그것이 라캉의 욕망 공식이기도 하다.
  〈그래프3〉이 드러낸 두 갈고리 사이의 공간은 바로 그 욕망의 힘이 작동하는 공간이거니와, 그 힘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 환상(/S ◇a)이다. 환상의 공식은 주체가 대상a와 마주 서 있는 모양새이다. 그 둘 사이에는 ◇가 가로놓여 있다. ◇는 건너뛰고 싶지만 결코 넘어갈 수 없는 간극이라는 뜻이며 동사로 쓰이면 그 자체가 ‘욕망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환상의 공식(/S ◇a)을 그대로 풀이하면 주체가 대상a를 욕망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대상a는 욕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원인이 되는 것,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다 대상a, 즉 신기루의 성격을 지닌다. 포착하려 하지만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붙잡았다고 해도 그 순간 이미 다른 것으로 변해버리는 것이 대상a의 속성이다. 욕망은 그런 대상을 붙잡으려 하는 주체의 열망이다.
  환상의 공식은 주체가 간극 너머의 대상a를 갈망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환상은 욕망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체가 지니는 원초적 욕구에 방향성을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욕망도 환상 없는 욕망은 없다.

  

‘케 보이’의 의미

  욕망이 만들어내는 이 공간에, 라캉은 이탈리아어로 ‘케 보이’라는 의문문을 문패처럼 붙여놓았다. 이것은 누가 누구에게 묻는 말인가. 물론 주체가 타자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다. 타자를 향한 질문은, 더 나아가면 타자에게 따지는 항변이 된다.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입니까,에서부터 시작하여, 도대체 나 보고 어쩌란 말인가,라는 수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이탈리아어인가. 이유가 없을 수 없다.
  케 보이라는 말은, 이탈리아어로 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 등장하는 대사의 일부이다. 난봉꾼 악당 돈 조반니가 자기를 찾아온 대리석 석상과 나누는 대화 속에 등장한다. 돈 조반니(돈 후앙 혹은 돈 주앙)라는 유럽의 전설적인 난봉꾼 악당이, 무덤 앞에 있는 대리석 석상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런데 그 석상의 주인공은 자기가 죽인 사람이며, 자기가 유린하고자 했던 여성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대리석 석상을 저녁 자리에 초대한 것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괴물 같은 악당이 자기 손에 죽은 사람을 모욕하고 조롱까지 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초대를 받았던 대리석 석상이 저녁 식사 자리에 나타났다. 이런 초자연적인 일이 벌어졌으니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걸어다니고 말을 하는 석상의 출현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악당 조반니에게 천벌이 시작된 것과도 같다. 뚜벅뚜벅 걸어서 문을 부수고 들어온 석상에게, 악당 돈 조반니가 묻는 말이 다름 아닌 ‘케 보이’이다. 대체 당신은 무얼 원하는가,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오페라에서 돈 조반니는 천벌을 받고 지옥불 속으로 사라진다. 석상은 악당 돈 조반니에게 참회를 요구했으나 돈 조반니는 거절한다. 자기가 나쁜 놈인 건 맞지만 비겁한 놈은 아니라며, 자기 죄는 자기가 지겠다는 자세로 돈 조반니는 지옥행을 선택한다. 유럽에서 전래되어온 돈 후앙에 관한 이야기의 결말은 시대나 극작가 개인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는 그중에서도 악당을 윤리적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낸 셈인데, 이런 변주 속에서도 한결같은 것은 석상이 악당을 방문한다는 이야기의 틀이다. 인간의 악을 응징하는 신의 방문이 기본 형식으로 놓여 있는 것이다. 요컨대 케 보이란 바로 그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질문이자 항변인 셈이다.
  〈그래프3〉에서 ‘케 보이’라는 말의 울림은 작지 않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질문은 기본적으로 힘없는 인간이 절대적 위력을 지닌 신에게 올리는 기도의 형식을 취한다. 당신은 저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것은 또한 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신의 목소리, 곧 큰타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네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것이건 간에 그 바탕에 있는 것은, 제 나름으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는 인간 욕망의 항변이다. 이렇게 생긴 것이 나의 본바탕이다, 나보고 뭘 어쩌라는 것이냐. 내가 이런 몸을 가지고 태어났고 바로 당신이 나에게 이런 천성을 주었다, 그런데 더 이상 나보고 뭘 어쩌라는 것이냐. 그것은 곧 인간이 지닌 몸의 항변이고, 욕망의 항변이다. 그리고 그 항변의 힘을 막아서고 있는 것이 환상(/S ◇a)이다.

