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으로 찾아가는 교동도

  

1. 교동도 가는 길

    2024년은 교동대교가 개통된 지 10주년이 되는 해이다. 교동대교가 개통되면서 교동도는 인천에서 핫한 지역 중의 한 곳이 되었다. 각종 TV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교동도를 찾는 이들 많아졌다.
    하지만 ‘민통선’1 지역인 교동도를 찾기에는 아직도 불편한 점이 있다. 교동대교가 개통되고 나서도 한동안 강화도 인화리 검문소에서 출입허가증을 받고, 교동대교 입구에서 재차 확인을 받아야 했던 것이, 이제는 교동대교 입구에서 출입허가증을 받는 것으로 간소화되었다. 하지만 주말이면 차량들이 길게 줄을 잇고 있어, 기다림에 지쳐 발길을 돌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남북분단이라는 현실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개선 방안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통행증을 받고 교동대로에 들어서면 저 멀리 오른쪽 조강祖江 건너 북한 땅이 눈에 뜨인다. 바다 안개 때문인지 뿌옇게 윤곽만 드러낼 뿐, 쉽사리 민낯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38선과 휴전선 (출처: 강덕우, 「옹진군의 연혁」, 『옹진군지』, 2010, 36쪽.)
    필자가 교동도를 처음 찾은 것도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당시 서울 양천구에 살았었는데 무슨 생각으로 특별한 연고도 없는 그곳에 가려고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아득하다. 그 당시 교동도 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멀었다. 그것은 단지 공간적 거리만이 아니라 심리적 거리도 한몫을 했다. 버스를 세 번이나 갈아타고 도착한 강화도의 창후리 포구, 그런데 섬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입도허가증을 작성해야만 했다. 해병대가 지키고 있던 선착장에서 허가증을 확인받은 후, 비로소 바다 건너 월선포 선착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교동대교가 생기기 이전 뭍으로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에 배에서 내리거나,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승객과 차량들로 늘 복작복작했다.
    월선 포구에서 버스를 타고 지석리에 있는 망향대를 찾았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약주만 드셨다 하면, “가련다 떠나련다~”(〈유정천리〉)를 부르곤 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땅이 망원경으로 볼 필요도 없이 너무도 가깝게 눈앞에 펼쳐졌던 기억이 새롭다.

    서울 하늘을 벗어난 지 시간 반이 될까 말까에
    이렇듯 다른 세상이 펼쳐질 수 있을까
    진초록 보리밭을 품에 안은 시냇물 그림 같고
    강화도 끝 창후리 포구에서 똑딱선으로 20분 건너
    교동도 월선포에는 새하얀 속살의
    왕골 내음이 술기운처럼 번져 있었다
    초여름 산들바람 가죽나무에 걸려
    끝없는 색실처럼 풀리고
    가지런한 못자리마다 때묻지 않은 목청을 뽑는
    개구리들에게서 눈을 뗄 줄 모르는 내게
    시집살이 이십년에 밭고랑 같은 주름살을 일렁거리며
    주모는 들판이 이쁠수록 사람살이는 고달프다고 웃었다
    하루 몇 번 창후리 뭍으로 닿는 뱃길이 끊어지면
    급한 병일 때는 그 자리에서 떠메여 나가야 했던
    설움도 옛말이듯 마을 안까지 처녀 의사 선생이 들어오고
    아이들은 개피떡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서울 부잣집 아이들과 똑같은 과자를 깨물지만
    도대체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단 말인가
    주모는 섬 끝으로 가 건너다보면
    물길 한뼘 너머에 바로 양부모 묻힌 북녘 고향이건만
    젯밥 한번 올리지 못한다고 눈시울이 마르지 않았다
    문득 돈으로는 못 살 자연을 나 혼자 갖는 게 아까워
    사진기를 들자 어디서 달려왔는지
    순박한 사람들을 헤치고 나온 검은 손 하나가
    와락 나꿔채 가버렸다
    접적지역의 노을이 서울보다 몇배 아름답게 펼쳐졌다

