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문학사 연습 〈1회〉: 문학사 연재를 시작하며

  

1. 국내/한국 중심

    재작년인가 이재용 주간이 찾아와 문학사를 『작가들』에 연재하자고 제안했을 때, 한편 기뻤지만 또 한편 아직 준비가 신통치 않아 어물어물했다. 이러구러 한 꾀가 솟았다. 어차피 통상적 문학사는 엄두도 낼 수 없는지라, 그때그때 정리한 주제를 느럭느럭 연재하면 어떨까 싶었다. 나중에 묶을 때는 그제 생각하고 우선은 시대순을 꼭 따르지 않을 작정이다. 기존 문학사에서는 혹 낯설지도 모르겠으나, 내가 발견한 새로운 면모가 중심이매, 아우얼바하Erich Auerbach의 『미메시스』1형으로 느슨하고 자유로운, 텍스트 중심의 비평적 문학사를 염두에 둔 것이다. 말하자면 ‘다시 보는 한국현대문학사’쯤 되지 않을까. 제목도 국문과 전공 강좌 비슷하게 ‘한국현대문학사 연습’으로 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저질러보자는 배짱이다.
    본격적 총론은 뒤로 돌리고 우선 간단한 원칙 몇 낱을 미리 제시하면, 첫째 국내 운동(지하 투쟁 및 합법 운동)과 국외 투쟁 중, 국내를 우위에 둔다. 이 원칙은 채만식蔡萬植(1902~1950)의 중편 「민족의 죄인」(1948)에서 암시받은 것이다.

    복종이 싫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외국으로 달리어 민족해방의 투쟁을 하였다. 더 용맹한 사람들은 외국으로 망명도 않고 지하로 숨어 다니면서 꾸준히 투쟁을 하였다.2

    친일 문제를 다룬 첫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불가피성을 변명하는 데 기운 점은 유감이지만, 국내를 해외보다 높이 평가한 주장에 나는 공명한다. 망명객들이 속속 귀환해 판을 쥔 해방 정국에서 식민지 권력에 굴종하는 듯 저항한 국내의 운동, 나아가 그 민중적 일상조차 소중히 여긴 갸륵한 눈이 아름답다. 문학은 생활을 떠나서 생존할 수 없다. ‘노예의 문자’야말로 해방의 먹이이매, 침략/독재에 대한 복종/봉기로 점철된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국내 문학을 중심에 두고 안팎을 아우를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북한문학을 거의 배제하는 부자연스러운 결과를 야기한다. 해방이 분단으로 현실화한 1945년 8월 15일 이후, 특히 6·25전쟁(1950~1953)으로 그나마 전쟁 이전까지 실낱같이 이어지던 교류마저 완전히 끊기면서, 남의 대한민국(1948. 8. 15.)과 북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48. 9. 9.)은 기이한 ‘적대적 공존’에 빠져들었다. 물론 소련이 해체되면서(1991) 찾아온 해빙의 물결 속에 남북문학의 진지한 만남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열풍조차 일시적인지라 상호이해를 심화시키는 계기로는 턱도 없던 것이다. 북한문학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분단체제가 해소되는 과정에 확실히 들어선 이후에야 가능할 것이기에, 여기서 나는, 그 중책은 미래의 학인들에게 맡기고, ‘과감히’ 한국 중심의 반쪽 문학사를 구성할 밖에 없겠다.
  

