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잡이 부족이 들려주는 노래

  

〈필자 주〉
  이 글은 울주 암각화를 그린 주인공들이 후대에 전하는 이야기다. 〈민중구술〉 코너는 스피커speaker가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면담자가 나서서 대담 형식으로 들려준다. 연구자들의 집필과 목소리를 거쳐 세상에 알려진다는 점에서 선사시대 사람들과 이 코너 주인공들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인터뷰이가 선사시대에 귀를 기울여 대신 전하는 이야기이므로 면담자는 빠지는 형식을 택하기로 한다.
  바위그림 연구자 장석호 박사는 계명대학교 미술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몽골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에서 바위그림을 연구하고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사연구소에서 중·동아시아 바위그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돌아와 폴리에틸렌(투명비닐)에 형상을 직접 옮겨 그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에 있는 대곡리(흔히 ‘반구대’라 부름)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를 채록하고 연구하였다. 또 세계의 바위그림을 찾아다니며 채록하고 연구하였다. 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가 2021년 퇴직해 언양읍에서 그간의 연구를 정리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미지의 마력』(역사공간, 2017) 『여신과 그 이미지』(동북아역사재단, 2019) 『중국의 바위그림』(동북아역사재단, 2020) 등이 있다.

  
  

시원을 찾아가는 원리

  

  화가들은 시스티나 성당 얘기를 많이 해요. 성소이고 그 속에는 당대 최고의 조형물들이 있고 최고 작가의 작품이 있죠. 그런데 그걸 거꾸로 추적해 올라가면 몽골 암각화에 닿습니다. 오늘 여기 서 있는 나는 어느 날 우주에서 툭 떨어진 게 아니라 무한한 어떤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그런 연장선상에서 내가 여기에 살아 있는 거라는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림1〉 앉아 있는 여자(출처: 스이다, 미누신스크 분지, 바데츠카야, 1970)
〈그림2〉 카파 로고(출처: 카파 공식 홈페이지)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디자인도 다 거기(〈그림 1〉 참조) 있어요. 이거(〈그림2〉 참조)는 스포츠 브랜드 로고죠. 원래 여자인데 대부분 고대에는 이런 경우 뿔 달린 소하고 같이 구성해요.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스에서 최근 발견된 쇼베Chauvet 동굴까지 갑니다. 3만 5천 년 전에 그려진 쇼베 동굴에 들어가면 여성의 골반 위에 소머리가 그려져 있어요. 소와 여자는 불가분이죠. 이처럼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쇼베 동굴의 그림이 있고 또 하나는 로셀의 각배를 든 비너스예요. 소뿔을 들고 있는데 그 소뿔 속에 선이 열세 개가 나 있대요. 그게 열세 개면 1년 동안 달이 차고 기우는 걸 나타낸 거다,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림3〉 쇼베 동굴: 소머리와 여성 하반신(장석호 제공)
〈그림4〉 각배를 든 비너스(Jean Clottes, 2008) (장석호 제공)

  
  
  
  
  
  

  그다음에 전 세계를 다니면서 확인한 것은 세계에서 발굴된 유적 대부분이 사실은 성소였다는 사실이에요. 그 자리를 무심히 지나면 그냥 긁힌 자국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성소죠. 석기시대가 됐든, 언제가 됐든 한번 사람이 그 자리에 와서 그림을 남기잖아요. 그 이후에 반드시 또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가서 자기들의 그림을 그려요. 그런 데다가 신흥 종교들은 기득권 종교, 그러니까 토착민들이 믿는 기왕의 신들, 그 신들을 가만히 놔두면 절대 새로운 종교를 믿지 않으니까 신상을 훼손해요. 너의 새로운 주인이 누구냐? 여기에 따라야지. 이게 계속해서 반복돼요. 이렇게 겹그려진 그림들을 팔림세스트palimpsest라고 해요. 양피지 위에 글을 쓰고 그 양피지가 귀하니까 나중에 약품을 써서 지워버리고 다시 사용하는 걸 말해요. 그러면 양피지 위에 몇 개의 시간이 응축되죠. 바위 위에 구석기부터 신석기, 청동기, 철기, 고대의 그림들이, 시간이 쫘악 다 중첩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걸 우리가 거꾸로 다시 하나씩 떼어내면 이게 연대기가 되죠. 도상 연대기가 만들어지는 거예요.
  덧새기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어요. 하나는 고의로 훼손하는 거예요. 다른 하나는 그걸 이용해서 더 정교하게 발전을 시키는 거고. 전자는 전 집단하고 우리 집단은 무관해, 하면서 과거의 기억을 없애버리죠. 후자는 그걸 잘 살려요. 살리기는 하지만 아주 같지는 않죠. 예를 들면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를 이어가며 기본 사상이 같아 심화시키면서도 차이가 발생하죠. 시대 양식은 늘 창출되는데, 이는 과거에 머물 수 없기 때문이죠. 젊은 세대의 욕구들을 반영하다 보니까 그런 게 그림 속에 따라 들어와요. 그게 재밌다는 거죠.
  그러고 난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기느냐면 그 자리에 종교가 오는 거죠, 불교가. 불교는 이미 시스템이 갖춰진 진짜 종교라면 그전에는 신화와 주술, 이런 게 다 엉켜 있죠. 기술적인 것과 정교한 종교적 카테고리가 아직 형성되기 전이라, 불교는 완전히 다르죠. 거기 불교 미술이 딱 들어오는 거예요. 그게 그 옆에 항상 들어선다는 거죠. 그전에 뭐가 있었냐면 사실은 무당의 굿당이죠. 그다음에 이슬람교가 또 옆으로 오는 거예요. 그다음에 또 뭐냐면 향교가 와요. 그다음에 또 뭐, 기독교가 가요. 그래서 유적 주변이 거대한 종교적 콤플렉스를 형성하죠. 그래서 한번 성소는 영원한 성소라는 거죠. 그런데 그 옆에 학교가 와, 목욕탕이 와요. 스포츠 시설이 와요. 다 거기에서 모이고 퍼져나가는 등 많은 사건이 이루어지더라고요. 사람이 모여들게 만드는 장소죠.
  
