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유지영의 작품과 광역 인천의 문학 1

 

    편집자 주

    「강화 유지영의 작품과 광역 인천의 문학」은 이전의 ‘우현재’와 달리, 작품 해제와 발굴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 해제 뒤에 발굴 자료가 게재된다. 발굴 자료의 경우, 여름호에는 분량이 많은 소설 「새와 같이」와 기사 「합일학교와 고 최상현 씨─그의 사업은 교육계의 금자탑」을, 가을호에는 동화와 시의 일부를 모아 별도의 해제와 함께 게재할 예정이다. 발굴 자료는 현대 맞춤법과 교정 원칙에 맞추어 수정하였다.

 

1. 광역 인천문학의 발견

    주류 문단 또는 학계의 눈으로 지방문학을 볼 때, 서열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더구나 ‘문학’이라는 제도를 학습하고 그 가치와 기준으로 작품을 보는 안목을 기르는 것이 필수적인 연구자의 눈으로 보기에 대다수 지방문학은 함량 미달이요, 비평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여 지방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수립하고 이에 근거하여 대상을 보고자 애쓸 때도 결국은 소위 ‘작품성’과 ‘역사적 위상’이란 기준을 적용하는 순간, 결국은 동일자로 환원되는 모순에 봉착하고 만다. 그럼에도 하루아침에 인간을 위한 고투의 결과로 수립된 이러한 문학적 성과에 대한 판단기준, 가치를 쉽게 포기할 수도 없다.
    대부분의 문학사 또는 문화사의 기술은 선도적 성과에 주목하여 기술된다. 시, 소설, 희곡과 같은 문학 장르는 물론이요, 잡지, 극장, 호텔, 커피숍 등등 수많은 문물에 결합하는 ‘최초’라는 수사에 우리는 자긍심과 흥미를 느낀다. 그러나 또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최초는 일반화에 의해 완성된다. 요컨대 ‘선도’적 성과는 이것이 퍼져나가 일반화되는 ‘확산’ 없이는 일회성 이벤트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방문학은 문학의 완성이고 지방사는 역사의 완성이다. 단일하고 단순한 기준에 의해 서열화나 우열적 이해를 단정하는 것도 위험하려니와 반대로 과도한 의미 부여나 가치 평가도 경계할 일이다.
    무엇보다 인천의 경우, 지역은 광역화되고 있으나 역사 인식은 협애한 개항장에 한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 문제다. 오늘날 인천의 이해에서 우선적이고 의식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인천이 광역도시라는 사실이다. 복잡한 다성적 중층적 내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그 의미를 해독하고자 노력할 때, 비로소 광역 인천의 본모습을 가늠할 수 있는 시야가 확보될 것이다.
 

