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 사건과 재심 과정

  
  

1.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인노회)의 창립

  
  1) 창립배경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 국민의 기본권은 크게 제약받았다. 특히 노동자와 농민들은 경제 성장의 중요한 담당자임에도 저농산물가격정책, 장시간 저임금노동정책으로 희생을 강요받았다. 이에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는 노동자, 농민들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독재정권은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동일방직, 원풍모방, YH무역 노동자들의 투쟁이 대표적인 노동 사건이다.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로 80년대를 연 전두환 군사정권은 더욱 폭압적인 방식으로 국민의 생존권과 기본권을 억압하였다. 민주인사들과 정치인들에 대한 가택연금과 구속이 일상화되고, 수백 명에 달하는 언론인들을 해고·투옥하였으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을 강제로 군에 입대시켜 밀정이 되도록 강요하는 만행을 저지르는가 하면, 무고한 국민들을 삼청교육대에 끌고 가서 폭행하고 강제노역까지 시켰다.
  한편 미국이 반란과 학살을 묵인·지지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들의 미국에 대한 인식도 바뀌게 되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과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 등이 대표적인 반미투쟁들이다.
  1980년대에 들어 어용노조 민주화운동과 민주노조건설운동으로 노동자들에 대한 조직화가 진전되었다. 한편으로 학생운동 출신자들이 대거 노동현장에 취업하여 노동운동을 고양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학생운동의 경험을 살려 노동현장의 각종 투쟁들을 조직하였다. 대우자동차 파업투쟁, 구로지역 동맹파업 등이 대표적인 투쟁이다.
  이들 학생운동 출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운동의 경제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면서 단위 사업장을 뛰어넘는 정치적 대중조직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과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5·3 인천민주화운동과 뒤이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대응 과정에서 서노련과 인노련은 계급 이기주의 행태를 보이며 정치·투쟁·조직 노선의 혼란상을 드러냈다. 이에 조직적 평가를 통해 진로를 모색하자는 주장과 지도부와 노선에는 오류가 없다는 주장, 해산하고 산개散開하자는 주장 등으로 조직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면서 여러 작은 그룹들로 갈라져서 각각 진로를 모색하였다.
  그러던 중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살해 사건이 생겼다.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과 잔인성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국민들은 분노하였다. 이에 인천·구로·영등포 등 몇몇 지역 노동운동 그룹의 대표들이 모여 투쟁을 공동기획하며 이 공동투쟁을 통해 조직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2월 7일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와 3월 3일 ‘고 박종철 군 49재 및 고문추방 국민대행진’에 참여하였고, 이어서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에 대항한 ‘호헌철폐 민주헌법 쟁취 투쟁’(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인천 부천지역 그룹들은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결성, 6월 26일 부평 가두투쟁 현장에서 결성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인민노련은 곧바로 그해 12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 참가 방침을 놓고 갈등이 생겼다. 민중독자후보론과 후보단일화론, 그리고 후보를 지정하여 후보단일화를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비판적 지지론)으로 나뉘어졌다. 나는 대통령선거 참여 방식은 하나의 전술일 뿐 민중운동에서 결정적 전략이 아닐뿐더러 조직 결성 초기에 무리하게 다수결로 결정하면 조직이 분열될 것이라고 지적하며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나 대의원대회에서 다수결로 독자후보론으로 결정이 나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소수파 대의원들에게 잘됐든 잘못됐든 결정이 난 이상 함께 실천한 후 함께 평가하면서 조직을 세워나가자고 간곡히 호소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후보단일화론자들이 탈퇴, 인천지역노동자연합준비위원회(인준위)를 결성하여 명동성당에서 삭발, 단식 농성을 하는 등 후보단일화운동을 하였고, 조금 뒤 비판적 지지론자들은 처음엔 김대중 후보로의 단일화를 주장하다가 투표일에 임박하여 지지율이 더 높은 김영삼 후보를 위해 김대중 후보가 사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과는 군부정권의 연장과 노동운동의 분열로 귀결되었다. 87년 6월 민주대항쟁 이후 분출한 7~9월 노동자 대투쟁에 부응하여 더 깊이 노동대중 속에 들어가야 할 시기에 보수 정당 후보들의 각축장일 뿐인 대통령 선거에 몰두한 어리석은 결정의 후과는 노동운동을 분열시켰고, 분열은 심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인노회의 결성