〈욕망의 그래프〉 완성태

  

향락jouissance과 충동drive

  케 보이의 힘이 환상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에 그 힘을 낚아채는 또 하나의 거대한 실체가 등장한다. 그것은 〈그래프4〉에서 기표의 선 너머 두 번째 수평선으로 표현되는 향락의 선이다. 향락에서 거세로 이어지는 수평선은 몸의 질서를 표상한다. 몸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마음 너머의 마음이라 해야 할 것이며, 무의식의 영역이라고 해도 좋다. 의식의 영역에서 이탈한 주체의 힘이 포획되는 세계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바로 그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 그래프 윗단이며, 이것이 등장함으로써 그래프 전체가 완성된다.
  향락jouissance(프랑스어 발음 그대로 주이상스로 쓰이기도 하고, 향유, 희열, 즐김 등의 번역어가 경쟁중이다. 영어로는 enjoyment가 가장 많이 채택되는 번역어이다)이라는 단어는 불쾌하거나 고통스러운 쾌락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쾌락pleasure과 구분된다. 프로이트의 용어로 잘 알려진 쾌락은 기본적으로, 불편한 긴장이 없이 만족스러운 상태를 지칭한다. 배설 이후의 방광이나 대장, 또는 비었다가 채워진 위장에서 얻는 만족감이 기본적이다. 이에 비해 향락은 만족을 추구하는 힘이라는 점에서는 쾌락과 같지만, 언제나 과도함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쾌락과 구분된다. 절도 있거나 평화로운 상태의 만족이 아니라, 넋을 놓고 빠져드는 탈혼망아脫魂忘我의 쾌락, 고통스럽거나 불편해서 오히려 불쾌가 된 쾌락을 지칭하는 것이 곧 향락이다.
  향락은 마음의 만족이라기보다는 몸의 만족에 훨씬 가깝다. 먹는 기관은 씹어 삼키는 것이 자기 일이며, 몸의 다른 부분과는 상관없이 자기 일을 한다. 주체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신체 기관의 움직임에 동반되는 느낌이 곧 향락이라고 해도 좋겠다. 위장이 힘에 부쳐 토해낼 만큼 먹고 마시는 일, 마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의지와는 달리 술을 마시고 있는 알코올 중독자의 모습 등이 모두 향락의 표현이다. 향락은 주체의 안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으며, 오히려 주체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는 것이야말로 그 자체의 동력이라서 향락은 오히려 주체를 집어삼키는 힘으로 작동한다.
  상징체계에서 일탈해 나온 주체가 바로 그 향락의 힘을 만나는 지점에 충동이 자리 잡고 있음은 이렇게 보면 당연한 것이겠다. 충동은 욕망과는 달리 머리도 눈도 없다. 아무런 지향성이 없다는 것이다. 왜 원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제 앞의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힘이다. 충동의 공식(/S ◇D)이 나타내는 것은 주체와 요구 사이에 건너뛸 수 없는 간극이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주체는 요구, 즉 언어화된 욕구에 도달하기를 바라지만 그 갈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다. 건너뛸 수 없는 간극 ◇가 그 사이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 신체 자체의 힘이 바로 그 간극에서, 마름모꼴의 구멍으로부터 솟구쳐 나온다. 그것이 바로 충동이다.
  향락이 충동을 거쳐 오른쪽으로 흘러나가는 힘의 끝자리에 놓여 있는 것이 거세이다. 여기서 거세란 실제로 성기를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거세를 뜻한다. 상징적 거세의 가장 대표적인 표상은 의복 속에 감추어진 몸이다. 사회 질서에 따라 노출해서는 안 되는 몸과 드러내도 되는 몸을 구분하는 것, 타인들과 접촉해도 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분하는 것, 파트너와의 성교 때 써도 되는 신체 기관과 그렇지 않은 기관을 구분하는 것 등이 모두 상징적 거세에 해당한다.
  윗단에서의 거세란 아랫단에의 목소리와 동일한 위상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하자. 목소리는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하는 말은 무엇이건 헛소리라는 것이다. 거세된 신체 역시 마찬가지다. 향락을 통제해버린 몸, 충동을 제거해버린 몸, 철저하게 해당 사회의 제도와 규율에 사로잡힌 몸이 곧 거세된 향락의 산물이다. 성감대란 그 자체가 분할된 향락, 즉 분할되고 통제된 신체를 표상한다. 그러니까 이 그래프에 따르면, 사회적 질서속에서 일탈하지 않고 사는 주체란, 향락이 거세된 신체를 지닌 채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지껄이며 사는 존재인 셈이다. 어둡고 우울하지만 수긍하지 않을 수도 없는 우리 마음의 현실이 곧 그것이겠다.

