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무게를 아는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포개는 일: 재난참사피해자연대 그리고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눈물의 연대, 재난참사피해자연대

    2023년 12월 16일 토요일 오후 2시.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렸다. 서울역 인근에 자리한 공간에서 열린 〈곁들의 날〉 행사장에는 우려와는 달리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리를 채워 앉았다.
  

재난참사피해자연대 발족선언 1 ⓒ 정택용

    우리는 재난참사 피해자입니다.
    1995년 502명의 생명을 앗아갔던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1999년 19명의 어린 생명이 스러져버린 씨랜드 화재 참사, 1999년 57명의 생명을 잃은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2003년 192명 시민이 화염 속으로 사라져버린 2·18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011년에서야 세상에 알려져 현재까지 1,825명의 생명을 놓쳐버린 가습기살균제 참사, 2013년 5명의 희생자를 낳은 7·18 공주사대부고 체험학습 참사(구 태안 해병대캠프 참사), 2014년 우리 모두를 목격자로 만들었던 304명이 별이 된 4·16 세월호 침몰 참사, 2017년 태평양 앞바다에서 아직 돌아오지 못한 21명을 남긴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참사 여덟 개의 참사 피해 가족들은 지난 2년간 따로 또 함께 만나왔습니다.

─「재난참사피해자연대 발족선언문」 중에서

    발족선언문을 다 읽어 내려가기도 전에 곳곳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저는 ○○○의 엄마입니다.”로 말문을 열었던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유족회 어머니가 아직도 아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고 이야기를 어렵게 이어갔다. 그녀를 포함해 여덟 개 참사 대표자의 모든 자기소개에는 떠나보낸 가족의 이름이 붙었다. 온 우주와 같은 생을 안타깝게 마쳐야 했던 이름이었다. 누구든 꼭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커다란 슬픔을 지켜보며 곳곳에서 조용히 눈물을 훔치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모든 참사는 너무도 닮아 있었습니다. 참사를 외면하고 지워버리는 사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것처럼 대하는 정부, 우리의 진심을 곡해해 시민들 앞에 모욕감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언론, 잊고 가슴에 묻으라고 하는 이웃이나 친척들까지, 재난참사 피해자인 우리를 대하는 모든 사람의 태도는 한 발자국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 한 번도 참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고, 우리의 목소리와 진심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간 참사는 계속 반복되어왔고, 더 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은 참사를 여러분들이 겪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가피하게 동일한 상황에 처한다면, 곁으로 찾아가 여러분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자 합니다. 우리처럼 오래, 우리만큼 깊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생명안전 사회를 꿈꾸며 모였습니다. 여덟 개 참사 피해 가족은 2023년 11월 18일 총회를 시작으로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재난참사피해자연대 발족선언문」 중에서

    그렇게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 동안 준비해온 ‘재난참사피해자연대’가 발족했다.
  

가장 어려운 단어, 역지사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단어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라는 의미.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참 어려운 말이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고통을 ‘안다’고 말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는 일, 그 죽음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일, 수없이 폄훼 당하고 오해받으며 살아가는 일을 겪는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을 10년간 지켜보면서,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좁혀질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마음을 아는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은 재난참사가 발생하면 최대한 빨리 현장을 방문했다. 재난 현장을 방문해 힘을 보탤 일을 찾았고, 조문객으로 장례식장을 찾아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2018년 12월 10일 발생한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사고가 있던 날도 함께했다.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은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와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부터 바깥으로 물렸다. 주변에서 용균이 엄마에게 밥이라도 한술 떠야 살지 않겠냐고 식사를 권하자 ‘지금 밥이 넘어갈 거라 생각하느냐. 한 끼 안 먹는다고 안 죽는다. 권하지 마라.’며 옹호했다. 그때서야 ‘숨이 좀 쉬어진다.’며 용균 엄마가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다고 한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날은 숙박 일정을 진행 중이었다. 아침에 만난 엄마들은 한잠도 못 이룬 얼굴이었다. ‘어쩌냐.’ ‘우리 아이들 나이 또래가 많다는데, 아까워 어쩌냐.’는 말을 반복했다. 곧 시민분향소에서 조문을 하고, 참사 현장을 방문했다. 이태원 피해 가족에게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기다려보자.’는 말과 함께 관심을 두고 있었다. ‘10·29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를 만들고 일부 유가족들이 4·16 세월호 참사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조심스럽게 전했을 때, 망설임 없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으로 찾아갔다. 들려오던 이야기에 따르면 피해 가족 중 누군가는 사회의 시선 탓에 조심스러워한다고 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10·29 이태원 유가족의 여건을 고려해, 온라인을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모든 걸 맞추어 비공식적으로 한 번, 공식적으로 두 번 만났다. 인상적이었던 만남은 2023년 10월 11일이었다.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 엄마들이 진상규명 주제 외에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며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 엄마들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4·16재단과 4·16 세월호 참사 유가족협의회가 운영하는 4·16꿈숲학교를 찾아온 엄마들이 봇물 터지듯 질문을 이어갔다.

