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대담회: 나의 마음과 너의 우주가 만났을 때

  

일시 2023년 3월 25일 (토) 오후 1시
장소 한국근대문학관 3층 다목적실
사회 오세란
대담 송수연, 선우은실
주관 한국근대문학관
  

〈편집자 주〉
이 대담회는 2023년 3월 25일 오후 1시에서 4시 무렵까지 ‘책담회’라는 명칭으로 진행되었다. 3시간 가까운 대담 내용을 줄이고 다듬은 편집본을 『작가들』에 싣고, 전체 내용이 모두 들어간 유튜브 영상은 글 끝에 링크를 걸어두었다. 독자들의 양해를 바란다.
  

1부. 마음과 우주의 만남

  

오  세  란

오세란 평론가 ⓒ 한국근대문학관

    여러분 안녕하세요. 한국근대문학관의 책담회 진행을 맡은 저는 청소년문학 평론가 오세란이라고 합니다. 오늘 책담회에서는 ‘나의 마음과 너의 우주가 만났을 때’라는 멋진 제목으로, 두 평론가의 책 제목에서 한 단어씩 따서 지으셨는데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공식적인 행사에서 평론가 세 사람이 모이는 것은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되도록이면 즐겁고 따뜻하고 다정한 자리를 만들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1부에서는 먼저 한 분씩 본인의 평론 활동이라든가 평론집에 관한 이야기를 차례로 듣도록 하고요, 2부에서는 비평의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그리고 또 비평이라는 활동을 하시면서 전반적인 한국문학계, 독자들과의 만남 등등에 관해서 폭넓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2부가 끝나면 청중석으로 마이크를 넘겨서 질문을 받겠습니다.
    문학관 측에서 가나다순이라고 그러더라고요. 모음 순서상 선우은실 선생님이 먼저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우은실 선생님은 인천에서 태어나셨고 인하대학교에서 공부하셨습니다. 2016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평론으로 등단하셨고 공저로 『끝없이 투명해지는 언어』(박동억 외 11명, 문학과지성사, 2022)를 내셨습니다. 최근에 『시대의 마음』(문학동네, 2023)이라는 평론집을 내셨는데요, 「책머리에」에 보니까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시대라는 거대한 시공간의 언어를 통과해나가면서 건져 올린 것은 겨우 마음, (어쩌면) 대단하게도 마음이다.”(『시대의 마음』, 8쪽.) 필자의 목소리를 통해 좀 자세히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  우  은  실

    안녕하세요. 선우은실입니다. 이번에 『시대의 마음』이라고 하는 첫 번째 평론집을 내게 되었는데요,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여러분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만들어져서 매우 기쁘고, 생각보다 많이 긴장이 되네요.
    선생님께서 앞에서 아까 「책머리에」 일부를 읽어주셨는데 이게 생각보다 굉장히 쑥스러운 일이다,라는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께서 헤아려주셨듯이 『시대의 마음』이라고 하는 제목을 정할 때에, 제가 2016년부터 2022년까지 평론을 해오면서 노동이라든지 젠더라든지 동시대성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주목을 했는데⋯⋯. 지금 이 시대를 건너가면서 어떤 사회적이고 정합적인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마음’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방식으로야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좀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시대’도 굉장히 큰 개념이고 ‘마음’도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제가 몇 년간 평론을 쓰면서 가장 찾고 싶었던, 가장 형태를 매만져보고 싶었던 것이 이 두 가지가 아니었나 해서 제목을 그렇게 짓게 되었습니다.
  

오  세  란

    조금 더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선  우  은  실

선우은실 평론집 『시대의 마음』

    이전에 작품 해설을 쓴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단행본에 참여한 적은 있었거든요. 그때에도 어떤 작가의 책이 있고 거기에 제가 글을 같이 실음으로써 협업을 한다는 정도의 감각이 있었는데 온전히 자기 책을 묶는다는 건 생각보다 더 품이 많이 들고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저는 글의 분량이 책을 묶기에 부족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욕심껏 다 넣을 수 없는 지점들이 존재해서 마지막 교정을 보는 순간까지도 글을 빼고 순서를 조정하는 작업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신경을 썼던 만큼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특정한 테마들이 통일감 있게 묶인 것들이 잘 전달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고요.
    편집자 선생님께도 질문을 많이 했거든요. 이전에 쓴 글이 지금의 기준에서는 다소 미달하는 논의인 것 같아 자주 물어보았어요. “이거 뺄까요, 말까요?” 또 다른 작가 친구한테도 물어봤거든요. 그 친구가 ‘이게 좀 후져 보일지라도 이러한 논의들까지도 이제 네 글이지 않냐’라고 얘기를 해줘서, 제 마음에 들지 않고 조금 미숙하다고 생각하는 글들을 다 드러내서 보여주는 게 하나의 과정, 제가 이러이러한 평론가로 성장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읽으시면서 어떤 글은 약간은 거칠다고 느끼실 만한 글들도 있겠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  세  란

    송수연 선생님도 같이 인사를 하고 시작을 하도록 할게요. 송수연 선생님께서는 전주에서 태어나셨네요. 인하대학교에서 아동문학 쪽으로 공부를 하셨고 겨레아동문학회 회원이시고, 2014년에 『창비어린이』 신인평론상에 「다문화시대 아동문학과 재현의 윤리」라는 제목으로 당선되어 평론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현재 계간 『작가들』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계시고 ‘어린이청소년SF연구공동체플러스알파’ 회원으로 일을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최근에 『우리에게 우주가 필요한 이유』라는 평론집을 내셨는데요, 역시 제가 「책머리에」를 잠깐 읽어드리면 “평론은 내가 사랑하는 작품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함께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했다. 이 이야기를 좀 보세요. 이렇게 아름다워요⋯⋯. 심장이 뛰고 눈물이 나요. 나에게 아동문학은 사랑이고 희망이다.” 나누고 싶은 작품을 읽고 다시 그것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평론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송  수  연

송수연 평론집 『우리에게 우주가 필요한 이유』

    반갑습니다. 송수연입니다. 원래 안경을 끼는데요.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 게 나에게 좋겠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안경을 벗었습니다. 안경을 벗으니까 좋네요. (웃음)
    비평집을 묶는 동안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다른 평론가분들도 글을 어렵게 쓴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저는 정말 시쳇말로 피똥을 싸면서 글을 쓰거든요. 주변에서 저를 볼 때는 쉽게 쓰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고, 마감에 닥쳐서 막 쓰는데 그전까지 약간 정상인이 아닌 삶을 살아요. 잘 먹지도 않고. 막 폭식도 하고 하다가 원고 독촉 전화가 오면 그때부터 쓰기 시작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어요. 글쓰기가 두려워서 그러는 거죠.
    또 어떤 습관이 있냐면 활자화돼서 나온 제 글을 읽지 않아요. 읽지 않기도 하고 읽지 못하기도 하고. 발표된 제 글을 읽은 게 손에 꼽혀요.
    비평집을 묶으면서 그간 제가 발표해왔던 글을 여러 번 읽는다는 아주 신기한 경험을 했다는 게 아마도 가장 큰 소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지만 제 글과 제 생각을 읽어보니까 일관성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생각보다 일관성이 있는 사람이구나, 이거를 더 깨닫게 돼서 재밌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결과물로 묶인 비평집에 저는 만족하는 편이에요. 출판사에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어요. 여기 있는 초록색 책이 제 책인데 “니 책은 표지가 열일했다” 이런 말을 많이 들었는데 (웃음) 저도 공감하거든요. 처음에 저 표지를 제안받았을 때 매우 기뻤어요. 아이가 딱 마음에 와서 안기는 것처럼 정말 마음에 들더라고요. 제 비평집의 키워드를 세 가지만 꼽으라면, 아동청소년문학, 소수자, 재현, 이 정도인데 저 표지 그림이 그걸 다 담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표지 중앙 좌측에 작은 아이가 있고 그 앞에 거인처럼 생긴, 저는 저게 타자라고 생각하거든요. 타자와 접촉하고 조우하는 장면을 폭력적이지 않고 이렇게 조심스럽고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을까. 저 그림을 쓸 수 있게 해주신 방세미 작가님께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 책은 평론집치고 얇거든요. 글을 빨리 많이 쓰지 못하기 때문에 모은다고 모았는데 저 분량이 나왔고, 묶고 나서 보니까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더라고요. 오늘 여기 나와서 제 책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 것도 좋은 것 같고⋯⋯. 제가 해왔던 일에 한 단락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서 여러모로 감사하고 만족하고 있습니다.
  

오  세  란

    독자로서 책을 받으셨을 때 두꺼운 책이 좋으세요, 얇은 책이 좋으세요? 얇은 책은 약간 가성비 측면에서 봤을 때⋯⋯(웃음) 지금 두껍고 얇고 그 얘기를 해주셔서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어요.
  

송  수  연

    얇고, 그래서 두꺼운 책보다 쌉니다. 아주 가성비가 좋죠. (웃음)
  

시대 안의 감각-들
  

오  세  란

    선우은실 선생님과 함께 집중 탐구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비평가들은 책을 자주 내지는 못하거든요. 시대의 흐름은 2023년인데 평론은 2010년대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평론이 묶이기도 하고 그래서 좀 난감하기는 한데요, 이 정도면 굉장히 빨리 나온 편에 속해요. 그래서 선우은실 선생님이 그동안 굉장히 열심히 활동하셨다는 것을 이 책을 보면서 느낄 수가 있었고요, 특히 재미있었던 것이 「책머리에」에 빨리 내 이름으로 된 평론집을 만나고 싶다는 그 욕망에 대해서 숨기지 않고 써주셨거든요. 그런데 책을 펴낸 다음에는 좀 마음이 달라지기도 하거든요. 실물을 받고 나면 도리어 두려워지는 경우도 있거든요. 전에 보이지 않던 나의 마음과 나의 생각과 이런 것들이 다시 한번 검토되고 도마 위에 오르게 되는 그런 상황이기 때문이에요. 펴낸 다음에 어떠셨는지, 그런 두려움 같은 건 없으셨는지 여쭤보고 싶어요.
  

