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NT

 

진실이라는 심연에는 오로지 속는 자만이 추락해야 한다.
─하인리히 블뤼허

 
 

  막사 앞은 예보에 없던 폭설로 인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작업모를 눌러쓴 한 간부가 넉가래를 든 채 삼삼오오 모여 있는 부대원들을 향해 배수로 쪽으로 눈을 밀어내라고 소리쳤다. 이른 아침부터 불려 나온 부대원들 입에선 허연 입김이 뿜어져나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엄경도는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대장의 옆얼굴을 힐끔 곁눈질했다. 관자놀이에 도드라진 혈관이 실룩거렸다. 중대장은 엄경도의 어깨를 툭 치며 의자를 가리켰다.
  “그래서 거수자가 위병소 쪽으로 달아났단 말이지?”
  중대장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꼬며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엄경도는 자기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폈다.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넌 초병으로서 당연한 조치를 한 거야. 다만 그때 상황을 조금 더 정확하게 알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까 녀석이 수하에 불응한 게 맞아?”
  중대장은 책상 위에 있는 모래시계를 뒤집어놓고선 캔에 든 아몬드를 접시에 담아 엄경도 앞에 놓았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공포탄을 쏜 거고?”
  “네.”
  “그런데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 시간에 탄약고는 물론이고 고가초소 앞을 오간 이는 아무도 없단 말이지. 감시 카메라에도 찍히지 않았고.”
  엄경도는 아몬드가 담긴 하얀 접시의 가장자리에 드리워진 얇은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접시는 탁자 위에 살짝 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엄경도는 사르륵사르륵 흘러내리는 모래시계의 알갱이들을 보았다.
  

  근무 교대까지는 30여 분 남은 시각,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이따금 고가초소 뒤편 숲에서 스르륵스르륵 눈더미가 쏟아져내렸다. 탄약고 주변은 열네 개의 경계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폭설 탓에 평소와 달리 시야가 좋지 않았지만 초소 지붕을 비롯해 탄약고 주변에는 아홉 개의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 사각지대라 할 만한 곳이 없었다.
  “김 병장은 초소 주변을 순찰하고 돌아온 자신을 향해 네가 갑자기 공포탄을 발사했다고 하던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김 병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단 얘긴가?”
  엄경도는 순간 머뭇거렸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강남의 한 클럽에서 웨이터를 하다가 입대했다는 김 병장은 엄경도보다 한 살 적었지만 8개월 먼저 입대한 선임이었다. 늘 그렇듯 김 병장은 초소에 들어서자마자 방한복을 뒤집어쓴 채 근무 시간 내내 잠을 잤다. 지난 새벽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변이 마렵다며 초소 뒤 숲속으로 들어가 볼일을 보고 돌아와선 초소 구석에 틀어박혀 이내 졸기 시작했다. 중대장의 얘기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제멋대로 초소를 이탈한 김 병장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지어낸 듯했다.
  “그때 김 병장은 순찰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엄경도는 일주일 후면 상병 계급장을 달고 휴가도 나갈 예정이었다. 그쯤 되면 손발에 굳은살도 제법 딱딱하게 배고, 전에 없던 눈썰미도 생기는 법이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걸 못 봤다고 말할 수 없고, 못 본 걸 봤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다면 인정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하지만 새벽에 있었던 일은 실수가 아니었다.
  중대장은 긴 한숨을 쉬더니 접시 위의 아몬드를 집어 입에 털어 넣곤 천천히 씹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있던 패드를 가져와 엄경도 앞에 내려놓았다. 패드에는 초소 방면을 향해 있는 2번과 5번 감시 카메라에 찍힌 영상이 담겨 있었다.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 건가?”
  “이건 김 병장이 볼일을 보고 초소로 돌아오던 상황 같습니다.”
  “같습니다?”
  중대장은 영상을 멈추고 하단의 촬영 시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가 거수자가 나타났다고 상황실에 보고한 시각이 바로 이때야.”