  인노회는 인민노련과 인준위가 비대중적이고 정치, 가두 편향적인 선도적 투쟁에 빠져 현장 노동자들의 정치의식화라는 과제를 간과하고 미취업 가두활동가 중심으로 전락하였다고 평가하고, 각종 노동써클들은 학습 위주, 비공개 활동에 젖어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양산되는 선진적 노동자들의 요구를 수렴할 수 없는 한계에 빠져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현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새롭고 대중적인 정치단체를 결성한다는 목표로 결성하였다. 그래서 인노회는 1년 이상 노동현장에 근무한 사람에게만 회원자격을 주었고, 대중적, 민주적 운영 방식이 인노회 활동의 특성이 되었다.
  
  인노회 결성은 「인천·부천지역 노동형제들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인천지역 민주노동청년회(인노청)’ 결성을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인노청은 노조나 친목단체처럼 공공연한 단체는 아니며, 반합법단체이고, 공개 활동과 비공개 활동을 결합하여 실천하는 단체이며, 광범한 노동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적인 싸움을 수행하는 투쟁단체라고 조직의 위상을 정하고, 나라의 자주화와 민주화, 평화통일의 큰 뜻에 동의하는 노동자라면 회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1988년 1월 중순경부터 안재환, 손형민, 신정길, 유동환, 김선철, 박동진(가명) 6명이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기존 노동운동에 대한 평가, 인노청의 결성 목적, 정치·투쟁·조직 노선 등에 대해 토론을 한 후 창립취지문, 회칙 초안, 사업방침 초안 등을 작성하였다. 이어 회원 10명당 1명씩 대의원을 선출하여, 1988년 3월 5일 시흥시 소재 작은자리 회관에서 대의원 17명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대의원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회의 명칭을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로 바꾸어 회칙을 제정하고, 임원으로는 회장에 안재환, 부회장 겸 조직국장에 손형민, 사무국장에 유동환을 선출하고, 사업방침을 통과시킴으로써 인노회를 결성하였다.
  인노회는 최고의결기구로 대의원대회, 집행기구로 운영위원회, 상임집행위원회, 사무국, 조직국을 두었다. 사무국에는 교육선전반과 홍보반을, 조직국에는 부평, 주안, 부천에 각각 지구위원회를 두고 각 지구에는 여러 개의 분회를 두었다. 회원들은 모두 분회에 소속되어 주 1회 모임을 갖고 활동하도록 하였다. 인노회 사무실은 처음에는 부천 송내동에, 나중에는 인천 십정동에 두었다.
  
  

2. 인노회의 목적과 활동내역

  

  인노회의 목적은 회칙 제2조에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① 노동형제와 조국을 위하여 의로운 삶을 살며 상부상조하고 노동자로서 올바른 품성을 함양한다.
  ② 회원 나아가 노동형제들의 생존권과 민주적 제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앞장선다.
  ③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노력한다.
  ④ 모든 노동자 단체와 단결하며 각계각층의 민주단체와 협력한다.

1988년 회원 가입 안내문 팸플릿 (필자 제공 사진)

