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십 분

 

  눈을 뜨니 깜깜했다. 단번에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침대 옆으로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켰다. 아담한 호텔 방이 밝아졌다. 잠시 눕는다는 게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외투도 벗지 않고 이불 위에 웅크린 채였다. 창가로 가 커튼을 젖혔다. 역 주변으로 사람들이 바삐 오가는 게 내려다보였다. 새해였지만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이 형형색색 남아서인지 추위 속에서도 거리가 활기차 보였다. 평일 저녁 시간대가 원래 어떤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이곳이 히로시마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히로시마 시내에 있는 비즈니스호텔에 홀로인 것도. 칠십 평생 처음으로 하는 혼자만의 여행이었다. 아니 여행이라는 말은 적합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따자니아를 만나러 왔다.
  따자니아는 히로시마로 자기를 보러 오라고 했다. 머지않아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여기 한국 사람들 많이 와요, 언니도 여행 삼아 한번 와요. 남편을 돌보는 내가 며칠씩 집을 비울 수 없다는 걸 따자니아는 잘 알았다. 히로시마로 떠나오기 전 입주 간병인으로 우리 집에서 생활하며 남편을 돌봤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근래에는 통화할 때마다 그래도 한번 오라고 했다. 그 말에는 자기가 고향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영영 다시 볼 수 없으리라는 예감이 담겼을 거였다. 따자니아는 코로나19가 있던 지난 몇 년간 가족을 보지 못했다. 그사이 50대의 건장하고 바지런한 고려인 여자는 예순 살이 되었다. 따자니아도 할머니 다 됐네. 내가 건네는 농담에 따자니아는 언니 만나기 전부터 나는 이미 라리사 할머니였어요, 하며 실제로 본 적 없는 손녀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휴대폰을 만져 화면을 깨웠다. 따자니아에게는 아직 회신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나? 간병 업무는 끝났을 시간이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히로시마에 도착했다고, 여행사에서 예약해준 호텔로 가 있겠다고 문자를 보냈다. 부재중 전화가 찍혔을 테니 곧 연락해올 것이었다. 한편으론 따자니아가 사는 곳을 알아둘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제야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이 일하는 처지에 부담이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내가 히로시마에 오리라는 걸 나조차 상상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나를 부추겼을까. 아니라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싶을 만큼 엉뚱하고 무모한 결정이었다.

