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Z세대 두 여자 이야기

  
  

〈필자 주〉
  프로 이직러이자 노무법인에서 근무하는 박진희와 프로 준비러인 미술 기간제 교사 이수지가 만났다. 그녀들이 나눠본 MZ세대 여성들의 삶과 내면의 대화. 첫 번째 글은 박진희가 이수지를 인터뷰한 내용이고, 두 번째 글은 이수지가 들여다본 박진희의 이야기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바닐라라떼만큼이나 달랐던 취향이 자연스레 섞여 서로의 미각을 깨운다.

  
  

‘밥 먹여주는 예술’을 찾아서(박진희가 인터뷰한 이수지)

  

  그녀는 ‘파이어족’을 꿈꾸는 ‘주린이’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가끔 말로 피를 보기도 하고, 정의롭고 싶지만 사회에 순응하는 보통의 사람이다. 장래 희망은 아무 걱정 없는 백수다.
  무더운 한여름날, 우리는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수지 언니는 나와 동네 주민이다. 이날 처음으로 마스크를 벗은 모습을 봤다. 그녀의 목소리 톤은 ‘솔’에 가깝고 나긋나긋한 말투에 말을 할 때는 한 박자 쉬어가는 습관이 있다. 나이가 한참 어린 나에게도 쉽게 말을 놓지 않는 그녀의 직업은 미술 기간제 교사다.
  2021년 교육통계연보에 의하면 고등학교 교사 10명 중 2명, 사립학교 교사 4명 중 1명이 기간제 교사다. 내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은 시간강사였다. 친구는 급여가 들쑥날쑥해서 월세 등의 고정 지출을 감당하지 못할까봐 늘 노심초사했다. 어렵사리 박사학위를 받아도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판단한 친구는 정든 고향과 가족의 품을 벗어나 먹고살 길을 찾아 해외로 떠났다.
  수지 언니는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고 싶었다. 하지만 예술은 배고팠다. 그렇게 ‘먹고사니즘’에 치여 지금에 이르렀다. 당장의 배고픔은 가셨으나, 또 다른 굶주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다 그림
  “여섯 살 무렵 여름이었어요. 유치원 그림 그리기 시간이었고요. 그때 다들 졸라맨을 그렸을 때 저만 갈래머리를 동글동글 땋은 사람 형상을 그렸어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칭찬해주셨는데 덩달아 주변 친구들까지 잘 그렸다고 해줬던 기억이 나요.”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예술고등학교와 미술대학에 진학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학교 성적도 좋았다. 부모님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녀는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다. 하루를 꽉 채워 ‘학원 뺑뺑이’를 돌았다. 그런데 없는 시간을 쪼개 ‘만화학원’을 다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물레 돌리는 데 방해된다며 집게손가락 한 마디를 스스로 자른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언니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유년 시절의 한 조각을 잘라 실현하고자 했던 꿈의 먹이로 바쳤다.
  “일주일 내내 쉬는 날 없이 학원을 다녔어요. 새벽 5시 체육관으로 시작해서 방과 후에는 속셈, 국어, 영어, 수학 학원을 다녔고요. 부산 남산에 있는 속독학원도 1년 다녔어요. 그거 마치고 나면 미술학원을 가요. 주말에는 만화학원을 갔어요. 만화학원은 제가 요구해서 다닌 거였어요. 나머지는 제 요구가 아니었죠. 부모님의 기대치가 너무 크기도 했고요. 그때는 제 성격이 소심해서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더 그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는 단과학원 빼고 나머지 학원들을 전부 관두고 오로지 미술에만 전념했어요. 고3 수능 막바지에는 ‘학원계’라고 해서 예체능계열 학생은 학원에서 발급해주는 출석증을 학교에 제출하고 학교에 안 갔어요. 3월부터 학원에서 실기를 준비했죠.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있었어요.”
