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 속에 사라진 부평 도쿄제강 사택

* 이 글은 손민환, 「역사: 도쿄제강 사택, 매몰된 이름을 드러내다」, 『도쿄제강 사택에 담긴 부평의 시간』, 부평역사박물관, 2021에 수록된 내용을 수정・보완하였음을 밝힌다.
도쿄제강 공장 전경(해방 이후 촬영 추정, 부평역사박물관 소장. 이하 이 글의 사진 출처는 모두 부평역사박물관 소장본임)

들어가며

  인천광역시 부평구 청천동과 산곡동 경계에는 ‘검정사택’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제강점기 노동자 주택이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있었다. 2020년 7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검정사택 대부분이 철거되었기 때문에, 이제 검정사택은 더 이상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에 지나지 않는다. 검정사택이 철거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역사 또한 장소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검정사택은 철거가 완료될 때까지도 많은 것이 베일에 싸여 있었다. 사택을 건설하고 운영한 주체조차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강제동원 연구자들과 지역사 연구자들은 이 사택의 건설 시기와 건축 양식을 토대로 강제 동원의 흔적이라 짐작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은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여전히 검정사택이라 불렸다.
  지난 2021년, 부평역사박물관에서 수행한 학술조사에 의하여 일본 전범 기업인 도쿄제강東京製鋼에서 검정사택을 건설한 사실이 밝혀졌다. 검정사택이 철거된 지 1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1943년 도쿄제강에서 부평에 분공장分工場 격인 부평공장1과 공장 노동자들이 거주할 사택을 건설하였다.
  해방 이후, 도쿄제강이 조선에서 철수한 혼란스러운 정국에서도 기존 노동자들은 공장 유지 자치위원회를 조직하여 공장 운영의 정상화를 꾀했다. 그러다가 1947년을 전후하여 공장에 관재관이 파견되면서 동양제강東洋製鋼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였고, 기존 도쿄제강 사택은 자연스럽게 동양제강 사택이 되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동양제강은 운영을 중단하였다. 동양제강 공장은 미군이 접수하였고, 동양제강 사택은 피난민촌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다가 공장은 현 한국GM에서 불하받아 철거 후 새로운 공장을 세웠고, 사택은 민간 불하가 이루어져 여러 번 손이 바뀌었다. 이러한 곡절 끝에 도쿄제강, 동양제강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검은 외관 때문에 검정사택이라고 불리다가 최근 철거되었다.

  

전범 기업 도쿄제강의 부평 진출과 철수

  1930년대 후반부터 인천광역시 부평구에는 많은 군수산업 시설이 들어섰고, 이곳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이 머물 숙소가 마련되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막바지 무렵, 부평이 일제에 의하여 군수 도시로 ‘개발’된 데에는 ‘인천시가지 계획(1937)’이니 ‘경인시가지 계획(1940)’이니 하는 일제의 시가지 계획과 토지구획 정리, 즉 일제의 치밀한 도시계획이 선행되었다. 더욱이 1940년대 초반 경기도에서 부평의 공업 부지를 저렴하게 분양한 점, 전력 수급과 공업용수 조달에 유리한 점, 대도시 서울과 가까워 인력 수급이 용이한 점 등으로 인하여 일본 자본가들에게 부평은 분명 매력적인 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도쿄제강 부평공장과 사택 위치도
  도쿄제강에 대해 살피기에 앞서 1940년대 부평 지구의 공업, 주택지 분양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경인시가지 계획’에 의하여 설정된 부평지구는 공업부지와 주택지를 평당 2원 50전부터 4원 50전까지 분양할 계획2을 세웠다. 산업발전 시국 아래 대륙 병참기지로 부평이 주목받게 되었고, 이를 통하여 일본 전범 기업들이 속속 부평에 진출하게 되었다. 도쿄제강도 그 중 하나였다.
  도쿄제강은 1941년 8월 28일 부평공장 건설을 출원하여 1942년 5월 19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 허가를 얻고 부평공장 건설을 추진하였다.3 도쿄제강은 부평공장 건설 사무소를 경성부 용산 원정元町의 모리타니 상회守谷商会 경성지점 내에 세우고, 건설 위원장으로 고쿠라공장小倉工場 기사技師 후쿠야마福山栄助를 임명하였다.4
도쿄제강 부평공장 지진제