  엄경도는 고개를 숙여 정지된 화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친 눈발 탓에 경계등 불빛이 번져 초소에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을 정확하게 식별할 수는 없었지만 엄경도는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초소 바로 아래에 있는 김 병장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이는 분명 자신이었다. 김 병장은 엄경도를 우두커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경도는 호흡을 가다듬고 화면을 보았다. 불빛이 번져 얼굴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건 분명 김 병장이었다.
  엄경도는 자신이 목격한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였다.
  녀석은 얼마 전 샤워실에서 본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머리통은 형광빛이 도는 투명한 고무공 같았는데 그 속은 푸르스름한 점액질 같은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녀석의 얼굴은 인간과 달리 이목구비가 없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턱 아래가 기묘하게 일그러질 때마다 원숭이 꼬리처럼 생긴 기다란 혀가 흘러내리듯 나와 흐늘거렸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통에서 연신 쉭쉭대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울렸다.
  정 대위는 패드를 터치해 영상을 재생시켰다.
  탄약고 후방에 설치된 2번 감시 카메라는 고가초소부터 탄약고에 면해 있는 무기고까지가 관측 범위였는데 렌즈에 눈이 녹으면서 얼어붙었는지 영상이 흐릿했다. 무기고 왼편에 설치되어 있는 5번 감시 카메라 영상에는 총구에서 세 차례에 걸쳐 불꽃이 번쩍거리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숲에서 눈보라가 몰아치며 초소 주변을 뿌옇게 뒤덮었다. 눈보라가 사그라들자 영상에는 엄경도가 초소 앞에서 위병소와 초소를 번갈아보며 서성이고 있었고, 이어서 눈길을 헤치며 신속대응팀이 초소로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팀장은 이리저리 손짓했고, 팀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을 시작했다. 엄경도는 어느덧 고가초소로 되돌아와 우두커니 서 있는 김 병장의 모습을 뚫어지게 보았다.
  “중대장님.”
  엄경도는 패드에서 시선을 거두며 중대장을 보았다. 중대장은 접시 위에 흩어져 있는 아몬드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쓸어 모으고 있었다. 엄경도는 마른세수를 하고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목격한 건 인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중대장은 접시 위의 아몬드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찍어 입에 넣다 말고 엄경도를 멍하게 바라보더니 열이 오르는지 창문을 열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지난가을 부대 인근 야산에서 매복 훈련 중에 겪었던 얘기를 꺼냈다.
  “정말 이상했지. 꼭 사람 머리처럼 보이더군. 그런데 거기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나오는 거야. 이리저리 휘적거리는 게 꼭 유령 같더만. 뭔가 싶어서 진지에서 나와 확인해봤지. 그게 뭐였는지 알아?”
  드르륵드르륵, 창문 너머로 넉가래를 미는 소리가 들렸다.
  “비닐이더군. 나뭇가지에 비닐이 걸려 있던 거였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엄경도?”
  엄경도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도 안다. 김 병장이 문제가 많긴 하지.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선 너한테도 좋을 게 없어.”
  “하지만 제가 본 건, 김 병장이 아니었습니다.”
  중대장은 끙, 하고 짧은 신음을 내뱉었다.
  “이걸 보고도 그런 얘기가 나와?”
  중대장은 손가락으로 패드를 두드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너와 김 병장 외에 누가 있는지 똑바로 보란 말이야.”
