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들린’ 시 ─ 이설야의 시

  

* 이 글에서는 이설야의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창비,2016), 『굴 소년들』(도서출판 아시아, 2021),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창비, 2022)를 다루었고, 글에서는 작품의 제목만 밝힌다

  

1. 타인의 고통을 쓰는/읽는 자세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바라보는 이 시인의 시선은 집요하다. 그러나 고통을 받는 타인에 대한 윤리적 의무감이나 불합리한 상황을 향해 외치는 구호적인 서술은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어둡고 비릿한 냄새가 나는 가난한 풍경들이 적나라하게 줄을 지어 등장하면 시를 읽는 마음에도 어느새 축축한 냄새가 배기 시작한다. 시인은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가난하고 냄새나는 사람들에게 온통 사로잡혀 그들을 적는다. 학교는 못 가고 공장으로 일을 나가던 그 애, 일번지 다방으로 출근하던 화평동 이모들, 뒷골목에 모여 면도날을 씹던 수문통시장 언니들, 여인숙 쪽방에 살던 계집아이, 매 맞는 여자들에서 출발한 시선은 전쟁통에 토굴을 파던 소년들, 몸값보다 비싼 앵무새를 놓치고 맞아 죽은 파키스탄 소녀, 사슬에 묶여 일만 하던 흑인 아이들, 전쟁에서 강간당하고 고문당한 여성들을 향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누군가의 고통을 추적하는 것일까. 그가 묘사하는 타인의 고통은 너무나 명확해서 오히려 읽는 이를 당황하게 만든다. 뒷골목을 지나가다가 남자에게 맞아 가면서 빌고 있는 여자를 본다거나(「심지음악감상실」), 깡통 입마개를 해 놓은 입을 하고 목에는 쇠사슬을 찬 채로 손톱이 벗겨지도록 일하는 노예들을 봤을 때(「레스타벡」) 대체 우리는 어떤 자세로 그것을 읽어야 하는지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타인의 고통을 목격한 순간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있는 ‘나’의 자의식도 무시할 수 없는 문제가 된다. 타인의 고통이 빚어내는 풍경이 너무 끔찍하다는 감각 이면에, 그 풍경을 목도하고 있는 내가 있다는 사실은 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때 그들을 ‘불쌍하다’고 여기는 원초적인 마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은 확실히 경계하게 되는 일이다. 아무래도 불쌍하다는 표현은 윤리적인 조심성이 부족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불쌍하다’ 혹은 ‘불쌍히 여기다’라는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길래 그것이 ‘윤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느끼는 것일까. 반대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떤 ‘적절한’ 자세로 그것을 읽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언제나 윤리적인 결과를 가져다 주는가. 언제부터 우리의 자의식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그다지 윤리적이지 못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을까.
  가끔 누군가가 수용자의 감각을 자극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타인의 고통을 묘사하는 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빈곤 포르노pornography of poverty’라는 개념이 이야기되기도 한다. 생산자는 빈곤이나 죽음과 관련된 중독적인 이미지를 제시하여 수용자의 감정을 동요하게 만든다. 빈곤 포르노에서 문제가 되는 점이라고 하면, 생산자는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화한다는 것이고 수용자는 중독적 이미지를 통해 과잉된 동정심을 느끼지만 묘사되고 있는 타인을 스스로와는 구별한다는 점일 것이다. 문득 한 시인의 시 세계를 논하며 빈곤 포르노라는 개념을 인용하는 것이 그다지 온당한 일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빈곤 포르노가 제시하는 타인의 고통을 묘사하는 과정의 정당성, 이미지를 생산하고 받아들이는 생산자와 수용자의 자세 등의 문제는 문학에서 논의되는 재현의 문제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문학을 읽는 우리 역시도 재현의 주체와 대상 그리고 수용자의 위치에 개입하는 권력의 문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질문들을 던져왔다. 그러니까 누가 재현의 주체인지를 묻는다거나, 재현의 대상이 되는 자의 발화 가능성을 생각한다거나, 수용자가 재현을 받아들이는 방식의 변화 등에 관해 다분히 의식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설야의 시 세계에서 이야기해야 할 것이 그런 질문들만은 아니라는 판단은 너무 안일한 것일까. 이설야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주체와 대상이 되는 피사체 사이의 간극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기검열적 질문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생략하는 시인이다. 다시 말해, 타인의 적나라한 고통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지독한 자기검열에 갇힌 채 한 글자도 쓰지 못할 바에야, 타인의 고통을 목격한 즉시 ‘흔들리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야 마는 것이다. 그 역시도 동전을 달라고 하는 노숙인 여자에게 지폐가 있었음에도 동전을 주고 돌아서는 길에 다시 “돌아갈까?/ 그러면 여자는 더 슬프지 않을까?”를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그러나 이설야가 자신의 시 세계에서 하고 있는 일은 “이런 일들은 나를 늘 흔들리게 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흔들리는 일들」). 그가 고백하는 이 ‘흔들림’은 타인의 고통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가 매번 경직될 필요만은 없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러니까 타인의 고통이 제기하는 윤리적 질문들에 앞서, 그것에 내가 ‘흔들린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의 고통을 읽는 하나의 자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은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라고 한다. 이 단어는 누군가의 가여운 상황을 보고 자신의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는 뜻이다.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로만 수용할 경우에는 그것이 자신의 내장을 찌르는 듯한 아픔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타인이 ‘나’를 “흔들리게 한다”고 말하는 시인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은연중에 고백하고 있다. 이 마음은 여전히 윤리적인 조심성이 부족하다고 읽히는가?
  그렇다면 결국 누군가의 고통을 타인이 묘사해도 되는 것인지에 관한 질문만이 남을 것이다. 재현의 권리에 관한 문제는 어느 지점을 넘어서는 순간, 자칫하면 자기검열의 무한굴레에 갇히기 쉽다. 그만큼 재현의 주체가 된다는 일의 윤리성에 관해서 생각하는 일은 끝없는 질문들을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설야는 그 과정에서 자신이 마땅히 그것을 그려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자꾸만 흘러넘쳐 어쩔 수 없이 받아 적었다. (중략) 어쩔 수 없다. 쓰는 수밖에”.1 이설야가 타인의 고통을 집요하게 추적하여 묘사하는 이유를 조금은 짐작하게 된다. 그는 ‘순수하게’ 자신의 안에서 흘러넘치는 목소리를 ‘받아 적었을 뿐’이다. 여기서 ‘순수하게’라는 말이 자칫 소거할 수 있는 문제에 관해서는 이설야의 시를 읽으며 생각해봐야 할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일단은 “어쩔 수 없다. 쓰는 수밖에”.

