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작가 박태원, 혹은 소설가 구보 씨의 고민

  

1. 박태원의 삶에서 주목해야 할 것들

    소설가 박태원은 음력으로 1909년 12월 7일 경성부 다옥정(현 서울시 중구 다동) 7번지에서 태어났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면 1910년 1월 17일, 월요일이다.1 1892년생 이광수나 1897년생 염상섭 같은 1세대 문인들과는 다른 세대에 속한다. 1908년생인 김유정, 김기림, 임화나 1910년생인 이상, 1911년생인 김남천이 그와 같은 연배의 문인이다. 박태원은 정지용, 이태준, 김기림, 이상 등과 함께 구인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박태원의 집안은 아버지 형제가 양약방과 의원을 하고 있었으므로 유복한 편이었다. 식민지 시대임에도 정규 교육 과정을 모두 정상적으로 이수하였다. 상급학교 진학에 대해서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고민할 형편은 아니었다. 집안은 문화적 엘리트들과의 교유도 있었다. 박태원은 성장 과정에서 소설가 이광수나 양건식 등과 직접 만나서 조언을 듣고 수업도 받을 정도였다. 경제적으로 유복하고 문화적으로도 조선에서는 최상층에 드는 환경에서 성장한 박태원은 자기의 인생을 설계할 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겪을 고충이나 압박감에서는 자유로웠다.
    고교 졸업 무렵까지 과도한 문학적 관심으로 독서와 창작을 거듭하면서 건강을 해쳐 휴학을 했다는 것도 특이한 일이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에 소설을 읽고 창작에 몰두했던 박태원이 후일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넉넉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가업을 잇는다거나 직장을 구해 돈을 벌어야 할 책무에서도 자유로운 편이었다.
    박태원은 1930년에서 1931년까지 일본 도쿄의 호우세이(法政)대학 예과를 다녔다.2 졸업은 못했지만 일본의 정규 대학에 유학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박태원이 유학한 1930년은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7년이 흐른 시점이었는데, 이때는 도쿄가 대지진의 재난을 겪고 모던한 도시로 재탄생하고 있던 시기였다. 도쿄 최초의 지하철이 개통된 것이 1927년이었으며 출판 잡지 등을 통해 각종 대중문화가 전면에 등장하던 시기였다. 이런 그의 성장 환경이나 교육과정이 그의 소설을 만들어낸 원초적 조건일 터이다.
    

2.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식민지 현실의 부재와 청년 소설가의 행복 찾기

    1934년 8월부터 9월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누가 뭐라 해도 박태원의 대표작이다. 1936년에 발표된 이상의 「날개」와 함께 이 작품은 한국 근대모더니즘 소설의 대표 격으로 거론된다. 개인 박태원이 연상되는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다. 전통적인 소설의 문법과는 달리 일종의 의식의 흐름 기법을 도입했다거나 소설의 몇몇 대목을 자유 연상 기법에 의해 서술하고 있다는 점, 언어 예술로서 소설의 문장에 대한 자의식,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소설로 평가받을 근거는 부족하지 않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여러 연구자에 의해 주인공 구보가 서울 시내를 배회하면서 자본주의적 문명 비판이나, 식민지 현실, 무기력한 지식인의 일상을 모더니즘 기법에 의해 잘 드러내었다고 평가받아온 작품이다.
    그러나 기존의 평가처럼 이 소설이 과연 식민지 현실이나 경성이라는 도시 공간과 깊게 연결되어 있는지는 따져보아야 한다. 우선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실제로 ‘식민지’로서의 ‘현실’이 그려져 있는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시대의 배경은 있어도 그 시대의 ‘현실’, 식민지이기에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은 뚜렷하게 찾아보기 힘들다. 있다 하더라도 배경으로만 존재한다. 일본식 지명이나 일본의 관청 (예를 들어 총독부 병원 같은) 이름, 일본식 연호年號가 박힌 동전을 사용하는 등, 일상의 생활 조건이 일제강점기라는 건 알아도 독자가 이게 ‘식민지’여서 겪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포괄적 맥락에서 식민지라는 조건을 작품 해석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는 건 수긍할 수 있으나 이 작품을 한국문학이 아니라 세계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에도 식민지 현실이 다뤄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경성을 ‘도시’로서 탐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3 도시 공간을 배회하면서 여러 지명이나 건물 이름, 전차 노선 등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의 눈이 경성이라는 도시의 ‘공간’을 ‘탐색’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산책이라 불러도 되고 배회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구보의 목적은 서울이라는 공간을 관찰하고 연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가 부산항에 내려 부산의 도시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가를 묘사하는 대목과 비교해보아도 이 점은 명백하다.