  

울주 대곡리 암각화, 예술의전당에 걸리다

〈그림5〉 대곡리의 도면(주 암면) ⓒ 장석호

  저는 ‘울주 대곡리 암각화의 주인공은 고래’라는 사실을 잡아냈죠. 고래가 제일 많은 것도 많은 거지만 고래 하나하나를 종별로 파악하고 그린 최초의 제작 집단이 거기 있었어요. 울산 지역 말고는 어디에도 이런 담론이 없어요.
  저는 원형에 대한 궁금증으로 암각화를 공부했잖아요. 대곡리 암각화를 찾아간 게 1984년도였어요. 그때는 거기 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알지도 못했죠. 말도 안 되는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나서 저는 부끄러웠어요. 낯 뜨겁다는 걸 느끼고는 일본으로 갔어요. 일본도 암각화 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공부가 잘 안 됐어요. 그래가지고 추천받은 게 몽골이었어요. 그때는 실패자로 간 건데 그게 노다지였죠. 저한테는 인생 최대 축복이었어요. 거기서 체벤도르지Tseveendorj라는 유명한 선생도 만나고 그분 소개로 이제 다시 러시아 가서 데블레트라는 유명한 학자를 만나고, 그다음에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중상류 지역을 4년 동안을 뒤지면서 공부했죠.
  울산 암각화를 어떻게 좀 제대로 공부할까, 어떻게 세계적인 수준으로 학문적 가치를 밝힐까? 그것밖에 없었어요. 전 세계를 다니면서도 항상 그 중심에는 울산이 있었어요. 나의 영원한 필드는 울산이다. 지금도 성지 순례하듯이 연초에 가서 기도하죠. 유적 옆에서 몇날 며칠 먹고 자고 산 사람은 저밖에 없을 거예요. 공부를 하다 보니까 아시아적이면서 세계사적인 보편성 속에서 우리만의 특이함을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박사학위 마치고 1999년도 9월에 러시아에서 돌아왔을 때예요. 11월에 학술회의 발표 자리에서 제가 시베리아에서 조사해놓은 도면을 다 보여줬어요. 마침 그때는 신화 전시회를 하려고 예술의전당에서 한 2~3년 준비한 시점이었어요. 전시 큐레이터는 대곡리 암각화, 천전리 암각화 탁본 두 개를 걸면 된다 생각했다는 거예요. 당시엔 그거 말고는 몰랐으니까. 그런데 제가 시베리아에서 조사한 컬러풀한 도면을 보여주니까 이분이 이렇게 할 수 없느냐고 저한테 제안했죠.
  그걸 새로 조사하는 데 엄청난 방해가 있었어요. 제 앞에 바로 탁본 친 사람이 있어요. 공식적으로 울산시에서 주관하고 그 사람이 용역을 받아 탁본을 치면서 한 열 개 정도의 형상들이 새로 발견됐다니까 울산에서는 엄청난 뉴스였죠. 그런데 제가 비닐을 대고 그대로 떠내는 게 실시간 생방송처럼 보도되니까 이 사람이 속이 상한 거죠. 한번은 울산시청 문화재과장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모든 조사를 멈추고 대기해라. 제가 암각화를 훼손한다는 게 이유였어요. 그 사람들은 공무원이었지만 기자들은 늘상 와서 보고 가니까 그 말이 먹히질 않았죠. 그때까지는 전부 다 바위에 못 치고 그걸 조사했거든요.
  진짜 훼손은 벽에 먹물 먹이고 합성수지(FRP)로 카피를 떠내는 등의 과정에서 일어나요. FRP를 떠내려면 벽면에 용제를 점액 상태로 만들어 거즈 같은 걸 붙이고 작업해서 떼어내니까 아무리 조심해도 코팅 등의 문제가 생기죠. 나중에 보면 어떤 데는 합성수지의 잔존물들이 남아 있어요. 지금이야 암각화가 물에 빠졌다가 드러났다가 해서 조금은 빠졌죠. 더 심각한 문제는 바위의 촘촘한 구멍들을 합성 약품이 다 막아버리면서 발생해요. 그려진 바위 표면이 떨어지면 나중에 형상들 윤곽을 찾아낼 수 없게 돼요. 우리는 아예 바위에 발판을 대지도 않고 50센티미터씩 간격을 두고 세운 작업대에서 비닐에다 그렸어요. 울산시청 공무원하고 학예연구사가 와서 보고 놀라는 거예요. 학예연구사가 발굴조사 현장에 그렇게 다녀도 이런 방법은 처음 봤다고 말하였죠.
  그때 그린 도면이 15미터짜리였어요. 일대일로 채록해서 컬러로 새로 싹 그려줬거든요. 주 암면 8미터를 비롯해 여섯 군데 벽 전체를 꽉 채워서 다 걸었어요. 그러니까 2000년 7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전시하고 지금 예술의전당이 가지고 있죠.
  
