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굴리던 집안의 둘째 딸 민선화 씨 ― 남한으로 온 엘리트 여성과 가족

  

  <필자 주>
  이 글은 1978년 북한에서 출생하여 30대 말에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이주한 엘리트 여성의 생애사를 정리한 것이다. 민선화 씨(가명)는 북한에서 운전사였던 아버지와 인민반 활동을 하던 어머니 그리고 세 자매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하여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1999년 교사로 배치되었다. 이십 대 중반 군인과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출산하였으며, 남편의 근무지를 따라 이동하면서 교사 생활을 계속했다.
  필자는 2019년 8월 민선화 씨를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두세 시간에 걸친 면담에서 구술자는 북한에 두고 온 지인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15년 동안 교사로 활동했던 경험, 북한에서의 생활 등을 소개하였다. 이야기 속에서 성실하고 교양있는 전문직 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2017년 통일연구원에서 작성한 구술 녹취록도 참고하였다. 구술 내용과 관련된 북한 사회에 대한 정보는 최근 학술 연구 결과를 참고하였으나, 이 글의 특성을 고려하여 자세한 출처는 생략하였다. 또 구술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인명과 지명을 적절히 바꾸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여 공개할 수 없는 내용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퇴근할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린 시절

  민선화 씨는 1978년 함경도에서 두 살 터울의 네 딸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닮아 뼈대가 굵었지만 어려서 1년간 병원 신세를 질 만큼 앓았다고 한다. 부모님이 부항과 뜸 치료를 받게 해서 몸에 커다란 뜸 자리가 생기기도 했다. 자동차 사업소의 운전사였던 아버지는 각 지역을 오가며 물자를 수송하느라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했고,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4명의 어린 딸들을 키우며 인민위원회 활동을 하던 어머니는 저녁밥을 차려놓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항상 우리 엄마가, 우리 기억에는 엄마가 항상 우리 그, 집 문턱에 이렇게 대고 자면 차 소리 쭉 나잖아요. 집 앞에 차 세우면 차 소리 듣고. 처음에 쪼끄말 때는 우리 엄마도 이렇게 밥도 “아버지 오면 딱 먹자” 이런 버릇이 있어서 애들 다 굶었거든요. 우리 다 안 먹고 그냥 있다가 아빠 오면 막 이렇게 밥을 먹고 또 자고 했었는데. (구술녹취록, 2019. 3쪽.)1

  1980년 초 북한의 한 가정에서 밥상을 차려둔 채 남성 가장의 귀가를 기다리는 정경이 한눈에 그려진다. 어린 나이의 구술자는 바깥소리가 잘 들리는 문턱에 귀를 대고 선잠을 자다가 차 소리가 들리면 일어나 늦은 저녁을 먹곤 하였다. “아버지 오면 딱 먹자”는 어머니의 말에서 묻어나는 단호함을 성인이 된 구술자가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 자녀들이 저녁을 굶고 퇴근할 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문화는 남성 가부장을 중심에 둔 가족 위계의 표현이다. 구술자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대가정大家庭’의 원리에 따라 직장에서 일하며 국가로부터 가족 전체의 배급을 받았다.2 어머니는 어린 네 자녀에게 일상적으로 아버지의 권위를 일깨웠다.

  

집안일과 남편 공대를 배우는 가정 교육

  구술자가 어린 시절을 보낸 1980년대 중반, 아침이면 온 가족이 탁아소와 학교, 인민위원회와 직장으로 출근하였고, 오후 5시 무렵이면 대부분 집으로 돌아와 생활했다. ‘엄격한 집안 분위기’지만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었고, 어머니는 집안 살림과 육아를 책임지는 동시에 오랫동안 지역 인민위원회에서 사무를 담당했다. 네 딸 중 첫째인 언니와 둘째인 민선화 씨가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일을 도왔는데, 여덟 살이 될 무렵에는 ‘세간살이를 다할 정도’였다.

  우리는 되게 여자들을 이렇게 어릴 때부터 그렇게 키워요. 나중에 이제 시집을 가서도 시집에 이제 잘 해야 되고 남편을 잘 공대하고 그다음에 가족생활을 잘 꾸려나가려면 어릴 때부터 부모들이 이제 그런 법을 다 배워주거든요. 이제 같이 뭐 밥 먹고 설거지하는 일, 그다음에 장판 이거 닦는 일, 그다음 빨래하는 것 이걸 엄마가 배워줘가지고.” (구술녹취록, 2019. 4쪽.)

