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바닥 투쟁 현장에 선 약자들의 어머니, “나는 나눔을 누렸다.”: 유희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대표

  

# 유희를 생각했다

    지난 두어 달간 그를 많이 생각했다. 계간 『작가들』 편집주간에게서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필자를 찾아 팔방을 헤매던 닌자 거북이 같은 편집주간은 “20년도 넘게 투쟁 현장에서 밥을 지어준 분”이라는 말로 나를 꾀었다. 그 한마디에 호기심이 생겼다. 당장 휴대전화로 기사를 검색했다. 편집주간은 굉장한 낚시꾼이 틀림없다. 나는 이미 닌자 거북이의 낚싯바늘을 단단히 물었다.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활동가들과 유희 대표 (오른쪽 세 번째) ⓒ 십시일반 밥묵차

    유희는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이하 밥묵차)’의 대표다. 지난 20여 년간 전국 각지 집회 현장에 찾아가 참가자들과 값없이 밥을 나눴다. 제 밥 몇 숟가락 덜어줬다는 말이 아니다. 활동가들과 1톤 트럭 ‘달려라 밥묵차’를 몰고 가서 적게는 수백, 많게는 2천 명도 훌쩍 넘는 집회 참가자들의 삼시 세끼를 며칠씩 챙겼다. 제주 강정, 경북 성주 소성리 사드 반대 집회, 서울 강남 하이트진로 본사 농성장, 청와대와 법원 등 노동자와 장애인, 노점상, 빈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싸우는 곳이면 그의 밥차가 달려갔다. 길바닥에서 오래 농성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밥을 안 먹어본 사람이 드물 정도다. 한진중공업 마지막 해고노동자 김진숙,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 김득중, 세월호 유가족 등 굵직한 투쟁에 있었던 분들은 유희의 밥차를 기억한다.
    한 번에 수백, 수천 명을 먹이는 게 어떤 일인지 짐작도 안 된다. 그리 오래 투쟁 현장을 다닌 꾸준함의 원천은 무얼까. 비용은 어찌 마련한 것인지도 알고 싶었다. 보아하니 단순히 밥만 나눠준 사람은 절대 아닐 터. 꼭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사진이 몇 장 있다. 짙은 검정 머리카락을 이마에 한 방향으로 삐쭉삐쭉 내린 모습에 세련미와 자신감이 풍긴다. 생기 넘치게 웃는데, 눈빛에서는 광선이 나온다. 총알을 난사하고 뜨겁게 달아올라 연기가 피어나는 총구 같은 눈이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호기심이 쏙 들어갔다. 여태 봤던 사람 중 가장 ‘센 언니’, 아니 ‘센 누나’가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입에 문 낚싯바늘을 멋대로 뱉어낼 수는 없었다.
  

# 모든 인간은 자신의 불안과 싸운다

    어쩌면 삶은 불안을 해소하는 과정이다. 가난이 두려워 힘든 직장을 떠나지 못하고, 건강을 잃을까 두려워 몸에 좋다는 음식을 챙기고 힘든 운동을 이어간다. 외로움이 두려워 휴대전화를 놓지 못하고, 시기를 놓칠까 두려워 주말이면 선 자리에 나가서 낯선 이성과 시답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코인지 입인지로 밥을 먹는다. 다들 그렇게 산다. 주변에 이런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동산, 주식, 코인. 또 무슨 무슨 투자처와 사업. 빠르게 변하는 이 땅의 설익은 자본주의는 만인 간의 경쟁을 부추긴다. 사촌이 땅을 사고, 동창이 주식이나 코인으로 한몫 잡았다는 소식에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 불안하다. 자본주의는 정체停滯를 허락하지 않는 까닭이다. 가벼운 자동차 사고가 나면 별 탈 없어도 일단 드러눕고 병원에 입원해 합의금을 단단히 챙기고, 차에 조금만 흠이 나도 자동차 부품을 통째로 교환하는 자가 똘똘하다 인정받는, 그래도 부끄러움 없는, 오히려 그걸 재주요 자랑이라고 떠벌리는, 뭐가 좀 잘못된 세상이다.
    이런 약탈과 경쟁의 세상에서 수천 명에게 수만 끼를 값없이 먹인 사람이라니. 대체 어떤 사람일까. 자신감이 넘쳐서 이런 애처로운 불안 따위는 우습게 짓눌러버린 호인일까. 어디 돈이 남아도는 자선사업가일까. 아니면 어떤 정치 세력이 뒤받쳐주기라도 하는 건가. 시간이 갈수록 궁금한 게 쌓였다. 무엇보다 그 계기와 과정, 소감을 듣고 싶었다.
  

