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낸 배수구네 집에서는 떡국과 차례 음식을 먹으며 음복술을 마시고 있었다. 집안의 어른인 배수구는 아들 삼 형제가 올리는 술을 받아마시며 얼근하게 취해가고 있었다. 배수구는 세 아들과 손자 손녀들에게 덕담을 내려주었다. 세 아들에게는 돈 잘 벌고 건강하기를, 손자 손녀에게는 어서 빨리 결혼해서 증손자 보여달라고 했다. 음식을 먹는 소리와 왁자한 웃음소리, 여기저기서 새살거리는 소리가 환한 설날 아침의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와 사촌들은 새해를 맞이하는 흐뭇하고 오붓한 축제의 기분에 빠져 있었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배수구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대선이 한 달 좀 넘게 남았다. 너희들 이번 대선에서는 투표 똑바로 해야 한다. 이번 대선은 다른 어떤 대선과는 다르다. 나라의 명이 걸린 중차대한 갈림길이란 말이다.”
  팔십 중반의 배수구는 나이에 비해 정정했다. 그 증거라도 보이려는 듯 그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술기운이 오르면 목소리는 더 커졌다. 순간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은 알고 있었다. 술이 어느 정도 거나해지면 나오는 배수구 씨의 정론이 시작된다는 것을.
  “지금 여론조사를 보면 팽팽하다. 그러나 여론조사 믿을 수 없어. 다 조작이야. 보면 알겠지만, 결과는 압도적인 차이로 이길 것이다. 그래도 맘을 놓아서는 안 돼. 너희들도 이번에는 정신 바짝 차리고 투표 똑바로 해야 해.”
  배수구는 은근히 선거운동을 하고 있었다. 오늘 모인 배수구 씨의 가족들만 해도 무려 11표였다. 배수구 부부 2, 큰아들 정수네 4, 둘째 아들 정식네 3, 막내아들 정만네 2표였다. 배수구는 아내 서산댁과 둘째 아들 정식이는 확실한 자기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큰아들과 막내아들이었다. 두 아들은 자신을 닮지 않고 서산댁을 닮아 조용하고 차분한 편이었다. 두 아들은 아버지에게 그런대로 고분고분했다. 그러나 선거 때만은 그를 배신했다. 특히 막내아들은 대놓고 그를 성토하곤 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강요하지 마세요. 민주 시민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투표할 권리가 있는 겁니다.”
  배수구는 갑자기 얼굴색이 변하면서 험한 눈초리로 막내아들을 째려보았다.
  “막내야, 내가 언제 강요했냐? 내가 꼭 집어서 누굴 찍으라고 했냐? 투표 똑바로 하라고 했을 뿐이야.”
  “그게 그거죠. 뻔한 얘기잖아요.”
  막내 정만은 평소에는 샌님 같은데 술만 들어가면 딴사람처럼 변했다. 아버지에게 그런대로 고분고분하던 사람이 사춘기 소년처럼 반항아가 되어 배수구에게 대들었다. 두 형들이 눈짓하며 만류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다. 말릴 수 없는 벽창호 배수구의 일갈이 터져나왔다.
  “뻔하다니. 뭐가 뻔하다는 게야. 이번 대선은 어떤 대선하고도 다르다는 거야. 종북 빨갱이 정권을 심판하는 선거란 말이다.”
  배수구는 씹던 밥알을 튕겨내며 흥분했다. 배수구를 제외한 10명의 선거권자는 서로 눈치를 보며 꾸역꾸역 차례 음식을 삼킬 뿐 말이 없었다. 흐뭇하고 오붓했던 설날 아침의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일찌감치 사라지고 없었다. 거기다가 정만의 말대답으로 분위기는 더 얼어붙고 말았다.
  “아버지, 답답하시네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아직도 빨갱이 몰이예요.”
  이쯤 되면 갈 데까지 다 간 것이다. 거실은 아이들 놀이 말대로 얼음땡이 되고 만다. 눈만은 모두 배수구에게 쏠려 있다. 이윽고 늘 듣던 배수구의 일장 연설이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밥술이나마 먹고,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 다 누구 덕인 줄 아냐? 박정희였어. 지금은 심복에게 총 맞아 죽은 독재자로 욕먹고 있지만, 그래도 산업화로 우리나라를 경제 대국으로 이끈 영도자였어.”