  어제, 남편 면회를 마치고 병원 셔틀버스를 탔다. 왕십리역에 내렸는데 느닷없이 여행사 간판이 눈에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다섯 평이나 될까 싶은 공간에 책상 두어 개가 놓였고 직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다가가 지인을 만나러 히로시마에 가야 하니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해달라고 말했다. 혼자 가시는 거예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요? 내일이라도, 가능하면 빨리요. 급하시구나. 혼자 가시는 거고. 잠시만요. 처음 본 어린 직원은 모니터로 시선을 옮기면서도 계속해 내게 말을 걸며 안심시켰다. 비행기 타고 두 시간이면 도착하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곳곳에 한국어 표기도 잘 되어 있고. 제가 알려드리는 대로 똑같이 따라 하시면 돼요. 직원이 프린트한 몇 장의 종이를 차례로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집에 가서 꼭 여권 사진 찍어 보내세요. 입금도 바로 하셔야 내일 비행기 타실 수 있어요.
  여행사 직원 말대로 히로시마공항은 작았다. 인천공항에 비하면 헷갈릴 게 없을 정도로 동선이 단조로웠다. 지문 인식을 여러 번 하긴 했지만 입국 심사도 빨리 끝났다. 공항 밖으로 나가니 플랫폼에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었다. 히로시마 버스센터로 가는 리무진 버스 노선이냐고 재차 물어보고 늘어선 줄 끄트머리에 가 섰다. 십 분쯤 기다리니 버스가 왔다. 안내하는 노 기사가 친절하게 가방을 실어주었다. 목례를 하니 그 역시 따라 고개를 숙였다. 별거 아닌 인사였지만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버스에 올라 중간쯤 자리를 잡았다. 곧바로 버스가 출발했고, 버스센터까지는 앞으로 오십 분이 소요된다는 한국어 방송이 나왔다. 차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국의 시골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이 이어졌다. 어쩐지 경기도 어디쯤을 지나는 듯했다. 직원은 내게 무조건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을 따라가라고 했다. 리무진 버스 종점에서 길만 건너면 바로 예약한 호텔이니, 사람들 다 내릴 때까지 앉아 있다 마지막으로 내리라고. 신기할 정도로 직원의 말은 모두 맞아떨어졌다. 별 탈 없이 객실 키를 받아 어둑한 방에 들어서자마자 한순간 피로가 몰려들었다.
  까무룩 잠들었다 깨니 하루가 가버렸다. 한 거라곤 아침에 집에서 나와 이곳 호텔에 도착한 거밖에 없었다. 점심을 걸러서인지 허기가 졌다. 어딜 가서 뭘 먹을 수 있을까. 따자니아가 온다면 모를까 도무지 호텔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커피포트에 생수를 붓고 버튼을 눌렀다. 티백을 우려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 좀 나을까 싶었다. 문가에 세워둔 캐리어 가방을 열어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내가 떠나온 걸 아무도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묘하게 서운한 기분이 들었다. 몰래 왔다고 하기에는 어디 말할 데가 없었다. 아니 누구라도 알면 미쳤느냐고 하려나? 입원한 남편은 어쩌고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고? 나는 오늘 처음으로 남편 면회를 가지 않았다. 남편은 한 달이 넘도록 중환자실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매일 병원에 출근하듯 남편을 보러 갔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한 뒤로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그래도 정해진 일과는 위안이 되었다. 정해진 대로만 하면 되니까. 버거운 건 늘 갑작스럽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오전 11시 30분부터 40분까지 면회는 하루에 한 번, 딱 십 분간 허용되었다. 면회하는 모든 사람은 방명록에 이름, 전화번호, 환자와의 관계를 써야 했다. 마스크를 끼고 문가에 비치해둔 소독제로 손을 닦았다. 면회자 변경은 두 사람에 한했다. 여러 명이 와도 두 명만 번갈아 중환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오 분 정도씩 나눠서 면회 시간을 사용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남편을 면회 올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십 분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건네주는 목걸이 명찰을 잘 보이게 목에 걸었다. 명찰에는 환자 이름 대신 침대 번호가 크게 쓰여 있었다. 침대 4.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간호데스크를 기준으로 좌측으로 끝까지 들어가면 맨 안쪽 코너에 있었다. 일렬로 놓인 침대와 달리, 두 면이 투명 유리 칸막이로 막혔다. 고열과 호흡 곤란으로 이송된 남편은 염증 수치가 높았다. 음압병실에서 했던 것처럼 비닐 옷과 비닐장갑을 착용해야 가까이 갈 수 있었다. 남편은 알 수 없는 장치에 연결된 선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채였다. 이봐요, 눈 좀 떠봐요. 나 왔어요.
  반응을 기다릴 틈 없이 물티슈를 뽑아 얼굴을 닦았다. 씻지 못해 몰골이 엉망이었다. 자세를 자주 바꾸지 못해 욕창도 심해졌고, 기도삽관을 한 채 입을 벌리고 있어 건조한 입술이 터지고 입안도 바싹 말랐다. 물 없이 쓰는 샴푸로 머리를 손질해주고, 가지고 간 손톱 가위로 코털도 정리해주었다. 손가락 발가락 사이사이에서 귓속까지 깨끗하게 닦아주며 상처가 생긴 곳이 더 없나 살폈다. 손가방에서 바셀린을 꺼내 면봉에 묻혀 입술에 발랐다. 로션을 발라 반들거리는 얼굴이 한결 상태가 좋아 보였다.
  면회 초기에는 계속 큰 소리로 부르며 깨우려 애썼다. 그러면 남편이 잠시 눈을 떠 나를 쳐다보았다.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니,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았다. 눈물을 닦아주며 고생 많이 했다고, 수고했다고, 부어오른 손가락을 매만졌다. 하지만 그건 혼미 상태에서 보이는 무의식적인 반응일 뿐이었다. 나를 알아본 것 같다는 것도 착각이었다. 남편은 곧바로 눈을 감았다. 남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었다. 이렇게 마주 볼 수 있는 날은 얼마나 될까. 손을 잡을 날은? 눈물을 닦아줄 날은? 때때로 이런 시간이 길지 않을 것 같다는 허약한 생각이 들었다.
  주변 침대를 둘러보았다. 환자가 몇 명 새로 온 것도 같았다. 환자는 계속 바뀌고 낯선 얼굴의 보호자들과 면회객들이 새롭게 등장해 중환자실의 상황을 바꿨다. 응급중환자실은 말 그대로 위급한 환자들만 입원한 곳이었다. 중환자실을 나가는 건 결국 딱 두 가지 경우였다. 위급 상황이 나아져 일반병실로 가거나 혹은 악화해 사망에 이르는 것. 남편 옆자리의 환자도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환자가 완강히 거부해도 살려면 어쩔 수 없었다. 다리 한 짝 없으면 어때요, 살아 있는 게 중하지. 부인의 목소리가 내게로 전해졌다.
  한 달이 다 되어 가니 낯익은 사람들이 생겼다. 초조하게 면회 시간을 기다리면서도 서로 눈인사를 나누거나 작은 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비슷한 처지라는 생각에 동질감을 느꼈다. 저마다의 십 분을 보내고 바쁘게 다시 제자리로 떠날 사람들이었지만, 만나 몇 마디 나누다 보면 서럽지 않은 사연이 없었다. 매일 마주치던 사람이 안 보이는 날은 무슨 일이 생겼나 궁금하기도 했다.
  어느 날은 면회 시간이 되기 전에 간호사가 환자의 이름을 부르며 보호자를 찾았다. 가족 여럿이 한 번에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면회 시간은 지연되고 순간 마지막 인사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를 면회하고 한참 뒤에 나오는 가족들의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내 아들 불쌍해서 어쩌누. 노모가 주저앉아 찬 바닥을 치며 오열했다. 감정에 복받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아니 모르고 싶어서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마음속 깊이 가둬두었던 어쩔 도리 없는 뜨거움이 전신으로 퍼지는 듯했다. 지난 주말에도 나만 보면 소파 자리를 양보하던 청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전남 무안으로 고인을 모셔 간다고 했다. 그동안 고생했어요. 네, 그래도 어르신은 꼭 쾌유하셨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할지 먹먹해 두 손을 잡고 한참을 서서 우리는 작별했다.

