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람이,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 화섬노조 파리바게뜨 지회 임종린 지회장 인터뷰

 

 

6년 만이었다. 파리바게뜨 임종린 지회장을 인터뷰이로 다시 만난 게. 6년 전에는 노동조합을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작은 카페에서 임종린을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제빵기사의 고충을 이야기할 때 분노와 어이없음을 감추지 못하다가 노동조합을 만들고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제빵기사들의 희망을 전할 때는 조금 들떠 보였다. 그가 신나서 들려주는 노조 설립 얘기에 내가 들떴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노조를 만들 때 도움을 줬던 정당 대표가 이제야 ‘진짜 세상을 만난 것’이라며 임종린을 응원했던 것을 기억한다. 6년간 그가 만난 ‘진짜 세상’은 이해되지 않는 일 투성이었고 싸워야 할 것들은 끝이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러 SPC 본사가 있는 양재역 5번 출구 천막 농성장으로 갔다. 천막에는 12일째 집단 단식 농성중인 단식자 5명과 연대자들이 있었다. 약속 시간에 맞춰 임종린이 천막으로 발빠르게 왔다.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 기자회견이 있어 대전에 갔다 곧바로 오는 길이라고 했다. 정신없이 바빠 보였고, 더운 탓인지 조금 지쳐 보이는 듯했다.
  노조를 만들고 직접고용 투쟁이 한창일 때, 화섬노조 조직국장이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임종린은 그때만 해도 ‘이거 빨리 끝나겠죠.’ 싶었다. 조직국장은 ‘직접 고용되더라도 노조 안정화되려면 아마 10년 걸릴 것’이라고 말을 받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말이 현실이 되었다. 임종린 지회장은 ‘몰랐어, 몰랐어’ 고개를 흔들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렇게까지 올 줄 몰랐’던 파리바게뜨 노동조합 이야기에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합의서에 도장 찍자마자 말 바꿨다