    “아이의 생일은 어떻게 지내야 하나요?”
    “아이의 유품은 어떻게 하셨나요? 아이의 방은 그대로 두셨나요?”
    “남겨진 형제자매가 이런 행동과 말을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친인척이 위로라고 하는 말에 자꾸 상처를 받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이라면 한마디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재난참사라는 단 한 번도 나에게 찾아올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마주하고, 주변을 둘러봤을 때 아무도 그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먼저 고통의 시간을 지나온 재난참사 피해 가족만이 진심을 담아 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꼭 필요한 자리였지만, 아픈 자리이기도 했다.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가장 좋았을 뻔했습니다.”

    오후 3시에 만나 인사를 하던 자리에서 4·16 세월호 참사 유가족인 엄마가 눈물을 참으며, 건넨 인사말이었다. 다른 참사 피해 가족을 만나는 날이면, 모두 무척 고단하다고 했다. 현장에서는 안정제를 먹어야 할 만큼 답답하다는 엄마도 있었고, 끝까지 견디지 못해 자리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참사 첫날의 감정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쉬운 만남은 아니지만, 누구도 대신할 수 없으니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2014년 4월에도 다른 재난참사 피해 가족이 팽목항과 광화문광장 등으로 찾아와 건네준 위로의 말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제언이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힘들지만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손잡기를 선택한 가족들도 있었다. 오후 3시 15분에 시작한 만남은 ‘4·16기억교실’을 방문하고, 저녁 식사 자리까지 이어져 밤늦은 시간에야 끝났다. 묘한 어색함과 긴장감이 흘렀던 처음과는 달리, 엄마들의 얼굴에는 믿을 만한 동료가 생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환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2014년에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 너무 괴로웠어요. 내가 좀 더 열심히 싸우지 않아서 저런 참사가 또 발생했을까. 미안해서 어쩌나 싶었죠. (중략) 1995년에 발생한 참사나 2014년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 2022년에 발생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정부의 행태를 보며, 어떻게 수십 년 동안 하나도 바뀌지 않았을까?”

    새로운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생각했다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유가족인 김문수 님을 포함해 2021년 이후 만나온 여덟 개의 참사 유가족들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전했다.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도와야지요. 함께해야지요.”

    누구보다 참사가 다시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발생할 수 있는 재난참사 피해 가족의 언덕이 되겠다고 나선 이들이 재난참사피해자연대의 피해 가족들이다.
    

재난참사피해자연대 발족 선언 2 ⓒ 정택용

  