2. 오성 유지영의 생애와 문학

    그런 의미에서 강화 출신의 작가로 평생 강화에서 활동하며 살았던 오성 유지영梧城劉智榮(1901~1981)의 작품 세계는 서구에서 도입되어 수도 서울을 중심으로 정립되었던 근대문학이 어떻게 지역으로 확산되며 지역의 현실과 일상, 가치와 상상력을 담아냈는가를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유지영은 팔십 평생 강화 역사와 함께한 순수 강화인이라 할 수 있지만 남아 있는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다.
    『신편 강화사증보』(강화군 군사편찬위원회, 2015) 하편에는 1948년 강화문화관 내 도서관 창립을 위해 노력한 사실과 「부록」의 ‘인물 편람’에 생몰 연대와 강화문화관 관장직을 역임했다는 사실이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의 기원은 1948년 강화문화관 기관지로 발간된 『강화』에 실린 내용과 1997년 강화문화원에서 발간한 『강화인물사』에 실린 강화문화원 자체 조사이다. 여기에는 유지영이 《동아일보》 강화지국장을 역임한 언론인이었다는 사실, 여러 사회단체의 구성원이었으며 강화군민의 원로로서 종횡무진 활동했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고 기관장으로서의 역할과 ‘강화군민의 노래’인 〈복지 강화〉 등 애향가 작사 등에 주목하고 있다.
    요컨대 유지영의 작품 활동이나 문인의 면모는 전혀 주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지영은 시, 소설, 동화 등 상당량의 작품을 여러 신문·잡지에 발표한 문인이다.
    1978년 4월부터 1979년 6월까지 《동아일보》에서 장장 205회에 걸쳐 전국을 순회하여 지역을 살핀 시리즈 「신 팔도기」는 무려 7회(1978. 5. 19.~29.)에 걸쳐 ‘강화도’를 다루고 있다. 이 중 마지막 회인 제40회(1978. 5. 29.)에서는 ‘일제 때 《동아일보》 지국장을 지낸 시인 유지영 씨는 대표적인 강화 유지’라 소개하고 있다. 당대에는 유지영을 ‘시인’이며 동시에 ‘강화 유지’로 이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지영은 강화 합일학교 출신인 것으로 파악된다. 1940년 3월 12일자 《조선일보》에는 「강화 합일동창회의 장려금 수여 준비」라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강화 합일학교 출신들은 재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모였고 여기에 유지영은 금 10원을 기부했다. 이외에 폐교 위기에 처한 강화 합일학교에 거액의 운영비를 남기고 사망한 고 최상현의 죽음을 애도하며 합일학교의 상황을 보고한 『신동아』 1935년 11월호의 기사 「합일학교와 고 최상현 씨─그의 사업은 교육계의 금자탑」에서도 합일학교에 대한 유지영의 깊은 애정과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유지영의 이후 학력 등은 별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합일학교 졸업 후에도 뜨거운 교육열을 지녔던 강화지역의 청년 등과 자율적으로 학습을 계속하며 식견을 넓혀간 듯하다.
    무엇보다 합일학교는 내리교회 조원시 목사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학교였지만 교회의 지원이 중단된 이후에도 강화인의 합심으로 학교를 유지하였다. 특히 최상현은 폐교 위기에 놓인 합일학교의 운영을 책임졌고 임종에 즈음하여 거액의 운영 재원을 남겼으며 그 유족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이를 실행했던 것이다. 유지영은 『신동아』에 게재한 「합일학교와 고 최상현 씨」라는 글에서 바로 이러한 최상현에 대한 추모 외에도 학교 운영에 필요한 강화도민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손에 못을 박아 호소했던 교무주임 강흥석의 일화를 함께 기록함으로써 강화 합일학교의 역사가 단순히 한두 명의 의거로 이룩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유지영은 1923년 《매일신보》의 강화분국 기자를 역임하면서 강화 언론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25년 창립된 강화 무명동맹회의 회원으로서 상무집행위원을 역임하였고 1928년에는 신인사의 사원으로도 일하였다. ‘신인사’는 잡지 『신인』을 준비하던 잡지사이다. 잡지 『신인』은 실물이 확인되고 있지는 않으나 진우촌秦雨村, 유도순劉道順 등이 인천에서 발간했던 잡지 『습작시대』의 후속으로 추진되었다. 추측컨대 강화 합일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던 진우촌이 강화에서 유지영을 만나 교유하며 함께 활동했던 것이다.
    신인사의 사원으로 있었던 1928년은 유지영의 작품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해이다. 현재 확인되는 유지영의 작품은 시, 소설, 동화, 평문 등을 모두 포함하여 총 14편이다. 이 중 무려 10편이 1928년 《조선일보》와 《중외일보》, 『새벗』 등에 실린 작품이다.
