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진도 국민해양안전관, 어린이날 100주년에 돌아본 우리 시대 기억의 현주소

  

기억한다는 것의 의미

  “제가 국민 학생일 때 광주 민중항쟁이 있었어요. 어렸지만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걸 어렴풋이 알았는데, 이후 대학에 가서야 실상을 알게 됐어요. 내가 어릴 때 나도 모르게 일어난 일인데도 평생 부채감을 안고 살았어요.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그럴 거예요. 어릴 때 세월호 참사를 지켜본, 그리고 태어났더니 이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사회에서 살게 된 아이들이 비슷한 불안감과 부채감을 갖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올바르게 기억해야 하는 이유예요.
  (중략) 태어나 보니 세상은 위험하고, 사회는 불안하고, 어른들은 믿을 수 없는 사회라면 어린이날을 아무리 축하한들, 어떤 좋은 선물을 준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보다는 사회는 불안하고 믿을 수 없는 어른들도 있지만 그래도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아이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어린이들이 그저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무언가 해낼 수 있는 주체라는 걸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어요. 어린이와 어른들이 함께 ‘기억의 벽’을 만든 것처럼요.” (정재은 동화작가. ‘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문학인들’ 사무국장)

사진1. 팽목항 ‘세월호 기억의 벽’ ⓒ송수연

  올해는 소파 방정환小波 方定煥(1989~1931)선생이 천도교 소년회(1921)를 만들고 어린이날(1922)을 제정한 지 꼭 백 년이 되는 해이다. ‘어린이’라는 단어조차 없었던 암울한 식민지시기에 소파는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며 어린이를 새롭게 개념화했다. 소파 이전까지 어른보다 작기 때문에 쓸모와 효용의 측면에서 기준 미달인 작은 노동력에 불과했던 어린이가 소파에 이르러 새롭게 주체화되었고, 백 년의 역사를 통해 어린이는 점차 ‘특화된 존재’가 되었다. 작은 노동력에서 보살핌과 사랑의 대상으로 변화한 어린이의 위상은 이전 시기에 비해 확연히 높아졌다. 여전히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폭력과 각종 불합리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아이들이 있지만, 전반적으로 어린이를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는 진일보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어린이와 약자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인가를 묻는다면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씨랜드 화재(1999. 6. 30.)사건의 상흔이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일어난 세월호 참사(2014. 4. 16.)는 기억을 장애물처럼 여기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만 골몰한 우리 사회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씨랜드 화재 후 사건을 유야무야 덮으려 했던 해당 수련원과 공무원들의 비리가 밝혀졌다. 그러나 재판의 결과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결국 아이를 잃은 부모가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참담한 결말이 빚어졌고, 씨랜드 화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망각의 대가는 2014년 진도 앞바다의 세월호 참사로 돌아왔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승객들에게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 전달되었고, 배 밖의 국민들에게는 ‘전원 구조’라는 거짓말이 뉴스 속보로 타전되었다. 선장과 소수의 상급 선원들이 ‘가만히 있으라’는 말로 승객의 발을 묶고 도망친 후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를 지키고 돕던 승객 304명은 모두 바다에 잠겼다. 망각의 대가는 참혹했다.

  

국민해양안전관, 우리 시대 기억의 현주소

  국민해양안전관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팽목항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지어졌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이듬해인 2015년 9월, 국무회의의 결정으로 진도군에 국민해양안전관을 짓기로 했다. 약 10만㎡ 규모로 총 270억원이 투입된 공사는 2019년 9월에 시작, 현재 98퍼센트의 공정률을 보인다. 지금은 내·외부 마감 작업을 비롯한 소소한 외부 조경 업무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사진2. 국민해양안전관 전경 ⓒ김남용

  국민해양안전관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다. 시설 중앙에는 해양안전정원(추모공원)과 추모조형물인 맘Mom이, 왼쪽에는 해양안전체험시설이 오른쪽에는 유스호스텔이 있다. 추모공간과 체험시설, 숙박시설을 한 곳에 몰아넣은 기묘한 공간 구성은 볼수록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해양안전관의 전체 구성을 어떻게 할지, 기획 단계부터 일치를 보지 못해서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온 게 아닌가 싶어요. 추모와 관광 레저를 동시에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결국 어느 쪽도 충족시킬 수 없는 건축물을 탄생시킨 거죠. 전체 설계와 디자인이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이해가 충돌하면서 빚어진, 일종의 건축 참사로까지 보입니다. 해당 업체야 발주받으면 하는 거니까 국민해양안전관의 목적이랄까 목표를 정했던 책임선들이 문제다 싶어요.”
  김환영 화가(‘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문학인들’ 공동대표)는 국민해양안전관을 두고 답답하고 안타깝다는 소회를 밝혔다.