  배수구는 어느덧 옛날을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대통령의 수출목표가 걸린 현수막을 보며 살아왔다. 전태일이가 제 몸에 불붙이고 죽을 때, 나도 월남에서 목숨 걸고 싸웠다. 너희들이 민주화 투쟁할 때, 나는 뜨거운 사막에서 모래 먼지를 먹으며 외화를 벌어들였다. 지금 10대 경제 대국의 기초는 박 대통령과 우리 세대들이 이룬 것이라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이다.”
  자못 영화 〈국제시장〉의 황정민 역이 떠오르는 연설이었다. 독일 광부 경력 빼고는 비슷했다. 한동안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누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약사를 듣고 있는 아들과 손자 손녀들은 눈치를 보며 가벼운 하품을 했다.
  “아버지는 군부 독재자로 총 맞아 죽고, 딸은 국정농단으로 탄핵 되어 감옥에 있는데, 아직도 박통 타령입니까.”
  큰일 났구나 싶어 아연실색하며 가족들의 얼굴빛이 변하기도 전에 배수구가 술이 튀어 오를 만큼 술잔을 내려치며 일갈했다.
  “저런 빨갱이 새끼, 찢어진 입이라고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알아. 지금 누구를 능욕하고 있는 거야.”
  마침내 배수구의 본색이 드러났다. 그뿐만 아니라 흔하게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명절이나 선거, 정치적 이슈로 떠들썩할 때 가족 모임에서 반복되던 상황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의 주요 원인은 술과 정치 성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배수구와 막내아들 정만의 술버릇은 비슷했다. 주량이 일정량을 넘어서면 회까닥한다는 것이었다. 배수구가 성격 그대로 더 호탕하고 호기롭고 저돌적으로 변한다면 정만은 평소 성격과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었다. 온순하고 조용하던 사람이 공격적인 사람으로 돌변해서 깐죽거렸다. 특히 정치토론이 벌어지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끈질기게 버텼다. 학생 시절부터 노동운동을 하던 정만은 여전히 투사의 열정이 살아 넘치고 있었다.
  배수구는 정만의 표현대로 수구 꼴통이었다. 태극기 부대로 각종 시위에 앞장섰다. 그러나 태극기 부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나돌자 태극기 대신 주먹을 휘두르는 야당 대선 후보를 따라다니며 복싱 글러브를 끼고 유세장을 누볐다. 그의 글러브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그려져 있었다. 어느 날엔가는 유세 중에 몸싸움이 일어나 실제로 글러브를 끼고 치고받은 적도 있었다. 배수구는 무용담처럼 그때 상황을 장황하게 떠벌렸다. 이때도 정만은 아버지와 대선후보를 싸잡아 비난했다.
  “어떻게 일국의 대통령 후보가 복싱 글러브를 끼고 주먹을 휘두른단 말입니까.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창피한 광경이에요. 세상에 대통령 후보 유세장에서 글러브를 끼고 주먹을 휘두르고, 그 모습을 보고 환호하는 꼴통들. 창피한 줄 아세요. 칼을 휘두르지 않은 것이 다행이네요.”
  배수구는 험악한 눈빛으로 아들을 쏘아보며 금방이라도 달려들어 때려눕히고 싶은 듯했다.
  “바로 너 같은 놈 때려잡자는 거야. 너 같은 종북 빨갱이들을 청소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그리고 입만 살아서 조잘대는 놈보다 몸으로 보여주겠다는 자세란 말이다. 뭘 알고 지껄여 이놈아.”
  정만은 이날도 역시 얼근하게 취해 있었다.
  “무식해서 뭐 아는 게 있어야 말을 하죠. 할 말이 없으니까, 호통이나 치고 주먹질이나 하는 거죠.”
  “입만 열면 거짓에 선동만 하는 전과자보다는 낫지.”
  “입만 열면 무식이 탄로 나서 머리만 주억거리는 배신자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죠.”