    물론 그 외에도 해당 호는 현재 확인할 수 없으나 1929년 3월호 『새벗』에 유지영의 「불쌍한 제비와 착한 공주」라는 작품이 실릴 예정이라는 예고 기사가 있고 홍은성의 소년문예 평론 기사(「금년 소년문예 개평」, 《조선일보》, 1928. 11. 3.)에 「코레라이의 처녀」[‘코레라이’는 원문대로 씀: 인용자]라는 작품이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으며 『새벗』, 『소년 조선』 등의 지면에서 그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현재 확인하지 못한 작품도 상당량 더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족이지만 1929년 3월호 『새벗』에는 진우촌의 「고국 동무에게」라는 글도 실릴 예정이었다. 이는 그간 확인할 수 없었던 진우촌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제목이다. 진우촌의 이력에서 일본에 유학하였다는 언급은 있으나 그 실체를 확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국 동무에게」라는 제목으로 보아 이 시기가 진우촌이 일본 등으로 주유하며 견문을 넓히던 때였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를 통해 유지영이 진우촌, 유도순 등과 이름을 나란히 하여 『새벗』에서 함께 활동하며 교유를 이어갔다고도 하겠다.
    ‘새벗’은 고병돈이 창간한 것으로 알려진 어린이 월간 잡지로서 어린이 교양과 흥미, 학습 등을 위한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하였다. 남아 있는 판본도 많지 않고 다소 흥미 위주의 통속적 읽을거리가 중심이었다고 평가되며 학계의 주목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으나 당시 활동하던 주요 작가들의 작품이 실려 있어 섣불리 재단할 대상은 아니다.
    또한 1929년에는 신간회 강화지회의 상무간사로 활동했으며 《조선일보》 강화지국의 기자를 거쳐 《동아일보》 강화지국의 기자, 지국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1937년에 설립한 강화지역 기자단체 목요회에서는 총무처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 강화지국의 기자로서 ‘강화직’과 ‘화문석’ 소개 기사, 강화 길직리 탐방 기사 등 강화도에 대한 기획 기사 등도 남아 있다. 추가적인 작품 발굴과 종합적인 조망과 분석이 이어지길 바란다.
    그 외에 유지영의 활동에서 중요한 것이 『강화』이다. 이는 1948년 강화문화관(오늘날의 강화문화원)의 기관지로서 처음에는 계간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후일 인천시장을 지낸 윤갑로가 강화군의 주사로 재직하던 당시 유지영 등 강화지역의 인사들과 협력하여 창간하였다. 2007년 강화문화원에서 복각본을 발간하였던바, 전체 기사를 윤문한 부분과 원본을 영인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본 전체가 영인 소개되었으므로 전체 기사의 윤문 부분이 재구성된 점이 큰 흠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잡지란 지면의 흐름을 보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하여 기사의 순서를 원문과 다르게 재구성한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문학’을 ‘강화문예 시’, ‘강화문예 시조’로 구분하고 유지영의 「상사곡 세 수」와 「강화주유가」, 동과숙 주인의 「농촌 건아가」, 최영대의 「국제연합 조선위원단을 환영하며 노래함」 4편을 시조로 구분한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 4편의 작품 중 유지영의 「상사곡 세 수」만이 시조이고 나머지 3편은 3음보의 신체시 형식이다. 특히 유지영은 「강화주유가」에서 ‘「육당 선생의 세계일주가」를 본떠’라는 부제를 달았으니 이는 음수율로는 7·5조, 그보다는 3음보의 율격으로 4행 35연의 신체시가이다. 강화의 중요한 지역과 역사, 풍물, 산업 등을 두루 다룬 시가로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강화 소창산업과 그 산업 유물인 ‘족답기’에 대한 언급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가이다. ‘신체시’를 문학사의 과도기적 의미만을 염두에 두고 평가한다면 본격적인 근대시가가 시작되고도 20여 년이 지난 뒤 발표된 「강화주유가」의 의미는 지체된 모작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율격을 여전히 자기표현의 형식으로 유지하면서도 유구한 강화의 사적과 역동적인 변화를 능동적인 주체로서 기록하였다는 사실과 최남선의 문학적 작업을 여전히 현재적인 것으로 향유하며 그러한 방식을 자기 기록에 응용하고 있다는 점은 간단히 폄훼되어서는 안 될 성과이다.
    이 시기 유지영은 윤갑로와 협력하여 강화문화관의 찬조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강화도서관의 장서를 모으기 위해 외부의 지원을 끌어내고자 동분서주하였으며 『강화』의 편집에도 조력한 것으로 보인다. 윤갑로로 추정되는 편집자 Y생은 편집 후기에 유지영을 따로 거명하며 협조에 깊은 사의를 표하고 있고 유지영의 시조 「상사곡 세 수」는 떠나는 윤갑로를 위한 송별시이다.
    이후 1954년에는 강화문화관의 관장을 역임하면서 문화영화 〈복지 강화도〉의 제작을 주도하였고 다수의 애향가를 창작하였다. 『강화인물사』에는 강화군민의 노래 〈복지 강화〉의 악보가 실려 있다.
 

