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미학

  

민구, 『세모 네모 청설모』, 현대문학, 2023

    민구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세모 네모 청설모』가 발간되었다. 시집의 첫 시는 「한 사람」이다. 그의 두 번째 시집 『당신이 오려면 여름이 필요해』의 시인의 말 「한 사람에게」가 떠오른다. ‘한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의 시집을 따라서 읽다 보면 ‘한 사람’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지칭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다시 행간으로 돌아가면 ‘한 사람’은 특정한 하나의 대상이 아닌 여러 개의 무엇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한 사람’은 하나의 세계이고 그 세계를 움직이게 하는 사랑일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을 위해 몇 편의 시를 쓸 수 있을까. ‘한 사람’을 이해하고 재현하는 시를, 풀어내야만 하는 시간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독할까.
    그의 시에서 ‘한 사람’은 인식의 범위를 바꿔주는 존재인 듯하다. 시적 주체는 ‘한 사람’을 통해 현실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것을 재발견한다. 그 흔적을 톺아보면서 일상의 풍경을 어긋나게 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소소하고 사소한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일상의 틈이나 구멍을 발견하기. 새로운 구도로 축소하거나 확장하기. 그의 시에서 줄곧 발견되는 구조이다. 시적 주체는 현재 자신이 서 있는 위치가 ‘한 사람’에 의해 바뀌었음을 감지한다.

    밤이 깊어 사람들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벌레 우는 소리 잠잠해지면/ 나는 접시를 치운다// 꿈이 지나간 바닥을 깨끗이 훔친다 (중략) 그가 먹을 빵과 물 한 잔/ 우리만 알고 있는/ 사소한 이야기// 한 사람이 잠에서 깨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모임에 참여한 사람 중의 한 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의 후반부에 가면 나의 꿈에 등장하는 ‘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한 사람’의 꿈속에 화자가 놓여 움직이고 있는 듯도 보인다. 시적 주체가 ‘한 사람’을 인식하게 되면서 시공간이 달라진다. 이와 함께 자신이 있던 자리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게 되면서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간다.
    거기에 중요한 미적 특질이 하나 더 있다. 행과 연이 연속되면서 의미가 생성될 때 시적 주체는 ‘한 사람’을 대상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정지하거나 다른 곳을 지시하며 행간을 만든다. 그는 의미가 생성되는 중에 말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을 한다. 그래서 그의 행간은 아득하고 담백하다. “지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가까이에서 보면 못생겼을 것 같”다고 말하는 그에게 지구는 “엄마의 병”(「평평지구」)을 품은 작은 방 혹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 사람의 눈동자, 어렸을 때 친구들과 가지고 놀았던 구슬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시적 주체는 ‘한 사람’과 자신의 생활을 겹쳐놓고 가만히 귀를 기울인다. 세상이 그들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가더라도,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는 세력이 다가와도, 자신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두 사람은 ‘청설모’처럼 그저 이 세계에 발을 딛고 있다. 그들에겐 아주 가벼운 몸짓으로 서로의 일상을 속삭이며, 현실의 무게를 깃털로 바꾸는 재주가 있는 듯하다. ‘한 사람’은 때론 두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천사로 읽히기도 한다.

    우리 사이에/ 거리가 있었으면 좋겠어 (중략) 그러던 어느 날/ 일상의 장면들이 무너지고 뒤섞여서/ 누가 현지인인지 관광객인지 모를/ 복잡한 거리로 확장되고 (중략) 이제 거리에 아무도 없겠지/ 그때 다시 만난다면// 두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골목이/ 우리에게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 사이」 중에서

    ‘한 사람’이라는 천사는 여러 사람이 지나던 길을 “두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골목”으로 바꿔준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꿈꿀 수 있게 만들어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과 알 수 없는 미래를 지닌 사람에게 다른 길(두 사람만의 골목)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두 사람만의 길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 물리적으로 놓이지 않더라도, 사랑으로 향하는 통로가 완성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한 사람’이라는 천사는 사랑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타임머신 같다.
    『세모 네모 청설모』의 어조를 요약하면 단정하고 무덤덤하다. ‘한 사람’을 경유하고 만들어내는 여백과 침묵이 낯설게 아프다. 시집 전체적으로 시가 끝날 때마다 백지가 한 장씩 덧붙은 작품이 자주 발견되는데, 그 형식 또한 울림과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 백지로부터 시작되는 고통이 예사롭지 않다. 시적 주체는 “팔다리를 잘라서 땅에 묻고/ 나머지는 돌에 매달아 강물에 던”지거나(「걷기 예찬」) 떨어진 팔을 다시 “내 몸에 결합한 뒤에”(「혼자」) 시를 쓴다. “기억이 나쁜 쪽으로 가려고 해서/ 붙잡고 있는 팔이”(「축시 쓰기」) 저려도 지속해서 무언가를 쓰려고 노력한다. 육체에 아픔이 가득 쌓여 더 이상 내부에 두지 못하고 언어로 변주하고 있는 듯 보인다.

