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났어도, 귀향하지 못한 월미도 원주민 이야기: 임인자 (상)

  

    〈필자 주〉
이 글은 인천여성가족재단에서 2022년 발행한 『인천여성 생애구술사Ⅰ: 인천여성이 경험한 한국전쟁과 분단』에서 임인자 할머님의 구술을 재수록한 것이다. 인천여성가족재단에 문의하여 필자를 ‘인천여성가족재단’으로 기재하였다.
인천여성가족재단은 각각의 구술에 구술자의 생애를 요약한 프롤로그와 약력, 구술 상황을 기록한 에필로그를 함께 수록하였다. 그중 에필로그에 의하면 이 구술은 2022년 6월 29일과 7월 13일 두 차례에 걸쳐 인천 미추홀구 숭의2동 임인자 할머님의 자택에서 이루어졌다.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고 싶다면, 인천여성가족재단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는 PDF 자료를 참고할 수 있다.
공개된 자료임에도 『작가들』에서 이 자료를 재공개한 이유는, 민중구술과 관련하여 소중한 자료가 발간되고 있음에도 아직 많은 이들이 잘 모르고 있다고 판단해서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천 역사를 생애구술을 통해 복원하는 이러한 작업을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일반 민중의 생생한 목소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많지만, 인천여성가족재단처럼 체계적으로 만들어가는 작업이 늘어갔으면 하는 바람을 보태어본다.
『작가들』에 다시 게재하면서 내부의 교정 원칙을 적용하여 일부 수정하였음을 밝혀둔다. 내용을 유지하는 선에서 가독성과 한글맞춤법을 감안하여 최소한으로 수정하였다. 구술은 2회에 걸쳐 나누어 실을 예정이다.

  

개구쟁이 어린 시절
  

갯벌에서 소라 캐던 어린 시절

    (19)36년생인데 나는 출생 신고가 좀 1년이 늦었어요. 의외로 자식 둘이 돌밖에 안 돼서 홍역을 하다가 자꾸 죽으니까, 우리 아버님이 나도 살지 못하고 금방 또 죽을까봐, 돌 때 되니까 출생 신고를 하셨대요. 그래갖고 한 살 늦어서 학교를 다른 애들보다 1년 늦게 들어갔죠. 6·25사변 나던 해 내가 중학교 1학년이야. 열다섯 살인데, 인천여중. 국민학교는 박문국민학교 나왔고.
    난 어려서도 그냥 좀 극성맞아서 산으로 나물도 잘 뜯으러 다니고 또 학교 갔다 오면은 바닷물 쓰고. 바닷물이 싹 나가잖아요, 그러면 이제 뻘 그런 거 다 나오잖아. 그러면 돌바위 그런 데 가면은 소라도 있고 고동도 요만씩 한 것들이 있고. 게 잡으러 다니고 바지락도 캐러 다니고. 여자 친구들도 있고 이웃에서 하는 남자애들도 있고 한 댓 명씩 이제 몰려서 가가지고, 나는 그러고 돌아다니면 우리 어머니는 아이 옷 버린다고 그냥 운동화 젖고 그런다고 뭐라고 그러시는데도, 그런 데 가서 그렇게 해오면은 우리 어머니가 그걸 가지고, 또 소라도 그렇게 잡아 오면 다 삶아갖고 다 빼서 초고추장에다가 무쳐서 아버지 이렇게 술 한 잔 들고. 반찬 해주고 졸여주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엄마는 그러면 내가 해오면은 다 그렇게 반찬 만들면서 가지 말라 그래?”, 한번은 갔다가 여태도 흉이 여기 있어. 거기 저쪽 돌 틈 바위에 있는 걸 그걸 꺼내려고 손을 이렇게 넣는데 그 굴 깍지가 쾅 여기가 찍힌 거야. 그래갖고 피가 철철 나고 그러는데 그게 흉이 안 없어지고 여태도 있더라고 늙어도. 그러고 나니까 우리 아버지가 갈구리를 하나 쇠를 철사줄로다가 해가지고 나무에다가 이렇게 호미 자루에다가 그걸 박아갖고 갈구리를 하나 만들어주시더라고.

1902~3년경 월미도가 보이는 인천항 임시 잔교의 모습 (임인자 소장)

  

공부도 잘했던 박문국민학교1 시절

    나는 그래서 어렸을 때도 집에서 이렇게 학교에 갔다 와도 가만히 안 앉았었어. 나무도 잘 올라가고. 그 대신 학교 가서도 벌도 잘 서고. 극성맞아 가지고 근데 남 하는 건 다 알아 쫓아다니니까, 얌전한 그런 성격이 아니고 우리 언니는 얌전해. 착하고 그 대신 동작이 좀 느려. 언니는 그러니까는 선생님들이 “야 순자는 착하고 얌전한데 넌 왜 그 모양이냐”, 우리 한 대씩 쥐어박고 그러셨거든.
    그러는데 이제 3학년 되고 그러니까 공부를 하는 걸 보시더니 우리 이모 보고 그러시더래, 담임선생님이. 순자 같지 않고 인자는 극성맞다고 사납다고 그러더니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 한다 그러시더래. 누구한테 지는 것도 싫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남한테 지는 거 싫고.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더래서, 살면서도 아휴 나를 우리 어머니가 그냥 고생스러워도 나 고등학교만 졸업을 시켰으면 내가 이렇게는 안 살았을 텐데, 못 가게 하셔가지고.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고등학교는 못 갔어.
    박문초등학교는 그때 당시 8·15 해방되기 전에 지금 신포동 거기 가톨릭회관이 있잖아요. 거기가 남자 교사였었어요. 여자들 교사 있는 쪽은 운동장도 작고 남자 교사 있는 데가 운동장이 커가지고 무슨 행사 때 여자들이 그 남자 교사 있는 데를 가서 행사를 같이하고 그랬거든. 워낙 건물이 크다 보니까 성당이 가운데 있고. 동쪽으로는 여자 학교 교실이 있고 또 서쪽으로는 남자 학교가 있었고. 남쪽으로는 신흥국민학교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거기 이제 폭격하기 쉽다고 건물이 제일 크다고 인천서. 우리 박문은 불란서 사람이 지은 학교잖아요. 세라복 입고 지금도 연수동에 박문초등학교 있잖아요. 불란서 주교가 와서 지은 거예요. 그래갖고 가톨릭 재단이야. 한 학년에 한 학급, 한 학급에 90명이야. 남자도 그렇고. 그런데다가 가운데 또 수녀원 있지. 또 유치원 교실 따로 있지. 해성병원이라고 따로 들어가는 입구에 병원이 있지 그러니까 건물이 컸어요.
    우리 외갓집 식구들이 박문초등학교 우리 이모님은 8회 졸업생이시고, 우리 어머니도 4학년까지 다니시다가 외할머니가 못 다니게 해서 못 가셨고. 그 외가 언니들도 다 박문초등학교, 우리 집 딸 셋이 다 거기 나왔어. 등록금은 많이 비싸지. 그런데다가 교복도 옷을 아무거나 입으면 못 가잖아요. 우리 다닐 때도 겨울에 세라복 입고 오바 입고 또 봄에는 치마도 모직사 이렇게 멋주름 잡은 거 그렇게 해서 입고. 봄 되면 와이셔츠 하얀 거 긴 거 입고, 여름에는 짧은 거 입고. 여기 딱 이렇게 리본해서 메고 그랬었어요. 그 박문초등학교가 유명한 학교거든요. 불란서 주교 돌아가실 때 우리들 8·15해방되고 나서 나 3학년 땐가 그때 돌아가셨는데 하얀 종이로다 족두리 만들어서 쓰고 교복도 입고. 여기 주안 지금 신흥초 거기가 가톨릭 재단 산소였었어. 거기까지 걸어서 와서 저학년들은 거기서 그냥 인사하고 들어가고, 4학년, 5학년, 6학년들 여기까지도 따라왔어. 우리 언니도 그때 6학년인데 여기까지 따라왔었지 장례식처럼.
  