사진3. 맘 조형물 ⓒ송수연
  “왼쪽 체험관 앞에는 수영장과 미끄럼틀이 있고, 중앙에는 맘 조형물과 추모길을 만들고, 오른쪽에는 숙박시설을 배치했어요.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누구를 대상으로 공간 설계를 한 건지 납득하기 어려운 거예요. 숙소에서 수영장으로 이동하는 동선을 보면 무조건 맘 조형물을 지나야 하는데, 아이들 손잡고 지나던 가족들이 맘 조형물을 보면서 어떻게 즐겁게 물놀이를 할 수 있을까요? 맘 조형물이 사고지점이나 아니면 바다를 바라봐야 할 텐데 뜬금없이 맞은편 산을 바라보게 한 게 말이 되나요? 아마도 이건 맘 조형물 제작자의 의도와도 어긋난 게 아닌가 싶어요.”
  맘 조형물의 발치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4월 16일의 참사를 기억하는 의미를 지닌 높이 4M, 가로 1.6M의 추모공간을 조성하였다. 참사장소를 향하고 있는 이 공간은 헌화의 공간으로도 사용된다.” 그러나 맘 조형물이 참사가 일어난 바다 쪽을 보려면 현재 위치보다 오른쪽으로 15~20도 정도 돌아앉아야 하는데, 현재 맘 조형물은 참사와 무관한 맞은편 산을 바라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참사 발생 시간인 9시 35분을 염두에 두고 맘 조형물의 현재 크기를 만들었다는 설명(“맘조형물의 상부좌대까지의 높이는 9M, 무릎부터 발끝까지의 높이는 3.5M로 참사 발생 시간인 9시 35분을 의미한다.”) 역시 요령부득이다. 이미 《한겨레》에서 한 번 지적한 것처럼 법원 판결문이나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종합보고서 등 그 어떤 국가 기록에서도 세월호 참사 발생 시각을 9시 35분으로 명시한 바가 없다. 자료에 의하면 9시 35분은 해경123정이 세월호에 도착한 시간이다.
  “그날 이후 진도 팽목항에서 세월호 사건을 분리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세월호 참사를 진지하게 인식하고 고민해서 공간을 설계했다면 이렇게 상투적인 건축물과 조형물이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자체로선 수백억을 들여 시설물을 만들었으니 수익을 내야 하는 걸 모르지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방향이 불분명한 뻔한 건축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 거예요. 독일의 다크 투어 코스를 돌아보면, 이들이 자신들의 비극에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얼마나 현대적이고 훌륭한지, 자체로 예술품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하게 돼요. 하나의 건축물이나 기념 조형물이 탄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여됐는지도요. 그런데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건축이나 기념 조형물은 너무나 과시적이고 위압적이에요. 요즘 시민들 눈이 얼마나 높아요. 이미 국제 수준의 안목을 갖고 있는데, 이렇게 해놓아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건축물이든 기념 조형물이든 시각 예술은 한눈에 들어오는 거거든요.”(김환영)
  기본적인 사실의 왜곡은 이것뿐이 아니다. 오류를 인정하고 현재 철거를 했지만 국민해양안전관은 세월호 참사 타임라인을 잘못 기록했다. 처음 추모공원 벽에 붙은 붉은 글씨의 타임라인과 침몰·구조 내용은 단순한 착오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다.

  ① 09:50 선장 이준석씨와 1등 기관사 손아무개씨 등 선원 6명 구조
  ② 10:15 최초로 승객에게 대피 통보 “여객선 침몰이 임박했으니 승객들은 바다로 뛰어내리는 상황에 대비하라”
  ③ 10:25 세월호 90도 이상 기울어짐
  ④ 11:20 세월호 완전히 침몰