  그리고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는 어떤 단체일까요?」라는 ‘회원 가입 안내문’에서, 인노회는 “첫째, 인천부천지역 노동자들이 모인 단체이며, 둘째, 임금인상, 민주노조건설 등 노동자들의 권리와 공장의 민주화를 위해 앞장서는 용감하고 믿음직한 노동자들이 모인 단체이며, 셋째, 모든 일하는 사람들과 민족의 고통스런 현실을 바로잡아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애국적인 노동자들이 모인 단체이다”라고 밝혔다. 또 인노회가 하는 일로는 “첫째, 회원 및 노동형제들의 자질향상과 실천 활동에 필요한 공부와 토론을 일상적으로 벌여나가며 이에 필요한 교육 자료의 발간 및 정기·부정기 교양강좌를 실시하며, 둘째, 회원 및 노동형제들의 요구를 널리 알리기 위해 홍보물을 발행하고 대소규모의 대중 집회를 개최하며, 셋째, 회원 및 노동형제들의 임금인상투쟁, 민주노조건설투쟁 등 제반 투쟁을 지지, 지원하는 활동을 하며, 넷째, 모든 노동단체, 각계각층의 민주단체와 협력하여 공장에서의 생존권과 민주적 제 권리 요구투쟁뿐만 아니라 이 땅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앞장서 투쟁한다. 이를 위해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 인천민족민주운동연합,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에 가입하여 활동한다”라고 밝혔다.
  또 이 안내문에서 자주, 민주 통일의 의미도 밝혀두었다. “자주란 외세 특히 미국의 정치‧경제·군사·문화적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벗어난 진정한 자주독립 국가를 만드는 것이며, 민주란 노동자·농민 등 전 민중의 생존권과 민주적 권리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며, 언론·출판·집회·시위·결사·사상의 자유가 보장되고 고문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며, 통일이란 자주·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의거하여 남북 쌍방의 합의하에 반드시 이룩해야 할 7천만 겨레의 염원인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그 의미를 밝혔다.
  
  「88년 상반기 사업평가와 하반기 사업계획서」 등에 따르면, 인노회는 다음과 같은 활동들을 하였다.
  
  1) 전체 행사

  ① 1988. 3. 5. 창립 대의원대회 개최
  ② 88. 4.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한 인천부천지역 후보들 초청 간담회 개최
  ③ 88. 6. 12. 인천대 잔디밭, 회원과 가족 등 100여명이 참여한 ‘인노회 창립 잔치’ 개최
  ④ 88. 10. 23. 인하대 운동장, 회원과 가족 120여 명이 참여한 ‘가을 체육대회’ 개최
  ⑤ 88. 12. 25. 부평 신용협동조합 강당, 회원과 인천지역 노동자 100여 명이 참여한 ‘인천지역 노동자 송년잔치’ 개최

1988년 ‘송년노동자대잔치’ 팸플릿 (필자 제공 사진)

  2) 발행 문서

  ① 88. 7 하순. 「인천·부천민주노동자회는 어떤 단체일까요」(회원 가입 안내문) 제작, 배포
  ② 88. 4. 중순. 「임금인상 하자는데 거짓말도 가지가지」 제하의 임금인상 촉구 유인물 500부 제작, 배포
  ③ 88. 10. 30. 「노동악법 개정은 1천만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이다」는 제하의 노동법 개정 촉구 유인물 5,000부 제작, 배포
  ④ 88. 11. 13. 「애국시민 여러분께 드립니다」, 「5공 비리 척결 및 노태우 정권 퇴진투쟁으로 총궐기하자」는 제하의 5공 비리 척결과 전두환, 이순자 구속을 촉구하는 유인물 각각 5,000부씩 제작, 배포
  ⑤ 88. 12. 18. 전두환 구속 및 노태우 정권 규탄 유인물 5,000부 제작 배포
  
  3) 노동현장 지원 등 연대활동

  ① 88. 4. 중순, 삼산동 소재 한독금속 ‘임투 승리 축하대회’ 참가
  ② 88. 6. 10. 민주쟁취국민운동 인천본부 주최로 주안1동 성당에서 개최한 ‘6월항쟁 정신 계승 및 1주년 기념대회’ 참가
  ③ 88. 6. 중순. 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주최로 부평1동 성당에서 개최한 ‘구속노동자 석방촉구 결의대회’ 참가
  ④ 88. 6. 중순. 인천대, 위장폐업공동대책위 주최 ‘위장폐업분쇄 결의대회’ 참가
  ⑤ 88. 6. 하순. 삼산동 소재 콜트악기 임투 전진대회 참가
  ⑥ 88. 8. 중순. 부천 삼정공단 소재 대호전자 파업 노동자 격려 방문
  ⑦ 그 외 동신전자, 코스모스전자 등 인천부천지역 임투 관련 집회, 파업현장 지원활동 등에 다수 회원들 참가. 주로 인노회 회원들이 근무하는 공장을 중심으로 지원함.
  ⑧ 노동법 개정 촉구 집회 등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위한 집회 참가
  ⑨ 5공 비리 청산, 전두환, 이순자 구속 촉구 집회 등 민주화 요구 집회 참가
  