  그녀는 원하던 대로 만화과에 입학한다. 대학 시절 수많은 만화를 그렸다. 하지만 생각했던 대로 그려지지 않았고 힘든 일도 많았다.
  나는 운좋게 MZ세대로 태어나 〈투니버스〉 황금기를 거치고 초창기 웹툰을 두루 섭렵하며 자랐다. 리모컨 버튼 하나만 누르면 TV 만화를 볼 수 있었고 몇 번의 클릭과 터치면 어디서든 웹툰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편의 만화가 완성되려면 수만 번의 펜 선이 그려졌다가 지워져야 하고, 대다수의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고 사그라진다는 사실을 어른이 된 후에 알게 되었다.
  “그때가 잡지 만화에서 웹툰으로 넘어가는 시기라서 교수님이 웹툰을 해보라며 권유하셨죠. 그 이후로 정말로 잡지형 만화가 사라졌고 만화가의 등용문이 없어졌어요.”
  언니는 〈레진코믹스〉에서 생활웹툰을 연재한 적이 있다. 하지만 기대한 만큼 수익이 나지 않았고 불투명한 미래가 불안했다. 고배를 마시고 차선책으로 애니메이션 회사를 가겠다고 결심한다.
  애니메이션 회사도 녹록지 않았다. 언니는 ‘열정페이’가 무엇인지 이 업계에 일하면서 알게 되었다.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으로 야근까지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청년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지만, 청년은 그 시절이 참으로 고달프다.
  “한 달에 아니, 75만 원을 주겠대요. 처음엔 제 귀를 의심했어요. 그렇다고 정시 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었어요. 면접관께서 야근할 가능성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보니까 거기에 간이침대가 있었어요. 게다가 점심 식사는 알아서 해결해야 하고 야근수당은 따로 없다고 못을 박아 얘기하더라고요. 대신에 저녁밥은 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만화과를 졸업했는데도 75만 원이냐고 물었더니 만화과든 대졸이든 고졸이든 똑같이 75만 원이라고 하셨어요. 그때가 2011년이었어요. 그날 저는 만화, 애니메이션의 길을 접기로 했어요.”
  언니는 열정페이를 피해 이력서를 여러 군데 넣었다. 그중 두세 군데에서 면접을 봤고 광고디자인 회사에 취직했다. 그나마 가장 높은 급여를 제시한 곳이었다. 회사는 수습 기간을 두고 급여의 80퍼센트만 지급했다. 수습 기간이라고 말한 기간도 3개월이 아닌 6개월이었다. 먹고살아야 했기에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며 스스로 다독였다. 말단 직원인 그녀의 주 업무는 블로그 포스팅 업로드와 홈페이지, 브로슈어, 팸플릿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가끔 방송에 나갈 이미지나 배너도 제작했으며 영상 작업도 했다. 월급은 쥐꼬리만 하게 주면서 일은 코끼리 발만큼 주었다. 언니는 회사를 ‘불 꺼지지 않는 사무실’이라고 표현했다. 야근은 일상이 되었다.
  “저는 아침에 출근하면 일단 설거지하고 책상부터 닦아야 했어요. 회사에서 제 본업이 아닌 다른 업무도 시키더라고요. 심지어 제가 먹은 설거지가 아니라 남이 먹은 설거지를 저한테 시켰어요. 하이라이트는 그 일을 해야 하니까 업무 시작 30분 전에 오라는 거였어요. 그때 9시 반까지가 출근이었는데, 9시에 오라더라고요.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거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했어요. 그래도 저는 꿋꿋이 늦게 갔죠. 아, 늦게 간 게 아니라 정시에 출근했죠.”