  병실 밖을 지키던 관리자가 들어와 면회 시간이 끝났다고 알렸다. 십 분은 늘 짧았다. 남편의 상태를 알고 싶어 담당 의사나 간호사를 찾아 두리번거렸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바빴고, 남편보다 위급해 보이는 환자를 돌보고 있어 말 한마디 붙이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시죠? 하고 말을 걸면 가슴부터 뛰었다. 남편의 상태를 알려면 설명을 들어야 했지만, 잘 알아듣지 못할까봐 걱정스러웠다. 요즘 들어 청력도 약해진 듯했다. 결국은 권하거나 하라는 대로 하게 될 테지만.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주겠지, 체념하며 내일 또 올게요. 잘 있어요. 내일은 눈 좀 뜨면 좋겠다. 남편에게 혼잣말로 인사하며 면회를 마쳤다.
  중환자실을 나오니 지팡이에 의지해 면회하곤 했던 한 노인이 오늘 남편을 요양병원으로 옮긴다며 이제 못 보겠어,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네요. 아니야,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대. 상태가 좋지 않아서 하는 퇴원이라니, 호전되어 병원을 나서는 것이라 생각했던 내가 한순간 바보처럼 느껴졌다. 미동도 않고 눈도 잘 뜨지를 않아. 차라리 편하게 갔으면 좋겠어, 고생 그만하고. 노인은 중환자실에서 사용하던 물품을 담은 꾸러미 여럿을 들고 돌아섰다.
  오래지 않아 나 또한 겪을지 모를 일이었다. 간혹 다른 보호자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을 축하하면서도 과연 내가 축하받을 차례가 올지 두려웠다. 하긴 남편의 상태가 좋았다면 아직도 여기서 이러고 있지는 않을 터였다. 폐렴 염증 수치는 계속 오르락내리락 불안정했고, 항생제를 오래 사용해 신장에도 문제가 생겼다. 기능이 저하되어 정상적인 소변량이 유지되지 않으면 투석을 시작해야 했다. 간혹 눈을 뜨긴 해도 초점도 맞추지 못했다. 평생 들어온 아내의 목소리에 반응도 못하고 눈도 맞추지 못하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1년 전에도 남편은 지금과 비슷한 폐렴 증상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지만 그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아예 면회도 되지 않아 더 속을 태웠다. 보호자 한 명만 상주할 수 있었다. 따자니아를 만난 곳도 이 병원이었다. 당시 독감에 걸린 나를 대신해 남편을 돌볼 간병인이 시급했다. 병원에서 소개해준 사람이 따자니아였다. 조선족도 아니고 우즈베키스탄 사람이라니! 예상치 못한 매칭에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직접 만나보니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고려인이었다.
  처음 만난 날, 따자니아는 내게 ‘걱정 마세요’ 대신 ‘심려 놓으세요’, 하고 말했다. 남편보다 덩치가 더 큰 남자 환자를 돌본 경험이 있다고. 능숙하지 않은 한국어에도 불구하고 듬직한 느낌을 주었다. 따자니아는 바로 전날까지 다른 층 환자를 돌봤다. 병원 내 이동이라 PCR 검사를 따로 할 필요도 없었고 일반병실, 음압병실, 중환자실까지 빠삭하다고 했다. 오래돼 보이는 여행 가방 하나와 비닐 쇼핑백 몇 개를 가지고 병실을 옮겨 다니며 생활한 지 꽤 되었다면서.