3. 현실을 바라보는 낭만적 시선

    해방 전, 현전하는 유지영의 시 6편과 1편의 소녀소설 「새와 같이」의 작품 경향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익숙한 일상 현실과 이에 대한 연민 어린 낭만적 시선이라 할 수 있다.
    「해변의 저녁」(《조선일보》, 1928. 4. 22.)은 해 지는 강화도의 저녁 풍경을 노래한 3음보의 시이다. 앞서 「강화주유가」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음수율보다는 3음보의 율격으로 신체시를 수용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1연에서 해가 질 무렵에는 작은 배 한 척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지나가며 애수의 정조를 드러내지만 2연에서 둥지를 찾는 새들과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인가를 조명하면서 달빛 싣고 돌아오는 고기잡이배를 3연에 배치하여 안온하고 평화로운 엔딩에 이른다. 「떠나가신 님」(《중외일보》, 1928. 4. 28.)은 순종의 3주기를 맞은 애통한 소회를 다루고 있다. 지난 왕조의 임금을 님으로 호출하는 심사가 퇴행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이 무렵 유지영은 신간회 강화지회의 상무간사였다. 지난 왕조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일제에 의한 독살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세상을 떠난 순종을 잊지 않음으로써 식민지 상태를 자각하는 계기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농촌의 하루」(《중외일보》, 1928. 4. 30.)는 평범한 농가의 모습을 명랑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늙은 조부모와 부부 내외, 아이들까지 저마다 할 일이 있어 제 몫을 다하고 있으니 전통적인 훈민가의 감수성을 이어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병중음病中吟(《중외일보》, 1928. 8. 8.)은 시인이 병들어 누웠을 때 쓴 작품인 듯하다. 시인은 건강할 때, 더 열심히 일하지 못한 것을 반성하면서 게으름에 대한 처벌로 질병을 의심하고 있으니, 질병을 보는 근대적 시선이 오롯하다. 「소곡 3편─고시체를 본받아서」(《조선일보》, 1929. 10. 13.)는 삼랑성, 정족산, 참성단을 다룬 3연의 연시조로서 유구한 역사의 장소에서 무력한 현실을 비통해하는 시인의 반성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다.
    즉 자신이 속한 강화의 자연과 역사, 일상 속에서 이를 따뜻하면서도 슬프되 시조라는 옛 형식에 기대어 감정적 파탄을 방어하는 미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망국에 비분하나 생활인으로서 균형을 유지한다는 것이 유지영과 지역의 문인에게 왜 중요했는지 새삼 화두를 환기한다 할 것이다.
    ‘소녀소설’이라 병기한 「새와 같이」는 소녀 춘희의 임종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소재의 비극성으로 말미암아 유지영의 작품에서 비극적 정조가 가장 두드러진다. 춘희는 친한 친구 옥실이가 있었지만 이미 사망하였고 옥실이와 함께 키우던 작은 새를 보며 결국 옥실이를 그리워하다가 사망한다. 춘희가 사망한 후 작은 새도 춘희를 따르듯 사망하여 춘희의 무덤 옆에 새를 묻어주고 차디찬 가을비 소리가 새 울음소리같이 두 영혼을 조상하듯 가느다랗게 난다는 내용이다.
    가축이 아닌 애완동물을 키우는 것은 일반인, 그것도 평범한 농가에서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자식을 비롯하여 집안의 모든 것이 가장의 소유로 인식되던 시대를 지나 소녀들이 ‘새’나 ‘금붕어’ 등과 같은 자신들 소유의 애완동물을 키우게 된 것은 근대 이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각종 생물을 효용이 아니라 정서적 이유로 키운다는 것은 주체 성장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물론 이태준의 「토끼 이야기」에서 보듯 그것이 무지로 인해 극단적인 파국에 이르기도 하고 현실주의적 관점에서는 이것이 더욱 개연성 있는 결과지만 미숙한 주체인 어린이, 청소년이 다른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며 책임지고 동행한다는 설정은 이니시에이션initiation에서 대단히 중요한 순간이라 할 것이다. 더구나 이들 소녀가 결국은 성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는 것은 일상의 활력으로는 넘어서기 어려운 시대적 한계일 것이다.
    물론 이때 판매되던 새, 금붕어 따위는 생존 환경이 좋지 못하여 대부분 일찍 죽고 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러한 상황 자체가 재현의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새와 같이」 또한 실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한 듯하다.
 

    童謠 ∥ 죽은 새 두 마리

江華 劉貞姬

    -1-
    어떤 날 아침에 새 장사 하나
    싸구료 싸구료 싸게 판다기 [원문: 싸판게다기, 인용자 수정]
    노랑새 두 마리 맘에 들기로
    사다가 창밖에 매달았지요.

    -2-
    이튿날 아침에 일찍이 깨어
    새 소리 들으려 귀 기울여도
    자는 듯 죽은 듯 소리 않기로
    울만치 섭섭해 가보았지요

    -3-
    불쌍한 숫새는 길게 잠들고
    설운 듯 암새는 방황하기로
    죽은 새 꺼내서 묻어줬더니
    암새도 그 뒤를 따라갔어요 (《중외일보》, 1928. 4. 14. 인용자가 맞춤법, 띄어쓰기 수정)
 

    유지영의 작품 「썩어 끊어진 새끼 동아줄」이 연재되고 있던 1928년 4월 14일 《중외일보》에는 강화 유정희의 시 「죽은 새 두 마리」라는 작품이 게재된다. 소녀소설 「새와 같이」가 발표되기 4개월 정도 전인데 암수 두 마리 새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상을 떠났다는 내용이다. 강화에는 강릉 유씨가 일정하게 집성을 이루고 있었고 묘금도 ‘유’ 자를 쓰는 다른 본관의 유씨는 없었으므로, 유지영의 친족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유지영은 친족의 소녀를 위해 「소녀소설: 새와 같이」를 썼다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친족의 소녀가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겠다.
    지정된 어린이 독자를 위해 작품을 쓴다는 것은 미래 세대에 대한 유지영의 애정과 기대를 분명히 보여준다. 강화 합일학교의 운영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던 강화인으로서의 책임감에도 연속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인 생애 사실이 확인되어 이러한 추정이 분명해지기를 희망한다.
    