  답답하긴 엄경도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자신이 목격한 녀석이 감시 카메라에 잡히지 않은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보급 창고 처마에선 눈이 녹으면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넉가래를 미는 소리가 들렸다. 엄경도는 보급 창고 진입로에 쌓여 있는 눈을 치우고 담배를 꺼내었다. 위병소 쪽에서 최 이병이 외발 수레를 끌며 창고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엄경도가 인사를 하지 말라고 채 손짓하기도 전에 최 이병은 오른손을 힘차게 치켜들며 경례 구호를 외쳤다. 그와 동시에 수레에 실려 있던 자루가 와르르 쏟아졌다. 최 이병 어깨의 노란 견장엔 거뭇거뭇한 때가 묻어 얼룩덜룩했다. 최 이병을 보자 미련스러우면서도 묘한 연민이 일었다. 그 시기엔 누구나 허둥대기 마련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적응할 텐데 고참들은 다그치고 또 다그쳐서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연극을 하다가 입대한 최 이병은 두 달 전에 부대로 왔는데 주의력이 부족하고 행동이 굼떠서 행정보급관이 시키는 허드렛일만 도맡곤 했다. 그런 탓에 함께 어울릴 일이 적어 엄경도와 같은 중대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데면데면했다. 사실 최 이병은 요주의 병사였는데 자대에 배치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서 울타리를 넘은 적이 있었다. 저녁 점호를 앞두고 있을 때까지 최 이병이 사라진 사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날 저녁, 상황실에 탈영 사실을 알린 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최 이병은 걷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낯선 도시에 와 있더라는 거였다. 다행히 상부에 보고되지는 않았지만 그날 이후로 중대장은 핏대를 세웠다. 그런가 하면 지난달 사격 훈련 때 오발 사고를 낸 것도 모자라 당황한 나머지 사선을 통제하고 있던 중대장에게 총구를 돌려 부대원 모두를 긴장시킨 일도 있었다. 부대원들은 그런 최 이병이 오갈 때마다 괴물이 나타났다고 키득거렸다.
  “그거 뭐야?”
  엄경도는 자루를 가리켰다.
  “숯입니다.”
  행정보급관이 창고에 가져다 놓으라고 시킨 일이었다. 엄경도는 넉가래를 내려놓고 자루를 들어 수레에 실었다.
  “또 쏟아진다. 잘 잡고 있어.”
  최 이병은 수레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엄경도는 최 이병에게 건네받은 자루를 창고 구석에 차곡차곡 쌓았다. 탄띠와 헬멧 따위가 쌓여 있는 선반 아래에 소주 한 상자가 판초로 덮여 있었다. 조만간 바비큐 파티라도 하려는 모양이었다.
  이따금 간부들은 창고 뒤편 공터에 모여 고기를 굽곤 했다. 사격장 주위에는 유독 꿩이 많았다. 엄경도는 풀숲에 대가리를 처박고 있거나 푸드덕거리며 날아오르는 꿩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었다. 중대장은 눈이 밝고 사격 솜씨가 좋았다. 호탕하고 늘 웃는 얼굴이었지만 축 늘어진 사냥감을 들고 걸어오는 모습은 어딘지 모를 살기가 느껴졌다. 옆에 있는 간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나이스, 하고 외쳤다. 더러 사슴이나 고라니가 사로까지 내려오기도 했다. 그런 날엔 어김없이 작은 트럭이 사격장으로 올라갔으며, 창고 뒤편 공터에선 그들만의 조촐한 파티가 열렸다.
  엄경도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어 최 이병에게 내밀었다. 최 이병은 괜찮습니다, 하고선 서둘러 수레를 끌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엄경도는 최 이병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선 창고 뒤편으로 가서 담배를 꺼내어 물었다.
  족구장으로 쓰이는 공터 가장자리에 외따로 서 있는 미루나무 아래에는 재가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눈에 뒤덮여 마치 하얀 봉분처럼 보였다. 창고 벽에는 포개어 놓은 녹슨 철조망 옆으로 드럼통을 잘라 만든 화로가 세워져 있었다. 엄경도는 장갑을 벗어 드럼통 위의 눈을 툭툭 털어내고 기대어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는 바람에 쓸려 이내 사라졌다. 비스듬히 쏟아진 햇살이 눈부셨지만 좀체 냉기가 가시질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언제나 잠이 부족했다. 특히나 한겨울 새벽 추위는 더더욱 잠을 부추겼다. 초소에서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들어 휘청거리곤 했다. 긴긴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시계를 보면 5분도 채 흐르지 않았다. 할 건 생각밖에 없었다. 일주일 후면 나가게 될 휴가 때 할 일을 계획하다가 어린 시절 집 근처 개울에서 놀다가 빠져서 죽을 뻔한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늘 그렇듯 생각은 무질서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러다가 아득한 어둠 속에서 지난 휴가 때 헤어진 미고가 느닷없이 다가와 눈앞에 아른거렸고, 미고에게 연락해 볼까, 그러다가 괜히 코끝이 시큰거리기도 했으며 이윽고 머릿속은 미처 건네지 못한 말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이상하지. 사랑해, 사랑한다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을 꺼내어 말하면 말할수록 왜 더 외로워질까. 어쩌면 솔직하다는 건 외로워지는 것과 같은 말인지도 모른다. 미고의 냉랭했던 표정이 머릿속에 스치자 부풀었던 생각은 구멍 난 풍선처럼 금세 쪼그라들었다. 하물며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러나 문제의 그 녀석은 어느새 이런저런 잡념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엄경도는 보랏빛이 감도는 축축한 돌기가 촘촘하게 돋아 있는 녀석의 기다린 혀를 좀체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었다.