  

3. 인노회에 대한 탄압

  

  오랜 세월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온 노동자들은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자야말로 이 세상의 참 주인임을 확인하였다. 또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뭉쳐서 싸워야 하며 뭉쳐서 싸우면 이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전국에서 민주노조를 세우거나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투쟁으로 나타났으며, 각 지역별 노동조합 협의회를 세웠다. 바야흐로 이 땅의 노동자들이 사람답게 대접받는 참 민주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다. 이렇듯 노동자의 힘이 날로 커가고 더불어 농민운동, 학생운동 등 전체 민족민주운동의 힘도 빠르게 커져서, 89년 1월에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결성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노동운동을 비롯한 전체 민족 민주운동의 힘이 날로 커 가자 노태우 정권은 이를 깨뜨리기 위해 안달하였다.
  
  6월항쟁으로 국민들의 저항의식이 높아진 상태에서 매우 수세적 조건에서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어떻게든 수세적인 정국을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박종철 군 고문살해 사건으로 간부들이 대거 구속되는 등 경찰이 크게 위축되었고 특히 대공부서는 존립이 위태로워졌다. 이에 경찰은 공안 사건을 조작해서라도 정국을 전환시키려 하였다. 이에 경찰은 1988년 10월 무렵부터 인천지역 여러 노동단체에 대한 감시와 노동자들에 대한 미행을 부쩍 늘렸는데, 1989년 봄에 있을 노동자들의 투쟁을 미리 막으려는 짓이었다. 이 과정에서 활발하게 공개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활동내용과 회원들이 공개되어 있던 인노회를 맨 먼저 탄압한 것이다.
  경찰은 1989년 1월 26일 유봉인, 정규옥 두 회원을 영장도 없이 불법 강제 연행하여 구속하였다. 이어 2월 8일 오후 설날 휴가를 마치고 출근한 사무국원 6명(손형민, 고남석, 신정길, 이동진, 이성우, 김동호)을 인노회 십정동 사무실 앞길에서 영장 없이 불법 강제 연행하여 치안본부 대공 3부(홍제동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거기서 잠도 안 재우고, 자기들이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진술하라고 강요하였다. 특히 인노회의 목적이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이하 NLPDR)이라고 진술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다가 백영엽 판사가 구속영장을 기각하여 약 78시간 만에 모두 풀려났다. 그 후 사무국원들은 전과 같이 날마다 사무실에 출근했으며, 이성우 회원은 2월 18일에 예정된 결혼 준비에 바쁜 날을 보냈다. 그런데 검찰은 느닷없이 2월 16일 구속영장을 다시 청구해 발부받았다(김동호 제외). 영장 기각 후 추가 수사도 하지 않고 TK출신 조희대 판사 당직 일을 골라서 영장을 재신청한 것이다. 이로써 사무국원들은 수배되었고, 결혼식은 신랑도 없이 신부와 가족 친지들만 모인 자리에서 눈물바다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3월 27일 이광석, 4월 1일 강병권, 한기성, 송명진 등 부평지구 회원들이, 4월 28일 오후에는 수배 중이던 손형민이 구속되었고, 같은 날 밤에 김민삼, 최동, 4월 29일 조성욱, 박종근 등 부천지구 회원들이 연행되었다. 수배 중이던 안재환 회장이 6월 3일, 신정길이 6월 7일, 이동진이 6월 14일 각각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그 외 부회장 서형옥과 이성우, 김동호(1992년 9월 노동자문화마당 일터 사건. 당시 인노회 건이 병합됨)는 1990년 이후 연행되어 구속되었고, 고남석은 오랫동안 수배되었다가 김대중 정부 때 기소유예되었고, 훈방되었던 박종근, 조성욱 중 조성욱은 뒤에 부천 세라아트 파업 사건으로 연행되었을 때 인노회건이 병합되었다.
  이렇게 인노회 사건 관련자 총 18명 중 16명이 구속되고, 2명이 불구속되었다. 당시 회원들이 받은 형량은 다음과 같다. 안재환, 손형민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2년, 서형옥, 신정길, 한기성, 김동호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정규옥, 조성욱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2년 집행유예 3년, 최동 징역 1년 6월 자격정지 1년 6월 집행유예 2년, 유봉인, 강병권, 송명진, 김민삼, 이동진, 이성우, 이광석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
  