  여성이라는 이유로 회사에서 겪었던 불합리한 일에는 노여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회사는 언니를 승진 대상에서 제외하고 언니보다 늦게 들어온 남자 직원을 진급시켰다. 1년을 다닌 언니는 계속 말단이었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분’은 대리 직급을 달았다. 심지어 경력직으로 입사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 사측이 내놓은 변명이 가관이었다. ‘이 사람은(남자 직원) 나이도 많고 결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수지 씨도 좀 있으면 결혼할 거고 그러면 야근 많이 못할 거 아니냐?’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남자에겐 유리하고 여자에겐 불리하게 적용되었다. 언니는 결국 그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기간제 미술교사
  부모님의 권유로 미술교육대학원에 진학했다. 졸업 이후 반 년 동안 정교사 임용을 준비했지만, 첫 시험에서 20점 차이로 불합격한다. 그녀는 수험 생활과 안 맞다고 느껴 임용 준비를 그만두고 이력서를 넣었다. 아무런 경력이 없는 교사는 채용되기 어렵지만, 그녀는 운이 좋게 경남 모 고등학교 미술 기간제 교사로 채용되었다.
  기간제 교사와 시간강사는 둘 다 비정규직이지만 담당 업무나 출퇴근 시간, 계약 기간 등에서 차이가 있다. 기간제 교사는 보통 6개월에서 1년 계약이지만 시간강사는 상대적으로 계약 기간이 짧다. 그리고 시간강사는 행정업무를 하지 않고 수업만 담당한다. 정해진 시간에 수업만 하면 되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운데다가 겸직이 가능하다. 다만, 시간강사는 호봉 산정 시 경력을 인정받기 어렵다. 이런 경력 단절에도 언니는 기간제 교사를 하다가 시간강사를 택했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기간제를 하면 몸이 아파져요. 1년쯤 하고 나면요. 체력적인 한계가 와요. 대학원을 가기 전에는 되게 희망적인 미래를 꿈꿨어요. 그런데 이제 비정규직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것을 그때 절실히 깨달았어요.”
  혹시 아이들이 기간제 교사라는 것을 아는지, 안다면 기간제 교사를 대하는 학생들의 태도가 어떨지 걱정이 되어 물었다.
  “학생들이 기간제 교사라는 걸 알고 있고 금방 떠날 선생님이라고 생각해서 깊이 마음을 열지 않아요. 만나면 ‘쌤 안녕하세요’ 그냥 인사만 하는 정도예요. 학생의 진로나 깊은 대화는 못 하는 거죠. 학기 초에 혹시라도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연락하라고 제 개인 번호를 알려줘요. 그런데도 대부분 번호도 저장하지 않아요.”
  잘려 나간 조르바의 손가락이 다시 재생되지 않듯이 그녀가 조각낸 소중한 시절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미술 기간제 교사는 평생 직장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그녀는 365일 이직을 꿈꾼다. 문득 궁금했다. 10년 후 그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언니의 인생에서 그림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예술은 밥을 먹여줄 수 있을까? 노동은 밥을 먹여줄 수 있을까?
그녀가 가진 물건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학창 시절에 산 ‘천연모 수채화 붓’이다. 부모님께서 큰맘 먹고 사주셨다. 그녀는 이 붓을 예고 입시 때도 쓰고 미대에 가서도 쓰고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언니의 붓이, 언니의 그림이 밥이 되는 세상을 상상하며 이야기를 마쳤다.
  