  둘은 티격태격하면서 서로 조롱하고 비난했다. 논리정연한 토론은 제쳐두고 두 후보 중 누가 더 좋다는 것이 아니라, 누가 더 나쁜지만 꼬집어 말하고 있었다. 2022대선의 특징이었다. 비전을 제시하고 정견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의 비리만 캐내 폭로하는 전형적인 네거티브 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수준 떨어지는 추악한 대선이었다. 질은 낮은데 열기는 전에 없이 뜨거워 어디서나 장외 대선 토론이 벌어졌다. 국론이 분열되어 서로 물어뜯고 할퀴며 곤두서 있었다. 집에서 직장에서 술집에서 공원에서 신문 방송 인터넷 할 것 없이 총력전을 벌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별 관련이 없던 대선후보를 근거 없는 원한과 증오로 적대시했다. 언제 어디서 자신에게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지만 사무친 원한으로 적개심이 넘쳐나고 있었다.
  큰아들 정수는 아버지와 막내의 언쟁을 지켜보면서 한편으로는 짜증이 나고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는 삼 형제를 대하는 태도가 다 달랐다. 큰아들 정수에게는 정중하게 둘째에게는 무덤덤하게 막내에게는 흉허물없이 대했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막내는 오냐오냐하면서 키웠고, 막내도 아버지를 무서워하지 않고 허물없이 지냈다. 그래서인지 둘은 술만 마시면 서로 지지 않고 자기주장을 펼쳤다. 그만큼 소통이랄까, 언로가 그런대로 열려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막내에게만 쌍소리를 하고 막내는 아버지에게 스스럼없이 대들었다. 그런 상황이 선거철만 되면 그 도가 지나쳐 날카롭게 각을 세웠다.
  두 사람의 논쟁은 어느 선거 때보다 치열했다. 전에 없이 히스테릭하고 적대적이었다. 후보도 유권자도 두 부자와 비슷했다. 조롱하고 모욕하고 물어뜯고 할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정수는 정치와 선거에 염증을 느꼈다. 지겨웠다. 금방 나라가 망할 것처럼 나라를 걱정하고 누고보다도 더 나라를 사랑하고 근심하는 애국자가 된 듯이 언론매체에서 주워들은 정론을 되풀이하는 정치적 인간들이 지겨웠다. 정수는 아버지가 보수에서 극우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아왔다.
  박통이 서거하자 충격으로 밥맛을 잃을 정도였다. 12·12 군사 반란을 박통의 복수전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고 규정했다. 김대중 노무현 10년 정권을 암흑시대로 치부하고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암흑시대에서 부활한 시대라고 환호작약했다.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 원한에 사무쳐 태극기 부대로 활약했다. 대한민국의 수호신으로 떠받들던 박통의 딸을 탄핵하고 정권을 잡은 문재인은 종북 빨갱이의 화신으로 증오하고 저주했다. 이런 문재인 정권을 심판하려는 이번 대선이야말로 아버지 배수구의 원한을 풀어줄 절체절명의 기회였던 것이었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대선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온 나라가 이전투구의 정치판에 휩쓸리고 있었다. 배수구는 동분서주했다. 유세장 따라다니며 응원하랴 시위하랴 바빴다. 유세장이나 시위장으로 갈 때 배수구의 차림새는 일본 전국시대 전사를 방불케 했다. 각종 배지와 해적선 깃발처럼 총칼 무늬로 장식된 모표를 붙인 모자에 검은 색안경을 썼다. 짊어진 배낭 뒤에는 붉은색 글러브가 매달려 있었고, 배낭에 꽂혀 어깨 위로 치솟은 태극기와 성조기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깃발을 꽂고 돌진하는 사무라이의 형상과 비슷했다. 어찌 보면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독재자나 파시스트 친위대 같은 혐오감을 주기도 했다.
  어느 시대나 혼란기에는 극우 친위대가 성하게 마련이다. 히틀러 유겐트,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 부대, 장개석의 남의사, 이승만의 서북청년단과 같은 하수인들이 판을 친다. 친위대는 아니라도 무조건적인 지지와 성원으로 반대파를 증오하고 적대시하는 세력이 친위대의 뒤를 따른다. 그들을 통틀어 극우세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배수구는 친위대는 아니라도 보수 피라미드를 지탱해주는 단단한 지반 같은 극우세력이었다.