# 만남

항암 치료 중인 유희 대표 ⓒ 김연식

    약속을 잡고 유희 대표의 집을 찾아갔다. 연락은 쉬이 닿지 않았지만, 인터뷰는 성격처럼 흔쾌히 수락했다. 선생은 인천 서구에 있는 아파트 5층에 산다. 거실에서 하천과 산책로가 가까이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집이다. 4월 어느 오후 5시. 초인종을 누르니 반려견 두 마리가 먼저 짖었다. 유희 선생은 강아지를 달래며 조금 상기된 얼굴로 필자를 맞았다. 항암 치료 탓에 탈모가 있는 모양이다. 선생은 브로치가 달린 모자를 썼고, 손님을 맞는다고 입술에 립스틱을 바르고 분을 조금 칠했다. 금목걸이와 반지, 귀걸이, 붉은색과 옥색으로 색을 번갈아 입힌 손톱에서 그가 본디 지키는 세련미가, 병중에도 제 색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보였다. 광선이 나올 것 같은 눈빛으로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던 생기 있는 모습은 없었다. 방덕의 독화살을 맞아 치료 중인 관우를 보는 느낌이었다. 군사들의 사기를 지키려 태연히 바둑을 두며 화타의 치료를 받던 영웅처럼, 유희 선생은 힘겹게 제 색을 붙잡고 있었다.
    몇 마디 말을 붙였다. 노인의 말은 앉은 자리에서 기억을 더듬는 까닭에 날것 그대로였다. 정확히 언제부터 몇 번 밥을 나눠 몇만 몇십만을 먹였는지 똑 부러지는 숫자로 내놓지 못했다. 이걸 경력이라 쌓고 자랑할 욕심이 없으니 훈장 세듯 일일이 셈하지 않은 까닭이다. 숫자는 뭉뚝하지만, 그의 말에는 오래 깊이 몸담았던 자만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현장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개인의 즉흥 기억에 의존하는 구술의 함정을 피하고자 신문 기사에 기록된 사실관계와 주변 사람들의 증언, 사진 등 객관적인 자료를 이정표 삼았다.
  