  

2. 회상의 형식과 기억의 범람

  이설야의 시가 출발하는 곳은 분명 인천이다. 첫 시집에서부터 그가 그리고 있는 풍경들은 인천 수문통, 동인천 일번지 다방, 양키시장, 숭의동 쪽방, 신흥 여인숙 등의 구체적인 지명으로 등장한다. 시인도 자신의 첫 시집에는 “인천의 후미지고 축축한 골목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2고 말하며 자기 시의 본적이 인천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설야의 시 세계가 과거 인천에서의 기억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기억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으리라는 예상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시인이 그려내는 기억은 회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을까?
  만약 이설야의 시 세계가 회상의 형식을 취한다면,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떠올려 그 시간 속에 묻혀 있는 풍경들을 발굴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때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고 현재의 시간에서 그것을 발화하는 작업은 다 자란 화자의 몫이다. 선형적 시간의 법칙은 오직 회상의 형식만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으로서만 서술될 수 있다. 그러나 이설야의 시에서 과거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성한다.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한 인간의 내면에 고스란히 인을 박고 죽을 때까지 그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중략) 못 자국 같은 생의 숨구멍들이 보였다// 지금은 솔빛마을이 들어서고/ 도로 밑에 개흙, 죽은 물고기들,/ 수문통 다락방 젖은 나무들,/ 모두 묻혀버렸지만,

