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욕망과 노년의 윤리

안종수, 『결국 로맨스 빠빠를 못 봤다』, 걷는사람, 2023.

    2004년에 등단한 안종수의 첫 소설집 『결국 로맨스 빠빠를 못 봤다』가 나왔다. 올해가 2023년이니 20년을 한 해 앞둔 결실이다. 7월 22일의 〈책담회〉 유튜브 영상에 의하면, 그는 이 소설집에 싣고자 출판사에 총 13편의 원고를 제출했고, 그중 8편만 실었다고 한다.1 2년에 1편 정도씩 소설을 써왔다는 건 소설가로서 직무 유기라고 생각할 독자들도 있겠지만, 별도의 생업으로 생활하며 청탁이 올 때마다 써내는 지역 작가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끈기를 감안하여 축하를 보낼 일이다. 틈틈이 시간 내어 쓰고 마감에 맞추는 소위 ‘주말 소설가’가 이룰 수 있는 성취가 이 소설집에 깃들어 있다.
  

경제적 빈곤 속 소년의 욕망

    1950년대생인 안종수의 소설에는 한국 현대사에 내재한 고난의 관문이 깃들어 있다. 일찍이 서영채는 지난 100년간 한국인이 통과해야 했던 고난의 관문을 국권 상실, 한국전쟁, 경제적 빈곤, 정치적 미성숙으로 정리한 적이 있다. 생활인으로서 안종수의 소설에는 이 중 경제적 빈곤의 문제가 짙게 배어 있으며 군부독재의 폭압적 현실이 정치적 미성숙을 증언하는 배경을 이룬다. 그중 경제적 빈곤의 현실을 가장 깊이 체험했던 소년기의 농촌은 그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소년기의 욕망과 그곳을 그리워하는 노년의 향수가 역설적으로 맞닿는 뫼비우스의 고리이다.

    내가 살던 화봉리는 골짜기가 끝나는 정안골의 끝자락에 있어 하정안으로 불리기도 했다. 마을 앞으로 신작로가 나 있었다. 남쪽으로 십여 킬로미터 가면 군 소재지인 공주 읍이고, 북쪽으로 가면 차령고개를 넘어 천안을 지나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화봉리는 정안골 사람들이 대처로 나가는 관문인 셈이었다. (8쪽)

    지역 발전의 위계를 들이대자면 작중인물 대부분의 고향인 화봉리는 서울-대전-공주 아래에 있다. 그곳은 도시와 등을 댄 적막한 산골이 아니라 먼 도시의 풍물이 드나들기도 하는 ‘관문’이어서 낯설고 화려한 단맛으로 소년을 유혹한다. 소설집에서 그 단맛은 영화와 아름다운 도시풍 여성과 엿으로 형상화되어 있다(「로맨스 빠빠」 「별」 「밥」). 그리고 그 유혹은 그 이전 세대의 소설가인 안정효(『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민족과문학사, 1992)와 송기원(『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 한양출판, 1994)이 그렸듯이 파멸의 힘을 내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년의 욕망은 그러한 미래에 눈 감고 도시적이고 문화적인 외양을 꿈꾸지만, 그를 제어하려는 힘은 완강하다. 모래밭의 가설극장으로 뛰어가는 욕망은 아버지에 의해(「로맨스 빠빠」), 단맛을 보기 위해 가재도구를 뒤져 엿장수에게 넘기는 범행은 어머니에 의해(「밥」) 직접 금지되고, 교과서에 실린 서양 소설에서 읽었던 파마머리를 하고 원피스를 입은 구멍가게 새댁에게 말을 걸고 싶은 욕망은 군부 정치와 새댁 남편의 가족들에 의해(「별」) 간접적으로 금지된다. 소년의 전면에는 경제적 빈궁을 해결하기 위한 금욕적 공격성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으로 현전하고, 저 멀리 흐릿하게 그와 결합하여 통제력을 발휘하는 군부독재의 통치술이 있다. 욕망은 강하지만 힘은 미약한 소년에게 그것은 다른 대안 없이 주체와 애정과 (중첩된) 금지의 세 꼭짓점을 이루는 오이디푸스적 삼각형으로 멍에 지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망은 강력한 저항이나 처절한 굴종이 아니라 “흐찔하게 헬레거리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짜부라지고, 고향에 대한 애정과 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다독거려지면서 흐르는 세월을 받아들인다.
  