열여덟 살 단오놀이 풍경과 첫 월경

    그때만 해도 단오에 그네 뛰고 했죠. 일제 때도 우리는 설에도, 다른 데서는 왜정 때는 설에도 뭐 못 해 먹게 하고 그랬다는데 우리 월미도에서 그런 거 몰랐는데. 일제시대 때도 구정 쇘죠. 다 장구 치고 꽹과리 치고 춤추고 놀고 그랬는데. 집집마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거 흰떡 집에서 해갖고 아버지들이 떡메로 쳐갖고 우리 어머니랑 할머니랑 쭉 이렇게 상 갖다 놓고 이렇게 비벼서 그 흰떡 가래떡 만들고 그러는 게 지금도 생각이 나는데. 월미도 들어가는 입구에 능수버들도 있었고 또 살구나무, 잣나무 그런 것도 있었어요. 능수버들에다가 그네 매갖고 그네들 뛰고 그랬었는데. 열여덟 살 봄에 그것(월경)도 난 허는지도 몰랐는데. 그네를 뛰러 갔는데 속에 인조로다 이렇게 바지를 하얀 걸 입고 그때들은 이렇게 통치마를 입었잖아요? 그런데 그네를 뛰는데 친구가 “야, 이 기집애야. 빨리 내려와!” 그래서 아 왜, 왜 그러냐고 그래서 치마를 쳐다보니까, 여기가 묻었더라고. 아이고, 열여덟 살 먹어서 오월 달 단오 때 처음이었어.
  

일본인 휴양지 월미도에서 한일 민간의 동거2

    월미도에 일본 사람들이 많고, 월미도 들어가면 언덕 비슷하게 높은 데가 있잖아요. 그 위에 일본 해군 하사관 학교 관사가 있었어요. 거기서 일본 애들이 같이 다 많이들 어울려서 놀고 그랬죠. 같이 놀았어요. 그 월미도에서 남자애들도 같이 놀면 축구하고 그러면은, 우리나라 애들하고 일본 애들하고 하면은, 우리 애들은 축구하는 걸 이기고 일본 애들은 야구, 그때는 야구가 아니라 그 고무공 있잖아. 고무공 가지고 방망이만 하나 만들어가지고 그걸 친다고. 그러면은 우리 애들은 그거 밤낮 져, 우리나라 애들은. 그래갖고, 우리는 월미도에서 일본 사람들하고 같이 살면서 일본 사람들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다는 느낌은 난 안 느껴봤어.
    왜정 때도 일본 사람들이 도시에서는 그렇게 안 그랬는데 저 시골 그런 데서만 그렇게 사람들을 못살게 굴었지, 인천 한복판에서는 누가 징용도 막 잡아가고 그러진 않았어.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은 우리 막내 외삼촌 일본 징용 끌려가신다고 그 세민발이(센닌바리)3 한 거가 생각이 나. 세민발이라고 일본 군인 갈 때, 수실로다가 그 옷을 수를 떠갖고 매듭을 져갖고 이렇게 무늬를 넣는 거 있어요. 그러면 그걸 옆구리에다가 이렇게 차잖아. 그러면 명이 길고 군대 가서도 오래 산다고 안 죽는다고. 군대 가는 사람들 그렇게 해서 여러 사람한테 길거리에 들고나와갖고 여러 사람들 보고 그거 몇 바늘씩 떠 달라고 그래. 세민발이 일본어야.
  

같이 단팥죽도 먹고, 달맞이도 하고

    우리는 여기 월미도 살면서 일본 사람이 반은 살았지, 그 해수욕장 쪽으로 가는 데는 다 일본 사람들 그 요릿집하고 다 있었어요. 큰 요릿집하고 그런 거 다 일본 사람들이 했었어. 8·15해방 전에, 월미도에. 그리고 우리 이쪽으로다가 우리나라 사람들만 거기 이제 한 80호. 또 저쪽에 가는 쪽으로다 좀 드문드문 몇 사람 살고 그랬지. 그래서 그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같이들 놀고 그랬어. 양력 명절 때 일본 사람들이 모찌떡하고 우리를 죄다 나눠주고 이 집 저 집 나눠주고 그랬었는데. 단팥죽도 그 젠자이ぜんざい라고 그래갖고, 일본 사람들은 팥죽을 해갖고 찹쌀떡을 숯불에다 구워요. 숯불에다 구워갖고 그거 구우면 얼른 안 풀어지잖아. 노릇노릇 구워갖고 그 찹쌀떡을, 팥죽을 해갖고 거기다 하나씩 넣어줘. 그것도 또 좀 저기한 집들은 거기다 밤도 넣어주고 은행도 넣어주고. 일본 사람들이 그런 것도 해서 그렇게 이웃하고 살았지. 그 해수욕장으로 용궁각4 쪽으로 가는 데는 다 일본 사람들이 살았지. 한 동네, 단오 때 같은 데 그네도 뛰는 데도 와서 같이 그네도 뛰고 그랬던 것 같고 명절 때 되고 정월 보름 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은 또 이제 저 달맞이 한다고 나와서 깡통 불 돌리고 돌아다니면 같이하고 또 장구 치고 아저씨들이 나와서 같이 다니고 그랬는데. 같이들 하고 그랬었어.
  