  1943년 3월 10일, 지진제地鎭祭를 실시하는 것으로 도쿄제강 부평공장의 건설이 본격화되었다. 공장과 사택 부지는 부평 천상정川上町으로, 현재 행정구역으로 공장은 부평구 청천동, 사택은 청천동과 산곡동의 경계에 해당한다. 공장 부지는 천상정 409번지 63,925평, 사택 부지는 천상정 381번지 12,804평, 공장과 사택을 합하면 76,729평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도쿄제강 100년사』(1989)에는 도쿄제강 부평공장과 사택의 위치가 개략적으로 도식화되어 있다. 공장은 인천육군조병창의 북쪽에 있었고, 사택은 공장으로부터 북서쪽 방면에 있었다.

부평공장 건설자재를 옮기는 현지 공원

  당시 도쿄제강에서 부평공장의 입지를 서술한 기록에 따르면, “경성에서 서쪽으로 약 25km, 경인선 부평역의 북쪽에 위치하였다. 이 일대는 경기도가 공업지대로 정지整地한 곳으로 부근에는 미쓰비시제강三菱製鋼, 아사노카리트淺野カーリット, 도쿄디젤東京ヂーゼル, 국산자동차國産自動車, 고요정공光洋精工, 도시바東芝 등의 공장이 있다.”5고 하여 서울과의 거리와 철도 교통의 편리함, 주변 공장 등에 대하여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도쿄제강에서는 부평공장을 건설하여 조선 내 강삭鋼索 및 강선류鋼線類를 공급하고자 했다. 강삭은 케이블카, 로프웨이, 현수교吊橋를 건설할 때 사용되는 철강 와이어로 당시 광산용 강삭과 알루미늄 심선芯線의 수요가 많았다. 도쿄제강 부평공장에서는 월 생산 150톤, 최종 생산 500톤을 목표로 삼았다.
  도쿄제강은 부평공장의 건설 위원장인 후쿠야마를 부평공장 공장장으로 임명하고, 공장장 아래 3부 8과를 두었다. 사무부 부장은 후쿠야마가 겸임하였고, 총무과장 가쓰키甲木常一, 근로과장 하라다原田憲美, 경리과장 세키야関屋一男, 사무과장 무토武藤数一, 창고과장 사코다迫田稔三가 각 과를 맡았다. 제조부 부장 아베安部備一는 제조부 제 1과장을 겸임했고, 제 2과장 이치카와市川千代人, 기계과장 구와노桑野漸가 각 과를 맡았다. 성품검사부 부장은 후쿠야마가 겸임했다.
  한편, 1943년 관부연락선 곤륜환崑崙丸 격침으로 도쿄제강 본사와의 연락이 악화되면서 부평공장의 건설에 난항을 겪었다. 도쿄제강은 제1기, 제2기, 제3기 계획을 순차적으로 세우고 우선 제1기 계획으로 2,800여 평의 공장 건설을 서둘렀다. 이를 통하여 부평공장 내에 소입공장燒入工場, 세장洗場, 건조실乾燥室, 신선공장伸線工場, 도금공장鍍金工場, 시험실試驗室, 스트랜딩, 크로싱, 보일러실, 수선실 등 설비가 들어섰고, 부속시설로 창고 3기와 변전소, 사무소, 합숙소 2개 동, 사택 2개 동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부평역으로부터 공장을 가로지르는 인입선引入線 건설을 포함한 제2기와 제3기 계획은 진행되지 않고 미개발 부지로 남았다.