  이 타임라인 네 가지 중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먼저 ① 선장 이준석씨는 9시 46분에 승객을 구조하러 온 해경123정을 타고 ‘도주’했다. 기관사 손주태씨는 9시 38분에 도주했다. ② 선원도 해경도, 그 누구도 승객에게 대피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③ 세월호는 08시 49분 왼쪽으로 넘어졌고, 수십 초 만에 좌현으로 45도 이상 기울어졌다. 10시 17분, 우현 난간이 바다에 닿을 정도로 뒤집어 졌다. 이때 기울기는 108도였다. ④ 10시 30분, 세월호는 뱃머리만 남기고 바닷물 속으로 잠겼다.
  선장과 상급 선원들이 승객과 하급 선원들을 버리고 도주한 것, 대피 안내 대신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을 해서 모두가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했다는 것은 세월호 참사에서 두고두고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점이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을 ‘세월호를 기억하자’는 목적으로 만든 국가 공공시설에서 모두 틀리게 기록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또 있다. 시공사가 맘 조형물 아래에 있는 세월호 형상과 주변 벽에 붙인 ‘세월호 기억의 벽’(이하 기억의 벽) 타일이다. 기억의 벽은 2015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세월호 기억의 벽을 세우는 어린이문학인들’이 팽목항에 만든 추모공공미술품이다. 2014년 참사 이후 광화문에서 시작, 전국 26개 지역을 돌며 각 지역의 어린이와 어른들이 4,656장의 타일에 쓰고 그린 추모의 글과 그림을 경기도 이천에서 구워 팽목항 방파제에 붙였다. 기억의 벽이 시작되는 방파제 초입에는 다음과 같은 안내문이 있다.

  등록번호 C-2-16-027468
  ‘세월호 기억의 벽’을 세우며

  2014년 4월 16일 제주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습니다. 선장과 선원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한 뒤 자신들만 탈출했고,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 도우며 구조를 기다리던 승객 304명은 모두 바다에 잠겼습니다.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 250명도 배 안에 있었습니다. 정부는 이들 중 단 한 명도 구하지 못했습니다.
  살아있는 우리는 부끄럽고 참담했습니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입니까.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단들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304위의 영혼들 앞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그날의 일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이제 우리 사회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돈과 권력에 지배받지 않는 민주사회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 마음을 전국 26개 지역 어린이와 어른들이 타일 4,656장에 쓰고 그려 이곳 팽목항에 ‘세월호 기억의 벽’을 세웁니다.

  2015년 4월 16일
  주관 : 세월호 기억의 벽을 세우는 어린이문학인들

  ‘기억의 벽’이 만들어진 이후 늘, ‘기억의 벽’ 어딘가에는 시민들이 남기고 간 편지와 과자, 꽃들이 놓여 있다. 더군다나 ‘기억의 벽’은 저작권을 가진(등록번호 C-2-16-027468) 공공미술품으로 안내문에 상기의 사실이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국민해양안전관의 시공사는 ‘기억의 벽’ 타일의 일부를 무단 복제·도용해 추모공원의 세월호 형상과 그 주변 벽에 붙였다. 원래 타일을 축소하거나 확대했고, 타일에 파란색을 입혔다.

사진5. 국민해양안전관의 복제품 타일─복제한 타일은 시공사가 임의로 배치하여 스토리라인을 가진 연속적인 타일의 경우 그 의미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송수연

  임정자 작가(‘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문학인들’ 공동대표)는 지난 3월 건립 중인 국민해양안전관을 둘러보던 시민이 복제 타일을 처음 발견하고 연락을 주어 위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린이문학인들은 지난 3월 31일 1차 내용증명을 진도군에 보냈다. 저작권 침해에 대해 사과하고 무단 복제·도용한 타일을 철거하고 ‘기억의 벽’을 지켜 달라는 것이 주된 요구사항이다. 내용증명에 대한 공식적인 답변을 받지 못한 어린이문학인들은 수차례의 통화를 거쳐 5월 3일 진도군 담당자와 면담을 가졌다.
  “면담은 각자의 입장을 확인한 것으로 끝났어요. 이미 전화로 여러 번 이야기한 ‘우리의 잘못이 아니라, 시공사와 이전 담당자들이 한 일이다. 우리는 사과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다시 들었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 벌어진 과정들이 다시 반복되는 것 같아 답답해요. 잘못을 했으면 인정하고, 사과하고 고치면 되는데 그게 왜 이렇게 힘든 걸까요. 3월에 내용증명을 보내고 이후 전화 통화도 여러 번 했는데 5월에 똑같은 말을 들으러 인천, 충주, 대전, 강진에서 새벽밥을 먹고 모였나 싶어 허망하기도 했지만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이야기할 생각이에요. 2차 면담을 갖기로 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세월호를 기억하고, 안전의식을 함양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민해양안전관은 우리 시대 기억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개관 이후 국민해양안전관이 실제 어떻게 사용될지 속단할 수 없지만, 국민해양안전관이 지어진 지금까지의 과정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지 더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이는 세월호 참사 현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제주 4·3 관련 유적지 역시 이곳을 관광수단으로 전용하려는 성급한 움직임을 보여 관계자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 곳곳에서 진행되는 다크투어에는 ‘다크’는 사라지고 ‘투어’만 남아 있다. 우리의 선택이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또 어떤 결과를 낳을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꿈꾸고 상생하기 위한 기억