─「못, 자국」 중에서

  기억의 서랍마다 알이 슬어 있다/ 새로 태어나는 시간을 죽이고, 물구나무서서 나뭇가지를 잃기도 한다

─「장롱 속에는 별을 놓친 골목길이」 중에서

  시간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고 묻히는 것이 과거라지만, 과거의 흔적은 묻힐지언정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과거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도로 밑에 묻혀 있지만, 여전히 삶에서 지워지지 않은 채로 숨을 쉬는 “못 자국 같은 생의 숨구멍들”로 남는 것이다. 심지어 “기억의 서랍마다” 슬어 있는 “알”은 현재의 시간에 침투하여 그것을 변형시키는 힘이 있다. 과거의 기억은 생명의 부화를 앞둔 ‘알’처럼 지금 이곳에 자리를 잡고 현재를 성실히 갉아 먹는다. “새로 태어나는 시간을 죽”일 수도 있는 기억의 ‘알’은 회상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회상의 형식을 거부하는 과거의 기억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것으로 현재에도 생생하게 살아 남는다. 기억은 사라지거나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썩지도 않는 것들”이 되어(「꽁치통조림」) ‘나’의 안에 켜켜이 쌓인다.
  그렇게 살아남은 과거는 타인의 고통으로 가득한 시간이다. 인천의 어느 축축한 뒷골목에서 출발한 과거의 기억은 온통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 투성이다. 이설야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얼굴들’의 존재가 그것을 증명한다. 얼굴들은 끈질기게 ‘나’를 쫓아와 들러붙고, ‘나’는 그 얼굴들에 사로잡힌다. 사라지지 않고 현재의 화자를 구성하는 과거의 기억처럼 “죽은 지 오래된 얼굴들” 역시 흘러가지 않고 “더 안쪽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남아 있다(「마트료시카」). 잠시 숨길 수는 있겠지만 영영 없앨 수는 없는 ‘얼굴들’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얼굴들은 ‘나’를 찾아올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나’의 얼굴을 노리기 때문이다. 앵벌이 소녀가 구걸하는 장면을 연극처럼 연출한 「막간극」에서는 소녀가 두고 간 “햇빛”이 “넝쿨식물처럼 올라와 관객들의 얼굴을 칭칭 감는다”. ‘얼굴들’의 이 노골적인 방문은 관객들이 그것을 직면하도록 강요한다. 끈질기게 쫓아오고, 달라붙고, 떼어낼 수 없는 감각이 이설야의 시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이유이다. “다 쓰지도 버리지도 못한 어제의 얼굴들”이 떠오를 때, 생각은 “나인 것처럼 달라붙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다”(「저수지」). 어느 순간부터는 ‘나’를 찾아오는 얼굴들, 즉 타인의 고통과 기억은 ‘나’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나인 것처럼” 달라붙어 ‘나’와 ‘그것’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이는 결국 ‘나’가 과거에 목격한 타인의 고통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태고의 풍경에 자리 잡은 타인의 고통은 현재까지 끈덕지게 따라붙어 ‘나’를 자극한다. 회상의 형식을 거부하는 과거, 곧 흘려보내지지 않는 타인의 고통이 현재의 화자를 붙들고 늘어지는 감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설야 시의 화자들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유독 취약하게 그려진다. “개미 다리 서너개를 밟고/ 일년이 다 상해버”릴 정도로 무르고 유약하다(「개미 그림자」). 여러 시편들에는 스치듯이 보고 지나칠 수 있는 풍경들도 그냥 흘려보내지 못하는 화자들이 무더기로 등장하는데, 그들에게 세상은 쉽게 두고 갈 수 없는 존재들의 눈빛으로 가득하다.

  나는 매일 어제의 말들 속에서 쓰러진다

  돼지가 아니었어

  화물차에 치인 커다란 개의 몸이 점점 마비되고
  도로는 개의 눈빛으로 질척거린다

  나는 지하차도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개의 눈빛은 지하차도 밖으로 새어 나오고
  트레일러는 차선을 바꿔 길을 마저 간다

  나는 저녁까지 개의 눈빛을 다 지울 것이다

  한때 개였다는 흔적이 지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개미가 지구 밖으로 짐을 쏟고 있는데
  섬의 나라 투발루는 점점 가라앉는다

  영혼의 점멸등이 깜박거리며
  우리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개의 흔적이 바람에 조금씩 깎이고 있다