  아버지 배수구를 이해하는 정수도 아버지의 그런 차림새에는 학을 뗐다. 너무 너절하고 비루해 보였다.
  “아버지, 유세도 좋고 시위도 좋지만, 그 차림이 너무 튀지 않나요? 나이에 걸맞게 좀 점잖게 차리고 다니세요.”
  “모르는 소리. 싸움에는 호전적인 기상과 기백이 필요한 법이다. 깃발과 휘장, 군복과 군가가 왜 필요하겠냐? 다 정신적인 무장이 앞서야 한다는 말이다. 적을 치기 위해서는 차림새부터 단단하게 무장해야 하는 법이다. 지금 대선 정국은 엄연한 전쟁이다.”
  제법 그럴듯한 논리를 펴는 배수구는 야당 후보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선을 넘어 그를 지키기 위한 개가 되어도 괜찮다는 의지가 넘쳐나고 있었다. 정수는 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선거 유세도 좋고 응원도 좋지만, 몸조심하세요. 무리하지 마세요. 아버지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배수구는 야당 후보가 유세하는 곳이면 불원천리 마다하지 않고 따라다녔다. 어디서 누구에게 연락받는지는 몰라도 그의 수첩에는 야당 후보의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낌새로는 교통비와 식비 정도는 지원받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돈 때문에 따라다니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는 야당 후보를 지키고 응원하고 환호하며 유세장의 열기에 취하는 광팬이나 광신도 같은 모습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수는 아버지와 동생 정만의 정치논쟁에서 항상 중립을 지켜왔다. 이번 대선 논쟁에서도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진짜 속마음은 늘 동생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동생처럼 과격한 진보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시위에도 참여하고, 돌과 화염병도 던져보았지만, 동생처럼 투사는 아니었다. 그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대 민주화를 열망하던 평범한 청년이었을 뿐이었다.
  그의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준비하는 취준생이었다. 명문대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대학을 나온 지 두 해가 지났는데 아직도 취준생이었다. 너무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준비하라고 일렀지만 불안했다. 아들은 힘든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었지만, 돈 문제만큼은 어쩔 수 없어 아내에게 손을 벌리는 모양이었다. 학생 때야 당당하게 학자금과 용돈을 받아갔지만, 졸업 후에는 부모에게 돈 받아가는 것이 수치스러웠던지 힘들어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통학하던 대로 학원을 오가더니, 그것도 면목이 안 서는지 고시촌에서 방을 얻어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보 상원이, 어떡하면 좋아?”
  아내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물어왔다. 왜 그래,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아내는 땅이 꺼지듯 한숨을 내쉬었다.
  “상원이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
  “왜, 자꾸 묻기만 하고 말을 안 해. 답답하게.”
  “걔가 지금 선거운동을 하고 있답디다.”
  “아니, 걔가 왜 선거운동을 해. 어디서 누구 선거운동을 해.”
  정수 씨는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혀를 차면서 노골적으로 정수 씨를 흘겨보았다.
  “상원이는 내 아들이고, 당신 아들이 아닌가? 어째서 나만 아들을 걱정하고 나 혼자서만 아들을 챙겨야 하냐고.”
  아들이 돈을 타가는 것도, 근황을 전하는 것도, 힘든 내색도 모두 아내를 통해서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아들은 제 어미하고만 소통했다. 정수는 아들은 다 그러려니 했다. 그게 원래 우리나라 전통이 아니던가. 아버지는 가풍을 세우고 엄하게 자식을 다스리고, 어머니는 자애롭게 자식을 보살핀다는 것은 아직도 집단 무의식처럼 남아 있는 기풍이었다.
  아내에게서 아들의 근황을 듣고서야 그동안 아들에게 무심했다는 자책감이 밀려왔다. 아내에게서 들은 이 시대 청춘의 자화상을 본 것 같았다. 취업 문은 점점 좁아지고, 쌓아야 할 스펙은 늘어나고, 스펙을 쌓기 위한 비용은 늘어나는데 돈이 없다. 그래서 취업 준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취업준비생이 ‘취준준생’이라고 불린다는 것도 알았다. ‘무전무업’이라는 말은 스펙을 쌓기 위해 들어가는 돈이 없으면 취직을 할 수 없다는 신조어라고 했다.
