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과 4월 사이에서─2023년 겨울호

    

    사건이 일어나면 원인cause을 무효화시키는 해결로 나아간다. 논란이 생기면 가짜뉴스 운운하며 원인을 없애고, 문제가 생기면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면서 원인은 굳이 규명하지 않는다. 책임의 무중력 상태에서 답답함을 호소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이태원 참사에서 여실히 드러난 이 정부의 무책임한 모습은 최근 행정전산망 사태에 이르기까지 무력하기 짝이 없다.
    한국 근대 사회의 성장 방식의 주된 흐름은 경쟁이었다. 경쟁은 성과와 효율성을 중시한다. 원인보다 성과와 효율을 중시하면 시민적 삶의 기반은 빈약해진다. 성적이 오르는 과정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사교육의 특수한 전략이 되고, K-컬처의 힘은 문화적 토대의 산물이 아니라 스타와 소속사의 개별적 경쟁력이 된다. 노동자의 죽음은 산업의 금자탑에 묻히고, 시민의 희생은 망각의 탑에 묻혀버린다. 한 인간의 가치가 한국에서 어떤 의미인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지표가 자살률과 출산율 아닌가.
  

아동청소년문학의 새로운 가치들, 그리고 역사와 예술 속 낯선 기획들

    『작가들』은 이 겨울에 근대성과 성장이라는 열쇳말로 살펴본 아동청소년문학을 〈특집〉 무대에 올려보았다. 김지은은 2000년대에서 2020년대까지 발표된 아동청소년문학 전반을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배치하면서, 단일한 가치를 복수의 가치들로 전환하는 ‘좁고 친밀하고 안전한 서사’를 요청한다. 김유진은 어린이 동시계의 자장을 흔들어놓았던 최승호의 ‘『말놀이 동시집』 이후’의 동시가 살펴야 할 이론적 구도를 기표의 우위, 난해성과 모호성, 독자의 개념 등으로 꼽으면서 새로운 개별 어린이 독자의 상을 찾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진기환은 어른 중심으로 틀 지워진 죄의식의 구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주체로 탄생한 청소년을 그린 백온유의 작품을 성장과 죄의식의 문제를 재발견하는 계기로 다루었다.
    초점은 다르지만 아동청소년문학에 대한 비평적 관심은 〈노마네〉에 실린 「돌봄의 자리를 탐색하는 청소년문학」으로 이어질 수도 있겠다. 김젬마는 백온유의 『페퍼민트』, 김려령의 『모두의 연수』, 최정원의 『저희는 이 행성을 떠납니다』를 통해 돌봄을 우리 모두의 상호의존성을 환기하는 문제로 제기하였다.

    〈비평〉에서 정주아는 역사 서사물의 계보를 잇는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범도』에 주목하여 낯익은 소재에 숨은 낯선 방식을 읽어낸다. 문종필은 만화, 영화, 텍스트를 오가며 표층의 의도와 심층의 의도를 드러내는 표현의 놀이에 주목한다.
    서영채의 〈기획연재〉 「인문학 개념정원」이 20회를 끝으로 연재를 마친다. 아이러니가 운명처럼 드리워진 현대인들의 삶에서 환상과 오인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지적 한계를 다루었다.
  

인천시립미술관, 소년재판, 원폭 피해자

    〈우현재〉에서는 아직 개관하지 않은 미래의 장소 인천시립미술관을 다뤘다. 정지은은 인천시립미술관의 필요성과 논의 과정, 미술관을 대신해왔던 여러 성과들을 살펴보며 인천시립미술관을 향한 기대를 담았다. 〈르포〉에서는 학교폭력이라는 이슈를 법정에서 지켜봤던 노윤호 변호사의 글을 실었다. 소년재판과 관련한 사항을 재판의 실감과 함께 조목조목 정리해주었다. 〈민중구술〉에서는 르포작가 정윤영이 합천의 한국원폭피해자협회를 찾았다. 1945년 피폭되었으나 78년간 혜택 없는 고통에 괴로워했던 원폭 피해자의 힘겨운 목소리를 지면에 담았다.

    한파와 따스함을 오가는 변덕스런 날씨에도 창작란은 굳건하다. 최성민 오석균 이세기 이기인 류명 이제야 전욱진 권창섭 김연덕 이용훈의 시가 사철 숲을 이루고 홍명진 한정현 임성용의 소설이 삶의 아픔을 전한다. 김준현 문봄의 동시는 겨울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몸짓 같고, 차영아의 동화, 청예의 청소년소설, 김젬마의 아동청소년문학비평이 가족의 틀, 연대의 틀 안에서 따뜻하고 여린 마음이 있음을 전한다. 서평에서는 금희 류보선 이주라가 각각 양수덕의 시집 『자전거 바퀴』, 박정윤의 소설 『꿈해몽사전』, 류수연의 비평집 『함께 내딛는 찬찬한 걸음』을 소개했다.

    허먼 멜빌에게 바틀비가 있고 폴 발레리에게 테스트 씨가 있다면, 브레히트에게는 코이너라는 페르소나가 있었다. 나라 꼴이 엉망이어서 몸이 아프다는 코이너 씨에게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그 대답이다. “(중략) 도시에 가면 모두 나보다 더 빠르거나 아니면 느리게 가더군. 나는 말하는 사람에게만 말을 하고, 모두가 듣는 것만 들었네. 이렇게 보낸 시간에서 얻어진 것은 오로지 불확실함이야. 확실함은 어디에도 없더군. 확실함은 단 한 사람만 가졌을 뿐이야.”(베르톨트 브레히트, 「코이너 씨와 병」,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 김희상 옮김, 이후, 2017.) 단 한 사람만 확실함을 가진 나라에서는 아무도 안전할 수 없다.
    1년 전의 10월 이태원, 5년 전의 김용균, 이제 10년째를 맞이할 4월의 세월호, 그들이 흐릿해지는 순간 우리의 안전도 무너진다. 사건의 원인과 책임 규명을 계속 요구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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