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개념정원 〈15회〉: 텍스트의 증상 읽기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없다. 똑같은 책을 읽은 내 동료는 그 책의 여러 부분들에 대한 확실한 호오와 그 근거에 대해 말한다. 그 친구의 말을 듣다 보면 책에 그런 대목이 있었던가 싶다가, 나는 대체 뭘 읽었을까 자문하게 된다. 기억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책을 읽는 방법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책을 어떻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텍스트의 증상을 읽어야 한다는 말은 이런 질문에 대한 한 대답일 수 있다. 증상이 보이면 생각이 투입되고, 성찰적 독서 경험은 텍스트를 자기 고유의 것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쓰이는 텍스트의 증상이라는 말은 일견 이상해 보인다. 증상이라는 말은 인체의 이상을 보여주는 지표인데 어떻게 텍스트에 적용될 수 있을까. 텍스트가 기침을 하거나 열이 나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증상 같은 것이 있을까. 또 텍스트의 증상을 읽는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그것이 어떻게 제대로 읽기의 방법일 수 있을까. 먼저 텍스트라는 말을 살펴보는 것으로 논의를 시작해보자.

 

작품work과 텍스트text

  한 개념의 뜻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그것의 맞짝 개념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맞짝 개념과의 차이를 알고 둘을 제대로 구분하면 좀더 정교한 앎에 도달할 수 있다.
  텍스트의 맞짝 개념은 작품이다. 이 둘이 맞서게 된 데는 프랑스 비평가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1915~1980)의 기여가 크다. 동일한 대상을 작품이라고도 텍스트라고 부를 수 있으되,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맥락과 의미가 달라진다. 크게 구분하자면, 감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작품이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텍스트이다.
  작품이라는 관념은 작가의 고유성이 발현된 완미한 결과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작가의 천부적 개성에 대한 강조가 그 바탕에 있어, 독창성이나 천재성 같은 관념과 동일한 궤에 놓여 있는 것이 곧 작품이라는 단어이다. 이런 일련의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맥락은 예술에 관한 근대적 사유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특히 낭만주의 예술관에서 두드러지는 것이기도 하다. 독창성의 산물로서 완결된 대상인 작품이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감상과 평가이다.
  반면에 텍스트는 씨줄과 날줄에 의해 짜여 있는 직물texture처럼 여러 요소들에 의해 직조된 결과라는 의미가 강하며, 작품과는 달리 완결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다. 결함과 간극을 지닌, 울퉁불퉁하고 균형이 맞지 않는 것이라 함이 텍스트의 속성에 맞는다. 그래서 텍스트는 감상의 대상이기 이전에 분석과 해석의 대상이 되며, 읽는 과정을 통해 재탄생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독자 앞에 존재한다. 텍스트가 미완의 것이라면 텍스트 생산의 주체 역시 유동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완결되고 불변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작품(혹은 그 세계를 창조한 작가)의 관념과는 정반대의 모양새이다.
  이런 점에서, 텍스트와 그 생산 주체는 ‘구성된 것으로서의 주체’라는 개념과 상응하는 면이 있다. 주체란 미리 존재하는 특정한 실체나 준거점이 아니라 다양한 행위와 관계 맺기를 통해 사후적으로 형성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전환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전환은, 근대성의 자기 전개 과정에서 근대적 이성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20세기 전반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대형 참사를 거치며 사상적 주류로 부각된 새로운 인간 주체의 상은, 확고한 이성을 가진 믿음직한 존재가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심연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불안한 존재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 대두한 사상사의 탈근대적(혹은 포스트모던한) 전환은 이성적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그 같은 신뢰 상실에 바탕하고 있다.
  텍스트와 생산 주체는 근대성의 전개 과정에서 크게 세 단계의 변화를 거친다. 무명의 장인에서 천재적 예술가로의 전환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전환에 해당하며,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전환은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전환이라는 흐름을 반영한다.
  중세의 장인은 기술자의 지위를 지닌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지녔다 해도 이름을 남겨 기림을 받을 정도의 대접은 받지 못했다. 자기 이름을 앞세우는 근대의 예술가-작가는 독창성을 지닌 작품의 창조자로 간주된다. 창조라는 말 자체가 그렇듯이 예술가는 신과 유사한 지위를 지닌다. 그러나 작가의 자리에 들어선 텍스트 생산의 주체는, 텍스트 자체가 그렇듯 다양한 방향성을 가진 힘과 다양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집적체이다. 누적된 흐름들 속에서 텍스트라는 매듭을 만들어내는, 그 자신 속에 있는 여러 힘들의 대행자일 뿐이다.
  텍스트가 사회적 생산물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작품이 개별 작가의 창조물이라는 생각은 허상에 불과하며, 또한 작품이 정합적인 의미 체계를 지닌다는 생각 역시 그러하다. 서로 어긋나며 심지어는 서로 상충하는 생각들의 집합체가 곧 텍스트이자 텍스트의 주체이다.