  입주 간병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먼저 권한 건 나였다. 위루술을 시술한 남편에게 튜브로 경장유동식을 먹여야 했다. 익숙해질 때까지 단 몇 달이라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새롭게 추가되는 일에 지쳐 남편 돌보기가 겁날 지경이었다. 망설이는 듯싶더니, 따자니아가 이내 짐을 챙겨 퇴원 길을 따라나섰다. 따자니아가 집으로 들어오며 남편 돌보는 일은 한결 수월해졌다. 자잘한 집안일이며 힘깨나 쓰는 일도 전부 도맡아주었다. 혼자였다면 밥을 거르기 십상이었을 테지만, 따자니아까지 굶길 수는 없었다. 찬은 별로 없어도 따뜻한 밥에 찌개 하나를 놓고 같이 밥을 먹었다. 힘을 합쳐 남편을 씻기고 먹였다. 밤이면 거실에 드러누워 트로트 프로그램을 보며 각자 좋아하는 가수가 1등이 되길 응원했다.  
  따자니아는 몇 년 동안 한국에서 살았지만 자기에게 잘 대해준 사람은 내가 유일하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선생님’ 하고 불러줬다는 거였다. 내가 그랬어? 하고 묻자, 따자니아는 더 자세히 말했다. 네, 언니가 간병인 선생님, 따자니아 선생님, 하고 불렀어요. 다른 보호자들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이라고 하면 조선족보다 더 싫어해요. 무시하고 욕하고 걸핏하면 간병인 바꿔달라고 해요.
  병원에서의 간병은 자격증 없이도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니 한국인들은 자격증이 있는 노인장기요양시설로 빠져 일하고, 간병 인력 대다수가 중국 교포인 조선족들이었다. 요양보호사가 안정적인 근무 조건을 가진 반면, 병원의 간병은 24시간 근무하는 프리랜서 형태였다. 가족이 있는 한국인들이 일하기 어려운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그 틈새를 중국 교포들이 메웠다고 했다. 하지만 젊은 조선족들은 더 이상 간병인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코로나19 이후 춘절 때 돌아간 조선족들이 돌아오지 않았다. 간병인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그들의 자리를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 고려인들이 채웠다.
  누워 있는 노인들 생각하면 잘해주고 싶은데 힘들어요. 부모 생각도 나고 해서 나름은 신경 쓴다고 해도 혼자 여러 명을 돌봐야 해요. 6인 병실에 세 끼 식사 보조하고, 대소변 치우고, 목욕시키고, 누워 있는 자세도 계속 바꿔줘요. 그래도 세 명까지는 할 만한데, 그 이상은 힘들어요. 따지고 보면 24시간 근무니까 시급 4천 원도 안 되는 것 같아요. 왜냐면 우리는 새벽부터 움직여요. 밤에도 수시로 깨서 깊은 잠을 잘 수도 없어요. 휴일도 따로 없어요. 쉬면 돈을 못 버니까. 숙소가 따로 있지도 않아요. 병원에서는 침상 하나가 다 돈이라서 간병인들은 복도에 간이침대를 놓고 자요. 처음에 안 시키던 석션, 드레싱, 콧줄 교환같이 간호사들이 해야 하는 것도 자꾸 시켜요. 문제 생길까봐 무섭지만 눈치 보면서 적당히 해줘야 해요.

  따자니아가 히로시마에 간다고 했을 때는 뜬금없었다. 히로시마 하면 떠오르는 건 원폭밖에 없었다. 한국 사람들이 그곳에 여행을 간다는 것도 생소했다.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대요. 여기 제가 뭐가 있어요. 돈 많이 주면 어디든 가는 게 우리 팔자죠. 따자니아는 고향에 보낼 돈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던 중 일본은 외국인이 개호복지사 자격증을 따면 체류 자격을 준다는 소식을 주변에서 전해 들었다. 쉬는 날이면 일본에서 요양보호사로 취업하도록 알선해주는 업체를 만나러 다녔다. 그즈음 히로시마에서 한국음식점을 오래 한 집안에 자리가 났다고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일본 가정이나 병원보다 나을 것 같다고 하는 따자니아를 말릴 수 없었다.
  어쩌면 돈 없는 내 사정을 잘 알아서 그런 결정을 한 걸지 몰랐다. 내겐 한 번도 돈을 더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간병비를 감당할 여력이 점점 줄어들었다. 다달이 나오는 남편 연금을 고스란히 따자니아에게 이체했고, 거기에 저축해둔 돈 일부를 더 보태야 했다. 누가 누구에게 얹혀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권하지 않아도 자기 집인 양 스스럼없이 냉장고를 열어 주스를 꺼내 마시고, 참외를 깎아 먹는 걸 알게 모르게 마뜩잖게 대했을 수도 있었다. 편하게 언니 동생처럼 지냈지만, 엄연히 나는 돈을 주는 쪽이고 따자니아는 돈을 받는 쪽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나는 따자니아가 먹은 그릇을 설거지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불만은 불안 속에서 나온다는 걸.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간병과 얼마나 들지 모를 비용이 나를 뾰족하게 날 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따자니아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다.  
  따자니아는 자신이 히로시마로 떠나기 전에 내게 요양병원을 알아보라고 했다. 언니, 혼자 못해요. 아저씨 못 돌봐요, 힘들어요. 망설이는 나를 대신해 따자니아는 주변 간병인 동료나 업체를 통해 남편을 입원시킬 병원을 알아봐주기까지 했다. 가격 안 비싸고, 집에서 안 멀고, 무슨 일 생기면 다니던 병원으로 옮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거기에 더해 경험 많고 믿을 만한 간병인이 있는 곳. 요양병원이라면 나보다 따자니아가 더 잘 알았다.
  우리는 히로시마에 갈 짐과 요양병원에 가져갈 짐을 동시에 챙겼다. 따자니아 짐이 남편의 간병 물품이 든 짐가방보다 더 단출했다. 짐을 보면 몇 년이나 한국에서 살았던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사설 구급차를 불러 남편을 보낼 때도 따자니아와 함께 갔다. 내가 보호자로 구급차를 타고 가고, 따자니아가 짐을 챙겨 택시를 타고 뒤따라왔다. 그만큼이나 따자니아는 누구보다 가깝게 남편에 관한 걸 공유한 사람이었다.
  히로시마로 떠난 뒤 처음 걸려 온 전화에서 따자니아가 말했다. 언니, 여긴 동남아시아인 간병인이 많아요.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사람들 사이에서 나만 고려인이에요. 돌보는 사람이나 가족들은 어때, 잘해줘? 힘들진 않고? 아픔보다 슬픔이 큰 곳이어서 그런가 다들 친절해요. 따자니아도 히로시마의 역사를 알고 있었던 걸까. 가끔은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따자니아의 말이 시처럼 들리기도 했다.