도쿄제강 부평공장과 사택 위치도(1967년 항공사진에 재도안)

  1944년 7월, 도쿄제강의 제 1기 계획에 의하여 공장 일부가 완성되어 조업을 시작하였다. 부평공장의 설비는 열처리로熱処理炉 2기, 신선기伸線機 1기, 제강기 2대, 연선기撚線機 8대가 있었는데, 제강기 및 신선기 1열은 고쿠라공장으로부터 가져온 것이었다.
  도쿄제강 부평공장이 실제 가동되었던 기간은 1945년 8월까지로, 해방 이후 도쿄제강은 일본으로 철수하였다. 도쿄제강은 부평공장 철수 직전 현황과 손해액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종업원 수(1945년 6월 기준) : 직원職員‧용원傭員 56명, 공원工員 170명
  • 생산실적 : 1944년 7월: 31톤
                             8월: 13톤
                             9월: 26톤
                             10월: 25톤
                             11월: 26톤
                             12월: 32톤
                  1945년 1월: 40톤
                             2월: 37톤
                             3월: 37톤
                             4월: 1톤, 이후 불명
  • 부평공장 상실에 의한 손해액 : 5,639,000엔6

  

도쿄제강 부평공장의 사택 운영

  도쿄제강은 1943년 3월 10일, 부평공장의 지진제를 실시하고 공장 건설에 돌입하였으나, 관부연락선의 격침으로 인하여 본사와의 연락 문제가 있었다. 1944년 7월이 되어서야 제 1기 계획으로 일부 공장에서 조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고쿠라공장의 조력으로 가능했다.
  도쿄제강 부평공장의 설립과 운영에는 일본에서 파견 온 노동자는 물론 조선인 노동자가 필수적이었다. 대개 일본인은 ‘직원’이나 ‘용원’, 조선인은 ‘공원’으로 고용되었다. 이런 경우 임금과 제공되는 사택 등 처우 면에서 큰 차이가 나곤 했다.
  도쿄제강 부평공장의 노동자 수를 시기 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7

도쿄제강 부평공장 노동자 수

  위의 표를 보면, 늦어도 1942년 12월에는 도쿄제강 부평공장 건설과 관련된 업무를 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직원 및 용원 2명은 공장 건설과 관련된 초기 업무를 담당했을 것이다. 1943년 3월 지진제가 실시되고 공장 건설이 본격화되었을 시기에 직원 및 용원이 급증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건 공원의 입사 시기와 수다. 그 전에는 없던 공원 수가 1944년 6월에 104명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1944년 7월 도쿄제강 부평공장의 가동을 앞두고 조선인을 대거 채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도쿄제강에서 ‘현지인으로 채용’한 조선인들은 도쿄제강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도쿄제강은 이들을 두고 “그들은 로프에 대해 지식이 없었고, 강삭 공장을 견학해본 적도 없었다.”8고 평가하고 있다.
  도쿄제강 부평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들의 사택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공장 밖에 있는 사택인 공장 안에 있는 사택인 장내場內 사택과 장내 합숙소, 그리고 장외場外 사택이다. 이 중에서 장외 사택은 속칭 검정사택으로 불리다가 최근 철거된 사택이다.
  첫째, 장내 사택이다. 장내 사택은 공장 부지 내 동쪽 상단에 2개 동이 있었다. 2개 동 모두 ‘凸’자 형태의 사택이다. 사택의 규모를 보았을 때, 조선인 공원보다는 일본인 간부 혹은 직원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자세한 사항은 보완 연구가 필요하다.
  둘째, 장내 합숙소이다. 공장 내에 합숙소 2개 동이 조성되었다. 공장 부지 내 서쪽 상단부에 ‘彐’자 형태의 합숙소 1개 동이 있었고, 공장 부지 내 동쪽에 ‘l’자 형태의 합숙소 1개 동이 있었다. ‘l’자 형태의 합숙소는 하단에 사무소가 붙어 있었다.
  가족 단위로 이주한 경우에는 장외 사택을 배정 받은 반면에, 홀로 입사한 경우에는 장내 합숙소에서 공동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로 어린 조선인 공원들이 장내 합숙소에 집단 수용되었다. 합숙소는 주거 시설 중 가장 열악한 환경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내 합숙소에 거주했던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가 신문 기사9에서 확인된다. 기사에 따르면, “도쿄제강 부평공장의 공원 신암순형新岩淳炯(21세) 군이 맹장염으로 쓰러지자 직장의 동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수혈을 해주어 완치되어 다시 공장에 나가 분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기사에서는 순형 군 이외에도 일본식으로 창씨創氏를 한 조선인 동료들의 이름과 나이를 밝혔는데, 그중에서 가장 어린 공원의 나이는 16세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 전시체제 하에서 각 군수공장의 미담 사례가 선전의 도구로 이용되었는데, 도쿄제강 부평공장의 이야기도 그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쿄제강 장외 사택(2020년 6월 철거 직전)