  “아니, 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딴짓이야. 내가 언제 그놈에게 아르바이트하라고 했어. 생활비에 학원비는 당신이 다 보내주고 있잖아?”
  정수는 아내를 향해 볼멘소리로 다그쳤으나 그에게 돌아온 말은 간단했다.
  “왜 내게 화를 내.”
  정수 부부는 아들을 주제로 대판 싸웠다. 서로 책임을 묻고, 비난했다. 아들이 태어난 날 술 마시고 병원에 뒤늦게 들여다본 것부터 시작해서 아들이 취준준생이 되어 선거운동을 하게 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잘잘못을 따졌다. 서로 부인하고, 거짓말이라고, 기억이 안 난다고 시치미를 뗐다.
  외출했다가 귀가한 서산댁은 자신이 집에 들어온 것도 모르고 싸우는 아들 부부의 악에 받친 언쟁을 고스란히 들었다. 들어보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어떻게 귀한 손자를 놓고 저러나 싶어 괘씸했다. 서산댁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며 헛기침이 나왔다. 그제야 기척을 눈치챈 두 사람은 몰래 뭔가를 먹다 들킨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어쩜 그리 똑같댜. 어제 테레비서 대선 토론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하고 똑같어. 드러눠 침 뱉기고, 즈이 똥 구린지 모르는 인간들여.”
  그날 저녁 공교롭게도 정수 씨의 아들이 집에 들렀다. 서산댁에게서 지나가는 말로 손자의 근황을 알게 된 배수구는 아들 내외와 손자를 불러 앉혔다. 비상대책위원회라도 열린 듯한 분위기였다. 배수구는 무서운 눈으로 손자를 노려보며 다그쳤다.
  “너, 똑바로 말해야 한다. 너 어느 캠프에서 일하고 있는 거냐?”
  “동작구 민주당 선거운동 본부요.”
  순간 배수구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는 손자의 멱살을 잡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고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배수구는 험악한 표정으로 손자를 노려보며 일갈했다.
  “이런 숙맥을 봤나. 이놈 이거 제정신이 아니구만. 왜, 하필이면 민주당 선거운동여. 엉!”
  배수구의 호통과 함께 폭발하듯 튀겨나가는 침방울이 손자의 얼굴로 튀었다.
  “상원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야단여. 아르바튼가 뭔가 하는 디서 돈만 받으먼 되는 거지, 당이 뭐가 중혀.”
  배수구는 부릅뜬 눈으로 서산댁을 흘겨보고는 다시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군자는 자리를 가려 앉고, 백로는 까마귀 노는 데 가지 말고, 똥은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했다. 그리고 누울 자리를 봐가며 다리를 뻗으라고 했다. 그런데 넌 왜 그런 곳에서 얼쩡거리느냔 말이다. 이놈아. 너, 언제부터 빨간 물이 들었냐? 엉!”
  “빨가키는 국짐당이 더 빨가턴디. 네코다이에 수건에 잠바까지 다 빨가터구먼.”
  서산댁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손자가 풋 하고 웃음을 참다가 킥킥댔다. 정수 부부도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배수구 혼자만 험악한 표정으로 서산댁을 쏘아보고 있었다.
  웃음을 그친 상원이가 금방 침울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대선 정국은 우리 같은 취준생에게는 대목이에요. 우리는 그런 거 안 가려요.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고요. 돈만 받으면 그만이에요.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어요. 우리 같은 취준생에게는 다 그놈이 그놈이에요. 우리는 누구도 믿지 않아요. 미래가 안 보여요.”
  호통치고 킥킥대던 분위기는 착 가라앉고 주위가 고요해졌다. 누구도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정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 현재 아들의 정체성이 어떤지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불안하고 답답했다. 지금 아들 나이 때, 정수는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화된 문민정부가 들어서기를 염원하며 정의감에 불탔었다. 정수 세대가 이룬 민주화된 세상에서 아들 세대는 젊은이의 순수한 기상을 잃어버리고 천박한 자본시장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배수구는 손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더니 끙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빨갱이 정권이 들어서면 이 나라는 망한다.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고 중국이고 러시아야. 우리는 오로지 우리 우방인 미국과 손잡고 빨갱이 나라들을 때려잡아야 한다, 이 말이다.”
