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과 인천의 인연

 

* 필자는 지난 5월 25일 인천남부교육청의 김태선 장학사 님과 인연이 되어 ‘인천 북 트레킹’ 프로그램의 하나로 인천 교사 여러분과 1차 답사를 하였다. 그 뒤 8월 14일, 방정환과 인천의 인연 언저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인천 지역 콘텐츠로 살려보고 싶어 인천작가회의 송수연 아동문학평론가께 청하여 2차 답사를 할 수 있었다. 방정환과 인천의 인연을 현장에서 함께 살려 주신 두 분께 감사를 드린다.

 

손용화 여사가 증언해준 방정환의 인천 요양 시절 이야기

“방정환 선생이 인천에서 말년에 요양을 하셨는데 알고 계세요?”

이렇게 질문을 던져 보면 그다지 알고 계신 이가 많지 않다. 인천에서 살고 계신 분들의 사정도 매한가지다. 필자 역시도 이러한 사실을 하나의 실증 근거를 잡고 확인한 것이 얼마되지 않는다. 바로 작년 7월, 해방 후 복간된 『어린이』지 1945년 5월호에 실린 「어린이의 참된 동무 방정환 선생 유족을 찾아」라는 글을 읽게 되면서이다. 이 글은 방정환 선생이 작고하던 해 요양했던 공간을 특정할 뿐만 아니라, 그 주변 풍경과 방정환 선생의 말년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그려볼 수 있게 한다.
  우선 이 글에서 특정하는 방정환의 요양 장소는 인천각이다. 방정환 선생 당시는 존스턴 별장으로 불렸던 곳이다. 당시 손용화 여사의 취재기를 만나 보자. 취재 기자 ‘한 뫼’의 글에는 방정환이 인천에서 요양하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쓴다.

“집뒤 만국공원에 우뚝 솟은 인천각仁川閣이 뵈입니다. 이 인천각은 선생께서 병들었을 때 정양와서 유하시던 곳입니다. 선생은 생존시에 인천의 바다를 좋아하셨고, 인천에서도 특히 만국공원의 경치를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무슨 인연이나 있었던 듯 해방 후 선생의 유가족은 이 만국공원 앞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 것입니다.”

해방 후 『어린이』에 실린 이 짧은 글은 방정환의 말년 시기에 대한 구체적인 좌표를 찍어 준다.
  1949년 인터뷰 당시 손용화 여사의 나이는 49세였고, 방정환의 맏아들 방운용은 “이제 32세” 어엿한 장년이다. 방운용은 설명하기를, 14살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힘들게 학교를 마쳤으며, 그 후 화신상회에 근무하다가 대한석유저장1회사에 다닌다고 했다. 장녀 방영화는 벌써 결혼을 했다고 한다. 방영화의 출생은 1920년 7월. 방정환 선생은 이 무렵, 조선학생대회로 전국 순회강연을 하다가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고 계속적인 강연 중지를 당하던 끝에 그해 9월 중순 갑작스럽게 도일度日하게 된다. 둘째 아들 방하용은 1925년 1월 13일생이니, 한국 나이로 25세인 것이 맞다. 이 취재에서 재미있는 것은 둘째 아들 방하용이 ‘인천에서 어머니 손용화 여사를 모시고 화장품 제조’를 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1910년대 엽서에 남아 있는 ‘존스턴 별장’과 인천 앞바다

사진 1. 인천항 풍경을 찍은 사진엽서. 오른쪽 위에 존스턴 별장이 보인다.

사진 2. 존스턴 별장을 찍은 사진엽서.
출처: 〈인천투데이〉 2021년 12월 28일 「개항장 기행」

  그러면 방정환 선생이 작고하던 해 요양했던, 당시 존스턴 별장(아래 엽서) 건물을 보기로 하자. 이 엽서의 사진은 1913년 제물포 세창양행 사택2에서 촬영한 것이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빨간 지붕의 이 별장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인천의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 둥그스름하니 낮은 산은 응봉산이다. 응봉산 주변은 개항기 외국인들의 거주지였던 만큼 서양식 건물이 많았다.
  1961년 7월 22일 《조선일보》에는 「고인 회억」이라고 하여 미망인 손용화 여사가 소파 방정환을 회고하는 인터뷰가 실려 있는데, 이 글에서 손 여사는 이렇게 쓴다.