  셋째, 장외 사택이다. 장외 사택은 가족 단위로 생활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장외 사택은 1호 사택 9개 동, 2호 사택 9개 동, 4호 사택 15개 동 등 총 87개 호로 구성되었다. 그중에서 일본인 직원 가족은 ‘아랫사택’으로 불리는 1호 사택과 2호 사택에 거주했고, 조선인 공원 가족은 ‘윗사택’으로 불리는 4호 사택에 거주하는 등 공간적 경계가 명백했다.
  도쿄제강 부평공장에 근무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1943년부터 4호 사택에서 거주한 명영진의 구술10에 따르면, 일본인 사택과 조선인 사택은 구조부터 위계와 차별을 느끼게 건설되었다. 일본인 사택이 조선인 사택보다 각 호의 규모가 컸던 것을 물론이고, 내부 시설 또한 달랐다. 일본인 사택은 구조적으로 북쪽으로 출입문을 내었고, 각 호마다 내부에 목욕탕, 마당에 우물이 있었다. 이에 반하여 조선인 사택은 남쪽으로 출입문을 내었고, 모든 가구가 공동으로 1개의 공동 목욕탕을 사용했고, 4개의 우물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또한 달랐다. 일본 아이들은 부평서국민학교를, 조선 아이들은 부평동국민학교를 다녔다.
  도쿄제강은 조선인 공원의 수가 증가하자 장외 사택을 추가로 건립하고자 했다. 1945년 4월 도쿄제강이 군수회사로 지정11된 이래, 1944년 12월부터 1945년 6월 사이에 공원의 수가 135명에서 170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애초에 도쿄제강이 사택 용지로 매입한 땅의 면적은 12,804평으로, 1943년 건립한 사택 부지보다 더 많은 면적이 공터로 남아 있었다. 도쿄제강은 장외 사택을 추가적으로 건립할 목적으로, 4호 사택 구역의 북서쪽 방면에 정지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8・15해방으로 인하여 공사는 중단되고 그 터는 한동안 비어 있었다.
  해방 이후, 도쿄제강은 공식적으로 철수하였으나 회사 명칭 변경 없이 기존 노동자들이 공장 유지 자치위원회를 조직하여 공장을 운영하였다. 그러다가 미군정이 관재령을 공포하면서 1947년을 전후하여 상공부에서 관리인 주종준朱鍾俊을 임명하고 회사 이름을 동양제강으로 변경하였다. 주종준은 도쿄제강 때부터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도쿄제강 사택은 동양제강 사택이 되었고, 사택의 관리는 주종준의 고향 친구 김병구가 담당했다.
  6·25 전쟁은 공장의 폐쇄와 사택 구성원의 변화를 가져왔다. 공장 부지는 미군이 접수해서 캠프로 편입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도쿄제강이 세웠던 장외 사택만이 남았다. 전쟁 전, 동양제강 사택에는 흔히 말하는 좌익 세력과 우익 세력이 섞여 있었고, 이들은 갈등 구조에 놓여 있었다. 전쟁 후에 좌익 세력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사택으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집을 채운 것은 다름 아닌 피난민들이었다. 공장은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었고, 황해도 출신의 피난민들이 빈 집을 가득 채웠다. 주로 황해도 연백 출신이 많았다.

  