  배수구는 말을 마치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내일 새벽에 광주에 내려갈 참이라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였다. 배수구는 야당 후보의 유세장을 따라 이동했다.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광주로 가게 되었다. 야당 후보가 광주에서 유세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긴장했다. 무슨 일이 터질지 알 수 없었다. 배수구에게 호남은 위험한 곳이었다. 배수구는 출정하는 장정처럼 늠름한 기세로 광주로 향했다.
  광주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유세장은 송정매일시장이었다. 시장으로 통하는 길가는 빨간 점퍼를 입은 선거운동원들이 ‘국민이 키운 윤석열’이라고 견고딕체로 쓰인 패널을 잇대어 방벽을 치고 서 있었다. 주변에는 경찰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고, 역시 빨간 점퍼를 입은 지지자들이 ‘정권교체’를 외치며 후보를 뒤따르고 있었다. 배수구는 빨간 점퍼를 입은 무리 뒤를 따르면서 함께 구호를 외쳤다. 그는 광주를 자신의 외침으로 울리기라도 할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쳤다. 두 팔을 들어 올리며 ‘윤석열 대통령, 정권교체’를 피를 토하듯 외쳐댔다. 시장 상인들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후보와 지지자들을 짖어대는 강아지 보듯 했다.
  배수구는 바싹 긴장했지만, 그가 우려했던 소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의외로 조용하고 냉소적이었다. 다른 대도시에는 다 있는 복합쇼핑몰이 광주만 없다. 호남은 민주당만 찍어서 발전이 안 된다는 둥 헛소리 같은 말을 쏟아내자 싸늘한 눈빛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다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청년들이 ‘무당공화국, 검찰공화국 결사반대’ 또는 ‘무식한 전쟁광 물러나라’ 등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후보가 유세를 마치고 시장을 빠져나오면서 길가에 서 있는 상인들에게 악수를 청했지만, 손을 잡아주는 이가 없었다. 배수구는 혈압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무덤덤하고 싸늘하고 조용한 대응이 얄미움을 넘어 괘씸하기까지 했다.
  눈바람이 거세졌다. 배수구는 오한을 느꼈다. 긴장이 풀어지면서 다리에 힘이 풀리고 등이 선뜩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배수구는 자신이 너무 무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휭 하고 비어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무력감이 찾아왔다. 그는 전주로 이동하는 유세단을 따라가지 못하고 혼자 송정역으로 향했다.
  열차를 타고 영등포에서 내려 주안역까지 전철로, 주안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오는 동안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배수구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지듯 자리에 누웠다. 잠자리에 드러누운 게 아니라 앓아누운 것이었다.
  “아이고. 팔십 노인네가 홍길동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더니. 내 이럴 줄 알았다니께.”
  서산댁은 혀를 찼다. 밤새도록 고열로 끙끙 앓던 그는 이튿날 아침 간신히 아들 내외의 부축을 받아 가까운 단골 동네 병원으로 갔다.
  “너무 무리하셨어. 보건소에 가서 코로나 검사부터 받아야겠네요.”
  배수구가 코로나19 판정을 받고 격리 수용되고 퇴원할 때까지 열흘 동안 지지율 조사 결과는 엎치락뒤치락 요동쳤다. 양 후보 부인들의 비리가 터져 대국민 사과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고, 온갖 비리와 추문에 따른 거짓 뉴스와 혐오와 적개심으로 가득한 유튜버들이 병균을 퍼뜨리듯 막말을 내쏟았다. 역대급으로 너절하고 치졸한 선거판이었다.
  배수구가 앓아누워 있는 동안 정만은 오랜만에 대학 친구들을 만났다. 정만을 포함해 네 사람이 만났다. 술기운이 거나해지자 자연스럽게 대선으로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학창 시절에는 죽이 맞아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었지만, 졸업 이후로 각자 달라진 삶의 행로로 인해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길을 걷다 보면 보이는 것도, 접하는 것도, 닥치는 것도 다른 법이다.
