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이 아닌,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김혜정·문이소·박영란·박하령·황유미, 『극복하고 싶지 않아』, 마음이음, 2022.

    『극복하고 싶지 않아』는 장애를 키워드로 한 청소년소설 앤솔러지다. 책을 처음 잡았을 때는 장애를 주제로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모은 만큼 뭔가 색다른 시각, 새로운 참조점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책을 읽고 오히려 마음이 복잡해졌다. 문이소의 「402호에 이사왔대」를 제외한 다른 작품들은 특기할 만한 점이 없는데다 몇몇 작품은 오히려 이전 시기로 퇴보한 모습을 보이거나 장애에 대한 또 다른 편견을 보이는 작품도 있어 답답했기 때문이다.
    「402호에 이사왔대」는 지구에서 빛의 속도로 15만 년 정도 떨어진 ‘야나후’라는 행성에서 지구로 체험 학습을 온 외계 생명체가 먹지 말아야 할 유제품을 먹고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을 코믹하게 그린다. 302호에 사는 배키(백희율)는 402호에 찾아온 외계 생명체에게 ‘계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꿀 알바’의 냄새를 따라 계인이 원하는 홍대 문화 체험에 나선다. 그러나 ‘휠체어로 지하철을 타러 가는 것부터 고난의 행군’이고 아등바등 겨우 탄 지하철에서는 “휠체어 전용 칸이 있는데 서로 불편하게”라는 말을 듣고 얼굴을 붉힌다. 무엇보다 “5분이면 갈 거리를 30분은 가야” 하는 지하철 구조는 우리 사회의 기반 시스템이 장애인에 대한 배려는커녕, 애초에 장애인을 고려의 대상에 넣지 않고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계인은 말한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왜 그래야 합니까?”
    이 작품은 SF라는 장르를 영리하게 활용, 장애를 색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소설 속 계인에게 장애는 특별히 불행한 것이 아니다. 그가 유제품을 먹고 다리에 영구 손상을 입은 것처럼, 장애는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사고다. 그리고 그가 사는 야나후에는 못 걷는 신체를 위한 장비나 시설이 충분한 듯하다. 그래서 홍대에 가지 못한다는 배키에게 계인은 묻는다. “네? 지구에는 못 걷는 신체를 위한 장비나 시설이 없습니까?” 이후 이어지는 둘의 행보는 장애인을 힘들게 하는 것은 장애 자체보다 장애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구축된 우리 사회의 기반 시스템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시스템 구축 시 장애인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가 장애인을 ‘없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철저하게 비장애인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회 시스템은 장애인을 집이나 시설에 가둔다.
    패스트푸드점의 키오스크도 매장의 테이블 배치도 비장애인만을 고려해 만든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없는 셈’ 칠 뿐 아니라, 정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 번도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상상한 시혜적 도움을 베푼다. 계인과 배키가 지하철에서 만난 장애인은 이런 지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도움을 주는 곳은 없습니까?”
    “음, 도움이 필요한 분들도 있지. 그런데 난 도움이 아니라 시스템이 필요해. 도움이 없어도 내가 성실하게 살면 살아갈 수 있게 말야. 학생도 그렇잖아. 도움받지 않아도 안전하게 버스며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거.” (57~58쪽.)