번화했던 월미도 풍경

    월미도가 그래도 살기가 좋았었어요. 경치도 좋고, 일본 사람들 해군 하사관 학교도 있었고, 또 동물원도 있었고, 식물원도 있었고, 8·15해방 전에는. 경기도 이쪽, 서울 이쪽에서는 유명한 유원지예요. 왜정 때 해수욕장만 있는 게 아니라 호텔도 있었고, 목욕탕도 이렇게, 이제 목욕탕에 들어가면은 목욕탕 안에도 짠물이 있고 수돗물 있고 그렇게. 목욕탕이 그렇게 있고, 여름에는 목욕탕으로 돈 내고 들어가는데 이제 수영할 사람들은 돈을 더 내고 들어가면은, 목욕탕에서 뒷문 열고 계단으로 내려가면 수영장이에요. 거기다 물을 하나 받아놓고 거기서 그렇게 풀을 세 개 만들어놓고 가족 단위로 애기들 데리고 가서 그렇게 모래밭마냥(처럼) 해놓고. 지금 내가 부산 같은 데도 가보고 그랬는데도 수영장 그렇게 해놓은 데가 없어요. 그러고 용궁각이라고 지금 저 호남정유 있는 데 그쪽으로 바다 있는 대로 쭉 나가면은, 쭉 굴을 파서 나가갖고 다리를 놔가지고 바다 한가운데다가 입 구 자로다가 기와집을 지어놨었어요. 그러면 그때 당시에 그거 기둥 둘레가 우리들 열두 살, 열세 살 먹었을 때 세 아이가 이렇게 팔 벌리고, 손을 맞잡아야지 닿을 정도로, 기둥이 그게 열두 개가 있었어. 인천에 썰물이 들어와서 물이 하나 가득 차면은 바다 위에 떠 있고, 물이 싹 나가면은 밑에 모래밭이고, 이제 조개 같은 거 잡으러 다니고 그러는 데예요. 왜정 때 있었어요, 거기가 요릿집이야.

1937년 월미도에 지은, 바다 위 요정 용궁각 ⓒ 월미공원

  

전쟁과 영종도 피난 생활

    국군하고 경찰관이 그때 3일 동안 후퇴했었어요. 25일 날 전쟁 났다, 인민군 쳐들어왔다, 그러니까 3일 동안 어디든 나가서 있다가 28일 날 다시 들어왔어요. 그래갖고 우리는 29일 날 영종도로 피난 가느라고 그냥 송장 등허리 밟고 배 타러 가고 그랬지.
  

전쟁 발발

    하루는 학교를 갔는데 선생님이 도로 가라고 그러시더라고. 전쟁이 났다고 그래서 도로 집에 왔는데, 그때 당시 우리 언니가 스무 살 먹어서 결혼을 해서 형부가 계셨었는데 그 형부가 대한청년단이었거든요. 거기 간부로 계셨었는데 오시더니 큰일 났다고 그러시면서 오셔가지고 이북서 인민군이 쳐들어왔다고 그러는데. 우리 아버님이 큰 배를 가지고 그때 당시에 17톤인가 되는 배를 갖고 운반선을 하셨는데 연평도 가셔서 조기랑 생선을 하나 싣고 이제 내려오시는데 천둥소리 같은 게 많이 나서, 그해 바짝 가물었거든요. 그러니까 ‘아유 어디 남쪽에는 비가 오나보다. 천둥하고 비가 오는가보다’ 그러고 내려오셔서 지금 저 볼음도(강화군 서도면) 그쪽 아래쪽으로 내려오시다 보니까 미군 순양함이 붙드시더래요. 그래서 인천은 못 들어간다고. 그래서 우리 가족이 인천 다 있으니까 내가 들어가서 배에다 가족을 다 싣고 도로 나와야지 된다고, 아버님이 일제 시대에 해군 물자를 수송하시는 배를 갖고 다니셔서 일본 말도 좀 잘하시고 그러니까, 그 순양함에 일본어 하는 사람이 나와서 얘기를 하더래요. 그래갖고 들여보내줘서 인천으로 오셨어.
    아버지가 오셔서 우리는 이제 편안하다, 그러고 있었더니 뭐 이틀 밤 자고 나니까(1950. 6. 29.) 아 밤에 새벽에 문에 유리가 좀 있었는데 마루에 그 유리문이 쫙 흔들리더라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나오시면서 “야 이거 큰일 났다. 어디서 박격포 쏘는 소리가 난다.”고 그러시면서 나오셨는데 아이고 우리 형부도 뛰어오고 작은아버지도 뛰어오시고 다들 뛰어오시더라고. 그랬는데 보니까 인민군 탱크가 지금 저 하인천역 있죠, 거기 와서 서갖고 있더래. 그래갖고 우리는 안개비가 막 쏟아지는데 우리 아버지는 쌀을 큰 자루에다 퍼서 짊어지시고. 나는 또 여덟 살 먹은 여동생 손을 붙잡고 우리 남동생 열한 살 먹은 건 우리 아버지가 손을 붙잡으시고. 우리 어머니 돌밖에 안 된 막냇동생 업고 그리고 이제 월미도 산을 넘어가는 거예요. 그래갖고 우리는 이제 월미도 여기 안개비가 와서 그냥 그 산 뒤로다 이렇게 넘어가는데 나는 지금도 그게 눈에 선해요. 세상에 군인들이 총도 하나도 없이 수통만 하나씩 차고 헬멧만 쓰고 민간인들 틈에 와가지고 다 드러누워 있는 거예요. 우리 국군이에요. 그래서 내가 군인 아저씨들이 왜 총도 없이, 전쟁 안 나가고 여기 와서 이렇게 드러눠 있냐고 그랬더니 지금 대한민국에는 싸울 물자가 없다는 거예요. 총도 부대마다 다 없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으냐, 우리 형부 보고도 “형부 그럼 저 군인들은 어떡하면 좋아요.” 그랬더니 이제 다 나갈 거라고 그러더라고.
  