“참 잊혀지지 않는 일이었어요. 운명하던 해인데……”

방정환 선생은 ‘혼자’ 인천에 휴양을 갔었다. 그때만 해도 살고 있던 재동에서 남대문까지만 해도 굉장히 멀고 청파동靑坡洞(현 서울시 용산구의 행정동)이라면 “굉장히 끔찍이 먼 곳”이었다는 거리다. 손 여사는 “하물며 인천이라면……”이라고 말끝을 흐리고 있다.
  그렇다면, 작고하던 해, 방정환은 하필이면 왜, 어떤 이유로 ‘혼자’서 인천으로 휴양을 떠난 것일까? 인천으로 먼저 휴양을 떠난 방정환은 손용화 여사에게 인천 구경을 오라는 편지를 띄운다. 손용화여사는 “이 기회에 인천 구경 못하면 평생 못한다”는 이상한 편지가 되왔길래 불길한 맘 못 푼 채 인천 구경을 했었다고 한다.
  방정환의 유물이 남아 있지 않은 건, 6·25때 “유고며 유물 그리고 사진마저 모조리 없어진”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1982년 5월 5일자 기사에는,3 “피난갔다가 돌아왔을 땐 이미 인천에 살던 집이 폐허로 변해 있었다”고 한 내용을 볼 수 있는데, 이로 보면 방정환의 인천 요양 이후 종로 소격동에 살던 손용화 여사 가족이 이곳 인천으로 와서 터를 잡은 것은 언제부터일까?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그 유족은 이곳 인천의 품안에서 살았다.

  

연애소설 「그날 밤」은 인천 앞바다,
소년탐정소설 「동생을 찾으러」는 응봉산 일대 작품의 배경지

  방정환이 인천 앞바다에 처음 다녀간 무렵은 언제일까? 하나하나 다 궁금해진다. 방정환이 즐겨 투고하던 『청춘』이라는 문예지에 김윤경이 쓴 「인천원족기」(1918.7.)를 보면, “반도 내에서 1, 2를 다투는 대항大港이요 굴지의 대도회되는 인천”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청년 방정환 역시도 이 무렵에 ‘인천 유람’의 기회를 얻었을지 모르겠다. 여하튼, 1920년대 초 방정환이 쓴 대표적인 연애소설 「그날 밤」(『개벽』 6~9호, 1920.12.~1921.2.)과 1925년 1월부터 10월호까지 『어린이』에 연재된 방정환의 첫 소년탐정소설 「동생을 찾으려」에서 인천은 작품의 중요한 무대가 된다.

  그 후 네 시간쯤 뒤 해저물 때 실심失心한 영식의 몸은 인천仁川의 인적 드문 바닷가 모래 위에 털썩 엎드려서 희고 고운 모래 위에 허정숙 3자를 쓰고는 짓고 젓고는 쓰고하고 있엇다.
  그는 아까 인천 정거장 매점에서 봉함 엽서 한 장을 사서 가장 친우親友인 임에게 이렇게 써 보냈다.

  임군?! 오랫동안 폐도 많이 끼쳤고 실례도 많이 하였소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인천 해변에서 머언 길을 떠나려 하오. 어델는지 자꾸 가려고 천국天國이 보일 때까지 여자女子없는 죄악없는 세상이 보이기까지 자꾸 가려오.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그냥 떠나가오. 내내 평안히 계시기 바라고 이 길을 떠납니다.
  이 편지 받으시고 집에 가서 말씀 드려 주시기 바라고 마지막 이 붓을 놉니다.

마지막날 세상을 가려는 최영식

  그는 이윽고 벌떡 일어섰다. 바다 저 어구에 어디로 가는 배인지 돛단 배가 표연히 떠 있다. 아아 저 배를 타고 먼 먼 곳으로 갔으면 끝없이 자꾸 자꾸 가 보았으면… 하였다. 그러나 즉시 아니, 아니, 아무리 간대도 이 지구에는 여자女子 없는 나라는 없다. 아아 이 세상에는 죄악 없는 나라는 없다!!
  그의 부르짖는 소리가 처량하게 흘렀다. 그는 고개를 돌려 시가를 바라보았다. 해가 막 저물어 세상이 조금씩 어두워 간다. 어느틈에 그의 눈이 젖어 있었다.
  해는 아주 저물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바다를 향하고 걷는다. 바위라도 삼킬 듯한 큰 물결이 자꾸 그의 앞으로 밀려온다.