세상에 닿지 못한 목소리들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과 시민의 출연금과 후원으로 2018년 4·16재단을 발족했다. 시민들의 염원을 담아 꼭 해야만 하는 일은 무엇일까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포함해 여러 숙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지만, ‘아이들이 마음껏 꿈꾸는 일상이 안전한 사회’라는 비전에 부합하는 방향을 정해야 했다.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을 통해 새롭게 이야기하기 시작한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널리 알리고 정착시키는 일이 여러 방향 중 하나였다. 2019년 〈재난사회, 피해자 권리를 묻다_재난 현장에서의 피해자 권리,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 국제포럼과 2021년 〈재난참사 피해자 그리고 권리 온라인 포럼〉으로 사회에 화두를 던졌다. 영국 Disaster Aciton의 앤 에이어는 살아남은 희생자가 다른 참사 피해 가족을 돕는, 상처 받은 치유자로서의 활동 경험을, 프랑스의 FANVAK의 재난참사 피해자 소피아 벤아집은 국가와 함께 피해자의 권리를 공식적으로 보장받는 사례를 발표했다. 광주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어머니인 김길자 어머니가 4·16 세월호 참사 엄마들에게 “자식 잃은 고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제. 당신 원통함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소.”라고 했던 것처럼,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이 10·29 이태원 참사 피해 가족을 위로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며, 연대가 가진 힘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미 걸어온 피해자가 피해자를 돕는 연대의 가능성은 확인하였으니, 이제는 움직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재난참사 피해 가족을 만나는 일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참사를 겪은 모든 피해자들이 다른 참사 피해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재난참사를 겪고 나면, 내가 세금을 내며 믿었던 대한민국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신뢰를 잃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만났던 정부 관계자는 ‘재난참사 피해를 복구한다는 정의를 참사 현장을 빠르게 치우는 것’으로 인식하고 행동했다. 2·18 대구지하철 참사 때에는 참사 당일 증거 물품인 열차를 옮기고, 바로 다음 날 현장을 물청소했다. 열차는 이후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져, 시신의 일부를 쓰레기 더미 속에서 피해 가족이 직접 찾는 일도 있었다. 2·18 대구지하철 참사를 포함해 다른 참사 현장에서도 피해 가족이 피해자가 현장에 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구조 활동을 위한 정부의 역할이 미진해, 피해 당사자들이 의견을 제시하고 나서야 이행되는 일도 있었다.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예의를 갖춰 인계하는 일이 10·29 이태원 참사 때까지도 드물었고, 때로는 희생자의 시신이 바뀌기도 했다. 참사가 발생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를 기다리는 가족들도 있다. 정부는 개개인별로 만나 ‘배상과 보상을 받고, 삶으로 빠르게 돌아갈 것’을 권했다. 배·보상을 받는 과정에서도 외국인이거나, 아르바이트생이어서 차별을 겪어야 했다. 24년이나 시간이 흐른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유가족 중에는 아르바이트생이라는 이유로 아직 제대로 된 배·보상을 받지 못한 가족이 있다. 4·16 세월호 참사와 10·29 이태원 참사에서 외국인 희생자와 그들의 가족들은 차별받고 있다.

    어떤 참사에서든 적극적으로 구조하는 정부를 경험한 이들은 드물었고, 복구와 회복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신뢰는 무참히 깨어져버렸다. 가족의 죽음에 대한 제대로 된 이유조차 모른 채 살아야 함에도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 있거나, 책임자에게 사법적으로 제대로 된 책임을 묻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씨랜드 화재 참사나 7·18 공주사대부고 체험학습 참사처럼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영업장들이 참사 현장 혹은 멀지 않은 곳에서 현재까지도 버젓이 영업을 하는 사례가 있을 정도다.

    언론은 배·보상 금액으로 힐난하고, 정부 고위직 공무원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들로 피해자인 국민을 조롱하며, 이웃들도 가슴에 묻고 살 것을 종용한다. 재난참사의 원인을 사회구조에서 찾지 않고, 그 장소에 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한다. 참사 발생 후 세월이 많이 흘렀음에도 제대로 된 추모 공간이 없거나 이로 인한 동네 주민과의 갈등으로 2차 가해를 오롯이 피해 가족들이 경험해야 했다. 모든 과정에서 재난참사 피해 가족들은 끝없는 혐오와 차별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를 겪으면서 심리적 외상을 입고, 신체화 증상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겪은 일을 누군가가 겪지 않기를 바라며 나서는 피해 가족은 큰 용기를 내는 것이다. 다른 재난참사 피해자의 곁이 되겠다는 결심을 내기까지 각 재난참사 피해자 단체 내에도 설왕설래가 있었다고 한다.