영종도로 피난 가는 길에 만난 시신 13구

    우리 큰 배는 여기 앞에 있었고 우리 작은아버지 배가 똑딱똑딱 그러는 배 조그만 거, 낚시질 다니고 그러시는 배가 있었는데 그거를 타고 영종으로 가야 되는데 인천은 썰물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 배가 밀물이 들어와서 뜨려면 3시간은 있어야지 돼. 그래갖고 산속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작은아버지가 배가 떴다고 가자고 그래서 거기서 내려와서 저 바닷가 쪽으로 걸어서 가는데. 그때는 이제 월미도에 수영장이 큰 게 있었어요. 수영 선수들이 하는 백풀이라고 다이빙도 하고 그러게끔 돼 있는 풀도 있었고 세 개가 있었어요. 그 뒤로 돌아가야 되는 거야. 그래 그 뒤로, 뒤로 돌아서 배 있는 데로 작은아버지 배 있는 데로 가려고 그러니까, 이쪽은 산이고 이쪽은 이제 바단데, 돌이 울퉁불퉁 있고 그러는데, 거기다가 세상에 잊어버리지 않아. 열세 사람을 뒤로 다 이렇게 묶어가지고 그냥 다 쏴 죽인 거야. 누가 누굴 쏴 죽였는지 지금도 그걸 몰라. 그러니까 지방 빨갱이들이 우리 군경 가족들을 그렇게 쏴 죽였는지, 근데 여자는 놓고 다 남자만이야. 또 우리 군경들이 그때 당시 이틀 나가 있을 때 지방 빨갱이들이 설치고 다니니까 그 사람들 붙잡아다 그렇게 쏴 죽였는지 그거는 몰라. 열세 사람을 이렇게 쏴 죽이고 했는데 우리 아버지가 거기를 건너가시려고, 우리 아버지가 1미터 80이셨어요. 키가. 건장하고 체력이 좋으셨는데, 우리 아버지가 거길 물로 내려 들어가시니까 우리 아버지 (허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여기까지 차는 거예요. 바닷물이. 그러니까 우리들이 갈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 송장을 이렇게 밟아보시더라고. 이 송장이 물 위에 뜨잖아요. 그러니까 안 빠지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남동생을 데리고 건너가시는데, 밟고. 어떻게 해요? 언덕으로 올라갈 수 없고 바다로 내려가면 우리가 꼴딱 들어가게 생겼고. 아무리 여름이라고 그래도. 배는 멀리 저만큼 있으니까. 근데 발을 한 번 이렇게 디디니까 송장이 불어가지고, 그때 당시에 운동화 신었잖아요, 학생이니까. 쑥 들어가는 거야 불어서. 그러니까 아이 나도 못 가겠다고 소리 지르니까 우리 아버님이 그러면 어떡할 거냐고 눈 딱 감고 오라고. 겁이 없는 놈이 그게 뭐더냐고 야단을 치지 뭐야. 그러니까 여덟 살 먹은 우리 동생은 (뭐 하는 짓이냐고) 언니 나는 그거 못 밟겠다고 내 팔, 어깨 여기 대롱대롱 매달리지. 보따리 하나는 들었지. 그리고 내가 좀 강한 데가 있고 말하자면 좀 어렸을 때 사납다고 그럴까,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그냥 눈 딱딱 감고 동생 하나 이렇게 붙들고 그냥 뛰어갔어요. 시체가 쭉 늘어서 있는 걸, 그걸 밟고 갔네요. 근데 우리 어머니 못 가시겠다고 그러시더라고. 막냇동생 하나 업고. 보따리 하나 못 드시고 못 가시겠다고 나 죽어도 못 간다고.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할 수 없으신지 또 건너가셔서 어머니를 붙잡아서 끌고 오시더라고.
    그래갖고 우리가 영종으로 건너가가지고, 영종 가서 있으면서. 한번은 아버님이 아무것도 못 갖고, 그냥 달랑 한 벌 입을 것만 갖고 나갔으니까 그래갖고 이제 노두 없는 배를 갖고 작은아버지하고 둘이 먹을 것도 가져오고 옷들도 가져온다 하셨는데, 두 번은 잘 갔다 오셨는데 세 번째는 인민군한테 걸린 거야. 그래가지고 배를 뺏어서 그냥 저기다 올려놔갖고, 작은아버님하고 우리 아버님하고 월미도에서 영종까지 수영을 해서 오셨어. 알몸땡이로. 왜정 때 그 배를 갖고 다니셔서 수영 잘들 하세요. 그래갖고 밤에 수영을 해서 거기를, 9킬로를 오고. 대동아전쟁5 때 군수 물자 싣고 다니시는 배들 타고 다니셨기 때문에, 그 동남아 그쪽에 가서도 미군 폭격기 만나가지고 배에서 내려가지고 수영을 해서 가시면은, 상어들이 따라붙는대요. 그러면은 상어가 와서 자기 키하고 그 사람하고 키를 재본대네. 그렇기 때문에 그 허리에다가요, 기다란 까만 끈을 돋구고 내려간대요, 기다란걸. 그러면 상어가 자기보다 커 보이니까 안 덤빈대요, 상어가. 그러시던 분이라서 수영들을 잘하세요.
  

심부름 갔다가 경험한 비행기 폭격

    그래갖고 우리는 영종 가서 있으면서, 한 번은 책가방도 하나도 안 갖고 책도 못 갖고 오고 옷들도 못 갖고 오고 그래서, 아버지가 오시는데 나도 따라왔어요. 밤에. 따라와가지고 하룻저녁 자고, 지금 저 동인천역 앞에 외갓집에 심부름 좀 갔다 오라고 그래서 가서 심부름 좀 하고 월미도로 도로 들어가는 중인데, 비행기가 얕게 떠갖고, 내가 이렇게 쳐다보니까 비행기 조종사가 보여요 그 정도로 얕이 뜬 거야. 그래가지고 내가 전주에 가서 이렇게 기대고 섰는데 세상에 그 앞에 2미터도 안 되는데 기관포 사격하는 거죠.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고 붙어가지고, 거기 서서 오줌을 다 싼 거야, 그냥 놀라서. 그러고 난 뒤에 집에 할머니 할아버지 계시는데 그러다가 월미도 집으로 들어가는데 우리 할머니가 금방 쓰러지게 생겼더래. 얼굴이 하얘가지고. 그러고 난 뒤에도 그 월미도 산에다 대고 또 폭격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제 임시 굴들을 판 데 들어가서 있었는데, 퐁~ 하면 그냥 그 방공호도 슬쩍 저기하게 좀 파갖고, 위에 나무 갖다 얹고 가마니 덮고 그리고 흙 갖다가 이렇게 덮어놓은 데라, 흙이 그냥 다 쏟아지고. 그러다가 저녁때 밤에 아버지가 오셔서 데리고 다 태워 영종으로 갔었거든요. 영종으로 가서, 몇 달 동안 있는 동안에, 한 달쯤 돼서 내가 월미도를 왔었거든요. 그래갖고 그 영종 가서 있으면서 인천에다가 미군들이 와서 폭격하는 거 다 보고. 근데 우리 아버지는 벌써 보시면은, 아유, 저거 어디, 어디 때렸구나. 어디 때렸구나. 그러시더라고.
  