선  우  은  실

    아까 송수연 선생님께서 표지 이야기를 해주신 김에 그 이야기를 덧붙여 ‘빨리 내고 싶은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표지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부차적인 작업들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시간이 조금 더 걸렸거든요. “저, 표지 뭐 할까요?” 이렇게 인스타그램에 투표를 올리기도 했는데,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표지는 아주 다른 것이어서, 투표해주신 분들은 당황스러우셨을지도요. 원고는 다 묶이고 교정이 끝났는데 그런 과정에서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가면서 출판 자체에 대한 긴장은 많이 풀어지고 있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오늘 릴리즈합니다” 해서 저는 그게 꽤 오래 걸리는 일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한 30분 뒤에 정말 릴리즈가 돼 있는 거예요. 그때 외부 일정이 있어서 그 두근두근하는 순간을 충분히 마주하지 못했는데 어쩌면 다행스러운 일인 것 같기도 해요. ‘반응이 어떻지, 어떻게 올라갔지?’ 하는 것들을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이런 식으로 책이 나왔구나,라는 이 실감 자체를 오래도록 가져갔던 것 같아요. 직후에 못 느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빨리 내고 싶다 하는 마음들이 책을 낸 이후에 좀 진정된 지점들이 있는 것 같고요, 또 말씀하셨던 것처럼 지금까지는 다른 사람의 작품에 대해서 말했는데 이제는 누군가가 내 책에 대해서 얘기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까 조금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작품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언제나 생각하면서도 많이 관심 가져주셨으면 좋겠다,라는 기대도 여전히 품고 있어요.
    사실 선배 평론가들한테 첫 책 준비할 때 어떤 점을 신경 썼는지 조언을 많이 구했거든요. 그런데 “신간 나오면 빨리 구간 됐으면 좋겠을걸”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계속 신간이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지만 조금 빨리 구간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상충되는 마음이 없지는 않더라고요. 그래도 오래가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  세  란

    지금 얘기해주셨듯이 작품 뒤에 사람이 있다는 거를 평론가들이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책을 다 펴내고 나서 보니까 책이라는 게 인터넷 서점에 올라가면 포인트가 있거든요, 포인트. 무슨 문학작품 같은 경우는 단숨에 1만 포인트 이렇게 뛰어넘는데 평론집은 1천 언저리에 와 있으면, 그래서 이렇게 마케팅을 출판사가 열심히 하는구나, 그래서 작가들도 그렇게 요즘에 마케팅을 많이 하는구나, 별별 모르고 있던 부분이 막 보이더라고요. 그럼에도 평론집을 빨리빨리 내야 하는 이유가 최근 담론들 중심으로 평론집이 묶여 있을 때 가장 현대의 흐름과 호흡을 잘 맞출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도 굉장히 늦게 묶은 편이기 때문에 그런 아쉬움이 있거든요.
    또 한 가지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여쭤보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뒤편에 실려 있는 양경 평론가와의 대담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이 되는 부분인데요, 많은 평론가가 이 시대를 진단하고 또 문학을 검토하기 위해서 이론을 많이 끌어들이거든요. 그런 철학을 도구로 사용하고 그것을 본인의 글에 인용하기도 하는 방법을 많이 쓰고 있는데요, 선우은실 선생님 평론집은 그걸 녹인 다음에 본인의 언어로 이야기하려고 하는 그런 노력이 굉장히 눈에 많이 띄었어요.
    평론도 일종의 문학의 범주에 들어 있거든요. 분명히 자기의 문장과 자기의 언어로 조탁된 글들인데, 자신만의 문장과 자신만의 생각 언어를 사유화하려고 하는 부분이 다른 평론집하고 조금 차별화되어 있는데 평소에 글을 쓸 때도 그런 것들을 의식하시는지 궁금해요.
  

선  우  은  실

    네, 주석 없는 비평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평론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한 시점부터의 결심과 연관이 되어 있을 것 같은데요. 평론이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서 어렵다고 여겨지는 편이잖아요. 그리고 실제로 그런 부분은 얼마간 형식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글을 쓸 때 제 목표는 전공자가 아닌 사람이 읽었을 때 이런 내용이구나, 하는 정도로 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었거든요. 복잡하고 어려운 얘기는 그런 방식으로 쓸 수도 있어야겠지만, 평론 쓰기에 대한 문법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평론을 쓸 때에도 이론 공부를 하되 그것들을 누구의 말을 빌려서 하기보다는 여러 관점들을 제 언어로 한번 정리를 한 다음에 제가 할 수 있는 말들로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양경언 평론가와의 대담에서도 그렇고 지금 선생님께서 여쭤보신 부분도 그렇고 저는 사실 이 질문이 생경했거든요. 왜냐하면 이론을 경유한 평론을 잘하는 이들이 있고 얼마간 저도 제 글에서 눈에 띄게 이론가들을 많이 언급하는 건 아니더라도 이론이 완전히 탈락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평론에 기대하는 글의 형식 가운데 하나가 이론을 격려하는 글쓰기인가 그런 것들을 떠올리게 하는 질문이어서, 이런 질문 자체가 제게는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오  세  란

    평론집을 많이 안 읽어보신 분들은 그런 차이점을 못 느끼실 수도 있는데 평론을 시작하시는 분들이 대부분 강단에서 활동을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우리나라에서 오랜 평론의 흐름 중에 하나가 그런 주석과 함께 작품을 분석하는 방식을 많이 쓰고 있고⋯⋯.
    청소년문학은 약간 오해받는 장르이기도 하거든요. 일반문학에 비해서 뭔가 완결성이 조금 다를 것이다, 문학의 범주로 봤을 때 교육의 범주가 아닐까, 이런 여러 오해의 장르라서 그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일반문학이 가지고 있는 잣대를 동일하게 들이대는 방식을 취하다 보니 이론가들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조금 더 내 말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이제 선우은실 선생님 평론을 보면서 했습니다.
    또 한 가지, 1부에 ‘시대 감각’이라는 제목이 들어 있는데, 작품을 읽는 것 이상으로 이 사회를 읽어내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이런 부분도 굉장히 크거든요. 그런 것들을 읽어내는 노하우 그런 것들이 혹시 있으실까요?
  

선  우  은  실

    그런 노하우는 따로 없지만 많은 매체들을 경유해보려고 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것 같기는 해요.
    제가 시대 감각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것이 등단하던 시점의 일과 연관되어 있거든요. 2016년에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고 문학이라는 ‘매체’가 어떤 성질을 가졌는지 심문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요. 제가 활동을 시작한 시점부터 이런저런 윤리적인 문제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화적인 것들이 굉장히 급격하게 제한되고 없어지기도 했고요. 그게 문학에 책임을 묻는 방식이었던 것이겠죠. 글을 요청받을 때에도 요즘에 이러한 것이 우리 문학장 안에서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는데 이것과 연결해서 작품을 읽어봐줬으면 좋겠다는 방식의 청탁들도 굉장히 많이 왔었어요. 저는 사실 그것들을 충분히 얘기할 만큼의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는데, 필요하다면 나중에 수정해나가거나 자기의 의견을 철회하거나 고쳐나가야 되는 것까지를 감안해서 지금 내가 놓여 있는 곳이 어떤 곳이고 내가 읽을 때는 어떤 것들이 보이고 이런 것들을 보는 게 중요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문학’이란 매체에 요청하는 이런 일련의 일들이 문학의 윤리나 문학 매체의 존속/생산의 방식은 아닐까 싶어요. 그런 과정에서 단련된 부분이 있어요.
    또 한편으로는 요즘에 매체 환경이 굉장히 급격하게 변화한다고 하는 걸 좀 느끼고 있거든요. 저한테 세 살 어린 동생이 있는데 감각이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동생은 영상 편집 쪽을 전공하고 더 트렌드에 민감하기 때문이기도 할 텐데⋯⋯. 다들 넷플릭스 보고 OTT 이용하고 SNS가 뭔지 알고 하니까 그러한 매체 시대에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마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미묘한 1, 2년의 시간 동안 많은 것들이 뒤바뀌다 보니까 그것을 어느 시점에 경험했는가가 굉장히 많은 감각을 좌우하는 듯해요. 그래서 그것들을 좀 부지런히 따라가보려고 제가 직접 경유하는 매체는 아니더라도, 이건 어떤 거냐, 이게 왜 재미있냐, 이런 것들을 좀 물어보면서 시대 감각에 대한 것들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오  세  란

    최근 들어서 그 얘기를 몇 번 했거든요. 이제 청소년문학 하지 말까봐. 왜냐하면 청소년과 저와의 간극이 너무나 멀어지는 느낌이 많이 들어서 내가 하기에는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지금 얘기해주신 대로 한 해 한 해가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요.
    그런데 중요한 지점은 그런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는 젊은 세대를 보고 젊은 세대의 것들을 또 녹여서 글로 쓰실 텐데요, 제가 그걸 보면서 또 배우고. 그런 점이 세대 간의 격차를 허무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제가 주목하는 작품들하고 여기 평론집에 실려 있던 작품들이 조금 다르기도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고요,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같이 만나는 건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또 한 가지 이 비평집의 특징 중에 하나가 시 비평도 적지 않게 있다는 거거든요. 저도 가끔 청소년 시 비평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서사를 전공한 입장에서는 소설 비평 쪽에 무게를 두게 되면, 시는 분석 방법이 조금 달라서 좀 겁이 나기도 하거든요. 볼 수 있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들고요. 시 비평하실 때하고 소설 비평을 하실 때 공통점이나 차이점, 이런 것들을 좀 들을 수 있을까요.
  

선  우  은  실

선우은실 평론가 ⓒ 한국근대문학관

    차이점이 더 클 것 같기는 해요. 제가 처음에 작품 활동을 시작할 때에 다뤘던 글이 이장욱 작가의 소설이었는데 이장욱 작가가 시도 쓰고 평론도 쓰고 하는 사람이다 보니 그럼 시도 한번 다뤄보겠냐고 해서 시, 소설을 두루 비평하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시에 대한 공부가 좀 늦은 편이긴 했거든요. 그러니까 시의 문법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소설에 익숙해진 것보다는 조금 더 늦은 편이었어요. 나름대로 이걸 어떻게 말을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던 시간들도 있었는데⋯⋯. 제가 평론이나 해설을 쓰면서 느끼는 두 장르의 다른 점은, 거칠게나마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소설은 비교적 우리가 사유하기에 익숙한 이야기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사회적인 맥락을 끌어오거나 하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럽고 용이한 편인데 시 같은 경우에는 편수가 굉장히 많고 어떤 시와 어떤 시를 연결 짓느냐에 따라서 만들어지는 이야기 자체가 많아지거든요. 소설은 소설집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한 6, 7편 정도가 평균적으로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아무리 많이 연결 지어도 나올 수 있는 가짓수가 되게 많지는 않고 심지어 하나로 다 엮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경우들도 있었거든요.
    시 같은 경우에는 그런 점에서 조금 더 평론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의 자율성이 큰 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자의적인 해석이 돼버릴 수도 있어요. 나한테는 이런 것들이 하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제출을 했는데 순전히 제 기준일 뿐인 거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읽었을 때도 이런 것들을 묶어 읽는 데 충분한 기준을 세워주는 일이 시의 해설이나 비평을 할 때 가장 주안점이 되는 요소였던 것 같습니다. 소설 같은 경우에는 어떤 장면을 뽑아낼 것인가가 더 문제였던 것 같아요. 소설은 우리가 그냥 뭉뚱그려서 이야기나 줄거리로 여기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 장르일수록 저는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파악해야 한다,라고 봐서 가령 어떤 시점으로 쓰여 있는지 그게 이 주제를 전달하는데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지, 이런 디테일들을 소설의 한 장면으로부터 건져 올리는 게 조금 더 재미있는 작업이겠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  세  란

    평론집 보시면 아시겠지만 각각의 비평들이 전부 좋은 텍스트들을 잘 선별하셔서 굉장히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요. 특히 최지인 시를 비평해주셨잖아요. 제가 기존에 생각하고 있었던 노동시라고 하는 개념이 굉장히 협소하구나,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노동이 우리 세대가 생각하는 노동과는 조금 더 다르구나, 「비정규」(최지인, 『나는 벽에 붙어 잤다』, 민음사, 2017)라는 시에서도 보면 일하지 못하는 것까지 노동의 담론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 등이 저의 시야를 굉장히 넓혀주었거든요. 노동시는 노동하는 사람에 관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 혹은 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들이 그 노동하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도 노동시의 담론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 이런 게 굉장히 신선했어요.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해주셔서 굉장히 감사해요.
    그래서 세대 간의 비평이나 문학을 통해서 이렇게 열어나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최지인 시 비평을 쓰시면서 생각하신 거나 그런 것 좀 있으실까요?
  