─ 「개미짐」 중에서

  차를 몰고 가던 화자는 도로에 쓰러진 개 한 마리를 발견한다. 달리는 화물차에 치인 것 같은 그 개는 점점 죽어가고 있고, 그 광경을 목격한 화자는 도로가 마치 “개의 눈빛으로 질척”거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화자가 속한 공간은 다른 존재의 고통을 목격하면서부터 삽시간에 그 성질이 변화한다. 그 와중에 거대한 트레일러는 유유히 “차선을 바꿔 길을 마저 간다”. 화자가 느끼는 질척거리는 감촉과는 사뭇 다른 산뜻한 온도이다. 게다가 점멸등의 불빛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개의 흔적은 “바람에 조금씩 깎이고 있다”. 별것 아닌 풍경이다. 달리는 도로 위에서 일어난 개 한 마리의 죽음과 그것의 우연한 목격은 차선을 바꾸듯이 시간이 조금만 흐르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기억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그러나 화자는 “개의 눈빛”이 “지하차도 밖으로 새어 나오”고 있음을 본다. 개의 눈빛은 흘러가지 못하고 ‘나’에게 따라붙었다. 개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의 화자는 곧이어 지하차도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흡입력을 느꼈고, 그건 화자가 차마 개의 눈빛을 무시할 수 없던 이유를 닮았다. 죽어가는 개의 눈빛은 ‘나’를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나는 저녁까지 개의 눈빛을 다 지울 것”이라고 다짐하지만,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나’는 “매일 어제의 말들 속에서 쓰러”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화자에게 다른 존재의 고통은 그것을 목격한 이상 회상의 형식으로 발화될 수 없다. ‘나’에게 달라붙은 개의 눈빛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므로, 마치 그것을 사라진 것처럼 여기고 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죽어가는 존재의 눈빛은 현재의 화자를 끌어들이거나 쓰러뜨리는 감각 등으로 발현한다. 고통의 기억은 비록 시간 상으로 “어제의 말”이 될지라도 번번이 화자를 쓰러뜨리는 힘을 가졌으며, 그 힘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다른 존재의 고통은 종종 삶을 잡아먹을 정도의 거센 압력을 가지고 찾아온다. 즉 삶에 대한 감각보다 삶에 침입하는 고통의 감각이 훨씬 강력하다는 것이다. 뺨을 맞는 여자의 옆을 지나면서 “나도 같이 맞고 있”는 느낌을 받거나(「심지음악감상실」), 횟집에 앉아서는 “상추 밑에 물고기 눈동자 끔벅이는 소리/ 얇은 눈꺼풀 상추 잎에 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물고기 여자」). 고통이나 죽음에 처한 존재들이 느끼는 감각은 목격자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목격자로서의 화자들은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하염없이 가라앉는다. 그 가라앉음은 마치 “개미가 지구 밖으로 짐을 쏟”는 와중에도 “섬의 나라 투발루”가 “점점 가라앉는” 일을 닮았다. 개미가 지는 짐의 무게를 이 지구상에서 아무리 덜어낸다고 해도, 하나의 섬이 가라앉는 속도를 따라잡지는 못한다. 타인의 고통이 존재하고 그것을 목격한 이상, 목격자로서의 화자들은 필연적으로 가라앉는 운명에 처한다. 시인은 “누군가는 살아 있고/ 누군가는 죽어가는 밤// 삶의 농도는 맞추기 힘들다고” 말한다(「사라진 것들」). 누군가의 죽음은 너무나 강력해서, 누군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차마 희석하지 못한다. 이설야에게 있어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고 그것을 감각하는 일은 끊임없이 이 불균형한 삶의 농도를 떠올리는 일이다.

  

3. ‘들림’의 시

  희석이 불가능한 타인의 고통은 ‘나’의 삶을 무단으로 침범한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까지 살아 남아 ‘나’를 구성하듯, 타인의 고통은 결코 죽지 않고 남아 ‘나’에게 달라 붙는다. 이때 시인이 느끼는 이 ‘어쩔 수 없음’의 감각이 시인으로 하여금 그들의 고통을 말하게 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를 쓴다는 일은 쉽지 않다. 타인의 고통으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어쩐지 죄를 짓는 것만 같”다(「웅덩이, 여자」). 게다가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그 어떤 말도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힘을 잃는다. 말은 삶이 존재할 때만 가능한 것이지만, 가끔 말이 삶의 크기와 속도를 앞지를 때, 공허한 멀미감이 찾아 온다. 「편집회의」라는 시에서 화자는 죽어가는 ‘너’의 병실에서 편집회의를 하며 “페미니즘과 유토피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페미니즘과 유토피아는 무슨 상관”인지, “유토피아는 지금 너에게 빚을 얻어 건설된 곳 같기만” 하다는 생각을 한다. “너는 죽어가는데/ 나는 이런 식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말이 삶을 앞지르는 순간의 아뜩한 현기증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타인의 고통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불균형해지는 삶의 농도를 끊임없이 곱씹는다. 삶 속의 죽음이 삶을 능가하는 농도를 가졌다는 사실 앞에서 번번이 좌절한다. “그림자의 일들은/ 아득하고 가득해/ 다 기록할 수 없”다고 고백하거나(「개미 그림자」), “어디선가 새어 나오는 연기처럼 사라진 것들”은 “입으로는 다 말 못”한다고 시인한다(「위험 고압가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쓰고자 한다면, 즉 타인의 고통을 포착하고 그것을 이미지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 과정에 자리한 생산자의 ‘의도’가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분명 이 시인의 의도는 수용자의 감정을 동요하게 할 목적으로 중독적인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포르노적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그는 타인의 고통에 한없이 취약하지 않았던가. 내장이 찔리는 듯한 감각을 느끼다 못해, 차마 흘러가지 않는 타인의 고통에 쫓기고 붙들리는 자가 아니던가. 그는 타인의 고통을 목격하며 그들로부터 자신을 구별할 수 없는 사람이다. 과잉된 동정심 같은 감정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략)
  난민단체 자원봉사자가 스티커를 내밀었다