─ 방정환, 「그날 밤」, 『개벽』 8호, 1921.2.

  1920년대 퇴폐적 낭만주의와 방정환의 계몽주의적 어조가 기묘하게 섞여 나타나는 연애소설 「그날 밤」의 최후 대목이다. 정혼한 사실을 숨기고 허정숙과 연애에 빠진 최영식은 허정숙의 혼인 소식을 받고 도리어 절망감에 빠진다. 완고한 가부장의 결정으로 정혼되어버린 현실의 불합리한 구조와 대항하여 싸우지만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영식은 인천 바닷가에서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방정환의 첫 소년탐정소설 『동생을 찾으려』는 실로 인천 응봉산 일대를 무대로 소년 탐정들의 놀라운 활약을 그려낸다. 창호의 누이동생 순희가 갑자기 실종된 지 벌써 7일째이다. 온 집안과 일가 집에서 나서서 찾고 경찰서에 가서 수색 청원을 해도 아무 소식이 없다. 창호는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학교 최 선생님과 동무들, 인천 소년회원들의 도움으로 인천으로까지 추격하여 끝내 순희를 구출하고 악당 중국놈 일당을 붙잡아 묶는다.
  작품 속에서 인천 지역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기차는 아무 일 없이 인천 정거장에 닿았습니다. 저녁의 바닷바람은 두루매기를 벗겨 갈 것같이 들이불어 오는데…… (중략) 쓸쓸스럽게 넓기만 하고 신작로같이 훤칠한 바닷가의 거리를 지나 우중충하고 냄새나는 언덕빼기 길로 휘어드니 묻지 않아도 인천에 유명한 중국 놈 거리였습니다. (중략) 꾸준히 뒤를 따라 끝까지 가노라니까 놈들은 중국 거리도 다 지나서 맨끝 산모퉁이에 맞닿은 곳에 조꼬마한 창고 같은 단층 벽돌집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인천 바닷가 산언덕의 어두운 밤…… (중략)
  달 밝은 밤, 바닷가의 행인 없는 신작로로 자동차는 총알같이 달음질하였습니다. 시가를 꿰뚫고 신작로 고개를 지나 철롯둑을 넘어서 초가집 많은 동리로 들어가더니 목욕탕 같은 높은 굴뚝 있는 뒷집 역시 야트막한 벽돌집 앞에 우뚝 서자, 놈들은 수군수군하며 내려서 그 집으로 기어 들어가 버렸습니다.”

사진 3. 방정환의 소년소설을 근거로 추정하여 당시 형태와 유사하다고 판단한 인천의 한 가옥 Ⓒ 장정희

  “인천에 유명한 중국놈 거리”는 오늘날 차이나 타운이다. “중국 거리도 다 지나고 맨끝 산모퉁이에 맞닿은 곳에 조꼬마한 창고 같은 단층 벽돌집”이라면 그 위치는 어디쯤일까.
  송수연 평론가와 필자는 방정환의 소년탐정소설 「동생을 찾으러」에 묘사되어 있는 “중국 거리도 다 지나서 맨끝 산모퉁이에 맞닿은 곳”이 어디쯤일지 가늠해 보고, 지금은 사라진 방정환의 말년 요양지 존스턴 별장 자리도 더불어 그 현장을 확인해 보기로 하였다. 혹시 남아 있을 흔적이라도 확인할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중국 거리도 다 지나서”라고 하였으니, 우리는 차이나타운 거리를 쭉 오른 뒤 송월동 동화마을이 있는 경계지점까지 갔다. 그리고 조금 꺾어서 돌며 응봉산 자락쪽으로 올라가는 곳에 일제시기 단층 벽돌건물이 나타났다.
  “중국 거리도 다 지나서”, “맨끝 산모퉁이에 맞닿은 곳”, 그리고 응봉산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가에 희한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조꼬마한 창고 같은 단층 벽돌집”. 이 집이 방정환이 소년탐정소설 「동생을 찾으러」에서 그린 그 가옥은 아닐지라도 그 당시 중국인 거리에서 볼 수 있었던 이 근처의 일반 벽돌집 가옥 유형이라는 추정을 함께 해볼 수 있었다.