  ‘세월호 기억의 벽을 세우는 어린이문학인들’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를 기억하고, 기억을 공유하기 위한 활동을 해왔다. 2014년 7월 특별법 제정촉구 릴레이단식을 시작으로 4·16 노란엽서 만들기를, 8월부터는 광화문 한 뼘 걸게전을, 동년 9월에는 『세월호 이야기』(별숲)를 출간했다. 이후 전국을 돌며 한 뼘 걸개 전시 및 『세월호 이야기』 북콘서트를 진행했다. 2014년 하반기부터 전국 26개 지역에서 ‘세월호 기억의 벽’ 타일 그림 그리기를 했고 모은 타일을 구워 2015년 4월 팽목항에 ‘기억의 벽’을 설치했다. 2015년 10월 소망 돌탑 쌓기를 했고, 2018년 잊혀가는 팽목항을 기억하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팽목바람길’이라는 총 12킬로미터의 도보 순례길을 만들었다. 팽목바람길은 개통한 때부터 2022년 5월 현재까지 매달 첫 번째 주 토요일 오후 1시 무렵 팽목항에서 모인 사람들과 함께 순례길을 걷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2020년 『슬이는 돌아올 거래』(문학동네) 출간을 마지막으로 ‘세월호 기억의 벽을 세우는 어린이문학인들’의 활동은 공식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공공기관에 의해 ‘기억의 벽’이 복제되고 그 정신이 훼손되자 이들은 다시 모였다. ‘세월호 기억의 벽을 지키는 어린이문학인들’이다. 이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통해 기억의 벽과 그 정신을 지켜갈 것이라고 말했다.

  “매달 그렇듯 이번 달(5월)에도 전국 각지에서 오신 분들과 함께 팽목 바람길을 걸었어요. 이번에는 유독 어린이들이 많이 왔는데 길을 걸으면서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계속 깔깔거리면서 걷고 뛰더라고요. 저는 세월호가 이렇게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아픈 일이지만 어둡고 암담하기만 한 기억으로 남지 않았으면 해요. 유가족들도 그걸 원해요. 팽목바람길을 웃으면서 걷는 아이들을 보면 단원고 친구들이 생각나요. 그들이 꽃다운 나이에 가졌을 희망과 웃음이요. 팽목바람길을 걸으면서 깔깔대는 아이들을 보면 겉으로는 추모가 드러나지 않지만, 보이는 게 다가 아니죠. 여기까지 찾아온 그 마음들을 짐작하면 충분해요. 더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임정자 대표의 말은 잊지 않고 기억하되 과거에 사로잡히지 말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로 들렸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더 이상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려는 데 가장 큰 주안점이 있다. 책임 소재를 밝히고자 하는 이유도 같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과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한 사회가 되어야 씨랜드가, 세월호가 반복되지 않는다. 이 땅의 아이들이 안전하고 민주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회, 부자이건 가난하건 어른이건 아이이건 그 누구라도 최소한의 품위 있는 삶과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 세월호 참사로 스러진 이들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는 올바르게 청산하고 기억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더 급한 다른 일이 많다는 이유로 유야무야 덮고 지나갔기 때문에 씨랜드는 세월호가 되어 돌아왔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어린이날 100주기에 우리 시대의 기억법을 돌아보게 된 이유이다.

  팽목바람길은 매달 첫째 주 토요일에 열린다. 돌아오는 6월에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함께 팽목바람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걸으면서 생각해보자. 나는 나의 삶과 생명을 얼마나 존중해왔는가.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는가. 더 나은 사회, 보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나는 내 삶을 어떻게 행복하게 꾸려갈 것인가. 걷다보면 팽목의 바람이, 바다가 가만히 내 마음을 만져줄 것이다. 그렇게 빨리 가지 않아도 된다고, 천천히 걸으면서 여기 핀 들꽃을 함께 보자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의 충만함일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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