    ‘아무개 집이 이번에 도로로 들어간다데.’ 하며 곰방담뱃대에 엽초를 다져 넣고 뻑뻑 빨아가며, 소견消遣 삼아 숙덕거리다가 자고 나면, 벌써 곡괭이질 부삽질에 며칠 어수선하다가 전차가 놓이고, 자동차가 진흙덩어리를 튀기며 뿡뿡 달아나가고, 딸꾹 나막신 소리가 날마다 늘어가고, 우편국이 들어와 앉고, 군아가 헐리고 헌병 주재소가 들어와 앉는다. 주막이니 술집이니 하는 것이 파리채를 날리는 동안에 어느덧 한구석에 유곽이 생겨 샤미센三味線 소리가 찌링찌링 난다.4

    「만세전」의 주인공 이인화는 시모노세키에서 연락선을 타고 와 부산항에 내려 부산의 골목골목이 변화해가고 있는 모습을 이렇게 드러내고 있다. 「만세전」과 비교해보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등장하는 장소는 주인공 구보의 발걸음이 닿는 곳이 그곳이다 보니 등장하게 되는 장소나 건물일 뿐이지 도시 공간 탐사를 위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은 아니다. 궁극적으로 작가의 관심이 도시 공간에 놓여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도시를 제대로 관찰하는 대목은 경성역 장면이다. 전 작품을 통틀어 구보의 시선이 날카로워지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구보는 고독을 느끼고, 사람들 있는 곳으로, 약동하는 무리들의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생각한다. 그는 눈앞에 경성역을 본다. 그곳에는 마땅히 인생이 있을 게다. 이 낡은 서울의 호흡과 또 감정이 있을 게다. 도회의 소설가는 모름지기 이 도회의 항구와 친해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러한 직업의식은 어떻든 좋았다. 다만 구보는 고독을 삼등 대합실 군중 속에 피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5

    구보는 경성역을 바라보고 그 안의 대합실에 앉아 있는 군상을 묘사한다. 그런 군중들을 바라보면서도 오히려 그들 가운데에서 고독을 느끼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있어도 모두 저마다 홀로 있는 타인으로서의 단순 집합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타자, 개별자들의 집합체가 근대 도시의 군중이다. 그들을 묘사하려다 감시자가 있는 것을 눈치채고 자리를 뜨는 대목까지 이 작품에서 구보의 눈에 포착된 도시 공간과 사람들의 모습이 빛을 발한다. 그러나 도시를 바라보는 소설가적 긴장감은 이 정도가 전부이다.
    그렇다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과연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이 소설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도시의 공간이 아니라 그 도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만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그들과 견주어 과거에 만났거나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떠올리는 상념도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그들이 도시 공간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니다. 도시를 걷고 전차를 타고 다방에 들어가면서 사람을 만나고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기에 도시 공간이 등장하는 것일 뿐, 정작 소설의 주요 내용은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느낌이나 벌어지는 일, 예전에 만났던 사람들의 기억들이다.
    이십 대 중반의, 도쿄(東京)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소설을 쓴다고 제대로 직업을 갖고 있지 못하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남자, 스스로는 궁핍하다고 말하지만 실제 씀씀이는 전혀 궁핍하지 않은 남자가 하루 종일 서울 시내를 돌아다닌다.6 왜 돌아다닐까. 작품을 자세히 읽어보면 행복을 찾기 위해서라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을 보고 만나면서 저들은 행복할까,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를 궁리하는 것이 이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이 작품은 그가 어디를 다녔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가 누구를 만났고 그를 통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가 중요하다.
