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개념정원 〈18회〉: 주체subject

  

주체라는 단어

    주체라는 단어의 쓰임은 다양하고 포괄적이다. 인간이 살아가며 행하는 일련의 행위에서 주동자이자 주인의 자리를 지칭하는 말이 곧 주체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인다. 그러니까 사람은 생각하는 주체이고 말하는 주체이며 움직이는 주체에 해당한다. 사람의 일이 다양한 만큼 주체라는 단어의 쓰임 역시 그럴 수밖에 없다. 경제적 주체, 정치적 주체, 윤리적 주체, 문화적 주체 등등으로 이어져가는 것이 주체라는 단어의 쓰임이다. 물론 모든 주체가 반드시 사람인 것은 아니다.
    주체라는 단어의 어감은 ‘주체적’이라는 형용사에서 볼 수 있듯이 긍정적인 느낌을 준다. ‘주체적’이라는 말은 자기 주견이 뚜렷하여 다른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하고 단단한 자기 확신 상태를 가리킨다. 주체라는 단어는 영어 ‘subject’의 번역어로서, ‘주관’이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번역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주체/객체’의 쌍과 ‘주관/객관’의 쌍은 정확한 동의어에 해당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쓰임으로 보자면, ‘주관적’이라는 단어는 ‘주체적’이라는 말과 그 뜻과 어감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주체적’이라는 형용사는 자주적인 판단이나 자기 주도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말임에 비해, ‘주관적’이라는 말은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어감이 크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무관하거나 차이가 나서 한 개인에게 국한된 생각이나 판단을 지칭할 때 ‘주관적’이라는 말을 쓴다. 물론 바로 그런 점을 좋게 평가하는 영역에서는 긍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으나, 어떻든 ‘주체적’이라는 말과는 달리 ‘주관적’이라는 말은 비-객관적이라는 함의를 짙게 지녀서, 어감의 차이로 보자면 한쪽은 긍정적이고 반대쪽은 부정적이라 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동일한 단어의 서로 다른 두 번역어가 상당한 어감 차이를 지니는 경우는, 영어 ‘the modern’의 번역어인 ‘근대/현대’의 쌍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런 차이는 번역된 개념이 한국어 고유의 의미 영역 안에 자기 자리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또한 각각의 번역어가 자기 나름의 역사와 맥락을 갖게 되고, 자기 고유의 의미와 어감이 영역을 만들어냄으로써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주체라는 단어의 쓰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subject/subjective’라는 단어 쌍의 경우, 명사로는 ‘주체’의 선택 빈도가 상대적으로 높음에 비해 형용사로는 ‘주관적’이라는 단어가 자주 채택되곤 한다. 주체라는 한자어 단어 자체가 워낙 당당한 데다, ‘주체적’이라는 형용사로 바뀌면 위압적인 느낌조차 풍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원어에 해당하는 ‘subject’의 유래와 쓰임을 살펴보면 사뭇 다른 그림이 펼쳐져서, 흡사 장엄한 옷차림 안에 가려져 있는 초라한 맨몸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한번 더 숙고가 가해진다면, ‘주체’와 ‘subject’ 사이의 이 같은 거리야말로 인간 주체가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조건임을 포착해낼 수도 있겠다.
  