월미도와 영종도를 오가며

    나 그때 한 달 만에 저기 월미도 나와갖고 그렇게 혼나고 나서는 다시는 못 왔지 뭐. 이제 그 월미도에 있는 사람들은 땅굴을 파면서 쌀 4홉을 받았어요. 우리 선원 아저씨도 다녀서 선원 아저씨가 쌀을 타가지고 영종으로다 우리 식구 먹으라고 갖다주고 그랬어. 그 아저씨가 전라도 진도에서 사시던 분인데 하도 불쌍하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배에 와서 심부름이라도 하고 그러라고 바로 해방 전에 우리 집에 오신 거예요. 우리 집에서 한 20년 사셨어 그 아저씨가.
    나 그때 한 달 만에 저기 월미도 나와갖고 그렇게 혼나고 나서는 다시는 못 왔지 뭐. 이제 그 월미도에 있는 사람들은 땅우리 아버님이 그 배에다가 조기하고 박대 이런 생선을, 우리 여섯 식구가 3년을 가만히 앉아서 먹고도 남을 만큼 생선을 사가지고 오신 거야. 그걸 사갖고 오셔갖고 인천에다가도 팔고 마포까지 들어가서, 서울 마포 가서 그걸 도매를 넘기고 오시고 그러셨었는데. 그거를 다 배가 싣고 영종 와갖고 여름 동안에 그거 조개 한 통 주면 주고. 허허허허. 또 어떤 사람들은 감자 갖고 와가지고 생선 달라고 그러면 그거 주고. 그때 영종도에도 염전이 있었어요. 그 염전에 자전거 타고 다니시면서 소금도 사갖고 오셔가지고 그 배에다가 놓고 그냥 소금을 다 뿌린 거야 배 속에다가. 그러지 않으면 다 썩어버릴 테니까. 좋은 거는 짚 사다가 조기 엮어가지고 말려서 그런 거는 돈 좀 더 받고 팔고. 그렇지 않은 거는 그냥 감자 한 통 이고 와가지고 생선 달라고 그러면 그거 한 통 주고, 또 보리쌀 갖고 와가지고 달라고 그러면 그거 주고. 아휴, 여름내 그렇게 먹고살았어, 우리가.
    (그리고 그때) 통통배도 못 다녔죠. 인민군이 아니까, 소리 나니까 그것도 달 밝을 때는 못 다니시고, 깜깜할 때만, 달 안 뜰 때만. 노 젓는 걸로다가 해서 아버지하고 작은아버지하고 두 분이 밤에만 월미도 집에 몇 번 오셔서 먹을 것도 갖고 오시고 옷도 갖고 오고 이불도 좀 갖고 오고 그러셨는데. 세 번째 오셔가지고는 그것도 또 누가 얘기를 했나보더래. 인민군들한테 일렀나보더래. 그래갖고 나가니까 배를 그냥 갖다 끌어다가 언덕에다가 다 끌어다 놨다 그랬잖아요. 큰 배는 영종도 갔다가 이렇게 언덕 있는 데까지 물이 많이 들어오니까 배를 거기다 갖다 놓고 말하자면 이렇게 오목한데다가 골목 같은 데, 거기다 갖다 짚을 갖다 놓고 아카시아나무 그런 거 베다가 배를 덮었었어요. 또 폭격할까봐.
  

8월 중순경부터 시작된 연합군의 공격

    그러고 이제 8월 중순쯤 함대가 들어오는 거예요. 함대 3대가 처음에는 월미도 안까지 못 들어왔어, 함대가. 월미도에서 포격할까봐, 월미도 안으로 못 들어오고, 월미도 바깥쪽에서, 함포를 몇 번 하고 가더라고요. 인민군들이 월미도, 저기 영종에도 백몇십 명이 와서 있었어요. 근데 함대가 들어와서 그렇게 함포 사격을 하는 걸 보고 인민군들이 런닝하고 하얀 바지만 입고 나무 그늘에 나와 앉아서 구경하고 앉았어. 거기서 뭐 자기네들이 대응할 수도 없잖아. 월미도에서도 대응을 하나도 안 해. 함대에다 대고 포 한 번 제대로 못 쐈어, 인민군들이. 그러니까는 이 인민군들이 여기 중부전선에는 별로 힘을 안 쓰고 남하로다가 전라도 경상도 쪽으로만 힘을 쓰고 내려가느라고 남한 저기 전라도까지 다 자기네들이 점령을 하려고 그래갖고 여기 서울 인천 이쪽 중부지방은 힘을 안 쓴 거야. 중대를 별로 안 남겨놔뒀던 거야. 그래갖고 월미도에서 밤에 땅굴을 파면, 쌀을 한 사람 앞에 4홉씩 줬대요. 밤에 9시부터 새벽 5시까지 땅굴을 파면은. 그러니까는 인천서 피난 못 가고 돈 가지고서 쌀을 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인천 시내 사는 사람들도 밤이면은 월미도 와서 다들 땅굴 파고 그러고, 그 쌀 받아가지고 가서 먹느라고 그러던 건데, 그냥 8월 보름 지나면서부터 그렇게 함포 사격하고 비행기가 와서 폭격하고. 3대가 와서 한바탕 하고 나면은 한두 시간 지나고 나면 또 와서 또 하고. 많이도 안 와. 꼭 3대씩 편대로 비행기가. 그러더니 나중에는, 우리말로다가 색색이라 그러잖아, 그 호주산 비행기. 그게 그냥 싹 나오고 가면 무슨 소리 나면, 그 비행기 벌써 어디로 가고 없어. 그게 와서 그렇게 폭격을 하고 그러더니 8월 10일, 9월 10일 되니까 상륙작전 하려고 그렇게 와서 비행기가 와서 폭격을 하고 함대가 들어와서, 어떤 때는 10대가 넘게 들어와서, 저 김포 비행장. 그러니까 인천 쪽에서 함대라고 대응을 안 하니까 나중에는 지금 율도 화력발전소 있잖아요, 그 앞에까지 가더라고 함대가. 거기 가갖고 거기서 김포 비행장까지 쏘더라고.
  

월미도에서 할머니 모시고 나오기

    그러더니 9월 10일 날 아침에는, 그 전에 그렇게 폭격을 하고 그래갖고 거기서 있던 사람들이 머리에 맞아서 죽은 사람, 또 팔 떨어져서 죽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할머니가 집이 세 개니까 그냥 거기 계신다고 그래갖고 계셨는데, 그게 폭격을 자꾸만 많이 하니까 아버지하고 작은아버지가 가서 할머니 모셔온다고 가셨는데. 우리 할머니가 머리가 하얗셨거든요. 근데 우리 할머니 그때도 팔십 가까이 되셨어. 그리고 여덟 살 먹은 사촌 동생하고 아버지가 왼손에는 조카딸을 이렇게 끼고 할머니는 다른 손으로 붙잡고 그러고 뛰는데도 거기다가 대고도 확 기관포 사격을 하더래요. 그래갖고 여덟 살 먹은 애니까 이렇게 껴안고 엎드리셔서 아버지 팔 밑으로 이렇게 들어갔으니까 안 맞았는데 할머니가 왼쪽에 계셨으면 기관포 사격 몇 방 맞았을 거라고 그러시더라고. 그래갖고 배를 타고 오시는데도, 수건을, 하얀 수건을 이렇게 흔들고 그러는데도 그렇게 기관포 사격을 하더래요. 영종도로 도로 오시는데 배에다 대고 기관포 사격을 해서 그냥 우리 작은아버지가 일어나서 수건을 들고 막 이렇게 후대불고 그러는데 나중에 아래쪽으로 내려오더니 이제 봤나보더래요. 그래갖고 기관포 사격을 멈추더라고 그러시더라고. 그래갖고 그때 당시에 월미도에서 그렇게 죽은 사람들도 많고⋯⋯.
  