    소설에서 그가 만나거나 떠올리는 사람들은 30명을 훌쩍 넘는다. 그 가운데에는 여성들이 많다. 미혼의 젊은 남성이니 이성에게 관심을 갖고 낭만적인 연애를 꿈꾸거나 미래의 배우자를 상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구보가 꿈꾸는 행복은 구원의 여성을 만나거나 이상적 연애를 하는 일도 포함된다. 그러나 과거에 짝사랑했던 친구 누이가 아이를 키워가며 그악스러워지는 모습을 보고는 짝사랑의 추억도 지워버린다. 일본 유학 시절 만났던 여인을 생각하면서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해서도 안타까움을 느낀다. 전차 안에서 과거에 선을 본 여인을 우연히 발견하고 여러 상념에 젖기도 한다. 경성역에서 뛰어난 미인을 애인으로 두고 자신의 돈을 자랑하는 중학 시절 열등생 동창을 만났을 때는 잠시, 그가 행복할지도 모르겠다고 부러워한다.7 카페에서 만난 여급에게 다음 날 만나자는 내기를 하는 것도 낭만적 사랑에 대한 희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렇게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는 이십 대의 젊은 남성이 기대할 법한 성과 사랑, 결혼에 대한 다양한 욕망과 기대가 그가 머물고 이동하는 장소에 따라 자연스레 등장하고 사라져간다. 거기에는 자기가 기대하는 사랑도 있지만 친구의 실패한 사랑, 실패한 결혼 생활도 끼어든다.
    그런데 소설 속 구보는 사랑을 희구하고 자신의 건강 걱정을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경제적 풍요로움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본다. 화신백화점에서 중산층으로 보이는 부부를 앞에 두고 “업신여겨 볼까 하다가, 문득 생각을 고쳐, 그들을 축복해”주는 데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구보가 생각하는 진정한 행복은 세속적으로 안정된 삶은 아니다. 호기롭게 동료들과 술을 마실 수 있는 보험회사 외교원은 경멸의 대상이며 예쁜 여인을 애인으로 삼을 수 있는 중학 시절 동창생의 경제력이 부러운 것도 아니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황금광들도 경멸의 대상이다. 오히려 그들의 교양 없음과 속물근성은 비판의 대상일 따름이다. 경제적 궁핍은 그의 고민이 아니다.
    그가 그래도 부러워하는 것은 서양, 아니면 도쿄 정도라도 여행을 하거나 친한 벗들과 즐겁게 지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보가 사회부 기자이자 시인(김기림일 것으로 추정된다)인 친구를 불러내 찻집에서 만나는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고독을 달래려고 만남을 청했으나 생각보다 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시인이자 기자인 친구는 왕성한 생활력에 문학적 열정이 남다르다. 구보는 그런 친구에게 미묘한 이질감을 느낀다. 이 소설에서 구보의 눈에 비친 시인은 자기 신념에 차 있어서 어떻게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인다. 그와의 저녁 시간을 기대했으나 그는 훌쩍 집으로 가버린다. 마침내 찻집을 운영하는 다른 문우(이상으로 추정된다)와 만나 밤에 카페로 향해 여급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 새벽이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며 구보가 다짐하는 것은 생활을 가지겠다는 것이다.