  ‘이 아이들처럼 전쟁이나 재난을 당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주저하다가 식량과 물이라 적힌 설문조사 칸에 스티커를 붙였다.
  자원봉사자는 내게 틀렸다며
  닳고 닳은 서류철을 펼쳐 보였다.

  (중략)

  아이가 아이를 낳는 곳
  그곳에서 여권이나 식량보다도 더 절박한 건 천막이라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장막
  국경을 바라보는
  자원봉사자와 나 사이에 무언가 있다.
  작은 천막 안에 빼곡하게 앉은 검은 아이들이
  이쪽을 향해 마른 눈빛을 보내고 있다.

  어느 먼 경계에서 자꾸만 말을 거는 아이들
  절박한 빛이 넘어오는 국경
  저쪽 천막은 까마득한 고통의 전시장

  반은 무음이고 반은 울음인
  검은 아이들과 나 사이에 무언가 있다

─「난민 소녀들─설문조사」 부분

  한낮에 길을 걷던 화자에게 난민단체 자원봉사자가 다가와서 전쟁이나 재난 중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느냐고 묻는다. 이때 화자가 생각한 대답과 자원봉사자가 정해놓은 대답은 일치하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에 관한 질문과 정답은 까마득한 국경을 사이에 두고 “닳고 닳은 서류철”에 적혀 있었는데, 이곳의 언어로 적힌 질문과 대답이 국경 너머에 있는 아이들의 말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곳에서의 질문과 대답은 오직 이곳의 언어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졸지에 ‘틀린’ 답을 하게 된 화자가 자원봉사자와 ‘나’ 사이에 있다고 느끼는 ‘무언가’는 이곳과 그곳의 언어가 갖는 간극을 반영한다. 아이들에게 절박하게 필요한 것을 설명하는 “닳고 닳은 서류철”의 언어와 아이들이 이쪽을 향해 보내는 “마른 눈빛” 사이에는 얼마나 큰 간극이 있을까.
  “어느 먼 경계에서 자꾸만 말을 거는 아이들”의 언어는 “반은 무음이고/ 반은 울음”으로 이루어졌다. 화자는 다시 한번 아이들과 자신 사이에 있는 ‘무언가’를 느끼는데, 그가 경험하는 이 ‘무언가’의 감각이 바로 이설야 시에서 타인의 고통을 서술하려는 추동력으로 작용한다. 시인은 해당 시가 실린 두 번째 시집의 「시인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에게 시는 그 ‘무언가’를 찾는 일이다. (중략) 그 ‘무언가’가 나를 찾아와 자꾸 흔들어 깨운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눈물들이 나의 문지방을 넘어 내 잠 속의 꿈들을 적신다”. 고통의 목격자를 “흔들어 깨우는” 이 ‘무언가’는 “반은 무음이고/ 반은 울음”인 비언어적 성질을 지닌다. 그러나 이 ‘무언가’의 상태는 시인을 끊임없이 찾아와 그것의 언어적 발현을 요구한다. 이것이 이설야의 화자들이 무언가가 “자꾸만 말을 거는” 느낌을 받는 이유이다.