  경찰이 인노회를 이적단체로 몰기 위해 조사과정에서 맨 먼저 인노회의 목적이 이른바 NLPDR이라고 조작하려 하였다. 이것이 뜻대로 안 되자 다음에는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회칙에 있지만 숨은 목적이 NLPDR이라고 진술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마저 자기들 뜻대로 안 되자 인노회 목적 ③항에 있는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용어의 의미을 조작하여 이것이 인노회가 추구하는 이념이라고 진술하도록 강요하였다. 즉 ‘자주란 미제국주의를 축출하고 노동자 농민 등이 힘을 합쳐 민족해방투쟁을 완수하는 것을 뜻하고,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는 민중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이며, 사회주주의 국가의 건설을 지향하는 것이고, 민주란 미제와 결탁한 독재정권과 매판자본에 의해 대다수 노동자 농민 등이 민주적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를 회복시키는 반독재투쟁을 말하며, 이 민주적 권리의 회복은 민족자주화를 이루는 중요한 조건이고, 통일이란 민중이 분단 상황을 끝내고 남북이 하나 되는 것으로서 반미 자주화투쟁, 반파쇼 민주화투쟁을 통하여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혁명을 완수, 궁극적으로 사회주의로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등으로 정해 놓고 이대로 진술하라고 강요하였다.
  강요하는 방법은 경찰이 조작한 대로 자주, 민주, 통일의 의미를 자술서에 쓰도록 강요하였다. 그대로 쓰지 않으면 며칠 동안 잠을 안 재우고 계속 강요한다. 그러다 지칠 대로 지친 한 회원이 검찰조사나 재판 때 진실을 밝힐 요량으로 허위로 자백하면, 이번에는 이것을 복사해서 들이밀며 ‘다른 사람은 다 진술하는데 너만 왜 버티느냐’며 계속 허위 자백을 강요한다. 끝까지 허위 자백을 안 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허위진술서를 갖다 붙여 신문조서를 꾸민다. 회원들이 검찰조사 때 이런 사실들을 밝히고 진실대로 진술해도 검찰은 경찰조서대로 기소하고, 재판정에서 부인하여도 재판부는 그대로 인정하여 유죄를 선고하였다.
  
  다음으로 경찰과 검찰의 회의 목적에 대한 조작이 좀 미흡하다고 생각했던지 인노회를 이적단체로 보도록 하는 여러 정황들을 만들었다. 사법 처벌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되는 회원 각 개인의 신념을 조작하여 서술하고, 인노회 사무실에 보관 중이던 자료들의 내용을 전체 뜻과는 무관하게 특정 부분만 의도적으로 선택, 왜곡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경찰과 검찰이 인노회를 이적단체로 몰기 위해 여러 짓을 하였는데 그중 제일 많이 써먹는 수법은 대개 세 가지 조작 방법이다.
  첫째는 아예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생짜로 만드는 방법이다.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는데, 없는 사실을 있는 사실로 만드는 것이 하나이며, 억지 추측으로 어떤 행위의 목적과 동기를 전혀 사실과 다르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이다. 앞의 방법은 창립준비 모임에서 안재환이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해 길게 설명했다고 만든 것 등이다. 뒤의 방법은 각종 유인물을 만든 동기와 목적을 경찰이 멋대로 지어서 갖다 붙인 것이다.
  둘째는 특정한 용어의 뜻을 왜곡 날조하는 방법이다. 자주, 민주, 통일에 대해 경찰이 만든 의미가 그것이다.
  셋째는 책자 내용 중 특정한 부분만 의도적으로 선택, 인용하여 그것을 그 책자의 전체 내용인 양 왜곡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심지어 인용 부분이 전체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이어서 책자를 전체 내용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의 책자로 둔갑시키는 일도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경찰과 검찰은 인노회를 이적단체로 몰기 위해 불법연행, 허위자백 강요와 내용 조작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4. 인노회의 회원들의 명예회복과 재심 과정