  

방정환과 인천의 인연을 말해 주는 자료의 파편을 모아

  한편, 방정환과 인천을 연결해주는 여러 자료를 모아 봄으로써, 방정환과 인천의 인연을 좀 더 돈독하게 만들어보고자 한다. 방정환과 인천의 인연에 대해서는 아직 학술적으로 자세히 논구되지는 못하였다. 우선 첫째로, 방정환 선생이 작고하기 전 이곳에서 요양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이전에, 어떠한 인연으로 방정환 선생이 인천으로 발길을 두었으며, 또한 그러한 발길을 가능하게 했던 배경적 요인은 무엇이었는지를 먼저 조사되어야 할 터인데 이것은 후대의 일로 남겨야 할 듯하다.

  

  1923년 7월, 조선소년지도자대회 때 ‘인천 소년단’ 참가

사진 4. 1923년 7월 23일부터 개최한 조선소년지도자대회(장소 천도교당)

  기록적으로 방정환 선생이 인천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20년대 천도교소년회를 지도할 때나 『어린이』지를 내는 등 어린이운동을 할 때부터이다.  방정환은 1923년 5월 1일 도쿄에서 색동회를 규합하여 어린이문화운동 단체를 설립하고 그 첫 행사인 ‘조선소년지도자대회’를 7월 23일부터 7일간 천도교당에서 개최한다. 정병기의 사회, 이돈화와 방정환의 간담이 이루어졌는데, 당시 참가한 20여 지역의 단체 및 참가자 소개를 보면,4 여기에 ‘인천 소년단’이 포함되어 있다.
  1925년 6월 16일자 《동아일보》에는 ‘인천 교육강연’이 6월 20일로 연기된다는 보도가 있으며,5 이때 강연 행사의 내용을 보면 장소는 ‘인천 산평정 공회당일’, 청강료는 ‘20전’, 연사는 ‘경성 이화학당 교사 김창제’ ‘《동아일보》 본사 한위건’ ‘천도교회월보사 이종린’, ‘경성 여자청년회 노순열’과 함께 ‘경성 어린이사 방정환’이 포함되어 있다.

  

  1925년, 인천 어린이들의 최초 어린이 특별사업 신춘소년소녀대회.

사진 5. 『어린이』 3권 3호. 1925. 3. 지면의 하단 여백은 입장권이 있던 자리.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독자가 입장권을 사용한 듯하다.