월미도 민간인 마을에 방화와 폭격

    우리 원주민이 살던 동네는 지금 저 해양고등학교(국립인천해사고등학교) 있죠? 그 언덕 쪽에 살았었어, 남쪽으로. 거기는 뾰죽하게 나와가지고 다 돌산이었어요. 지금 공원 자리가 82호가 살던 동네야, 거기가. 근데 그들을 다 이주를 시킨 거예요. 그래갖고 집들을 좀 넉넉히 사는 사람들은 가장자리로다가 토지를 조금 더 넉넉히 사고 따로따로 지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일렬로 일곱 줄. 가운뎃줄은 손으로만 이렇게 끌고 다닐 정도로다가 이렇게 남겨놓고, 꼭 요만큼이지, 뭐. 그러는 데다가, 세상에, 가운데 가장자리에다가 휘발유 탱크, 기름 탱크 터뜨려놓고 거기다가 불을 질렀으니 그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겠어요. 9월 10일, 12일인가 그래.6 상륙은 그 나중에 했고 그렇게 가장자리에다가 그냥 비행기가 휘발유를 떨어뜨리고 그냥 거기다 불을 지른 거예요. 민간인들이 있는데, 민간인 마을인데. 82호가 거기 살았어. 그래갖고 거기서 우리 원주민은 11명 죽었는데 11명뿐만 아니라 인천 시내에서 땅굴 파러 들어와가지고 집들이 비어 있으니까 거기서 잔 사람들이 여럿 있대요. 거기 가서 밥도 해 먹고 자고 하던 그 사람들 다 죽은 거예요.
  

친한 친구 성희의 죽음

    월미도에서 9월 15일이면 위령제를 지냈거든요. 내 제일 친한 친구야. 불쌍하기도 불쌍하고. 8·15해방되던 해, 콜레라로다가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 많이 죽었어요. 그때 월미도에서 사람이 열몇 명이 죽어 나갔어. 근데 다 죽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트럭으로 다 싣고 갔어. 근데 걔네는 아버지, 엄마랑 돌도 안 된 애기랑 셋을 다 실어 갔어. 그래갖고 큰오빠는 큰집이 자식이 없어서 큰집으로다 양자를 갔고. 둘째 오빠가 그때 당시 열여덟 살 먹고 성희가 나하고 친구가, 열여섯 살 나보다 한 살 더 먹고 그 밑에 동생이 열네 살인가 먹었었어요, 남동생이. 그렇게 사는데 너무 먹고사는 것도 힘들고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시고 하니까 학교들도 못 갔지. 학교도 못 가고 그러면은 우리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 이제 학교 갔다가 없는 동안에는, 우리 집에 와서 동생들 업어주고 어머니 심부름하고 그러고 와서 밥도 좀 같이 먹고 그러면은 우리 어머니가 그러셔. 쟤가 어쩌면 저렇게 착하냐. 저 먹으라고 뭐 주면 저 안 먹고 갖다가 제 동생 먹인대요, 그렇다고 착하다고. 그러면은 나 학교 갔다 오면 저녁에 와가지고 내가 학교에서 공부한 거 와서 그거 배울라고. 곱셈 같은 거 하고 한자 같은 거. 우리도 학교 다닐 때 한자도 꽤 가르쳤거든. 그런 거 배우러 와가지고 저녁에 그냥 밤 11시가 되도록 안 가고 공부를 하고 그랬었거든. 그랬는데 타 죽는 바람에. 오빠하고 걔하고 밑에 남동생하고 셋이가 한 덩어리가⋯⋯ (울먹이며). 아버지가 갔다 오시더니 그렇게 불타고 난 뒤에 갔다 오시더니, “야. 그거 태욱이네 애들이, 셋이가 다 죽었구나.” 그래서 “아유 아버지 왜? 왜 도망을 못 가고 죽었대?” 그랬더니 앞에 줄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나갔는데 뒤에 있는 사람들은 못 나온 거야. 그러니까 셋이가 이렇게 엉겨 붙어서, 한 덩어리로 타 죽었더라고.
    그래갖고 맨 앞줄에 있던 우리 집도 다 탔으니까. 아무것도 없고 그냥 뭐 삽 하나도 없고 그러니까. 우리는 그때 당시에 영종 가서 있었고, 우리 배에 선원 한 사람이 우리 집을 지키고 있었어요. 근데 그 아저씨만 계시다가 그 맨 앞에 줄이니까 그 아저씨만 도망을 오신 거예요. 내일 가가지고 연장 갖고 가서 밭에다가라도 (시신을) 파묻고 와야지 되겠다 그러셨는데, 그 이튿날 그냥 상륙작전을 하니까, 새벽부터 상륙작전을 하니까 꼼짝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거기서 그 원주민들 죽은 사람들도, 유골 하나도 못 찾았어, 하나도. 그렇게 타서 죽었는데 가족들이 들어가서 흙만 그냥 덮어놓고, 내일이라도 와서 다시 좀 옮겨야지 되겠다 그랬는데 상륙작전을 하니까 못 들어가잖아요. 그러니까 탱크랑 그냥 불도저가 다 밀고 가서 월미도 사람들 유골 하나도 못 찾았어. 몇 명 죽은 거는 확실히는 모르고, 내가 아는 죽은 사람은 여덟 명인가 아홉 명밖에 안 돼요. 위령제 지낼 때 그것밖에 안 돼. 다른 사람들도 많이 죽었죠. 다른 사람들은 이제 객지에서 들어와서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몇 명이 죽었는지) 모르지.
  