  

  2000년 1월 12일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인노회 사건 관련자들도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이하 심의위원회)로부터 인노회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을 받았다. 2001년 11월 27일 최동, 유봉인, 2003년 8월 19일 강병권, 2003년 9월 30일 송명진, 2004년 6월 15일 안재환, 2004년 6월 29일 정규옥, 2005년 5월 2일 한기성, 2004년 4월 27일 서형옥, 2005년 3월 14일 이광석, 2005년 8월 8일 손형민, 2006년 11월 20일 이동진, 2010년 1월 11일 이성우.
  그런데 심의위원회는 신정길에 대해서, 1985년 대우전자에 입사하여 1986년 해고된 사실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인노회 활동에 대해서는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인노회가 이적단체이고, 인노회 활동 약 5년 후인 1994년에 이적단체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는 이유 등을 들었다. 인노회 활동에 대해 명예회복 신청을 한 회원 중 유일하게 신정길만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신정길이 ‘심의위원회가 명예회복을 신청한 모든 회원들의 인노회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였고, 더구나 신정길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받은 간부들조차 인정하면서 신정길만 불인정한 것은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며, 5년 후의 행위를 가지고 선행 행위까지 재단한 것은 잘못이다’는 등의 이유로 행정소송을 제기, 2012년 5월 17일 서울행정법원, 2012년 11월 2일 서울고등법원에서 모두 승소하였다. 그러나 2014년 10월 6일 대법원 소부(주심: 민일영)에서 이를 파기 환송하였다.
  이에 신정길이 2015년 7월 15일 서울고법에 인노회 사건에 대한 재심을 신청하였다. 재심 신청 사유로는 첫째, 형사소송법 제420조의 제5호 유죄의 선고를 받은 자에 대하여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된 때(인노회 사건 관련자들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사실), 둘째, 위 제420조의 제7호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 이 두 가지 사유를 들었다. 그리고 1989년 2월 8일 불법연행되어 1989년 2월 11일까지 불법감금되었다는 사실을 1989년 2월 8일자 치안본부 작성 ‘범죄인지 동행보고서’와 2월 11일자 기각된 ‘영장’, 그리고 1989년 2월 11일자 치안본부 작성 ‘신정길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를 등사·제출하여 증명하였다. 특히 2월 11일자 조서에는 신정길이 불법연행, 구금 사실에 대해 항의하며 석방을 요구하면서 수사관들과 몸싸움을 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로써 불법체포, 구금된 사실이 증명되어 서울고법이 2015년 12월 31일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고, 재심을 거쳐 2017년 1월 18일 선고를 하였다. 선고 요지는 ‘인노회는 인천·부천지역 노동자들의 경제적·정치적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대중적 노동단체로서 그 구성 목적이나 활동 내역, 외부와의 연계 정도 등을 감안할 때,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동조하는 활동을 단체의 목적으로 삼지 않았고, 대한민국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실질적 해악을 끼칠 위험성도 없으므로 이적단체에 해당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다만 ‘신정길이 만든 「한국사회의 성격과 변혁운동의 성격」 제하의 유인물은 이적표현물이고, 동신전자 파업현장을 방문한 것은 노동쟁의조정법(3자 개입금지)을 위반한 것’이라며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였다. 대법원이 2020년 4월 29일 쌍방의 상고를 기각하여 위 판결은 확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인노회가 이적단체가 아님이 확정되었음에도, 2021년 4월 21일 행정소송의 파기 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신정길이 승소한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을 파기, 신정길의 인노회 활동에 대한 심의위원회의 불인정 결정을 취소하지 않았다. 재심재판에서 이적표현물이라고 판단한 표현물은 신정길이 인민노련 기관지 『노동자의 길』을 단순히 오려붙인 것으로, 그 기관지를 발행한 인민노련 간부들조차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었다. 이어 2021년 8월 12일 대법원이 심리불속행으로 확정하여 심의위원회의 오류는 끝내 바로잡히지 않았다.
  
