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시집

  

임선기 시집, 『피아노로 가는 눈밭』, 창비, 2021.

  

  임선기의 다섯 번째 시집 『피아노로 가는 눈밭』은 2021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발간되었다. 이 사실은 어딘가 암시적인데, 그것은 이 시집을 읽을 수 있게 되는 시간이 아무리 빨라도 그 이듬해라는 점과 관련된다. 2021년에 인쇄된 이 시집은 읽는 이에게 2022년에 도착한다. 물론 글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시차는 필연적이다. 이는 문학이 감안하는 동시에 향유하고 있는 운명적 형식 혹은 형식의 운명으로서, 이제는 거의 불문不問에 부쳐진 바가 되었다. 그런데 임선기의 이번 시집은 그 시차를 감안하는 것도 아니고 향유하는 것도 아닌, 있는 그대로 보존하고 드러내는 방식을 택한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삶’과 ‘존재’의 시차를 기록한 본래 ‘문자’ 즉 ‘텅 빈 언어’에 최선을 다해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음으로써 “다시 텅 비게 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어느 날 병 속 편지가 도착했다/ 문자는 보이지 않았지.// 나는 텅 빈 언어를/ 다시 텅 비게 해서 보낸다네”(「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3」). 사족이겠으나, 이 시차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물리적 시간 이상을 의미하는 것은 말할 것이 없다.

  백지에서 말하는 소리 아니라
  백지가 말하는 소리.
  지금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모두
  지나간 것이다
  지금 보는 것 듣는 것 모두
  지나간 것이다.

─ 「이것으로도 저것으로도 눈을 가리지 말자」 중에서

  그래서 이 시집은 누구도 ‘제시간에’ 읽을 수 없는 시집, 누구든 제시간에 이 시들을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시집, 더 나아가 누구와도 상관없이 시란 결코 제시간에 읽을 수 없는 글쓰기의 형식이라는 사실 혹은 진실을 공표하는 시집이 된다. 그 공표의 날짜가 독자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전날이며 지난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고도 더없이 적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집의 제목이 ‘피아노로 가는 눈밭’이며, ‘눈’에 관한 시들이 유독 많은 것은 이런 맥락에 있다. ‘눈’은 실체가 분명하지만, 만지는 순간 이내 사라진다. 지상에서 소멸하기에 가장 좋은 육체(형식)를 지닌 눈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에 가장 어려운 사물(언어를 포함해)을 상징한다. ‘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라는 4편으로 구성된 연작시의 제목은 임선기가 생각하는 시가 무엇이며, 시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를 비유를 통해 정확히 설명한다. 사실 임선기의 시 세계에서는 비유가 설명을 대신하며, 정확한 설명은 정확한 비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눈을 밟는 사람도 아니고 눈을 치우는 사람도 아닌, ‘눈을 나르는 사람’은, 눈을 나르는 일의 이유와 목적에 대한 의문을 수반한다. 눈을 왜 나르는 것일까. 결과에 대한 불신도 함께다. 눈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제시간에 나를 수 있을까. 이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임선기는 ‘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라고 과거형으로 서술한다. ‘눈을 나르는 사람’(시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임선기는 그러나 여전히 ‘눈’의 존재를 사랑하고 믿는 사람이다. “네, 눈이 늘 있어요.”(네, 시가 늘 있어요.) 눈은 사랑과 믿음의 영역에서, 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이의 내면에서 늘 존재한다. “그래요? 눈이 어디 있죠?”(그래요? 시가 어디 있죠?) 그러나 눈의 구체적인 존재 여부와 위치를 묻는 질문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다 녹아서 있어요.” 눈은 가시적인 현실과 타자와 공유하는 공동의 영역에서는 녹아서/사라져서 있다(?). ‘녹아서’라는 단어 옆에서 그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있어요’는 존재와 부재를 정확히 동시에 표상한다. 녹아서/사라져서, 있어요/없어요.(이상 시 「대화」에서 인용)
  임선기에게 ‘눈’은, 쓰는 당신/나와 읽는 나/당신 사이의 시차를 견디느라 “문자는 보이지 않”게 된 “병 속 편지”와 같은, ‘시’의 아름답고 덧없는 상징이며 알레고리다. 시집 『피아노로 가는 눈밭』에 실린 시들은 둘 사이의 시차를 넘어서기 위해 고안된 ‘병 속 편지’를 받고 다시 보내는 일, 혹은 ‘눈을 나르는 일’의 불가능성을 말하(지 않고 못하)는 일에 소용된다. “모르는 말이 너무 많고 안다는 말도 실은 모르는 말이다// 별 없이 걸을 수는 없다 그러나 별을 알고 걸을 수도 없다”(「별 바라기」). “아름다운 일이 내린다.// 이미 깊은/ 눈이 내린다”(「눈 3」). 알고 있는 말과 모르는 말, ‘별’과 함께 걷는 것(동반, 소유)과 “별을 알고 걷”는 것(이해), 과거와 현재 등은 모순의 형태로(만) 공존한다. 임선기의 시는 이 모순을 지우고 통합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기 위한 고요하고도 필사적인 행위이며, 참여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기억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를 갖는 건 잠시 자신의 목소리를 갖는 것/ 목소리는 내려가서 12월쯤을 걷는다./ 시간의 협곡이 펼쳐 있고 바람꽃들이 펼쳐 있다/ 시를 갖는 건/ 잠시 바람꽃들이 흩날리는 것을 갖는 것.”(「목소리」 전문) 이 시의 초점이 ‘시를 쓰는 것’이나 ‘시를 읽는 것’이 아니라 ‘시를 갖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자. 시를 쓰고 읽는다고 해서 시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병 속 편지에 문자가 보이지 않고, 눈을 나르는 일이 과거의 소망이었다는 점을 통해 임선기는 이를 암시해 왔다. 단적으로 말하면, 임선기에게 시는 모두의 보편성이 아닌 ‘나’만의 개별성의 영역에 속해 있다. 이 개별성은 타자가 볼 수도, 타자에게 나를 수도 없는 것이다. “잠시 내리는 눈을 보았으나/ 나의 눈이 아니었다/ 나의 눈은 나만이 아는 눈이다/ 나를 기다리게 하고/ 내가 기다리는 것을 아는 눈이다.”(「눈 1」) 그러나 동시에 개별성은 ‘보이지 않는 문자’와 ‘나를 수 없는 눈’의 형태로, 모르는 타자들이 주고받을 수 있는-없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개별성을 주고받(지 못하)는 일의 보편성과 이 소통의 (불)가능한 현장을 임선기는 ‘시’라고 부른다. “얼마나 사랑을 했던가/ 사랑받지 못한 사랑을”(「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1」). 모든 일이 불가능한 동시에 가능하며, 불가능하기에 가능한 사랑의 현장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풍경을 하고 있다.

