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국극, 그 꿈과 환상의 세계

  

여성국극과의 만남

    오랜만에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을 다시 보았다.
    2012년에 완성했으니 벌써 10년이 넘었다. 화면에는 2008년부터 5년여의 시간 동안 여성국극 공연과 배우들을 쫓아다녔던 우리들의 젊었던 한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에도 일흔을 훌쩍 넘긴 배우들이 대부분이어서 그사이 몇 분은 세상을 떠나셨다. 시간의 흐름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온몸을 적신다.
    당시 나는 막 여성학 박사과정에 입학한 참이었다. 문화연구의 세례를 받은 한국의 인문학계가 일제에 의한 식민지기를 근대성과 소비문화라는 키워드로 새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이 한창일 때였다. 그런 흐름은 해방 후 1950년대를 다르게 보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졌다. 여성사에서는 전쟁과 빈곤으로만 상상되는 1950년대 여성의 경제 활동에 주목한 연구가 나왔고, 영화 및 문화연구에서는 전근대성과 근대성이 경합하던 이 시기 여성성과 남성성의 재현을 둘러싼 문화정치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등장했다. 이런 연구들에 매혹된 나는 틈만 나면 1950년대 신문과 잡지를 뒤지며 연구 소재를 찾고 주제를 고민했다.
    그런 어느 날, 그전까지 듣도 보도 못한 ‘여성국극’ 홍보 포스터가 신문 지상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성들이 남역까지 도맡아 하는 창극의 일종이라고 했다. 일단 포스터를 뚫고 나올 듯한 화려한 비주얼에 압도되었다. 이렇게 화려한 극이 1950년대에 계속 인기몰이를 하면서 무대에 올려졌다니 신기했다. 혹시 연구물이 있을까 하여 찾아보았더니 학위 논문을 포함해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대부분 창극사에 곁들여 연구한 것이지 여성국극 자체를 다룬 연구는 1편의 연구 논문이 전부였다.1
    호기심이 일었다. 해방과 미군정, 독재와 전쟁, 살육과 굶주림이 지배하던 1940, 50년대의 한반도에서 번쩍이는 의상을 차려입고 무대를 호령하던 이 여성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런 무대에 서서 돈을 벌고 인기를 얻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왜 나는 이런 극예술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까. 그녀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다큐멘터리 〈왕자가 된 소녀들〉 포스터. 제공: 문화기획집단 ‘영희야놀자’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1950년대라는 시대적 맥락에서 여성국극과 그녀들을 제대로 해석하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진 듯한 이 여성들을 세상에 다시 내보이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옛 국극 배우들이 정기적으로 공연을 무대에 올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2007년 가을 여성국극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다. 놀라웠다. 사실 옛 포스터의 비주얼에 압도되긴 했어도 공연의 질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60여 년 전 국극이 인기를 모았던 때에 비하면 반짝반짝하고 화려한 볼거리들이 넘쳐나는 시대가 아닌가. 이런저런 공연을 꽤 보러 다녔다고 자부한 나는 여성국극의 역사적, 여성학적 가치에는 기대를 가졌지만 공연 자체는 촌스러울 것이라고, 그러니 너무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을 한 터였다. 웬걸, 공연은 충분히 볼만했다. 무엇보다 고령의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가 압도적이었다. 특히 남역 배우들의 연기는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남자 배우 못지않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았다. 젊었을 적부터 단련된, 그러나 이제는 나이 든 여자의 신체로 펼치는 남성 역할 연기는 그들이 젊었을 때 왜 그렇게 인기를 모았는지 단박에 이해될 만큼 멋진 것이었다.
    연구만 하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공연을 보러 간 친구를 꼬드겼다. 마침 그녀는 영국에서 문화연구를 전공하고 돌아와 영화로 진로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소규모 드라마 제작사에서 일하던 다른 친구와 영화와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후배들을 끌어들이면서 일이 커졌다. 단편영화 제작 경험이 전부였던 우리들은 다큐멘터리 완성에 몇 년이 걸릴지 예상도 하지 않고 무작정 국극 배우들을 찾아 나섰다.
  

애타게, 여성국극의 그녀들을 찾아서

    ‘국극보존회’는 이런 과정에서 만나게 된 모임이었다. 당시 예순을 넘긴, 생존 여성국극 배우들 중에서는 가장 젊었던 이옥천과 팬들이 주축이었던 ‘국극보존회’는 여성국극을 처음 들어본다는 우리들을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한 달에 한 번, 생존 국극 배우들과 팬들이 모여 함께 음식을 해 먹고 옛 추억과 현재 이런저런 사정을 나눴던 이 모임은 배우들의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노래와 춤, 간이 공연으로 저녁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다.
    이처럼 5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각별한 관계를 유지할 정도로 여성국극의 배우와 팬 관계는 특별한 것이었다. 우리 또한 대중문화의 시대에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만큼 연예인에 대한 팬심을 충분히 경험해보았지만 1950년대부터 시작된 이토록 뜨거운 팬심이라니!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혈서로 쓴 팬레터, 팬이었다가 가출해서 국극단에 입단해 배우가 된 이, 남편 될 사람에게 여성국극 배우 팬으로서의 활동(?)을 보장받고 결혼한 이 등 그 열정이 지금도 느껴지는 사례들이 속출했다. 어떤 팬은 남역 배우와의 가상 결혼식을 꿈꾸며 사진을 찍자고 조르기도 했다.