  소학교에 다니던 열 살 때부터는 밥을 먹으면 언니가 설거지하고 구술자는 장판을 닦는 등 ‘나중에 커서 시집가서 할 일’을 막힘없이 잘할 만큼 집안일을 하고 동생들을 챙기며 생활하였다. 당시 북한은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지 않아서 아파트의 3층에 살던 가족은 물동이를 이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오고, 오수를 내다 버려야 했다. 또 창고의 땔나무를 등짐으로 지고 3층 부엌에 하루 필요한 양을 채워 넣어야 했는데, 언니와 구술자가 아침과 밤낮으로 이 일을 맡아서 했다. 흥미롭게도 고등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구술자는 학교생활보다 언니와 집안일을 했던 경험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 또 1993년 언니가 의과대학으로 진학하여 집을 떠나게 되자 구술자의 어머니는 언니의 학업보다 언니가 하던 집안일을 먼저 걱정하였다. 이런 어머니의 짐을 덜기 위해 민선화 씨는 몰래 새벽에 일어나 물을 길어오는 등 “큰 소가 나가고 작은 소가 [일을] 한다”고 할 만큼 집안일을 하였다. 구술자는 인터뷰에서 ‘여자로서 할 일’을 배우는 것이므로 ‘우리에게 다 좋은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코피를 떨구며 공부하여 교사가 된 여성

  민선화 씨가 중학교에 갈 무렵 아버지는 노동자로서 ‘노력 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1989년 평양에서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릴 때는 외국인들을 수송할 운전사로 선발되었다. 외국인들이 참여하는 각종 대회에서 일한 후 이 경력을 기반으로 일반 자동차 사업소가 아니라 보안서에서 물자를 수송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북한에서 그 바퀴 굴린다고 하거든요 (중략) 바퀴 굴리는 사람이 제일 잘 산다고 이렇게 해서. 그래도 아빠가 로동자이지만 나름대로 북한에 있을 때는 엄청 생활이 좋았거든요. (구술녹취록, 2019. 4쪽)

  1990년대 초 북한의 국가기관인 보안서 소속 운송담당자가 된 아버지는 권력과 물자를 동시에 갖게 되었다. 각종 교통시설이 부족한 북한에서 자동차를 운전하여 각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조건은 다양한 정보를 취득하고 유형무형의 연계망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뿐 아니라 보안서와 관련된 물자를 ‘실질적으로’ 배분하는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가족의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풍족하게 조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유복한 조건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민선화 씨는 언제 어디서나 말 잘하고 똑똑한 언니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다. 언니가 의과대학에 진학한 후에는 어머니를 도와 각종 집안일과 함께 대학 입학 시험공부를 하면서 “코피를 뚝뚝뚝” 흘리기도 했다(구술녹취록, 2017. 5쪽). 고등중학교 3년 동안 배운 여섯 개 과목의 내용을 통째로 암송하는 대학 예비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여 다른 3명과 함께 희망하던 지역의 ◯◯대학 ‘지표’를 받았다.3 이어서 본시험을 거친 구술자는 1990년대 중반 ◯◯대학 어문학부에 진학하였다.
  구술자가 입학한 대학은 시범적으로 조성된 신식 대학이었으나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 후 시작된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교 기숙사와 식당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4 처음에는 500그램 식기에 ‘안남미’로 지은 밥을 주다가 10월 무렵이 되자 식기 바닥에 옥수수를 깔고 감자 3알을 얹어서 한 끼 식사로 주기 시작했다. 배가 고픈 학생들이 참지 못하고 집을 오가며 누룽지와 같은 ‘간식’을 가져다 먹기 시작했다. 당시 아버지가 북한의 통나무를 실어다 팔고, 쌀과 밀가루 등을 가져오는 ‘중국 무역’을 하던 중이었으므로 민선화 씨의 가족은 고난의 행군 중에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어머니는 학교 기숙사에서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하는 딸들에게 아버지가 챙겨온 밀가루로 과자를 만들어서 ‘간식’으로 주었다. 어떤 경우에는 25킬로 밀가루 1포대를 먹을거리가 귀하던 장마당에 판 돈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기도 했다. 민선화 씨가 다니던 학과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학한 직발생, 제대군인 그리고 3~4명의 사회 현직생을 포함하여 30명 정도의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엄청 재밌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십 대 말에서 삼십 대 초반의 제대 군인까지 포함된 남녀 대학생들 사이에 연애 분위기가 있었지만 ‘남녀문제’가 제기되면 퇴학을 당하기 때문에 대부분 드러내지 못했다. 당시 대학에서는 남녀가 손잡고 다니는 것도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었다.
  1998년 대학교 4학년이 된 민선화 씨는 6개월 동안 고사총부대에서 교도 생활을 하였다. 대학 생활 중 군부대에 배치되어 총 쏘기를 비롯한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마치고 졸업하면 유사시에 소위부터 상위까지의 장교로 임명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북한은 당시 심각한 식량난으로 주민들이 생계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국경지역 주민들이 ‘비법’으로 두만강을 건너는 월경越境이 속출하고 있었다. 먹을 것이 부실한 상황에서 군사훈련에 시달리던 대학생들 사이에 파라티푸스 전염병이 돌았다. 민선화 씨는 죽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40여 일 동안 고열에 시달리며 물도 먹지 못하던 중 동생을 면회 온 언니에게 구제되었다(구술녹취록, 2019. 8쪽). 외부 연락이 안 되는 군부대 한구석에서 앓고 있던 구술자는 당찬 의대생 언니의 호통과 긴급한 조치로 ‘치료받으러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집으로 왔다. 언니의 갖은 고생으로 열차를 타고 겨우 집에 도착한 후 병원에 입원했으나, 전염병과 기아가 겹쳐서 떼죽음이 벌어지는 당시 병원 상황을 보고 다시 집으로 왔다. 한 달 반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이 구해온 ‘유엔UN 약’과 ‘계란’ 등의 영양 많은 음식을 먹으며 겨우 건강을 회복하였다.
  다시 학교로 돌아간 구술자는 6개월 동안 남은 공부를 마치고 1999년 초 대학을 졸업하였다. 그해 각 시, 군 단위의 우등생들을 교육하는 제1중학교 제도가 시행되었는데 구술자는 이 학교의 국어 교사로 ‘당선’되었다. 지원자 12명 중에서 2명이 해당 학교의 수학과 국어 교사로 배치되었는데 후자가 민선화 씨였다. 스물한 살의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고 수재 중학교의 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군복 입은 남자와 결혼한 교사