    소설의 거의 마지막 대목에 오면 구보의 행복 찾기 결말이 실체를 드러낸다. 그건 창작을 열심히 하고 그것으로 자기의 생활을 삼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하는 것이다. 아직 삶에 대한 뚜렷한 확신도 없고 이렇다 할 문학적 성취를 거둔 것도 없는 소설가가 하루 종일 거리를 배회하고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이제는 목적 없이 방황하는 시간을 정리하고 소설을 열심히 써야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처럼 보인다. 하루를 낭비한 것이 얼마나 허탈한 일인지, 과연 이런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인지 회의에 빠졌을 법하다. 사랑을 동경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현실이고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게 별다르지 않은 거라고 다시 확인하면서, 그래도 자신이 붙잡고 있는 소설에서 성취를 이루고 그것으로 자기 생활의 중심을 세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그의 결론이다. 이런 결론이 대단한 통찰일 수는 없어도 자신에게 솔직하다는 점에서 진실성을 담고 있다. 그 과정이 상념을 따라 이리저리 흘러가며 한 편의 소설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관심은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 탐색이나 식민지 현실을 드러내려 했던 것이 아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행복을 찾아 나선 소설가가 하루 동안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리고 의식이 흘러가는 바에 따라 돌아다닌 장소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나열한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주제 의식도 그렇게 명징한 건 아니다. 이 작품은 하루라는 시간 안에 청년 소설가 내면의 유동성을 담아내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불투명해서 다루기 어려운, 내면이라는 실체를 소설이라는 객관화된 문학적 틀로 구현해내었다는 점이 성과이다. 소설을 쓰는 일로 생활을 삼겠다는 구보의 결심이 일목요연하게 서사적 얼개로 잘 구성된 건 아닌데, 주목할 점은 우리의 실제 생활이나 내면도 그렇게 잘 짜인 게 아니듯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그 흔들림이나 유동성을 소설로 구현해내는 데 성공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구보’로 대표되는 ‘개인’이 이 소설에서 비로소 등장했다는 것이다. 존재 자체가 자유로워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지만 모든 게 불투명해 보이는 내면을 갖고 있는 ‘개인’은 이 소설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만세전」의 이인화와 비교해보더라도 그렇다. 이인화처럼 자신이 식민지 주민이라는 심리적 억압은 구보에게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게다가 구보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곧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데 그게 특별할 게 없다. 여러 방면으로 생각들이 흩어진다. 삶에 대한 절실함도 문학이라는 열망을 빼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직업을 갖거나 경제적 곤궁을 절박하게 느끼는 존재가 아니다 보니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고 그렇기에 더욱,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동경도 강렬해진 것이다. 독특한 근대인, 자유로워서 오히려 고독한 예술가 개인을 창조했다는 점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거둔 또 다른 문학사적 성취가 아닐까.
  

3. 박태원은 과연 모더니스트였을까, 전업 작가였을까

    실제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발표한 이후 박태원은 소설 쓰기에 전념한다. 1934년 10월 유복한 집안의 무남독녀와 성대한 결혼식을 마치고 그는 열심히 소설을 쓴다. 1935년부터 해방 전까지 그가 발표한 단편소설이 28편, 중편이 6편, 각종 신문과 잡지에 연재한 장편이 11편(미완성 작품 포함), 수필 62편, 평론 10편, 동화나 야담 3편, 번역 15편에 이른다. 1935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전까지 만 10년 8개월 정도의 기간에 쓴 글의 양 치고는 상상을 넘어선다. 평균적으로 1년에 중단편 서너 개, 장편 하나, 번역 하나 이상, 평론 하나, 수필 다섯 개 이상씩 쓴다는 건 중노동이나 다름없다. 이만큼 글을 써냈다면 원고료 수입으로도 생활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박태원은 각종 신문과 잡지에서 많은 청탁을 받았고 그 역시 가리지 않고 글을 주었다.8
    일제강점기 작가들의 원고료가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정확한 추정은 쉽지 않으나 1934년 삼천리사에서 각 신문사의 학예면 원고료에 대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매월 50~60원, 《조선중앙일보》는 30~40원이고 총독부에서 지원받는 《매일신보》는 월 300원까지 이른다.9 학예면에 실리는 작가들의 글은 1회당 1원에서 2원50전 정도였다는 기록이10 있으므로 박태원처럼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작가였다면 생활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9권의 단행본 소설집이나 장편소설, 번역 단행본을 따로 출간하였으므로 인세 수입도 만만치 않았다.