주체와 주권자

    주체主體라는 한국어 단어가 지닌 당당한 느낌은 일차적으로 단어 구성에 사용된 한자어의 효과에서 두드러진다. 주인이라는 말[主]만으로도 힘센 느낌인데, 거기에 몸[體]이라는 물질성이 더해져 있어 위풍스런 어감이 생겨난다. 주체의 상대 개념이 객체客體, object 혹은 대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런 느낌은 더 커진다.
    또한 주체라는 단어의 어감에는 그 한국어 단어 자체에 누적된 맥락의 역사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1970년대, ‘한국식 민주주의’나 ‘민주주의 토착화’라는 기이한 구호를 내세워 민주주의를 유린했던 권위주의 정부는 ‘통일주체 국민회의’라는 간선제 대의기구를 만들었고 ‘민족주체성의 확립’을 이념적 기치로 삼았다. 같은 시기 북한에서 내세웠던 것은 ‘주체사상’이었다. 북이 주장했던 ‘혁명적 주체’도 남의 구호인 ‘민족적 주체’도 당시 두 지역에서는 가장 힘센 이념적 존재들이었다. 이런 까닭에 주체라는 단어의 어감이 강해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거꾸로, 말 자체가 지닌 강한 어감 때문에 이런 맥락 속에 징발되었다고 해도 말이 된다.
    영어 단어 ‘subject’의 어감은, 한국어 단어 ‘주체’에 비하면 오히려 반대에 가깝다고 해야 하겠다. 어떤 힘의 대리자나 그 힘에 복종하는 존재라는 뜻이 그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subject’라는 영어 단어는 라틴어 ‘subicio’의 과거분사 ‘subiectus’에서 유래한다. subicio는 sub(아래에)와 iacio(두다, 놓다)의 합성어이므로, ‘subiectus’의 말뜻은 ‘아래에 놓인 것’이 된다(subject의 상대 개념인 object는 ‘맞은편에 놓인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subject’는 스스로의 힘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힘에 의해 자리 잡혀서 그 힘 아래 예속된 것을 뜻하는 말이 된다.
    ‘subject’가 행위의 주체만이 아니라 문장의 주어, 글감이나 창작의 대상을 뜻하는 제재나 주제, 또는 과목이나 전공 등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subject’라는 단어가 군주국에서의 신민臣民(신하와 백성)을 지칭하는 것까지도 이상하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우월한 힘 ‘아래 놓인 것’으로서의 주체는 ‘복종하는 자’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라는 단어의 이런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실례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의 쓰임이다. 여기 등장하는 ‘subject’라는 단어는 주권자sovereign(이 영어 단어는 라틴어 방언 ‘superanus’에서 변용된 고대 프랑스어 ‘soverain’에서 나온 말로 지배자나 주인 혹은 최고를 뜻한다. 이탈리아어 ‘소프라노soprano’도 6촌쯤 되는 말이다)의 짝이 되는 개념으로서 둘은 군주와 신민(한국어 번역본에서 ‘백성’이라고 옮겨져 있다)의 관계를 이룬다. 여기에서 홉스가 말하는 ‘리바이어던=레비아탄’은 바다에 사는 상상의 괴수, 해룡이다.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코먼웰스=국가’야말로 그런 놀라운 힘을 가진 존재라고 했다. 하늘에 하느님(immortal God)이 있다면 ‘땅에 있는 신(mortal god)’과 같은 존재가 곧 국가라는 것이다.
    홉스의 논리를 요약하자면, 사람들이 ‘신의계약covenant’을 통해 만든 인격체가 국가이고, 그 인격을 소유한 존재가 주권자=군주이며, 국가에서 주권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곧 주체=신민이라는 틀이 된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신민’으로서의 주체는 주권(sovereignty 혹은 sovereign power)이라는 최고 권력에 복종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주체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 공화국의 시민으로 사는 국민 주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틀은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다. 국가의 최고 권력은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 공화국의 이념, 곧 국민 주권의 이념과 어긋나 있는 탓이다. 하지만 주권자에게 복종하는 주체의 형태 자체에 국한해서 말한다면, 이 둘의 관계는 민주공화국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다. 민주공화국에서 국민은 국가의 주권자이면서 동시에 주체이다. 주권자이면서 동시에 주체인 국민은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는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는 주권자-주체의 모습이야말로 국민 주권의 요체이며 민주공화국의 핵심 이념이다. 여기에서 주권자와 주체의 관계는 흡사 뇌의 명령에 복종하는 팔다리의 모양새와도 같다. 타자에게든 자기 자신에게든 복종하는 존재가 곧 주체인 것이다.
 