  착실한 우등생이었던 민선화 씨는 교사로 부임하면서 ‘직업적 혁명가’로서의 포부를 가졌다. 인근 지역에서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한 중학교였으므로 자부심도 컸다. 당시 여성들은 스물세 살을 결혼 적기라고 생각하였으나 구술자는 다른 계획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우리 학급 애들 중에 둘이를, 2명을 이제 5과나 6과 있잖아요, 김정일 저택 호위나 5과생들 뭐 그런 데[곳] 이제 우리 학급 중에 남자애들 키 크고 잘나서 그런 데[곳] 뽑혀가잖아요, 우리 학급에서 그 2명을 배출하면 나는 바로 화선입당시키거든요.” (구술녹취록, 2019. 12쪽.)

  민선화 씨는 사회주의 건설 현장의 하나인 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을 잘 지도하고, 그 결과로 2명 이상의 학생을 북한의 핵심 조직에 선발시킨 공로로 화선입당火線入黨을 하겠다는 꿈을 가졌다.5 결혼도 입당 이후로 미뤘다. 2000년대 초 ‘수재 학교’의 젊은 교사로서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하고 당의 인정을 받는 것은 출세의 길이기도 했다. 학교의 수업이 5~6교시에 끝나지만 새벽 2~3시까지 학교에 남아서 공부하는 학생들을 감독하고 지도했다. 또 수업이 끝난 뒤 학년별로 이어지는 풀 뽑기 등의 노동작업과 4학년부터 실시되는 20~30일 농촌지원 등을 열성적으로 지도했다.
  그러던 중 의사가 된 언니가 1년 만에 중매로 나이 차이가 많은 고급 군관과 결혼하였다. 1년 뒤에는 민선화 씨에게 친구 어머니가 ‘군복 입은 남성’을 중매하였다.6 민선화 씨의 부모가 친구의 부모를 만나 군복무 중인 남성의 여러 가지 조건을 확인하고 흔쾌히 승낙하지 않았으나 자주 오가며 신뢰를 얻었다. 당시 학급을 맡아서 바쁘게 지냈던 민선화 씨는 학교까지 따라오기도 하는 네 살 연상의 남성에게 크게 호감을 느끼지 못했으나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하고 살겠나’라고 생각하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런데 군사복무 중인 장교는 만 서른 살이 되기 전에 결혼할 수 없는 규정으로 3년을 기다려야 했다. 남성이 자주 휴가를 받아서 구술자의 집으로 오면 함께 밥을 먹은 후 잠은 각자 다른 방에서 자는 생활을 계속했다. 구술자의 부모가 약혼하지 않은 남성과의 잠자리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이 시기 구술자의 가족이 남성의 군대 생활을 위한 물자를 지원했다. 2003년 여름 남편의 만 서른 살 생일을 크게 치른 후 부대 근처에서 살림을 시작했고, 다음 해에 정식 혼인을 한 후 딸을 출산하였다.