    일제강점기 중산층의 한 달 생활비가 70원 내외였을 거라고 계산할 때, 장편 연재에 중단편과 수필을 쓰고 이따금 단행본도 발간하는 박태원으로서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11 그가 일제 말기에 발표한 사소설 「재운財運」에는 “겨울을 나는 동안에 월평균 삼백여 원의 원고를 쓰고, 또 팔 수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돈암동에 대지가 넓은 주택을 직접 지어 이사했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딸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백화점에 가서 새로 옷도 사주고 집안에 일을 도와주는 할멈이나 소녀를 늘 데리고 있던 것을 보아도 그렇다. 박태원이 식민지 시대에 궁핍하게 살아간 소설가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평가해보면 그의 작품은 양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을 것이 많지는 않다. 그가 발표한 수많은 중단편 가운데에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이외에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작품은 의외로 별로 없다. 「골목 안」 정도나 「방란장 주인」이 그나마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인데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떨어진다. 동시대의 이태준이나 이효석, 채만식, 김남천 등과 비교하더라도 그 성과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박태원을 한국의 대표적 모더니스트라고 평가하는 것도 실체에 비해 부풀려졌다는 생각이다. 그의 작품 전반을 보더라도 박태원이 모더니스트였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회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대표작을 근거로 모더니스트라고 말한다고 해서 잘못된 건 아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 모더니즘 작품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더라도 박태원이라는 소설가 자체가 모더니스트라고 평가하려면 조금 더 엄밀할 필요가 있다. 초기작 일부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방란장 주인」 정도를 제외하면 그가 이후 쓴 작품을 두고 모더니스트의 그것이라고 흔쾌히 말할 수 있을까? 발표된 작품들의 개별적 성공 여부를 떠나 그가 진정 모더니스트로서 소설을 쓰기 위해 분투해왔는가를 냉정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표 장편인 『천변풍경』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의 어느 면이 모더니즘인지는 모르겠지만 청계천변에 살아가는 여러 인물 군상을 피카레스크식 구성으로 재현해냈다는 점, 중심 서사는 없이 다중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장면과 장면을 자연스럽게 넘나들고 있다는 정도일 텐데, 이 정도를 갖고 모더니스트로 평가한다면 모더니즘을 너무 안이하게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천변풍경』은 오늘날 대중문화에 빗대어 말하자면 청계천변의 여러 인물과 가족의 삶을 회차回次 별로 다채롭게 그려내는 일일드라마 비슷하다. 이발소, 이쁜이네, 민 주사, 한약방, 카페 여급 하나코, 금순이, 점룡이네 등, 청계천변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두루 섭렵하여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이 집 저 집 방문하면서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고개를 디밀어 들여다보고 여러 갈피의 에피소드로 묶어내어 1편의 장편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맛깔스러운 문장이나 자연스러운 장면 전개, 사소하지만 세밀한 에피소드 구성 등으로 작가가 공력을 들여 쓴 장편소설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동시대 다층적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이 있는 통찰이나 날카로운 해부가 번뜩인다기보다는 작가의 따뜻한 휴머니즘이 작품을 안온하게 감싸고 있다. ‘따뜻한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의 실체를 파고 들어가는 분석력보다 민초들의 생활에 대한 인간적 안타까움과 평속한 윤리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소재가 넓게 흩어지고 그걸 모아내는 서사의 초점은 불분명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4. 일제 말기 박태원의 자화상 연작, 밥벌이로서 소설 쓰기의 윤리학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제 말기는 암흑기라는 이름으로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괄호로 닫혀 있는 시기였다. 친일문학이 주조를 이루는 시기였기에 제대로 연구할 가치가 있는 시대는 아니라고 치부되었다. 여기에 자칫 소모적인 친일 논란에 불을 댕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연구자들의 심리적 부담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로 하여 이 시기 문학사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탈식민주의 문화이론에 국내 연구자들도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 근대문학을 다양하게 다시 해석하려는 시도 가운데에 일제 말기 문학도 연구의 대상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일제 말기의 문학에 대한 평가의 준거틀을 어떻게 확보하는가에 있었다. 일제 말기의 문학 활동과 작품에 대한 평가는 친일, 혹은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한 문제 때문에라도 작품의 전후 맥락과 텍스트의 면밀한 분석, 삶에서 보여준 지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온전히 가능하다. 일제 말기야말로 다른 어느 시기보다 문학 연구 특유의 섬세한 접근이 필요한 시기이다.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문학작품이라는 특수성에 대한 동시적 이해가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폭압적 정치 체제 아래에서 처지에 따라 문인들의 작품이나 행동은 중층적이고 때때로 예상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권력이나 정치에 대해 일관된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인간이 폭력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이 시기 문학작품 속에서 어떤 일관성과 방향을 읽어내는 것은 연구자의 몫이다.