# 투병하신다고 들었다. 어떻게 지내시나

    안 그래도 오늘 아침부터 배가 심하게 아팠다. 인터뷰를 취소해야겠다 생각했는데, 너무 아파서 연락하는 것도 잊었다. 약 먹고 잠들었다. 오후에 일어나니 복통이 물러났다. 인터뷰해도 괜찮겠다 싶으면서도 다시 복통이 찾아올까 걱정이다. 어쨌든 지금은 괜찮으니 다행이다.
    5개월 전, 그러니까 2022년 11월에 암이라 선고받았다. 췌장암이란다. 3기를 지나 4기로 넘어가는 단계(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전이되는 단계)다. 이태 전부터 배가 살살 아팠다. 병원을 여기저기 가봤는데 하나같이 위장만 검사했다. 워낙 활기 넘치니까 아무도 암을 의심하지 않은 모양이다. 나 자신도 암은 상상도 못했다. 복통의 원인을 오래 못 찾으니 누가 권해서 CT를 찍었다. 국립암센터에 배우자와 아들 셋 모두 동행했다. 황당했다. 천하의 유희가 암이라니. 오진이라 생각했다. 가족도 안 믿었다.
    1959년생, 만 63세. 뭐, 암이 오자면 언제든 올 수 있지만, 난 아직 젊다. 며칠을 펑펑 울었다. 그 끝에 결심이 섰다. 남은 인생이 얼마든 밥을 나눌 수 있으면 더 나누고, 집회 없는 날엔 여행 다니며 즐겁게 보내자 다짐했다. 내가 앞길 창창하게 젊은 것도 아닌데 이 병 고치고 얼마나 더 살려고 병원에서 씨름하느니 당장 행복하게 보내다 가자 결심했다. 세 아들은 난리를 쳤다. 요새 약이 참 좋다며 어떻게든 병을 고치잔다.
    절충했다. 입원 대신 통원하며 반은 치료, 반은 하고 싶은 거 하며 산다. 월요일에 치료받고 오면 화, 수 이틀은 골골거린다. 목요일쯤 힘이 생기면 금, 토, 일은 밖에 나다닌다. 소식이 닿으면 집회 현장에도 간다. 지난 주말에는 경북 구미 아사히글라스 농성장에 다녀왔다. 봄이 한창이지만, 본래 꽃구경은 취미에 없다.
    다행히 경과가 좋다. 5개월 사이 암 크기가 3.7센티미터에서 2.2센티미터로 감소했다. 몸무게도 68킬로그램에서 48킬로그램까지 빠졌다가 요즘 55킬로그램으로 회복했다. 의사들이 하나같이 놀랍다고 한다. 다른 환자들과 다르게 구토하는 일도 없고 기력만 좀 빠져 있다. 이렇게 견디면 완쾌할 것 같은 희망이 있어 생기가 돈다. 다만 오늘은 아침부터 찾아온 복통에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일 것 같아 자존심이 굉장히 상한다. 약한 모습 꺼내고 싶지 않다. 동지들이 내 이런 모습을 본 적 없다. 보기에도 괄괄해 보이겠지만, 아프다고 약한 모습 내비치는 건 내 자존심이 절대로 허락 안 한다. 감기도 안 걸리는 내가 병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이거 원.
    ‘일단 앞에 과일 좀 드세요. 딱 1분만 시간을 주겠어요?’
    투병 과정을 설명하던 선생은 갑자기 말을 끊더니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인터뷰를 시작했는데 복통이 찾아온 건 아닌지 몸 상태가 걱정되었다.

    전국노점상연합회 수석부의장으로 활동한 유씨는 1995년부터 집회 현장에서 밥을 짓기 시작했다.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가 분신한 해였다. 박 열사로부터 직접 유언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한다. 유씨는 투쟁하던 장애인들을 위해 왕십리 시장에서 들통과 솥을 가져다 국밥을 끓였다.1

  

# 어쩌다 밥을 하게 되었나

    당시 전국노점상연합회(전노련)에서 활동했다. 앞에 나서서 열심히 했다. 나중에 수석부회장까지 했으니까. 나도 이십 대 때부터 청계천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공구도 팔고, 카메라도 팔았다. 당시엔 구청 직원들이 팔뚝에 ‘단속’이라는 완장을 차고 돈을 뜯어갔다. 진짜 공무원도 있고, 사기꾼도 있고. 여기저기 노점상을 괴롭히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노점상 총무를 맡아서 돈을 걷어 바쳤다. 그들은 돈을 뜯어가면서도 걸핏하면 노점을 철거한다고 협박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삶이었다. 그러다 노점상, 빈민운동을 하게 됐다.
    1995년 최정환 열사 분신 사건이 터졌다. 장애인이 직업을 갖기 힘든 시절에 노점이라도 해서 먹고살려는 사람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제 몸에 불을 붙였을까. 그 심정을 생각하니 죽을 것처럼 마음이 힘들었다. 최 열사가 안치된 강남성모병원(현 서울성모병원)에 사람들이 천 명쯤 모였다. 빈소에도 밥때는 어김없이 찾아오고, 그 많은 사람이 어디 갈 데도 없고, 그래도 일단 뭐든 먹어야 할 것 아닌가. 싸우는 것도 좋지만 먹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어찌 밥통과 들통을 구해다 국밥을 나눠줬다. 그게 시작이다.
  