  

교사이자 군관 비서로서의 생활

  북한의 선군정치에 의하면 남성은 국가를 보위하는 주체인 ‘총’이고, 여성은 의식주를 중심으로 사회의 일상생활을 책임지는 주체인 ‘총꾼’으로 규정된다. 이에 따라 민선화 씨는 교사로 활동하지만, 여성으로서 군관인 남편의 일을 보좌하는 ‘군관 비서’이자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삼중의 역할을 하였다. 근무지를 따라 이동하는 군관 가족의 생활을 위해 결혼 초 구술자는 어린 딸을 친정에 맡기고 학교와 군부대 생활을 유지했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총화와 교육 외에도 명절에는 남편의 부대원을 위해 최소 20~25킬로 정도의 떡과 반찬을 준비하고, 주기적으로 탄창 주머니를 수선하는 일 등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교사로 일하고 있었으므로, 군대 일 중에서 적당히 빠질 수도 있었다.
  북한에서 군대는 모든 것에 우선하는 사회 조직이므로 국가가 가족까지 포함하여 모든 생활 물품을 조달하였다. 1인당 하루 800그램, 한 달에 24킬로의 쌀과 “사회보다 오히려 많은 생활필수품을 몽땅” 국가가 지원했다(구술녹취록, 2019. 17쪽). 교사였던 구술자는 학교에서 배급을 받기도 했지만 몇 달을 몰아서 한 번에 옥수수 500킬로, 쌀로 환산하면 2킬로 정도에 해당하는 양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제 생활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고난의 행군 이후 물자 부족으로 공장 생산과 배급이 중단되고 중국 밀무역을 통한 장마당 거래가 일반화된 2000년대 중반, 구술자의 가족은 물자 부족 등의 어려움 없이 생활했고 구술자 또한 장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7 군관인 남편은 구술자가 아프면 밥을 하거나, 겨울이 되어 수도관이 얼면 군인들을 보내서 물을 긷게 하는 등으로 집안일을 도왔다. 또 집안에서 “볼 뽀뽀”하는 것이 알려져서 상부에 ‘보고’되기도 했다.

  사실 북한에서는 이런 일이 그전에는 없는 일로 봤었거든요. 지금은 점점 나아지긴 하는데, 그전에는 남자는 일체 아예, 집안일은 몽땅 여자가 한다, 이런 게 있어가지고.” (구술녹취록, 2019. 21쪽.)

  당시 북한에서는 대부분 남성이 집안일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여성도 ‘나름대로’ 남편에게 ‘여자 할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분위기였다. 이와 비교하여 구술자의 남편은 “북한사람으로서는 좀 뭔가 달랐”다고 평가할 만큼, 덜 권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술자의 딸과 아들은 학령기가 되어 엄마와 같은 학교에 다니며 유형무형으로 담당 교사들의 관심과 지원을 받았다. 구술자는 집에서도 “말을 안 들으면 욕을 하거나 때리는 북한식”이 아니라 적당히 설득하고 달래는 방식으로 교육하였다. 자녀들은 북한에서 “정말 착실하게 공부를 잘하는 그런 형”으로 성장했다. 민선화 씨는 남편이 아주 먼 거리의 부대로 가게 되었던 1년을 제외한 15년 동안 중학교 교사로 일하며 자녀를 양육하고, 군관 비서 역할을 했다.