  그리고 특별히 기억할 것은 1925년 3월 30일 저녁 8시 ‘인천 내리內里 예배당’에서 개벽사 인천지사 주최로 열린 ‘신춘 소년소녀대회’이다. 이 대회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국에서 후원하였다.6 인천의 소년소녀들이 방정환과 정순철을 초빙하여 ‘동화와 동요’를 들었다는 내용이며, 여기에 대해 당시 인천지국 기자는 “이번 소년소녀대회는 인천에 처음 일이 되는 동시에 어린이만을 위하는 사업으로는 이것이 효시”라고 평가하였다. 방정환은 이렇게 소년소녀대회를 소년회에서 직접 주최하게 함으로써, 그 지역의 소년회 활동을 이끌어 냈다고 할 수 있다. 이 ‘소년소녀대회’는 방정환이 『어린이』 창간 2주년 기념으로 기획한 것인데, 당시 『어린이』지를 통해서도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소년소녀대회’의 개최 일자이다. 『어린이』 창간 2주년의 광고를 보면 ‘즐거운 어린이 회합’이라고 소개되어 있고, 경성, 인천, 청주, 대구, 마산, 부산 차례로 개최되며, 잡지에 인쇄된 ‘입장권’을 떼어 오라고 되어 있다. 사진 하단 오른쪽의 공란은 입장권이 잘려나간 모습이다. 여기서 보면 ‘인천’은 ‘3월 18일’ 개최로 제일 먼저 앞서 있다. 실제의 보도로 보면 ‘3월 30일’에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큰 어린이 사업이 기획되기 전에, 방정환 선생이 먼저 와서 어린이 사업의 씨를 심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인천 소년소녀대회 개최에 앞서, 1922년 인천에는 의미 있는 어린이 행사가 있었다. 경성 천도교소년회 주최, 개벽 인천지사 후원으로 6월 29일 저녁 8시부터 ‘인천가무기좌歌舞伎座’에서 ‘소년소녀가극회’가 열렸던 것이다.7 이 행사에는 독창, 합창, 5, 6막의 가극과 무도, 그리고 「소년회 조직에 대한 필요」를 방정환이 천도교청년회 도쿄지회장 자격으로 강연했다. 1921년 5월 1일 조직된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 개벽사가 서로 추동하고 후원하면서 소년회와 어린이 문화 예술 활동을 일으켜 나간 초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920년대 어린이 문화운동의 인천지역 활동 거점: 인천 내리예배당.
  인천의 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개최한 소년소녀대회 이후, 인천 엡윗소년회의 활동도 눈에 띈다.8 인천 엡윗소년회에서 방정환을 초청하여 1925년 9월 26일 저녁 7시 반에 내리예배당에서 동화회를 개최하는데, 입장료는 따로 받지 않고 “소년소녀에 제한하여 입장을 허락하니 많이 참석하라”는 내용이다. 인천 내리예배당이라면,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즉 제물포 웨슬리예배당이 아닌가 추정되며, 인천시에서는 2012년 이를 복원했다. 이 내리예배당에서는 방정환이 1930년 2월 15일에도 와서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었으니, 내리예배당도 방정환과 인연의 인연에서 꼭 들러보고 기억하면서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겠다. 이때 동화회는 저녁 7시부터 시작되었으며, 동화에는 방정환, 안준식, 동요에는 경성 가나다회원이 맡았다.
  당시 인천에는 천도교인천종리원도 있었고, 천도교청년회의 활동도 이루어지고 있었고, 또 새로 인천에서도 소년회가 일어나 소년소녀대회와 같은 큰 의미 있는 어린이 행사가 이루어진 인연을 바탕으로 방정환과 인천이라는 지역의 친연성은 충분히 축적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22년 4월, 천도교소년회와 인천으로 봄소풍을 온 방정환.

사진 6. 이정호의 글이 실린 『천도교회월보』 141호, 1922. 5.

  다시 시간을 거슬러, 조선소년지도자대회보다 한 해 앞선 1922년 4월, 방정환은 천도교소년회와 함께 인천으로 봄소풍을 왔다. 정확한 때는 4월 23일. 이 시기는 ‘1922년 5월 1일’ 우리나라 첫 어린이날이 한창 준비되던 시기요, 방정환이 직접 어린이날 제정을 위해 각종 선전지와 제반 준비 사항을 챙기던 무렵이었다. 1922년 4월의 기록은, ‘1922년 5월 1일’ 어린이날 추진과 진행에 있어 “방정환이 동경이 아닌 국내에 있었다는 명백한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면, 1922년 4월 23일, 천도교소년회 어린이들과 함께 했던 인천 소풍 나들이 풍경을 엿보기로 하자.
  이날의 기후는 그 전날까지만 해도 흐려서 좋지 못하였지만, 그날은 “활짝 걷히어” “봄날의 온화한 일기”였다고 소년회원 이정호는 쓰고 있다. 기쁨으로 아침도 ‘허둥지둥’ 먹고 나타난 소년회원 이정호는 어언간 행렬을 지어 남대문을 향하는 ‘소년 행렬’을 보는 행인들의 시선에 부러움이 보인다는 느낌의 표현으로, 은근한 원족회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남대문에 도착하니 도일度日한 왕세자 전하의 입경을 축하하는 봉영문奉迎門 준비로 인부들이 일하고 있다. 소년회원들이 인천행 기차를 타고 ‘정시 9시 30분’에 기차는 남대문역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방정환 선생님 김기전 선생님 두 분이 차내 주의와 하차하여 주의 사항”을 들었다고 쓰고 있다. 요즘으로서는 쉽게 상상이 되지 않으나, 소년회원들이 기차 안에서 〈소년회가〉를 불렀다고도 한다.
  기차는 용산역을 지나 한강철교를 지나 노량진역에 도착하고, 이어 영등포역, 부평역, 주안역을 거쳐 축현역에 도착하였으니, 이곳이 이들 소년회원들의 인천 소풍 도착지였다. 지면의 글자는 “죽현”으로 인쇄되어 있는 듯이 보이나 “축현”이 아닐까 한다. 오늘날 동인천역이 바로 이 글에 나오는 축현역9이다. 역 앞에서 소년들은 멀리 보이는 ‘인천해’ 바다를 바라보고 역 앞에 만발한 봄꽃들에 한창 즐거움에 들떠 있었다. 이 소년회원들을 환영하러 인천 천도교 교구장 이외 몇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이들과 함께 소년들이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인천 천도교 교구이다. 마침 시일侍日 예식의 종소리는 울리고, 소년들은 〈소년회가〉 2창二昌을 부르며 상쾌한 기분을 펼친다. 설교는 김기전의 「인내천과 동귀일체」였으며, ‘창가조’로 나가는 천덕송에 교구가 떠나갈 듯하였다고 이정호는 쓰고 있다.
  그런데 “말짱하던” 날이 흐리기 시작하더니 점심때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할 수 없이 비가 그칠 때까지 인천 구경을 하지 못하고, 뜻밖에 방정환의 이야기 시간이 마련되었다. 이정호는 다음과 같이 그 내용을 기록한다.