선  우  은  실

    최지인 시와 관련해서는 2편의 글을 썼을 텐데요. 하나는 노동과 관련한 큰 테마 안에서 여러 시를 고르는 가운데 최지인이 언급이 됐었고, 다른 하나는 최지인의 신작을 중심으로 해서 지금까지 썼던 흐름들을 보는 거였어요(「노동을 해보았느냐고─시에서 노동 읽기」 「생활 전선 보고서─최지인의 『나는 벽에 붙어 잤다』를 중심으로」). 그런데 저도 사실 오세란 선생님이 방금 말씀해주신 걸 듣고 이게 이렇게 읽히는구나, 이게 정말 신선했어요.
    노동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 저도 이제 최지인의 시를 노동시라고 얘기를 하려고 하면 기왕의 문학장 안에서 노동시라고 하는 담론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저희 세대에서는 이게 노동인데요’ 이렇게 쓸 수는 없거든요. 그래서 기존에 어떤 것들을 노동시라고 했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왜 중요했고, 그것과 단절이 됐다면 왜 단절이 됐고 이어져 있다면 왜 이어져 있는지를 같이 보면서 여기까지도 노동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요것 정도를 제안하는 게 목표였거든요.
    제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노동시의 이미지가, 구호를 외치고 노동자 단결, 우리는 만국의 노동자다, 이거였어요. 최지인 시를 딱 열어서 봤는데 뭐라고 설명하기 어렵게 이건 노동시인데,라는 느낌이 드는데 그런 구호 같은 것도 없고 절망과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화자가 보이는데 너무 마음이 아픈 거예요. 만약 내가 이걸 노동시라고 얘기를 하고자 한다면 특정한 감정을 태동하는 하나의 인간의 수행성으로서 노동을 받아들여서 영역을 조금만 더 넓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최지인 시를 호명하면서 노동시의 범주에 대한 검토를 같이하고자 했었어요.
  

오  세  란

    기존 세대들이 가지고 있던 틀이라는 게 되게 견고하잖아요. 그래서 노동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거대 담론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사소함을 다시 돌아보는 그런 지점이 있었어요.
  

아동문학에서 발견한 타자
  

오  세  란

    이번에는 송수연 선생님 평론집에 대해서 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둘 다 평론가가 아니던 시절부터 아동문학을 같이 공부하던 사이였기 때문에 등단하기 오래전부터 활동하셨다는 걸 제가 잘 알고 있고요. 아까도 본인이 말씀하셨지만 천천히 쓰시는 분이고 천천히 활동하시는 분이라서 비평집 묶는 시간도 적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이 비평집을 묶는 동안 그리고 그 결과물을 보는 소회를 다시 한번 짚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송  수  연

    활자화된 제 글을 읽지 않거나 읽지 못하거나 그런다고 그랬잖아요. 근데 이제 책을 묶어야 하니까 저도 3교까지 봤는데, 계속 보면서 여전히 현실성은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뚫고 나가야 할 지점을 시원하게 그동안 우리 문학이 뚫지 못했던 지점들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시의적절할 수 있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10년 동안 평론가로서의 제 삶은 혼자인 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삶이었어요. 작가들하고 사적으로 관계를 맺고 친분이 생기면 공정한 평론을 쓰기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 굉장히 강했거든요. 내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그걸 최대한 객관적인 논리로 풀어내는 게 평론이잖아요. 근데 어쨌든 그게 가능하려면 아무와도 친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제가 10년 동안 가지고 혼자 글을 썼거든요. 저는 책도 혼자, 문학동네 편집부하고만 얘기를 했고 누구에게 이걸 어떻게 할까요, 이런 것도 물어보지 않았고 트렌드가 어떤가, 내 책은 거기에서 어떤 포지션을 가질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도 별로 고민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 평론집이 아르코 창작 지원금을 받았는데⋯⋯.
  

오  세  란

    올해 안에 내야 한다.
  

송  수  연

    서류를 써서 내려고 보니까 몇 부를 찍었는가 쓰는 게 있더라고요. 몰랐거든요. 그래서 담당 편집자한테 전화를 해서 물어봤더니 너무 많이 찍었더라고요.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오는 거예요. 이게 다 재고로 남으면 어떡하려고. 나는 그렇게 많이 찍으라고 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선택해서 찍었기 때문에 재고가 나와도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굳이 혼자 정리를 하고 나는 자야 한다, 내가 안 잔다고 책이 더 팔리는 것도 아니잖아. 나는 원래대로 그냥 다시 자자, 했어요.
    포인트라는 게 있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거든요. 안 볼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포인트를 봤는데, 생각보다 책이 많이 팔리는 거예요. 같은 분야에서 1위를 찍은 적도 있고, 몇 주를 1위를 찍고 하니까 되게 좋더라고요. 제 책이 동일 분야에서 계속 1위를 할 때 한 2주를 거의 매일 가서 봤던 것 같아요. (웃음)
  

오  세  란

    저는 캡처도 해놨어요. 1위 했을 때. 가족들한테 보여주려고.
  

송  수  연

송수연 평론가 ⓒ 한국근대문학관

    어쨌든 기뻤는데 많이 팔려서 기뻤다기보다는, 제가 학생일 때 평론은 ‘그들만의 리그’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되게 어려운 단어로 자기들만 알아듣는 단어로 자기들만의 언어로 자기들끼리 얘기한다 이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사실 그럴 거면 아무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자기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평론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이 고민했었고, 쉽고 재미있는 평론이라는 가당치 않은 목표를 세워놓고 그걸 쓰려고 제 깐에는 꽤 노력을 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더 쉽고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쓸까 하다가 글을 많이 발표하지 못했는데⋯⋯. 재밌어요,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일 기뻤어요. 재밌다는 얘기는 그게 어쨌든 제가 떠든 말이 이해가 되고 거기에서 뭔가 느끼시는 바가 충분히 있었고 소화가 돼야지 재미있는 거잖아요. 재미있고 쉬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평론가의 평론이 쉬울 수 있다는 거를 제 책을 보고 알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가 사실 제일 기뻤어요. 지금도 더 쉬워져야 하고 더 재미있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전 원래 현대소설 전공이었고 아동문학으로 전환을 해보라는 제안을 대학원 시절에 여러 번 들었는데, 사실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거든요. 아동문학을 읽고 자라지 않았어요. 제가 1974년생이라서 한국 동화가 그렇게 많지 않았었거든요. 어렸을 때 책을 많이 보기는 했는데 세계문학 전집을 읽고 자랐지 한국 동화를 어렸을 때는 한 번도 못 읽어본 것 같아요. 아주 어렸을 때는 세계문학을 읽었고 그다음에 중학교 가서는 한국문학을 읽었지만, 소설을 읽었었죠. 동화가 뭔지 잘 몰랐어요.
    석사 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 너무 지쳐서 좋다는 아동문학을 많이 사서 읽었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그전에도 제가 게으른 학생이었지만 그래도 책은 꾸준히 읽었는데 소설에는 없는 세계가 거기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루카치의 “길은 시작되었는데 여행은 끝났다”(게오르크 루카치, 『소설의 이론』, 김경식 옮김, 문예출판사, 2007, 83쪽.)라든가, 아무튼 소설은 그런 세계잖아요. 몰락하는 것을 보여주는,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의 세계인데 동화의 세계는 반대거든요. 그런데 그거를 아주 논리적으로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아가서 설득당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런 작품들이 있어요. 정말 저를 무릎 꿇게 한 작품들이 있었기 때문에 석사 논문을 한 60퍼센트 정도 썼는데 바로 바꿨거든요. 소설에는 루카치가 말하는 멀리 있는 별과 그 별에 다가갈 수 있는 지도가 없잖아요. 아동문학계에는 그게 있거든요.
    이런 세계라면 진로를 바꿔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동문학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아동문학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아주 근원적인 신뢰, 선에 대한 믿음, 관계의 회복을 열망하는 마음. 그런데 그런 것들이 마음에서 그치지 않고 얼마나 노력해서 그것들을 이루어내는가가 잘 그려진 작품들이 있거든요. 그런 작품들을 읽었을 때는 정말 소름이 돋고 이렇게 좋은 책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이 있다는 거를 얘기해주고 싶은 거예요. 그걸 객관적으로 풀어내기 위해서 노력을 한 거였는데 그게 가 닿았다, 어느 정도는,이라고 생각을 해서 책을 내고 나서 기뻤어요.
    중간에 여러 가지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잠깐 쉬었던 적도 있었는데 그 모든 시간을 지나서 책이 1권 나오고 이것들을 통해서 또 새로운 일을 만들고 꿈꾸고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거, 그게 개인으로 끝나지 않고 아동청소년문학장 안에서 서로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이런 계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꿈을 갖게 돼서 참 좋았던 것 같습니다.
  

오  세  란

    저는 문체에도 지문이 있고 자신만의 목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송수연 선생님 평론은 재미있을 수밖에 없어요. 돌려서 얘기하지 않고 솔직하고 스트라이크거든요. 야구로 말하면 스트라이크만 계속 던지는 그런 투수라고 할까요. 평론집 안에는 제 책에 대한 글도 있어요. 평론집을 낸 사람 입장에서는 제 평론을 또 읽어주고 글을 써서 대화를 나눠주셔서 굉장히 감사해요. 이 부분은 의견이 다르다, 이렇게 써주셨거든요. 그렇게 의견이 다르다고 써주신 부분을 밑줄 그으면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인가, 볼 수 있게 되었어요.
    비평집 81페이지에 ‘타자는 우리의 우주’라는 결론에 도달하시는 과정이 있어요. 저도 이 ‘타자는 우리의 우주’라는 데 굵게 밑줄을 칠 수밖에 없었고 타자를 우리의 우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 공동체가 또 공동체의 외곽에 있는 존재들에 대해서 비추어주지 않는다면 문학의 의미나 역할이 무엇일까, 이런 생각도 좀 했는데요. ‘타자는 우리의 우주’라는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얘기를 조금 더 들려주시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송  수  연