    2022년 한 해 동안 재난참사 피해 가족을 단위별로 만났다. 이미 그 전부터 교감이 있었던 피해 가족도 있었지만, 긴장감이 있는 피해 가족 단체도 있었다. 2·18 대구지하철 참사를 제외하고 재단법인에 대한 경험이 없었고, 재단법인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과 함께 만날 것을 요구하거나, 4·16 세월호 참사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피해 가족도 있었다. 피해자 단체의 대표자는 호의적이지만, 해당 단체의 다른 가족들과 함께 만났을 때는 앞에 제시된 이유들로 ‘그게 되겠느냐.’ ‘의미가 있는 일이냐.’ ‘상처만 덧날 뿐이다.’라면서 부정적인 의견을 내는 가족도 있었다.
    총 열한 개의 참사 피해 가족을 만났다. 4·16재단이 제안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함께 만들자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4·16재단 부설센터로 만들게 될 재난참사 피해자 권리를 옹호하고, 이를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자 하는 재난피해자권리센터와 함께 활동해달라는 것이었다. 2022년 당시 집중해서 해결해야 하는 현안이 있는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광주 학동 참사, 10·29 이태원 참사, 오송지하차도 참사를 제외하고 여덟 개 재난참사 피해 단체의 참여 의사를 전달받았다. 이후에는 서로를 알고, 서로의 시각을 맞추기 위한 네 차례의 권역별 모임을 추진하였다. 서로의 최근 상황을 나누고, 재난참사피해자연대를 통해 함께 이루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 나누었다. 영국과 프랑스에 있는 재난참사 피해자 단체의 활동에 대한 학습도 함께했다. 이들을 만나면서 몇 가지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피해자들은 모두 뜨거운 감자를 가지고 있었다. 재난참사의 진실이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거나, 추모공원 혹은 추모식으로 인한 내외부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배·보상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관계부처와 풀어야 할 문제도 남아 있었다. 사회적 도움 없이 소수의 피해 가족만이 해결하기 위해 외롭게 싸우고 있었다.
    둘째, 발생한 지 20년이 넘은 재난참사의 경우, 피해 가족들의 노령화로 추모식을 장기적으로 운영하기 어렵거나,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재난참사로 인한 심리적 외상에 대한 체계적인 지원을 받은 사례는 없었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인한 분노조절장애 등으로 피해 가족 안의 갈등이 심각한 경우가 많았다. 4·16 세월호 참사와 스텔라데이지호 침몰 참사, 10·29 이태원 참사, 오송지하차도 침수 참사를 제외하고, 시민사회단체의 지원을 받은 경험이 없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일수록 외부 지원은 부족했다. 이는 재난참사에 대한 민간 및 공공의 중장기적인 지원체계와 경험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셋째, 30년 전에 발생한 참사나 최근 1년 이내에 발생한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큰 차이가 없다는 의견을 냈다. 구하지 않는 정부, 책임지지 않는 정부, 피해자를 비난하는 정부라는 점에서는 나아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개선하지 않으면 자신이 겪었던 피해를 다른 사람들도 반복적으로 겪을 것이니, 이를 바꾸어야 한다는 의견을 강하게 제시했다.

    이러한 특성들은 향후 재난참사피해자연대의 활동 방향에 영향을 주었다.

1. 우리는 재난참사 피해자와 연대하고, 함께 대응하고자 합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느낌을 종종 가집니다. 정부를 믿고 살았던 내가 무색하도록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의 경험을 정리하고, 재난에 대해 학습하며, 함께 대응하고자 합니다. 함께 행동하고자 합니다.

2. 우리는 재난참사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에 함께하고자 합니다.
   언제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간단했습니다. 소중한 가족의 생명을 잃은 원인을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생명이 꺼져가던 그때, 내 가족이 경험한 참사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함께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3. 우리는 재난참사의 재발 방지 및 안전사회를 추구합니다.
   누구보다 우리는 재난참사 피해 가족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활동이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의 초석이기를 바랍니다. 참사의 경험이 남긴 숙제를 사회가 배우고, 대안을 찾아 예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우리는 재난피해자권리센터와 함께 걷고자 합니다.
   4·16재단의 부설센터가 될 재난피해자권리센터는 피해자의 권리를 지키는 곳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기꺼이 센터와 함께하고자 합니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힘을 보태어 함께 걷고자 합니다.