  그날도 그랬다.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도 달랐다. 2대 2로 팽팽하게 패가 갈린 네 사람은 언제부터 그랬나 싶게 서로를 물어뜯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상황이었다. 예전부터 서로 기질이나 성향에 대해서 대충 파악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극렬하게 패가 갈려 언쟁하기는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조심하면서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점잖게 시작되었다.
  “요즘 대선, 참 가관이야. 정견이나 정론은 없고, 막말이 판치고 있어.”
  “대책 없는 포퓰리즘 정책은 어떻고.”
  “외교나 안보에 대한 안목도 없이 생각나는 대로 내뱉고 있어.”
  “실익외교에 친북 정책 펴서 얻은 게 뭐 있어.”
  투수가 공을 던지면 타자가 치고, 스파이크를 때리면 블로킹하듯 주고받는 난상토론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서로 치고받는 격투기처럼 치열한 언쟁이 벌어졌다. 네 친구는 술기운이 돌아 불콰해진 얼굴로 핏대를 올리며 양 후보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죄인 잡아다 족치는 짓만 하던 사람이 무슨 정치를 한다고.”
  “전과에 개발 특혜 비리에 의혹이 넘치는 인사가 대통령 후보라니.”
  “멧돼지 상판에 야비한 인간.”
  “째진 눈으로는 찢어진 것만 보이는 거야.”
  “그 여자 말이야. 꼭 무당 같잖아? 거기다가 경력 위조에 논문 표절까지 끔찍해.”
  “그 여자는 어떻고. 법인카드 제 것처럼 쓰고, 공무원을 하수인처럼 부리고, 알 만하지.”
  후보는 물론 후보 부인까지 물고 늘어지며 주워들은 말들을 되쏟아내고 있었다. 더 나가서 가족 추문, 성격, 외모까지 들춰내며 양 후보를 비하하는 말들이 침방울과 함께 터져나왔다. 정만은 마침내 술기운에 꼭지가 돌았다.
  “니들 참 많이 변했네. 돈 좀 벌고 먹고살 만하니 배에 기름만 낀 게 아니라 눈하고 머리에도 기름 덩이가 꽉 찼구나.”
  정만은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두 친구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두 친구 중 한 명은 건설자재를 납품하는 회사의 대표이고, 한 명은 학원 강사였다. 반면 정만은 건축기사였고, 정만과 같은 후보를 지지하는 친구는 남동공단에서 주방기기를 생산하는 공장을 갖고 있었다.
  “야, 배정만. 너 취했구나. 그 술버릇은 여전하고. 우리가 기름이 끼었다면, 너는 안개가 끼었냐? 아직도 앞뒤 분간 못하고.”
  벌떡 일어나려는 정만을 잡아 앉히고 공단 사장이 일갈했다.
  “야, 구태연. 말 좀 가려서 해. 앞뒤를 분간 못한다니? 네가 말하는 앞뒤라는 게, 뭔 뜻이냐?”
  그러자 학원 강사가 나섰다.
  “몰라서 물어. 세월 가고 나이 들면 거기에 맞게 적응하고 변해가야 하는 거야. 용불용설도 모르냐. 니들은 어째서 그냥 그대로냐?”
  이제는 서로 다투어 두 팔로 전후좌우를 제지하며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토해내려고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 잘났어. 정신 차려. 희망이 없네. 제정신이 아냐. 개돼지 같은 놈들. 이 새끼들 정말 답이 없네. 어느새 그들은 후보와 상대방을 싸잡아 비난하고 성토했다. 술에 취해 오간 말들은 토사물이 되어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차림새나 눈빛이 만만치 않은 여자애였다.
  “아이, 씨발 술맛 떨어지네. 그놈의 대선 얘기 때려치우라고요.”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새파란 이십 대들이었다. 남자 3명에 여자가 둘이었다.
  그중 덩치가 산만 한 남자애가 정만네 술자리를 흘겨보았다. 누가 먼저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얼마 후에 술집은 난장판이 되었다. 치고받고, 와장창 부서지고, 나뒹굴었다. 얻어터지고 나뒹군 이들은 정만과 그 친구들이었다. 정만은 여자애가 휘두른 소주병에 머리를 맞았다. 경찰이 출동하고 고소 고발과 합의 과정을 기술해서 무엇하랴. 정만에게는 회한과 굴욕의 과정이었을 뿐이었다.