# 나서기 쉽지 않았을 텐데, 성격인가

    엄마에게서 배웠다. 엄마가 그랬다. 남 굶는 꼴 못 보고, 밥해다주고, 쌀 갖다주고. 혼자 사는 게 아니라고 늘 내어줬다. 그냥 보면서 닮아간 것 같다. 그렇다고 네 자매가 똑같지는 않다. 네 자매의 둘째다. 보통 둘째 성격이 이러지 않은데, 언니가 동생 같고 내가 맏이 같다. 학교에서도 리더 역할이었다. 친구들 이끌고, 사회 보고, 무대 나가서 노래하고, 친구들 보듬고, 혼내고, 연애편지도 대신 써줬다.
    소위 ‘꼴통’이었다. 불의를 못 참았다. 어릴 때 별명이 만화영화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의 ‘베라’였다(TBC 동양방송이 1970년대 방영했던 만화영화.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는 소외되고 불쌍한 인간들을 지키는 정의 협객이다. 벰은 남성, 베라는 여성, 베로는 소년 캐릭터). 그런 비슷한 별명이 많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별명을 안 부른다. 어른으로 대접하고 어려워하고. 그럴 때 이제 나도 늙었구나 싶다.
  

# 밥은 어떻게 하나

창고의 주방 기구들 ⓒ 김연식

    밥은 집밥이다. 집에서 손수 준비하고 보온상자에 담아 나른다. 밥차에 발전기가 있지만, 오래 걸린다. 집에 장비를 다 갖추고 있다. 다용도실에 500인분 국 끓이는 들통이 여러 개다. 50인분 밥을 짓는 밥솥도 여럿이다.
    말을 끊고 창고를 어디 한번 보자 청했다. 문을 열자 식당에 있을 법한 주방 기구들이 빼곡했다. 선반에 구내식당에나 있는 대형 전기밥솥이 둘이나 있다. 성인 남성이 목욕해도 될 것 같은 들통이 하나 있는데, 러시아 전통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그 안에 조금 작은 통이 차곡차곡 들어 있었다. 고무대야, 소쿠리, 프라이팬, 반찬통도 같은 방법으로 있었다. 식당에 있는 물건을 죄다 모아놨는데, 요령 있게 잘 정리한 모습에서 노인의 깔끔한 성격과 오랜 경험이 엿보였다.
    100인분일 때는 코란도, 300인분까지는 에쿠스, 1,000인분이 필요할 때는 1톤 화물차를 불러 음식을 날랐다. 빈민운동이나 노인 요양원 봉사를 같이했던 사람들이 도와줬다. 그렇게 도운 사람이 열일곱이었다.
    한번은 울산 현대자동차 투쟁 현장에 갔다. 아직 밥차가 없던 때라 자가용 에쿠스에 밥을 가득 싣고 현장에 갔다. 세 아들이 돈 모아 사준 차다. 현대자동차 간부가 탈 법한 차가 들어오니 회사 경비며 경찰이며 길을 터줬는데, 내가 차에서 내려 밥통을 꺼내고 사람들을 먹이니 경찰들 표정이 얼마나 황당하던지. (웃음)
    밥을 하는 철칙이 있다. 밥 주는 사람은 기분 좋게 주고, 먹는 사람은 공짜 밥이라도 즐겁게 먹을 의무가 있다. 특히 이건 공짜 밥이기 때문에 기분 좋게 줘야 한다. 나누는 사람이 인상을 쓰면 먹는 사람이 얼마나 부담스럽겠는가. 힘들게 투쟁하는 사람인데. 그래서 같이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늘 웃으라고 당부한다. 내 기분이 어떻든, 오늘 집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든 밥 앞에서는 웃어야 한다. 주는 사람이든 먹는 사람이든. 팔이 아프지만 배식할 때는 무조건 웃는다. 밥 주는 게 보람 있기도 하고.
    밥을 준비하면 전날부터 힘들다. 그렇지만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면 힘든 게 싹 가신다. 보람을 느끼고. 저렇게 잘 먹는데 안 왔으면 어쨌을까. 잘 왔다. 내가 안 왔으면 추운 데서 덜덜 떨었을 텐데. 오기를 참 잘했다. 그렇게 오래 했으면서도 그 모습 보는 건 늘 좋다. 그게 내가 사는 맛이다.
    사람들이 비용을 궁금해한다. 밥은 무조건 내가 직접, 내 돈으로 한다. 누구 도움 바라며 시작한 것 아니다. 지금도 떡이며 떡국이며 다 내 돈으로 사서 나눠준다. 원래 장사를 해서 손이 크다. 많이 벌고, 번 것 다 쓰고, 그러다 장사 죄다 망하고 집도 팔아서 재개발 예정인 낡은 빌라에 살았다. 다행히 아들 셋이 다 잘 컸다. 젊은 나이에 각자 번듯하다. 그래서 엄마한테 돈을 많이 보태준다. 아들들이 여기 아파트를 사주면서 ‘밥 나누는 것 좀 안 하고 쉬라’고 했다. ‘수십 년간 해온 밥 나누는 일을 그만두는 건 삶의 희망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밥을 나누면서 느끼는 뿌듯함 때문에 이 일을 해야 한다고 아들들을 설득했다.
    어찌 알고 정기 후원해주시는 분이 30명 정도 되고, 종종 밥차를 보고 감동했다며 10만 원 정도 쾌척하는 분도 있다. 들어간 재료비에 턱없는 금액이지만, 나머지는 내가 내면 되고, 그게 어디서 나왔든 함께 수고해서 만들어낸 장면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는 게 뿌듯했다.
  