    

오성 유지영 연보

    1901년        강화 출생
    19–년        강화 합일학교 졸업
    1923년        《매일신보》 강화분국 기자
    1925년        강화 무명동맹회 회원(상무집행위원)
    1928년        신인사 사원
    1929년        신간회 강화지회 회원(상무간사)
    1929년        《조선일보》 강화지국 기자
    1930년        《동아일보》 강화지국 기자
    1934년        전등·전화가설기성회 위원
    1937년        강화지역 기자단체 목요회 창립, 총무처장 역임
    1940년        《동아일보》 강화지국 기자 및 지국장
    1948년        강화문화관 기관지 『강화』에 편집 조력
    1954년        강화문화관 관장 역임
    1981년        영면
 

작품 연보


 


 

〈발굴 자료 1〉

    少女小說
    새와 같이

 

    춘희春姬는 언제든지 작은 새를 바라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조그마한 몸을 노란 깃으로 가리고 산호珊瑚빛같이도 빨간 다리가 더욱 춘희의 마음에 정다웠습니다.
    작은 새는 춘희의 마음을 알고나 있는 듯이 춘희가 서러운 듯한 얼굴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새도 조그마한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춘희에게는 새의 마음을 잘─ 알았습니다.
    “춘희야 왜? 서러워하니. 같이 노래나 부르자꾸나!”
    새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춘희는 언제든지 새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떠한 때에는 자줏빛 하늘이 변하여 물빛 하늘로 변한 듯이 새가 있는 장 틈으로 보였습니다. 물빛 같은 하늘빛은 춘희가 건강하여 학교에 다닐 때에도 바라보지 못한 듯한 부드럽고도 아름다운 빛을 가진 하늘이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하늘이로구나.”
    새장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보는 춘희는 알 수 없이 마음이 즐거워졌습니다.
    “아─ 좀 있으면 별들이 뜰 터이지. 그리고 달도 뜰 테지. 또 저 하늘 위에는 선녀仙女가 좋은 집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놀겠지. 내가 그곳에를 가게 되면은 어여쁜 선녀들이 나를 사랑해줄 것이다. 아─ 어서 가보았으면⋯⋯.”
    이와 같이 춘희의 공상空想은 꿈나라로 방황했습니다.
    ×
    ─어떠한 날─
    그날은 아침부터 서늘한 가을바람이 쓸쓸하게도 마당에 선 나뭇잎새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춘희는 병이 점점 더해갔습니다. 오늘도 기침을 숨차게 하였습니다. 또 몸에는 열이 많아서 자꾸 자꾸 헛소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와 간호부看護婦는 걱정스러운 듯이 춘희의 머리맡에 앉아서 머리도 만져주고 다리도 주물러주시면서 정성스러운 간호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고 있을 때입니다. 춘희는 갑자기 별 같은 눈을 반짝 떴습니다. 이불과 요는 열로 인하여 펑하니 젖었습니다.
    “어머님 새가 그저 있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새는 춘희가 늘─ 사랑하는 새였습니다.
    “그래 새가 있다. 자─ 춘희야, 보아라. 저─ 창문에 걸려 있지 않으냐⋯⋯.”
    “응? 있어요?”
    춘희는 그 말을 하고는 또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다가 또다시 눈을 떠서
    “새가 노래 부릅니까?”
    “아니다. 설운 듯이 너를 보고 있구나. 어서 병이 나아서 새와 같이 놀아라!”
    “나는 지금 새가 노래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넓은 꽃동산에서 나는 새와 같이 노래를 불렀답니다. 아주 어여쁜 소리로. 그런데 어머님은 못 들으셨습니까?”
    어머니는 설운 듯이 춘희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습니다.
    “참, 우리 집 새는 정말로 어여쁜 새지요.”
    “그래, 어여쁘고말고⋯⋯.”
    “나는 언제든지 새와 같이 놀고 싶어⋯⋯.”
    “어서 놀아. 빨리 병이 낫거든.”
    춘희는 갑자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옥실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옥실玉實이라고 하는 이름을 지금 병으로 앓고 누워 있는 춘희의 입으로 말하는 것이 듣기 싫었습니다.
    “옥실이가 아직도 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단다. 아직 오지 않았어.”
    어머니는 섭섭한 듯이 가만가만히 대답했습니다.
    “좀 빨리 오면 좀 좋을까. 어쩐 일일까? 옥실이는.”
    춘희는 이렇게 말을 한 후 열이 많은 눈을 떠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했습니다.
    “어머님, 옥실이는 참 죽었지요!? 어째 내가 이럴까.”
    춘희의 눈에서는 또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고 새로 빤 하얀 손수건으로 춘희의 눈물을 훔쳐주고 계셨습니다.
    “춘희야. 지금 너무 서러워하고 또 우지 말아라. 병이 덧치면 안 되니. 응? 착하지!!”
    춘희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축음기蓄音機를 들려주랴? 춘희야⋯⋯.”