  

  그날 뿌연 수증기가 자욱한 샤워실에서 너덧 명의 부대원이 샤워를 하고 있었다. 샤워기 아래에서 거품을 닦아내고 있던 김 병장은 녀석이 푸르스름한 빛을 발광하며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샤워실에 들어서던 엄경도는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쿵쾅거렸다.
  대체 저게 뭘까?
  엄경도는 처음 본 광경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듯했다. 녀석의 턱 아래에서 보라색 돌기가 미끄러지듯 나왔다. 그러더니 곧바로 김 병장의 목을 칭칭 휘감고선 입속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엄경도는 비명을 질렀다. 김 병장은 쿨럭쿨럭 기침을 토해내며 이내 점성이 생긴 밀가루 반죽처럼 축 늘어졌고, 차츰 피부가 투명해져 갔다. 김 병장의 몸 안에선 녀석과 마찬가지로 점액질 같은 게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엄경도는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녀석은 이어서 머리를 감고 있는 또 다른 부대원에게 스르륵 다가가 목을 휘감았다. 부대원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시르죽은 듯 팔다리를 늘어뜨리고선 변태를 시작했다. 엄경도는 얼어붙은 듯 멈춰 선 채로 녀석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녀석의 머리통 안에선 마치 시퍼런 불꽃이 일렁거리는 것 같았다. 엄경도는 샤워실 출입구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녀석이 엄경도의 다리를 향해 혀를 뻗었을 때 변태를 마친 또 다른 녀석도 슬금슬금 다가왔다. 엄경도는 샤워실 입구에 세워져 있던 대걸레를 집어 들고 녀석의 머리통을 향해 마구 휘두르며 복도로 나왔다. 엄경도는 곧장 상황실로 달려갔지만 자신이 목격한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횡설수설했다.
  “뭐야, 귀신이라도 본 거야?”
  때마침 상황실에 있던 중대장은 물에 흠뻑 젖은 엄경도와 함께 샤워실로 갔다. 어찌 된 영문인지 녀석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고, 부대원들은 비누칠을 하며 조금 전 목격한 작은 소동에 대해 웅성거리는 중이었다. 김 병장은 얼굴에 묻은 거품을 닦아내며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샤워실 출입구를 쳐다보았다. 중대장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상황실로 돌아갔다. 그러자 부대원들은 엄경도를 향해 저 새끼 뭐야, 하고선 자기들끼리 쑥덕거렸다.
  엄경도는 입대 후 그때껏 단 한 차례도 말썽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신병일 때부터 빠릿빠릿하기도 했거니와 각종 훈련에서 뒤처지는 일도 없었다. 선후임과의 관계 또한 원만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건 한순간이었다. 엄경도가 김 병장에게 대걸레를 휘둘렀다고 하더라. 그럼 하극상이 아니냐. 애인한테 차여서 분풀이라도 하려고 했던 건가. 그게 아니라 헛것을 본 모양이라더라. 의병 제대를 하려는 거겠지. 엄경도의 귀에도 그런 얘기가 들렸다. 하지만 지난 새벽 초소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는 녀석을 보았을 때 그건 더 이상 망상이 아니었다. 또렷했고, 분명 실체가 있었다. 샤워실에서 보았던 바로 그 녀석이었다.