  날이 밝았다. 따자니아에게선 아직 연락이 없었다. 호텔에서 계속 기다려야 할까 고민했지만 내일이면 나는 돌아가야 했다. 들인 돈을 생각하니 가만히 호텔에만 있는 것도 바보 같은 일이었다. 평일 낮이니 따자니아도 일할 터였고, 무엇보다 뭘 좀 먹어야 기운 날 것 같았다. 히로시마 시내를 둘러볼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미야지마로 가자. 따자니아가 가보고 싶다던 곳이었다. 아직 가본 적 없다는 말이 기억나, 유일하게 여행사 직원에게 경로를 물어둔 곳이기도 했다. 호텔에서 한 시간을 가 그곳에서 또 배를 타야 한다고 들었다. 저녁 전에 다시 돌아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미야지마로 가는 노면 전차에 올랐다. 어릴 때는 서울 종로 사거리에도 전차가 다녔다. 아버지 손을 잡고 타고 다녔던 기억이 났다. 남편을 처음 만난 곳도 종로였다. 세운상가에서 작은 음반 가게를 했던 20대 시절이었고,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 가게에서 틀었던 팝송도 정확히 떠올릴 수 있었다. 내 진정한 사랑 당신이 없다면 어떻게 나의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요. 나를 외롭게 떠나지 마세요. 오직 나만을 사랑해줄 거라고 그리고 당신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줄 거라고 말해주세요. 미국의 형제 듀오인 에벌리 브라더스의 노래였다. 남편이 레코드숍에 들어와 노래 제목이 무어냐 물었다. 대답을 듣고도 한동안 떠나지 않았던 밤. 나에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는 것을 난생처음 온 히로시마에서 느끼다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전차의 종점이 미야지마구치 항구여서 길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매표를 하고 잠시 기다리니 페리가 왔다. 섬을 수시로 오가는 페리는 사람을 싣고 지체 없이 이쓰쿠시마 신사를 향해 방향을 잡았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듯해 대합실 밖으로 나가보았다. 멀리서도 바다 한가운데 빨간 목조 구조물이 떠 있는 게 신기해 한참을 바라보았다. 신사 앞에 서 있는 관문, 신들이 드나드는 문이었다. 썰물 때가 되면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 소망을 빈다고. 따자니아가 보고 싶다던 게 이런 풍경이었을까.
  배에서 내려서니 오래된 상점가가 길게 이어졌고 거리는 관광객들로 붐볐다. 아기자기하게 진열해둔 소품을 구경하며 팥이 든 단풍 모양 만주도 하나 사 먹었다. 일본어는 모르지만 한자를 읽을 줄 알아서인지 대충 이해가 갔다. 신사로 가는 입구에 돌로 만든 커다란 문과 양옆으로 해태처럼 생긴 사자상이 있었다. 사자상을 지나 어디서나 보이는 높이 솟은 5층 탑을 향해 걸었다. 눈앞에 회색 사슴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관광객들 사이사이에 사슴이 길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꽤 여럿이었다. 사람을 경계하는 법 없이 고요한 상태인 게 신기했다.
  맞은편에서 사슴 한 마리가 나를 무심한 듯 바라보더니 총총총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사슴은 그럴 의도가 없는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사슴이 내게 오고 있다고. 그런데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슴이 가까워질수록 몸이 굳어지며 약간 긴장이 되었다. 사슴은 조금 떨어져 몸을 돌리는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내 발밑까지 바싹 다가왔다. 어딘가로 피해 사슴에게서 멀어지고 싶었지만 사슴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턱대고 나의 허벅지에 코를 가져다 댔다. 아주 짧은 사이 여러 마리가 주위를 에워쌌다. 먹이를 달라고 하는 듯했으나 나에겐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빈손을 눈치챈 사슴들이 하나둘 흩어졌는데, 처음에 다가왔던 사슴은 떠나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다.
  사슴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깊고 커다란 눈동자가 무감해 보였다. 눈길을 피하지 않는 사슴을 보고 있자니 조금 슬퍼졌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떠오르기를 반복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남편도 더없이 고독했겠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 또한 그랬다. 매일의 십 분을 대답 없는 말들로 채우는 게 외로웠다. 삶을 포기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게 맞는지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슴은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측은하게 바라보는 건가, 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사슴이 내 마음을 헤아릴 리는 없었다. 매일 눈 맞춤하는 남편도 내 마음을 아는 게 아니듯.