# 밥차가 생기다

    자가용으로 감당키 어려운 양이 됐을 때 밥묵차 멤버들이 ‘새로 밥차를 장만하자’며 후원을 받았다. 2016년 작은 푸드트럭 ‘밥묵차’가 탄생했다. 8명이던 밥묵차 멤버도 현재 17명으로 늘었다. 지금은 투병으로 쉬고 있지만, 활동을 멈추기 전까지 밥과 밥솥은 여전히 유씨 몫이었다.
    밥묵차는 추운 농성장에서 김밥 한 줄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이들에게 큰 힘이 됐다. 고등어 무조림, 제육볶음 같은 메인 메뉴에 김치, 계란말이 등 반찬이 나오는 집밥으로 하루 두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최성원 밥묵차 활동가는 “밥차가 오면 밝아지는 사람들 표정이 저희에겐 가장 큰 찬사”라며 “그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고된 것을 잊는다”고 했다.
    밥묵차의 밥은 허기를 채우는 것 이상의 일을 했다. 참석자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긴 싸움에 지쳐 있을 때 먹었던 유 씨의 집밥을 기억했다. 허지희 세종호텔 정리해고 노동자는 “추울 때 시래깃국 같은 따뜻한 국물을 주시면 일단 몸이 녹았다. 그럴 때 힘을 받고, 위로를 받고, 응원을 받았다”고 했다.2
    밥차가 생기면서 우리의 색도 생겼다. 화사한 주황색. 밥차 마련한 기념으로 미술 하는 아들이 앞치마를 그 색으로 맞춰줬다. 앞에 두르면 기분이 밝아진다. 밥차가 생기고 우리 활동반경은 더 넓어졌다. 2018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4박 5일 동안 서울에서 공동투쟁을 했다. 내내 쫓아다니면서 밥을 해 먹였다. 아침은 청와대에서 먹고 점심은 국회에서 먹고 저녁은 법원에서 먹었다. (웃음) 그때가 가장 힘들었지만, 보람이 컸다.
    
    유희 대표의 밥차는 전국을 누볐다. 강원도 골프장반대 투쟁 현장부터 부천 원종 종합복지관, 삼성, 쌍용차, 콜트콜텍, 코오롱, 풀무원, 구미 스타케미컬, 동양시멘트, 티브로드, 청주노인전문병원, 세종호텔, 사회보장정보원 등 셀 수 없다.