  투명한 머리통 안에선 파란 잉크를 푼 것처럼 무언가 꿀렁거리고 있었는데 어쩐지 연약해 보이기도 했다. 녀석은 어기적어기적 초소 위로 올라오며 엄경도를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 만약 그게 녀석 나름대로 어떤 호감을 표출하려는 행위였다면 당연히 공포탄을 발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뜻밖에도 녀석은 공포탄 소리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의 덩치는 더 부푼 것처럼 보였다. 엄경도는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사실 자신이 들고 있는 건 빈총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앞 탄약고에는 온갖 탄약이 가득 쌓여 있었지만 영내 초소 근무자에게 실탄은 주어지지 않았다. 설사 실탄을 장전했다고 하더라도 녀석을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을까. 눈조차 없는 녀석이라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고, 흐느적거리는 몸짓에서는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자신과 달라서 적의를 느꼈고, 그 적의의 본질이 무엇인지 몰라 두려웠다. 무슨 마술이라도 부린 걸까. 눈보라가 몰아쳤고 순식간에 녀석은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허둥지둥 상황실에 추가 상황을 보고했을 때만 하더라도 녀석이 위병소 쪽으로 달아난 줄 알았다. 적어도 중대장실에서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고, 또 믿으려고 했다.
  엄경도는 담배를 끄고 야전 상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금속성이 느껴졌다. 엄경도는 탄창을 꺼내어보았다.
  신속대응팀이 막사로 복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다음 근무자가 초소로 오고 있었다. 어느덧 하늘은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고 눈발이 가늘어졌다. 엄경도는 초소 후방에 위치한 간이 통문 열쇠와 탄약고와 무기고 출입문 열쇠, 그리고 출입일지 등을 인계하고 얼떨떨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초소에서 내려왔다. 김 병장은 초소에서 내려오자마자 어깨를 부르르 떨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탄약고를 지나 막사로 향하는 소로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소로 양쪽 수풀엔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좁다란 길에는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 있었다. 바닥만 보며 뒤뚱뒤뚱 걷던 김 병장은 갑자기 돌아서더니 엄경도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 엄경도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김 병장은 분이 삭지 않은 얼굴을 한 채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주춤거리며 일어서던 엄경도는 눈 덮인 수풀이 움푹 파인 걸 보았다. 그곳에 탄창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엄경도는 김 병장의 뒷모습을 힐끗 보고선 허리를 숙였다. 그건 의외로 묵직했다.
  탄창에는 스무 발의 실탄이 채워져 있었다. 신속대응팀이 떨어뜨린 게 틀림없었다. 만약 실탄이 분실된 사실이 보고되었다면 이미 부대가 발칵 뒤집어져 대대적인 수색 작업에 들어갔을 터였다. 하지만 여태 잠잠한 걸 보면 아직 분실한 걸 모르거나 어느 누군가는 남몰래 마음을 졸이며 탄창을 찾으러 부대 곳곳을 배회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창고 건너편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엄경도는 서둘러 주머니에 탄창을 넣었다. 다들 며칠 전 서울 상공에 출현한 미상의 비행 물체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간간이 김 병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보낸 건지 뻔한 거 아냐. 김 병장은 정기휴가를 계획하고 있는 듯했는데 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다 책임지겠다고 떵떵거렸고, 간간이 야유와 함께 저속하고 거친 말들이 오갔다. 그들의 얘기를 엿듣고 있으니 어쩐지 이방인이 된 듯했다. 엄경도는 창고 모퉁이에 서서 멀어지는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제설 장비를 바닥에 질질 끌며 막사 쪽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엄경도는 창고 반대편으로 돌아 나와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물 같은 구름이 뭉쳤다가 흩어지길 반복하며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막사로 돌아온 엄경도가 중대장실 문을 두드릴까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호주머니가 무겁게 느껴졌다. 실탄을 은닉한 사실이 밝혀지면 처벌을 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작 엄경도가 중대장실 문을 두드린 건 점심 무렵에 중대장의 호출을 받고 나서였다.