    춘희는 어머님 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방긋이 웃었습니다.
    좀 있더니 조용한 봄 노래가 축음기에서 새어나와 춘희가 누워 있는 병상病床 위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춘희는 눈을 감고 듣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춘희는 세상을 떠난 동무 옥실이가 더욱 그리워졌습니다. 그러더니 춘희의 눈에는 정녕히 옥실이 얼굴이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 옥실과 춘희는 한 동생보다 더욱 친하게 지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춘희는 옥실이가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오늘까지도 잊지 못하는 것이 무리無理가 아닙니다.
    새를 치기도 옥실이와 같이 길러보자고 하여서 외국外國에서 오실 때 삼촌 어른이 춘희에게 선사로 갖다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두 동무는 얼마나 좋았던지 한바탕 춤을 추기까지 하였었답니다. 옥실이의 집은 춘희의 집과 마당이 한데 붙어 있었으므로 날마다 새를 마당 한가운데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놀았었습니다. 옥실이가 죽을 때에도 새가 못 잊혀서[원문: 못밋어셔-인용자] 새의 이름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불렀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하. 옥실이는 벌써 세상을 떠났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또 새로운 눈물이 가슴속으로 솟아나왔습니다.
    축음기 소리는 아직 조용히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은 춘희의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보고는 축음기를 그만두셨습니다.
    “춘희야, 노랫소리가 듣기 싫으냐?”
    춘희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다만 머리만 좌우로 흔들 뿐이었습니다.
    “어머님, 새를 이곳으로 데려다가 보여주셔요.”
    “새를⋯⋯.”
    어머님은 새를 가져오는 것이 춘희로 하여금 더욱 서러워할 원인原因인 줄은 아나 할 수 없이 새장을 떼어왔습니다.
    주홍朱紅빛 새장의 새는 몸을 움츠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새장을 갖다가 춘희의 머리맡에다가 놓아주셨습니다. 춘희는 가만히 눈을 떴습니다.
    “새를 가져왔으니 보아라. 춘희야⋯⋯.”
    “가져왔어요, 새를!”
    춘희는 깜짝 놀란 듯이 머리를 이편으로 돌렸습니다.
    “지금 잠깐 옥실이 꿈을 꾸었답니다.”
    “저─런⋯⋯.”
    어머니는 눈썹을 찡그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춘희의 말하는 것이 모두가 병으로 인한 헛소리인 줄 아셨습니다.
    “어머님! 나는 학교에 다닐 때 입던 치마와 가방이 보고 싶어요.”
    “어째서⋯⋯ 그런 것이 보고 싶단 말이냐?”
    “그렇지만 치마와 가방을 보면 학교에 간 듯싶은 생각이 나니까요.”
    어머님은 웃방에 가서 치마와 가방을 가져오셨습니다. 가방과 치마를 입을 때 한 달 전에 춘희가 학교에 다닐 때 일이 번개같이 언뜻 생각났습니다. 그리고는 가방을 메고 마당으로 학교에 가는 춘희의 뒤 태도態度가 마치 활동사진活動寫眞 모양으로 휘익 지나갔습니다. 어머님은 생각잖은 눈물을 그 치마에 씻었습니다.
    “어머님, 내가 학교에 다닐 때에는 참 건강했었지요.”
    춘희는 손을 꺼내어서 그 치마와 가방을 만지작만지작하면서 어머님더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 봐요. 이것이 바로 옥실이하고 같이 산 가방이지요. 아이고, 지금 학교 동무들은 어떻게들 있을까요.”
    그때 의사醫師가 왔습니다. 진찰診察을 한 다음에 열이 몹시 세고 병세가 대단하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는 가버렸습니다. 춘희의 열도熱度는 40도四十度가 지났습니다. 그래서 간호부는 춘희의 머리 위에 수건을 냉수冷水에 적셔서 얹어주면서 정성껏 간호를 해주었습니다.
    춘희는 한참 동안 지친 듯이 곤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어머님은 부엌에 나가서 밥 짓는 것을 보살피십니다.
    그리고 해가 다 저물었을 때에 급히 병실病室로 가서 보니까 춘희는 어느 틈인지 눈을 떠서 새를 바라보면서 무엇인지 혼자 중얼대고 있었습니다.
    춘희는 어머니를 보더니 급히
    “어머님, 이 새를⋯⋯ 내가 죽은 후에라도 사랑해주셔요⋯⋯. 네!”
    춘희는 이 말을 그치고는 가슴이 메어지는 듯이 큰 소리로 엉─엉 울었습니다.
    어머님도 모르는 동안 춘희를 껴안고 춘희와 같이 울기를 마지 않았습니다.
    ×                ×
            ×                ×
    그로부터 한 보름이 지난 후 춘희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춘희가 생전生前에 사랑하던 새도 어쩐 일인지 춘희가 죽던 이틀 후 슬픈 소리를 길게 부르고 죽고 말았습니다.
    춘희가 묻혀 있는 무덤 옆에는 알 수 없는 조그마한 무덤 하나가 더 생겼으니 그것은 춘희가 죽을 때까지 귀여워하던 ‘새’의 무덤이었습니다.
    가을날이 깊어감을 따라 차디찬 가을비 소리가 작은 새小鳥의 울음소리 같이도 조그마하고도 가느다란 소리로 불쌍한 어린 두 영을 조상하는 듯이 뿌리고 있었습니다.