조금앵과 팬의 가상 결혼식 사진. 〈왕자가 된 소녀들〉에서 캡처.

    이 사진에서 신랑은 남역 배우로 유명한 조금앵이다. 그녀는 남역 주연으로 인기가 높았는데 특히 칼싸움 연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젖먹이가 있었던 한 팬이 결혼식 사진을 찍고 싶다고 청하자 쾌히 응한 조금앵은 실제로는 결혼한 적이 없었다. 동거남들과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낳았지만 결혼식을 올린 적이 없는 그녀의 유일한 결혼식 사진이 이 사진인 셈이다. 여성 하객들은 모두 국극단 단원들이었다.
    여성 팬들은 왜 남역 배우들에게 빠져들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설득력 있는 연구들이 축적되어 있다. 연극평론가 김지혜는 남녀유별문화와 보수적 성 관념 때문에 결혼 전까지 남성들과 자유롭게 친교를 맺을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여성 배우와 여성 팬 간의 밀도 높은 친밀관계가 안전하게 여겨졌다고 본다. 특히 실제 남성보다 더 멋진 남성 역할을 거뜬히 해내는 남역 배우에 대한 선망과 애정은 이성애적 욕망을 넘어서 동성애적 실천으로 이어지기도 했다.2 국문학자 이화진은 가부장제 사회의 젠더 규범을 뛰어넘는 남역 배우의 신체와 퍼포먼스가 여성들에게 쾌락을 안겨주었다고 지적한다.3 이는 김지혜가 지적한바 다양한 여성 관객들에게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여성국극공동체로 이어졌다.4
    그렇다면 여성국극은 여성들만 열광하는 극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만난 남성 팬들은 여성 팬 못지않게 열성적이었다. 이들은 주로 여역 배우의 팬들로서 전설적인 여역 배우 김진진과 그 팬들의 경우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배우 이정섭은 김진진의 팬으로 유명한데 1990년대 여성국극 〈진진의 사랑〉을 직접 연출해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우리를 만난 그는 김진진의 팬으로 국극을 보러 다녔던 때부터 자신의 연기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가부장제 사회의 젠더 규범은 여성들에게만 억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많은 남성들에게도 남성 젠더 규범은 자신다울 수 없는 족쇄로 여겨지는 것이다. 이런 이들에게 곱디고우면서도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면모가 돋보인 국극의 여역 배우들은 젠더 규범을 뛰어넘어 자신다울 수 있는 롤모델로 여겨진 것이리라. 이에 대한 연구를 기약해본다.
  

상고 시대 환상극에 새겨진 욕망

    팬들이 열광한 늠름하고 용맹스러운 남성과 곱디곱지만 다부진 여성이라는 한 쌍은 신라 시대나 삼국 시대, 그도 아니면 시대를 알 수 없는 상고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여러 고난과 시련을 겪고 마침내 혼인에 이른다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주인공들이었다. 즉 팬들을 사로잡은 것은 배우뿐만 아니라 상고 시대 배경의 로맨스 환상극이라는 서사 형식이기도 했다.
    창극이 판소리의 주요 레퍼토리를 극화하면서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여성국극도 〈춘향전〉을 극화한 〈옥중화〉(1948)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성공하지 못했다. 여성국극을 알린 것은 그 이듬해 대성공을 거둔 오페라 〈투란도트〉를 번안한 〈햇님과 달님〉과 후속편 〈황금돼지〉였다. 이후에도 성공을 거둔 여성국극의 대표작들은 신라나 삼국 시대 그도 아니면 상고 시대를 배경으로 선한 남성 영웅의 모험과 그 보상으로서의 혼인을 그린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전후 재건이 겹친 시대에 왜 이런 이야기가 인기를 끌었을까.
    국문학자 이화진은 여성국극의 환상적 로맨스를 식민지 시기 악극들이 이미 구현한 바 있는 ‘동양주의’와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악극들이 재현한 환상적인 동양성은 일제와 식민지 조선의 문화적 친연성을 강조하며 ‘대동아전쟁’의 기치를 뒷받침했다. 게다가 해방 후에도 몇몇 레퍼토리들은 별 갈등 없이 공연되었고 심지어 민족정신의 정수를 그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5 여성국극에서 판소리 레퍼토리보다 상고 시대 로맨스 환상극이 전형적인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다는 것은 제국에 복무하는 감수성으로서의 동양주의적 환상극이 이 시기 새로운 냉전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재활성화된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갖게 한다. 이화진이 지적한 대로 1949년 공연된 〈햇님과 달님〉은 “유엔한국위원단 환영위원회 접대부”가 후원한 극으로서 유엔한국위원단의 수석비서Principal Secretary 에곤 베르트하이머Egon Ranshofen Wertheimer의 평이 남아 있다. 그는 시종일관 극의 “동양적인 정서 표현”에 감탄하면서 화려한 의상과 연기를 “구미각국에서 차저볼 수 없다”고 평한다. 이는 당시 제작진인 여성국악동호회와 외무부를 고무시켰다고 한다.6
    전쟁과 뒤이은 분단 상황에서 삼국 시대와 삼국을 통일한 신라 시대, 혹은 한반도의 분단과 상관없는 상고 시대라는 재현은 역설적으로 당시의 현재적 상황을 환기시키며 통일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7 여성이 연기하는, 남자보다 더 남자다운 영웅과 고귀하고 현명한 여성 주인공은 당시 대중이 놓인 난세를 상상적으로나마 극복하고자 한 열망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여성국극의 모든 레퍼토리는 행복한 혼인이라는 해피엔딩을 채택했다.
  