  

서양 중심의 사고

  

  최근에 콜롬비아 아마존에서 4만 년 이전의 그림이 발견됐어요. 무려 7만 개가 그려져 있어요. 지금은 지구상에 없는 동물들이 그려져 있어서 그걸로 연대 추정을 한 거예요. 인도네시아 술라웨시라는 섬에서도 4만 년을 넘어가는 그림이 발견됐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학문적 성과와 이론으로는 그때를 도무지 설명 못해요. 우리는 유럽의 지성들이 이룬 성과에 함몰되는 경향이 있죠. 모든 문화가 거기서 발전한 거다. 유럽중심주의의 어떤 부문이 이룬 현상인데 우리는 지금 여전히 거기에 매몰돼 있다.
  제가 도입에서 시스티나 성당을 예로 들어 잘못된 유럽 중심주의를 지적했죠. 어쨌든 새로운 인본주의 르네상스가 유럽에서 부흥한 거잖아요. 그때 소위 말해서 원근법이 발견됐다고 이야기해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라는 건축가가 소위 르네상스 건축을 하면서 그걸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말은 그때까지의 학문 세계에서는 맞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입체감 있게 그림을 그려내지 못했으니까요. 전부 다 평면이라 입체감 있는 공간으로 바꿀 수 없었어요. 멀고 가까운 차이를 어떻게 화면 속에다가 드러낼까? 이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에요. 아무리 큰 것도 멀리 가면 작아져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표현할 줄은 몰랐던 거죠. 공간 속 소실점으로 모든 사물이 수렴된다, 이건 획기적인 이야기였죠. 그 뒤 모든 과학이 거기로 빨려 들어가며 매몰된 거지요. 그러니까 알베르티라는 화가는 이걸 카메라로 카피하듯 그려냈고 과학은 그걸 증명해내죠. 여기에서 시각적으로 엄청나게 큰 변화가 왔어요.
  사실 이것은 또 다른 왜곡일 수도 있어요. 선사시대의 그림들은 다시점多視點을 썼어요. 원근법은 거리가 멀고 가까워지는 데 따른 차이의 표현이니까 뒤에 있는 걸 볼 수 없잖아요. 그다음에 사물 개체 하나하나의 중요성을 살펴낼 수가 없는 거죠. 왜? 원근법으로 보면 뒷면이 가려져 버리니까. 다시점 화법은 가려져 있는 것도 뒤로 돌아가서 보는 기법이죠. 시점이 사물을 좇아가는 거죠.
  
  

사물 중심의 우주적 사고

  

  원근법은 1인칭 시점(一視点)인데 이게 참 중요한 말이에요. 이게 바로 인본주의죠. 다시점 화법은 물체 중심, 사물 중심이에요. 모두 산재되어 있는 거죠. 세상에 주인이 어디 있어요? 전부 다 저마다의 자리를 가지고 있으니 궁금하면 내가 돌아가서 봐야죠. 왜냐하면 “나를 중심으로 모여” 이러고서 원근법을 만들면 모든 건 내 앞에서 정리되면서 “지금 우리가 아는 이게 바르다”는 편견을 쌓는 계기가 되죠. 그랬건 저랬건 간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만든 원근법 이전에, 1300년 혹은 1100년 이전에 이미 아시아에서는 그걸 써먹고 있었어요.
  예를 들면 우리 그 고분벽화에도 소가 끄는 수레 그림이 있어요. 또 ‘타쉬트이크’라고 하는 시대가 있는데 기원 전후의, 흉노 시대와 거의 같아요. 이 시대 사람들은 달리는 말의 다리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 달리는 말을 그린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어요. 순간 포착을 해야 하는데 이건 끊임없이 인류가 그려온 그림들을 부정했다는 거죠. 이게 아닌데, 달리는 걸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못 만들어낸 거야. 근데 어느 순간 타쉬트이크라는 그 문화기文化期에 와서는 달리는 것도 그리고, 그다음에 뒤에 있는 거 어떻게 그려요? 그래서 공간 너머에 있는 것도 중첩시켜서 그렸죠. 근데 기가 막히게 만들었어요. 입체감이 나오게 그리는 거예요. 서양의 원근법이 약 14세기면 그건 낮춰 잡아도 3세기예요. 그러면 1100년 이상, 빠르면 천오륙백 년 이상 앞선 시기에 원근법을 아시아 대륙에서 써먹고 있던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원근법에 대한 지식은 잘못된 것이죠.
  제가 그림 공부를 하고 선사시대 유적을 찾아다니면서 이런 쏠쏠한 재미도 알게 되었죠. 그걸 논문으로 썼더니 사람들이 그걸 원근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네요. 이 사람들은 너무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생각했죠. 일본에서 공부한 사람은 아무래도 일본에 가깝고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은 미국에 가깝고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은 또 그런 게 좀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이거는 명백하게 패러다임을, 바라보는 시각의 얼개를 싹 바꿔버리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못된 교육을 받고 있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이미 오래전에 극동지역을 주목한 학자는 문명의 두 개의 축이 있다고 말해요. 하나는 소위 프랑코-칸타브리아라고 하는 프랑스가 포함된 유럽지역이고, 다른 하나는 아시아다.
  
