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전鹽田 외 1편

 
 

염전鹽田

 

  한때는 소금밭이었던 길을 지나며
  나는 확신했지 나무들이 걸어 나온 시푸른 바다가
  누대에 누대를 먹여 살려온 밭이었지

  칠게들이 뻘밭에 집을 짓는 사이
  갈대밭에 고요를 한바탕 흔들며 날아오르는
  멸종 위기 날갯짓과 날갯짓 사이
  풀밭과 풀밭 사이 무너진 중심을 잡아주는
  모래밭과 모래밭 돌밭과 돌밭 사이
  헤아릴 수 없는 아스라한 풍광들이
  우리와 우리를 지탱해왔지

  무릎을 연거푸 꺾는 풀벌레 울음과 울음 사이
  쉼 없이 돋는 파도의 고랑과 고랑 사이
  다행히 아직, 해맑은 해풍의 입자와 입자 사이
  골진 이마의 주름과 주름을 빼곡히 메워주는
  저녁놀과 이제라도 풍광 속으로 스며야겠지

  거기 짭조름한 생활을 빼곡히 파종하듯
  태초의 하늘과 땅 사이 사람과 문명 사이
  떨어져도 다시 차오르는 이슬과 이슬 사이
  모든 새벽이 작황이어야겠지 이미 잃은 미래의 날들만큼
  밭이어야겠지 우리 모두 소금이어야겠지
 
 

한 그루의 파동

 

  1
  둥글게 만 꽃잎들이 깨진다 수천수만의 맛이 튀어 오르고 다시 고이며 낮은 곳으로 흐른다 좀처럼 식지 않는 정황 속으로 발목들이 빨려들어간다 버둥거리는 잇바디의 혀도 굳어버린다 이럴 때는 언제나 나타나는 부드러운 손길들이 다음 동작을 일러준다

  2
  표정의 형식이 매번 다르면서도 닮았다고 한다 서로 불안한 부리들이 부는 휘파람 소리가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고 한다 달팽이관을 약간 닫고 숨도 잠시 멈춘 듯이 쉬라고 한다 딱 그 자세를 우아하게 유지하라고 한다 수맥은 더 달아오르고 다른 가지들의 지시대명사가 빠르게 창조될 것이라고 한다

  3
  언제나 그랬던가? 맛들이 말끔히 치워지면,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또다시 꽃이 피었던가? 피기도 전에 먹구름은 사라졌던가? 흙바닥은 한 겹을 벗어버리고 새살이 돋았던가? 까칠한 피부는 부드러워졌던가? 갈라졌던가? 서늘해진 공간이 일조량을 그리워한 만큼 폭죽처럼 창문이 열렸던가? 닫히지 않았으니 열릴 일이 없었던가? 모든 언어의 한계가 이렇듯 명백했던가?

  4
  뿌리를 잃은 질문들이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다 거꾸러진 계절 속으로 다녀간 무수한 가벼움의 실체가 떨고 있다 마침내 혀끝을 비집고 나오는 말의 씨앗을 닮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사방팔방으로 흐르며 퍼지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잔여 속으로 신비한 습관이 물들고 있다 한 그루의 파동이 투명한 먹빛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손병걸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푸른 신호등』 『나는 열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통증을 켜다』 『나는 한 점의 궁극을 딛고 산다』, 산문집 『열 개의 눈동자를 가진 어둠의 감시자』 『내 커피의 적당한 농도는 30도』 등이 있음. 구상솟대문학상,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인국무총리상, 민들레문학상, 중봉조헌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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