 

텍스트의 증상

  모든 텍스트는 자기 고유의 증상을 지닌다. 텍스트는 사람 손을 거쳐 나온 것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제작되었다고 해도, 신의 작품이 아닌 다음에야 꿰매고 기운 흔적이 없을 수 없다. 텍스트의 증상이란 텍스트가 지닌 정합성의 체계에 생겨난 비정상 상태 혹은 일관성의 예외 상태를 뜻한다.
  텍스트에 증상이 불가피하다면, 각각의 텍스트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증상들은 곧 텍스트의 고유성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일그러짐으로서의 증상이 텍스트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기침하는 소설이고, 저것은 열이 나는 시이다. 증상이 생겨 텍스트의 일관성이 흐트러지는 지점을 파고들면, 그 텍스트의 고유성이 발원하는 심층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에서 증상은 텍스트의 심층으로 들어가는 문의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보자.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제대로 복수하지 못하는 왕자의 이야기이다.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에 복수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햄릿은 극중에서 커튼 뒤에 숨어 있는 사람을 단칼에 찔러 죽인다.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이기는 했지만, 햄릿의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궁정의 대신이 햄릿의 칼에 죽었다. 그런 행동을 하는 햄릿을 우유부단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가장 중요한 인물인 햄릿의 성격적 일관성이 흐트러져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햄릿의 성격적 비일관성은 『햄릿』의 증상으로 간주해도 좋겠다. 그리고 그런 증상의 존재는 『햄릿』을 『햄릿』답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햄릿의 성격에서 나타나는 텍스트의 증상은 무슨 말을 하는가. 다른 사람은 쉽게 죽이면서도 복수의 대상인 숙부에게는 함부로 칼을 대지 못한다는 점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이 지점을 천착하면, 바야흐로 근대성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는 합리적 정신의 모습이, 햄릿의 성격적 비일관성 속에 아로새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햄릿이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 복수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층위에서 얽혀 있는 시대적 의미의 매듭이 곧 『햄릿』의 증상이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로 기록되는 이광수의 『무정』의 경우를 들어볼 수 있다. 이 소설에서 기괴하다 할 만큼 특이한 점은, 여주인공 박영채가 매판지식인과 매국노에 의해 능욕을 당하는 사건이 서사의 결정적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선량한 여주인공이 겁탈당하는 일은 그때까지 한국소설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소설 속에서 그 사건은 남자주인공의 작중 위상을 크게 흔들어버리고 종래는 서사 전체의 방향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 그런 정도로 강력한 정서적 위력을 행사하고, 또한 적지 않은 파장을 만들어내는 이 사건은 서사적 비정합성의 초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사건을 텍스트의 증상으로 만드는 것은 이런 특이성 때문이거니와,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정』이라는 텍스트가 자기 시대의 독자들과 공유하고 있는 정동의 덩어리를 찾아낼 수 있다. 『무정』의 작가 이광수가 지녔던 의식적 무의식적 이념도 그 일부를 이루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겠다.
  증상이 텍스트의 고유성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함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모든 텍스트는 자기 고유의 증상을 가진다고 했으니, 텍스트의 증상은 최소한 현존하는 문학 텍스트의 수만큼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텍스트의 증상을 발견할 수 있는 독자의 존재 여부이다. 억지스럽거나 이상해 보이는 설정, 서사의 일관성이 흐트러지는 대목들은 모두 증상의 후보자가 된다. 그런 후보자들 중 어느 하나에서 텍스트를 완결시키는 논리가 발견될 때, 그 논리를 찾아내는 독자가 등장할 때, 그것은 비로소 텍스트의 증상이 된다.
  이런 점에서, 텍스트의 증상은 객관적이면서 동시에 주관적이다. 주관에 의해 포착되고 그 기제가 논리화됨으로써 비로소 객관적 실체가 되는 것이 곧 텍스트의 증상이다.