    모든 작품이 이와 같은 형식으로 흘러가진 않는다. 그러나 그가 ‘한 사람’을 인식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그는 신체를 스스로 해체한다. 내부로부터 발현된 에너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대로 폭발하지 않고 시인의 마음으로 여과된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분명 정제된 언어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파토스가 불쑥 출현할 때가 있다. 차마 말을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고독이 체념이 되어 여백과 침묵 사이, 한 사람과 두 사람 사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 그 어딘가에 녹아들어, 언어의 원자로를 유영하고 있는 듯하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웠다// 나는 의자 위에 몸을 두고/ 다리만 빠져나와서/ 집으로 걸었다/ 집에 도착한 다리는/ 깨끗이 발을 닦고/ 방바닥에 쌓인 먼지를 쓸었다 (중략) 내가 밤늦게 집에 도착했을 때/ 다리는 심각하게 꼰 채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먼저 자지 그랬어, 나는 다리를 풀어서/ 뭉친 근육을 주무른 다음/ 내 몸에 결합한 뒤에// 같이 침대에 누웠다

─「혼자」 중에서

    ‘한 사람’은 화자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천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분리되었다가 조립되면서 만들어지는 ‘한 사람’이다. 인용한 시를 보면 ‘다리’는 모임에서 빠져나와 나를 돌아본다. 자아가 신체로 분열되면서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한다. “언어는 우리의 육체가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다.”1라는 아도르노의 말을 떠올려본다면 신체의 해체를 통해 언어의 자유를 추구하고 정신의 해방을 희구하는 장면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서 분리된 ‘다리’는 반 박자 늦게 움직이면서, 길을 걷고 청소하고 춤을 추며 침대에 눕는다. 분리-조립을 통해 재조합된 ‘나’에 대해 범박하게 생각하여보면, 사회의 구성원에서 개인으로 탈착을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이다. ‘나’라는 ‘한 사람’은 구성원의 역할을 해내야 하는 개인에서 ‘나’만의 시공간을 구축하여주는 존재자이다. 그곳의 시공간은 ‘세모 네모 청설모’로 구성되어 있을 듯하다.
    ‘한 사람’을 경유한 ‘나’의 세계로 진입하면 흥미롭고 명랑한 이미지가 목도된다. “과자에서 나온 사람들이/ 나를 데리러 오고”(「포춘 쿠키」) 있거나 “비싼 소 한 마리// 식당 안으로 걸어와서/ 네 가슴을 밟”(「오래」)는 장면들이 그렇다. 동화적 상상력은 우리를 다른 판으로 이동시켜준다. 그것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감정의 크기를 증감시키고 비틀어 새로운 시점을 확보한다. 결국 “나는 토끼를 몰아/ 달력에”(「새해」) 걸고 좋은 일이 생길 거란 기대를 하고 ‘나’의 육체로 돌아올 ‘한 사람’을 기다린다.

    결국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이면서 모든 사람이 아니고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 ‘한 사람’은 언어의 숲에 산다. 사랑하는 사람과 골목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길목의 어딘가가 내가 사는 곳 같다. 청설모의 주소가 서류로 증명되지 않듯이 우리의 삶도 숫자로만 설명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언젠가 지나친 ‘청설모’를 찾을 시간이다. 언어의 숲을 뛰어다니는 ‘청설모’는 어느 나무에서 숨죽이고 있을까. 누구의 식탁 아래서 꼬리를 흔들고 있을까. 사랑을 위한 ‘한 사람’의 변증법이 여기 있다.

    당신은 쉽게 사랑에 빠진다// 너무 쉽게 마음을 주고/ 너무 쉽게 나를 가져간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해서/ 뒤를 돌아본다 (중략) 나도 사랑에 빠진다// 내 앞에는 떠나버린 사람이 있고/ 여전히 커다란 의심이 있고/ 단물이 빠질 때를 알고 기다리는// 모범택시가 한 대 서 있다

─「간조」 중에서
  
  

정우신

2016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비금속 소년』 『홍콩 정원』 『내가 가진 산책길을 다 줄게』가 있음. 2023년 내일의 한국작가상 수상.

    
    

〈주석〉

  1. 김진영, 『상처로 숨 쉬는 법』, 한겨레출판, 2021, 453쪽.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