고립된 노년과 윤리

    그렇다고 모든 욕망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농촌 본래의 생활과 문화에 관련된 욕망은 살아남아 농촌의 자본주의화에 저항한다. 소년기의 ‘어허 딸랑’ 놀이에서 시작한 ‘요령잡이’로 한 인간의 생애 전체를 그린 「어허 딸랑」, 아버지 때부터 전해 내려온 소와의 관계로 자본주의적 농촌 경영에 저항하고 마침내 광우병 소 집회까지 이끈 「소들은 어디로」에서 보이는 노년의 윤리는, 경제적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예감되는 농촌 사회의 몰락에 저항한다. ‘죽은 자에게 마땅한 대우를 해야 한다’든지 ‘소가 돼지처럼 사는 건 받아들일 수 없다’라는 소박한 윤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세상에 저항하는 것이다. 소년의 욕망은 노년의 윤리로 변하지만, 그를 둘러싼 사회의 공동체적 (또는 공통감각적) 대화 가능성은 막혀 있다. 따라서 이 노년의 윤리 역시 ‘요즘 세상’의 논리 앞에 대외적 설득력을 잃고 혼자만의 윤리가 되어간다.

    “아니, 요새 요령잡이가 따로 있나유? 그때그때 아무나 잡으면 되잖어유. 그라구 이제 상여 꾸며서 장사 지내는 집 있겄슈? 그냥 대충 들어다 묻는 시상인디. 포클레인으로 땅 파구 묻는 시상 아뉴?”
    영만 씨는 조 서방의 큰아들한테 속내를 꺼내 놓았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그랬다. 듣고 보니 그럴 만도 했다. 요즘 세상에 전문 요령잡이가 무슨 필요 있단 말인가. 이제는 상여조차 없어질 판 아닌가. (76~77쪽)

    그러므로 노년의 윤리가 자신이 살아온 집터를 향한 맹목이 되어 병원을 탈출하는 장모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별의 뒤안길」은 증상적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면회가 제한되는 지점에서 제기되는 요양병원의 노인 관리에 대한 의문, 그리고 그에 답변하는 의사의 철벽같은 전문가 논리에 의해 방어된 대화 불능의 세계에서 노인의 보호자들은 무력하다. 오직 기억과 논리를 지운 치매 속에서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주체의 자유를 향한 열망만이 탈출/실종을 가능하게 할 뿐이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탈출/실종의 애달픔과 불가피함이야말로 자본주의적 세계의 강고함과 실존적인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위안 너머로 엿보이는

    소년의 욕망과 노년의 윤리는 모두 기성복 같은 세상에 무력하게 적응해간 우리에게 자칫 패배감으로 비칠 수도 있다. 반공-군부독재의 모습을 사라진 청년들을 통해 그린 「별」과 「안개 속으로」에서 더욱 그러한데, 이 두 작품에서 각각의 청년을 사랑했던 여성들 모두 사랑의 힘을 잃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서술자는 이들의 이야기를 (소년의 눈이 되어) 목격하거나 (파견 나온 사원의 귀가 되어) 전해 듣는다.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고 싶어 한 이들의 삶은 세상과 어울리지 못하는 유령 같은 모습이거나 누군가를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 속의 인물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군부독재의 폭력으로 사라진 사람을 원거리에서 그린 이 두 작품은 모두 낭만적인 자연 묘사로 끝난다. 중심인물이 사라진 세계의 쓸쓸함으로 그 인물을 환기시키는 기법은 오래된 것이지만 혹시 사회의 번잡함에서 눈 돌리려는 결곡한 마음의 위안용 전환은 아닌지 우려되기도 했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보면 『결국 로맨스 빠빠를 못 봤다』의 마지막 작품 「삼각관계」는 또 다른 위안용 전환으로 판단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노년의 윤리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특히 부부관계 속에서, 삼각형의 관계가 아니라 ‘자연이 그려주는 아름다운 도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방향을 제시한다. 소년과 노년이 공히 갖고 있는 고립의 돌파구를 마련한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압축적이기는 하지만 안종수의 소설에서는 드물게 청년기를 다루고 있기도 하다. 다양한 인간관계도 눈에 띈다. 아버지, 어머니와 나의 삼각관계가 주축이 아니라 그 주위를 감싼 다양한 형제 관계가 등장하기도 하고, 부인과 딸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형상의 등장은 시작 부분에서는 가족을 다른 방으로 퇴장시키고 혼자 과거의 기억에 빠지고, 종결 부분에서는 마을의 몰락(?)을 단 3~4문장으로 정리해버린 「로맨스 빠빠」의 방식과 대조적으로 앞으로 더 풍부해지고 길어질 안종수 소설의 상호주관적 대화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하여 기대가 된다.

    소설가로서 걸어온 길의 첫 결실을 축하하며, 소년의 욕망과 노년의 윤리라는 두 축이라는 출발점에 다양하고 풍부한 형상과 매개, 사건 들을 끌어들여 기성 작가들이 잊어가는 지점에 있는 그 무엇과 더 자주 만날 수 있게 해주길 바란다.
  
  

이재용

1972년 서울 출생. 평론 「황순원 문학에 내포된 타자의 세 고리」 「포스트휴먼 시대의 별유천지비인간」 「강경애 문학의 대상a와 인천」 등이 있음.

  
  

〈주석〉

  1. 한국근대문학관, 〈2023년 제6차 책담회─3인3색 인천 작가와의 대화〉
    (https://www.youtube.com/watch?v=bHi9dG7v7rs&t=595s)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