주체와 호명interpellation

    한 개체가 주체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절차는 주권자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다. 주권자의 목소리를 듣고 주권자의 지시를 이해하고 그 지시를 수행하는 것, 그럼으로써 주권자에 대한 복종을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곧 주체의 존재 이유이다. 주권자의 뜻을 자기 안에 구현해냄으로써 개인은 비로소 주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라는 한국어 단어 안에 있는 주인[主]이란 사실은 둘인 셈이다. 하나는 우월한 힘을 가진 주권자-주인이고 다른 하나는 그 힘을 받들어 구현하는 주체-주인이다. 하지만 주인의 외관을 지닌 두 번째 주인-주체란, 그 내용을 보자면 사실은 주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인이나 집사 혹은 대행자라고 해야 마땅한 존재이다. 주권자는 말을 하고 주체는 그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agent’(대행자나 대리인이라는 뜻을 가진 에이전트가 주체의 자리에 올 때는 행위자, 수행자 등으로 번역되곤 한다)라는 영어 단어가 ‘subject’를 대체하는 말로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 역시 그런 까닭이겠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짜 주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점은 조금 뒤에 살펴보자.
    주체가 어떤 목소리의 부름에 응답한 결과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18~1990)가 논리화한 ‘호명’이라는 개념이다. 한국어 호명이란 말 그대로 이름 부름을 뜻하지만, ‘interpellation’이라는 단어에는 거기에 더하여, 의회에서 진행되는 대정부 질의 절차라는 현실 정치의 특별한 용법이 들어가 있다. 국회의원과 관료 사이에서 진행되는 호출과 질의와 응답의 과정이야말로 주권자와 주체의 관계를 더없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호명하는 국회의원은 주권자의 자리에 있고, 질의에 대답하는 정부의 관료는 주체=대행자의 자리에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알튀세르는 이 같은 맥락을 지닌 ‘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국가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형성 과정을 이론화하고자 했다. 그럼으로써 그가 이루고자 했던 것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던 국민 지배의 기제를 정교화하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파악이 거칠면 그에 대한 대응도 거칠 수밖에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여서 정교한 파악은 정교한 대응을 낳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관의 기본 틀은,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지배 계급이 공권력을 가진 국가 기구(정부, 군대, 경찰 등. 이를 ‘억압적 국가 기구’라 부른다)를 통해 피지배 계급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지배 체제를 전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혁명 절차도, 이 체제가 지닌 권력관계를 따라 진행된다. 먼저 국가 권력을 획득하여 국가 기구를 장악하고, 이를 새로운 국가 기구로 대체하며, 마지막 단계로 국가 기구 자체를 폐지하는 과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논리이자 로드맵이다.
    이와 같은 틀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 권력과 국가 기구의 이분법인데, 알튀세르는 여기에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ISA라고 약칭된다)’라는 세 번째 항을 추가한다. 폭력을 사용할 수 있는 억압적 국가 기구 옆에 또 하나의 국가 기구를 덧붙인 것이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지배 계급의 목표가 현존하는 체제와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억압적 국가 기구의 강제력을 통한 지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의식을 장악하여 정신적 지배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안출한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는 바로 그 일을 하는 기관을 뜻한다. 현존 체제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체제의 유지와 보존을 도모하기 위한 이념과 의식을 재생산해내는 기구가 곧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인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회가 대표적이고, 근대에 들어서면서는 학교가 교회를 대체하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가족, 정당, 조합, 소통 매체, 각종 사회 문화 단체 등이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에 해당한다. 공식적인 국가 기관이 아니더라도 알튀세르는 넓은 의미에서 국가 기구라고 칭했다.
    알튀세르가 말한 호명이란 바로 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가 개인을 상대로 행하는 일을 일컫는다. 호명의 직접적인 예로 그는, 경찰이 길거리에서 검문하는 것을 들었지만 국가=주권자의 호명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부름에 적절하게 응답해야 국민=주체가 된다. 출생 신고를 하는 것, 학교에서 교사의 출석 확인에 응답하고 주어진 교과 과정에 따라 학습하는 것,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자기 이름과 사진을 제공하는 것, 납세와 병역 의무에 응하는 것 등이 모두 호명과 응답의 절차에 해당한다. 물건에 붙은 간접세를 국가에 지불하면서 물건을 사는 행위 자체, 곧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약탈하지 않고 정해진 방식으로 재화를 교환하면서 사는 삶 자체가 이미 한 공동체의 주체를 만드는 절차이기도 하다.
 