    따라서 일제 말기의 문학사는 다른 시대와 달리, 작가가 동시대에 대해 정치적으로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를 판별해내는 일이 중요하다. 일제 말기 문학사 연구는 예술적 성과와 미학적 가치만을 따지기가 불가능하다. 그 어느 시대보다 정치적 올바름이 문제 되는 시기가 이때였다. 다만 그 정치적 올바름을 읽어내는 것이 단순해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작품의 자구에만 매달리지 않고 작품 전체를 보는 종합적 시각이 중요하다.
    일제 말기 박태원의 작품과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단편적인 근거만을 갖고 친일 여부나 저항 여부를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자기 신념에 충실한 소수를 제외하면 보통의 문인들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때로는 무엇이 진실인지 혼란스러워하며 살아간 시대였다. 박태원의 일제 말기 소설 중 사소설 연작인 「음우淫雨(1940. 10.), 「투도偸盜(1941. 1.), 「채가債家(1941. 4.)는 그런 점에서 자세히 읽어보아야 할 작품이다.12 이들 작품은 작가 스스로 ‘자화상 3부작’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연작이다. 그가 1940년 직접 설계해 집을 지어 이사한 돈암동 집과 가족들의 이야기를 다룬 것으로 소설가 박태원의 면모와 당시 생활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연작소설을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는 집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의 이야기이다.
    소설가가 집과 관련된 소재를 선택해 3편의 소설을 썼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음우」는 계속되는 장마로 새로 지은 집의 지붕이 무너지고 집 안 여기저기 비가 들이쳐 일상이 허물어지는 이야기이고 「투도」는 좀도둑이 들어 집안의 평화가 위협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채가」는 집을 지을 때 대출받은 돈과 이자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사건을 다룬다. 자연재해로 인한 안전의 위협이거나 외부인의 물리적 침입, 집 때문에 생긴 경제적 불안 등, 모두 일상의 평온한 삶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소설의 소재들이다. 주인공인 소설가는 사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생활인으로 겪게 되는 생활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작가는 일제 말기라는 시기에 왜 이런 소설을 여러 편 계속 썼을까. 일부 연구자들이 주장하듯이 일제 말기라는 상황을 고려해 가족의 안정된 삶을 위협하는 외부 존재를 군국주의 체제의 알레고리 삼아 창작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13 즉, 가족의 안정된 삶과 일상의 평온을 위협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에 등장하는 위협들은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요컨대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생길 수 있는, 해결 가능한 문제들이거나 소소한 걱정거리 이상은 아니라는 점에서 군국주의를 거기에 비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채가」의 마지막 대목은 해석에 유의해야 할 대목이 아닐까 한다.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집을 짓는 데 들어간 비용 때문에 빚을 얻어 생겨난 문제와, 이와 별개로 큰딸인 설영이의 유치원 입학이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등장한다. 특히 소설 끝부분에서 유치원 입학을 위해 면접을 하다가 ‘창씨개명’ 문제가 등장한 것을 주목해 이 소설이 일제 말기 억압적 상황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하는 사례가 있다. 그러나 소설의 맥락을 따져보면 작가는 ‘창씨개명’에 심각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창씨개명’ 문제로 딸의 유치원 입학이 불가능하게 된 것도 아니다. ‘창씨개명’ 문제는 면접하는 과정에서의 작은 해프닝일 뿐이지 정작 작가가 드러내려 하는 것은 커가는 딸아이의 대견스러움이다. 면접하는 과정에서 가족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얘기하더라는 아내의 설명에 소설가는 유쾌한 웃음을 터뜨린다. 하루 종일 빚 문제 때문에 고생했던 시름을 딸들의 재롱으로 잊게 된다는 것이 소설의 결말이다. 가장으로서 집안의 어려움을 헤쳐가야 하지만 그래도 가족 때문에 힘을 잃지 않는다는 평범한 주제의 소설이 「채가」이다.