  발걸음을 옮겨 뒷길에 접어드니 오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벌목하지 않은 산은 자연림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산 아래 잘 가꾸어진 정원과 어우러진 사원은 신사가 아니라 부처를 모시는 전통 절이었다. 여러 얼굴을 한 부처님이 곳곳에 모셔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절이 다 있을까. 경전이 적힌 대전약경통이 계단 난간을 대신했다. 속으로 불경을 외며 계단을 찬찬히 올랐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기에도 가팔라 힘들어 보였지만 어쩐지 불상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다. 본당에 서서 초에 소원을 적고 절을 했다. 복전하고 초에 불을 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먼저 남편의 안녕을 적었다. 다시 건강하게 해달라고 적고 싶었지만 참았다. 기적이 이루어질 리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까. 안녕이라는 말로 족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길게 기도했다.
  미야지마에서 하룻밤을 자겠다는 결정은 또 한 번 나답지 않은 선택이었다. 시내 호텔에 두고 온 짐이 없어서 다행이기도 했고, 공항으로 바로 가는 리무진 버스가 있다는 말에 안심되었다. 물론 미리 계산한 숙박비가 아깝긴 했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잠자리가 바뀌어서일 수도, 낯선 곳에 혼자여서 그런지도 몰랐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꼭대기 층에 있다는 대욕장에 가봤다. 말만 대욕장이지 예전 주택가에 살 때 있었던, 오래된 동네 목욕탕 같았다. 나지막한 목욕 의자가 조르르 놓여 있었다. 그래도 아무도 없는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니 좋았다. 남편 때문에 아무 곳도 가지 못했는데 남편이 병원에 있으니 여행이 가능해졌다.
  40년을 기계 돌아가는 공장 소음에 휩싸여 살아온 남편의 삶을 떠올렸다. 전 생애를 걸고 잉크 깡통을 만들어 온 삶이란 어떤 걸까.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고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있었지만 빚은 아름답지 않았고, 오래도록 남편을 괴롭혔다. 몸은 고달프고 머리는 바쁘고 마음은 가난했다. 그게 우리의 현실이었고 같이 산 세월이었다. 이다음에 돈 벌면 잘해줄게. 남편이 간혹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본래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하도 말을 안 해서 속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운전대를 잡은 날에도 남편은 차를 세우며 이다음에 드라이브 꼭 가자고 말했다. 근육병으로 거동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운전도 쉽지 않았다. 그래요, 당신 나으면 우리 드라이브 가요. 하지만 남편은 그 이후로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 그날 밤, 가을이 왔다는 걸 실감했었지. 나는 그 가을이 다시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다음은 없는 거야. 오늘 지금이 아니라면. 두고두고 그 생각을 하며 나는 남편을 오래도록 미워했다.