  정수는 아버지와 동생 정만의 병원치레 과정을 듣고 착잡했다. 아버지는 선거운동으로 무리해서 입원했고, 동생은 선거 논쟁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것이다. 정수는 이놈의 대선이 어서 빨리 지나기를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럽고 치사하고 뻔뻔하고, 내가 곧 그들인 것처럼, 휩쓸려서 나도 그들인 것처럼 분노하고 증오했던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원했다. 한마디로 지겨웠다. 대선 피로 증상이었다.
  사전선거 열풍과 선거관리 부실, 지지율 3위 후보의 통합 선언에 따라 선거판은 요동쳤다. 배수구는 휠체어를 대여해서 서산댁의 부축을 받아 사전 투표했다. 배정만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사전 투표했다.
  드디어 본 투표가 끝나고 배수구 집에는 예전대로 온 가족이 한데 모였다. 그것은 배수구의 강력한 의지의 발로이기도 했다. 이런 날은 가족이 한데 모여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날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배수구의 퇴원을 맞아 문안 인사 겸 모인 자리이기도 했다. 머리 붕대를 푼 정만도 퇴원한 아버지 문안차 참석했다.
  거실은 진격의 나팔 소리가 울리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 넘치고 있었다. 초읽기가 시작되고 사전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배수구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르는 자세로 두 손을 치켜들었으나 서산댁의 제지로 도로 자리에 앉더니 숨을 헐떡이면서 중얼거렸다.
  “간철수가 아니라, 이룰 성, 성철수여. 갑자기 나타나서 이리저리 헤매더니 드디어 중한 일을 해냈구먼.”
  배수구는 코로나19 병상에서 꿋꿋하게 헤치고 나온 전사다운 의기양양함까지 더해 숙연한 모습으로 말을 꺼냈다.
  “내가 죽다 살아나서 오늘 이 역사적인 개표를 볼 수 있다는 게 감개무량할 뿐이다. 니들 잘 봐라.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인 거다.”
  배수구는 의기양양했다. 그간의 예를 보아도 출구조사 결과는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불안했다. 아무리 초반이라지만, 여당 후보가 앞서가는 것이 끔찍했다. 나중에 역전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슬아슬한 기분이었다. 배수구는 가슴이 벌떡거렸다. 남들은 무식하고 품위 없고 야비하고 막말하는 돼지라고 욕해도 그에게는 염원인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는 후보였다. 박통을 탄핵하고, 친북 친중의 빨갱이 옹호 정책을 폈던 정권을 심판하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야 했다. 이제 곧 정권이 교체되는 순간이 와야 할 텐데, 아직도 야당 후보가 앞서고 있었다. 배수구는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정만은 암담했다. 이제 결과는 뻔했다. 정권이 교체되면 여당이 추진했던 정책은 쓰레기통에 처박히고, 정치보복과 패거리 정치가 판을 칠 것이었다. 앞으로 5년 동안 그 꼴을 볼 생각을 하니 벌써 스트레스가 밀려왔다. 이제부터 텔레비전 뉴스에 저 얼굴이 보이면 채널을 돌려야 할 것이었다.
  정수는 창백해진 얼굴로 땀을 흘리며 힘들어하는 배수구를 발견했다. 모두 개표방송에 눈을 박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배수구의 신상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정수가 벌떡 일어나 아버지를 부축할 때야 가족들도 배수구의 심상찮은 상황을 알아차렸다. 배수구는 응급실로 실려 갔다. 뇌졸중 초기 증상이라 했다. 그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병원 대기실은 물론 응급실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도 개표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이제 야당 후보가 역전하여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었다. 종합병원 대기실에 몰려 있던 환자와 가족들은 모두 개표방송에 빨려들어 자신이 환자라는 것도, 환자 가족이라는 것도 잊은 것처럼 보였다. 정수는 거기 모인 사람들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누군가는 안도하고, 누군가는 절망스러워서 내뱉는 한숨 소리였다. 정수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안종수

2004년 『작가들』로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결국 로맨스 빠빠를 못 봤다』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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