  

조형 매너

  

  선사미술은 그림을 전공한 사람이 일반 연구자보다 접근하기 유리해요. 형상 판독을 하는 거니까 회화를 한 사람이 연구하면 보다 이점이 있죠. 작가마다 조형 매너가 있어요. 예를 들어볼게요. 파사주passage 기법이라고 세잔느가 많이 쓰는 화법은 아무도 흉내를 못 내요. 세잔느는 그게 체화돼서 붓만 들면 이렇게 움직여요. 근데 고흐는 붓만 들면 꿈틀꿈틀 움직이는 듯한 터치를 보여주지요.
  세잔느나 고흐나 이런 사람들은 그림을 보면 바로 표가 나잖아요. 브러시워크brushwork라고도 하는데 붓 터치에서 그런 걸 느낄 수 있죠. 램브란트 같은 경우는 빛과 그림자를 대비시키면서 선택과 집중이라 할 수 있는 자기만의 독특한 좋은 방법을 만들어내죠. 그런 게 선사시대의 회화에도 그대로 있어요.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떤 손놀림을 가졌는지 어떤 타격 방법을 썼는지 어떤 물감을 썼는지 이런 걸 금방 구분해낼 수 있어요. 조형 매너를 모르는 사람은 절대 찾아낼 수가 없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런 부분에서는 장점이 있어요. 제가 직접 그림을 그리고 드로잉을 했기 때문에, 타격 방법이 사람에 따라 굉장히 미묘하니까 타격 흔적을 찾아서 옮겨 그려야 하는데 바위에 그려진 것도 보면 같은 사람이 했는지 안 했는지 다른 사람 두 배, 세 배 이상 빠르게 판독하죠. 다른 사람들더러 가서 형태를 찾으라면 찾겠어요? 또 채록해낼 수 있겠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엄청난 장점입니다.
  
  

울주 대곡리 암각화를 그린 사람들

  

  ‘울주 대곡리 암각화를 세계적 유산’이라고 할 때 중심은 ‘고래잡이’예요. 저기 카렐리야(러시아 서북쪽 끝)라든지 여기 축치(러시아 북동부 추콧카반도 원주민), 저기 저 베링 해협이라든지 이런 데는 고래처럼 그리지만 무슨 고래인지 구분이 안 돼요. 그런데 여기는 무슨 고래인지 알 수 있는 게 열한 종이 그려져 있으니 굉장하죠. 그래서 졸저 『이미지의 마력』에서 저는 ‘선사시대의 고래 도감’이라고 말했어요.
  저는 세계를 다니면서 여러 군데를 조사했잖아요. 경험이 쌓이다 보니까 그림을 한 번 그리는 게 아니라 두 번, 세 번 여러 개로 겹쳐 그리는구나, 알게 되었죠. 먼저 그린 사람들은 아주 부드럽게 쪼아서 그려요. 그 위에 덧그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타격이 강해져야겠죠. 그다음에 또 왔어요. 더 세게 더 세게 하는 거죠. 처음 그림과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그림은 스타일이 다르고 강도도 강해지고 이런 차이가 있죠. 이걸 쫀 사람하고 저걸 쫀 사람하고 다르다는 걸 조형 매너로 구분해요. 보통 사람들한테 이게 보일까요?

〈그림6〉 중첩. 고래잡이 장면: 두 척의 배가 협력하여 오른쪽의 고래를 잡는 장면. 뱃머리에 작살잡이가 작살을 들고 서 있다. ⓒ 장석호

  그걸 탁본을 치면 여러 겹 중첩되어 있으니까 뒤죽박죽 판독하기 어렵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전모를 파악 못하고 아는 것만 보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그걸 정교하게 분석해 층위를 다 구분하죠. 탁본 치기에서 결정적으로 놓친 게 뭐냐면 작살을 들고 고래 잡는 장면이에요. 중층 구조를 볼 수가 없었죠.