  

편견과 선입견에 맞서는 멋있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이수지가 인터뷰한 박진희)

  

  9월임에도 날씨가 유난히도 화창하여 더운 입김이 나오던 날, 주섬주섬 마스크를 장착하고 밖을 나간다. 프로 ‘집순이’인 나를 움직인 그녀는 파랑새 같았다. 프로 ‘이직러’의 삶을 살며 즐겁게 직장을 다니고 있는, 일기를 쓰는 것이 하루의 끝인 평범한 부산 여자사람 박진희. 나도 그녀도 일대일 만남은 처음이라 소개팅하는 남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고 연신 커피를 홀짝였다. 까눌레도 처음부터 주문했지만 초반엔 디저트에 포크하나 대지 않았다. 그러나 대화를 나눌수록 친밀감이 생겼고,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에 이끌렸다.
  그녀가 키우던 고양이 ‘미오’, 내가 현재 키우고 있는 ‘달’. 모습은 서로 다르지만 고양이를 생각하는 우리의 마음은 일치했다. 동물을 좋아하는 그녀의 내력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생애 첫 기억은 아장아장 걷던 시절 공원에서 봤던 동물이에요. 어머니께서 오빠와 저를 데리고 집 주변 공원으로 자주 산책을 가셨는데, 그곳엔 하마, 원숭이, 공작새 등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별다른 이유 없이 동물과 자연을 좋아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자연스레 들어왔어요. 동물을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저는 무섭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병아리를 키우는 등 동물과 가깝게 지내며 자란 그녀는 동물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길고양이의 밥을 주기 시작하면서 고양이의 매력에 빠져 블로그에 길고양이 관찰 기록을 남기고 위기에 처한 ‘아이들’을 구조했다. 네이버의 고양이 대표 카페에서 특별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오를 만났다. 임시보호자에게서 입양한 미오는 푸르스름한 홍채에 검은 동공이 세로로 길게 뻗어 있는 고양이다.
  내가 기른 달이는 길에서 주워왔는데 달빛이 가득한 날에 주워 ‘달’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땐 나도 술을 한잔한 터라 뭔가에 홀렸던 모양이다. 자고 일어나니 내가 고양이를 납치(?)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간식 줄 때만 달려오는 달이와 달리 미오는 부르면 언제든 달려오는 애교 많은 개냥이였다.
  “유대감이 깊은 아이였어요. 제가 공부할 때 제 팔에 얼굴을 기대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제 배에 올라와 골골거리며 기분 좋다는 소리를 내던 냥이였습니다.”
  가족보다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던 미오는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럴 때 항상 미오가 곁에 있었고 위안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고양이별로 가서 충격이 컸어요. 허전함이 너무 크게 다가왔어요. 시간이 지나도 아픈 마음은 그대로인 것 같아요. 미오를 집 근처에 묻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봉분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어요. 내가 이렇게 슬퍼하는 것을 보면 미오도 슬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슬픈 마음을 떨치려고 노력했죠. 슬프지만 삶은 계속되어야 하니까 점점 무뎌졌지만 힘들 때 생각나는 존재로 남아 있어요. 그런 이야기 있잖아요. 죽으면 먼저 세상을 떠난 반려동물이 마중을 나온다는 이야기요. 저도 우리 미오가 마중 나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동물복지에 대한 관심은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약자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그녀는 법대에 입학하였고 학과 동아리인 국제법학회에서 활동했다.
  “모의재판에서 ICJ(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된 일본의 ‘남극해 과학조사 포경 프로그램 JARPA’를 주제로 선택해 학술대회를 한 일이 기억에 남아요. 포경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판결이 나도 강제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어요. 권고사항이라 한계가 있죠. 실제 일본은 판결이 난 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포경을 시작했어요. 모의재판이 끝난 후 심사위원으로 자리한 교수님께서 ‘일본에서 고래 고기는 오래된 식문화라고 주장할 경우엔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일본에서 고래 고기 소비량은 줄어드는 추세이며 육류 전체 소비량의 0.1퍼센트에 불과하다. 보존해야 할 종의 멸절을 야기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식문화인지 의문이다,라고 대답했어요.”
  그녀는 대학 시절 ‘리트반’에서 로스쿨을 준비했다. 이 시절 단통법(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 헌법소원에 참여해 청구서를 제출했지만 결국 합헌 결정이 났다. 그때 실망감은 지금도 생생한 느낌으로 남아 있다.
  “교수님이 우리가 헌법소원을 제기한 그 자체로도 큰 의의가 있다고 위로해주셨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에 더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되었어요.”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고 바꾸려는 노력은 난민 문제로 이어졌다. 시리아 난민 문제가 주요 이슈일 땐 「한국 난민법의 한계와 개선방안」이라는 논문을 썼다. 그녀가 처음으로 쓴 이 논문은 『인권법평론』에 실리게 된다.
  “대한민국은 국제적으로 난민을 수용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요. 당시 난민 수용 시설, 법적인 조항이 매우 미비했어요. 그런 한계점을 지적하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지 방안을 제시했죠.”