    이기든 지든 밥은 먹고 살아야 한다. 아침에 어디 갈까? 생각하다가 가야 할 농성장이 떠오르면 바로 준비한다. 백 명, 이백 명 정도는 혼자 감당할 수 있다. 냉장고 다 열어 놓고 반찬 준비하고, 밥하면 두 시간이면 된다. 쌀 10kg이면 백 명이 먹는다. 천 명이 먹으려면 100kg 이상, 두 가마니가 있어야 한다. 15인분 밥솥, 50인분 밥솥이 있다. 반찬? 큰 통 하나면 100명이 먹을 수 있다. 몇 명이 모인다고 하면 밥과 반찬을 얼마큼 해야 할지 그림이 나온다.3
 

# 현장은 어떻게 알고 가나

    딱히 연결고리가 있는 건 아니다. 민주노총이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같은 단체도 있지만, 주로 페이스북으로 알게 되어 움직인다. 소식을 들으면 같이 움직일 자원봉사자 일정이나 식자재 사정을 고려해 결정하는데, 전장연 집회는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참여한다. 장애인들은 어디 가서 밥을 먹기 더 힘드니까. 친정 같은 곳이기도 하고.
    농성장에 밥을 가져가면 오히려 투쟁하는 동지들이 ‘아줌마, 사장님, 이모’라 부른다. 다짜고짜 ‘장사하러 왔냐, 밥값은 얼마냐’ 묻는다. 장사 아니고 공짜라고 하면 의심스러운 눈치로 ‘어디서 왔냐, 밥 이거 누가 보내냐, 돈은 누가 주냐’ 묻는다. 그러면 나는 ‘밥은 하늘이고, 누구나 다 먹을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 중 하나를 내가 받아서 하는 거다. 돈은 우리 아들이 잘 벌어서 도와주는 거다. 나는 당신들의 아줌마가 아니고, 사장님도 아니고, 이모도 아니다. 당신들과 같이 싸우는 동지이기에 이렇게 온 거다. 왜 왔냐고 묻지 마라. 맛있게 먹기만 해라’ 말한다.
    그러면 머쓱하다가도 밥을 먹고 나면 다들 마음이 녹는다. ‘아줌마, 사장님, 이모’ 하던 사람들이 오랜 투쟁으로 힘을 잃었을 때 내 밥에 다시 힘을 내 싸운다는 글까지 쓴다. 그 글에 나도 눈물이 나고. 서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람이 밥 한 그릇에 그렇게 마음을 열고 힘을 낸다. 그쯤이면 사람들은 나를 밥으로만 보지 않는다. 동지가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이거다. 목적이 뭐겠냐. 밥에는 목적이 없다. 무조건적인 거다. 굳이 의미를 붙이자면 그저 굶지 말고 건강히 투쟁하라는 거다. 만날 컵라면에 김밥 먹을 때, 그런 때 따끈한 밥을 내놓는 건 구세주다. 밥에 목적이 있으면 안 된다. 밥은 무조건적인 것이다.
    밥을 나누면서 나도 점점 성장한 것 같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사람이니 싸워도 같이 싸워야 버틸 수 있다. 함께하는 가치를 배운다. 자본가 중심의 세상을 바꾸는 아주 작은 역할을 한다는 뿌듯함도 있다.
 