  

타자 결여의 기표

  윗단 그래프의 왼쪽 교차점에 놓여 있는 것은 타자 결여의 기표, S(/A )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우울한 욕망 현실 속에서도 제대로 된 삶을 살고자 하는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 곧 이 기표이다. 여기에서 타자(A)는 말할 것도 없이 큰타자로서, 인간 존재에게 사회적 질서를 제공하여 주체로서의 삶을 부여한 존재이다. 그런데 그 대단한 존재의 가슴 한복판에도, 주체에게 있는 것과 똑같은 빗금이 그어져 있다.
  빗금 쳐진 존재, 결여를 가진 큰타자 /A 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자명하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제대로 모르기로는, 나만이 아니라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선생님도 공부를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지 모르기는 마찬가지고, 신도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내게 사랑하라고 했다. 그것이 내 삶의 진정한 의미라고 했다. 그런데 사랑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인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 그럴 때 사랑은 타자 결여의 기표가 된다.
  타자 결여의 기표들은 신적 지위를 지닌 것, 즉 초월적 기표이기도 하다. 어떤 의미도 자기 자신의 기의로 수용할 수 있는, 정반대되는 행동이나 결과조차도 모두 그 자신의 기의로 삼을 수 있는 기표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아끼고 존중하는 것도 사랑하기 때문이고, 훼손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는 죽여도 그것이 곧 사랑 때문이라고 할 때의 사랑 같은 것, 그것이 곧 타자 결여의 기표이다.
  그런 점에서 타자 결여의 기표는 주체의 행동을 촉발하는 윤리적 동력이 된다. 신의 뜻을 모를 때, 내 선생님도 멘토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 대답일 수밖에 없다. 신의 부재, 기도에 응답하지 못하는 신의 곤경을 이제는 내가 해결하러 간다. 타자 안에 있는 결여는 주체가 채워야 한다. 내 발걸음과 내 행동이 곧 타자의 일부가 된다. 물론 그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 그것이 곧 타자 결여의 기표가 주체의 신체를 감싸 안은 채로 주체에게 윤리적 동력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타자 결여의 기표는, 정신분석이 지닌 윤리적 동력을 나타내는 표상이기도 하다.

  

  

* 후주
  〈욕망의 그래프〉는 지난 회에 언급한 바와 같이, 라캉의 논문 「프로이트적 무의식에서의 주체의 전복과 욕망의 변증법」(『에크리』, 홍준기 외 옮김, 새물결, 2019)에 수록되어 있다. 라캉의 글은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매우 불친절하다. 해설로는,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과 핑크의 『에크리 읽기』(김서영 옮김, 도서출판b, 2007) 등이 대표적이다. 물론 충분할 수는 없다. 「사드와 함께 칸트를」에서 환상의 공식을 설명하며 라캉은 ◇를 ‘~에 대한 욕망’이라고 표현했다. 이 글에서 ◇를 “건너뛸 수 없는 간극”이라고 한 것은 그와 같은 설명을 염두에 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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