응답하는 주체

    호명에 관한 알튀세르의 명제는,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라는 문장으로 압축된다. 그렇다면 주체란 결국 외부에서 다가오는 어떤 힘에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주체는 비록 복종하는 존재이지만 또한 동시에 주동자이자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체의 형식이다.
    주체가 타자의 호명에 응답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임에 이론의 여지는 있기 힘들다. 그러나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호명이 주권자의 몫이라면 응답은 주체의 몫이라는 점이다. 주체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부름만이 아니라 응답이 있어야 한다. 응답하는 것이 주체의 선택임에 두말할 나위가 없으니, 주체는 복종하는 존재임에 분명하지만 좀 더 정확하게는 복종을 선택한 존재라고 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주체가 응답하기를 선택한 바로 그 호명조차도 사실은 주체의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체가 응답할지 말지를 선택한다는 것은 또한 자기가 응답할 목소리, 곧 호명을 선택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주체가 응답하는 목소리는 하나이지만, 주체를 부르는 목소리는 하나일 수가 없다. 역사가 부르고 주님이 부르며, 세상의 고통이 나를 부르고 눈먼 돈이 나를 부른다. 자기에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응답하는 주체는 그 목소리를 선택한 존재이자, 무엇보다 먼저 호명과 응답이라는 틀 자체를 선택한 존재이기도 하다. 출석부의 호명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출석을 해야 하고 또한 호명되는 바로 그 이름을 자기의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복종하는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주인일 수 있는 것은 스스로가 행한 응답의 선택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호명을 선택하고 응답하는 과정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다시 한번 자기 의지로 선택하는 운명애의 형식과 동일한 틀을 지닌다(운명애의 형식에 대해서는 연재 3회분에 있다). 주체가 자율적으로 응답과 호명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주체화의 결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주체 자신의 마음에서 사후적으로 확인된다. 주체로서의 행위에 수반되곤 하는 죄의식과 보람은 바로 그런 책임감의 다른 모습들이다. 자기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복종하는 존재는 동시에 선택하고 응답하는 존재, 곧 주인=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 역시 간단치 않음을 알게 된다. 이데올로기가 개인을 호명하여 주체화하는 과정은, 또한 동시에 한 개인이 이데올로기를 선택하여 주체가 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에게 이데올로기란 단순한 강압이나 속임이나 혹은 세뇌에 의한 결과가 아니라, 종국적으로 그 자신이 받아들이고 선택한 것이 된다. 호명이 만들어낸 주체는 속임수로 인해 허상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선택한 환상 속으로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간 존재라는 것이다. 실질이 어떻든 간에, 자율적인 선택의 형식을 지니지 않고서는 주체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특정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일은 쉬울 수가 없다. 단순히 그 이데올로기가 은폐하고 있는 진실을 제시하거나 깨우쳐주는 정도로 달성되기 어렵다. 진실이냐 허위냐를 따지는 수준보다 더 강인하고 끈질기게 작동하는 힘이 그 바탕에 있기 때문이다. 그 힘은 곧 주체를 만드는 자기 결정의 형식이 가진 힘, 곧 자기 선택을 고수하고자 하는 주체의 완강함이다. 논리나 사실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 비판이 자기 목표를 달성하기 힘든 것은, 주체성의 형식이 가진 이런 힘이 이데올로기의 논리적 평면 밑에 잠복해 있기 때문이다. 주체가 고수하고자 하는 자기 결정의 완고함, 주체가 자기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충동, 환상 안에 있음으로써 주체가 누리고 있는 향락 등을 상대하는 일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주체 구성the construction of subject과 해체deconstruction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통한 주체 구성이라는 알튀세르의 개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나름의 울림을 갖는 것은, 그의 이론이 활성화하고자 했던 현실 비판의 동력이나 마르크스주의가 지녔던 윤리적 힘 때문이기도 하지만, 인간 주체에 대한 또 다른 방식의 이해를 이끌어냈던 정신분석적 사유의 힘이 그 바탕에 있기 때문이라는 점이 또한 강조되어야 한다. 서구의 근대를 이끌어왔던 단일하고 자율적인 주체 개념에 근본적인 회의를 야기한 것이 곧 프로이트와 라캉의 주체 이론이 가진 힘이었던 까닭이다.
    주체의 형성과 관련하여 정신분석적 사유가 보여주는 핵심은, 주체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화 과정을 통한 구성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과 행위는 최소한 세 겹의 층위(자아, 초자아, 리비도)에서 접근되어야 한다는 프로이트의 생각과, 주체는 타자를 통과하면서 타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라캉의 주체 이론이 그 뼈대를 이룬다. 알튀세르는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적 시각을 더하여 주체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을 이데올로기적 호명이라고 불렀거니와, 좀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먼저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까. 말할 것도 없이 나의 양육자들이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존재들, 가족이고 국가이고 하느님이며, 드높은 하늘과 그 위에 떠 있는 구름이다.