# 인천은 언제 어떻게 오게 되었나

    인천에 온 지는 20년쯤 되었다. 원래 서울 금호동에 살았다. 형부가 돌아가시면서 언니가 우울증이 심했다. 언니 하나 살리자는 생각에 계양구 효성동에 왔다. 왔는데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부평문화의 거리에서 작은 카페를 8년 운영했다. 노래도 하고 주방 일도 겸했다. 카페에서 새벽 3시에 퇴근하고 두세 시간 잔 뒤 아침에 몇백 명분 밥을 해서 연대를 나갔다. 잠이 모자라 버틸 수가 없었다. 카페를 접은 뒤엔 부평동에서 노래방을 시작했다. 학생노래방이었는데 금방 망했다. 그러다 효성동에 ‘주마등’이라는 민속주점을 차렸다. 민속주점은 주로 서울에서 집회하고 마친, 멀리서 온 동지들 먹이고 재우는 공간이었다.
    인천에 오면서 인봉봉사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노인 요양원에 가서 어르신들 목욕시켜드리고 공연도 하는 봉사단체다. 나는 사회자 겸 가수로 활약했다. 어제는 조끼를 입고 데모 현장에 있다가, 오늘은 짧은 치마에 부츠를 신고 요양원에 있는 어르신들 앞에서 트로트를 불렀다. 겨울이면 연탄 기금을 모으고 봉사활동도 했다. 정말 바쁘고 신명 나게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대우자동차판매’ 후원주점에 갔는데, 거기서 누가 바로 옆에 콜트콜텍 농성장이 있다고 설명했다. 캄캄해져서 농성장에 갔더니 꼴이 말들이 아니다. 그걸 보는 게 너무 괴로웠다. 세상에, 공장에서 쫓겨나 농성하는 사람이 내 머리맡에서 이러고 있는데 까맣게 몰랐다니. 바로 옆을 못 봤구나. 가슴을 쳤다. 그날 이후 거의 매일 밥해다줬다. 임재춘 씨가 요리를 잘하기도 해서 같이 이것저것 만들었다.

    1995년 11월 24일엔 인천 연수구 아암도에서 변사체가 발견된다. 장애인빈민운동가 이덕인이었다. 발견 당시 그이는 얼굴 부위와 어깨 등에 피멍 든 상처가 있고 윗도리와 신발은 벗겨져 있었으며 두 손은 밧줄로 포박된 상태였다. 당시 나이 만 28세였다. 인천시와 연수구는 아암도에 친수공간을 조성한다며 용역 1,500여 명을 투입해 그곳에서 생계를 꾸려 가던 노점상들을 철거했다.
    이덕인은 장애인, 노점상인들과 함께 망루 위에 올랐다. 경찰은 초겨울의 추운 날씨에도 소방차를 동원해 망루에 물대포를 쏘고 돌멩이를 던졌다. 또한 경찰은 음식물 반입을 막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했다. 25일 밤 그이는 고립된 망루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자 경찰 포위망을 뚫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런데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4

    인천은 집을 옮기기 전에도 자주 왔다. 대표적으로 이덕인 열사 사건이 있다. 장애인 노점상인데, 단속에 맞서 망루를 쳐서 올라갔다. 그러다 경찰들에게 두들겨 맞아서 숨졌다. 바다에 버려졌는데 포승줄에 손이 묶인 시신이 밀물에 아암도로 쓸려왔다. 시신을 길병원으로 옮긴 우리는 6개월 동안 집에 안 들어가고 투쟁했다. 당시 인하대, 인천대 학우들이 힘을 보탰다. 나는 이 사람들의 밥을 챙겼다. 당시 대학생이던 친구들이 나이 들어 요즘 만나면 내게 ‘언니 때문에 누님 때문에 신세 망쳤다’라고 한다. 내 밥 먹고 운동에 묶였다나.
 

# 〈토요일은 밥이 좋아〉 행사도 인천과의 인연에서 시작했나

2023년 1월에 열린 〈토요일은 밥이 좋아〉 행사장의 유희 대표 ⓒ 십시일반 밥묵차.

    지난 14일 오후 2시 인천 부평구 민주노총 인천지부 지하강당에 모인 80여명이 함성을 쏟아냈다. 모두가 한 사람을 바라봤다. <토요일은 밥이 좋아> 응원회의 주인공, 유희씨(64)였다.
    이날 모인 노동자와 인권운동가들은 “집회 현장 어디를 가도 유씨가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대한민국에서 투쟁하는 사람치고 유희 동지 밥 안 먹어본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 밥 먹고 컸고, 복직했습니다.” 한진중공업의 마지막 해고노동자 김진숙씨도 유씨가 투쟁 현장에서 건넨 밥을 기억하는 응원 영상을 보내왔다.5