〈그림7〉 중첩 분석: 대곡리 주 암면 왼쪽 위. 선으로 그린 고래 몸통은 오른쪽의 고래 지느러미. 위쪽의 고래 꼬리지느러미, 아래쪽의 호랑이 귀가 침범했다. ⓒ 장석호

  그다음에 살집 좋은, 면 쪼기로 그린 고래 형상 위에, 예를 들어 선으로 호랑이를 딱 쪼아놨어요. 그러면 면 쪼기가 먼저 그려진 것이고 선 쪼기가 나중에 새긴 것이었다고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게 맞아요? 그때까지는 그게 맞는 거였어요. 그런데 우리가 보니까 선 쪼기의 고래 잡는 장면을 제일 먼저 그려놓은 거야. 선 쪼기로 그린 고래 형상에 면 쪼기의 고래 형상이 침범해버린 거야. 그러면 순서는 선 쪼기가 앞서고 그 위에 면 쪼기가 덧그려지고, 다시 선 쪼기, 그다음에 면 쪼기 뭐 이렇게 제작 순서가 완전히 바뀌어요. 완전히 해석이 달라지고 형상의 숫자도 달라져버리고 문화의 주인공도 달라져요. 그렇게 첫 번째 그린 사람들은 전부 다 고래잡이였다는 결론을 얻었죠.
  또 지금까지도 이 그림은 청동기 시대에 정착해 수렵을 병행한 집단이 그린 것이다, 이렇게 해석해요. 그러나 그건 아니다. 처음에 그림을 그린 이 바위의 주인들, 이 바위를 성소로 삼았던 사람들은 고래잡이를 했다. 여름에는 고래를 잡고 겨울에는 수렵을 하기는 하지만 고래잡이가 주업이었다. 지금도 축치 사람들은 여름철에는 고래를 잡고 겨울철에는 수렵을 해요. 먹을 게 많으면 좋죠. 하루 일해 하루 먹어야 하는 사람들한테 그림 그리라고 그러겠어요? 이 그림도 고래잡이를 한 사람이니까 가능했던 거예요.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1년 내내 식량 걱정 안 해도 돼요.
  
  

우리는 어디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그렇지만 예술은 없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가 여기 있었다. 나는, 우리는 누구인지 이런 근원에 대한 의문을 드러낸 거죠. 또 하나는 고래잡이는 이런 방법으로 하는 거야, 설계도는 이런 거야. 이렇게 ‘타임캡슐’이라는 걸 만든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가 수천 년 후에 그걸 보고 과거의 일을 해독하는 거죠. 그 성소에서 앞시대와 뒤시대 사람들이 계속해서 교감하죠. 거기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거기서 결혼식이 치러지고 거기서 주민 총의를 모아서 삶의 목표를 정해가지고 자기 자리로 나아가죠. 그다음에 또 어떤 정해진 날에 다시 와서 그걸 또 확인하고 잘잘못을 검증하고 그런 자리거든요.
  때문에 저는 처음부터 예술적 충동이 있었다고는 보지 않아요. 그렇지만 집단 내부에서도 이미 직능별로 분화돼서 작살을 잘 던지는 사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 역할 분담이 있었다는 거죠. 어떤 솜씨 좋은 사람이 돌고래는 이렇게 생겼어, 귀신고래는 주름이 여기까지 오고 혹등고래는 혹이 났고 가슴지느러미가 크고, 이런 디테일을 아는 거죠. 〈아메리카 갓 탤런트America’s Got Talent〉에서 소리만 들으면 다 외워서 우승한 한국계 미국인(Kodi Lee)이 있어요. 또 스티븐 윌셔Stephen Wiltshire(1974~)는 뉴욕시, 도쿄 시내를 30분 정도 보고 그걸 다 그려버려요.

〈그림8〉 순록과 연어: 빠르게 달리는 모습 (장석호 제공)

  선사시대의 그림 속에는 달리는 순록의 다리를 그린 게 있어요.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1800년대 말 카메라가 발견되기 전까지 서양 그림을 보면 달리는 말은 앞발 둘을 똑같은 모양으로 들고 있어요. 또 유럽을 다녀보면 동상에서 기사를 태운 말들이 전부 다 앞다리를 들고 있는데, 뒷다리로 서 있어야 하니까 중심이 안 잡히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돼? 앞에다가 지지대를 받쳐놓는 거죠. 이런 웃기는 일을 했던 거죠. 말은 당연히 앞발 둘을 동시에 같은 모양으로 들고 달리는 줄 알았던 거죠. 반면 석기시대 사람들은 딱 비디오로 찍은 것처럼 본 것을 기억하는 거지. 그런데 당시에는 카메라도 글자도 없었으니까 어떤 기억을 남기려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가 지닌 선사시대에 관한 상식으로 보면 놀라운 일이에요. 근데 우리 중 특별한 사람한테는 그 능력이 있어요. 또 소수의 서번트 신드롬savant symdrome을 지닌 최고급 사람들은 당연히 그런 걸 하고도 남죠. 그런 것처럼 그 마을의 재능이 있는 특별한 사람을 뽑아가지고 그려라 하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그는 그만의 조형 매너를 발휘하는 거죠. 첫 번째 그린 사람은 이렇게 그리고 두 번째 그린 사람은 저렇게, 세 번째는 또 다르게, 다 달라요. 작업을 하는 사람은 정해진 날 그곳으로 가서 얼마 동안의 기한 내에 주어진 임무를 다하겠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게 어찌 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짠하고 드러냈겠죠. 요즘도 하다못해 공사를 하더라도 그런 식으로 가리고 하잖아요.
  그런 유적을 요즘 와서 보니까 그 속의 그림들이 전부 다 미술의 원형이라는 범주에 들어가 있는 거지, 원래 그림을 그리려고 했던 거는 아닐 것이다. 저는 그렇게 보는 거죠. 그런데 너무 잘 그렸어요.
  