5. 우리의 발걸음이 여러분들과 함께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곁에 여러분들이 있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혼자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손잡아준 시민을 기억합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고 생각해 함께 행동해준 시민을 기억합니다. 시민분들과 우리가 함께 안전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을 바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 함께이기를 희망합니다.

─「재난참사피해자연대 발족선언문」 중에서

    이러한 재난참사 피해자의 현실이 미약하나마 알려진 것은 4·16 세월호 참사 이후다. 국민 모두를 목격자로 만들었던 4·16 세월호 참사 이후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다른 재난참사의 경우, 정확한 발생 시기, 참사의 원인과 피해 당사자들이 현재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사회적 관심이 저조했다. 재난참사도 유행을 타는 것처럼, 1년 안쪽으로 사회적인 관심이 있다가 다른 참사가 발생하면, 곧 사그라드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생명안전버스 행사 사진 ⓒ 4·16재단

    다른 재난참사 피해 가족의 목소리를 대중적으로 알리고, 시민들과 함께 추모하는 일을 통해 안전한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자 기획한 것이 ‘4·16생명안전버스’다. 4·16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앞두고,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이 버스에 탑승하는 시민들과 함께 다른 재난참사 피해 가족들의 기일 혹은 주요 행사에 찾아가 추모식 혹은 기도회 참석 등 다양한 기획을 함께 곁들인 이야기 콘서트를 열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을 했다. 총 8회, 250여 명의 시민들과 함께했다. 28년 만에 추모곡을 가지게 된 삼풍백화점 참사 기일에는 4·16합창단과 노래가 있는 이야기 콘서트를 열었다. 씨랜드 화재 참사 기일에는 한국어린이안전재단을 견학하고 참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7·18 공주사대부고 병영체험학습 참사 기일에는 세상에 처음 나온 『피해자의 목소리로 다시 쓰는 백서_7·18공주사대부고병영체험학습참사백서』로 북콘서트를 열었으며, 2·18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와 상인동 가스폭발 참사가 있었던 대구 현장 곳곳을 둘러본 후, 대구 시민들과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피해 가족들이 연결되는 자리가 열렸다. 이후 대구 시민들은 매월 18일이면, 거리에서 대구지하철 참사를 기억하는 피켓팅과 문화제를 열고 있다. 현재에도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는 영화 〈공기살인〉(조용선 감독, 2022)을 시민들과 함께 관람하고, 피해 가족의 현실을 알렸다. 스텔라데이지호 기도회에 함께했던 생명안전버스에서도 피해 가족의 이야기를 전했다.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에는 시민 참여자들과 도보행진과 추모식에 함께하였으며, 처음으로 피해 가족들만의 독립된 공간을 가지게 된 인천 인현동 화재 참사 피해 가족을 추모식에서 만나기도 했다. 시민들이 자유롭게 참여하지 못하는 평일이라는 추모 기일의 특성을 고려하여 한 번을 제외하고 모든 일정을 유튜브로 송출하였다(4·16재단 유튜브에서 확인 가능). 수년간 외롭게 보냈던 추모 기일에 시민들이 발걸음을 보탰다. 곁이 되는 일에 기꺼이 먼저 실천해온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만이 아니라 여건이 되는 한 함께하고자 했던 다른 참사 피해 가족들과 이한빛(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어머니도 있었다.

    홀로 버티지 않기 위하여: 참사 유가족이 또 다른 참사의 추모식, 참사 현장을 찾아가 유가족을 만나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생명안전버스를 탄 것은 유가족의 외로운 손을 잡고 함께 기억하고 곁이 되어 서로 부축하고 위로받고 싶어서였다.