    딱히 이덕인 열사 길병원 투쟁 때문은 아니지만, 그때 인천지역 활동가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자식들 데리고 토요일 행사에 참석했다. 몸이 무척 힘들었는데, 나를 위한 자리였으니 힘을 내서 갔다. 죽어서 기억해주면 뭐 해, 쑥스럽지만 차라리 살아 있을 때 그런 자리에 가니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옛 동지들도 보니 좋았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좋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간 아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늘 엄마가 자랑스럽긴 했지만, 엄마 참 잘 살았다’고 말했다. 행사에서 사람들이 엄마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너무 자랑스럽다, 신문에 나온 걸 보면서 친구들에게 자랑한다고. 아들 셋이 그 이야기를 하는데, 눈물이 났다.
    보통 밖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집에서는 대우를 못 받는다. 나도 젊었을 때 하도 수배를 많이 당해서 집을 자주 비웠다. 앞에서 사회를 보니까 늘 수배 1순위였다. 주동자라고. 경찰서에서는 아니라고 잡아뗐는데, 녹음 들어보니까 내가 주도하긴 했더라고. 아무튼, 그날 가족의 인정을 받으니 뿌듯했다. 뭐, 어렸을 때 엄마 손을 못 타서 미안하긴 하지만, 아들들도 지금은 엄마 자랑하고 다니니 뭐, 된 거 아닌가. (웃음)
 

# 병중에 외람되지만, ‘묘비명’을 생각해봤나

    ‘밥은 하늘이다.’ 딱 한마디다. 모든 것의 근본 이유는 밥이다. 밥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 밥은 하늘이고, 밥은 힘이고, 밥은 사랑이다. 뭘 해달라는 게 아니다. 밥은 하늘이라는 걸 가슴에 새겨달라. 밥은 누구에게나 다 필요한 거다. 다 같이 밥을 먹기 위해서는 너도 십시일반하고 나도 십시일반해서 이 하늘을 서로 나누는 거지.
    저 편하게 살고, 느긋하게 살고, 이만큼 했으니 가족을 위해 편하게 살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도 그런다. 가족을 돌보는 건 중요한데, 한 번만 돌아보면 우리가 돌볼 사람이 많다. 나만 잘살겠다 생각 말고, 그런 사람들에게 베풀자.
    집회하는 사람들, 늘 많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유가족, 길바닥에서 집회하는 사람들 보면 그 사람들의 애달픈 마음, 애절한 마음을 조금은 역지사지하며 헤아려보자. 그러면 생각보다 당신이 따뜻한 마음을 줄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우리가 운동하고 밥을 나누는 것도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거다. 조금만 따뜻한 시선을 가져주면 좋은 세상이 더 빨리 오지 않을까.
    암을 고치려 하고 있지만, 지난 삶에 후회 없다. 순간순간 뜨거웠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대충했다면 미련이 남겠지만, 늘 모든 걸 다 끌어올렸으니 아쉬움 없다. 세상 참 치사하지. 나처럼 누릴 거 다 누린 사람이 어디 있어. 오늘 바로 죽어도 여한 없다. 그저 너무 많이 아프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길바닥 투쟁 현장에 선 수천 명에게 수만 끼를 나눈 유희 대표는 ‘나눔’을 ‘누렸다’고 말했다.
    

십시일반 음식연대 밥묵차 활동가들과 유희 대표 (오른쪽 두 번째). ⓒ 십시일반 밥묵차.

 
 

〈주석〉

  1. 「“밥은 하늘”⋯밥심으로 투쟁하던 이들이 기억하는 ‘밥묵차’」, 《경향신문》, 2023. 1. 15.
  2. 위의 기사.
  3. 「유희 씨 인터뷰: 집회 현장마다 ‘밥’ 챙겨주는 유희 씨, 아들이 운동하다 잡혀가면 사식 넣어주는 게 꿈」, 《오마이뉴스》, 2016. 7. 30.
  4. 위의 기사.
  5. 《경향신문》 앞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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