    타자의 호명은 동시에 질문이기도 하다. 타자의 질문은 신원을 확인하는 질문이면서 그 자체로 힐난이기도 하다. 타자의 질문은 대답을 이미 알고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선악과를 먹고 숨어버린 아담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 있느냐. 여호와는 동생을 죽인 카인에게 묻는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타자의 호명은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이 질문은 주체에게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킨다. 주체를 호명하는 라캉의 타자는 그런 점에서 프로이트가 말한 초자아와 동일한 위상을 지닌다.
    라캉의 이론 속에서 빗금 그어진 대문자 /S 로 표현되는 주체는 상징계의 질서를 받아들인 존재이며, 그로 인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자기 안에 지니게 된 존재이다. 언어화될 수 없는 것들의 영역은 의식화되지 않는 영역, 즉 무의식의 영역이므로, 타자의 욕망을 품고 있는 라캉의 주체는 곧 무의식을 지닌 주체인 셈이다(연재 9회, 라캉의 담론 이론에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있다).
    정신분석학이 안출해낸, 무의식을 지닌 주체의 개념이 근대 사상의 역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근대성이 기대고 있던 완결되고 자율적인 주체 개념에 근본적인 타격이 되었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있는 나의 무의식은 나를 내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놓는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내가 내 안에 있으니,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닌 것이 된다. 무의식을 품고 있는 인간 주체는 타자의 호명에 대한 응답의 결과로 이루어진 일관성 없는 효과들의 집적체일 뿐이다. 이런 까닭에, 앎의 절대적 보증자가 사라진 근대 세계에서, 데카르트적 이성의 이름으로 인간 주체가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결정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이겠다.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에 의해 제기된 해체deconstruction(이 단어는 ‘탈구축’으로 번역되기도 한다)의 개념이 위력을 발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비판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총격이라면 해체는 내부에서 터지는 폭탄과도 같다. 비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상의 외부에 비판의 거점이 있어야 한다. 대안 없는 비판은 외부 거점이 없는 비판이라서 그 자체로 무력하여 현실적 위력을 지니기 힘들다. 그러나 비판과 달리 해체는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다. 내부에 존재하는 균열과 모순의 지점들을 찾아내서 구조 자체의 근본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 해체적 사유의 일이다. 그 지점을 건드려 전체를 붕괴하게 만들지 혹은 균열점을 보강하여 구조를 단단하게 할지는 그다음에 판단할 일이다.
    증상 없는 텍스트가 있을 수 없듯이, 해체 철학의 시선으로 보면 구성의 봉합선 없는 인간 주체의 영역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사유의 영역에서 해체가 비판의 힘을 넘어선 것은, 이제 지구 전체가 외부성 없는 세계에 갇혀버린 현실과 조응하는 면이 크다. 자본주의는 마침내 지구 정복에 성공하여 유일의 세계 체제가 되었다. 자본주의가 절대 이념이 됨으로써 자본주의의 이념적 외부성을 상정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 된 것이다. 단결한 프롤레타리아가 국가를 세우고 세계 혁명을 꾀하던 때와는 시대적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내부에서 증상을 찾는 작업으로서의 해체는, 비판을 위한 외부 거점이 존재하기 힘든 시대에 비판적 잠재력을 견인해낼 수 있는 유력한 대안일 수 있다. 증상을 찾는 것은 증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해체를 향한 의지 곁에 적시해둘 필요가 있겠다.
 
 

후주

    『리바이어던』의 해당 구절을 인용해둔다. “코먼웰스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다수의 사람들이 상호 신의계약을 체결하여 세운 하나의 인격으로서, 그들 각자가 그 인격이 한 행위의 본인이 됨으로써, 그들의 평화와 공동방위를 위해 모든 사람의 힘과 수단을 그가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인격을 지닌 자가 주권자sovereign라 불리며, ‘주권적 권력sovereign power’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 외의 모든 사람은 그의 백성subjects이다.” 홉스, 『리바이어던 1』, 진성용 옮김, 나남, 2008/2016, 233쪽.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은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1970)에서 개진되었으며, 이 논문은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이진수 옮김, 백의, 1992.)과 알튀세르, 『아미엥에서의 주장』(김동수 옮김, 솔, 1993.)에 실려 있다. 국가 기구는 국가 장치로 번역되어 있다. 호명에 관한 명제의 번역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최초의 정식으로서, (주체라는 범주의 기능을 통해서)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 개인들을 구체적 주체들로서 호명한다고 말하고자 한다.”(솔, 118쪽.)

error: Content is protect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