SPC 불법 파견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고용노동부에서도 직접고용을 지시하자, 회사는 서둘러 사회적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불법 파견 과징금을 유예해주는 조건으로 근로계약서 작성, 동일근속 동일직급 등의 약속을 얻어냈다. 임종린은 전국을 다니며 조합원들을 만났고 노조가 이뤄낸 합의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사진을 보면 너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게 끝은 아니겠지만 약속을 했으니 지킬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합의는 처음부터 삐걱거렸고 ‘합의서에 도장을 찍자마자 말을 바꾼다’는 생각만 들었다. 부당 노동행위 관리자를 징계하겠다면서 벌금형까지 받은 관리자를 진급시켰고, 조합원들은 자신을 괴롭힌 관리자와 계속 같이 일해야 했다. 자회사 피비파트너즈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기로 한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복수노조인 한국노총의 반발이 심하다는 게 이유였다. 한국노총과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노조 사무실이 한국노총보다 큰 것도 문제가 됐다. 갈등이 심해지자 개별 교섭을 요구했지만 그마저도 한국노총 반대로 좌절되었다. ‘대화가 딱 깨져버려’ 이렇다 할 진전이 없었다.
  마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합의를 지키라는 농성을 시작했다. 툭하면 약속을 깨는 본사 태도에 천막 농성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노조 사무실을 구하는 데만도 두 번이나 농성을 했다. 처음엔 한국노총 사무실보다 커서 안 된다며 본사에서 정한 사무실을 쓰라더니 천막을 치자마자 태도가 바뀌었다. 합의가 이뤄지고 농성을 접으면 태도가 금세 또 달라졌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는 항의에 상무는 “그때는 3천 명 모인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고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으니까 약속 안 지켜도 된다.”고 답했다. 결국 또 천막을 쳤다. 농성 40일 만에 노조 사무실을 얻었다. 납득할 수 없는 상황들, 천막을 칠 일들은 계속 있었다.
  산업안전보건법 규정에 따라 사업장은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을 둘 수 있는데, 명예감독관은 과반수 노조나 근로자 대표가 맡을 수 있다. 한국노총은 교섭대표노조지만 과반수는 아니었기에 근로자 대표를 뽑기로 했고, 임종린 지회장이 근로자 대표로 선출되었다. 이 역시 임종린이 문제 삼지 않았으면 한국노총에서 명예감독관을 맡을 터였다. 임종린이 선출되자, 본사는 바쁘다는 핑계로 감독관 지정을 한 달이나 미뤘다. 그러는 사이 한국노총 조합원이 갑자기 천 명이 늘어나 과반 노조가 되어버렸다. 임종린은 조합원들과 잠자는 시간 쪼개고, 휴가 반납해 가며 얻은 명예감독관 직책을 하루 아침에 잃었다. 선거운동을 할 때 한국노총 조합원중에도 임종린을 반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여기(한국노총)에 있지만 민주노조에서 하는 거 다 알고 있다’며 응원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바뀔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한 달 만에 근로자 대표 자리를 뺏겨야만 했다.
  사소한 노노갈등은 계속 있었지만, 노조 사무실이 생기고 난 뒤 몇 달간은 ‘평화의 시대’라 할 만했다. 조합원들 목소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고 노조를 홍보하는 만큼 조합원이 계속 가입하던 때였다. 한국노총을 탈퇴하겠다는 연락이 끊이질 않았고 조합원이 몇백 명씩 늘어나면서 ‘분위기가 역전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조 탈퇴할 때 상대 노조에 연락해서 가입하고 싶다고 도움을 요청해요. 그러면 우리가 탈퇴서를 대신 받아서 월말에 상대 노조랑 주고 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경쟁처럼 되는 거예요. 누가 탈퇴서를 더 많이 보내나 경쟁이 된 거죠. 우리는 노조 설립하고 한 번도 이 경쟁에서 져본 적이 없거든요. 한 달에 최소 10장 이상 탈퇴서를 보내고 우리는 한두 장 받았어요. 좀만 열심히 하면 되겠다 그런 분위기였죠.”
  ‘평화의 시대’는 짧았다. 2021년 1월 근로자 지위 확인 등 두 개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다. 2017년 직접고용 지시에 본사는 3자 합작이라며 자회사를 설립해 직접 고용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노조는 그에 합의하고 소송을 취하하는 대신 노동환경을 개선하기로 약속받았다. 본사는 몇 년이 지나도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소송도 취하하지 못했다. 그런데 노사가 화해계약, 그러니까 사회적 합의를 했다는 이유로 소송에서 패소한 것이다.
  2021년 1월은 2018년에 합의한 3년 내 임금 맞추기 시한이 끝나는 시점이기도 했다. 임종린과 조합원들은 이날만을 기다렸다. 3년이 가까워지자 본사는 말이 자꾸만 달라졌다. 3년 내에 임금을 맞춘다는 뜻이 아니라 근속 3년 차에 맞추기로 한 거였다고 했다가, 근속 3년 차가 아니라 5년 차라고 바꿨다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만 뱉어냈다.
  또 본사는 ‘합의는 민주노총이랑 했지만 교섭권은 한국노총에 있다’는 이유로 민주노총은 단체 교섭에 ‘껴줄 수 없다’고 했고, 한국노총은 ‘너희가 합의를 엉터리로 해서 교섭이 힘들다’며 맞장구쳤다. 결국 파리바게뜨 지회를 배제한 채 교섭이 진행됐고 3년 내 임금 맞추기는 이행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본사는 사회적 합의를 이행했다며 합의 선포식까지 열었다. 그런데다 한국노총과 본사가 체결한 단체협약에는 한국노총에 가입해야만 SPC에 입사할 수 있다는 조항이 새로 생겼다. 임종린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며 빠르게 말했다.
  “저희 입장에서는 사회적 합의 이행됐다고 발표를 해버렸는데 이제 신입사원들은 무조건 한국노총 가입해야한다니까 이거 우리 죽으라는 거구나 싶은 거예요. 민주노총 없애려고 하는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져서 투쟁이 막 올라오기 시작한 거예요.”