  한편 서울중앙지법은 2022년 1월 27일 최동에 대해 재심개시 결정을 하였고(재심개시 사유: 신정길 재판으로 인노회가 이적단체가 아님이 확정됨. 수사관의 불법체포감금), 이성우에 대해서도 2022년 5월 25일 재심개시 결정(재심개시 사유: 수사관의 불법체포감금)을 하였다. 그 외 재심을 신청한 회원들에 대한 재심개시 여부는 2022년 10월 31일 현재까지 결정 나지 않았다.
  
  

5. 남은 문제들

  
  1) 국가보안법은 언제 폐지될까?

  신정길이 제작하였다는 이적표현물은 「한국사회의 성격과 변혁운동의 성격」이라는 제목으로 손글씨로 만든 4쪽짜리 문건이다. 당시 인노회 연대사업 간부들의 혼란을 해소하고자 당시 연대사업 대상 단체인 학생운동 진영의 주요 입장(식민지반본주의론)을 당시 주안지구 위원장이던 오동진이 요약정리하고, 인민노련의 입장을 신정길이 인민노련 기관지인 『노동자의 길』 29호, 33호를 단순히 오려 붙인 것이다. 이적 목적이 전혀 없이 인노회 간부들에게 연대사업 대상 단체들의 정치노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자료일 뿐인데도, 인노회 사건 27년이 지난 2020년 4월 사법부는 이적표현물로 판단하고 말았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남북 간에 수많은 합의와 선언이 나왔음에도 사법부의 인식은 아직도 1990년대에 머물러 있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언제까지 북한의 주장과 같거나, 비슷한 주장을 하거나, 그런 내용의 문건을 읽거나 소지하면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아야 한단 말인가? 인류 공동선과 민족 동질성마저 부인하는 악법은 진작 폐지되었어야 한다.
  또 신정길이 노동쟁의 조정법을 위반(3자개입)했다고 유죄를 선고한 내용도 일반 상식과 미풍양속에 비추어 납득하기 어렵다. 재판부의 법리는 ‘88년 6월 4일 안재환, 손형민 등 인노회 회원들이 동신전자 파업현장을 방문하여 노동쟁의 조정법을 위반하였는데, 신정길은 비록 이날 함께 가지는 않았지만, 안재환, 손형민 등과 인노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인노회 간부로 활동하였으므로, 공모공동정범에 해당하므로 유죄이다’라는 것이다. 쉬 납득하기 어렵다. 또 당시 회사 측이 수도와 전기를 끊어버려 어린 여공들이 기숙사에서 밥도 못 먹고 있는데 쌀 10킬로그램을 가져다준 게 죄가 된다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우리의 미풍양속은 노동자들에게만은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2) 인노회 어느 간부의 밀정 논란

  인노회 사건으로 구속된 후 수사관들의 강압적 수사결과 정신분열증상을 앓던 최동 열사는 1990년 8월 7일 분신자결로 고문정권에 항거하였다. 최동 열사와 학생운동 시절부터 10여 년을 긴밀하게 활동하였고, 인노회 부천지구 위원장이었던 김순호 경찰국장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밀정으로 의심받고 있다. 1989년 4월 28일~29일 부천지구 회원인 최동, 박종근, 조성욱 3인이 치안본부에 갑자기 연행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김순호와 밀접하게 활동하던 회원들인데다가 김순호가 아니면 알 수가 없는 내용들(부천지구 전체 분회 조직도와 전체 분회원 명단 등)을 수사관들이 미리 알고서 이들에게 추궁하였으며, 김순호는 이들 부천 회원들이 연행되기 직전인 89년 4월 초순경 갑자기 잠적하였고, 더구나 그해 8월에 인노회를 수사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대공공작 관련자’로 경장에 특채되어 빠른 속도로 승진하였으며, 또 수사관들이 수사 과정에서 먼저 김순호 본명을 거명하며 취조하였음에도 부천 회원들에게 윗선인 김순호의 소재지에 대해 한마디도 캐묻지 않았고, 그 무렵 인노회 간부들이 피신 중이었는데도 김순호는 그때 부천에 있던 친누나 집에 버젓이 있었으며, 구속도 되지 않았다는 점 등 때문에 의심을 받는 것이다. 진실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역사의 심판은 끝이 없고 준엄하다.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疎而不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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