  중대장은 쭈뼛거리며 서 있는 엄경도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초소 근무자에게 공포탄을 발사해 위해를 끼친 건 엄벌을 피하기 어려운 사안으로, 그 결과 상병 진급은 늦춰졌고, 휴가도 기약 없이 미루어졌다며. 그 모든 건 엄경도가 보급 창고 앞에서 눈을 치우는 사이에 결정된 일이었다. 어디선가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경도는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모래시계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더 할 얘기 있나?”
  중대장은 서류철을 덮으며 물었다.
  엄경도는 마른침을 삼켰다. 탄창이 든 주머니 쪽 어깨가 기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별안간 기묘하게 일그러지던 녀석의 머리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중대장에게 얘기해봤자 콧방귀조차 뀌지 않을 게 뻔했다.
  “돌아가지 않고 뭐 해?”
  엄경도는 경례를 하고선 중대장실을 나왔다. 만약 자신이 먼저 실탄이 든 탄창을 습득했다고 보고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실탄을 분실한 어느 누군가는 책임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내려질 처분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내려진 결정이 뒤집어질 리 없었다. 어차피 탄창을 분실한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모든 부대원이 소집될 게 뻔했다. 그때 제자리에 돌려놓거나 아니면 발길이 닿지 않는 풀숲에 슬그머니 던져놓은들 발각될 일은 없을 터였다.
  제설 작업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중앙 도로와 연병장 제설 작업을 끝낸 부대원들은 툴툴거리며 각 훈련장으로 흩어져 넉가래를 밀고 다녔다. 심상치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부대원들이 제설 장비를 들고 하나둘씩 막사로 복귀할 무렵이었다. 서울 상공에 나타난 비행 물체가 이번에는 인천과 대전 등지에서도 목격되었다는 것이다. 일과를 끝낸 부대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휴대전화를 켜고 인터넷을 검색했다. 시민들이 두 눈으로 빤히 목격한 비행 물체를 두고서 사실이다, 아니다, 옥신각신 다퉜으며, 인터넷에는 온갖 음모론이 나돌았다. 하지만 그런 뉴스는 보고타에서 갓 태어난 어느 아기에게 꼬리가 달렸다거나 델리의 한 동물원에 갇혀 있던 코끼리가 5미터 높이의 울타리를 날아오르듯 뛰어넘어 탈주극을 벌였다는 해외 토픽보다도 더 심심한 해프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고, 아니나 다를까 저녁 시간이 되자 부대원들은 젖은 전투화를 말리거나 세탁실에서 빨래를 하는 등 저마다 정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엄경도는 아무 일 없는 듯 굴러가는 시간이 의아했다. 아니, 두려웠다.
  녀석을 다시 목격한 건 다음 날 저녁 체력단련실에서였다. 이제 녀석은 하나가 아니었다. 한 녀석은 러닝머신 위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또 다른 녀석은 벤치 프레스에 걸터앉아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녀석들이 출몰하는 빈도는 점점 잦아졌다. 사열대나 부대원들의 왕래가 잦은 매점에서도 녀석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녀석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녀석들은 괴이하게 생긴 머리통을 까딱거리며 대놓고 부대 곳곳을 쏘다녔다. 엄경도는 녀석들을 마주칠 때마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했지만 또다시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새벽, 엄경도는 가느다란 눈발을 맞으며 고가초소에 올랐다. 어떤 우려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경도의 근무 파트너는 최 이병으로 바뀌었다. 일과 시간에는 그렇다고 쳐도 그동안 최 이병이 저지른 사고를 모르지 않은 터라 함께 초소에 오르는 게 적잖이 부담스럽긴 했다. 하물며 최 이병도 녀석들과 같은 부류는 아닌지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눈송이가 뒤섞인 바람이 불 때마다 어둠에 잠긴 숲이 괴이한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방한 마스크를 착용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휘몰아치는 칼바람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마치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얼굴 속으로 파고들어 할퀴는 듯했다. 엄경도는 시계를 보았다. 누구와 함께든지 간에 초소에서의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초소에 투입된 지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고 손발은 면도칼로 벤 듯 얼얼했다.
  “휴가 때 뭐 할 거야?”