    도움이 아닌, 시스템을 원한다는 말. 이보다 더 명징한 의사 표현이 있을까. 재난, 혹은 그에 준하는 어려움에 직면한 사람들을 찾아가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는 것은 자신의 선함을 전시하기 위한 기만이다. 도움이 아닌 시스템을 원한다는 말은, 그런 사람들과 그런 시스템에 맞서 스스로 일어나겠다는 말이자, 더 이상 당신들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지 않겠다는 명확한 자기표현이다. 아니나 다를까, 계인이 인과를 조정해 지하철 아저씨가 절박하게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었을 때 아저씨의 다리는 여전히 불편한 상태 그대로이다. 그가 가장 원했던 바는 팔다리를 고치는 게 아니라 직업을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어설픈 우리의 선의는 곧잘 폭력이 된다. 「402호에 이사왔대」는 묻는다. 당신의 선의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고. 만약 그 방향이 의심된다면 상대에게 물어봐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앤솔러지의 표제작인 「극복하고 싶지 않아」는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작품이다. 그간 장애를 소재로 한 우리 아동청소년 서사가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고, 전형적인 고난 극복의 서사 혹은 장애인 성공 서사를 주로 써왔다면 이 작품, 정확하게는 이 작품의 제목에 이르러 장애는 비로소 극복의 대상이 아닌, 그 자체로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된다. 하지만 실제 작품은 제목의 의미와 무게를 현실적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내지 못하고 결국 다소 뻔한 성공 서사로 마무리되어 아쉬움을 남긴다. 리릭시스트가 가사를 써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 주인공 지형은 처음부터 가사를 쓰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자리는 무대가 아닌 책상 앞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지형이 굳이 핸디랩을 해서라도 무대에 선다는 결말은 지금의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 나는 무언가를 극복해야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제목과는 다소 어긋난다.
    「금을 긋다」는 비장애인으로 살다가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해인이가 학교에 복귀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교복 모델까지 했던 해인이는 사고 후 자신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학교 시설은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불편한 점들이 생기고 형우가 해인이의 도우미가 된다. 언젠가부터 형우는 해인이의 휠체어를 밀면서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새치기를 하는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해인이도 서서히 익숙해지는데, 학교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는 일을 기점으로 이야기는 돌이키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후 ‘장애를 빌미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의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이야기는 해인이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바로 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작품은 표면적인 서사만 따라 읽을 때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장애 카르텔’,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면서 작품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가를 짚어보면 이 이야기가 얼마나 위험한 지점에 서 있는지 보인다.

    어쩌면 나를 차별한 첫 번째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먼저 장애라는 금을 긋고 내가 먼저 나를 방어하기 위해 도움이나 혜택을 바라고 더 나아가 권력의 형태로 위세를 떨었던 거다. (30쪽.)

    주인공 해인의 자아 성찰 내용은 얼핏 보면 고개를 끄덕일 내용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기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너무 많다. 장애등급제나 탈시설 문제, 이동권 문제는 그야말로 장애인의 생존이 걸린 문제다. 지하철 리프트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죽은 장애인들, 시설에 갇혀 평생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장애인들의 문제는 정말 장애인 개인의 문제일까? 개인이 각성하고 스스로를 장애인이라고 생각하는 ‘피해의식(9쪽.)’에서 벗어나면 문제가 해결될까? 각성하고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금 밖으로 나온 장애인은 어떻게 지하철을 타야 할까? 내가 생각을 바꾸면 이동권 문제가, 시설 감금 문제가 해결되는가? 그리고 장애인이 얼마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시스템을 설계할 때 장애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우리의 무신경함은 바뀔까? 장애인들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도움이나 혜택을 바란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장애인 당사자의 입에서 나왔을까, 보수를 자처하는 주류 언론에서 나왔을까?
    장애인은 도움이 아니라 시스템을 원한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에서 끊임없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다리가 불편해도 휠체어를 타고 밖에 나갈 수 있고 내가 가고 싶고 가야만 하는 곳에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교통 연계 시스템. 그들이 지하철을 멈춘 이유는 도움이나 혜택을 바라서가 아니다. 5분 거리를 30분 넘게 죽을힘을 다해 가지 않아도 되는, 가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얻기 위해 달리는 지하철을 세웠다.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최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어떤 방법이 있을까, 오래 생각해봤지만 나는 답을 얻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리 청소년들이 장애인을 도움이나 혜택을 바라는 사람으로 인지할까봐 두렵다. 전장연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불법적인 카르텔을 형성하고 권력을 쥐고 흔들려는 집단으로 이해할까봐 무섭다. 한번 그렇게 씌워진 프레임은 건널 수 없는 강을 만든다. ‘그들과 다른 나’는 늘 이렇게 작은 오해에서 시작된다. 장애인이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서 아이들은 안전하게 자랄 수 있을까? LGBT를 핍박하는 사회가 아이들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을까? 아동청소년문학은 지금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가장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섣부른 도움을 베푸는 대신 아이들에게, 당사자에게 물어야 한다. 묻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진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말하고 싶다. 장애인은 도움이 아닌, 시스템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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