2. 한국문학이 모시는 세 우상

    이미 밝혔듯이, 내 문학사는 기존의 이인직-이광수 축을 이해조-염상섭 축으로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친일개화론자 이인직李人稙(1862~1916)과 그 무의식적 계승자 이광수李光洙(1892~1950) 대신에, 애국계몽문학을 대표할 이해조李海朝(1869~1927)와 그 비판적 계승자 염상섭廉想涉(1897~1963)을 새 축으로 삼는 기획이거니와, 특히 후자는 마르크스주의와 국민주의를 가로지르는 사상의 모험에 기투企投하는 한편, 식민지 시대와 분단 시대의 질곡에 진지하게 육박한 장편 작가로서 우뚝하다. 시는 좀 복잡하기도 해서, 이 축에 꼭 맞출 필요는 없을 것인데, 그럼에도 기존의 기점을 반복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최남선崔南善(1890~1957)이 그의 자 공육公六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少年에게」(『소년』 창간호, 1908. 11. 1.)는 터무니없이 유명하다. 바이런George Gordon Byron(1788~1824)까지 끌어들인 과장된 해석들이 족출하고, 교과서를 통해 반복적으로 암기되면서 일종의 국민 상식으로 굳어지고 말았거니와, 제목부터 어색한3 이 시는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자유시에 미달이다. 물론 긍정적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다가 소년을 고동鼓動함으로써 늙은 조선이 소년 한국으로 재생하기를 기원하는 계몽주의가 얼비치지만, 시어들은 처처에서 서걱대고 운율은 곳곳에서 걸린다. 해방의 동경이 폭포수 같은 리듬으로 분출한 자유시의 고전, 예컨대 이상화李尙火(1901~1943)의 「나의 침실寢室로」(『백조白潮』 3호, 1923)를 상기하면 까닭이 활연豁然할 터. 우리 근대시의 자연스러운 독서 상한上限이 바로 3·1운동(1919) 이후 발진한 1920년대 신문학운동의 산물인 눈부신 자유시들일진대, 이제는 이 어설픈 신체시를 놓아줄 때가 되었다.4
    국초菊初 이인직, 육당六堂 최남선, 춘원春園 이광수는 우리 현대문학사의 ‘우상’이다. 그들이 생산한 최초의 신소설 『혈의누(1906),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 최초의 근대 장편 『무정無情(1917)은 ‘최초’의 주문에 걸린 물신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매우 특이한 친일파로 매국의 길에 분주했던 국초를 문학사에서 본격적으로 거론한 이는 뜻밖에도 천태산인天台山人 김태준金台俊(1905~1949)5이지만, 소설사적 위치를 결정한 이는 임화林和(1908~1953)다. 최남선과 이광수를 국초와 함께 묶는 것은 사실 미안한 일이다. 춘원은 3·1의 도화선인 2·8독립선언서의 작성자이고, 육당은 3·1독립선언서의 기초자다. 그들은 결코 국초류가 아니다. 민족의 해방을 열렬히 희망한 애국자다. 그럼에도 일본/서양의 근대적 외관에 압도되어 그 근본적 악마성을 놓침으로써 근대 너머까지 사유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 나는 2002년 11월 미타三田의 게이오慶応에 강연 갔다가 근처 시로카네白金의 메이지明治학원을 우정 찾았다, 일찍이 이 캠퍼스에서 수학한 춘원6을 생각하면서. 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답게 양관들이 아름다웠다. ‘피안도[平安道]’ 산골 출신의 가난한 소년 춘원의 눈앞에 근대가 꽃처럼 개화한 것이거니,7 서울 중인 출신으로 경제력도 든든한 육당에게 그 근대는 더욱 가까웠을 터. 그로 말미암아 그들의 계몽주의는 차마 친일로 빠질 여지가 좁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한계는 문학사가들에 의해 특정되었다. 백철白鐵(1908~1985)이 발명한 “육당·춘원의 2인 문단기”8라는 해괴한 용어를 조연현趙演鉉(1920~1981)이 “최남선·이광수 2인 문단 시절”9로 받는데,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그래도 그때까지는 특화하지 않았다. 백철은 이 신체시의 제목은 뺀 채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소년은 이 시대 문학의 주인공”(175쪽)이란 흥미로운 평가를 내렸고, 조연현은 “신체시의 혁명적 의의”(148~151쪽)라고 강조는 했어도, 이 작품을 단독 우상으로 모시지는 않았다. 도대체 언제 우상으로 떠올랐을까? 검색하니, 책 한 권이 나온다. ‘한국신시60주년기념사업회’ 김용호金容浩10 편, 『한국시선: 한국신시60주년기념시집』(일조각一潮閣, 1968). 어렴풋이 신문·잡지마다 요란했던 1968년의 풍경이 떠오른다. 급기야 다형茶兄 김현승金顯承(1913~1973)의 『한국현대시해설』을 들춰보니, 영락없다. 김수영金洙暎(1926~1968)의 절창 「풀」(1968)에 나오는 ‘풀’을 민중으로 해석한 효시로 밝혀져 새삼 주목받은 (물론 이는 과도한 단순화로 최근 거의 지양됨) 이 책에, 이 신체시가 “한국 최초의 자유시”11로 첫 장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입시용으로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이 책으로 말미암아, 아마도,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우상으로 좌정한 듯싶다.
    우상은 과학으로보다는 미신으로 이끌기 십상이다. ‘암흑기의 문학’(백철)이란 용어가 일제 말의 저 도저한 친일문학 시대를 은폐하듯, ‘2인 문단 시대’는 국민주의적 계몽주의 시대의 문화열을 엄폐한다. 《독립신문》(1896~1899) 이후 애국적 민중의 계몽시가들이 답지한 바는 이미 주지하거니와, 나는 육당의 시가와 춘원의 소설도 계몽주의문학이란 시야 속에 재조정할 것이다. 솔직히 세 우상의 구축과정에 공산주의운동에 투신한 국문학자 김태준, 마르크스주의 문학평론가 임화, 그리고 고매한 기독 시인 김현승이 관여했다는 점에 미친 것은 충격이다. 그런데 이런 괴리를 요즘도 심심치 않게 목격하게 된다. 진보적 문인·지식인들조차 자유롭지 않은 경우가 없지 않다. 국어 선생들이 나태한 탓이다. 문학사의 실상에 겸허히 다가가고자 정진할 뿐이다.
  