 

텍스트의 무의식

  증상이라는 단어가 사람의 몸이 아니라 텍스트와 결합할 수 있게 해준 사람들이 있다. 프로이트와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들, 그리고 정신분석학의 논리를 텍스트 읽기에 도입한 철학자 알튀세르Louis Pierre Althusser(1918~1990)를 들어야 할 것이다. 해체deconstruction라는 단어를 자기 고유의 윤리-비평적 용어로 정착시킨 데리다Jacques Derrida(1930~2004)의 작업도 그런 생각의 연장에 있다.
  프로이트의 신경증 분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신체적 증상psychosomatic symptom, 즉 정신적인 이유로 신체상에 나타나는 증상들이다. 프로이트가 체계화한 논리에 따르면, 증상이 있는 곳에는 억압이 있고 억압이 있는 곳에는 무의식이 있다. 억압된 생각들이 풀려서 의식으로 드러나면 비로소 증상도 사라진다. 신체적 마비나 호흡 곤란 같은 증상들이 지시하는 것은 그 밑에 무의식과 억압이 있다는 사실이다.
  텍스트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증상이 있는 곳에는 심층에서 작동하고 있는 무의식의 기제들이 있다. 텍스트의 무의식에서도 중요한 것은 무의식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기제를 통해 작동하는지를 밝히는 것이다.
  텍스트라는 말은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그것이 서로 상충할 수도 있는 다양한 요소들로 구성된 것임을 뜻한다. 한 사람의 정신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텍스트라는 관념은 그것이 한 개인의 손끝을 거친 사회적 생산물임을 전제하고 있다. 텍스트의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밑에서 작동하고 있는 힘들의 세계가 텍스트의 무의식을 이룬다.
  텍스트 생산에 참여하는 기제는 크게 세 차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 개인과 사회 현실, 그리고 둘을 매개하는 것으로서의 장르의 문법이다. 개인의 차원에 있는 것은 어떤 작품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이다. 그리고 작가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한 힘은 사회적 차원에 존재하는 현실이다. 작가의 의도가 작품으로 구체화되기 위해서는 그 의도가 기대야 할 장르의 문법이 있다.
  어떤 텍스트도 의도가 없는 텍스트는 없지만, 거꾸로 그 어떤 의도도 수미일관하게 텍스트 안으로 관철될 수는 없다. 한 개인의 의도는 사회 현실과 장르의 문법을 만나는 순간 굴절되지 않을 수 없다. 사회 현실과 장르의 문법은 모두 자기 고유의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회 현실과 장르의 문법 역시 한 개인의 의도와 만나는 순간 변형과 왜곡의 절차를 거친다. 특정한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 역시 자기 고유의 동력을 지닌 탓이다.
  이와 같은 굴절과 변형과 왜곡 과정에서 텍스트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힘도 있고, 또 다양한 형태의 내외적 억압으로 표현되지 못한 채로 잠복해 있는 힘도 있다. 바로 그 잠복해 있는 힘이 텍스트의 무의식을 이루며, 그 힘의 일그러진 표현이 곧 텍스트의 증상이되, 증상은 오로지 그것을 읽고자 하는 사람의 시선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증상 읽기