  방 선생님의 인천의 산출産出 및 인구 호수를 설명하여 들려 주셨으며, 관찰력과 추상력에 각국의 비교와 우리로 하여금 그의 마음을 양성養成하라시는 말씀과 동양 소년이 행하는 일과 서양 소년의 행하는 일을 비교하여 우리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느낌과 감각을 주었으며, 그러나 비는 여전하였었다. 그러나 일행 중 몇 사람은 우중이나 구경하러 간 후 나머지 회원은 방 선생님 김 선생님의 주창 하에서 인류의 동일한 점을 말하라시는 고로 우리의 아는 데까지는 말하였었다. 그러나 방 김 두 선생님에 비교에 말할 수 없어졌으며 다시 방 선생님의 동화에 대한 설명과 조선에서는 동화를 알아주지 못함에 애석하시다는 말씀과 독일 동화가 그림 동화의 걸작 동화를 듣고 구경 갔던 회원의 돌아옴에 따라 여자부와 남자부에 창가 경쟁 있는 결이結易 비기였었다.10

  천도교 인천교구에 자리를 잡고 비가 옴에도 인천 구경간 팀, 그리고 교구에 남아 방정환의 동화를 들었던 팀, 그리고 함께 모여 창가 경쟁을 남자팀 여자팀이 나눠 했으나 결국 비기고 말았다는 이야기 등 재미있는 일기 내용이 남아 있다.
  이들 소년회원들은 다시 3시 20분 경에 출발하여 경성으로 돌아오기 위해 역으로 이동했으며, 그곳에서 이들은 단체 촬영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사진사가 단체 촬영은 ‘불허’라고 하여서, 남자 여자가 따로 촬영한 점이다. 소년들은 멀리 보이는 인천 염전을 바라보면서 다시 〈소년회가〉로 섭섭함을 달래었다. 개벽사 지사에서는 소년들의 섭섭함을 위로하기 위해 ‘인천항의 실황’과 ‘영국 공원의 사진’을 나눠준다. 그날 남대문 역에 도착하였을 때의 시간은 6시 5분경이었다. 이정호는 방정환과 잠시 동행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시간은 6시 30분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돌아와서 부모님이 기뻐하였다는 내용으로 글은 매듭을 짓는다.

  