3. 근대/현대

    끝으로 좀 골치 아픈 문제를 거론해야겠다. 나는 우선 연재의 큰 제목을 ‘한국현대문학사 연습’으로 잠정했다. 이 ‘현대문학’은 엄밀한 학적 개념이 아니다. 국문학 전공을 흔히 고전문학/현대문학으로 나누는 분류를 일단 따른 것인데, 제목을 정할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자본주의가 발생하여 발전하다 마침내 사멸할 때까지를 근대modern로 파악하는 인식을 나도 공유한다. 우리 근대의 상한은 비교적 명백하다. 자본주의세계시장에 강제로 편입된 개항(1876)이 기점일 터인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간까지도 자본주의는 현존하기 때문에 하한은 미정이다. 지금도 우리는 근대를 산다. 따라서 ‘근대문학’이란 명명이 정확하다. 그런데 요즘을 ‘근대’라고 칭하면 실감에서 동뜬다. ‘현대’를 아니 쓸 수 없다.
    그럼 언제부터 현대인가? 왕년에 사회주의자들은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를 ‘현대’로 불렀다. 유령으로 떠돌던 공산주의가 하나의 국가권력으로 대두한 1917년 이후, 자본주의는 ‘전반적 위기’ 속에 결국 사멸한다는 시간표가 사회주의현대론이매, 신경향파의 등장을 획으로 조선 신문학을 ‘근대 편’과 ‘현대 편’을 나눈 백철의 사관이 그 전형적 예다. 아시다시피 소련의 해체로 사회주의현대론은 효력을 잃었다. 일찍이 ‘선견지명’(?)을 모색한 이가 조연현이다. 그는 우리 근대문학사를 한국현대문학사로 다시 명명했다. 아마도 이념적 갈등으로 소란한 근대를 삭제하고 싶은 내밀한 욕구가 작동한 것일 터인데, 마침 1930년대 모더니즘의 유행에 주목한다. 정지용鄭芝溶(1902~1950)과 이태준李泰俊(1904~?)을 대표로 하는 모더니즘을 우리 현대문학의 진정한 출발로 삼으려는 기획인바, 대공황(1929)을 이긴 뉴딜에 기원을 둔 비사회주의현대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또한 망상이다. 태어난 자 죽음을 면치 못함은 자본주의라고 비껴갈 수 없기도 하지만, 1930년대는 ‘순수문학의 황금시대’(조연현)가 아니다. 모더니스트들이 심각한 고민 끝에 해방 후, 좌우협동조직으로 창립된 ‘조선문학가동맹’(1946)에 합류하기에 이른 바에 단적으로 드러나듯, 우리 모더니즘도 현실로부터 이륙한 ‘천국의 새’가 아니었다. 사회주의현대론도 비사회주의현대론도 이미 낡았다. 현재로선 마땅한 대안도 없다. 가까운 미래에 동틀 지혜를 기다리며 다름을 보존[存異]하는 것도 한 해결책이다. 우선은 근대/현대를 시간적 실감을 담아 사용할까 싶다. 엄밀하게는 근대문학사지만, 오매에도 그리던 나라를, 비록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하더라도, 지니게 된 해방 이후를 ‘현대문학사’로, 그 이전을 ‘근대문학사’로 잠칭暫稱할 것이다.
  