1·4후퇴 시 군산으로 피난

    영종도에서 인천으로 온 게 9월 말, 학교 개학한다고 오라고 그래갖고 만석동(인천 동구) 우리 외갓집 제재소 사택으로 와서 살았어요. 그랬다가 또 1·4후퇴 때, 우리 아버지 그거, 배 타고 스물여덟 식구가, 하하하, 군산까지 갔죠.
    진짜 혼나기는 1·4후퇴 때 혼났지. 지금 저 대한제분 앞에 그쪽이 6·25사변 때는 선창이었어요. 거기서 이제 우리 식구들이 다 타고 짐도 싣고 그랬는데 군인들이 오더니 배를 징발을 하겠다는 거야. 우리 국군이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어쩔 수가 없어서 스크루를 빼놓으셨다고 그랬대. 군인들이 와서 당신네 개인 식구들은 다 내려가라고. 그래갖고 우리 어머니랑 할머니가 막 울고 했었는데.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스크루 끼울 재간이 있으면 저거 고장 나서 우리도 못 가고 있으니까 저거 고쳐서 가지고 갈 수 있으면 갖고 가라. 그런데 군인들이 배 그걸 뭘 알아 기계를 알아? 모르지. 그러니까 한 사람이 여기저기 들어가 보고 그러더니 여기 왜 이거 스크루가 없냐고 그러더래요.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가 지금 이거 고장 나서 우리도 피난을 못 가고 있는데 여기 공장에 어디 가서 이거 고칠 데가 없다 그러셨대.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군인들이) 그냥 갔는데, 우리 아버지가 얼음물 속으로 스크루를 끼러 들어가신 거야. 얼음물 속에 물을 휘저어야지 배가 가니까. 그 스크루를 그 얼음 둥둥 뜬 데, 그걸 끼시러 들어가셔서 한 시간이 넘게 바닷속에서 그걸 하시는데 우리 어머니 그냥 손을 이러고 빌고 문지르고 바깥에 나와 서셨고 그냥 우리들은 아버지 죽을까봐 어머니~ 울고 흐하하핫. 그러고 나섰는데 얼른 불 있는 데로 안 들어가시고 그 배 위에서 선원들 보고 문지르라고 그러시데. “내 몸을 다 문질러라.”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이렇게 두드리고 문지르고 그러시더니 그럴 때 뜨거운 곳에, 뜨거운 데 얼른 들어가면 죽는다고. 포대기를 갖다가 뒤집어씌우고. 뜨거운 데 들어가면 안 된대. 그냥 살이 빨개. 그래갖고 다들 두드리고 그래가지고 기계가 이제 윙 하고 돌아가가지고, 배를 갖고 이제 가는데 어, 얼마 한참 가다 보니까 그거 짐 싣고 쌀 싣고 그러고 가방 이렇게 덮어놓은 데서 세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이북서 피난 나온 사람이 숨어 있었어. 내외하고 아들 하나하고 어느 틈에 거기를 들어가서 숨어 있던 거야. 우리 배에 밀가루하고 안남미 실어놓은 거기 들어가서 숨어 앉았었어, 세 식구가.
  

배에 원조 식량 싣고 피난 가기

    그때 당시 그 선창에다가 미국서 식품 온 거를 이북서 피난 온 사람들 준다고 쌓아놨는데. 밀가루가 한 포대에 40킬로였어요. 처음에, 미국에서 들어와서 밀가루가 참 좋았었어요. 근데 40킬로야, 한 포대가. 그리고 안남미도 그 40킬로 자루에 하나씩 들은 건데. 그런데 그거를 미처 다 국군들이 실어 가지 못하고 인민군들이 들어오게 생겼으니까 불을 지르더라고, 그걸 태우더라고요. 그러니까는 그 곁에 있던 사람들, 피난 가려고 나와 있던 사람들이 우리 먹게 두지 왜 그렇게 불을 지르냐 그랬더니 군인들이 뭐라 그러냐면은 인민군 안 먹이고 자기네가 먹을 수 있으면은 가져가라 이거야. 그래갖고 우리는 그때 식구가 배 선원 가족이랑 우리 이모님네 가족이랑 28명이야. 그거 그 배에다 다 싣고 가야지 되는데 어디 가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선원들이 어디 가 쌀을 사게 될지 못 사게 될지 모르니까. 그래갖고 밀가루도 한 30포 싣고, 안남미도 몇십 포 싣고 갔는데 거기 배 위에다가 실어놓고 가방을 덮었는데, 그때는 좀 추워서 바닷물이 깨끗하고 그러니까 성애가 이만큼씩 얼었었어. 얼음덩어리가 바다에 둥둥 떠다녔어요, 이만한 게 배를 쿵쿵 두드리고 그랬었거든.
  

피난 가면서 만난 섬사람들

    식구들이 그거(안남미) 갖고 간 거 있으니까, 또 우리 식구가 다 안 먹으니까 팔기도 팔고. 밀가루는 내려가면서 충청도 이 해안 쪽으로 내려가면서 몇 포대를 뜯어서 우리 아버지가 그 섬에서 그 못사는 사람들은 다 그냥 나눠주고 가셨어. 조그만 섬에 아휴 저 저기 섬에 내려가면서 보니깐요. 이렇게 하고도 사람이 사나 싶을 정도로 어린 나이에도. 새색시랬는데 양말도 버선도 없이 그냥 짚신 한 켤레야, 짚신. 게다가 속에 입은 옷도 그 집에서 그거 광목 짠 거 있잖아요. 그걸로다가 바지 하나. 속바지 하나. 치마 하나. 우에도 그냥 적삼 하나. 그걸로 다 겹저고리 해서 하나. 그렇게 입고 그냥 물동이 이고 물 길러 다니고. 집에 보니까 방이라고 보니까 흙냄새가 풀풀 나고 이게 벽지 그런 게 하나도 없어. 그냥 흙이야. 방바닥도 커다란 왕골. 그거 자리 깔고 도배라고 붙이는 게 하나도 없어. 그래도 아프리카 지금 그 사람들보다는 나아. 불 때고 아궁이 있고 문 닫고 비 새고, 뭐.
    그 집 아랫방을 내줘서 거길 들어가서 있는데 밥을 해가지고 식구 수대로다가 그 옛날 사발을, 이렇게 벌어진 사발이 있잖아요. 다섯 식군가, 시아버지 시어머니 다섯 식구구나. 아들 며느리, 근데 며느리가 그때 당시에 열여덟 살인가 그렇게 먹었다 그래. 그냥 시골 여자인데 그렇게 이쁘게 잘생겼더라고. 시누가 하나 있고 그러는데 그 며느리가 밥을 한 그릇을 자기가 먹질 못하더라고. 자기 밥도 똑같이 퍼줬는데, 자기 밥그릇에서 시아버지 덜어주고 자기 남편 덜어주고 또 시누가 와서 뺏어가고. 그러다 보니까 밥을 반도 못 얻어먹더라고. 따로 줬는데도, 며느리가 밥을 그렇게 덜어서 주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부엌에서 저기하면은 눌은밥이라도 더 먹으라고. 그러면 시어머니가 나와서 그래. 우리 애기 배 늘리지 말래. 세상에 지금 그렇게 먹다가 당신네들 가면은 그거 지금 먹던 배를 어떻게 채울 거냐고 더 주지 말라고 그래. 나이 어린 며느리를 데려다가 그렇게 시집살이를 시키더라고.
    4월 달에는 올라오다가 그 섬에 또 갔는데 가서 보니까 보리쌀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칡을 캐다가 깨끗이 씻어갖고 껍질 다 벗겨갖고 씻어갖고 절구에다 찧더라고. 그러더니 그거를 또 맷돌에다 갈아. 그래가지고 그걸 자루에다가 넣어가지고, 그게 녹말을 안치는 거예요. 녹말을 내갖고, 우리네는 그걸로다가 수제비를 해주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잖아. 다른 거 같지 않고 그거 칡 분말은 정말 맛있더라고.
  