  엄경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최 이병에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최 이병은 방한 장갑을 낀 두툼한 손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코를 훌쩍였다. 백 일 휴가를 얼마 앞두지 않아 달뜰 만한데 최 이병의 얼굴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최 이병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탄약고 진입로 가장자리의 꽝꽝 얼어붙은 눈더미만 내려다보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최 이병은 아홉 살이 되던 해 교통사고로 부모를 여의었다. 분명 자신도 함께 차에 타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사고 직후 그때껏 살아온 기억이 송두리째 지워졌다며.
  “이상하게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좋았던 기억을 부모님이 다 가져가 버린 것같이 하얗습니다.”
  최 이병은 틈틈이 일해서 모은 돈과 봉급을 보태어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와 함께 살 전셋집을 마련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입대하기 일주일 전에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하나둘씩 떨어지던 눈송이는 어느덧 굵어져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아무렇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엄경도는 최 이병에게 어떤 위로라도 건네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이유 때문에 탈영한 게 아니었습니다.”
  최 이병의 입에선 뜻밖의 얘기가 나왔다.
  “저도 봤습니다.”
  “뭘?”
  “엄 일병님이 봤다는 것들, 말입니다.”
  엄경도는 자기도 모르게 소총을 움켜쥐었다.
  “어디서?”
  엄경도는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위병소 경계등 아래에서 눈보라를 뚫고 나타난 긴 그림자가 바닥에 드리우더니 한 무리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엄경도는 소총을 겨누며 수하를 했다. 경계등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다름 아닌 신속대응팀이었다. 여전히 탄창을 분실한 걸 모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찾고 있는 걸까. 신속대응팀은 탄약고 주변을 순찰하며 막사 쪽으로 이동했다.
  “제가 왜 중대장님을 쏘려고 했겠습니까.”
  엄경도는 혼란스러웠다. 최 이병이 봤다는 게 자신이 목격한 녀석들과 같은 부류인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근무 투입 전에 보았던 중대장의 모습은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 현실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디에서나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언제나 일어납니다.”
  최 이병은 대사를 읊듯 중얼거렸다. 엄경도는 호주머니에 있던 손난로를 꺼내어 최 이병에게 건넸다.
  “괜찮습니다.”
  엄경도는 최 이병의 방한복 주머니에 손난로를 넣어주었다.
  “가슴 쪽에 대고 있으면 한결 나아.”
  바로 그때 막사 쪽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초소에 있던 유선 송수신기가 딸깍거렸다. 감시 카메라에 탄약고 쪽으로 접근 중인 거동 수상자가 포착되었다며 경계를 강화하라는 지시가 전달되었다.
  “내가 가볼게.”
  엄경도는 최 이병에게 주위를 잘 살펴보라고 지시하고선 초소에서 내려가 탄약고 출입문으로 향했다. 탄약고 주위에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탄약고 울타리를 한 바퀴 돌고 초소로 돌아올 무렵, 엄경도는 별안간 요의를 느꼈다.
  “별일 없었지?”
  엄경도는 고가초소에 우두커니 서 있는 최 이병에게 소리쳤다.
  “네.”
  최 이병은 짧게 대답하고선 막사 쪽을 바라보았다. 엄경도는 초소 뒤 숲으로 들어가 재빨리 볼일을 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초소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떼던 순간 머리 위에서 철커덩, 하며 금속이 긁히는 소리를 들었다. 초소 위에서 최 이병이 자신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최 이병의 방탄 헬멧은 금세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엄경도는 파르르 떨고 있는 최 이병의 두 눈을 올려다보았다. 최 이병은 막사 쪽을 힐끗거렸다. 막사 쪽에서 한 무리의 녀석들이 눈길을 헤집고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엄경도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숲속에서 스르륵 눈더미가 쏟아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최 이병의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져나왔다. 숲속에서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일제히 날아올랐다.
  

  초소 뒤편 숲길을 따라 300미터 정도를 올라가면 간이 통문이 나왔다. 통문은 훈련 때가 아니면 거의 열리는 일이 없었다. 통문 오른편은 700고지로 이어지고, 왼편으로는 작은 고개 하나만 넘으면 축사와 농가가 있었다.