하루아침에 사라진 강제 동원의 흔적

  도쿄제강 사택의 시작은 전범 기업인 도쿄제강에서 운영하던 부평공장에 동원된 노동자 사택이었다. 사택 준공 2년 만에 해방을 맞이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동양제강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동양제강 사택이 되었다. 6・25 전쟁 이후 재건과 산업화의 물결 속에 피난민촌이 되었다가 인근 공장 노동자들의 숙소가 되기도 했다.
  사택 준공으로부터 약 80여 년이 세월이 지났다. 사택은 낡았고, 황폐해져갔다. 사택 소유주들은 한때 산업화 시대에 발맞추어 방을 쪼개 셋방을 내주어 작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노동자들은 좀 더 쾌적한 집을 찾아 떠났다. 기존의 공장지대들이 대규모 아파트로 개발되면서부터 노동자의 수도 줄어들었다.
  사람들은 옛 이름을 잊은 채, 어느 순간부터 이곳을 검정사택이라고 불렀다. 사실 그 유래조차 몰랐지만 그냥 사람들이 부르는 그대로 검정사택이 되었다. 부평 역사에서 조병창, 미쓰비시 등에 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검정사택에 대해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연구자도,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동안 검정사택이라는 이름은 더욱 굳건해졌다.
  그러다가 도쿄제강 사택이 포함된 구역의 재개발 이야기가 나왔다. 2009년 6월 8일, ‘청천1구역’이라는 이름으로 ‘청천1 주택재개발 정비계획수립 및 정비구역지정’이 결정되었다. 재개발에 대한 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마을의 쇠락을 동반했다. 재개발이 곧 될 것이라는 기대로 집의 수선을 미루기 때문이다. 검정사택 또한 다르지 않았다. 검정사택을 비롯한 인근 마을의 생활 환경은 시간이 갈수록 열악해졌다. 소유주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떠났고, 값싼 숙소를 찾아 온 노인,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임시로 채울 뿐이었다.

철거 중인 도쿄제강 사택(장외 사택 중 4호 사택, 2020년 7월)

재개발 부지 내 모든 가옥의 철거가 완료된 모습(2020년 10월)

  재개발사업 부지에 포함된 도쿄제강 사택은 잔존하는 49개 호 중 46개 호였다. 1943년 도쿄제강이 장외 사택 87개 호를 건설했는데, 6·25 전쟁 때 20개 호가 폭격으로 사라진 것을 감안할 때 상당히 많은 사택이 잔존하고 있었던 셈이다. 1960년대 개인 불하 이후 일부 사택이 철거되면서 단독주택, 빌라, 상가가 들어섰고, 남은 사택은 거주자의 편의에 의해서 변형이 되어 왔다. 그럼에도 2020년 7월 철거 이전까지 49개 호의 사택이 기본 골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중 46개 호가 재개발 구역에 포함되었고, 3개 호는 재개발사업 부지에 포함되지 않아 그대로 남게 되었다.
  재개발사업 부지 내 도쿄제강 사택 46개 호의 철거가 진행된 것은 2020년 7월의 일이다. 구조적인 문제로 인하여 철거가 지연된 1개 호를 제외하고는 불과 하루 만에 사업 부지 내 사택 45개 호의 철거가 완료되었다. 철거가 지연되었던 1개 호 역시 얼마 후에 철거되었다.
  이제, 재개발사업 부지에 포함되지 않은 3개 호만이 남았다. 3개 호는 2호 사택 중에 서쪽 호가 잘리고 남은 동쪽 1개 호, 그리고 1호 사택 2개 동이다. 그중에서 2호 사택 동쪽 호는 서쪽 호를 잘라내는 과정에서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주거 기능은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1호 사택 중 1개 동은 오래전부터 식당으로 사용되면서 전면적인 내부 개조가 진행되어 원형을 전혀 알 수 없다. 다행히 가게 창고로 이용 중인 나머지 1호 사택 1개 동은 북쪽으로 난 현관과 내부 다락 구조 등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다.
  과연, 남은 사택 3개 호는 언제까지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까. 남은 사택은 앞으로 들어설 약 7,500세대 아파트의 진입로 초입에 있다. 이런 경우 대개 상업시설이 들어서기 마련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제 부평에 남겨진 강제동원의 흔적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나가며 : 지역사 연구자의 변