  로스쿨을 준비하던 그녀는 건강 문제로 꿈을 접었다. 그러나 그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는 날개를 접은 그 자리에서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파랑새였다. 그녀가 자신을 소개하며 표현한 프로 이직러의 삶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한 직장을 그렇게 오래 다니지 않는다. 우리 세대의 숙명인지 모르겠다. 내 경우, 1년에서 2년 정도 지나면 직장을 옮기게 되는 현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지만 내 기준으로는 ‘워라벨’이 첫 번째다. 한 직장을 오래 다니면 업무는 과다해지고 책임이 는다. 내 영혼이 과중하다 느끼면 다른 곳으로 이직을 준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조용한 사직’은 “MZ세대가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과 일상의 균형을 되찾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코로나 이후에 팬데믹의 대량 해고, 실직, 재택 근무가 늘어나며 일에 대한 관점이 많이 달라진 것도 그 이유가 되겠지만 더 이상 부당한 근무는 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조용한 사직이 사회 현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취업 플랫폼 〈사람인〉은 작년 직장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70퍼센트가 “월급 받는 만큼만 일하면 된다.”라고 답했다. 지난해 ‘신규 입사자의 1년 이내 퇴사율’은 28퍼센트였다. MZ세대는 평생 직장을 꿈꾸던 기성세대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조용한 사직을 되풀이한 그녀의 첫 직장은 은행이었다.
  “은행에서 계약직으로 1년 동안 일했는데 제 적성과는 맞지 않았어요. 그 후 보험회사에 들어가서 청구에 대해 심사하여 지급하는 일을 했어요. 결국 이 일도 최대한 회사의 이익을 위해 제 가치관에 반하는 일을 해야 해서 그만두게 되었어요. 그다음 들어간 곳이 건설회사였어요. 그때의 제 업무는 회계였습니다. 이번에는 비용을 삭감시키거나 감정적으로 다툴 일은 없어서 그나마 할 만했어요. 결국에는 이 회사도 저의 발전을 위해 그만두었습니다. 생각해보니 1년에서 2년 사이에 직업을 바꾸곤 했네요.”
나도 자주 직장을 옮기는 처지이고 예전에 회사에서 겪은 일이 생각나 ‘유리천장’을 경험해 봤는지 물어봤다.
“손해사정사에서 일할 때 팀장님이 워킹 맘이셨어요. 그분은 다른 메이저 보험사에서 근무하시다가 이직한 케이스였는데 전 회사에서 팀장님이 여자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제외되고 연차가 쌓여도 과장으로 올라가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이직하셔서 팀장 직책을 달았던 거였죠. 그분은 제가 봤던 여성분들 중 가장 멋진 여성이었고 가장 똑똑했던 사람이였어요. 그런 똑똑한 사람도 차별을 겪고 회사의 부당한 결정에 대해 어떻게 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고 해요. 그 이야기를 듣고 여성의 권익보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현재 그녀는 노무법인에서 일하고 있다. 직장 동료들이 좋아 직장에 만족한다고 한다. 그녀는 스물아홉 살. 곧 서른 살을 앞두고 있으며 삼십 대를 어떻게 알차게 보낼지 계획하고 있다. 나의 스물아홉 살은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흐지부지 지나간 기억만 있어 솜털처럼 가벼웠다. 그녀는 자신의 짧은 생애를 어떻게 돌아보고 있을까.
  “성격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되게 순수하고 열정으로 가득한 영혼이었죠. 제가 아는 가장 심한 욕이 바보였는데, 지금은 온갖 욕을 사회에서 배워서 쿠크다스였던 제가 갑옷을 입은 쿠크다스가 되었어요. 쿠크다스인 건 변함없지만요.”
  그녀가 자신의 미래를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내가 궁금해졌나 보다.
  “언니, MBTI가 뭐예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실제로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MBTI를 시켜만 봤지 정작 내 MBTI를 알아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MBTI는 ENFP. ENFP의 특징은 따뜻하고 정열적이고 활기가 넘치며 재능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사회에 만연한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싶고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좋아하는,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다.
  평소 열여섯 개의 유형의 성격으로 사람을 대변할 수 없다고 호기롭게 이야기하던 나였지만 MBTI는 처음 대화해본 그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삼십 대이신 주변 선배들한테 기분이 어떤지 많이 묻고 다녔는데 다들 스물아홉 살에서 서른 살이 되었다고 내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대답을 받았어요. 사실 만으로 스물여덟 살이라고 스스로가 안심하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이십 대 중반에 내가 나이를 많이 먹었구나,라고 생각한 게 좀 억울할 정도네요.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이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제 스스로 의식주를 잘 해결하고 있고 독립한 것에 대해 뿌듯해요. 인생의 최종 목표는 편견과 선입견에 맞서는 멋있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에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젊음의 시간들이 가득 고여 흘러넘치는 모래시계 같았다. 끝으로 나는 그녀에게 인생을 한 줄로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리 괴로운 시간이라 해도 1시간은 절대 60분을 넘지 않는다. 지난 29년의 삶을 돌이켜보니 마냥 평탄하지만은 않았어요. 행복하고 즐거운 기억도 있지만, 괴롭고 고통스러워 회피하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터널을 지나듯 결국에는 그 시간들을 흘려보냈어요. 그래서 이 문장이 떠올랐어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라는 작은 공간이 영역 확장하듯 조금더 넓어진 기분이다. ‘나’라는 지구인이 화성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기분은 조금 미묘하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타입의 사람이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고, 친해진 다음에는 그녀의 세계를 엿본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세상의 편견과 선입견은 그녀와 같은 이들이 있어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박진희의 꿈을 응원하며 인터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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