  

선사시대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

  

  여기서 짚을 게 서화동체론書畫同體論이라는 말이에요. 글씨와 그림은 뿌리가 같다. 과거에는 그림을 수단으로 어떤 기록을 한 거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그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천전리 암각화’를 천전리 각석刻石, 서석書石, ‘글씨가 쓰인 바위’라고 해요. 세계적으로 그림이 그려진 바위를 전부 다 ‘글씨 바위’라고 해요. 원래 이 사람들의 의도는 기록에 있다. 그들의 조상, 지금, 미래가 어떻게 될지 영혼을 다 담아놓은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다 그렇게 보는 거죠. 거기는 성소니까 계속해서 그 자리에 와서 성인식을 하든 뭘 하든 해야 돼. 후대에 와서 우리가 미술의 역사를 찾아 들어가다 보니까 우리가 하는 미술의 뿌리가 거기에 있구나. 그래서 우리가 그것들과 연결시킨 거죠. 그러나 최초 의도에서 이걸 잘 그려야 되겠다, 이걸 멋지게 그려야 되겠다 하는 욕망이 앞섰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게 전시용이었다, 과시용이었다, 솜씨를 뽐내기 위한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이래요. 굳이 동굴 그 깊숙한 곳에다 그릴 필요가 있었나? 저기 알타미라 동굴이 발견됐을 때 발견자는 굉장히 모함을 받았어요. 조작이다. 위작이다. 선사 취향이 늘어나니까 알타미라 영주 사우투올라 후작이 자기 동굴 속에다 사람을 시켜 그렸다고. 그 집 하인이 벙어리니까 그 하인한테 시켰다고. 그 하인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나? 발견자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아 결국은 화병으로 죽어요. 아이러니한 게 선봉에 서서 부정하고 공격했던 사람이 다른 데 가서 똑같은 동굴을 발견하게 돼요.
  
  

인간은 언제나 개화된 시대에 살았다

  

  스칸디나비아의 저 노르웨이 끝에서 태평양 이쪽 끝까지 다 누비고 다녔어요. 횡으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아무르까지, 노르웨이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그 위의 하바롭스크까지 관통해서 거의 사이에 있는 유적들을 다 뒤졌죠. 종으로는 저 위의 카렐리야지역에서 탄자니아, 오스트레일리아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적들은 다 보고 다닌 거죠. 그 많은 바위그림을 가능한 데는 제가 거진 다 채록했어요. 중국의 서른세 개 유적도 다 조사하고 일부는 그림을 그렸으니 그게 어마어마한 자료잖아요.
  그걸 한자리에 쫙 펼쳐놓고 우리가 보편적 미감이라고 말하는 게 무엇인지 발견해보는 거죠. 그다음에 왜 지구상 저쪽 스칸디나비아랑 저기 아마존강에 있는 그림이랑 시베리아 사람의 그림이 똑같은지. 사람들이 상상한, 예를 들면 트로아 플뢰르 동굴 속의 소뿔을 달고 있는 사람, 사슴뿔을 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같아요. 주술사도 17세기 퉁구스족의 주술사랑 모양이 똑같아요. 이거 어떻게 설명을 할까? 그러니까 이런 공통점 속에서 우리가 보편적인 인류의 종교적 심성, 미감, 조형 매너 이런 것들이 뭔지 알아내는 것은 중요한 이야기다. 그래서 지금 작업 중인 ‘천 개의 이야기’도 거기에서 나온 거고 그다음에 제가 또 한 가지 구상을 하고 있는데 시간이 필요한 일이에요.
  ‘마카로니에서 캘리그래피까지!’
  국수 마카로니는 구불구불하잖아요. 동굴에 들어가 보면 선사미술의 핑거 페인트가 마카로니처럼 생긴 거야. 그래서 최고 오래된 사람의 흔적에서부터 최근의 캘리그래피까지를 하나로 꿰는 거죠. 이렇게도 저렇게도 생각해보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그것들이 우리하고 무관한 게 아니다. 내가 그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어떤 프로세스 중 지금 이 시점에 내가 서 있는 거다. 여기에 수많은 아프리카의 그 이브African Eve인 루시Lucy(최초의 인류)부터 시작해 수많은 인류가 거쳐갔고 그 DNA를 우리는 그대로 이어받아왔고 그 삶의 방식이 우리가 두 다리를 딛고 걸어 다니는 이상은 절대 바뀔 수가 없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개화된 시대에 살고 있는 듯 여기지만 언제나 인간은 개화된 시대에 살았다. 지금 이 순간 최고의 과학 혜택을 누리며 사는 듯하여도 500년 후가 되면 우리는 너무너무 미개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저마다 최고로 발전한 시대에 살았던 조상들이 축적해 온 어떤 인간적 몸부림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데, 조금 더 필요한 게 뭔지 이런 걸 조금 더 예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걸 고민하고 사는 거 아니냐. 저는 그런 몸부림을 지금 하는 거죠. 요즘은 계속 그런 생각을 합니다. 수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그 학자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짚어보면 결론은 또 하나예요. 어떻게 변화해왔나? 하는 이야기하고 본질이 뭐냐? 본질의 그 본질의 본질을 쪼개가면 그게 양자다, 소립자다, 전자다 뭐 그런 이야기죠.
  그런데 우리는, 저는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왜? 우리는 저마다 할 일이 다른 데 있으니까. 그냥 좋은 책이 나오면 한번 읽어보고 개념이 안 잡히더라도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인간의 문제를 혹은 사람의 편리함을 이끌어내려고 했구나 하면 되는 거예요. 저는 그럼 뭐를 해야 하나? 도상을 보고 공부한 사람이니까 이걸 사람들한테 쉽게 좀 볼 수 있게 해주고 우리는 옛날 사람이랑 다르지 않구나. 그리고 우리는 그 연장선에서 오늘 이 자리에 서 있구나 생각해보게 하는 거죠.
  