방정환이 말년에 요양하러 왔던 ‘존스턴 별장’ 옛터에는 ‘한미수교기념탑’만 우뚝, 인천 어린이들 웅지의 기개를 키울 꿈동산으로 변모하길

사진 7. 인천항이 내려다보이는 인천자유공원(만국공원) 앞에서 송수연 평론가와 함께 필자. Ⓒ 장정희

  좀 더 산길을 올라 방정환이 말년에 휴양 왔던 존스턴 별장(인천각) 터를 조사해보기로 하였다. 인천작가회의 송수연 평론가는 인천지역의 문학 자원 발굴과 문화 유산 콘텐츠 개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방정환 선생의 문학과 인천지역 어린이들의 문화 예술 활동을 연계시킬 소중한 프로젝트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셔야 할 분으로 생각되었다.
  우리는 방정환 선생 생존 당시 인천지역의 서구식 별장으로 가장 화려한 모습을 자랑하던 존스턴 별장의 옛 자취를 찾아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자취는 물론 관련 내용을 담은 설명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는 답사를 마치고 내려와 저 멀리 월미도의 풍경과 내항 외항으로 설계된 인천항 부두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인천각은 1904년 러일전쟁이 그치자 영국(스코틀랜드)인 제임스 존스톤 씨의 하계별장으로 건축되었으며, 1905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설계는 독일인 쿠르트 로트케겔이 맡았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인천 개항장 양관 중 가장 아름다운 서양식 건물이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역설적으로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국 전함의 포격을 맞고 폭파되었다.
  오늘날 그 자리에는 ‘한미수교100주년’ 기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1982년 ‘한미교수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가 제작해놓은 명문이 조형물 아래쪽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이 일대의 전체적 설계는 한미수교의 형태가 아니라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부터 해서 응봉산 꼭대기의 기념 조형물까지 거의 미군의 위용에 뒤덮여 짓눌려 있는 격이다. 뾰족뾰족하게 치솟은 조형물이 위태로워 사람의 근접을 쉽게 허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탁 트여 있어야 할 저 멀리 바다 전경이 가로막혀 있어 숨이 막히고 답답한 형국이었다.
  자고로 스토리텔링의 시대인 현대에, 방정환이 이곳에서 말년 요양을 했다는 이야기와 이 응봉산 일대를 무대로 그의 작품 속 소년들이 탐정 활약을 했다는 이야기를 인천의 근대문학예술로 콘텐츠화하면 굉장한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응봉산 정상이 방정환 소년탐정소설에 등장하는 소년 주인공들처럼 서로 돕고 협력하며 웅지의 기개를 키울 꿈동산으로 변모할 그날을 기다려 본다.

사진 8. 존스턴별장 옛터. 지금은 한미수교100주년 기념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 장정희

  

  

주석

  1. 원문에는 “제장회사”라고 표기되어 있다.
  2. 독일산 화학약품, 염료, 화약 등과 강철 제품인 면도칼, 바늘을 비롯한 각종 유럽산 상품을 수입 판매하던 잡화점.
  3. 「어린이날 오면 마음 심란 추억 살릴 사진 한 장 없다」, 《조선일보》, 1982. 5. 5.
  4. 「어린이 인도는 어찌하면 좋을까」, 《동아일보》, 1923. 7. 25.
      당진소년회, 대전소녀회, 파주소년회, 이천양정여학교, 인천소년단, 진주천도교소년회, 통영천도교소년회, 선천소년군, 마산불교소년회, 철원소년회, 백천소년회, 안주소년회, 평산문화소년회, 성진유지, 평양천도교소년회, 이천유치원, 옹진소년회, 안성유지, 북청유지, 경서유지.
  5. 「인천교육강연 20일로 연기」, 《동아일보》, 1925. 6. 16.
  6. 「소년소녀대회 인천에서」, 《조선일보》, 1925. 4. 3.
    「소년소녀대회 『어린이』 창간 2주년 기념으로」, 《동아일보》, 1925. 3. 18.
  7. 「소년소녀가극회」, 《동아일보》, 1922. 7. 2.
  8. 「엡윗소년동화회」, 《동아일보(소년동아일보)》, 1925. 9. 27.
  9. 축현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이 지역 ‘싸리재’라는 이름이 한자로 표기된 것인데, 한자 사전에 ‘싸리 축’(杻, 감탕나무 유)으로 표현한 것이 유래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1926년 4월 25일 ‘상인천역’으로 역명이 바뀌었다. 일본인 입장에서 축현이 안 쓰는 한자라서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1955년 8월 7일에 ‘동인천역’으로 역명은 바뀌었다.
  10. 글 원문의 조사와 단어가 어색한 부분이 있어 현대 독자의 편의에 맞추어 수정하였다. 다만, 마지막 문장의 “결의”는 그 뜻을 확정하기 어려워 원문에 있던 한자를 살렸다. “결과가”라는 뜻으로 읽었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