(『새벗』, 1928년 8월호)
 


 

〈발굴 자료 2〉

합일학교와 고 최상현 씨
        그의 사업은 교육계의 금자탑
 

    합일학교는 초등학교로 강화에서 유일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 다시 전 조선적全鮮的으로 그 유례를 보기 드문 30년의 참담하고 찬란한 역사를 가진 보통학교 급으로서 가장 존재가 크다는 것은 자타 공히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남다른 환경에 처한 우리네 교육기관으로 30년이란 짧지 않은 세로世路를 지난 강화 합일학교가 금일을 맞이하기까지의 쓰라린 체험과 피 섞인 경험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 학교該校는 이제로부터 30년 전 즉 광무 5년[1901년: 인용자]에 미국 선교사 조원시趙元時와 전도사 박능일朴能一 씨의 손으로 설립한 사숙私塾으로 학동 겨우 3명을 모집해가지고 교육기관으로 첫발을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융희 2년[1908년: 인용자]에 들어 교명을 잠두합일학교蠶頭合一學校로 개명했으며 대정 2년[1913년: 인용자] 3월에 제1회 졸업생 4명을 낸 것이 그 학교의 첫 번 경사였었다.
    학교 건물은 물론 조선식 구옥(교회 부속 건물)으로 명색만이 교실, 사무실 몇 간이 있었을 뿐으로 사실은 창에 유리 한 장 변변히 붙이지 못하여 풍우를 막지 못했고 지붕은 개초蓋草조차 제대로 못하여 이슬비에도 새는 지경에 있어서 당시 학교 당국자로서는 교사를 어떻게 하여서라도 개축을 하든지 그렇지 못하면 교문을 닫고 말자는 최후의 곤경에 빠지게 되었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오불관언이라는 듯이 모르는 체하고만 있었다. 당시 강화군에 봉직하던 신효승辛孝承 씨도 합일학교의 비보를 듣고 분무奮無히 직을 사하고는 합일학교에 일신을 바쳐 학교 갱생의 길을 찾아볼 결심으로 합일학교에 자원봉직하기로 되었었다. 씨는 취임 초부터 보다 큰 문제인 학교 신축 문제 해결에 몰두한 나머지에 군내 부호와 유지를 역방歷訪하여 학교의 사정을 술述하고 교사 신축비의 기부를 간청해보았으나 그의 가는 곳마다 이해 없는 사회는 도저히 신 씨의 이상대로 기대대로 부합되지 않고 도리어 신 씨를 비방과 욕설로 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 씨는 이에 불굴하고 다만 자기의 성의가 부족함이라 하여 그때부터 주야 50일을 남산에 올라 신에게 자기 소원을 기도하고 최종일은 마침내 자신의 손自手에 오촌정五寸釘을 박아 교사 신축에 일관하기를 스스로 맹서하고 다시 실전에 세 치 혀三寸舌1를 유일의 무기로 돌진하게 되니 냉정하던 사회, 이해 없던 유지들도 그의 성의에 감동되어 다행히 성사될 서광이 비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여름휴가 기간夏休에도 일관 학교 갱생을 위하여 자가 부업의 사진업에서 나는 돈으로 손수 재목을 사서 책상을 만들고 교재를 가다듬어 앞날의 희망을 꿈꾸며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 편도便道 당국에 기부 인가를 받게 되니 고 최상현 씨 외 몇 분과 악수하고 사회의 동정을 구하여 다이쇼 12년[1923년: 인용자] 4월에 들어 총공사비 1만2천4백 원으로 당당한 연와제 2층 양옥을 신축하게 되고 다이쇼 13년 2월에 신교육령에 의하여 수업 연한을 6년제로 연장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니 재정 문제와 교사校舍 문제 중에 한 가지 난문제만은 해결을 보았으나 호사다마라서 동 14년 3월에 이르러 선교회의 보조금은 금후 더 지속해줄 수 없으니 학교를 단독 경영하라는 최후통첩을 받게 된 때부터 합일교는 다시 두 번째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었었다.