  

암각화를 망치는 사람들

  

  제가 박사를 받고 돌아온 지가 20년이 지났어요. 처음에 운 좋게 대곡리 암각화를 그렸죠. 진짜 영광스럽게도 그걸 그려내고 인정받았죠. 울산시가 또 “아, 천전리는 장석호한테 줘” 이래서 천전리 그림도 제가 다 조사를 했으니 그 두 개의 국보를 손으로 그린 사람은 세계에서 제가 유일하죠.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바위그림 대부분을 다 그려서 왔기 때문에 이제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세계적인 이 암각화를 어떻게 보존할까? 이거는 연구자로서는 너무 당연한 화두예요.
  사실은 연구자들이 유적 훼손의 주범이에요. 그게 돈이거든요. 그걸 순수하게 연구과제로 바라보는 사람은 제가 봐서는 1퍼센트도 안 돼요. 어떻게 하면 그것을 독차지하고 끊임없이 맛있는 걸 뽑아 먹을까 궁리하면서, 이게 어떻게 연구되고 또 보존이 되면 좋을까 하는 고민에서는 점점 멀어지죠. 그래서 암각화 연구는 본질에서 벗어나고, 끊임없이 어떤 이슈를 제기하죠. 훼손되고 있다! 암면이 엄청나게 뭉개져서 이 그림이 다 없어지고 있다. 이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거죠. 그건 동기는 좋았어요. 그러나 내용에는 불순물이 많이 끼어들었죠.
  또 한 가지 이슈는 물 문제가 있어요. 물 때문에 그림이 훼손되고 있다. 그래서 물에서 건져야 한다. 그것도 이슈는 좋아요. 그러나 완전히 100퍼센트 맞는 말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그런 사례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세계 많은 유적지가 물 가까이 있고, 물이 항상 들었다 빠졌다 하는 지점에 그려놓은 경우도 많아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이슈를 선점한 거예요.
  문제는 이게 무슨 그림이고 어떻게 연구해서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고, 세분화해서 다른 쪽과 연계해나갈지 연구를 확장한 게 아니라 거기서 모든 연구를 정지시키고 보존해야 한다 이렇게 나간 거죠. 그러면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는 막혀버리죠. 선점한 사람들은 수천 수억 연구 용역비를 받아서 계속 쓰면서 국고를 낭비하게 되죠.
  물로부터 보호하자고 내놓은 방안이 네 가지였어요. 하나는 하류의 사연댐을 해체시켜버리는 거였어요. 근데 이거는 씨알도 안 먹는 이야기라. 그럼 울산 시민은 어떻게 식수를 해결하냐? 해서 사연댐 해체는 논외가 됐어요. 사연댐은 원래는 울산 공장들을 위해 만든 거지 실상은 식수로 끌어다 쓰지도 않아요. 그래도 말하기가 좋잖아요. 울산 사람들이 맑은 물을 먹어야 하는데 낙동강 물은 먹기 싫다는 거죠. 그래서 물을 보호해야 한다고 새로운 이슈가 또 파생되는 거죠. 그러면 댐을 없앨 수는 없으니까 차수벽을 설치하자. 두 번째 안인 차수벽은 암각화를 에둘러 벽을 쌓자는 건데 물 때문에 댐 속에 댐을 쌓는 거라 저를 비롯한 학자들로부터 바로 반박당했어요. 그걸 막으려면 최소한 그 앞에 15미터 이상 댐을 쌓아야 하는데 암각화를 완전히 감옥 속에 가둬놓아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거죠. 또 여름에 장마지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어떻게 맨날 펌프로 퍼내겠나? 장마철만 문제도 아니다. 그것도 안 되니까 세 번째 안으로 앞산에 터널을 뚫어 암각화 가까이로 물이 안 지나가게 유로를 변경해버려라. 이 또한 좀 넓은 차수벽일 뿐 사실 같은 말이에요. 그러자 이번에는 그렇게 안 해도 차수벽을 만들 수 있다. 여름에 비 오면 닫고 여는 카이네틱 댐을 만들자. 카이네틱 댐이라는 네 번째 안이 채택되면서 돈을 20억인가 얼만가 썼어요. 그 자체로 너무 웃기는 예산 낭비자 환경 훼손이죠.
  이런 식으로 항상 물 문제를 암각화와 묶어놔요. 한 3킬로미터 위에다가 대곡댐이라는 큰 댐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물을 안 내려주면 사연댐에는 물도 없어요. 이게 또 수자원공사의 집단 이기주의이거든요. 거기에 취수시설을 만들어 그 물을 먹으면 되는데 취수시설을 안 하고 항구적으로 이 자리를 자기네 걸로 점유하는 거죠. 유적 관점에서는 신경을 안 쓰니까 그렇게 연구자는 늘 소수자가 돼버렸죠.
  