  텍스트의 증상은 증상 읽기라는 절차에 의해서 발견된다. 정신분석학에서 증상이 중요한 것은 증상 해석을 통해 그 사람의 무의식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증상에 있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텍스트의 증상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증상 읽기를 통해 텍스트 안에 축장되어 있는 다른 목소리와 접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증상 읽기는, 표면에 드러나 있는 의미에 만족하지 않은 채 심층의 목소리 속에서 텍스트의 고유성을 읽어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때로 그런 시도는 한 텍스트의 저변에 응축되어 있는 텍스트 형성의 일반 원리에 접근하게 하기도 한다. 증상 읽기를 시도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한국문학사가 조동일은 조선의 판소리계 소설이 지닌 주제의 양면성을 적시했다. 소설의 서사가 겉으로 내세운 명분과 서사 자체가 실제로 표현하고 있는 내용을 구분하여, 그는 표면적 주제와 이면적 주제라 불렀다. 그에 따르면, 표면적 주제는 조선 시대 지배 이념의 전통적 덕목들에 해당하는 것이고, 이면적 주제는 그런 이념들이 포괄할 수 없는 당대의 사회적 현실의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판소리계 소설은 구비전승된 이야기가 채록된 것이다. 말 그대로 집단 창작의 소산이기에 판본이 다양할 수밖에 없으며, 그에 따라 인물의 일관성이 결여되기도 하고 사건이 서사 전체와 정합적이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들은 서사의 표면에 드러난 것만으로도 증상투성이의 모습을 지닌다. 이를테면, 『흥부전』이 내세우는 윤리적 명목은 형제간의 우애나 권선징악이지만 실제로 그려내고 있는 것은 빈부 격차와 갈등이라는 사회적 현실, 그리고 이미 역전되어 버린, 부자와 양반 사이의 현실적인 힘의 위계이다. 『춘향전』의 경우는 여성의 정절을 앞세우고 있으나, 서사가 표현해내고 있는 것은 탐관오리로 대표되는 지배집단의 악행과 한 여성이 자기 정절조차 지킬 수 없는 사회적 현실의 질곡이다. 이 둘을 두 개의 주제로 분할하는 조동일은 텍스트의 증상 읽기를 실천하고 있는 중이며, 그것을 통해 그는 텍스트가 생겨나는 내부의 원리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프랑스의 맑스주의자 알튀세르가 『자본론 읽기』(1968)에서 제안한 징후적 독해lecture symptomale(혹은 증후적 독해/읽기 등으로 번역된다) 역시 증상 읽기의 대표적 방법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영국의 고전 경제학자들을 읽으며 그들이 지닌 고정관념으로 인해 볼 수 없었던 것들을 지적하고 보충해내는 것을 보면서, 마르크스의 방법을 징후적 독해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그 방법으로 마르크스를 읽자고 제안한다.
  여기에서 ‘징후적’이라고 번역되어온 단어는 정신분석학에서 사용되는 증상에서 나온 말임은 크게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라캉이 수행해온 프로이트 읽기가 그의 이론적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그 자신이 밝히고 있거니와, 마르크스로의 회귀라는 그의 표어 역시 프로이트로의 회귀라는 라캉의 모토와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요컨대 하나의 텍스트가 지닌 결락과 간극, 언어화되지 않은 것, 즉 텍스트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이 알튀세르에게는 징후적 독해에 해당한다.

 