    그 후 학교는 수업료 기타 사회의 약간 보조로 1년 동안은 근근이 유지해보았으나 도저히 예산 없는 학교를 무리하게 끌고 나가기도 곤란하여 당 연한年限 졸업식으로 학교는 그만두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경우에 이르렀었다.
    학교 당국은 쇼와 2년[1927년: 인용자] 4월에 거행할 제13회 졸업식은 학교의 마지막 경사이면서 최후의 폐교식으로 인정하고 의의 깊은 졸업식을 하기 위하여 어려운 중에도 학부형의 주머니를 짜서라도 학예회 작품전을 하기로 하였었다. 제13회 졸업식에 임하여 교무주임 강흥석康興錫 씨는 단에 올라 학부형모매學父兄母妹 그리고 내빈을 향하여 최후의 애소를 하였던 것이다.
    고 최상현 씨는 전부터 당교 교감이었으나 당시 경성에 있어 최후 졸업식에 참석치 못한 관계로 그 후 귀강 후 졸업식의 경과를 듣고 자진하여 학교 경영을 인계하기로 하고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으니 그로부터 합일교에는 서광이 비쳤던 것이다. 다시 동 4년 3월에 설립자 방거房巨 씨가 사임하고 최 씨가 설립 겸 교장이 되면서 부족되는 경비 일체를 책임지고 나섰던 것이다.
    재작년(쇼와 8년) 가을부터 최 씨는 신병으로 병상에 누운 채, 다시 회춘을 못 보고 별세한 것은 사회의 불행이면서 아울러 강화 합일학교의 불행이다. 12월 24일 정오 지나서 강화읍 잠두교회에서 최 씨의 비보를 전하는 조종 소리는 얼마나 강화 인사를 놀래었던가? 사회 인사의 놀란 것은 씨의 별세와 한 가지 씨의 사후 합일교 경영에 대한 불안에서 나온 놀람이었으니 그 원인은 최 씨는 병석에 누우면서 일절 입을 열어 말을 못했으므로 학교 경영 방침도 세우지 못했을 것을 추측한 것임으로서이다. 그러나 마지막 죽음의 길을 떠나는 날까지 학교를 잊지 않은 최 씨는 작고하던 전날 시탕하던 교직원을 손으로 불러 옆에 앉히고 말하기를 “나의 병세 보아 다시 회생키 어려우니 내가 간 후에라도 학교 경영할 재산[을: 인용자] 얼마간 제공할 터이니 최상현이가 세상에 왔다 간 기념으로 잘 경영해주시오.” 이리하여 토지(소유반분) 18만 평(당시 지가地價 7만 원이나 현금現今 지가 약 10만 원)을 경영 재산에 제공하게 될 것이다. 씨의 사후 학교는 반석 위에 엄연히 서서 아무리 모진 태풍에라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다. 사회 인사는 최 씨의 공덕을 영세 기념하자는 의미로 지난 8월 30일 씨의 기념 동상을 교정에 건립하였으며 또 7천여 원을 들여 교사를 증축 준공하고 운동장 확장 공사를 앞두고 한편 재단법인 인가 신청 중으로 장래 지정 보통학교 운동도 종으로 횡으로 완비한 학교 건설에 전진하고 있으니 고 최상현 씨의 기념 금자탑인 강화 합일학교에 전도 끝없는 발전이 있기를 바라고 이만 두기로 한다.

(1935년 9월 10일)
(『신동아』 1935년 11월호)
 
 

〈주석〉

  1. 원문에는 三寸筈, 오식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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