    채권자가 “도변渡邊(와타나베)”라는 일본인이라는 점도 해석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경제적 압박을 가하는 것이 일본인이므로 일제 말기 군국주의의 억압적 상황을 이런 식으로 우회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해석을 할 수도 있겠다. 소설가가 와타나베가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나 저택인 그의 집안 분위기 등을 보면 그런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소설은 경제적 어려움을 드러내는 데에 더 초점이 가 있다. 민족 문제를 소설의 핵심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 소설이 일제 말기에 발표되었다고 해서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억압적 성격을 고발하려 했다거나 협력에 대한 거부 의도를 우회적으로 암시한다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부분이나 자구가 아니라 소설 전체의 주제와 지향하는 내용을 아울러 살펴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만약 그럴 것이라면 같은 시기 발표한 김남천의 「등불」 같은 작품과 비교해보아야 한다.14 일제 말기 지식인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사소설 형식으로 잘 드러낸 작품이 「등불」이다. 소설가였지만 회사에 취직해 월급을 받는 생활인으로 바뀐 주인공의 처지를 담담하게 드러내면서 보호관찰 대상이 되어 보호사를 정기적으로 면회하는 장면, 그를 만나고 돌아온 날 아이를 재우면서 느끼는 상념을 통해 군국주의 체제 아래에 목숨을 부지하며 생활인이 되어버린 소설가의 모습이 비감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이런 소설들과 견주어 자화상 연작이나 「재운」 같은 소설을 읽는다면 박태원이 그려낸 이 시기의 모습은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사소하다. 생활인으로서의 소설가, 밥벌이로서의 소설가의 모습이 부각된 대신, 시대를 고민하는 지식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가 시대에 대해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완전히 무감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박태원은 개인 성향 면에서도 시대와의 접점이나 긴장 속에 자신의 존재나 문학을 고민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문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 하는 데에 익숙했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문학을 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일제 말기에 쓴 자화상 연작은 그런 점에서 주변 일상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곤혹함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전쟁을 선동하는 시대에 작가는 오히려 일상을 소재로 삼아 평범한 날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대의 일상은 그렇게 한가롭지 않았다.15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그는 집과 가족 주변의 사소한 일상에서 소재를 찾아 소설을 썼다. 작가는 시대와의 긴장에 의도적으로 눈을 감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대에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를 묻는다면 작가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었다고 답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이렇게라도 소설을 썼어야 했을까. 소설가이니 소설 쓰는 게 업이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면 할 수 없지 않겠느냐고 답할 법하다.
    그에게 문학은 생활의 수단이 됨으로써 가족들을 돌보고 집을 장만할 수 있게 만든 소중한 업이었다. 그가 일제 말기에 『삼국지』나 『수호지』, 『서유기』 번역에 나서는 것도 이런 사소설의 연장 위에서 소설가로 생존의 방편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계속 연장된다면 이윤에 밝은 근대인의 초상밖에 남지 않게 된다. 소설이 교환가치가 되는 세상에서 무엇을 팔 수 있을 것인가만 신경 쓰고 정작 세상 자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눈 감는 소설가. 오히려 시대가 그럴수록 더욱, 소설을 쓰는 행위의 엄정함을 끈질기게 물었어야 하는 건 아니었을까. 해방을 맞아 상황이 반전되고 그는 다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운명을 맞게 되지만 적어도 일제 말기까지는 이런 삶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주석〉

  1. 박일영, 『소설가 구보씨의 일생』, 홍정선 감수, 문학과지성사, 2016, 13쪽.
  2. 박태원은 유학 무렵으로 추정되는 1931년 5월 《동아일보》 지상에 「하르코프에 열린 혁명작가회의」라는 이름으로 미국 잡지(번역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잡지”라고 소개했다)에 실린 기사를 전문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글을 번역했다고 해서 그를 사회주의 문학에 동조했다고 평가하기는 이르다. 젊은 시절 외국 사상에 대한 동경 정도로 보는 게 실제에 부합하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이 글을 번역했을 때 그는 만 21세였다.
  3. 윤대석, 「경성의 공간분할과 정신분열」(『국어국문학』 144호, 2006.)에서도 작가가 도시 공간을 대상화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4. 염상섭, 『만세전』, 문학과지성사, 2014년(개정판), 77쪽. 이 작품의 저본은 1924년 고려공사에서 발행한 판본이다.