    ‘타자는 우리의 우주’라는 말은 「우리에게 ‘우주(SF)’가 필요한 이유」라는 평론 안에 들어가 있는 문구예요. 청소년SF소설 단편집 『옆집의 영희 씨』(정소연, 창비, 2015)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이 책을 읽고 저 평론을 썼는데 저한테도 개인적으로 되게 중요한 글이거든요. 저희가 청탁을 받아서 글을 쓰잖아요. 그리고 청탁의 내용이 생각보다 굉장히 세세하고 디테일해요. 저는 제 생각과 다르면 청탁이 와도 글을 쓰지 않는데요, 제가 그 책을 읽고 나서 정말 너무 좋은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걸 막 너무 소문을 내고 싶은 거예요. 개인적으로 그 작가는 모릅니다. 그냥 그 작품이 너무 좋아서 정말 너무 좋아서라는 말 말고는 설명이 잘 안 되는 거예요. 글을 너무 쓰고 싶었고 그래서 제가 자발적으로 쓴 몇 편 안 되는 글 중에 하나거든요.
    보통은 머리로 저희가 많이 쓰잖아요. 배우고 익힌 것을 객관적인 논리로 풀어내는 것이 평론인데 이 글은 몸으로 쓴 첫 번째 글인 것 같아요, 정말 짧은 시간에. 그럴 때가 있어요. 누가 불러주는 것처럼 글을 쓸 때가 있거든요. 이 글을 쓸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쓴 것 같아요.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가 타자나 소수자,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너’잖아요. 나 아닌 모두가 타자인데 사실 굉장히 먼 대상이죠. 타자나 소수자를 바라보는, 그리고 그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제가 등단할 때부터 여태까지 문제 제기를 많이 한 편이고, 지금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지금보다 훨씬 더 윤리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재현해야 한다는 얘기를 저 책 전체에 걸쳐서 얘기했는데,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그 앎이 머리가 아니라 실제 제 몸으로 내려와서 쓰게 된 글이었어요.
    2017년에 썼는데, 2015~16년 이때쯤에 제 삶에 변화가 되게 많이 생겼어요. 그 이전에 저는 소수자를 바라보는 사람이었어요. 사람의 지위, 위치라는 게 ‘갑’일 때도 있고 ‘을’일 때도 있잖아요. 소수자는 보통 언제나 ‘을’인 사람들이죠. 삶의 변곡점이 생기기 전까지 저는 그냥 계속 공부만 했던 사람이고 내내 책상에만 앉아 있었던 사람이고 소수자의 윤리, 이런 것들은 다 머리에서 나온 거였죠. 그런데 2015~16년에 실제 제가 소수자가 됐거든요. 손바닥만 한 자리도 없는 그런 사람이, 진짜 소수자가 된 거예요. 진짜 소수자가 되니까 세상이 제 뺨을 때리더라고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고 어떤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 사람에게 자리 즉 장소를 주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 장소에서 사람이 되어간다는, 김현경 선생님이 쓴 『사람, 장소, 환대』(문학과지성사, 2015)라는 글이 있는데, 정말 뼈에 한 땀 한 땀 새겨지더라고요. 그때 그 글을 읽으면서 소수자에게 자리와 장소를 갖게 하는 거, 그러니까 타자를 내 존재의 어떤 근원으로 여기는 거, 이게 정말 너무너무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어요. 소수자의 목소리와 요청에 우리 사회가 귀 기울인다면 그런 사회는 폭력적이지 않거나 최소한 지금보다는 덜 폭력적일 수 있거든요. 나와 다른 의견, 나와 다른 취향,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단칼에 틀렸다, 혹은 정상이 아니라고 잘라내지 않는 거, 그런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제가 성 안에 살고 있는 시민이었을 때는 몰랐었는데 성 바깥으로 쫓겨나고 나서는 알겠더라고요. 정말로 타자를 어떤 방식으로 환대를 해야 하는지. 나에게 한 뼘의 자리밖에 없어서 저 사람을 옆에 앉히는 게 힘들면 내 무릎 위에라도 앉히든지 아니면 3명이 한 뼘씩을 내면 한 사람이 앉을 수 있거든요. 어떻게 해서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자에게 그 사람이 자신의 있는 존재 그대로 현현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다라는 것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거를 몸으로 배우고 몸으로 깨달아가지고 쓴 글이었어요.
  

오  세  란

    ‘타자는 우리의 우주’라는 말이 삶의 어떤 궤적 안에서 나왔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결국은 당사자의 자리에 서서 소수자로서 세상을 보는, 그런 말씀을 해주셨지만 언제라도 소수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가 가진 위치이기 때문에 이런 걸 조금만 더 헤아려보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2시 20분에 2부를 시작하겠습니다.
  
  

2부. 제도 안에서 읽고 쓰기

  

오  세  란

    선우은실 선생님, 평론집의 챕터를 보면 문학 제도라든지 아니면 문예지 발간이라든지 출판 상황이라든지 이런 거에 대한 메타적인 측면에서의 비평도 많이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어요. 저희는 그냥 문학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평론이라고 생각했는데 문학이라는 장에 대해서 젊은 평론가들 중심으로 이야기가 되고 있고, 저희도 굉장히 문제의식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깨지 못했던 것들을 지금 담론화해주고 계셔요. 가령 신춘문예를 통한 등단이라든지⋯⋯. 우리나라의 신문이 상당히 많아요. 한 해 신춘문예로 등단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활동이 이어지지 못하고 또 한편에서는 등단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지면을 얻지 못하거나 여러 가지 지원을 받지 못하거나⋯⋯. 그런 것들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은 부분도 있고요. 한편으로 평론은 지면이 없으면 쓸 수 없는 글이거든요. 그런데 그 지면이 굉장히 적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비평이라는 장르로 이렇게 글을 계속 쓰고 계신데 그렇게 선택한 이유가 또 있으신지⋯⋯.
  

선  우  은  실

    우선은 작품집 묶으면서 텍스트 자체에 대한 비평뿐만 아니라 무엇이 문학장을 이루고 있고 또 제도는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고 어떤 문제 제기가 되고 있고 이런 것들을 좀 다면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했어요. 이런 것들은 사실 이미 저보다 조금 더 활동을 일찍 시작한 평론가들이 문제 제기를 먼저 해주어서 그것들을 이어받아서 전개한 지점들이 있었어요.
    이를테면 평론가들이 모여서 어떤 아이디어 회의를 한다고 하는 건 글을 써서 제출하는 것 이전에 어떤 담론들을 꾸릴 것인가 하는 기획에 대한 것이고 이것 역시도 일종의 값이 주어져야 하는 부분이거든요. 그런데 이 아이디어 회의라고 하는 건 눈에 띄는 결과물이 당장 보이는 게 아니다 보니까 아이디어를 가져가는 것 자체에 비용을 지불해야 된다는 걸 설득하는 게 되게 어려운 지점들이 있더라고요. 그리고 또 필요하다면 기관과 협력을 해야 하기도 하고. 이런 과정 안에서 문학예술의 특수성과 아이디어 또한 예술 활동의 일부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받아들여지는 폭의 차이가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문학장 안에 있는 사람들, 그러니까 작품 활동을 하고 문학장을 비교적 가깝게 경유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정작 우리끼리만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 어떠한 방식으로 제출되고 있다는 것들이 자료로서 남지 않으니까 실제로는 이렇습니다,라고 설득할 만한 어떤 근거들이 실물로 주어지지 않는 지점들이 있었던 것 같고요. 이를테면 다른 평론가 가운데서는 비평을 쓰거나 아이디어 회의를 하거나 하는데 실제로 주어지는, 노동력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값이라고 하는 게 굉장히 부족하다고 하는 걸 자기의 몇 년간의 평론에 평균치를 내서 제시하고 문제 제기를 한 면들도 있었거든요.
    단순히 하나의 해프닝으로 볼 게 아니라 이걸 기점으로 해서 이 행위를 가능하게끔 하는 구성 요소를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고, 무엇보다 규칙을 다시 만드는 데 직접 참여할 수 있을 때 우리가 지향하는 어떤 문화의 참여성이라고 하는 것들도 직접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이 좀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담론을 만드는 과정 안에서 검토했던 게 매체와 관련한 것들, 제도와 관련한 것들이었는데 등단 제도가 대표적인, 그래도 많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부분 가운데 하나일 것 같아요.
    이것과 관련해서는 제가 몇 해 전에 『문장웹진』에서 대담을 했던 게 생각이 나요. 등단해서 활동을 좀 오래 한 작가 2명과 신인 작가 2명을 모시고 제가 사회를 보고. 저는 한 차시만 진행했어요. 요 근래가 다매체화된 시대라서 사실은 꼭 문예지나 신춘문예로 등단을 하지 않아도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거든요. 훨씬 대중과 더 빨리 소통할 수도 있고요. 단순히 자비출판이냐 아니냐의 문제뿐만 아니라 웹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기왕의 매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것들을 경유하는 데 조금 더 접근성을 가지고 있는 젊은 층들이 많아졌단 말이죠.
    이러한 것들이 있는 시대에 문학 제도라고 하는 것이 다시 점검되는 측면들이 있는 것 같다, 등단 제도 또한 처음에는 문학이 재생산하는 어떤 종류의 권위들이 문학이 지향하는 것과 어떻게 대비되는가, 어떻게 상충되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검토됐지만 지금은 또 그게 매체 환경과 결부가 되면서 약간 다른 양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작가들께 ‘만약 지금 이 시대에 여러분이 청년 예술가로서 등단 또는 작품 활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여전히 등단 제도를 경유하실 것 같은지 아니면 조금 색다른 시도들을 하실 건지’를 여쭤봤어요.
    저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작가분들께서 응답을 내놓아주셨던 것이, 지금 매체 환경의 변화에 대해서 젊은 층들이 훨씬 더 수용력이 크고 그리고 대중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부분들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문화 제도라고 하는 것 등단 제도라고 하는 기왕의 것을 한번 거칠 것 같긴 하다고 얘기를 하셨거든요. 이게 단순히 제도에 대한 비판점이 없거나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문학을 사유할 때에 이전의 문학은 없고 우리 시대의 문학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흐름 속에서 지금까지의 문학이 연결성을 가지는 건데, 내가 지금 문학장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하는 것조차도 이전의 문학장이 계속해서 만들어온 틀의 자장 속에서 하고 있다고 하는 거죠. 내가 만들어가는 문학관조차도 그런 자장의 일부로서 발현된 지점들이 있어서 이 제도라고 하는 걸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저도 거기에 동의를 하고 얼마간 제도를 고쳤어야 하는 거라는 생각도 좀 하고 있거든요.
    근본적인 차원에서 고쳐질 필요가 있는 거지 단순히 대안 없이 모든 게 다 해체되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우리가 비판하려고 하는 제도가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됐든지 당시에는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을 거거든요. 그런데 환경이 변화하면서 맞아떨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생기고 그 균열이 점점 커지는 걸 거란 말이죠.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건지를 과거에서부터 차근차근 살피고 대안을 제시하거나 고쳤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들을 했었어요. 만약 우리가 문학장 안에서 이런 얘기를 해야 한다면 비평이 그 담론의 한 역할들을 맡을 수 있겠다, 문학 제도에 대해서는 그런 얘기들을 했었습니다.
  

독자의 비평적 수행성과 장르문학의 매력
  

오  세  란

    가만히 생각해보면 제가 문학을 공부하던 젊은 시절에는 등단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일종의 문학인으로서의 어떤 절차로 학습되었기 때문에, 등단하지 않은 상태에서 여러 대안 매체의 글을 쓰는 것만으로 내가 평론을 하거나 문학을 한다라는 자의식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기 검열 같은 것을 해왔던 것 같아요. 그런 자의식은 어떻게 보면 소모적인 부분이 커요. 대안적인 제도가 필요해서 생성되기는 했지만 지금으로 봤을 때는 그것이 권력화되지 않도록 목소리를 내는 게 필요하고,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버리는 것들도 미안한 마음이 적지 않죠, 선배들 입장에서 봤을 때는.
    뒤에서 진행해주시는 분이 유튜브에 지금 굉장히 많이 들어왔다면서 기뻐해주셨고 비평집을 읽고 계시는 분들이 와주셨고요. 그래서 비평을 읽는 분들, 독자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싶은데, 문학비평에 귀 기울이고 이렇게 같이 공유하려고 하는 분들을 실제 얼마나 만나셨는지, 그분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죠.
  