 

SPC의 민주노조 길들이기

“탈퇴서 쓰신 분들 진짜 울면서 쓰셨을 거예요.” 임종린은 어쩔 수 없어서 노조를 탈퇴했지만 다시 민주노조로 돌아오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미안하다며 지금까지 노조와 연락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파리바게뜨 노조가 제빵기사에게 그동안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방증 같아 다행이라고 덧붙였다. Ⓒ 정윤영

‘죽으라는 거구나 싶은’ 일은 또 있었다. 단체협약 발표가 끝난 후 조합원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관리자들이 자꾸 찾아온다.’, ‘불안하고 불편하다’는 내용이었다. 관리자들이 조합원을 찾아오는 이유는 단 하나. 민주노총을 탈퇴하고 한국노총에 가입하라는 거였다. 한 달에 한두 장이던 탈퇴서가 3월에만 120장이 들어왔다. 탈퇴 문의도 ‘엄청’ 났다. 탈퇴를 했거나 하겠다는 조합원들의 이유는 한결같았다. ‘진급이 안 된다’는 거였다. 3월부터 넉 달 동안 매달 100장씩 탈퇴서가 쏟아지듯 들어왔다. 단 넉 달 만에 760명이던 조합원 숫자가 200명으로 줄었다. ‘조금만 열심히 더 하면’ 과반 노조가 될 수도 있겠다는 희망으로 조금 더, 뭐든 조금 더 했다. 그리고 정말 ‘역전할 수 있겠다’ 싶은 순간에 조합원 560명이 탈퇴했다. 50일 넘는 단식도 ‘즐거운 마음으로 순식간에 지나갔다’던 지회장도 탈퇴서가 100장씩 들어온 넉 달은 어떻게 해도 마음이 달래지지 않았다.
  “자면서도 팩스 들어오는 꿈을 꾸는 거예요. 팩스 들어오는 날 저랑 수석(부지회장)님이랑 탈퇴서를 정리하는데 둘 다 말은 안 하지만 속으로 ‘올 때 됐다, 올 때 됐다.’ 긴장하는 게 느껴져요. 보통은 팩스로 지~잉 한두 번이면 끝나는데 지~잉이 안 끝나는 거예요. 한 20분 동안 들리는 거예요. 거기 아는 사람 이름도 있고, 심지어 어제 통화한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게 상처가 되더라고요.”
  그때 임종린 지회장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최근 퇴사한 본사 관리자였다. 그는 대뜸 “요즘 탈퇴가 많죠?” 묻더니, (민주노총) 탈퇴서를 가져가면 회사에서 돈을 준다고 했다. 탈퇴서 한 장당 5만 원, 돈을 주는 방식은 공개적이었다. 회의할 때마다 민주노총 탈퇴율을 체크하고 난 뒤 본부장이 건물 1층으로 내려가 은행에서 현금을 찾아온다. 그러고는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누구 씨 수고했어.’, ‘누구 씨는 얼마야.’ 보란 듯 액수를 얘기해주고 신입 관리자에게는 ‘돈 왜 주는지 옆사람한테 물어봐.’ 노골적으로 민주노총 탈퇴서를 받아오게 했다.
  노조는 부당노동행위로 회사를 고소하고 곧장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노조 탈퇴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로부터 부당노동행위 판정을 받았지만 본사의 ‘탈퇴 작업’은 계속되었다. 탈퇴시키려고 ‘별의별 방법’ 다 썼다며 임종린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오늘은 꼭 받아가야된다면서, 정말 무슨 사채업자처럼 탈퇴서 쓸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요. 너 때문에 관리자들이 진급 못 한다, 탈퇴 안 해주면 다른 지역으로 가야 된다고 탈퇴서 쓰라고 하고. 자기 너무 힘드니까 좀 도와달라고 하는 관리자도 많고요. 이해가 안 되는 건 휴직자들도 탈퇴서를 내는 거예요. 너무 이상해서 연락해봤더니 ‘나 좀 살려달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써줬거나, 복직 힘들 수도 있다고 하니까 불안해서 탈퇴했던 거예요. 이런 식으로 560명을 탈퇴시킨 거죠. 그런데다 그때 직급 발표가 났는데, 정말 말도 안 되게 나온 거예요. 저희 조합원들이 거의 승진을 못했어요.”
  명백한 노조 탄압이고 진급 차별이었다.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와 고용노동부에서 부당 노동행위를 인정 받았고, 관리자 9명이 기소되었다. 그런데도 ‘노조 괴롭히기’는 멈추지 않았다. ‘남은 조합원은 강성이기 때문에 괴롭혀서 퇴사시키는 게 회사 목표’라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다만 ‘관리자들이 그러면 걸리니까’ 현장 직원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민주노조에 남은 200여 명은 같이 일하는 조장에게 매일같이 ‘다 탈퇴시켰어. 이제 네 차례야’ 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불법이 인정됐는데도 바뀌는 게 없으니 임종린은 ‘이렇게 투쟁하는 게 맞나?’ 싶었다.