    박몽구 시인이 1987년 『한국문학』에 발표하였던 「교동도에 가서」2이다. 시적 화자는 ‘서울’에서 ‘벗어난 지 시간 반’ 만에 펼쳐진 ‘다른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다.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똑딱선’을 타고 건너야 하는 교동도 월선포, ‘그림’ 같은 초여름의 ‘진초록’은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 사방 보이는 것과 함께 ‘개구리’ 울음소리, 그리고 술기운처럼 은은히 번져오는 ‘왕골 내음’ 등 자연의 빛깔에 오감을 빼앗겼다. 산책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교동도의 풍경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시적 화자의 시선은 자연지리적 풍경을 넘어 “도대체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단 말인가”라는 자문으로 정주자들의 삶에 시선을 돌리게 된다. 휴전 이후 만들어진 교동도의 인문지리적 풍경 속에는 ‘위험한 평화’3가 눈속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들판이 이쁠수록 사람살이는 고달프다”는 주모의 넋두리 같은 말 속에서 교동도에서 살아내기가 만만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 단적인 예로 날이 저물면 섬은 오갈 수 없는 고립의 공간이 되어 ‘급한 병’은 ‘그 자리에서 떠메여’ 나갈 수밖에 없었던 날들, ‘처녀 의사 선생’ 덕분에 그나마 허무한 죽음의 ‘설움’을 끊어낼 수 있게 되었다. 흐르는 세월 속에 아이들의 주전부리는 도시와 다르지 않게 변했건만, 진정 ‘물길 한뼘 너머’에 부모님 묘가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고향 땅을 망연히 바라봐야만 하는 사람들, 그 애달픈 풍경조차 사진기에 담지 못하게 막아서는 ‘검은 손’의 횡포가 버젓이 남아 있는 현실. 시적 화자는 “접적지역의 노을이 서울보다 몇배 아름답게 펼쳐졌다”고 자조 섞어 토로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2. 풍경 속 교동도

    1899년에 편찬된 『교동군읍지』에는 교동의 지리적 특징을 잘 담아낸 교동팔경喬桐八景이 실려 있다.

    동진포에서 손님을 전송함 東津送客
    읍성 북문에서 농사를 살핌 北門觀稼
    응암에서의 달구경 鷹巖賞月
    용정에서 꽃을 탐하다 龍井探花
    먼 포구의 세곡선 遠浦稅帆
    외로운 암자의 종소리 孤菴禪鍾
    서도의 고기잡이 등불 黍島漁燈
    진산의 저녁 봉화 鎭山夕烽4

    교동도는 섬이면서도 논농사가 발달하였으며, 물류의 중간 기착지이기도 했다. 뱃길을 이용해 멀리는 중국과 왕래를 하였으며, 삼남지방의 세곡선을 비롯한 각종 선박들이 이곳을 경유하여 개성과 한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요충지였다. 그래서 고려의 수도인 개경의 인후이자 관문 역할을 하였고, 조선에서는 강화도와 함께 한양을 지키는 수군의 핵심 기지로 인조 때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었다.
    이처럼 활기 넘치던 교동을 황석영은 『장길산』에서 아래와 같이 묘사하였다.

    교동 북나루는 북으로 해서의 내륙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예성강의 수로가 입을 벌리고 있으며 동으로는 임진강이, 그리고 강화 수로를 감돌아 마포 경강으로 뻗어들어간 한강의 어귀가 그물의 콧줄같이 닿아 있고, 바다로는 관서 해서에서 오는 배가 경강으로 들어갈 때 꼭 지나야 하는 곳이었다.
    북나루 입석산立石山 아랫녘의 주막거리가 교동 읍내만큼 번화하였는데, 술과 밥을 팔고 재워주기도 하며 급히 빌릴 배까지 내주고 배를 관리 또는 수리도 해주는 여각이 여럿이었다. 여각의 방마다 뱃사람들이 들락날락하고, 떠나는 자들이 방을 비우면 곧 잇달아서 다른 패거리들이 들이닥쳤는데, 실상은 마포 여각 객주에서 물품의 위탁판매를 기다릴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북나루에서 묵는 자들은 보통 하룻밤, 길어야 이틀을 넘기지 아니하였다.5

    소설 속에서 장길산의 의형제로 서해 바다를 장악하였던 우대용이 주목한 곳이 바로 교동도이다. 그곳은 “바다와 강에는 각종 상품과 쌀을 실은 배들이 개미떼처럼 들끓어 쌀을 천여 석 이상이나 실을 수 있는 큰 배만도 삼백여척이 넘게 드나들었으니 쌀 백여 석에서 어물, 소금 등을 싣고 다니는 배들은 수천 척”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북나루와 입석산6이 자리하고 있는 지금의 인사리에는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강선’이 운행되었다고 한다.7 역사적으로 교동은 군사적 거점이었다. 중국과의 교역이 축소되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행정적 위상이 군에서 면으로 축소되었으나, 바다와 육지를 잇는 교통의 거점으로서 의미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휴전선이 생기면서 교동은 고립된 공간이 되어버렸다.
 