선  우  은  실

    제가 외부에서 일반인 분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강의를 하기도 하고 대학에서 학생들 강의를 하기도 하는데요, 또 중고등학생 글쓰기 강의를 한 적도 있고 ‘문학은 위험하다’라고 하는 비평 앤솔러지 행사가 있었는데 사회로 참여를 하여 여러 여성 비평가들과 얘기를 하면서 그 현장에 온 독자들하고도 얘기를 하는, 돌이켜보면 굉장히 많은 독자와의 만남의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정말 감사하게도 ‘제가 어떤 것들을 발표합니다’ 하는 것들을 공유하는 SNS를 운영하는데 그 SNS를 통해서 어떤 글을 잘 읽고 있다,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주시는 분들이 있고요. 그래서 제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독자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비평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제 글의 어떤 부분에 주목을 해주시고 있구나 하는 것들을 좀 경험하고 있어요.
    어려운 얘기이긴 하지만 저 역시도 독자 가운데 한 명이잖아요. 지금은 조금 더 전문적인 글을 쓰고 있고 그만큼 어떤 책임감을 조금 더 가지게 된 지점들도 있지만 지금과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비평을 읽거나 문학을 읽거나 한 시간들이 있어서 사실 독자를 생산한다는 것에 제1의 참고 자료는 저고요, 내가 어떤 독자였는가 그리고 지금은 어떤 독자인가, 내가 독자라면 비평을 보면서 뭘 알고 싶을까, 이런 것들을 가장 먼저 참고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은 작품을 읽으면 뭘 얘기하고 싶을까, 뭘 궁금해할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 꼬집어서 얘기해줄 수 있는 게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문학비평에 관심을 가진 시점이 비교적 좀 늦은 편이라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때 딱 한번의 접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굉장히 중요했다고 생각해요. 내가 문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이걸 한번 읽어봤더니 좀 괜찮더라, 그런데 이걸 그냥 내 생각으로 막연한 느낌으로 남겨두는 거 말고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볼 수 없을까,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이 문학장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이게 단순히 쉬운 비평, 난이도가 낮은 비평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저 또한 비평집을 처음 추천받고 읽었을 때 너무너무 어려워서 숙제하는 느낌으로 못 알아듣는데 매일 몇 페이지씩을 붙잡고 앉아서 읽었거든요. 너무 어렵고 그 가운데 심지어 제가 알고 있는 작품도 별로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얘기했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다음에 작품을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작품을 읽고 나니까, 그래서 이렇게 얘기를 했었구나, 그런데 나라면 좀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을 것 같다는 생각들을 했었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비평이 얼마나 어려우냐 쉬우냐만의 문제도 아닌 거죠.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비평의 통로로서 제 글이 작용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물론 다른 예술의 영역에 비하면 비평가에 주목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비평의 영역 자체가 비평가를 내세우는 방식으로 쓰이지 않았던 그런 역사들이 굉장히 길고요. 그런데 지금은 비평이 작동하는 방식이 약간은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비평가의 자의식에 대해서 검토하는 게 이제 담론 안에서 주된, 주되게 초점화되는 부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거든요. 언제나 비평의 독자는 내가 막연하게 틀 짓는 것보다는 훨씬 넓고 많다고 생각하고 그런 의미에서 늘 문학의 위기를 진단하지만 그건 사실 얼마간은 게으른 진단일 수도 있다라는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그런 위기의식을 통해서 어떤 것들이 더 나아지는 지점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만 바깥에서 접근하려고 하는 독자층들을 그런 방식으로 미리 차단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오  세  란

    요즘에는 비평집을 찾아 읽는 독자들을 실제로 만나게 되어 비평가 입장에서 봤을 때는 그분들이 굉장히 소중하기도 해요. 이 독자가 곧 글 쓰는 사람일 수도 있거든요.
    딱 한 가지 질문만 더 드리고 송수연 선생님한테 마이크를 넘기려고 하는데요, 제가 궁금해서 드리는 질문이에요. 작품을 읽다가 쓰고 싶은 주제가 도착하는지, 아니면 요즘 사회에서는 젠더라든가 노동이라든가 문학이라든가 이런 담론을 얘기해주어야 하니까 이 담론에 걸맞은 작품들을 수집하셔서 쓰시는지, 어느 쪽이 더 쉬우신지. 독자들도 궁금해하기도 하더라고요.
  

선  우  은  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시대가 요구하는 담론과 그것에 대해서 쓰는 작품이 잘 맞아떨어져서 나오는 시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특별히 작품 때문에 이걸 한다거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게 별로 없고, 제가 하고자 하는 말과 시대의 담론과 지금 제출되는 작품들이 잘 맞아떨어져서 거기에 대해서 담론을 형성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다만 누구에게나 다 비슷하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보니 다른 담론과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주는 게 까다로워집니다.
    단순히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도 있거든요. 젠더 중요하다, 이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지금 우리가 젠더를 문학적으로 어떻게 사유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시대 담론에 기대어서 그냥 어떤 정체성을 강조하고 끝내는 경우도 있고요. 그러니까 작품 자체에 대한 얘기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문학의 정치성을 드러내는 방식들이 있잖아요. 그런 디테일들을 같이 살펴봄으로써 비평의 어떤 결들을 세분화해주는 게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의미에서 아까 독자 얘기해주신 부분에 대해서 제가 한 가지 생각난 게 있어서⋯⋯.
    기본적으로 독자는 읽는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쓰이기는 하지만요, 저는 얼마간 독자들도 비평적 행위를 하고 작품들이 그 결과로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참여자, 수행자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아요, 독자라는 표현보다는. 비평의 수행자로서 자기를 의식하는 분들이 비평이라고 하는 문학적 텍스트를 더 많이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측면들이 있다. 그래서 전망을 너무 어둡게 볼 필요 없겠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오  세  란

    말씀해주신 대로 현재의 시대적인 흐름, 이런 것들을 이렇게 예리하게 포착하고 진단하고⋯⋯. 작가들도 그런 것을 포착했기 때문에 문학으로 승화를 시킨 것이고⋯⋯. 가끔 비평을 하고자 하시는 분들 중에서는 글쓰기에 치중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글쓰기 이전에 이 시대에 대한 어떤 관찰, 그리고 그것에 대한 깊은 성찰, 같이 나누려고 하는 것, 그런 것들이 글쓰기 이전에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번에는 송수연 선생님께 비평에 관한 말씀 좀 드리고 싶은데요. 아까 『옆집의 영희 씨』 얘기도 해주시고, 장르문학에 대한 애정을 굉장히 많이 드러내고 계시더라고요. 처음에 문학 공부를 소설로 쭉 하셨다고 했는데, 그때부터 그러셨는지 아니면 아동청소년문학을 하다 보니 판타지, SF 등등의 장르문학의 매력을 느끼신 건지⋯⋯.
  

송  수  연

    저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세계문학 전집 키즈였고요, 어렸을 때부터 장르문학을 많이 읽었어요. 제가 고등학생 때는 하이틴 로맨스를 죽자고 읽었고요. 그 이전에 추리문학이니 이런 것들은 이미 다 떼다시피 하고⋯⋯.
    장르문학을 많이 읽은 이유는 하나예요. 재밌으니까. 진짜 재밌거든요. 저도 대학에서 수업을 했었는데 학생들한테 물어봤어요. 숙제를 내주지 않겠지만 숙제를 내준다고 가정을 하고, 책이 10권이 있어. 톨스토이의 『인생론』, 마르크스의 『자본론』⋯⋯. 10번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사건』. 이 10권 중에 1권을 읽고 A4 한 장짜리 리포트를 써야 해. 어떤 책을 읽을래? 라고 물으면 30명이면 30명, 50명이면 50명, 다 10번 골라요. 마르크스의 『자본론』, 톨스토이의 『인생론』, 아무도 고르지 않습니다.
    제가 애들한테 “왜 10번을 고르니?” 그러면, “재미있으니까요”. 읽을 때 다른 책은 고통스러울 게 뻔한데, 추리 소설을 읽을 때는 되게 재미있을 거라는 걸 본인이 안다는 거예요. 저는 우선 문학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아동청소년문학은 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제가 장르문학에 주목하는 이유는 독자인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또 그것만큼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리얼리즘 문학은 말 그대로 현실에 발바닥을 딱 붙이고 있는 장르잖아요. 현실의 규율을 넘어설 수가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외계인이 지구에 오고 옆집에 영희 씨라는 말도 안 되는 이름의 외계인이 살고, 이게 가능한 게 SF죠. 다른 장르문학도 마찬가지고요. 이건 제가 다른 강의에서도 많이 예를 든 건데 넷플릭스에 〈브리저튼〉(2020~)이라는 영국 드라마가 있어요. 제가 그 드라마를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너무 빠져서 한 이틀 만에 그걸 다 봤는데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리얼리즘 문학이나 영화로 흑백 갈등을 다루면 어떻게 다룰지 저도 알고 여러분들도 다 알아요. 흑인이 얼마만큼 차별을 받고 있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묘사를 할 거예요. 결말 부분에 가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든 언해피엔딩으로 끝나든 어떤 방식으로 결말이 지어질지 우리가 다 알고 있죠.
    그런데 〈브리저튼〉은 흑백 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세상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요. 그 드라마의 서사를 쭉 따라가다 보면 인종 문제는 웃기는 거네,라는 생각이 들어요. 실재하지도 않는 건데⋯⋯. 이건 너무너무 우스운 거구나, 이건 너무너무 말도 안 되는 거구나. 물론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요. 그냥 그게 해결된 상태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그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인종 차별 문제가 얼마나 우스운 건지 알 수 있어요.
    전 장르문학에서 보여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바로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리얼리즘 문학에서는 흑백 문제, 남녀 문제, 젠더 문제 같은 것들을 정공법으로 다룰 수밖에 없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머물기 쉽단 말이에요. 장르문학은 완전히 뒤집어서 이야기할 수가 있어요. 아까 말한 〈브리저튼〉도 그렇고, SF 작가 중에 듀나 작가도 그래요. 『우리 미나리 좀 챙겨주세요』(듀나 글, 이현석 그림, 창비, 2021) 보면 안드로이드, 공룡, 인간 이게 다 섞여서 사는 세계가 나오거든요. 그것도 보면 알 수 있어요. 현재 우리나라 혹은 세계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계급, 젠더, 인종 문제 이런 것들이 되게 우스운 거구나, 이건 다 그냥 가짜인데, 우리가 너무 가짜에 휘둘려서 진짜를 보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거든요.
    아무리 좋은 이야기, 아무리 가치 있는 이야기를 해도 지루하고 재미없으면 독자가 읽지 않잖아요. 장르문학은 훨씬 더 가볍고 재미있게, 하지만 아주 깊숙한 곳을 찌를 수가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장르문학을 독자로서 사랑하고, 평론가로서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인천의 의미와 추천 작품
  

오  세  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리얼리즘 문학이 현실을 넘는 방식에서 ‘아버지의 법’이라고 하는 견고한 그것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에 대해서 굉장히 진지하게 사유하지만 넘을 수 없는 그런 지점이 있다면, 아동청소년문학은 한 번도 판타지를 놓친 적이 없어요. 장르문학 같은 경우는 놀이의 법칙으로 접근을 하잖아요. 논리와 합리성의 법칙이 아니고 놀이의 법칙으로 너무나도 가볍게⋯⋯.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한번 상상력으로 그걸 넘어보는, 그 벽을 와해시켜보는 상상력, 그게 문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인데 특히 아동청소년문학에 그런 지점들이 많이 나타나 있으니까 평론집 읽으시면서 거기에 칭찬해주신 텍스트를 찾아 읽는 것도 즐거운 독서의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에는 인천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인천에서 문학을 하고 있는 그런 것에 대해서 ‘인천’이라는 키워드로 말씀해주세요.
  