단식 농성중인 SPC 본사 주변은 현수막들로 가득하다. 약속을 지키라, 노조 탄압을 중단하라, 제발 휴식시간을 달라는 이 단순하고 당연한 요구를 위해 천막 농성, 단식 농성, 집단 단식 농성, 삼보일배와 오체투지를 해야만 하는 현실에 노동자들이 죽어간다. Ⓒ정윤영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단식을 시작했다. 임종린 지회장이 단식을 시작하자마자 20~30장씩 들어오던 탈퇴서가 2~3장으로 줄어들었다. 본사도 대화를 하겠다며 자리를 만들겠다고 했다. 사실 본사는 대화보다 정의당 배진교 의원을 먼저 찾아가 해결을 부탁했다. 배의원은 ‘천막에 가보기는 했냐’면서 천막을 방문하는 게 먼저 아니겠냐고 답을 했다. 의원은 갈 때 노조 요구안에 답변을 가져가라는 뜻으로 ‘빈손으로 가지 마라’고까지 일러줬다. 본사는 비타민 음료 한 상자를 준비해 ‘다 먹어가면서 하는 거’라며 단식 농성중인 임종린에게 건넸다.
  단식 농성으로 힘겹게 얻어낸 대화는 예상대로였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뻔뻔할 줄은 몰랐다. 목숨을 걸고 노조 탄압을 멈춰달라는 농성을 본사는 지회장 살리고 싶으면 우리 요구를 들어주라는 협박으로 이용했다. 대화하자고 나온 자리에서 다짜고짜 점주들에게 사과하고 불매하지 말라며 요구사항을 쏟아냈다. 또 고소를 취하해달라길래 이미 송치된 사건을 어떻게 취하하냐고 하자 그럼 탄원서를 써달라고 했다. 임종린의 단식이 50일이 넘어가 노조 간부들은 애가 탔지만 대화를 더 이어갈 수가 없었다. 불법행위에 대해 대표이사가 사과하겠다고 하더니 금세 임원이 하겠다고 바꿨고, 연차 휴가는 못 주고 보건 휴가를 주겠다더니 그마저도 흐지부지였다. 그러면서도 곧 죽어도 사회적 합의를 이행했다고 잡아뗐다. 증거 자료를 달라는 요구에는 논의해보겠다더니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답이 없다.
  단식 농성은 53일에서 멈췄다. ‘살아서’ 끝까지 싸워야 했다. 본사는 단식을 중단한다고 보도자료가 나가자마자 곧바로 ‘잠수타기’에 들어갔다. 임종린은 2017년부터 본사가 보인 패턴이라며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회사가 약속을 안 지키거나 불법을 저질러요. 그럼 우리가 농성하고 투쟁을 해요. 처음엔 무시하다가 여론이 안 좋으면 대화하는 척을 해요. 뭔가 합의를 하는 모양새가 되면 바로 잠수 타고 언론에는 합의했다고 하는 거예요. 한국노총은 우리를 상대로 성명서 내면서 노노갈등이 생기고, 점주들은 우리 때문에 못 살겠다, 제빵기사 못 쓴다는 식으로 기사를 내요. 그러면 시민들이 연대하고 또 합의서를 작성하거든요. 이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예요. 이 악순환을 5년째 반복하고 있어요. 이번에 다른 게 있다면 시민들이 불매운동을 하는 거예요.”
  10년 넘게 제빵기사로 일한 임종린에게 불매는 ‘통쾌하지만은 않은’ 소식이다. 연대가 ‘신기’할 만큼 감사하지만 ‘내가 다니는 직장’이 불매로 타격을 입는다면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할 게 당연하다. 그러나 ‘노조 때려잡으려다 브랜드 때려잡을 판’을 만드는 건 노조가 아니라 노조 탄압 때문이다. 그런데도 본사는 멈출 줄을 몰랐다. 당사자가 나서야겠다는 판단에 최유경 수석부지회장을 비롯해 간부 5명이 집단 단식을 시작했다. 연차를 써서 단식을 시작하자, 단식자들은 본사로부터 연차 휴가를 승인해줄 수 없으니 업무에 복귀하라는 내용증명을 받았다. 건강 이상으로 병원에 실려 가 입원 중인 단식자도 내용증명을 보낼 예정이라는 공문을 받았다. 그러면서 언론에는 사회적 합의를 이행했는데 억울하다, 노조가 불매를 부추긴다는 기사를 내보내며 본사는 5년째 반복중인 악순환을 또 시작하고 있다.
  그렇다면 별 수 없다. ‘뭐라도 해야 (대화에) 나오는 게’ 맞다면 ‘또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다’고 임종린은 계획 아닌 계획을 밝혔다. 지회장이 밝힌 ‘투쟁 2막’ 계획은 오체투지 행진으로 시작했다. 인터뷰를 하고 보름 뒤, 단식을 끝낸 지 3개월 만이었다.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이 오체투지를 제안했고, 시민들이 그 제안을 받았다. 오체투지를 함께하겠다는 시민은 28명이나 되었다. 제안한 지 이틀 만이었다. 계획은 더 있다. 오체투지가 끝난 뒤부터는 전국 350개 매장에서 1인 시위를, 그래도 안 되면 700개 매장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예정이다. 그래도 안 된다면 아마 또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이고,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8월 4일 서울역부터 대통령 집무실까지 임종린과 ‘파리바게뜨 노동자 힘내라 공동행동’, 연대하는 시민 등 30여 명이 오체투지 행진을 했다. 체감온도 40도를 가리키는 날씨, 여덟 보를 걷고 북소리에 맞춰 이마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아스팔트에 내려놓았다가 다시 일어나 여덟 보를 걷는다. 숨이 막히게 뜨겁고 걸음은 느리고 온몸은 땀에 절었지만 앞으로, 기어서라도, 기어코 간다. 함께 걷는 사람들과 앉아서 마시는 물 한 모금에 웃게 된다. Ⓒ윤성희