군산에서의 피난 생활

    군산 가서 4월 달까지 있다가 왔지. 그때 당시에는 우리 아버지가 개인으로 장사를 못하시니까, 우리 배를 이제 한염7에다가, 한염에서 배도 세를 가져갔고 우리 아버지도 이제 월급쟁이로 그 한염에 거기에, 그 회사에 이제 매인 거지.
    피난민들 아침이면은 그 추운데도 5시만 되면 일어나서 새벽에, 군산시청에 가서 줄을 서야지 돼. 내가 제일 일찍 일어나서 가서 줄을 서 있으면은, 우리 언니는 첫애기 낳은 거 업고, 그리고 우리 형부도 군인 갔으니까, 아침 해 먹고 그러고 8시 넘으면 이제 나하고 교대해주러 와, 언니가. 군산시청에서 시장이 우리가 피난 오신 분들 이렇게 극진히 대접을 하니까 어디 가면 전라도 사람들은 구박하지 말아라, 이거야. 옛날에는 전라도 사람들, 경기도 이쪽 사람들이 구박을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하지 말으라고. 그래갖고 그때도 쌀을 한 사람당 하루에 5홉씩 줬었어.
    근데 6·25사변 때는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1·4후퇴 때는, 배를 타고 그렇게 다니니까, 우리는 고생하는 걸 몰랐어. 1·4후퇴 때는 밀가루 그렇게 싣고 가고 그래갖고. 안남미 가지고 군산 가가지고 그것도 흰떡 빼다가 먹고. (인민군이) 군산까지 안 들어왔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그냥 방앗간도 하고 뭐 다 시장도 있고 다 하니까 안남미 가지고 방앗간에 가서 떡 빼다가. 선원들이랑 같이들 나눠 먹고. 아주 6·25사변 때 그 여름 동안에 제일 힘들었어. 돈을 가져도 살 수도 없고.
  

피난 이후 영종도에서

    우리는 그때 1·4후퇴 때 인천 와가지고 만석동에서 한 달 살다가 나중에는 전동, 그리 왔지. 헌 집 사가지고 고쳐갖고, 방 두 개 있는 거. 만석동서 우리 외갓집 제재소 사택에서 한 달 살다가 전동으로다가 이사 왔어. 거기서도 몇 년 못 살았어요. 그래갖고, 또 영종으로 건너갔지. 난 열여덟 살에서부터 스물세 살까지 영종도 살았지.
  
  

인터뷰 및 정리 | 인천여성가족재단

인천발전연구원 여성정책센터와 인천여성문화회관이 통합되어 2013년 출범. 여성가족정책 연구, 여성사회교육, 일자리지원사업을 선도적으로 추진하고 있음. 2021년 인천여성에 대한 생애구술사 자료 구축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2022년부터 ‘인천여성이 경험한 한국전쟁과 분단’ ‘인천지역의 공단과 여성의 공장노동’ ‘부평 주한미군기지와 인천여성의 삶’ ‘인천여성의 상업과 점포 운영’ ‘다도 인천, 여성과 섬 이야기’로 세부 주제를 선정하였다. 2023년 현재 두 권의 책을 출판하였다.

  
  

〈주석〉

  1. 당시에는 ‘국민학교’가 맞는데 구술자는 박문초등학교로 구술하였다. 즉, 구술자는 국민학교와 초등학교 둘 다를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다.
  2. 월미도에서 한일관계가 평화로웠던 것은 이 지역이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을 위한 유원지로 개발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조탕, 별장, 요정, 해수풀장이 있던 지역적 특수성으로 일제는 이 지역에서의 한일 갈등을 원하지 않았을 수 있고 유화정책을 폈다고 추정된다.
  3. 천인침(일본어: 千人針 센닌바리)은 태평양 전쟁 중 일본에서 유행한 풍습이다. 전쟁에 참전한 사람의 무운장구를 빌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정성을 모아 함께 기원하는 행위이다. 1m 정도의 길이인 흰 천 하나에 붉은 실로 천 명이 한 땀씩 꿰매어 만들어준다. 천인침은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하여, 총탄이 피해 가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천인침을 받은 군인은 배에 두르거나 모자에 꿰매어 항상 소지한다. 1938년에는 이 풍습을 소재로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인 〈천인침〉이 제작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였던 조선에도 이 풍습이 전해져, 조선인 최초의 중일전쟁 전사자 이인석의 어머니가 이인석에게 천인침을 전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여성을 묘사한 김영희의 장편소설 『센닌바리』(1999)도 이를 소재로 삼고 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C%B2%9C%EC%9D%B8%EC%B9%A8; 이안재(2003년 9월 27일), “발굴 옥천 현대사-형님이 이용당한 것”, 《옥천신문》, 2022년 11월 4일에 확인함; 오정국(1999년 2월 8일), “김영희씨 장편 ‘센닌바리’ 일제말 징용사 한땀씩 수 놓아”, 《문화일보》, 2022년 11월 4일에 확인함.)
  4. 용궁각(龍宮閣)은 월미도 소재 일본 요정으로 대단히 유명한 곳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전소되었음.
  5. 대동아전쟁은 일본의 전쟁 정당화 용어로 패전 후 폐기하기로 했고 ‘태평양전쟁’이란 표기가 맞다. 여기서는 구술자가 말한 대로 표기하였다.
  6. 폭격은 9월 10일에 일어났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월미도 미군폭격 사건」,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2권』, 11쪽 참조.)
  7. 한염해운주식회사의 약칭. 1928년경 설립되어, 해방 후 문순모가 인수하여 미군수물자 하역 작업을 도맡으면서 성장 가도를 달리다가, 1997년 IMF 외환 위기와 함께 내부 부정부패 사건 등을 겪으면서 폐업하게 됨. 《인천일보》 1999. 4. 27. 구술자는 소금 회사로 기억하나 이것은 아니고 소금을 운반했던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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