선  우  은  실

    저는 인천에서 태어나서 한 9년 정도 살다가 지금 경기도로 이사를 가서 살고 있는데 인천 소재에 있는 대학으로 오게 되면서 다시 인천과 연관성을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저한테는 인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착들이 좀 있어요. 단순히 인천, 모든 게 다 너무 좋아, 이런 거는 아닌데 특정하게 제가 좋아하는 공간들이 있거든요. 굳이 비교를 하자면 송도 신도시 쪽보다는 중구청 있는 쪽이 그래요. 지난한 역사가 지금 이 시점까지 계속 남아 있다는 게 저에게 상기하는 특별함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한테 인천이라는 공간성 자체가 일종의 역사성의 연속이고 제가 그걸 재구성하는 시간 속에 있다라고 하는 걸 확인시켜주는 그런 작업, 그런 것들을 가능케 하는데⋯⋯.
    안 그래도 최근에 제가 인천에서 유치원 동창을 만나게 됐어요. 행사를 통해서 만나게 됐거든요. 그 유치원 동창이 와서 이렇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너 누구잖아 하는데, 갑자기 기억이 확 난 거예요. 유치원 졸업한 이후에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고 한 2~3년 같이 지냈을 뿐일 텐데⋯⋯. 제가 인천에서 예술인 지원을 하는 어떤 프로젝트에 지원을 해서 그 친구랑 『남동 키즈 재회』라고 하는 작은 책을 준비했고 조만간 출판 계획을 하고 있는데요, 그런 활동들도 사실은 이 인천이라는 공간성을 토대로 해서 할 수 있었던 것들이고요. 예전에는 인천이 어떤 공간이지, 이런 생각을 잘 못 했는데 지금 와서 인천에서 산 짧은 시간 동안의 역사가 내 이후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오  세  란

    외부자로서 말씀드리면 인천은 문학으로 봤을 때 굉장히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인천에서 지금 불러주셨을 때 제가 한걸음에 오기도 했어요.
    송수연 선생님, 인천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송  수  연

    저는 약간 다른 말씀을 드리게 될 것 같은데요. 저는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나서 고등학교까지 거기서 나왔고 대학을 이쪽으로 오게 됐는데 고향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여기서 살았던 시간이 이제 훨씬 길어졌고, 인천이 저한테 익숙한 곳이 됐어요.
    인천은 굉장히 흥미로운 지역이죠. 장점과 단점을 다 가지고 있고. 저는 지금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인천이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제가 평론을 하지만, 아카이브 작업도 많이 했는데, 인천과 관련된 어떤 문학예술 기사를 찾았을 때⋯⋯.
    제가 예전에 “인천은 서울의 식민지다”라는 이야기를 정말 귀가 닳도록 들었거든요. 그건 인천에 태어나서 인천에 적을 두고 인천 사람으로 계속 살고 있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울분과 분노죠. 저는 인천에서 태어나서 쭉 살지는 않았지만 30년째 인천에 살면서 그런 부분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하고 아주 많이 느끼고 보아왔거든요.
    중앙과의 거리에서 발생하는 갈등. 너무 붙어 있잖아요, 인천하고 서울은. 예를 들어서 진주, 목포, 부산 이런 데 가면 지역색이 아주 확실하거든요. 그리고 지역문학이라는 게 명확하게 보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인천에서 살고 있고, 등단하고 주로 인천에서 활동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인천만의 지역색이 아주 명확한가?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그게 되게 안타까운 지점이었거든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게 다시 새롭게 보이더라고요.
    얘기가 섞이는데, 제가 문화예술 아카이빙 작업을 하다 보니까 예전에 인천에서 문학, 음악, 미술을 하던 예술인들이 막 분노하면서 쓴 사설 같은 게 있더라고요. 여기서 좀 된다 싶으면 서울에서 다 뽑아간다, 그리고 여기 있던 사람들도 서울에서 불러주면 아낌없이 달려간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글들이 많거든요. 사실 그런 면이 없잖아 있죠.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갖게 되는 분노와 허탈감 이런 것들도 분명히 있고. 그런데 그게 저는 인천의 장점이라는 생각이 최근 들어서 들더라고요.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많이 달라진다고 생각해요. 저는 팩트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제가 팩트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외계인은 아니거든요. ‘팩폭’이라는 말 많이 쓰잖아요. 그런데 저는 팩트가 절대 50퍼센트 이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팩트가 분명히 있죠. 하지만 이 팩트를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살 한 살 먹어가면서 더 많이 생각하고 있어요. 인천이 갖고 있는, 나쁘게 말하면 그 섞이는 것들을 ‘식민성’으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경계성’으로 해석할 것인가에 따라서 앞으로의 인천 모습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걸 식민성으로 생각하면 울분과 화가 담길 수밖에 없고 그러면 내일을 생각하기가 좀 버거워지죠. 그런데 이걸 경계인의 시각과 입장에서 생각하면 다른 많은 것들을 포용하고 수용하고 끌어들이고 함께하고 관계성에 대해서 더 많이 성찰할 수 있어요. 그리고 실천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자리와 시각이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인천이 그 어떤 도시보다도 경계인으로서의 시각, 경계인으로서의 주체성을 새롭게 정립한다면 엄청나게 많은 가능성을 앞으로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부분에 있어서 앞으로 좀 더 매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  세  란

    맞습니다. 탈중심주의라는 시선으로 볼 때 혼종성마저도 재구성해서 예각화할 수 있는 그런 시도들 많이들 하고 계실 텐데요. 인천이 그런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는 충분한 어떤 역사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번에는 독서에 대해서⋯⋯. 두 분은 읽는 게 힘드세요, 쓰는 게 힘드세요? 어떤 분은 쓰는 동안에 너무 힘든 나머지 뭔가를 해소하는 그런 방식으로 써나간다, 이런 얘기도 하셨는데 쓰시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거를 견디시는지⋯⋯.
  

선  우  은  실

    최근에는 읽는 게 조금 더 힘든 지점이 있는 것 같아요. 할 말이 딱 정해져서 이거에 대해서 좀 다뤄보고 싶다는 게 정해지면 저는 쓰는 것 자체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그 어떤 소스가 제 마음대로 주어지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내가 원하는 뭔가를 건드리지 않는 작품들을 계속 읽고 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읽는 범주를 한정하는 일부터 시작해서 어디까지 읽어야 하는가가, 작업의 시작에서 저를 압도하는 경우들이 있거든요. 미룰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미루다가 후루룩 읽게 되는 경우들도 있고 해서, 전에는 읽는 것에 대한 재미가 컸는데 최근에는 그런 것이 줄어들어서 아쉬워요.
  

송  수  연

    많이 쓰지 않아서⋯⋯. 그런데 저도 그런 부분은 선우은실 선생님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흔히 ‘그분이 오신다’고 작품이 너무 좋으면 약간 미친 것처럼 쓰게 되는 것 같아요. 작품이 좋으면 할 말은 생기는 것 같아요. 작품이 너무 좋으면. 『옆집의 영희 씨』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었는데 사실 쓰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많이 버리고 그만큼을 쓴 거였거든요. 많이 읽다 보면 좋은 작품들을 만나게 되고 그런 작품들을 만나게 됐을 때 쓰고 싶은 욕구와 열망이 생겨요. 그런데 청탁이 오지 않으면 혼자 써서 어디 발표할 수 없고⋯⋯. 아동문학은 정말 매체가 없어도 너무 없거든요. 지금 잡지가 딱 두 개인데 그 잡지 두 개는 열일을 하지만 얼마나 뭘 할 수 있을까요.
  

오  세  란

    잡지가 비평 전문도 아니고 여럿을 다루니까.
  

송  수  연

    다뤄지는 작품들이 너무 적은 거죠. 잡지도 잡지만의 색깔과 시각이 명확하게 있는 거잖아요. 그리고 그 색깔과 시각에 맞는 청탁을 하게 되고⋯⋯. 아까 말씀드렸지만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고. 시도를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요.
    읽는 것과 쓰는 것, 둘 다 힘들지만 둘 다 보람 있고 둘 다 아주 즐거운 일인 것 같아요. 어쨌든 좀 다른 방식의 비평이나 서평,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또 다른 장들이 많이 아동청소년문학에서 생겨야 한다라고 너무 절실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  세  란

    아동청소년문학 같은 경우는, 특히 아동문학비평 같은 경우는 그런 경우이기도 해서 여러 다양한 지면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작품들을 많이 읽으면 작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찾는 단계가 있고 그 작품들로 글을 쓸 때 훨씬 더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거죠. 문학도 소설이나 동화나 읽어보면 작가가 정말 본인도 재미있게 썼구나, 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이 사람 참 쓰기 힘들었나보다, 읽는 동안 그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거든요. 비평도 마찬가지인 것 같기도 하고요. 혹시 최근에 읽은 작품 중에서 최근작 중에서 같이 나눠보고 싶다, 아직 글로 쓰지 않았더라도 영화 혹은 기타 동영상이라든가 이런 데서도 권하고 싶은 작품 있으신가요?
  

선  우  은  실

    저는 소설이나 시 이외에 다른 것을 좀 추천을 해보고 싶은데요. 지금 이 질문을 듣고 떠올린 건 한 두 개 정도인 것 같아요.
    하나는 영화인데요,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라고 양영희 감독이 찍은 영화거든요. 작년에 인천에서 열린 ‘디아스포라 영화제’에서 보게 됐어요. 나중에 한국영상자료원에 가서 한 번 더 시청을 했어요. 2세대 재일조선인이거든요, 양영희 감독이. 어머니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맥락이 굉장히 특이해요. 제주 출신이고 평양에 갔고 오사카에서 살다가 제주로 갔는데 4·3이 터져서 다시 오사카로 와서 거기에서 자녀를 출산했는데 남편이 평양 출신이고 하기 때문에 그 아들들을 일종의 선물로 보내야 하는 그런 일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장남이 우울증 때문에 자살을 하고 막내인 양영희 감독만 오사카에서 성장을 한 그런 케이스거든요.
    4·3에 관한 얘기예요. 다큐멘터리적인 형식을 띠고 있고요. 어머니를 직접 촬영해서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이렇게 남한 정부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됐었다는 얘기를 하거든요. 도대체 제주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몰랐다라고 하는 것들⋯⋯. 그런데 실제로 어머니가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많이 노쇠하게 되어서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거든요. 그래서 4·3 조사단이 와서 여러 가지를 물어보고 하는데 처음에는 얘기해줄 수 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제주도를 가게 됐을 때에는 거의 기억을 못하시는 거예요.
    이것들이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보여지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 내가 맞대고 있는 현실과 조금 틈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 영화가 촬영하는 것 자체는 그 사람의 그냥 삶이잖아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저 사람의 가족은 아니지만 역사에 대해서 어떤 것들을 더 알아야겠다,라는 생각들을 좀 하게 됐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수프와 이데올로기〉라고 하는 작품을 한번 보시면 좋겠다. 구하기 어려운 영화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제가 작년 말쯤에 좀 흥미롭게 읽었던 책 가운데 하나는 『이수지의 그림책』(비룡소, 2011)이라고 하는 책인데요. 자기가 쓴 그림책에 대한 일종의 해설서라고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에세이이기도 하고 해설서이기도 하고⋯⋯.
    저는 문학 텍스트가 가진 형식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문학이 가진 형식이 뭐냐고 콕 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가령 똑같은 장면을 서술할 때에도 누군가는 1인칭을 사용하고 누군가는 3인칭을 사용하고 누군가는 내면을 보여주고 누군가는 건조한 방식으로 객관적인 사실만을 나열하고, 이 모든 것들이 제가 문학의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여러 가지로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들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이 책에서도 그림책이라고 하는 게 단순히 이런 주제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게 아니라 물성으로서 형식으로서의 그림책을 봤을 때⋯⋯. 가령 [책이: 편집자] 가운데서 이렇게 갈라져 있잖아요. 가운데 선은 모종의 규칙 선인데 여기에는 겹치는 그림을 놓지 않는다는 거예요. 놓으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림책이 가진 형식 자체로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얘기들을 해주고 있거든요. 이게 그림책이나 동화나 이 부분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문학적인 형식, 뭔가를 내용을 담는 형식이라고 하는 게 사실은 그렇게 분리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떤 형식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보여주거나 발견할 수 있는 내용들이 훨씬 많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좀 하게 되어서⋯⋯. 시를 [비평: 편집자]하다 보면 이거 굉장히 서사적이네,라는 생각할 때가 있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이걸 시라고 읽거든요. 어떤 소설 보면 이거 굉장히 시적이다, 그런데도 소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제가 궁금한 테마인 것 같아요. 우리가 뭘 문학적이라고 하는가, 어떤 형식들 때문에 문학적이라고 인식하는가, 마찬가지로 그림책이라는 것의 어떤 물성들 때문에 이것을 그림책이라고 생각하는가, 또는 영화라고 생각하는가, 이런 것들을 좀 고민하기에 좋은 작품이라서 한번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  세  란

    양영희 감독의 영화하고 그림책이라는 장르가 가진 형식적인 부분을 주목해서 볼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송수연 평론가는 최근에 꼭 한번 나누고 싶다 하는 작품 있으신가요?
  

