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해몽과 꿈 해석의 사잇길─박정윤의 『꿈해몽사전』에 대한 단상

박정윤, 『꿈해몽사전』, 걷는사람, 2023.

    박정윤의 신작 장편소설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읽었다. 예상과 달랐다. 하지만 기대 이상이었다.

    『꿈해몽사전』(걷는사람, 2023)이라는 제목을 접했을 때 일단은 ‘소녀(들)의 성장기 혹은 반성장기’는 아니겠거니 했다. 소설 제목에서 받은 직관적인 인상 때문이었고, 보다 본질적으로는 박정윤 소설의 흐름 때문이었다. 박정윤 소설에 현혹되어본 적이 있는 독자들1이라면 잘 알고 있듯 박정윤은 그의 출세작 『프린세스 바리』(2012) 이후 『목공소녀』(2015)에 이르기까지 소녀(들)의 성장기 혹은 반성장기에 집중해왔다. 이때의 박정윤 소설은 아름답고 순수한,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독식하고자 하는 원초적 아비들의 후예들에게 집요하게 훼손당하는 소녀들의 힘겨운 성장 혹은 성장 거부의 드라마를 통해 오늘날의 남근주의적 상징질서를 아프게 환기시킨 바 있다. 한마디로 소녀(들)의 성장기 혹은 반성장기는 한동안 오늘날의 세상을 새롭게 절합節合하는 박정윤의 핵심적인 이야기 틀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박정윤의 소설 세계에 변화의 징후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나혜석, 운명의 캉캉』(2016)부터이다. 이때부터 박정윤은 힘겹게 상징질서로 편입하는 혹은 성장하지 않기로 한 소녀들 대신 남근주의적 질서의 순종을 거부하고 탈-존의 새로운 길을 헤쳐가는 ‘또 다른 경로로 성장’한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쓰인 도발적이고 발칙한 소설이 바로 『연애독본』(2015)이었다.

    『꿈해몽사전』이 소녀(들)의 성장기 혹은 반성장기는 아니겠거니, 그러니까 『연애독본』의 뒤를 잇는 작품이겠거니 짐작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꿈해몽사전』은 크게 보아 소녀들의 반성장기라 일컬음직한 소설이었다. 여기 한 소녀 ‘소리’가 있다. 그녀는 어떤 경계에 서 있다. 오늘날의 상징질서와 그것에 의해 마성적인 것으로 혹은 비합리적인 바로 그것으로 아브젝트abject된 무속 질서 사이. 세습무의 전통을 떠받드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엄마의 결단으로 세습의 굴레에서 벗어난 소리는 세습무의 질서 속에 편입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오늘날의 상징질서에 순응하지도 못한다. 갈팡질팡한다. 그리고 갈팡질팡하다가 끝내 길을 찾는다. 물론 그녀가 길을 찾는 순간 그 길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아니다. 여행을 시작하려는 지점에서 소설은 끝난다. 그런 점에서 『꿈해몽사전』은 ‘행복했던 젊은 시절-행복의 균열과 방황-현실로의 귀환(혹은 세계와의 화해)’이라는 성장소설의 전형에 반하는 반성장소설이자 방황 끝에 현실로의 귀환이라는 모티브가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성장소설이라 할 만하다. 어찌 되었던 간에 『꿈해몽사전』으로 박정윤의 소설은 또다시 ‘소녀(들)의 성장기 혹은 반反, 半성장기’를 반복하거나 혹은 그것으로 귀환한 모양새다.

    하지만 그렇다고 『꿈해몽사전』이 박정윤 이전 소설의 단순반복이거나 단순회귀인 것은 아니다. 분명 의미 있는 차이들이 있다.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원초적 아비적 존재’의 잠복. 이제까지 박정윤 소설에서 ‘소녀’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것은, 성장을 가로막는 정도가 아니라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은 원초적 아비들의 노골적이고도 물리적인 폭력이었고, 이 원초적 아비들의 눈에 보이는 폭력은 박정윤 소설의 특이점에 해당한다 할 정도였다. 한데 『꿈해몽사전』의 경우 이 ‘원초적 아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의 소녀들이 발랄하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초적 아비의 보이는 폭력에 시달릴 때보다 오히려 더 견고한 벽 앞에 좌절한다. 원초적 아비의 노골적인 폭력 대신에 소녀들에게 훨씬 더 가혹한 구조적 폭력 혹은 폭력적 구조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교활하게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그녀들은 원초적 아비에게 복종하는 삶이 아니라 남근주의적 질서 안에 순종하는 신체로 서서히 마모되어간다. 『꿈해몽사전』은 이처럼 그녀들의 좌절의 원인을 남근주의적 질서의 대리인에 불과한 몇몇 예외적인 아비들의 폭력성에서 찾는 대신에 폭력적이건 폭력적이지 않건 간에 다양한 대리인을 통해 그녀들을 집요하게 순종시키는 남근주의적 질서 자체에서 찾거니와, 덕분에 『꿈해몽사전』은 박정윤 이전 소설처럼 무시무시하고 외설적인 장면 없이도 오히려 더 사회구성원 모두를 순종하는 신체로 전락시키는 오늘날의 현실을 섬뜩하게 재현한다.