4. 교착기의 미명에서

    크게 봐 우리 문학에는 고비가 둘 있었다. 하나는 계몽주의문학을 교체한 1920년대 신문학운동이요, 또 하나는 남한의 순수·참여문학을 일거에 가로지른 1970년대 민족문학운동이다. 전자는 공화국의 꿈을 선취한 3·1운동(1919)의 아들이고, 후자는 국민의 탄생을 고지告知한 4월혁명(1960)의 딸이다. 그런데 후자는 또한 기존의 남한문학뿐만 아니라 그 반면反面 거울로 성립한 북한문학의 길로부터도 이탈한 문학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4월혁명으로 한국은 남한적 성격을 넘어 전 한반도적으로 확장할 씨앗을 지니게 되었거니와, 우리는 지금도 민족문학의 시대를 산다. 민족문학은 그러나 그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목하目下, 황혼을 맞이하고 있다. 한 시대와 또 한 시대가 서로 껴묻은 이 교착기에 인간에 대한 납작한 이해에 기초한 타락한 말이 기이하게 횡행하는 세태가 만연한 한편으로 우리의 젊은 문학은 각자성불各自成佛의 지경으로 진화를 거듭하매, 어떤 시대의 미명일지 걸기대다. 이에 문학사가로서 우리의 뛰어난 문학 유산이 열어놓은 오지奧地에 미력이나마 다가가고자 다짐하거니, 교착의 이분법을 돌파할 회통의 전회轉回가 절박하다. 아마도 두 번째 고비 이후도 다룰 예정이지만, 내 역량 탓에 어디까지 갈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인간은 깊다. 문학은 더 깊다. 오묘한 한반도의 시절, 마음을 믿고 일단 시작한다.
  
  

최원식

1949년 인천 출생.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창작과비평』 편집주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 현재 인하대 명예교수, 인천작가회의 고문. 평론집 『민족문학의 논리』 『문학의 귀환』 『문학과 진보』 『기억의 연금술』, 연구서 『한국근대소설사론』 『한국계몽주의 문학사론』 『문학』 등이 있음. 대산문학상, 임화문화예술상, 용재학술상 등을 수상.

  
  

〈주석〉

  1. 호메로스(Homeros)부터 버지니아 울프(V. Woolf)까지 서양 문학의 흐름을 대표작 중심으로 분석한 이 근사한 책은 망명지 이스탄불(Istanbul)에서 1942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집필되었고, 1946년 스위스 베른(Bern)에서 첫 출간되었다. 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 trans. by Willard Trask, Princeton Uni. Press, 1973, 판권지.
  2. 『채만식전집 8』, 창작과비평사, 1989, 434쪽.
  3. 이 시의 일본풍 제목을 우리 식으로 바꾼다면 ‘바다가 소년에게’가 될 게다.
  4. 그렇다고 최남선을 문학사에서 추방하자는 것은 아니다. 계몽주의자 육당은 일정하게 평가해 마땅하다. 1908년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해 『소년』(1908. 11.~1911. 5.)·『청춘』(1914. 10.~1918. 9.) 등 잡지들을 발간하고, 1910년 광문회(光文會)를 통해 고전들을 출판한 것만으로 보람인데, 문학적으로는, 후술하겠지만, 역시 시조의 부흥이 돋보인다.
  5. ‘문학운동의 선구 국초 이인직씨의 소설’이란 절까지 두어 “조선문학사상(上)에 있어서 첫 사람으로 추앙”했다. 김태준, 『증보 조선소설사』, 학예사, 1939(초판 1933), 241~246쪽.
  6. 춘원은 1907년 관비(官費)를 받아 메이지학원 보통부에 편입하여 1910년 봄에 졸업했다. 하타노 세츠코(波田野節子), 「李光洙の第2次留學時代カレンダ-」, 『植民地時期朝鮮文學者の日本體驗に關する總合的硏究』, 서울: 청운, 2009, 27쪽.
  7. 이 철부지 이상주의는 유학생들의 ‘합창’으로 마무리되는 『무정』의 결말에 반영된다. 이 장면은 미국 유학생의 희망찬(?) 귀국으로 마치는 『혈의누』와 신통하게 짝이다.
  8. 백철, 『조선신문학사조사』, 수선사(首善社), 1948, 83쪽.
  9. 조연현, 『한국현대문학사』, 현대문학사(現代文學社), 1956, 146~147쪽.
  10. 김용호(1912~1973)는 해방 직후 좌경했다 전향한 사회파 시인으로, 1967년 결성된 ‘한국신시60주년 기념사업회’의 부회장이었다. 《중앙일보》 1967. 8. 1. (회장 조지훈(趙芝薰)이 1968년 5월 작고하자 김용호가 회장을 승계함.)
  11. 김현승, 『증보판 한국현대시해설』, 관동출판사, 1975(초판 197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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