송  수  연

    넷플릭스에 〈낯설고 먼〉(2020)이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35분이 안 돼요, 총 러닝타임이. 제가 이걸 3일 전인가 4일 전에 봤는데, 오~ 하고 봤거든요. 얘기를 다 하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
  

오  세  란

    스포일러가 되죠.
  

송  수  연

    이것도 흑백 갈등에 관한 거고요. 아주 짧은 영화인데, 어떤 남자가 자기 개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부단한 어떤 행위를 계속하는 거예요. 개에게 가서 밥을 주고 싶은데 개에게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영화를 보면 그 이유가 나오는데⋯⋯. 알고 보셔도 재미있을 거예요. (웃음)
  

오  세  란

    얘기하고 싶죠, 나누고 싶죠. (웃음)
  

송  수  연

    아무튼지 간에 한번 보세요. 저는 결말도 되게 좋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단어를 제가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 단어 하나를 가지고 평론을 쓰고 싶은 생각이 한 7~8년 전부터 있었고 작품도 다 정해졌는데 못 쓰고 있어요. 그 단어에는 모든 게 다 있죠. 안 되는 것도 있고 화가 나는 것도 있고 안 하고 싶은 것도 있고 깽판 치고 싶은 것도 있고, 다 마음에 안 드는 거 천지야.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것들, 지속되어야만 하는 삶, 내가 짊어져야 할 내 삶의 고통. 저는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그걸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그거를 어떤 방식으로 짊어질 것인가를 다룬 정말 단순한 이야기인데 저는 참 좋게 봤어요. 30분짜리니까 금방 보실 수 있거든요. 한번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낯설고 먼〉입니다. 주최 측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웃음)
  

오  세  란

    제가 준비한 질문은 여기까지인데요, 질문 또는 같이 나누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몇 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질의·응답

  

질  문  자  1

    얘기가 너무 재미있어가지고요. 세 분 다 너무 혹하게 얘기를 해주셔서 깊이 빠져드는 우를 범해서 질문의 질이 좋지 않음을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나씩 질문하겠습니다. 사회자님에게 질문을 먼저 하면, 오늘 시간이 ‘다정하고 따뜻한’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서두에 그렇게 말씀하셨는데요, 오늘 그렇게 초두를 열어주신 이유가 있었는지 한 번 더 듣고 싶고 결과는 어땠는지 듣고 싶고요.
    선우은실 평론가님한테는, 양경언 평론가님께서 ‘여성’ 비평가라는 말을 쓰셨고 또 책 표지에 보면은 ‘90년대생’이라는 걸 넣었더라고요. 마케팅에서 여성, 90년대생, 젊은 평론가, 이런 것들이 붙여지는 것에 대한 한계성, 이런 것들이 저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어요. 그냥 평론가 선우은실이 아니고 마케팅으로 소비되어지는 것이 평론가님의 세계관이나 얘기하고 싶은 이야기들과 정말 접목되는 건지, 표지 그림도 약간 불편하게 저는 느껴졌습니다. 색깔을 쓰는 거라든지 이런 것들이. 그래서 이런 것들이 타협하는 과정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마음에 드시는 전략이라고 판단되셨는지, 그게 조금 궁금하고요.
    송 평론가님한테는 김현경 평론가, 3명이 앉을 것 같은데 자리가 두 개밖에 없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한 뼘을 비켜서서 앉게 해줘야 하는 거라는 얘기를 아까 하셨을 때, 환대하지 않는 사회에 투쟁을 해야 하는 평론가로서의 어떤 위치성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투쟁의 삶을 살아오시면서 글 아니면 직접적인 발언대라든지, 이렇게 조금 양상화시키는 어떤 그런 상황들이 있었는지 그게 조금 궁금하고요.
    처음에 저는 평론가님이 이렇게 재미있어야 한다, 신나야 한다, 이 말에 굉장히 즐거운 쾌감을 느꼈습니다. 저도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고요. 또 하나는 ‘팩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해석이 다르다’라고 얘기하셨는데 초두에는 ‘처음에 평론은 객관화되는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하셨습니다. 근데 사실 객관이라는 말이 정말 있는 걸까, 어떻게 보면 똑같은 책을 볼 때에도 이 평론가는 이렇게 얘기하고 또 다른 평론가는 저렇게 얘기하기 때문에 주관이 상당히 많이 개입된 것이 평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주관성과 객관성에 대한 어떤 해석 아니면 저에게 조금 더 이해를 시켜주실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면 좋겠고요.
    선우 작가님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똑같은 얘기인데요. 여러 번 읽고 여러 번 쓰면서 내 생각을 정리하지만 생각을 적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이 되거든요.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다름에 맞서는, 아니면 나의 생각이 맞는다는 확신에 글을 쓰기도 하고⋯⋯ 물론 유연하게 바꿀 수도 있지만⋯⋯ 그것의 힘, 외적인 격려, 지지, 이런 것들을 혹시 어디에서 받으시는지 이런 것도 조금 궁금합니다.
  

오  세  란

    감사합니다. 선우은실 선생님부터 대답해주시면⋯⋯.
  

선  우  은  실

    우선 ‘여성 비평가’라는 말과 ‘90년대’라고 하는 것은 얼마간 마케팅의 전략이기도 하지만 제 글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명명을 하는 게 이 사람의 어떤 가능성이나 행위성을 특정 지을 수 있다라는 점, 그런 부분이 우려된다는 점을 저도 이제 활동을 하면서 늘 생각을 하긴 하는데요.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명명들은 전략적으로 취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조금은 하거든요. 가령 여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어떤 여성됨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단어를 괄호 치는 것만이 그 유일한 길은 아니라고 생각이 돼요. 그리고 얼마간 제가 저를 여성 비평가로서 자각하기 때문에 바라볼 수 있게끔 하는 지점이 존재하거든요.
    이번에는 그러한 것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런 것들을 채택한 지점들이 있고 그 점에 대해서는 우려해주신 부분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 작품을 진행할 때에는 좀 더 노력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그 표지는 어떤 점이 불편하셨는지 좀 궁금했어요. 어떤 점 때문에 불편하셨을까요?
  

질  문  자  1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을 표현하는 것일 수 있는데, 색깔에서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선  우  은  실

    어떤 이분법적인 대비⋯⋯. 그렇죠, 그렇게 느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기본적으로 이 형태가 균형과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까지는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얼마간은 유효한 비판일 수 있다는 생각은 들거든요.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지를 조금 더 옹호하는 입장에 서자면 우리가 빨강·파랑, 흰색·검은색이라고 하는 건 그 자체로 어떤 본래적인 의미를 지니는 건 아니잖아요. 이게 대비되고 이 대비를 통해서 의미가 위계화됐을 때에 그게 문제가 되기 때문에 조금 불편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어떤 면에서는 대비되는 색상 자체가 위계를 곧바로 연상시키는 것에 대해서 메타적으로 생각해볼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부분들이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그리고 외적인 격려와 지지 사실. 저한테 엄청 필요한 거거든요. 저는 되게 저를 혹독하게 대하는 편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유독 스스로에게 박하게 구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어떤 면들은 엄청 수고했네, 잘했네, 해줄 법도 한데, 이 정도는 다 누구나 하는 건데, 이런 식으로⋯⋯. 늘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텐션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스리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텐션이 바닥을 칠 때 너무 힘든 거예요. 그럴 때 저는 주로 작가 친구들한테 글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좀 듣는데, 그 다른 작가들이 저를 엄청나게 격려를 해줘요. 되게 단순한 것부터 아니면 그냥 맛있는 걸 먹인다든지 이런 것들을 포함해서 그냥 뭐 이미 잘하고 있다는 격려를 해주거든요. 그런 게 저한테는 좀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송  수  연

    질문이 너무 고급져서 안경을 꼈습니다. (웃음) 질문 감사드리고요. 최대한 대답을 해보자면 환대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싸워야 하는 지점, 명확하게 있습니다. 아까 오세란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글도 되게 선명하게 쓰는 편이거든요. 친구를 아무도 만들지 않을 만큼. 후배 하나가 저한테 어떤 말을 했냐면⋯⋯. 3년 동안 제 옆에 있었던 후배인데, 언니는 글을 쓰기 위해서 삶을 직조하고 만들고 그렇게 사는 사람인 것 같애. 그러니까 이런 거죠. 윤리적이어야 한다,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 하면 그렇게 해야지 그 말을 쓸 수 있어요. 저는 그러니까 타협을 못하고, 안 하는 거죠.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써야 하니까.
    지금 너무 많이 싸웠고 너무 많이 내쳐졌고 성 밖의 불가촉천민이 되었고⋯⋯. 아이고 웃기는 소리하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실제 제 팩트가 그러니까. 저는 싸웠던 것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는데요, 너무 거칠었다라는 지점에 대해서는, 그러니까 저같이 그렇게 거칠게 하지 않고도 싸울 수 있죠. 그리고 그게 훨씬 더 현명한 거고. 싸워야만 했고 앞으로도 싸울 건데, 싸우는 방법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요.
    그다음에 주관적 논리, 평론을 할 때 객관적이어야 한다. 저는 그게 ‘주관적 객관’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내가 느낀 건 이래,라고 그냥 말하는 거는 약간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평론은 2차 텍스트잖아요. 본 텍스트가 있고 이거에 대한 내 감상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건데, 본 텍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 마음대로 읽으면 안 되고, 이렇게 읽기까지의 내 주관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평론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라고 그렇게 쓰지 않고, 이 부분이 이래서 아쉽다, 이 부분은 이랬어야 하지 않을까,라고 말하려면, 정확하게 말을 하려면 더더욱 나의 주관은 최대한 객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해요.
    주관이에요. 명확히 주관이지만 그걸 객관화하는 과정을 거쳐야지 제가 하는 말이 폭력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다음에 팩트와 해석에 대해서는, 제가 성 밖의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성 밖의 사람이 돼 보니까 성 안에 있었을 때는 이 대신 잇몸이라는 말도 있지만 전 이걸 약간 다르게 해석하는 편인데, 입술이 없으니까 잇몸만으로. 이게 되게 춥더라고요. 정말 잇몸으로 계속 있으려니까. 언젠가는 입술이 생기겠지, 했는데 입술이 안 생기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래 받아들이자, 다 드러난 잇몸을 받아들여야지, 받아들이고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보자,라고 생각을 계속 몇 년 동안 해왔고 아까 오세란 선생님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아동청소년문학 분야에서는 발표 지면이 너무 없어요. 너무 없는 게 평론가한테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작가들한테도 사실 굉장히 힘든 일이거든요. 애써서 작품을 냈는데 한 번도 언급해주지 않아. 그런데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2권의 잡지가 다 종합지란 말이에요. 그러면 평론은 기껏해야 1편, 2편 실리고 그 한 잡지당 서평이 평균 3편이면 서평만 놓고 본다면 3편씩 6편, 6×4, 1년에 24편의 서평이 실리는 거예요. 1년에 출간되는 책은 몇 권인데요.
    저는 이거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고 이걸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최소한 의미가 있고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봐야 하는 작품에 대해서 최소한의 언급, 그 존재 자체를 언급해주는 거, 호명해주는 거, 저는 이게 너무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바로 평론가로서 제가 작품에 한 뼘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고 그 작품의 이름을 불러주는 거라고 생각을 해요.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고민을 해서 팟캐스트를 열었고 4월 첫 주에 아마 첫 번째 방송이 나갈 거예요. 말로 하는 건데 아주 디테일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여러 가지 이유로 호명되지 못하는 작품들에 대해서 그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이런 작업들을 앞으로 좀 더 많이 힘을 실어서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이 해보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답이 됐을까요?
  