    『꿈해몽사전』에서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차이는 앞서도 지적했듯 『꿈해몽사전』의 소녀인 소리가 경계에 서서 갈팡질팡하는 존재이며 결국 소리의 그 갈등과 방황을 통해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의 문명이 나아갈 의미 있는 좌표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소리는 근대와 전근대, 그러니까 탈마법화의 원리와 마법적 세계 사이의 경계인이다. 소리는 산 자와 죽은 자, 가해자와 피해자,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서로가 용서하고 합일하여 도달하는 신명나는 세상을 꿈꾸는 샤먼적 세계 속에서 태어났으나, 어쩔 수 없이 인간 모두에게 매 순간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윤을!’을 창출하며 살라고 강요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사회구성원 모두를 ‘우리(나 혹은 우리 가족)만 빼고 어서 망해라’라는 가언명령 하에 ‘만인이 만인과 투쟁’하는 오늘날의 상징질서에 편입해간다. 소리는 그녀가 숙명으로 마주하게 된 무속의 질서에 한편으로는 매혹되어 있기도 하지만 어떤 점은 영 마뜩찮게 받아들인다. 세습무의 질서가 그것을 계승하는 대신 오늘날의 상징질서 속의 일원으로 살아가려는 각 개인들의 선택을 전혀 존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세습무의 세계를 악마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으로 폄훼하고 원초적으로 억압하는 오늘날의 상징질서에 대해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상징질서는 어떤 면에서 무속의 질서보다도 더 악마적이고 비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에 있어서도 매우 제한된 선택지만을 인정하는 까닭이다. 소설 속의 다른 인물들이 두 세계 중 한 세계에 귀속되기 위해 목숨을 건 결단을 내리는 반면 소리는 두 질서가 가지는 나름의 보편성과 업적, 그리고 한계 때문에 어느 한 곳을 자신의 귀착지로 설정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양자 사이를 유동한다.
    그렇게 부동浮動하다가 소리는 둘 중 하나의 세계로 귀속되는 대신 제3의 길을 선택한다. 두 질서를 서로 길항시키고 삼투시켜 또 다른 인식론적 틀을 만들거나 아니면 두 질서 모두를 고차의 상징질서로 혁신시켜 두 질서가 공생할 수 있는 길을 찾기로 한 것. 소리의 각성에 따르면 무속의 질서와 오늘날의 상징질서가 오늘날처럼 서로를 적대시하며 서로가 서로를 극단적으로 만들어가는 적대적 공존의 상태여서는 오늘날 우리의 삶이란 전혀 나아질 수 없다. 그러니 두 질서가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받아들여 양자 모두가 보다 가치 있는 질서가 되도록 자극하는 상생의 관계로 변화되어야 하며, 이때 비로소 인간과 비인간, 남성과 여성,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생하는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것이다. 근대성에 대한 흥미로운 접근이자 지구의 미래를 위한 값진 지침이라 할 만하다.

    『꿈해몽사전』은 이렇게 한 소녀의 반反, 半성장기를 통해 오늘날의 남근주의적 자본주의 질서와 그것에 의해 아브젝트된 무속의 질서 사이의 적극적인 길항의 필요성을 자연스럽고 흥미진진하게 제시한 밀도 높은 소설이다. 하지만 이 경청할 만한 제안이 제안 그 자체에 멈추고 있는 것 또한 지적되어야 한다. 소리가 오늘날의 상징질서와 무속의 질서 사이를 길항시키고자 시도한 상징적인 결과물인 『꿈해몽사전』이 아직 많은 독자들을 감복시킬 만한 충분한 체계를 확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그러나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꿈해몽사전』이 현재 작가 박정윤이 행하고 있는 모색의 최종 결과물이 아니라 그의 또 다른 계보학의 출발점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박정윤의 소설이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꿈해몽사전』을 더 체계화시켜 어느 방식으로 우리 앞에 현전시킬 것인지,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어떤 인물 어느 징후를 누빔점으로 하여 오늘날의 상징질서와 무속 질서 사이의 길항의 가능성을 생생하게 재현할 것인지를 지켜보는 일은 박정윤 소설사에 한 획이 그어지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자 동시에 한국소설사에 새로운 계보가 등재되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이겠기 때문이다. 박정윤의 다음 소설을 고대해본다.
  
  

류보선

문학평론가. 군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현대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저서 『경이로운 차이들』 『한국 근대문학의 정치적 (무)의식』 『또 다른 목소리들』 『한국문학의 유령들』 등이 있음.

    
    

〈주석〉

  1. 박정윤 소설과 관련된 링크를 타고넘고 타고넘고 하다가 『be:lit』 2호를 읽게 됐다. 박정윤 소설에 매혹된 이가 이렇게 많다는 것을, 게다가 매혹의 정도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고 놀랐다. 박정윤 소설을 따라 읽는 독자로서 우선 반가웠다. 하지만 다른 한편 앞으로는 박정윤 소설을 읽을 때는 조사 한 개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읽어야 한다는 점도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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