사회적 증상, 증환症患, sinthome

  인문학의 영역에서 symptom(혹은 symptome)의 번역어로 채택되었던 징후나 증후라는 말이 증상이라는 의학 용어로 대체된 것은 지젝의 책들이 널리 읽히면서부터이다. 라캉의 소개자이자 이데올로기 비판가로서 지젝은, 매우 먼 거리에 있는 것으로 보였던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이론적 다리가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책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첫머리에서, 마르크스의 상품형식 분석과 프로이트의 꿈형식 분석이 동일한 문제의식에 입각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젝이 강조한 멋진 개념 둘을 살펴보자. 사회적 증상과 증환이다.
  지젝은 마르크스의 관점을 차용하여 증상을 사회적 증상 혹은 이데올로기적 증상으로 제시한다. 이 경우 사회나 이데올로기는 당연히 자본주의 체제와 이념을 지칭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증상은 “주어진 이데올로기의 장에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그 장을 완결시키기 위해 필요한 어떤 결렬의 지점”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여기에 개입해 있는 것은 예외의 논리이다.
  자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보편 이념으로 으뜸가는 것이다. 자유시장을 만들어내는 이 자유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포함하여 집회 및 결사 등의 다양한 자유를 그 밑에 거느리고 있다. 그런데 이 자유가 유지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특별한 자유가 있다.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팔 자유가 그것인데, 이 자유는 노동력 말고는 팔 수 있는 게 없는 부자유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시장 경제에서 핵심 원리는 자유로운 등가 교환이다. 그 원리가 시장과 상품을 만든다. 그런데 등가 교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상품이 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곧 그것이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치가 정해진 상품은 교환이 끝나고 난 뒤에 아무런 말이 없다. 그러나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자신의 가치에 대해 불만을 갖거나 항의하고 혹은 감사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는, 정확하게 산정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여 언제나 너무 적거나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력이라는 상품 없이는 상품 생산도 교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시장 자체가 만들어질 수 없다. 등가 교환에 필수적이면서 포섭되지 않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이런 점에서 시장 경제의 증상이다.
  이 두 개의 증상이 겹쳐지는 곳에 존재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자본주의 체제의 사회적 증상이다. 텍스트로 치면 배꼽 같은 존재이다. 일그러지고 보기 흉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없으면 모태를 거쳐야 하는 인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배꼽이다. 자본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시장이 있어야 하고, 시장은 상품이 있어야 한다. 다른 재산이 없어 상품을 만드는 일에 투입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어야 이 모든 것들이 유지된다. 그것이 곧 사회적 증상, 사회를 유지하는 데 불가피하고 또한 그로 인해 사회적 교란이 생겨나는 증상이다.
  증환은 분석이 끝나고 난 다음에도 사라지지 않는 증상을 지칭하기 위해 라캉이 만들어낸 신조어이다(프랑스어로 증상과 증환은 생톰이라는 동일한 발음을 지닌다). 정신분석 과정에서 증상은 해석이 끝나면 사라져야 한다. 마비된 팔이 풀리고 현기증이나 가슴 두근거림이 사라져야 한다. 분석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증상,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온 증상을 라캉은 증환이라고 부른다.
  왜 사라진 증상이 되돌아오는가. 이에 대한 라캉의 대답은 주체가 증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무의식의 표현인 증상에 주체의 향락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증환은 통상적 분석 절차에 의해 해소되지 않는다.
  지젝은 증환이 지닌 이런 속성을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진실을 밝히고 사실을 납득시켜도 여전히 잔존하는 이데올로기적 힘, 혐오와 차별과 편견 등이 있다. 그런 이데올로기적 힘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증환과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향락을 누리고 있는 주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회적 증환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히거나 교육시키는 것 이상이 필요한 이유이다.

 

 

  * 후주
  롤랑 바르트에서 시작하는 텍스트와 저자의 논의에 관해서는, 김태환 『실제 저자와 가상 저자』(문학실험실, 2020)가 유용하다. 표면적 주제와 이면적 주제에 관한 설명은, 조동일 『한국문학통사』3권(지식산업사,1984), 539~545쪽에 있다. 징후적 독해에 관한 대목은, 알튀세르 『자본론을 읽는다』(김진엽 옮김, 두레, 1991), 33쪽과 39쪽에, 알튀세르가 말한 라캉의 도움에 관한 대목은, 같은 책 17쪽에 있다. 알튀세르와 그의 동료들의 작업에 대한 개요를 알려면, 페레터, 『루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심세광 옮김, 앨피, 2014)가 유용하다. 지젝의 인용문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수련 옮김, 인간사랑, 2002), 49쪽에 있다. 증환에 대한 설명은 같은 책, 2장에 나온다. 『햄릿』의 증상에 대해서는 졸저 『풍경이 온다』(나무나무, 2019) 2장에, 『무정』의 증상에 대해서는 졸저 『아첨의 영웅주의』(소명, 2011) 2부에 좀 더 자세히 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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