서한리 낙조 ⓒ 안정헌

    흰 살구꽃
    피는
    염하 건너 교동

    바다 너머
    닭 우는 소리
    가깝게 들린다는
    봄 밤바다를
    고요히 고요히 듣노라면

    칠흑 같은 어둠속
    막배도 없고
    건너갈 배도 없는 이 적막의 바다엔

    차르륵 차르륵
    조개껍데기를 밟고 지나가는
    저녁 물때만이 저 홀로
    들어왔다 나가고

    밤의 대치를 알고나 있는지
    아무렇지도 않게
    봄밤의 달빛은
    마냥 바다 위를 지납니다

    인용한 시는 이세기의 『언 손』(창비, 2010)에 실려 있는 「교동에서」이다. 교동대교가 2008년 9월에 착공되어 2014년 7월에 정식 개통되었으니, 시인이 이 작품을 쓸 때에는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야만 교동도에 입도할 수 있었다. ‘염하鹽河’, ‘조강祖江’ 등으로 불리는 교동도의 바다는 예성강과 한강, 임진강의 하구와 접하고 있는 분단의 상징적 공간이다. ‘흰 살구꽃’이 피는 봄날의 교동도, 지금은 조금은 나아졌지만 교동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해가 지면 교동도에는 오가는 인적도 함께 사라지는 곳이었다. ‘건너갈 배도 없는 이 적막의 바다’, 다만 ‘닭 우는 소리’와 ‘저녁 물때’ 그리고 ‘봄밤의 달빛’만이 ‘밤의 대치’에 아랑곳 하지 않고 평화롭게 ‘바다 위’를 지나고 있다.
    교동도가 이처럼 유폐의 섬이 된 것에는 해안에 둘러쳐진 철조망이 한몫을 한다. 교동 해안선의 길이는 37.2킬로미터인데, 1997년부터 ‘군사상의 이유’로 25.5킬로미터에 달하는 해안가에 높이 2~3미터에 달하는 ‘군사용 철책’이 둘러쳐져 있어 외부와의 단절은 물론이고, 섬으로서의 기능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교동도의 밤 풍경은 해안가에 높이 둘러쳐진 철조망과 함께 바다 쪽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비추는 전조등만이 줄지어 있을 뿐이다.

    은행나무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은행나무 한 그루를
    화개산 약수터에 심었다던,
    꼿꼿하고 경우 바르던 추씨推氏 아저씨
    악센트가, 이북이 고향이라 했다.

    은행나무가 자라면 키가 장송長松처럼
    커서, 황해도 연백 뜰 고향 집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고집 하나로 살아왔다며
    손등으로 구슬땀을 훔치던 추씨 아저씨
    늙어 화개산만 쳐다보다
    돌아가셨다

    앉은걸음이라도 꼭 한 번
    올라 가 보고 싶다고 하시던 아저씨
    정말 은행나무가 되어
    고향 집 용마루를 망연히
    굽어보고 계신다

─석천石泉, 「샘터지기」

    몇 년 전 화개산 산행 중 정상 부근 약수터 앞 나무에서 보았던 작품이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준비 없이 오르다 보니 갈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즈음 나타난 약수터는 육체적 갈증을 풀어줌은 물론 머릿속까지 맑게 해주었다. 시원한 약숫물, 그리고 북쪽 바다를 건너 불어오는 바람, 거기에 시 한 수를 읊어볼 수 있는 기회를 공짜로 누릴 수 있다니, 이것이 바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시인에 대해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없었는데, 최근 교동의 시인 석천 김흥기의 정원을 소개하고 있는 사이트들이 눈에 띈다. 간혹 인터넷 사이트에서 교동도를 근거지로 하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을 만날 때면 반가움과 함께 무명 시인들에게 인색한 지면에 아쉬움을 느낀다.
  