  

엘리트 여성과 가족의 남한 이주

  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 사회는 시장 활동이 일반화되고, 경제활동을 통해 돈을 갖게 된 여성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특히 장마당을 통해 유통되기 시작한 ‘외부 문화’는 북한 사회의 일상을 전면적으로 변화시켰다. 다양한 통로로 유행하던 남한 드라마와 음악을 매개로 개인 사이의 연애가 대도시를 중심으로 확산하였다. 남한으로 온 친지나 가족들을 통해 ‘외부’ 소식과 돈이 오가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 ‘식량난’을 피하고자 북한 주민들이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오기 시작했으나, 2010년대가 되면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찾아서 ‘남한행’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2015년 국경 주변의 군부대에 근무하던 남편이 갑자기 북한 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국경지역이었으므로 중국을 오가는 사람들의 밀무역을 눈감아주는 일이 많았다. 나아가 북한의 가족과 ‘남한으로 간 사람들’ 사이의 연락을 중개하던 중 사실이 알려져 당국의 감시를 받게 된 것이다. 민선화 씨의 집에서 남한으로 간 가족의 소식을 듣고 돌아가던 사람이 심문을 받았고, 사용하던 “◯◯◯ 전화기”가 발각되었다. 남편이 체포되어 열흘에 걸친 조사를 받는 동안 온 가족이 대책을 세워 겨우 ‘아무것도 없이 대응하는 것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북한 사회의 군인으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사라진 남편은 남한 이주를 결심하였다. 구술자는 처음에 남편의 계획을 완강히 거부했으나 결국 가족과 함께 ‘남으로 오는 길’을 택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벌어진 가족사의 전환이었다. 북한 사회에서 교사와 군관 비서로서 사회적, 물질적 혜택을 누렸던 엘리트 여성이 삼십 대 말의 나이에 남한 사회의 구성원이 된 것이다. 현재 민선화 씨는 다양한 자격증을 취득하고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주석

  1. 이 글에서 구술자의 녹취록을 인용하는 방식이다. 즉 민선화 씨의 2019년 구술녹취록 3쪽을 뜻한다.
  2. 1948년 정권 수립 이후 북한은 사회주의 ‘근대가족’을 표방했으나, 점차 전통적 가족주의에 근거한 사회주의 가부장제가 정착되었다. 1962년 김일성 주석의 신년사에서 ‘사회를 단합된 하나의 대가정으로 만들자’는 언급 이후 ‘사회주의 대가정’ 담론이 북한 사회체제의 원리로 정착되었다. 이 담론에 의하면 북한은 수령이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 행정체계인 노동당은 어머니, 북한 주민들은 자녀로 비유되는 ‘커다란 가정’이다. 국가는 남성 가부장인 아버지를 매개로 의식주를 보장하고(배급제도), 여성의 모성을 강조하며 개인 돌봄과 보호의 역할을 지도록 하는 등 전통적인 젠더 구조를 재생산하였다.
  3. 해마다 북한의 각 중학교에 일정한 수의 대학 [진학] 지표가 배당되면, 학교는 대학 예비시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에게 지표를 배부한다. 대학 지표를 받은 학생은 해당 대학에서 실시하는 ‘본시험’을 본 후 특정 학과에 합격 또는 불합격 통지를 받게 된다. 이처럼 고등중학교에서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을 ‘직발생’이라고 하며, 그 외 현직생, 제대군인 혹은 현직 군인이 대학 추천서를 받아서 대학에 입학하기도 한다. 해마다 전체 고등중학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평균 10퍼센트 정도이며, 여학생들은 의대, 사범대, 상업대 등을 선호한다.
  4. 북한이 경제난으로 ‘고난의 행군’을 선포하고 배급을 중단한 것은 1995년 4~5월이다.
  5. 화선입당은 사회주의 건설 현장에서 세운 특별한 공로를 인정하여 심사 없이 즉각 노동당에 입당하도록 하는 북한의 제도이다. 6·25 전쟁 중 공을 세운 군인을 현장에서 입당시킨 것이 출발이다.
  6. 김일성 사망(1994년)과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한 김정일 정권(1998~2011년)이 군사주의를 앞세운 선군(先軍) 정치를 본격화했다. 이에 따라 사회의 권력과 물자가 군대 중심으로 조직화 되면서 2000년대 초반 ‘군관’에 대한 사회적 선망이 강했다.
  7. 북한 내 공장가동률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30퍼센트에 머물렀다. 김정일 정권은 2002년 7.1조치를 통해 시장화를 공식 인정하였다. 배급이 없어도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남성들과 달리 가족 생계를 책임진 여성들이 간단한 먹거리나, 텃밭 작물 등을 거래하는 것으로부터 중국 밀무역을 통한 ‘보따리 장사’를 하는 경우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그 결과 의사, 교사 혹은 국가기관의 고위직과 같은 소수의 전문직 여성을 제외한 약 70퍼센트의 여성이 장사에 종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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