─「올해의 사진」 (《시사IN》 제849호, 2023. 12. 16.) 중에서
  

재난참사 피해자의 희망에 빚져 우리가 오늘을 살았다
이제 우리가 당신들이 살아갈 내일을 만들 힘을 채워갈 것이다

    2024년 1월 31일 늦은 오후 7시. 충무로에 있는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사무실 개소식에 10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재난참사피해자연대가 한 차례의 전국 모임과 다섯 차례의 준비 모임을 통해 11월 18일에 총회를 거쳐, 12월 18일에 발족을 했다면,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는 이들 중 대표자 2명과 인권·재난·사회·법률·심리 등의 외부전문가와 함께 준비위원회를 꾸려 준비해왔다.

    2022년 재난피해자권리센터를 처음 상상했다. 재난참사 피해자의 경험이 개인의 지우고 싶은 악몽이 아니라, 처음 참사를 겪는 피해자들에게 힘이 되는 연대이기를 바랐다. 재난참사 피해자가 사회적 활동으로 성장하고, 회복할 수 있는 교육을 기획하고자 했다. 재난참사 피해자에 대한 사회의 지원이 모멸감을 견디는 시혜적인 관점을 벗어나 권리로 보장받기를 원했다.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가 피해자만을 위한 선언적인 권리가 아니라, ‘재난 상황에서도 사회구성원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안전망’이 있다는 믿음이 되기를 상상했다.

    지난 2년간 재난피해자권리센터를 준비해왔다. 4·16 세월호 참사 피해 가족들과 함께 ‘재난안전 전문가과정’을 기획하고 학습했고, 현재까지 총 11명이 수료했다. 재난 현장을 지원하기 위한 전문적인 교육과정이었다. 재난에 대한 이해, 한국의 재난구호 시스템에 대한 이해, 심리적 지원에 대한 이해와 훈련, 실습 등을 배웠다. 향후 이들이 재난 현장에서 다른 참사 피해자들의 곁이 되고, 회복하는 데 동료가 될 것이라 기대한다. 재난 현장의 사각지대를 지원하는 긴급지원사업을 진행했으며, 피해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4·16긴급콜(1668-2014)’을 설치했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만으로는 여력이 부족할 수 있으니 관련 기관, 단체 10곳과 협약을 체결했으며,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재난 피해자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기 위해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개발하여 홍보하는 중이다. 『피해자 권리 매뉴얼』을 만들어 배포하고, 〈생존자의 기억법〉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영했다(SBS 방영, 현재 Wavve 시청 가능). 카드뉴스로 재난참사 피해자의 권리에 대한 콘텐츠를 만들어 인스타그램으로 알렸다. 메타버스 플랫폼에 〈우리가 다시 쓰는 이야기〉 공간을 만들어 재난참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미션으로 구성하여 운영 중이다. 이를 경험한 시민들은 ‘재난참사에 대해 잘 몰랐다.’ ‘피해자들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과정이 되었다.’라는 간단한 소회부터 자신이 목격한 재난참사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길게 작성하며 공감을 드러냈다.

    개소식에서 유해정 센터장은 “재난참사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겠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피해자 곁에 있겠다고 약속하지도 않겠습니다. 그저 재난참사 피해자들의 우직한 곁이 되겠습니다.”라고 개소 인사를 전했다. 우리는 재난참사 피해자들이 만든 정책과 제도로 지금까지 운 좋게 살아남아 있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이후, 건축법규 및 건축규제가 강화되어 살아남은 우리가 안전한 건물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2·18 대구지하철 참사 이후에 한국 사회는 열차 내장제를 난연·불연제로 교체하였다. 도시철도 기본계획에 안전관리가 포함됨으로써 상향된 안전관리 기준으로 지금의 안전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홀로 애써온 피해자들의 곁에서 미래의 재난참사 피해자들이 살아갈 내일을 만들 힘을 만드는 곳이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가 되리라 희망한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개소식 ⓒ 정택용

  
  

박성현

1979년 부산 출생. 4·16재단 나눔사업 1팀 팀장. 전(前) 안산 지역사회 공동체 회복을 위한 복지관 네트워크 ‘우리함께’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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