  의사는 보호자인 나를 불러 기도절개를 할지 결정하라고 했다. 삽관을 한 지 2주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2주가 지나면 관과 기도가 유착될 수 있어 그 전에 빼야 한다고. 자가호흡을 할 수 없어 기도절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하겠느냐고. 안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걸 제외하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겁니다. 오래 버티시지는 못하겠지만. 설명을 들으면서도 이해되지 않았다. 바삐 자기 말만 늘어놓고 자리를 뜨려는 의사의 팔을 처음으로 잡았다. 선생님, 천천히 한 번만 더 설명해주세요. 잘 모르겠어요. 드물게 특별대우 같기도 한 면담이 길어지자 관계자가 곁으로 다가와 면회 시간이 지났으니 목걸이 명찰이라도 미리 달라고 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이나 복도 소파에 앉아 있었다. 동의하는 게 혹여 남편을 더 고통스럽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호흡이 돌아오면 감염이 생기고, 감염을 낮추려 약을 쓰면 신장이 망가졌다. 살려고 들어온 중환자실에서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느라 욕창이 생겼고, 몸 곳곳이 멍이었다. 혹시나 위험할까 묶어둔 팔다리가 부어서 오동통해 보일 정도였다. 검사하면 원인을 찾아낼지는 몰라도 그걸로 남편의 상태가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도돌이표 같은 병세의 악화가 남편의 마지막이 머지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물론 여러 번 입퇴원을 반복하며 놀람과 당혹스러움은 점차 줄었다. 구급차를 부르는 동안 복용하던 약, 처방전, 당뇨 주사제, 기저귀와 패드 그리고 내가 쓸 세면도구, 간단히 먹을 누룽지나 덮을 담요 등 필요한 짐을 빠짐없이 챙겼다. 정신없으셨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다 완벽히 준비해 오셨어요. 응급실 간호사가 놀랄 정도였다.
  언니, 얼마 전에는 일흔두 살 먹은 할아버지가 자기 아내를 살해한 일이 있었대요. 끔찍한 사건인 줄 알았는데, 내막은 그게 아니더라고요. 10년 넘게 혼자서는 거동이 어려운, 아픈 아내의 투병을 돌봤대요. 더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끼고 함께 죽기로 마음먹었다고. 아내도 남편의 뜻에 동의했대요. 자신이 선물한 머플러로 아내의 목을 조르고 본인도 목을 맸다는데, 하필이면 이웃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대요. 따자니아는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일을 통화로 전해주며 ‘하필이면’이라고 말했다. 간병에 지쳤다고 했다. 죽음 말고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고. 지난 시간의 병간호가 너무 힘들었다고, 자녀들에게도 짐이 되는 것만 같아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그 말을 듣는데 슬프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다.
  나 역시 남편이 생의 끈을 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오래도록 누워만 있다 눈감을 걸 생각하면 불쌍했다. 누구나 타고난 운명만큼 살다 떠나는 거니 더 이상의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 왜 꼭 연이어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는지. 어쩌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나였을지 몰랐다. 남편의 병을, 요양병원 입원을 그리고 마지막 헤어짐을. 그래서 무작정 떠났는지 몰랐다. 결정 앞에서 나는 도피한 걸지도. 그냥 좋았던 걸 생각하고, 해보지 않았던 걸 해보고, 가보지 않았던 곳에 가보고 싶었다. 아무 고민 없는 순간이 나는 그리웠다.

  일본 아이들이 나를 앞질러 뛰어갔다.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 떠날 기쁨에 들떠 보였다. 공항에 도착해 커피숍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첫날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출발 두 시간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 계셔야 해요, 하는 여행사 직원의 말에 그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게 부지런을 떨었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 비행기를 놓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불안 때문이었다. 따자니아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은 생각해본 적 없는 결론이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짐작이 전부일 뿐이었다. 통창 너머로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커피를 받아 드는데 컵 홀더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쓰여 있었다. 정신없고 바쁜 와중에 휘갈겨 쓴 게 분명한 글씨였다.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한국인이에요? 하고 청년에게 물었다. 아뇨, 한국어 배우고 있습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받는, 나만 느꼈을 위로였다. 면회를 하러 가면 커피 한잔 사 마시기가 어려웠다. 온전히 돈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돈 때문이기도 했다. 가끔은 나를 위한 사치를 부려보려 편의점 대신 빵집에서 커피를 사기도 했다. 한기를 없애려 산 커피가 너무 뜨거워 마실 수가 없었다. 면회 시간에 앞서 이걸 왜 샀을까 후회하면서도, 조금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 내 삶이 버거웠다.
  테이블 위에 놓인 여권을 넘겨보았다. 언제 마지막으로 여권을 사용했던 건지. 2013년 입국한 기록과 중국 비자가 붙어 있었다. 흔한 패키지로 남편 친구 부부와 함께 갔던 게 떠올랐다. 그때도 남편은 무리에서 뒤처져 걸었다. 유람선을 타고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도 기억났다. 여기서 찍어야 인생 사진이 제대로 나온다고, 가이드가 자신하며 같은 장소에 사람들을 차례로 세워 사진을 찍고 다음, 다음, 하고 외쳤던 순간. 돌아가는 원탁을 꽉 채운 음식을 양껏 덜어 먹으면서도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와 고추장을 찾던 일. 값싼 중국산 기념품을 침대에 늘어놓고 좋아하는 나를 보며, 앞으로는 둘이서라도 자주 여행 다니자고 했던 남편의 말까지. 남편이 없다는 건 다시 무언가를 함께할 수 없다는 거였다.
  11시 30분. 나는 지금 이곳에 왜 와 있는 걸까. 따자니아를 보러 여기 온 게 맞기는 한 걸까. 아니, 여기가 아니라면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야쿠르트 배달이나 가스 검침을 제외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 매일 서성이던 중환자실 앞? 중환자실 앞을 메우고 있을 가여운 사람들을 떠올렸다. 히로시마공항 한복판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따자니아를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남편에게 돌아가기 위해 떠나온 거라고. 다시 돌아가 그를 영원히 편하게 해줘야 한다고. 늘 무언가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그대로 안고 돌아가야 했다. 그래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히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만나려 무작정 여기로 떠나왔듯 나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려 돌아가야만 했다.