  5.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문학과지성사, 2005, 114쪽. 이 작품의 저본은 을유문화사에서 1948년에 출간한 『성탄제』이다.
  6. 이십 대 중반에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시 풍토로 보자면 노총각 소리를 들을 수준이었다. 국가기록원 나라기록포털에 의하면 1960년 남성의 초혼 연령은 25.4세였고 통계청 KOSIS에 따르면 1938년 기준으로 남성의 경우 24세 이하 혼인 비율이 60퍼센트에 이를 정도였다. 한편, 구보가 이날 하루 찻집을 세 번 방문하고 저녁 식사로 설렁탕, 길가에서 친구의 조카를 만나 수박 두 통을 사주고 밤에는 카페에서 여급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전차 비용은 빼더라도 그가 이날 쓴 돈은 요즘 물가 기준으로 보더라도 10만 원은 훨씬 넘었을 것이다. 술값이나 저녁 식사 값은 누가 냈는지 알 수 없지만 정말 궁핍한 소설가라면 이렇게 돈을 쓰지는 못했을 터이고 설령 돈을 쓰더라도 주머니 사정을 의식했을 것이다.
  7. 구보는 소설 속에서 그 여자를 보고 “확실히 어여뻤다. (중략) 어여쁘다고 생각하여 온 온갖 여인들보다 좀 더 어여뻤을지도 모른다”고 언급할 정도이다.
  8. 다만 흥미로운 사실은 박태원이 많은 신문과 잡지에 글을 발표하면서도 『인문평론』과 『국민문학』에는 단 한 차례도 글을 싣지 않았다는 것이다. 최재서가 주재한 잡지에 글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우연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최재서 쪽에서 아예 청탁을 안 했을 수도 있다. 인문사에서 번역된 책을 출간한 게 딱 한 번 있을 뿐인데, 왜 그랬던 것인지는 생각해볼 만하다.
  9. 「삼천리 기밀실─각 사의 원고료」, 『삼천리』 제6권 7호, 1934. 정경운, 「근대문인 원고료의 사회학」(『현대문학이론연구』 51집, 2012.) 370쪽에서 재인용.
  10. 다언생, 「비중비화, 백인백화집─홍명희와 조선일보」, 『별건곤』 69호, 1934, 19쪽. 위의 논문 371쪽에서 재인용.
  11. 박현수, 「소설에 나타난 식민지 조선의 물가」(『대동문화연구』 121집, 2023.)에 따르면 교사 월급이 40~80원, 은행원 월급이 60~80원으로 조사되었다. 262쪽.
  12. 이들은 앞의 2편이 『조광』에 실렸고 「채가」는 『문장』에 실렸다. 참고로 이외에 「재운」(『춘추』, 1941. 8.)도 자화상 3부작의 연장선 위에 있는 동일한 유형의 작품이다.
  13. 방민호, 「박태원의 1940년대 연작형 ‘사소설’의 의미」(『인문논총』 58집, 2007)가 대표적이다. 방민호는 사소설 연작을 전반적으로 일제 말기 상황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로 해석하고 있다. 특히 「채가」에서 ‘창씨개명’과 일본인 채권자 와타나베를 등장시킨 대목에 대해서도 일제의 억압적 체제를 드러내는 징표로 읽는다. 그러나 이는 작품 전체의 주제와 어긋나는 것으로 보여 동의하기 어렵다.
  14. 김남천의 「등불」은 『국민문학』 1942년 3월호에 발표되었다.
  15. 일제 말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본 지배체제는 상당한 정도로 억압적이었다. 예를 들면 1942년에 일어난 일인데,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소학교 교사 동료인 남녀가 산책하는 과정에서 남자가 고급 생과자는 일본인에게만 배급되고 있다거나 조선어가 세계에서도 우수한 언어라고 여교사에게 말했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일이 있었다. 김락기, 「내선일체는 허구이고 내선차별이 실제이다」, 『인천역사통신』 2020년 가을호(26호) 참조. 소소한 일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당하는 이런 사건은 의외로 많이 일어났다. 김락기, 『인천역사통신』, 24, 25, 27호에서 같은 저자의 다른 글도 참조.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