  빗물보다 진한 눈물 뚝뚝 흘리며
  벽장 안에 갇혀 울던 화평동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세탁기통 속에서도 귀신들이 우글거리며 같이 가잔다고

─「어제 자르다 만 귀가 있다」 부분

  화자에게 말을 거는 존재는 형체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다만 감각될 뿐인 ‘귀신’이나 ‘넋’과도 같다. 울음과 무음으로 이루어진 ‘무언가’의 상태가 그 실체를 판별할 수 없듯이, 화자를 향해 말을 거는 것들의 정체는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은 그에게 분명한 무언가를 요구한다. 앞선 시편들에서 화자를 쫓아와 끈질기게 들러붙던 것은 그가 목격한 타인의 고통이었고, 화자는 자신에게 달라붙던 그 감각들에 취약했었다. 화자가 느끼는 ‘무언가’ 역시 그 감각의 연장 선상에 있다면, 이제 타인의 고통은 감각의 차원에서 화자를 자극하는 수준을 넘어 “돌아가고 싶다” 혹은 “같이 가잔다”는 요구를 한다. “바뀐 주소로 누군가 자꾸만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구체적인 언어의 형태를 요청하기 시작하는 것이다(「날짜변경선」).
  시인은 자기 안에 흘러 넘치는 그들의 목소리를 “어쩔 수 없이 받아 적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이설야 시의 특이점은 마치 화자가 타인의 고통에 ‘들린 것처럼’ 그것을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들림’이란 귀신이나 넋 같은 것이 누군가를 덮쳐 바로 그 자신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외부를 떠돌던 낯선 감각들이 시인을 덮치면, 그때 시인은 타인의 고통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생산자가 아니라 직접 고통을 말하는 당사자가 된다. “그들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자꾸만 흘러넘쳐 어쩔 수 없이 받아 적었다”는 시인의 고백은 바로 이 ‘들림’의 고백에 다름이 아니다. 화자는 타인의 고통을 ‘전달’하거나 ‘대변’하지 않는다. 다만 화자의 몸속에는 귀신처럼 들린 목소리들이 가득해서 그것이 ‘흘러 넘치는’ 상황을 막을 수 없는 것 뿐이다.

  나는 그 벌레의 정체가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중략) 나는 그것을 입말로 풀어내기 위해 끙끙댔다. 그때, 한 문장이 지나갔다.

  “뒤돌아서 벌레의 길을 가라”

  그러자 어디선가 날아온 벌레가 내 목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작은 발가락들을 꼬물거리는 알이 꽉 찬 벌레가 내 배 속에다 몸을 풀었다. 나는 이제 벌레를 사랑해야만 하고, 벌레를 살아야 할 것이다. 꽤 오래된 시간이 나를 끌고 다녔나?

  내가 비로소 벌레가 되었을 때,
  벌레의 한 종족으로 화했을 때,

  나는 벌레의 밖을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유령 벌레들」 부분

  타인의 고통을 둘러싸고 그것을 중독적으로 이미지화하는 생산자, 그리고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한 채 과잉된 감정을 일회적으로 소비하는 수용자의 구도가 이설야의 시에 적용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고통에 ‘들린’ 시를 쓰고 있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들린다’는 행위는 곧 고통의 당사자와 목격자의 간극을 무화하고 단 한 명의 발화자만을 남긴다. 화자가 궁금해하던 벌레의 정체는 “입말로 풀어내기 위해 끙끙”대도 해명될 수 없었다. ‘들림’이 일어나기 전에 화자와 벌레 사이에는, 그러니까 발화자와 피사체 사이에는 서로 다른 존재로서의 간극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레가 화자의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알이 꽉 찬 벌레가 내 배 속에다 몸을 풀”기 시작한다. 이제 화자의 몸과 벌레의 몸은 구분이 불가능한 하나의 몸이 된다. 그제서야 화자는 자신이 “이제 벌레를 사랑해야만 하고, 벌레를 살아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설야의 시에서 벌레를 쓰고 싶다면 그것을 쓸 수 있는 방법은 “내가 비로소 벌레가 되”는 것이다. ‘들린’ 존재라는 것은 곧 내 안에 들어 온 존재를 직접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설야는 자신이 목격한 타인의 고통이 그의 몸을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로, 그러다가 곧 그 자신이 되어버리는 ‘들림’을 기꺼이 허용한다. 따라서 그에게 타인의 고통은 묘사하거나 기술하는 영역을 뛰어넘어, 그 자신이 되어 고통을 발화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들림’의 순간에는 타인의 고통을 묘사하는 자나 그것을 읽는 자의 ‘적절한’ 자세에 관한 질문은 잠시 흐릿해진다. 이설야는 자신이 써야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그것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시인이다. 그가 써야 하는 얼굴들은 쓰는 자의 내부에 알을 까고 자리를 잡은 다음 불가항력적인 언술의 흘러넘침을 요구한다. 이때 시인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쓰는 수밖에”.

  

  

주석

  1. 『굴 소년들』에 수록된 「시인노트」 참고.
  2. 위의 글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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