오  세  란

    아마 오늘 비평가가 굉장히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그냥 책 읽고 쓰는 것보다 훨씬 문학의 장이라는 것 자체를 고민하는 사람들이구나,라는 거를 조금 아셨을 것 같습니다. 아까 또 손 드셨는데⋯⋯.
  

질  문  자  2

    코로나 덕분에 책을 많이 보다 보니까 동아리 활동도 하게 됐고, 그래서 글도 한번 써봤어요. 뭔가를 쓴다는 거는 책임이 필요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막 비평, 평론⋯⋯ 이런 것들을 보기 시작한 입문자입니다. 지금 보면 콘텐츠를 많은 사람들이 생산을 하잖아요. 자비출판도 하고, 독립출판도 하고⋯⋯. 작가하고 독자의 경계가 좀 허물어지는 이런 시기에 이제 정말 비평이 뜰 때가 됐다, 이런 생각이 들고 필요하니까 찾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럴 때 어떤 기준을 갖고 있는가, 내가 무엇에 방점을 찍어서 보는가 이런 게 되게 중요한데 두 분 선생님들은 어떤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시는지가 궁금하고요, 지금 너무나 많은 콘텐츠들이 돌아다니니까 누군가가 그런 것에 대한 가이드를 잡아주는 것들이 필요해졌고, 서평이나 이런 것들도 보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그 글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어떻게 비평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그럴 때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시고 그 고민이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되는지가 궁금합니다.
  

송  수  연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는요, 소수자를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예요. 장르문학에서도. 장르문학을 사랑하는 이유가 소수자를 그래도 좀 덜 폭력적으로 재현하기 때문인데, 아동청소년문학의 주체와 주인공은 아동이고 청소년이잖아요. 근데 아동과 청소년이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인데요, 가장 대표적인 소수자예요. 소수자라는 게 숫자가 적은 게 아니고 쉽게 말해서 힘이 없고 권력이 없고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이잖아요. 아동청소년문학을 하는 작가 선생님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아동과 청소년을 대신해서 그 목소리를 내는 거, 이게 아동청소년문학이고 저는 일반문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얼마나 잘먹고 잘사는지를 보여주는 건 문학이 아니잖아요. 그건 다른 영역에서 다루어지고 있고, 어쨌든 없는 사람들, 힘든 사람들, 목소리가 지워진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불러줄 것인가, 그들에게 어떻게 자리를 마련해줄 것인가, 온전하게 한 몫의 사람으로 살 수 있게 우리가 서로 어떻게 도울 것인가. 타인을 돕는 거는 결국 내가 나를 돕는 거라고 생각해요. 대단하게 타인에게 뭘 베푸는 게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타인과 함께 손잡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소수자 재현이 너무너무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동청소년문학에서.
    이거는 제가 정말 한 백 번쯤 얘기한 것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 이야기하는 건 아직도 아쉽다고 생각하는 작품들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에요. 다문화 가정의, 저 다문화라는 단어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대체할 수 있는 단어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아서⋯⋯. 오랜 시간 다문화 가정의 아이나 아니면 아주 가난한 집 아이가 주인공인 동화면, 그 동화는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는 거의 그대로 진행되거든요. LGBT가 주인공이야, 그러면 얘를 얼마나 핍박하고 모욕하는지 주인공이 얼마나 당하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재현해요. 그리고 끝에 가서 아이디얼리즘으로 해결을 보는 동화들이 있거든요.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하죠.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와서 빵하고 해결이 되는⋯⋯. 현실은 그렇지 않잖아요.
    소수자들을 주인공으로 쓰는 이야기들이 대부분 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너무 자세하게 그려요. 그리고 해결은 너무 낭만적으로 그린단 말이에요. 이랬을 때 어떤 부작용이 생기냐면 독자가, 특히 어린 독자들이 그 작품을 읽었을 때 낭만적인 해결이 머릿속에 남는 게 아니라 앞부분에 너무 가엾고 비참하고 불쌍한 게 인상에 깊게 남아요. 그래서 실제 현실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됐을 때 내가 읽은 방식대로 대하게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선의로 시작했는데 반대의 결과를 낳거든요. 교육이 그것과 연동되어서 굉장히 많은 오류들을 낳고 있기도 하고. 여태까지 그려져왔던 대표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은 소수자의 ‘없음’에 주목해요. 돈도 없고 피부 색깔도 좀 더 누렇고 가난하고 없음에 주목하는데 저는 소수자의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소수자들에게도 품위가 있어요. 저는 인간한테 품위는 너무너무 중요한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살아 있기 때문에 갖고 있는 품위라는 게 있어요.
    안미란 작가가 쓴 「참 다행인 하루」(안미란 글, 김규택 그림, 『참 다행인 하루』, 낮은산, 2016)라는 저학년 동화가 있는데 거기 배고픈 개 이야기가 나와요. 이틀인가 사흘을 못 먹은 개인데 아이가 떨어뜨린 빵을 주워서 입에 물고⋯⋯. 제가 이틀 만에 빵 하나가 저한테 생겼으면 저는 그 자리에서 그거 다 입에 다 쑤셔 넣을 거거든요. 근데 이 개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빵을 입에 물고 산벚나무 가지가 흐드러지는 곳에 가서 바람을 맞으면서 이 빵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어야지,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반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이런 인물한테는. 이 개는 사실 소수자죠. 힘든 거는 나와요. 근데 그건 잠깐이고, 나는 너무 배고프지만 품위 있게 먹고 싶은 거예요. 저는 그렇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소수자들의 없음에 주목하지 말고 소수자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에 주목해서 그 있음에 대해서 최대한 자세하게 최대한 성실하게 재현하고 복원해내는 거, 그다음에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최대한 정확하게 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동화에서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나 탈북자가 주인공일 때 대사를 되게 어눌하게 재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 되게 안 좋아하거든요.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실제 그렇잖아,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있는 현실을 그대로 베끼는 게 문학이 아니잖아요. 얘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어쨌든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는 소수자를 어떤 방식으로 윤리적으로 재현할 것인가, 이거에 대해서 정말 더 많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  우  은  실

    아까 두 번째로 해주신 질문이 아마도 첫 번째로 해주신 질문이랑 얼마간 좀 맞닿아 있는 대답이 될 것 같아요. 우선은 어떤 종류의 책임을 진다라고 하는 게 일면 자기의, 자기를 드러내는 일에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원하는 방식의 내가 있잖아요. 내가 이상화하는 방식의 내가 있고 실제로 외부로부터 불리는 이름으로서의 내가 있고 이런 것들을 종합해서 메타 인지하는 내 모습이 있는데, 이런 것들을 제대로 모른 채로 이상화하는 방식의 나를 노출하는 게 약간은 책임감이 없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약자-되기로서의 개인적 정치성과 에세이라는 언어 형식」(『쓺-문학의 이름으로』 13호, 2021년 하권)이라는 글에서 일부, 말씀해주신 부분들을 적었어요. 저한테 지금 중요한 주제들은 소수자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는 소수자로서 또는 소수자-되기로서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좀 드는데, 키워드로 정리를 하자면 당사자가 아니라 당사자성이라고 하는 게 지금 제가 조금 골몰하고 있는 주제어 중에 하나일 것 같아요.
    이를테면 많은 지표들이 저를 여성이라고 규정하죠. 그런데 그런 식으로 주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여성이라고 지시를 할 때 어떤 방식으로 그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는 건지에 대한 탐구들이 글을 쓸 때 같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에는 이 텍스트가 어떠한가에 대한 얘기는 이걸 쓰는 사람이 뭘 볼 수 있는 사람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드러내는 작업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지점을 조금 더 이렇게 앞세워서 얘기할 수 있는 것, 더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방식으로 규정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나에 대해서 설명할 것인지 재현할 것인지, 그런 것들을 글로써 같이 보여주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점에서 두 번째로 질문해주셨던 책임을 지는 부분들도 얼마간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자기의 언어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들로서 드러난다고 생각합니다.
  

오  세  란

    뒤로 갈수록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요. 일단은 이 공개 행사를 이제 좀 마무리하고 그다음에 여기 현장에 계신 분들하고는 도란도란 얘기하거나 사인도 하고 사진도 찍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유튜브로 참여해주신 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요, 마지막으로 첫 번째 질문해주셨던 선생님께서 이 자리가 다정하고 따뜻한 자리라는 말을 서두에 한 것에 대한 의도를 질문해주셨는데 그 이야기하면서 마무리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의도적으로 이 자리를 다정하고 따뜻한 자리로 만들고 싶다고 말씀드린 거는 이렇게 3시간 가까이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비평가들은 많은 사람들하고 싸우는 사람들이에요. 문학의 제도와도 싸우고 또 아주 가까이에 있는 작가들하고도 싸웁니다. 그리고 또 비평가들끼리도 싸웁니다. 그래서 비평가 하면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강한데,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이 사회에 아까 얘기한 소수자라든지 여성이라든지, 지금 싸워나가야 할 담론들의 방향을 정립하는 역할을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러기 위해서 더 큰 지점에서 다정함과 따뜻함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그냥 싸우는 것이 아니고 따뜻하고 다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다. 비평가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다소 어려운 이야기가 오고 갔을 수도 있는데 이 자리가 그래도 의미 있고 따뜻한 자리가 되셨기를 바랍니다.
    일단 이 행사는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인사 한 말씀씩 짧게⋯⋯.
  

송  수  연

    감사합니다. 와주셔서 감사하고 좋은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기회가 되면 또 뵙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선  우  은  실

    토요일 주말에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하고요, 앞으로 많은 활동을 통해서 또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책담회 유튜브 원본 영상 링크(클릭하면 영상으로 전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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