  엄경도는 고개를 넘으며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오간 흔적이 없는 눈 덮인 고갯길엔 자신이 달려온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대체 최 이병은 왜 나에게 공포탄을 발사한 걸까?
  엄경도는 다시 부대로 돌아갈까 싶다가도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던 최 이병의 눈빛을 생각하자 혼란스러움만 더해졌다. 만약 녀석들이 부대를 송두리째 집어삼켰다면 상급 부대에서도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증원 부대가 투입되어 부대 인근을 차단하고 진압 작전에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엄경도는 공포탄이 든 탄창을 제거하고 실탄이 든 탄창을 소총에 결합했다. 차라리 누군가 나타나서 그런 자신을 가로막고 붙들어줬으면 하고 바랐다.
  얼마나 달렸을까, 허벅지에서 경련이 일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엄경도는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낮추고 소총을 치켜들었다. 엄경도는 고개를 넘기 직전 부대가 있는 방향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이상하리만치 잠잠했다. 어느덧 푸르스름한 어둠은 걷히고 나뭇가지 사이로 힘없는 햇살이 내비쳤다. 엄경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고개 너머 마을을 향해 힘껏 내달렸다. 그곳에서 차를 구해 도시로 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마을에 다다랐을 때 엄경도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고립감을 느꼈다.
  풀숲에 숨어 있던 엄경도는 축사에서 내려오는 소형 트럭을 멈춰 세웠다가 까무러쳤다. 운전석 차장이 열리자마자 곧바로 축축한 혀가 뻗어 나와 엄경도의 목을 휘감아 당겼다. 엄경도는 허공을 향해 연거푸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놀란 녀석은 헐레벌떡 운전석에서 튕겨져나왔다.
  엄경도는 트럭을 몰고 마을을 벗어나 도로로 나오기 직전 똑똑히 보았다. 텅 빈 것처럼 고요하던 마을 어귀에 녀석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엄경도는 곧장 서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산간벽지까지 녀석들의 손아귀에 넘어갔다면 서울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엄경도는 휴대전화를 꺼내었다.
  “괜찮아?”
  미고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내 말 잘 들어.”
  엄경도는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미고에게 털어놨다.
  “난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믿기 힘들다는 거 알아. 하지만 사실이야.”
  “경도야.” 미고는 숨을 고르더니 덧붙였다. “자수해.”
  엄경도는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그럼 모든 게 끝이야.”
  “아니, 그럼 모든 게 해결될 거야.”
  “제발, 한 번만 내 얘길 믿어줘.”
  저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어쩌면 거짓으로 꾸며진 세계가 더 편안하고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엄경도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몸이 좋지 않아도 창밖으로 해가 떠오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조금씩 회복되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 않던가.
  서울 외곽 도시에 다다랐을 때 거리는 거짓말처럼 한적했다. 라디오 뉴스에서는 무장한 탈영병이 도주 중이라는 속보가 나왔다. 이어서 한 논객이 탈영병을 괴물로 만든 원인에 대해 진행자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쩐지 녀석들이 짜놓은 각본 같았다. 엄경도는 피식 헛웃음을 터트리며 멀리 서울 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위에서 거뭇한 비행 물체가 선회하며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작은 아파트 단지를 지나 상점이 늘어선 갓길에 엄경도는 트럭을 멈춰 세웠다. 교차로 건너편 검문소 앞에는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엄경도는 맥도날드나 스타벅스와 같은 간판을 보자 왠지 모를 위안을 느꼈다. 유리창 너머로 초조해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이 간간이 스쳤다. 그들의 얼굴을 보자 언뜻 또 다른 희망이 느껴지는 듯했다. 엄경도는 탄창에 남은 탄을 헤아려보고 트럭에서 내렸다. 그와 동시에 교차로 좌우측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녀석들 사이에 섞여 있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엄경도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이상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던 최 이병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도재경

1978년 함양 출생.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별 게 아니라고 말해줘요』, 공저 『여행 시절』 『소방관을 부탁해』 『전두엽 브레이커』가 있음. 허균문학작가상, 심훈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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