다시 살아나는 여성국극의 꿈

  

여성국극 〈여의주〉의 한 장면. 제공: 문화기획집단 ‘영희야놀자’

    이렇듯 1950년대 전성기를 누린 여성국극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이미 여러 연구들이 지적한 바대로 복합적이다. 배우들이 모두 여성들이었기에 극의 운영도 여성들이 주도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 극단 운영과 공연 기획, 제작 및 대본 작업은 전적으로 남성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극단 운영은 소위 ‘주먹 세계’와 연결된 남성들이, 그 외 극의 만듦새는 남성 전문가들이 주도했다.8 우리가 만난 배우들은 사업부의 남성들이 자신들의 공연으로 돈을 벌어 집을 가장 먼저 산 이들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성국극단들은 여성들을 공연 전문 인력으로 양성하는 시스템을 만들지 못했다. 남역 스타 배우들이 결혼, 임신, 출산, 양육을 하던 시기 여성국극의 인기가 급속도로 식어간 이유다.
    한편 영화와 컬러 TV의 보급으로 전후 대중들의 감수성이 계층, 세대, 성별로 분화되고 다변화되어가면서 모든 세대와 성별을 아우르면서 웃음과 눈물을 선사한 창극과 악극, 국극의 시대는 저물어갔다. 창극은 1962년 국립국극단으로 살길을 찾았지만 그 또한 대중들과 호흡하는 본연의 길은 아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가적 보호가 없이는 새로운 문화산업의 시대에 더 이상 생존할 수 없게 된 극단들은 옛 향수를 찾는 나이 든 이들을 대상으로 지방과 간이 무대에 오르며 서서히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마침 1960년대는 강력한 가부장적 정치권력의 시대였고, 남성과 여성의 자리는 분명히 구분되었다. 이순신과 신사임당이 용맹한 남성과 현모양처 여성으로 불려 나와 재발명된 것이 그 좋은 예다. 이런 시대에 젠더 교란을 매력으로 하는 환상과 해피엔딩 서사로서의 여성국극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줄 알았던 여성국극이 최근 몇 년 사이 부쩍 눈에 띈다. 예전 그대로의 극은 아니지만 비디오아티스트의 작품으로, 드랙쇼의 테마로, 웹툰으로, 그 웹툰을 기반으로 한 창극으로 우리 곁을 다시 찾아오고 있다. 연극계 성폭력 고발 이후 증가하고 있는 ‘젠더프리’ 극의 실험과 함께 이 시대 대중들의 젠더를 둘러싼 여러 열망들을 반영하는 하나의 선례로서 재소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가능성을 포착해 서툰 방식으로나마 알리고자 했던 사람으로서 여성국극의 부활은 정말이지 눈물겹도록 반가운 일이다. 배우들과 팬들을 만나면서 감염되듯 전달받았던 그들의 열정과 꿈이 이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재발명되길 바랄 뿐이다.
 
 

〈주석〉

  1. 백현미, 「1950년대 여성국극의 성정치성」, 『한국극예술연구』 제12집, 2000.
  2. 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공동체의 동성친밀성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학』 제26권 제1호, 2010, 102~115쪽.
  3. 이화진, 「여성국극의 ‘오리엔탈 로맨스’와 (비)역사적 상상력」, 『한국극예술연구』 제43집, 2014, 190쪽.
  4. 김지혜, 앞의 글, 115~121쪽.
  5. 이화진, 앞의 글, 175쪽.
  6. 위의 글, 176~178쪽.
  7. 김유미, 「1950년대 여성국극에 나타난 대중역사극의 변화─〈서동과 공주〉, 〈눈 우에 피는 꽃〉, 〈백호와 여장부〉의 성역할을 중심으로」, 『어문논집』 제57호, 2008.
  8. 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의 단체활동과 쇠퇴과정에 대한 연구」, 『한국여성학』 제27권 제2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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