  기도삽관을 하기 전 유난히 맑은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던 날, 본래 앞에서는 눈물을 잘 보이지 않았던 내가 왈칵 눈물을 쏟았던 날, 남편은 내게 나만 알아들을 수 있게 소리 없이 말했다. 그만하자. 그만하고 싶어. 그럼에도 나는 기도삽관을 결정했다. 그대로 보낸다는 걸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탓이었다.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한 지금에 와서도 나는 남편의 삶을 연장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옳은 게 뭘까, 나에게 말고. 남편을 위하는 게 뭘까, 나 말고. 남편의 죽음을 결정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죽음은 나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돌아가면 병원부터 가야 했다. 가서 기도절개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전해야 했다. 결국 나는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하려 곁으로 돌아가려는 거였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나라면? 나라면 어떨지 하는 생각을 매일 밤 했다. 몸을 움직일 수도 없고, 먹고 마실 수도 없고, 온전한 정신일 때보다 혼미한 상태일 때가 더 많은 침상에서의 시간. 가능성도 가망성도 없는 자신의 처지를 꾸역꾸역 온몸으로 버텨내는 남편을 뻔히 내려다보며 나라면. 그만 나를 포기해달라고 매달리고 싶을 것 같았다. 죽을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겠다고. 왜 자꾸 나를 살게 하느냐고.
  어쩌면 남편은 이러한 의식조차 없는 상태에 접어든 건지 몰랐다. 한 사람의 세계가 저물어가고 곧 끝날 터였다. 태어나고 자라 이만큼 늙어질 때까지도 내가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되리라는 걸 생각지 못했다. 나이를 먹는다고 모든 걸 다 알 수는 없었다. 죽음에 관해서만은 나 역시 처음이었다. 담담하게 받아들여지거나 순순히 포기되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닌 남편의 삶이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오늘의 십 분이 지나면 앞으로 지속될 내일의 십 분을 무엇을 위해 보내야 할까. 한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만 채워졌던 십 분을 이제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 짧은 시간이 하염없이 막막했다. 끝내 따자니아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휴대폰에는 보호자를 찾는 병원 메시지뿐이었다. 남편이 언제는 위중하지 않은 적이 있었나. 혼잣말하며 나는 부러 배짱을 부려보았다. 남편은 내가 도착할 때까지는 떠나지 못할 것이었다.
  어젯밤에 보았던 오토리이를 떠올렸다. 어둑어둑한 거리를 지나니 조명을 받은 오토리이가 더욱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려고 근처 벤치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관광객이 모두 빠져나간 섬은 적요했다. 하늘에는 서울에서 보기 힘든 별이 많았고 바다는 낮과 달리 깊고 어두워 보였다. 찬 기운이 옷소매를 파고들어 온기를 빼앗아갈 때까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어떤 낯선 기운이 나를 섬 구석구석으로 끌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거기서 다시 낮에 본 사슴을 만났다. 이상했다. 다 똑같이 생긴 사슴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내가 잠시 걸음을 멈출 때마다 그 사슴이 나타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사슴을 향해 이제 그만 가라고, 편하게 쉬라고 말했다. 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을 거였다.

  따자니아, 어제는 손님이 나밖에 없는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어. 정성을 다해 만든 초밥을 한두 점씩 접시에 올려 차례로 가져다주는데, 나만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오래 식사를 하고 식당을 나서는데 기다렸다는 듯 사슴이 나를 따라왔지. 사슴이 곁에 와 느린 발걸음에 맞춰 함께 걸어주었어. 나는 두 발로 녀석은 네 발로 걸었지만 느릿느릿 나아가는 폼은 비슷했던 것 같아. 옆에서 걷는 녀석의 발톱을 보니 콘크리트 바닥에 갈려 많이 닳아 있었어. 겉모습은 어려 보였지만 녀석도 나만큼이나 나이를 먹었을까. 들은 이야기지만 이 섬의 사슴은 신의 사자로 여겨진다고 해. 따자니아, 고향에 돌아가기 전 미야지마에 꼭 가볼 수 있기를 바랄게. 신의 가호 안에서 사슴과 산책할 수 있기를.
  
  

최지애

2013년 심훈문학상 수상, 2014년 『아시아』에 수상작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소설집 『달콤한 픽션』, 앤솔러지 『숨어 버린 사람들』 『마스크 마스크』 등이 있음. 2022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2023년 제20회 서라벌문학상 신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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