  일제강점기 군수 기지였던 부평에는 근대 산업 유산이 즐비하다. 일본 육군에서 운영했던 인천육군조병창과 조병창 노동자들이 살았던 산곡동 영단주택, 조선 3대 기계공장으로 평가 받았던 히로나카상공을 인수한 미쓰비시제강의 사택, 부평 남부역에 있는 철도관사 등 지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산업 유산들이 있다.
  위의 산업 유산이 가지는 무게에 비하여 도쿄제강은 전범 기업임에도 우리에게 무겁게 다가오지 않는다. 도쿄제강에서 세운 부평공장은 조선 내 유일한 공장이었음에도 규모가 큰 편이 아니었다. 부평공장은 여건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제1기 계획만 완성되었고, 제2기, 제3기 계획은 미완에 그쳤다. 만약 그 계획이 도쿄제강의 바람대로 성공리에 완수되었다면 더 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되었을 것이 확실하다.
  검정사택이라고 불린 도쿄제강 사택의 전모가 드러났음에도 지역 언론과 학계에서는 큰 이슈가 되지 않았다. 기관에서 배포하는 언론보도 이외에 보충 취재나 심층 취재를 진행한 언론사는 없었으며, 학계에서도 논문으로 재생산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쿄제강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전범 기업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이미 사택 대부분이 철거되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강제동원의 규모와 전범 기업의 이름값에 비례하여 사람들의 관심이 커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것은 언론의 힘이라고 해야할까? 부평에 있었던 인천육군조병창과 미쓰비시 사택의 경우, 보존과 철거에 대한 첨예한 논쟁 속에 학계와 언론, 지역 주민의 관심이 주목되었다. 하지만 부평의 아베식당은 도면과 건축주, 건축 목적이 전해지는 희귀한 건축물임에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철거되었다. 도쿄제강 사택도 마찬가지였다.
  최근 들어 지자체에서 근대 문화유산, 향토 문화유산 등에 대한 보존 조례를 공포하고 있으나 강제력이 없어 실효성이 현격히 떨어지고 있다. 사후 약방문식 정책이라 비판받는 이유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철거 이전에 역사・문화적 가치를 평가하고 현황 도면 등을 기록화 하는 등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문화유산의 철거에 대응한 지자체의 면피용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여러 번 보았다.
  지자체, 언론, 연구자가 제각기 역할을 다할 때, 지역의 문화유산이 보존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주민과 소유주의 이해가 필수적이고, 갈등이 발생했을 때 적극적인 중재가 필요하다. 관련 예산을 마련할 수 있고 행정 권한이 있는 지자체에서 의지를 가지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겠지만, 앞으로는 철거와 보존의 논쟁에서 벗어나, 보존과 활용 측면에서의 발전적 논의가 주를 이루길 바란다.

  장소가 사라지면 기억마저 사라진다. 그 선택의 기로에 우리는 서 있다.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할 것이라면 선택을 유보하고 후대에 양보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선택일 수 있다.

  

  

주석

  1. 도쿄제강은 부평에 건설한 공장을 조선공장(朝鮮工場)이라 불렀다. 조선 내 유일한 분공장(分工場)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에서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도쿄제강 조선공장을 도쿄제강 부평공장으로 지칭하도록 하겠다.
  2. 「우선 154만 평의 부평지구를 분양」, 《매일신보》, 1940. 1. 26.
  3. 도쿄제강주식회사, 「영업보고서─서무요항」, 『제 111회 보고서: 1942년 5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1943, 4쪽.
  4. 도쿄제강주식회사, 「조선공장의 남겨진 발자취」, 『도쿄제강주식회사 70년사』, 1957, 505쪽.
  5. 도쿄제강주식회사, 「연표」, 위의 책, 643쪽.
  6. 도쿄제강주식회사, 「조선공장의 남겨진 발자취」, 위의 책, 506~508쪽.
  7. 도쿄제강주식회사, 「쇼와(昭和) 연대에 있어서 사업장 별 종업원 수의 변천」, 같은 책, 274쪽과 275쪽 간지 부분.
  8. 도쿄제강주식회사, 「조선공장의 남겨진 발자취」, 같은 책, 507쪽.
  9. 「서로 수혈을 지원─빈사(瀕死)된 동료 공원(工員)을 구조」, 《매일신보》, 1944년 8월 5일. 신문 기사에서는 ‘동경제강 ○○공장’이라고 표기하여 구체적인 공장 이름을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기사에서 지역을 ‘부평’으로 명시하였고, 도쿄제강에서 조선에 설치한 공장은 부평공장이 유일하였다.
  10. 명영진 인터뷰, 2021년 8월 13일.
  11. 「제2차 지정회사, 금일 영서(令書) 교부식 거행」, 《매일신보》, 1945.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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