노조를 설립하고 6년 동안 임종린 삶에 달라진 게 있었느냐는 질문에 ‘별로 없다’고 담담하게 답했다. 그러더니 잠시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는 ‘노조하면 행복한 결말’일 줄 알았지 길에서 자게 될 줄, 단식을 하고 삼보일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안 해보던 거 지금 다 하고 있다’며 가끔 혼자 웃게 되는 일이 있다고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건데, 제가 예전에는 제 차만 운전한 줄 알았어요. 다른 사람 차를 탔다가 스타트 키 누르는 걸 몰라서 한 20분 헤맸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아무 차나 다 운전하고 있더라고요. 혼자 생각하면서 웃었어요.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회사 덕분에 살면서 정말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구나 싶어요. 그래서 그런지 막 엄청 힘들고 엄청 절망스럽고 그렇지는 않아요.”
  정말 힘든 날도 물론 있다. 탈퇴서가 100장씩 들어왔을 때가 그랬다. 그럴 때도 임종린은 사람들과 맛있는 것 먹고 맥주 마시고 얘기하면서 풀었다고, 성격이 ‘그래도 무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6년 전 제빵기사로서 대단한 목표는 없지만 그날 만든 빵이 예쁘면 그걸로 만족한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노조 설립하고 천막 농성과 단식 농성까지 쉬지 않고 달려오면서 단단해졌겠다는 입에 발린 칭찬(?)에도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다만 무던히, 상식과 상생의 길로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