3. 교동도를 떠나며

    강화도와 함께 교동도는 역사와 문화가 겹겹이 쌓여 있는 장소이다. 하지만 강화도와 달리 교동도의 문화역사유적은 방치된 것을 넘어 훼손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은춘 시인은 「시간의 그림자」(미발표작)에서 “남산포/ 슬레이트 지붕 아래/ 계류석 하나/ 서 있다//(중략)// 삼도수군통어영지// 새우젓 냄새 풍기며 들고 나던/ 멍텅구리 배 밧줄로 묶던/ 손길// 마음으로 되새기는 듯/ 홀로/ 늙어가고 있다”라고 묘사하였다.
    2023년 5월 화개산 모노레일이 정식 개장하였다. 교동도를 찾은 사람들이 화개산 정상에서 섬의 전경과 바다 건너 이북 땅을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도록 하여 더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취지는 이해할 수 없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260미터 정도의 산을 훼손하면서까지 꼭 이런 시설이 들어서야 하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때는 방치되어 있던 섬, 교동도가 이제는 난개발에 놓여 있는 듯하다. 교동도가 꾸는 꿈은 어떤 모습일까.
    장석주는 “산다는 것은 지리 공간, 즉 장소와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장소를 의미화하고 아울러 장소는 거기 사는 사람을 의미화”8한다고 하였다. 교동도에 관한 문학작품을 보면서 분단이라는 역사적 멍에에 갇혀, 정작 중요한 그곳에서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을 형상화한 작품들에 소홀한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이세기의 『흔들리는 생명의 땅 섬』의 한 대목으로 글을 맺고자 한다.

    섬은 섬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나는 섬만큼은 비사유화의 영역이 되기를 바란다. 섬이 사유화되는 순간 만인이 누려야 할 공공성은 사라진다. 섬사람들은 머지않아 발 딛고 선 자기 땅에서 추방되어야 할 운명을 겪어야 될지도 모른다. 지금도 섬 고유의 토착종들이 사라진 자리에 외래종이 이식되고 있으며, 천혜의 원시림은 파헤쳐지고 수억 년을 지켜 온 섬둘레인 ‘갯티’는 망가지고 있다. 섬을 황폐화의 길로 내모느냐, 아니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섬답게 보존하느냐는 오로지 오랫동안 정주하며 삶을 일구어 온 섬 주민들이 결정할 몫이다.9
  
  

안정헌

인천개항장연구소 연구원. 논문 「병인양요에 대한 글쓰기 연구」 「역사, 인천을 사유하다」 「기억, 인천을 횡단하다」 「대중일보 소재 문학연구」 등이 있음.

  
  

〈주석〉

  1. 민간인통제구역은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비무장지대를 따라 띠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바다에는 설정되어 있지 않다. 강원도 고성·인제·화천·양구·철원, 경기도 연천·파주·김포, 인천광역시 강화 등에 걸쳐 있다. 지역 내에서는 군 작전과 보안 유지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민간인의 영농을 위한 토지 이용이 허가되고 있으나 지역 내의 출입과 행동, 경작권을 제외한 토지 소유권의 행사 등 일부 개인의 자유와 국민의 기본권이 통제되고 있다. Daum 백과사전, 「민통선」 부분 참조.
  2. 박몽구, 「교동도에 가서」, 『철쭉꽃 연붉은 사랑』, 실천문학, 1990.
  3. “전쟁의 공포와 유격대의 횡포가 사라진 자리에는 군대의 통제와 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더불어 전쟁의 직접적인 위협 대신 반공이데올로기의 사상통제가 주민들의 의식을 통제했다. 섬을 지키는 군인들의 불법적인 명령과 통제는 대항할 수 없는 권력이었고, 주민들은 순응의 자기통제에 스스로를 가뒀다. ‘위험한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김일환, 「평화의 섬 교동도를 가다」, 『통일과 평화』 9집 1호, 2017, 375쪽.
  4.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엮음, 『역주 교동군읍지』, 임학성 외 옮김, 2006, 34~36쪽 참조.
  5. 황석영, 『장길산 4』, 2004(개정판), 265쪽.
  6.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1863년경)에 ‘입석산’은 북쪽 15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7. 한강선은 인천-인사리(교동)-고미포(개풍)-당머리(개풍)-영정포(개풍)-염창(염창동)-선이봄(영등포)-마포를 하루 1회 편도 운항했다고 한다. 김귀옥, 「건국과 전쟁에 의한 지역 공간의 지정학적 변화─해방 전후~1950년대 인천시 강화군 교동의 사례」, 『정신문화연구』(통권 112), 2008년 가을호, 79~82쪽 참조.
  8. 장석주, 『장소의 탄생-우리 시의 문학지리학』, 작가정신, 2006, 28쪽.
  9. 이세기, 『흔들리는 생명의 땅 섬』, 한겨레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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