  눈밭을 걸어 피아노로 간다/ 가는 길에 한그루 나무/ 인사한다./ 조용한 건물 지하 피아노는/ 땅에 묶여 있다/ 피아노를 들었다 놓는다/ 가난한 일들을 위한 저녁 미사를/ 준비한다/ 피아노에도 눈밭이 있다/ 피아노가 눈밭을 걸어갔다 온다/ 새 한 마리 피아노에서 눈밭을 걸어/ 돌아오는 길에 인사를 한다./ 문 닫고 나온다/ 피아노로 가는 눈밭이 펼쳐 있다.

─ 「피아노로 가는 눈밭」 전문

  먼 곳에서 온 손님인 줄 알고 보았더니
  먼 곳에서 온 나였다
  집인 줄 알고 보았거니 여관이었다
  착각인 줄 알고 보았더니 시였다

─ 「착각」 중에서

  이 시집의 해설에서 장철환은 이를 비인칭과 사라지는 주체, 침묵의 언어 등으로 요령 있게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텅 빈 언어”는 언어의 본성적 상태로서 언어 사용의 ‘흔적’들을 지우려는 마음을 표현한다. 요컨대 “다시 텅 비게 해서 보낸다”는 말에 담긴 것은 실패의 고백이 아니라 언어의 원형적 상태를 회복하려는 마음이다.”1 여기에 덧붙이면, 임선기의 “텅 빈 언어”는 언어의 원형적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으로도 표현하고 환원될 수 없기에 무엇으로든 부를 수 있는 것. 단지 아주 잠깐 보이지 않는 문자의 형태로 읽을 수 있고, 나르자마자 녹아 사라져 있는-없는 ‘눈’의 형상으로만 가질 수 있는 것. “착각인 줄 알고 보았더니 시였”던 그것은 모든 존재의 이름을 일회적으로 대신하며 시차를 거스른다.(거스를 수 있을까.) 임선기가 그리는 일회적이고 일시적인 삶의 풍경은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극단에 있는 사멸하지 않는 ‘불후의 삶’과 구별되지 않는 형식을 갖고 있다. 임선기의 시를 읽는 동안, 벤야민의 다음과 같은 통찰이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불후하는 삶은 잊을 수 없다.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불후하는 삶을 인식하는 표지이다. 불후하는 삶은 기념비도 없고 추억도 없이, 어쩌면 증언도 없이 잊을 수 없는 것이어야 할 삶이다. 그 삶은 잊을 수 없다. 이러한 삶은 말하자면 그것이 채워질 그릇이나 형식이 없이도 사멸할 수 없는 삶으로 남는다.”2

  

  

주석

  1. 장철환, 「여백의 깊이와 침묵의 언어」, 임선기 시집 『피아노로 가는 눈밭』 해설, 창비, 2021, 101~102쪽.
  2.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서사・기억・비평의 자리』, 길, 2012, 163~1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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