  

마카로니에서 캘리그래피까지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박물관 지을 때 내부 설계 전체 얼개를 다 잡아줬는데 어느 날 제가 돈만 밝히는 사람으로 알려졌더군요. 제가 가진 모든 걸 내놓으래요. 그리는 못한다 했죠. 내부 시설에 30억인가 되는, 그때로서는 어마어마한 예산을 쓰면서 30만 원씩 세 번 자문해주고 90만 원 받았을 뿐인데. 연구자로서 제가 누린 영광을 생각하면 그걸로 된 거죠.
  최근에는, 경상북도 상주에 물량리라는 데가 있어요, 얼굴 그림이 새로 발견됐죠. 옥스퍼드 대학에서 5년마다 내는 『Rock Art Studies』라는 학술지가 있는데 한국의 연구 동향을 써달라고 해서 그걸 써줬어요. 그렇게 공부하다 보니까 이거 참 재밌구나, 그래서 책을 한번 재밌게 써야겠다. 마음이 부풀어서 그걸 하고 있어요.
  상주 바위그림에는 사람의 눈이 그려져 있어요. 얼굴에 눈하고 코, 그런 그림이 한 스무 개 정도. 눈을 그린 게 특이하고 한국에서 처음 발견된 거라 유라시아 대륙 속에서 상주 암각화 의미가 어떤 것인지 그걸 좀 비교하면서 신화적이고 종교적, 무속적, 애니미즘적 그런 시각에서 써도 재밌겠다 싶은 생각이에요. 그거 말고도 구상은 많았어요. 1년 동안 북경대 초빙교수 신분으로 가서 매달 정해 놓고 유적을 채록하러 다녔는데 중국이 워낙 크니까 열두 개 성, 서른 개의 유적을 조사했어요. 그때 많은 영감을 받았어요. 그전에 봤던 것들하고 이게 다 오버랩되면서 이거는 이렇게 꿰고 저렇게 꿰고 그런 게 막 떠오르는 거죠.
  전혀 다른 형상들을 크게 헤아리면 1만 개도 넘겠죠. 거기서 천 개만 뽑아서 그 이야기를 좀 써볼 계획이에요. 제목을 ‘천 개의 이미지 천 개의 이야기’로 정하고 계속 메모하는 중이고, 오래전 출판사에서 ‘세계의 바위그림’ 시리즈를 내자는 주문을 받아 놓았어요. 지금까지는 공직 생활을 했으니까 구상만 하고 있었죠.
  그다음에 제 꿈이 박물관을 짓는 거예요. 너무나 많은 도면을 제가 그려가지고 있고 또 사진도 찍어 지니고 있거든요. 제가 아무 작업도 안 하고 사라지면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같이 사라져버릴 테니까. 그래서 제가 개인의 공부 때문에 한 거지만 누가 저처럼 다니려면 엄청난 공력을 들여야 할 텐데 저는 진짜 겁 없이 쫓아다녔고 그걸 잘 정리해 놓으면 그다음에 공부하는 사람들한테도 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이제 박물관을 한번 지어야겠다, 계속 그걸 어찌하면 좋을까 돈도 없는데, 미리 생각만 키우고 뜻만 가지고 있는 거죠.
  사실 저는 울산 고래 집단의 후손들이 어떤 삶을 이어왔고 그래서 오늘 어떻게 내가 이 시점에 와 있는지 이런 거대담론이 제일 궁금해요. 현재 울산 풍토하고 그 시대 울산 상황은 어떻게 매치가 되느냐? 한번 성소는 영원한 성소라고 했죠. 고래잡이배를 만드는 데는 계속 배를 만드는 거지. 그 지역에 조선소가 있죠. 또 하나는 고래 무게가 한 100톤이면 20톤은 기름이다, 끝! 선사시대 정유 공장인 셈이죠. 그게 계속 선순환을 한다는 거지. 그런 일이 이어지고 그런 DNA가 울산 사람한테, 장생포 앞바다 사람들에게는 있다. 그러니까 현재 수많은 화학 공장이 들어가 있고 조선소가 들어서 있고 우리가 그런 걸 바라봐야 한다. 이제 그러면 뭘 해야 되냐? 앞으로의 연구 과제는 옛날에 어디에 조선소가 있었느냐? 배는 어떻게 만들었느냐?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까? 또는 바꿔야 하나? 이런 것들도 공부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지 그게 완전한 복원이 된다고 저는 생각해요.
  어쨌든 저는 ‘마카로니에서 캘리그래피’까지 제가 해야 할 일이구나 하는 사명감, 그런 걸 좀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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